2015. 6. 29. 00:57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부쳐

소위 동성애 문제에 대해 요즘 인터넷에서 논쟁이 진행중인 걸로 알고 있다.

딱히 여기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부질없는 댓글놀이나 하고 있을 만큼 힘이 남아돌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 이미 본인의 대략적인 생각을 밝혀 둔 바도 있다.

다만,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은 우리나라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터이므로 몇 마디 적어둔다.
몇 마디라도 해두지 않으면 할 말 않고 잠잠히 있느라 불편한 속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1. 소수자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의 언명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꼭 성적 소수자들의 생각에 반드시 동의하진 않는다.

특히 소위 퀴어신학 쪽의 성경해석은 기본발상부터가 궤변스러워 탐구욕을 확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몰트만이 언젠가 말했듯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짧다는 게 그들에게 구원 가능성이 없다는 증거가 되나?

구원 가능성도 구원 가능성이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도록 숨통은 틔워 주어야지 않겠나?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다 몰아내 음지에 가둬 놓고 죄중에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건가?

그런 게 과연 정의이고 공의인가?

병든 사람, 장애인,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온갖 소수자들을 율법서를 들이대며 찍어내 버려야 할까?

적어도 예수님 제자이길 원한다면 그럴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은 왜 그런 소수자들의 처지에도 들지 못할까?

근본주의자들이여,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늘의 심판을 벌써 다 내렸나?


2. 만만한 동성애자들을 걸고 넘어지는 것은 비겁하다.


한국교회의 온갖 추문들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으라"를 외치면서 왜 애꿎은 동성애자들만 괴롭히나?

그야 당신들 보기에 만만해서지.


결국 당신들의 선전선동은 애꿎은 희생양 삼아 자기결집하려는 얄팍하고 얕은 술수에 불과하다.

당신들이 교회개혁에 그만큼 목숨걸고 나섰다면 진정성 만큼은 약간 인정해 줬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진정성조차 없고, 그냥 개독뻘짓이다.

당신들이 개독뻘짓하는 딱 그만큼 당신들은 예수님 욕 먹이고 있는 거다.


3. 침소봉대와 적반하장의 거짓 영성 좀 집어치우라


본 블로그의 유입검색어 중 줄곧 3위 안에 드는 낱말이 관상기도다.

근데 관상기도에 "이단"이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붙는다.

관상기도가 이단이라는 거지.

심지어 존 파이퍼도 관상기도를 배제하지 않았다,

존 파이퍼가 맛이 간 프리메이슨이거나 배교한 게 아니라면 재고해 보든지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존 파이퍼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얼마나 광신의 도가 심한지 말 다 했지.


오늘도 말씀묵상 큐티한다고 난리법석이면서 관상기도를 흔들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소위 큐티라는 게 렉시오 디비나라는 고대의 관상기도법을 약간 고친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어불성설을 거짓말과 선전선동을 동원해서라도 관철시키겠다는 찬란한 똥고집들이다.

이미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며 교황 프란체스코 방한 때 아주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셨지?

똥고집을 똥고집이라고 하면 핍박이고, 협잡을 협잡이라고 하면 당신들의 고귀한 진리에 대한 박해이고?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오늘도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낚여서 들떠 있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딴 음모론의 근거란 부풀려진 헛소문들에 불과하다.

헛소문의 진앙지는 물론 근본주의자들 자신이고.


당신은 근본주의자이지만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낚이지 않았다고?

잘 하셨다.

근데 동성애 음모론에는 낚이셨네?


프리메이슨 음모론하고 동성애 음모론하고 얼마나 다를 성 싶은가?

이리저리 낚이면서 그게 정말인지 확인은 해 보셨나?

제발 좀.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근본주의자들이여, 언제 이 말씀이 폐기된 적이 있었나?


2014. 12. 5. 09:21

최근 동성애 차별논란에 관하여

최근 서울시가 제정키로 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박원순 서울시장이 폐기하기로 하는 과정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조항을 둘러싸고 극우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일련의 소동이 있었다.


너무나도 황망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몇 마디 해 두도록 한다.


1. 근본주의자들이 왜 유독 동성애를 걸고 넘어지는가?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1.1 과연, 로마서 1장에 동성애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언급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언급된 다른 죄악들은 다 뭐란 말인가?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죄악들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악에서 자유로울까?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심판 선언은 반드시 3장 이후 천명되는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근본주의자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동성애자들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고? 근본주의자들 자신들이 그 수많은 죄악을 행하면서도 구원의 길에 있다고 자부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결코 그럴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동성애가 성령모독죄나 배교라도 되는가?


1.2 모세오경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 역시 죄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이지, 유독 동성애를 저주하라든지 동성애자에게 폭력과 차별을 행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구약율법의 규정으로 사람에게 정신적, 물리적 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범죄자 취급해도 된다면, 구약제사규례며, 음식규례 따위도 다 지키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은 21세기에 사사들과 함께 사악한 이방인들을 "진멸"해야 할까?


1.3 성경의 문자를 문맥과 취지에 상관 없이 원하는 대로 똑 떼어서 침소봉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사이비이단이 애용하는 자의적 성경해석과 거의 구분될 수 없을 지경이다.


2. 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절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절대로 아니라고? 이들은 선천적인 동성애자들을 만나보지 못했거나 만났어도 인간 취급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에는 기형아도 있고 장애우도 있듯이 동성애자도 있다. 자연세계에도 기형과 장애가 있으며 동성애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2.1 동성애는 세상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행과 소외와 변두리로서 교회가 기도하고 긍휼히 여길 연약함에 해당하지, 진 밖으로 끌고 가 진멸할 성령모독죄가 아니다. 교회는 이들과 공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세워주라고 부름 받았지, 이들을 정죄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이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3.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성애라는 특정사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미국근본주의자들의 어젠다들을 그대로 흉내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1 미국 서민대중들이 부패한 우파정치가들에게 비호 받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에게 부당하게 해고와 착취 당한 뒤 하는 일이란 고작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를 규탄하는 시위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딱하고 한심한 것은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같이, 그네들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떠는 문제들보다 더 시급하고 절박한 어젠다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서민대중들이 간단한 의료처치조차 병원 가서 하기엔 너무 비싸서 집에서 직접 꿰매고 자가처방하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하고 야만적인 사회구조에 맞서 저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가 하고 있는 짓이란? 고작 베리칩 음모론과 임박한 대환란의 종교적 망상으로 서민대중을 위협하여 미국 우파 보수층의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의료처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에 서민대중이 저항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약간의 교인들을 긁어 모아 자신들보다 배나 악한 광신도로 만드는 것 정도? 나머지가 있다면, 부패한 공화당 세력이 다수의 미국대중들의 충성을 갈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덕분에 미국의 기독교인구는 매년 감소추세에 있고, 기독교내 공화당 지지자들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 근본주의의 약진? 아니다. 미국교회가 부패한 공화당이라는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놀라운 부흥성장을 하면 할수록 미국교회는 미국사회가 극복하고 일소해야 할 민중의 아편이자 악의 축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근본주의라는 역병의 창궐이다!


어째서? 미국의 극우주의와 근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아
억압된 분노와 불안을 표출하는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병리적 현상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때 독일에서 나타났던 병리적 사회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극우 근본주의는 전체주의의 서막이다. 미국사회는 지금 세계자본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3.2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는? 한국교회도 동성애보다 시급한 사회적 어젠다들이 널려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내부적으로 정리되고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진적 깨어 대비해야 할 진정한 적수인데, 자꾸 외부에서 엉뚱한 적을 상정하고 있다. 동성애자, 이슬람, 종북빨갱이, 로마가톨릭, 프리메이슨 -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외부의 적을 타도하고 배타함으로써 내부결속을 다지는 얕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미래는?


안타깝게도, 정신줄 놓은 군중에게 선전선동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간다.

교회 회중이 예외인가?

저 악랄한 서북청년단을 태동한 것이 한국교회인 판국에,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사대강과 부정선거와 서북청년단.

이제 대한민국에 무엇이 올 것인가...

한국교회여, 한국교회여,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느냐...


2013. 7. 11. 00:57

WCC의 소위 종교다원주의 논란을 보며

지난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찬반토론회 동영상을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편협성과 정치적 속내에 따른 막무가내식 우기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점들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 글의 주제는 6월 24일 토론회 중 소위 종교다원주의 부분에 국한할 것인데, 그 까닭은 근본주의자들이 여전히 토론의 상황에 대해 착각하고 있거나 거짓말로 덮으려 하는 것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1. 우선 위 동영상을 편집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라는 성구(디모데전서 2:5)를 영상 말미에 제시함으로써 이 토론회에서 반WCC진영이 얻고 싶어하는 바, 즉 WCC는 종교다원주의 노선이라는 혐의를 각인시키고 싶어한 것 같다.


2. 반WCC진영의 속내는 토론 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WCC찬성진영 쪽 발제토론자 정병준 교수는 WCC의 의사결정구조에 관해 발제문과 토론과정에서 WCC총회가 채택하는 문서를 기준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점을 몇 차례 지적했다. 즉, 소위 바아르 문서는 WCC총회 이전 예비연구단계에서 신학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정에서 나온 목소리요, 정현경의 저 유명한(?) 퍼포먼스로 홍역을 치르면서 열렸던 WCC 캔버라총회는 바아르문서나 정현경의 입장을 공식입장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WCC에서 활동하는 개개인 몇이 종교다원주의 성향을 표방하는 것과 WCC가 공식적 레벨에서 표명하는 입장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 문제에서 유념해야 할 기본적인 사실관계이다. 정병준은 이 기본적 사실관계를 누차 지적했다.


그러나 반WCC진영 쪽 발제토론자 최덕성 교수나 토론회 사회를 맡은 이병수 목사 어느 쪽도 이 중요한 지적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들으려 할 뿐이었다. 최덕성의 막무가내 우기기야 그렇다 치고, 중립을 지켜야 할 진행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병수조차 "바아르 문서가 종교다원주의 노선이었다"고 정병준에게서 답변을 재차 유도한 다음 "솔직히 인정해 주셔서 고맙다"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어내어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면 이것으로써 WCC는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을 WCC찬성 쪽에서조차 인정한다는 뜻이 되는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반WCC쪽에서 여기저기 심어놓은 댓글알바들만이 아니라 토론당사자들까지도 하고 있었다면 참 황당무개한 일 아니겠는가?


3. 게다가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된 "생명"(요한복음 10:10 등)이 구원론적 의미의 ζωη(조에)이니까 이것을 βιος(비오스)에 해당하는 창조론적 의미로 인용하면 안 된다는 최덕성의 공격은 얼마나 유치한 바리새적 단견인가. 요한복음 1장 서문(요한복음 1:1-14)에서 요한은 이미 그 생명의 빛인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창조된 것은 없다고 밝혀두었고, 이 서문에 함축된 사상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펼쳐지게 된다. 이 가장 단순분명한 요한복음 해석의 출발점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얘기다. 미안하지만 이건 어설프게 원어를 들이대기 전에 우리말 성경만으로도 알고 있어야 할 요한복음 이해의 기초임을 환기해두겠다. 이런 수준의 독해력으로 WCC문서의 "성경인용"을 검증하겠다면 그 눈이 제대로 열려 있는지부터 상식적인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4. The Tradition(=복음)과 traditions(교회전통들)를 모두 '전통'으로 알아듣고 이걸 종교다원주의에 갖다붙이는 단장취의식 독해의 대단한 내공에 이르러선 할 말을 잃는다. 에큐메니칼 문서 읽기 클리닉 같은 거라도 해야 할 판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나가면 사이비이단 쪽 댓글알바들의 적반하장, 견강부회, 단장취의 내공과 구분이 희미해질 지경이다. 부디 논란 당사자들과 이런저런 추종자들께서는 더욱 정진하시기 전에 이점을 한 번쯤 심각하게 유의해 보셔야 할텐데... 이게 누가 말리거나 나무란다고 될 문제가 아닌지라. 참 씁쓸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5. 가장 기초적으로, 늘 그렇듯이, 비그리스도교를 이웃하면서 대화와 공존의 필요성 가운데 있는 현대 그리스도교가 처한 현실을 가리키는 종교다원성(religious plurality)과 어떤 종교든 구원에 이르는 정당하고 온당한 길이라는 주의를 가리키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근본주의 진영에서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세계복음주의연맹 (WEA)는 최소한 이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했던 방향으로 수렴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이걸 두고 또 종교통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을테니... 참 갈 길이 멀다.

2013. 7. 5. 12:03

민간사찰의 일상화 시대를 경계하라

본 블로그의 검색유입어에서 줄곧 상위에 올라 있는 낱말 가운데 하나가 "베리칩"이다. 베리칩 음모론자들이 설레여 하는 꿈은 그들의 영적 아비인 1992년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그것 만큼이나 터무니 없다. 


그러나 본인이 그들의 "비전" 가운데 나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대목은 예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정보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아마겟돈이 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소위 "아마겟돈"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광신적 시나리오보다는 정보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묘사된 빅브라더의 세상에 가까울 것이다.(*1)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거의 현실로 다가오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근 대한민국의 저울추가 매우 심각한 국면으로 기울고 있다. 국정원의 개입에 의한 부정선거  사실의 폭로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에 모여 절규하고 있지만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어차피 그들이 백성의 절반 이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모든 법과 선전수단과 자본을 쥐고 있는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당파적 목적과 이익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비판세력을 빨갱이 또는 종북좌파라는 얼토당토 않은 딱지를 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프레임으로 시민들의 생명과 권리와 재산을 극히 안정적으로 수탈하여 왔다. 그것은 어쩌면 광장에서 시민 몇 명이 모여 만세삼창 하는 것 정도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수준을 오래 전에 넘어선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은 그들의 죄상에 비추어 전면해체 내지 전면개혁이 필요함에도, 현 정권은 오히려 인터넷 사찰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사참조)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사람들이 지금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다.


관상기도가 이단이라고 누군가 빨간 딱지를 붙이면 관상기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돌팔매질을 해대고 있다. 최일도 목사나 이동원 목사, 혹은 존 파이퍼 목사나 릭 워렌 목사, 제 아무리 저명한 지도자들이라도 일단 관상기도를 입에 올렸다면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들은 이미 이단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누군가 빨간 딱지를 붙이면 세계교회협의회가 어떤 기관인지도 모르면서 돌팔매질을 해댄다. 원래 세계교회협의회에 반대했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A)조차 세계교회협의회가 천명한 노선을 사실상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 이들의 극렬한 입장은 저 칼 맥킨타이어의 악명높은 국제기독교연맹(ICCC)의 철지난 분리주의 결사에나 어울린다는 사실, 종교혼합주의가 정말 뭔지, 종교간 대화와 협력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실은 자신들이 별로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고, 다만 악의적으로 왜곡된 피상적인 몇 가지 풍문에 분개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되지 않는다. 이들 머릿속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미 적그리스도의 졸개들로 낙찰되어 있기 때문이다!(*2)


도대체 애먼 사람을 프리메이슨 = 사탄의 졸개로 빨간 딱지를 붙여 명예살인을 해대는 몰지각한 음모론자들이나 인민재판으로 학살을 자행한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이 무엇이 다른가? 이들중 어떤 이들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몰지각함을 비웃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이렇게 엉뚱한 데 힘을 낭비하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정작 세상에 대한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이 사람들아!) "영적 분별력"(로마서 12:1~2)을 잃어 버리고 반공근본주의에 기대여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에 기꺼이 동참할 뿐 아니라 앞장서기까지 하고 있다. 저들이 만들어내는 아마겟돈의 예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로나 한국교회로나 지금이 중요한 기로에 있다. 한국사회가, 시민들이 기득권자들의 "아마겟돈 프로젝트"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짐승정권"의 공포정치가 행해지는 "대환란"이 도래할 것이다. 그 기간이 "7년"이 될는지, 혹은 70년이나 그 이상의 세월이 될지, 아니 그 정도 세월이나 주어지게 될지, "그 때와 그 날은 아무도 모르나니 ... 아버지만 아신다." 그 다음에는? 분명한 것은 이런 불의와 부패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불의와 부패에 올인한 사회는 반드시 망한다. 한국교회는? 이대로 개념 없이 넋놓고 있으면 불의와 부패에 올인한 세상에 박수해 주면서 축복을 선언한 수치스러운 거짓예언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한국사회에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다. 부디 이 희망의 빛이 무사히 살아있기를 바라고, 한국교회가 일어나 한반도에 희망의 빛을 밝히 비추는 소임을 감당하기를. 부디 이 모든 묵시문학적 시나리오가 그저 한 때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아멘.


[덧붙임]

*1: 이러면 조지 오웰이 프리메이슨이었다고 우기는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꼭 있다. 어휴...못말린다 정말...

*2: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정병준님의 글이 적절한 반론이 될 것이다. 

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
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2011. 7. 26. 13:47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2)

노르웨이 테러사건에 대해 지난 포스트에서는 테러범 브레이빅에게서 통상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의 특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적 의미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반다문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그가 dokument.no에 올린 글모음과 노르웨이 언론기사들을 주로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범이 앤드류 버윅(Andrew Berwick)이라는 이름으로 유포한 1500여쪽 분량의 '2083 유럽독립선언문'은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이때문에 과연 정말 사실관계에 부합한 것인지 여전히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해서, 문제의 '선언문'을 구해서 검토해 본 결과 앞의 포스트에서 제기했던 필자의 주장을 상당부분 뒤집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 대한 의혹과 분노를 세상에 대한 악마시와 자유주의신학 단죄와 음모론, 그리고 수구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력행사로 푸는데 머물러 있지 않고 테러라는 행동으로 옮기는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라니, 불쾌감을 넘어 정말 놀라움과 전율마저 느껴졌다. dokument.no의 글모음에서 과대망상끼만이 풍겨나왔다면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이 '선언문'에서는 기괴한 정연함이 느껴졌다.

테러범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윤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하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선언문'의 쪽수를 나타낸다.)

1. 성경을 신비화, 절대화하고 자기 신념의 전거로 삼는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근본주의적 특징은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의 원천으로 보고 성경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며, 성경의 전거를 대어가며 자기 신념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점에 있다. 

- '남성들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성경을 읽기 보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역할이나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시대분위기'를 개탄한다.(28)
- 무슬림들에게 성경이 모독당했지만 기독교에서 별 반응이 없는 파키스탄의 사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한다. (428) 
- 꾸란에 견주어 성경이 문학적으로 더욱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블로거 Fjordman의 글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했다.(706f.) (자신은 Fjordman의 글을 자신에게 중요한 책 목록에 넣었다.(1407) 그러나 Fjordman가 2005년 이후 활동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2009년 이후 구체적으로 테러를 준비하면서 자신 혹은 자기 신념을 중요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예전에 쓰던 아이디를 일종의 멀티아이디로 언급했을 수 있다. 그가 '선언문'의 심화연구 파트에 실어놓은 성전기사와의 인터뷰에 나오는 성전기사도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1349ff.))
- 그리스도인의 '자기방어'의 성경적 정당성을 상당히 길게 주장한다.(1327-34) (여기서 말하는 '자기방어'란 무슬림의 공세에 대한 자기방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자의적인 취사선택이라는 근본주의 성경인용의 맹점을 그대로 답습했다.)
- 성경을 모독하거나 공격한 무신론자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서부터 볼테르와 맑스를 거쳐 도킨스에 이르는 인물들이 열거된다.(1341ff.) (근본주의에서 성경을 신비화하는 전형적인 설교내용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의 성경에 대한 집착은 성경영감론을 기독교의 시금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본주의과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구유럽전통의 모체로서의 기독교전통이며, 성경은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기보다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경외와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의 그것에 가깝다.

2. 성경의 왜곡과 변개를 주장한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근본주의적 특징은 성경이 원문에서 왜곡되고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는 현대성경이 가부장적 어휘가 아니라 양성평등적 어휘를 사용하고, 문자적 일치가 아니라 역동적 일치, 즉 문자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 아니라 뜻이 통하도록 옮기는 번역으로 자기 해석과 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왜곡되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들, 즉 서구인들의 뿌리는 불가타성경이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이며, 이것이 무슬림에 대항하여 자기방어를 행사하는 기독교세계를 대변하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1137)

그러나 1611년 흠정역 성경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근본주의 집단 가운데서도 이단시되는 특정한 부류의 주장에 국한된다. 게다가, 흠정역과 무슬림 대항을 연관짓는 것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원문판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1611년판 흠정역 성경을 절대시하는 그룹들의 주장과도 다르며, 더더군다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것과 아무런 역사적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브레이빅이 이들의 주장을 인터넷을 통해 접한 뒤에 자기 신념에 나름대로 갖다 붙이고 빼고 한 것으로 보인다.

3. 종교간 대화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진보적 어젠다를 비난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종교간 대화와 상대종교를 공존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각종 진보적 이슈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노동당 교회'가 된 현대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특히 1403등) 이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한다.

4. 예언에 대한 근본주의적 집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왜 하필이면 '2083년'인가에 대해 주목해 본다. 혹시 특정예언에 따라 시간표를 만드는 부류의 근본주의대로 기독교나 서구세계에 전해지는 소위 미래예언과 관련있는 게 아닐까? 이슬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브레이빅이 이슬람에 관한 예언에 따라 자신의 시간표를 짰던 것은 아닐까?

이슬람과 범유럽세계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언에 대한 집착을 물려 받았다면 찾아내게 되었을 예언가로 바바뱅가라는 이가 있다. 그는 이슬람이 서구세계를 석권하리라는 내용의 예언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달리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바바뱅가의 예언이 원용된 경우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시간표를 짜고자 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바바뱅가에 따르면 유럽은 2010년 11월에 시작될 제3차 세계대전에서 핵전쟁을 겪고, 핵전쟁 이후 이슬람과 전쟁을 하여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2043년에도 이슬람은 유럽을 지배하고, 이슬람에 대한 무장봉기가 이루어지며, 2066년에는 미국이 이슬람 치하의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2076년에는 계급없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2084년은 '자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브레이빅이 유독 2083년에 맞출 때 이 '예언'을 의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명확하게 브레이빅 자신의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근본주의 프레임을 따라 적용해 본 나의 추측임을 밝혀둔다. 

(4번을 제외하더라도) 이상과 같은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타입과 겹치는 면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점에 무게를 두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브레이빅 유형'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근본주의로서, 일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온전히 구분된다. 이점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5. 그가 (근본주의) 기독교를 (취사)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성 때문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의 컬트적 속성와는 거리가 멀다. 즉, 전형적인 근본주의는 성경으로부터(만) 취사선택한 신념체계로서 근본주의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배타적인 창이 되고자 하는 데 비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인 척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종교는 약한 사람의 버팀목일 뿐이다. 자신은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진 않았지만 거사를 치를 때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기독교는 "참호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다.(1344)
그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 기도나 성찬참여를 들고 있다.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음 이후에 내세가 있다는 믿음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1345)
아울러 그가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그룹과 연대하기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많은 민족주의 그룹이 기독교의 깃발 아래 싸우기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하긴 하지만, 기독교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하나로 묶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380ff.)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며 새삼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며 좋아하는 기독교안티와 이웃종교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당신들이 신봉하는 신념이나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신념체계나 종교든 실용적인 이유에서 악용될 수 있다.


6.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한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03f.)

이것은 dokument.no 글모음에서도 일관되게 나온 얘기다. 이 주장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범유럽주의에 대한 '실용적' 관심과 일맥상통한다.

7. 그는 자신을 템플러기사라고 지칭하면서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 지칭한다.  

문제의 '선언문' 표지에서부터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의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신을 Justiciar Knight Commander, Knight Templar Europe, Knight Templar Norway 등의 프리메이슨 칭호로 지칭했다. 앞의 포스트에서 지적했다시피 통상적인 근본주의자라면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포스트에서 소개했듯이 노르웨이 프리메이슨 측은 사건이 일어나자 브레이빅을 제명하고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서둘러 부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그는 2010년에서 2030년까지 '첫번째 국면' 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템플기사단그룹인 PCCTS에 개인이 가입의식을 치르도록 했다.(1113f에 가입의식이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템플기사단은 기독교의 '자기방어'를 위한 저항운동단체를 뜻한다.(1118) 저항은 비폭력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1121f.) 그는 '청년유럽운동'(1127)과 같은 전위조직을 통해 우익자유주의자, 기독교 극단주의 무장단체, 전투적 민족주의 등의 그룹을 묶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고 슬쩍 흘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 뒤에 뭔가 굉장한 배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위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느냐이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이라면 치를 떠는 것과 달리, 브레이빅은 프리메이슨 템플 기사단이 서구 기독교세계의 이슬람교에 대한 자기방어를 위한 것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가톨릭에서는 아직도 프리메이슨과 별개로 '기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브레이빅은 자신이 말하는 '기사단'을 기독교의 또다른 양태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범유럽주의를 위해 실용적으로 선택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허울이고, 실체는 범유럽주의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프리메이슨의 연결은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에서 나타나는 적대관계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브레이빅의 '선언문'을 검토하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거기 나오는 내용들이 도대체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어디부터가 그의 망상 또는 희망사항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과연 브레이빅 배후에 어떤 무장단체가 있는지, 혹은 허세인지 여부는 노르웨이 경찰 당국의 수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브레이빅 개인의 허세로만 보자니 정신착란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배후에 정말 어떤 그룹이 있다고 보자니 이 또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건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이 약간 길어졌기 때문에 결론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 브레이빅이 말하는 타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와 프리메이슨 템플기사단을 합한 형태로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자기방어'를 위한 범유럽주의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자기 나름의 기독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같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원리주의 내지, 자신이 표현한 대로 기독교 극단주의라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정신적 안정과 범유럽주의라는 사회문화적 가치의 활용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1)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 심지어 그의 의심스러운 정신상태가 아니라, 테러범이 유럽의 다문화주의와 관용에 반대하여 테러를 저지른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도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2)


[덧붙임]
*1: "그는 단순한 테러범일 뿐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국민일보 기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브레이비크가 잘못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는 선언서 1307쪽에 표현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종교적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문화와 사회, 도덕적 토대 안에서 기독교를 믿는다. 이것이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근본주의 성향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두 분 신학자들이 근본주의 기독교와 테러범의 '기독교'를 구분짓는 주장도 대체로 괜찮았는데, 제목은 교계의 딱한 현실부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좀 민망스럽다. 아예 확 세게 나가야 한다는 심산이셨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원... 사고치고 집나간 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어야 할 사실관계는, 이 기사에서 근본주의와 테러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고 한 부분은 명백히 틀렸다는 점이다. 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찾아보면서 새삼 인식하게 된 부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그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백인기독교근본주의그룹 KKK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 '그리스도의 어린 양(the Lamb of Christ)' 등이 낙태, 애국심 등과 같은 특정사안에 대해 테러를 저지른 극단적 근본주의 그룹들이 존재해 왔고, 오늘도 미국 어디에선가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기독교 테러리즘에 관한 온라인자료로서 영문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을 참고할 것.) 더 나아가, 기독교는 북아일랜드, 세르비아 등 세계분쟁지역에서 폭력과 테러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독교는 분명 잘못되고 거짓된 형태의 기독교이지만, 이건 기독교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말했든 간에 그의 교회관은 왜곡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론으로는 애시당초 공교회의 회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교회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삼일절주일에 한국개신교회 강단에서 민족대표33인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고, 개신교가 삼일운동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회주체였다는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기억하고, 주기철, 길선주 목사 같은 극소수 목회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의 참람된 변절과 배교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며, 공교회적인 참회를 행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유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관는 근본주의적이다. 테러리즘을 저지르지 않고 음모론이나 사이비이단, 자유주의, 공산주의 단죄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그 배타적인 폭력성이 당장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근본주의가 테러리즘으로 발전하는 것은 단지 한끝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희망사항과 본인의 주장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어두고 싶다.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나는 두 편의 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이에 관해 노르웨이 테러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기독교 근본주의가 결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본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논지를 재확인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극히 위험한 폭력성과 폐쇄성,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적 관계의 폭력을 저지르는 형태로 이미 수없이 표출되어 왔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한 사례도 결코 없지 않다.
문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스스로가 근본주의자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다른 이름으로 진짜 정체성을 남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공교회의 형제요 친구인 근본주의자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더하시기를! 죄많고 허물많은 우리 자신과 모든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동일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2: 미국이 조지 W 부시 시대에 테러 이후 교회는 근본주의화하고 국가는 경찰국가로 돌변한 것과 달리 노르웨이 사회는 이 비극적 사건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서 노르웨이에 대한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통합전략으로서의 관용에 관해서는 좀더 심도있는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포기할 까닭은 없다. 테러의 비극을 겪은 노르웨이 사회의 의연한 대처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부디 우리 한국사회도 자유와 관용의 가치가 뿌리내리는 위대한 사회가 되길!

2011. 7. 24. 21:49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경찰이 발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크롬의 영어번역서비스를 통해 보니 노르웨이 언론에서도 경찰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로 지칭했다고 전하는 보도가 있다.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60705175-Anders-Breivik-From-Document-No.pdf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2011. 5. 18. 20:16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이정석 교수님의 안타까운 부고를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미인박명이라더니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가.
20년은 우리 곁에 더 계셨어야 할 분이었는데... 

언젠가는 꼭 가까이서 뵙고 말씀 나눌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던 분인데 너무나 아쉽다.

이제 후학들에게 짐을 나눠주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빈다.


내게 있어서 이정석 교수님은 그 행보가 늘 궁금하고 눈여겨 보게 되는 어른이었다.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국교회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당신이 자란 교단의 지배적 신학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할 용기를 발휘했던, 정말 국내에서 드물게 정직한 신학자이셨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정석 교수님의 출신교단인 예장합동은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의 원흉'(서철원)이라고 매도해 온 교단이다. 

칼 바르트는 세계교회에서, 소위 보수주의 교회에서 정말 자유주의의 원흉으로 통하고 있는가? 이정석 교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셨다. 

교수님은
총신대에서 기독교철학으로 학사과정을 하셨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하셨다. 그리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세속화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칼 바르트 연구를 수행하여 박사학위를 하시고, 미국 풀러신학교 등에서 조직신학교수로 봉직하다가 몇 해 전 귀국하여 최근에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부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라면 총신대와 고신대 신학자들의 학문적 본향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곳들이다. 특히 화란 자유대학교는 국내 보수신학의 두 아이콘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활동했던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이정석 교수님은 바로 이곳에서 칼 바르트의 성화론으로 박사학위를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성화론은 자유주의의 원흉스럽다'이라는 사상비판을 잘 해서 박사학위를 하셨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칼 바르트의 성화론이 세속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논지였다. 이와 같은 이정석 교수님의 학문적 여정에 대해 교수님 당신자신의 글을 옮겨보자.

"......(화란대학교에서: 인용자) 나를 지도하는 환 에그몬드교수는 화란, 독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학회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실로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구해보고 싶은 신학자임에 틀림없었으나, 한국 보수신학자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개척분야로서 위험부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실로 총신대에서 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르트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서 바르트는 보다 균형있게 언급되었으며, 특히 바르트 아래서 친히 수학했던 클로스터교수는 그의 비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조건적 바르트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그와 한 학기동안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I/2를 읽으면서 개인지도를 받는 동안 나의 바르트에 대한 편견은 점차 제거되고 그의 신학이 주는 깊은 통찰력과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되었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위 인용문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한국에서 보수주의신학의 아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칼 바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칼 바르트를 최악의 자유주의자라고 터무니없이 매도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바르트에게 직접 배웠던 신학자가 지도교수였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는 아예 지도교수가 유럽의 바르트학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학자였다. 적어도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보수계통 해외신학교의 대표주자라고 할 두 학교에서 칼 바르트는 신학적 대화의 중심화두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근본주의의 기수역할을 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어떨까?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하신 복음주의 신학자 한 사람의 글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의 이름은 이 블로그에서 가끔 언급한 바 있는 케빈 밴후저다. 공공연하게 안티바르트를 부르짖었던 반틸의 영향력이 강력한 학교에서 신학의 형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 보면 칼 바르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요전거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칼 바르트를 기독교사상사에 몇 안 되는 신학의 거인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있기조차 하다.

이것이 세계신학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라든지, 세계신학이 배교와 변절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사고의 길로 들어설지 여부는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자여서 소위 '막 나가는' 진보신학계에서나 읽혀지는 게 아니라, 소위 보수신학계의 큰 산맥을 이룬다고 자부하는 저명한 신학교들에서도 칼 바르트가 내놓았던 복음적 통찰들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세계신학계를 더 둘러보면 지금은 바르트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칼 바르트가 남기고 간 신학적 통찰을 재해석하고 심화함으로써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장합동측은 아직도 외국신학교에서 멀쩡하게 바르트를 전공하고 돌아온 교단신학자들까지 안면몰수한 채 바르트를 매도하고 있고, 총회출판사를 통해 한종희 목사의 칼 바르트 신학비판이라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그 내용이야 바르트의 신학정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곡해와 아전인수로 가득하다. 국내 유수의 대교단에서 이런 참 낯 뜨거운 내용이 아직도 가르쳐지고 있다면 참 딱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신학이 자기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교권의 명시적, 암묵적 압력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바르트를 입에 올렸다가 사상시비로 교수직에서 축출된 분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예장합동만이 아니라 합신과 같은 합동계열의 중소교단도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새삼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귀하고 벌써부터 그립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탁한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가며 신학을 하셨으니 가히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자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래 글은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뤄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박사학위논문주제로: 인용자) 바르트를 연구하고저 했던 이유는 바르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진보계열의 조직신학에서는 바르트가 중심인 반면 보수계열에서는 바르트가 전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대화와 화해를 이룰 수 없었다. 바르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대가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마음 짠하게 하는 말인가...

나는 이정석 교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은 한반도 분단의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움받는다. 바르트 신학의 참된 함의를 덮어버리려는 온갖 황당무개한 곡해와 매도가 걷힌다면 한국교회는 아마도 한반도의 잘라진 허리를 잇는 소임을 감당하게 되지 않을까!

故 이정석 교수님을 주님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주님께서 한국의 보수신학계에서 이런 가인(佳人)을 만나볼 날을 주시기를 고대한다.
2011. 3. 12. 13:4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근본주의 교회는 흔히 숫적 부흥을 자랑하곤 한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대외적으로 '좋은 열매'라고 내세우는 가장 자신만만한 미덕이다. 물론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는 자부심도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좋은 열매'일 것이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다.

과연 이런 것들이 좋은 열매일까? 

1. 굳이 머릿수를 논하고 싶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목회한 삼위일체 교회에도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신자들이 돌아와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해두고 싶다. 그들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라는 식의 변명을 하려면 근본주의자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꿩잡는 게 매'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실천강령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가? (슐라이어마허라는 기독교사상사의 거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경심은 젖혀 놓고서라도 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논점이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성경에서 열매에 관한 말씀이 과연 숫적 팽창을 가리킨 경우가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예수님도 바울도 '열매'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말씀하셨지 머릿수가 몇인가를 두고 '좋은 열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게 마련"(누가복음 17:37)이라고 하셨다.

근본주의자들이 숫적 '부흥'에 관해 스스로 확신하고 퍼뜨리는 대표적인 어젠다가 바로 자유주의 교회는 숫적으로 쇠퇴한다는 얘기다. 서구교회가 쇠퇴한 원인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구교회의 쇠퇴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를 방불하는 분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라는 작고 강력한 나라를 일으킨 정신적 토대 노릇을 한 영광스러운 교회였다. 20세기초만 해도 개신교회의 교세는 가톨릭을 압도했고, 50-70년대까지만 해도 우세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가 가톨릭의 절반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네덜란드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들어서? 베르까우어 같은 지도적 신학자가 사악한 '자유주의의 괴수' 칼 바르트를 추종하는 바르티안이어서? 천만에! 네덜란드가톨릭도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어 있지만 교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신학 자체가 교세감소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개신교의 쇠퇴는 오히려 개혁교회가 '보수적 신앙' 때문에 이전투구하고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내 교단이 낫니 네 교단이 낫니 도토리키재기를 하지만, 결국 그 피해는 모두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 이전투구와 교회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주로 '보수적으로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다.

[표 설명] 첫번째 짙은 파란색은 무종교, 연두색은 카톨릭, 빨간색은 개혁교회, 노란색은 개혁교단, 보라색은 화란개신교단, 옅은 파란색은 기타 종교를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인 1970년대 초에 교세가 약간 늘어났다가 90년대에는 다시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집필된 네덜란드주교회의 새교리서(1966)를 교황청이 검열한 '화란교리서사건'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보수화, 경직화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 영국교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공회든 개혁교회든 할 것 없이 오늘날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던 영광스러운 영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존 로빈슨 주교가 '신에게 솔직히'를 외쳐서? 존 힉 목사가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퍼뜨려서? 소위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천만에! 비록 세속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영국교회가 쇠퇴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60년대 이전만 해도 영국교회는 아직 건재했다. 영국교회의 몰락은 다름아닌 복음주의 진영의 자중지란에서 촉발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거룩한 분리주의를 주창하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복음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었다. 당장은 분리주의자들이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복음의 텃밭으로서의 한 사회 속에서 복음의 신뢰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만든다.

- 미국교회? 오늘날 미국교회 역시 서서히 영국교회 짝 나고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교회건물이 술집이 되고 모슬렘사원이 되는 현상이 미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왜 미국교회가 저 지경이 되고 있을까? 자유주의의 누룩 때문에? 그 별로 미덥지도 못한 축자영감설과 창조과학과 베리칩 이론을 신봉하지 않아서? 혹은 사악한 프리메이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명하고 신실한 목사 수가 부족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선명성 경쟁에 뛰어드는 데 열심이 부족해서? '한줌도 안 되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회중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미국교회가 기울고 있지 않은가?

- 결국 서구교회 쇠퇴의 가장 깊은 뿌리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지엽말단의 명분싸움으로 갈갈이 찢어졌던 데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회의주의가 서구사회를 휩쓸게 된 배경이 바로 교파분열이었다는 교회사가 후스토 곤잘레스의 지적이 합당하지 않은가. 서구세계가 세속주의, 회의주의에 먹힌 까닭은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시점은 근본주의의 한 형태인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이 터졌던 90년대초였다. 종교다원주의든, 칼 바르트든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사회의 혐오감을 자라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최근 몇 년간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절에 땅밟기를 하고, 불 지르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장로대통령을 세우겠다면서 기득권자들을 감싸고 도는 희한한 시민운동을 하고, 대통령을 무릎꿀리고, 자기 이익관계에 반하는 사안에 대해선 불 일듯 일어나 총궐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신실하고 영웅적인 신앙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고 있을까? 왜 사회적 지탄에 날마다 치명상을 입고 있을까? "이게 다 자유주의 때문"인가? 도대체 이번엔 애꿎은 누굴 희생양으로 지목하려는가? 자유주의 핑계 대기 어려우면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15:17-19, 요한일서3:13)는 성경말씀을 갖다 붙여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만드는 둔갑신공을 발휘하는 이들이 꼭 있다. 언제부터 둔갑신공의 마술적 신앙과 순교자 콤플렉스가 참 신앙이 되었단 말인가?

최근 한겨레21에 "대통령보다 세고 헌법보다 무서운 목사님"이라는 기사가 떴다. 세상 언론에서조차 주목할 만큼 근본주의 진영의 드라이브는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이 기사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성시대를 맞이했는데 거꾸로 한국교회는 역풍을 맞아 기울게 되리라는 것이 요지다.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한국교회는 기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염치를 불안과 증오의 음모론과 맞바꾼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2. 주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은 "두려움을 내어쫓는 사랑"(요한일서4:18)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계시된 용서와 화해의 복음, 공평과 정의의 복음이다. 보혈의 은혜를 믿는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얘기다. 칭의의 복음을 믿는다면서 기득권자들을 싸고 도는 부조리와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끊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도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지금껏 살면서 근본주의자들이 복음의 정신인 조건없는 화해와 포용(Miroslav Volf)을 부르짖는 것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의 근본주의자들, 특히 소위 반공목사들은 상대방이 무릎꿇고 빌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극히 세속적인 원리를 성경과 참신앙의 이름으로 둔갑시킨다. (석기현 목사의 "빨갱이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설교를 들어보라!) 이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살해한 공산군을 자기 양아들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신앙의 위인으로 떠받드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지 않은가? 

오히려 근본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신봉하는 '복음'은 베리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성경과 상관없는 밑도 끝도 없는 희생양신화들이 아닌가? 다른 글들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런 근본주의의 희생양신화들이 거짓말에 기초해 있다. 한갖 거짓말로 불안과 증오를 끝없이 부추겨 영향력을 얻는 근본주의의 기본행태가 과연 성경적이고 복음적일까? 그런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낚였다는 사실이 과연 좋은 열매라는 자랑거리일 수 있을까?

이런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서 공감을 얻고 세력을 얻는 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암적인 존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교회의 사도성과 공교회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1)

[덧붙임]
*1: 최덕성은 2013년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WCC 찬반토론회에서 이 글에서 지적한 근본주의의 주장을 또다시 그대로 되풀이했다. 재차 강조해두거니와, 바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태도 때문에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


2011. 3. 2. 04:43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

양화진에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묻혀 있다.


이들이 증거라고 제시한 사진들에는 이들이 선교사나 목사나 그들의 가족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기록조차 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은 양화진에 묻혀 있으면 다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은데, 100주년 기념교회가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양화진문화원에 따르면 양화진에는 현재 417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선교사와 그 가족은 145명이다. 양화진 묘역에서 프리메이슨 마크 사진을 찍었다고 곧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다.

양화진문화원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145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다가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고마운 분들이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싶다면 최소한 145명의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 명단을 확인해서 그중 몇 명이나 '프리메이슨'인지 확인해 보는 게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염치가 아닐까?

2011. 2. 19. 16:00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3)

5. 근본주의는 왜 음모론에 열광하는가?

알다시피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세속의 물결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으로 생겨난 사조다. 자신들이 근본으로 지목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 외의 거의 모든 대상은 잠재적으로 이미 세속에 물든 '순수한 신앙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심지어 근본주의자들 자신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근본'이냐에 대해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영문흠정역성경이 권위의 원천이냐 자신들의 흠정역성경번역이 권위의 원천이냐 라는 식의 논쟁과 같이, 근본주의 바깥에서 볼 땐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견해차이 때문에 서로를 '참신앙의 적'으로 돌려 버린다.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신들이 나름대로 설정한 한계 바깥을 적으로 돌리고, 따라서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으로 바라본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니 억측이 무성하고,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의 이유는 차곡차곡 쌓이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근본주의는 감정배설의 통로를 신앙의 근본진리라는 명분으로, 의분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Erich Fromm) 정당화하게 된다. 자기가 그어놓은 한계 바깥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과 신학이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마음과 눈과 귀를 닫아 버린 채 터무니없이 희화화해 버린다.

그와 같은 희화화가 사리에 맞는 것일 수 없다. 논리의 비약과 일방적이고 성급한 단정이 난무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조차 예리한 영분별을 빙자하여 무시된다. 상대방을 대화와 이해의 대상으로 품고 서로 배우기 보다 터무니없이 희화화하는 거기에는 상대방의 의도나 지향점에 대한 정확하고도 진정성 있는 파악이 고스란히 빠져 있다. 적으로 돌린 상대방은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되고, 신비화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음모론은 근본주의가 안착하기 쉬운 편리하고 매력적인 함정이 된다. 초창기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이젠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상대방을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해야 하는데 근본주의가 자유주의라고 매도하는 종류의 신학은 심지어 자신들의 자매인 복음주의 계통 신학에서조차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여서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임팩트가 적다. 이에 비해 자기 적을 사탄의 졸개로 못 박는데 프리메이슨과 같은 딱지만큼 손쉬운 게 또 없다. 거슬리는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의혹을 계속 제기하다가 의혹이 짙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몰아 타도의 대상으로 세우면 증오와 분노를 터뜨릴 공동의 통로가 만들어진 덕분에 결집하고 유지할 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희생양만들기와 무슨 차이점이 있단 말인가? 바로 얼마전 타블로음모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음모론에 열광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더이상 사랑, 화해, 용서, 공의, 관용과 같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율법과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강조했던 기독교 실천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에 대해 양심에 일말의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런 덕목들은 어차피 프리메이슨들이 온 세상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뻔뻔스러운 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에서 역사의 지평은 7년 대환란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휴거 따위로 대체된지 오래다. 어차피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모든 역사과정이 깔끔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근본주의자들은 프리메이슨을 쓰러뜨리자고 공격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굉장하고 대단한 단체라고 정말 믿는다면 한줌밖에 안 되는 근본주의자들로선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공격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불안과 적대감을 증폭시켜 근본주의 시스템에 더욱 매달리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면 족할 뿐이다.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언뜻 성경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요한복음 20:29, 로마서 8:24-25 등)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행동을 인간의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감각과 제한된 사고범위에 의지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씀이지, 자의적으로 꾸며낸 음모론을 믿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니 빨갱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가며 혐오해마지 않을 헤겔이나 맑스나 블로흐, 마르쿠제 같은 신맑스주의자들이 현상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실증주의적 인식방법을 불신하고 존재에서 무를, 아직 없는 것에서 참 존재를 보고자 했던 사고방식이 오히려 성경에 그나마 가깝다. 이런 격조높은 철학을 근본주의 음모론에 견주는 것이 도리어 철학에 대한 큰 실례와 굴욕이 될 지경이다.

현상의 인식에 있어서 눈앞에 드러나는 겉보기 배후에 진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들처럼 피상적인 겉보기에 속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승리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실패하거나 패배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 승승장구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일을 어둠 속에 숨기기 위해 행하는 온갖 더럽고 비뚤어진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겉보기 현상이나 소식에 대한 합리적이고 엄밀한 의심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해야 할 믿음의 책무가 있다. 이 믿음의 책무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자기만족이어선 안 되고, 반드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나가야 한다. 몰트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각자가 속한 역사의 지평에서 부르시고, 다시금 역사의 지평으로 보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의 지평은 어떤 상황인가? 질병과 고통, 죄악과 부조리를 겪는 개인사의 지평이 있고, 세대와 지역과 계층과 남북으로 갈라져서 신음하는 한반도의 역사라는 지평도 있다. 세계자본과 세계권력이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물화하고 비역사화하는 자본주의의 악마적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세계사적 지평도 있다. 교회사적으로는 제3세계에서 폭발적으로 기독교가 성장하는 한편 그동안 세계교회의 대들보 노릇을 해왔던 서구교회가 무너지고 있고, 한국교회도 구태의연한 이전 패러다임의 되풀이와 악순환 속에서 심지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심각한 영적 위기 내지 전환기에 봉착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짐이요,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해결할 열쇠는 프리메이슨 음모론과 같은 유의 음모론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기보다는 역사의 지평과 공적 영역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 채 '바깥에 사자가 있다'면서 분노하고 불평하는 영적 게으름과 무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열쇠는 오로지 세상 죄짐을 담당하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무거운 죄악의 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십자가를 지고 구체적인 삶을 던지고, 목숨을 다해서 그분을 뒤따르는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믿는 참된 길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의 지평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 속에 종말론적 희망의 약속이 있다.
2011. 2. 18. 01:35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2)

3. 릭 워렌

빌리 그래함의 뒤를 이어 아마도 미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서 위상을 지니게 될 차세대 복음주의 지도자 릭 워렌 목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관심을 갖는 대목은 그가 불치의 질병을 무릅쓰고서도 탁월한 설교자로서 우뚝 섰다는 점이 아니다. "목적이 이끄는" 시리즈의 책 인세만 해도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10의 9조를 헌금하며,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과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거절하고, 교회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다지 흥미의 대상이 못 된다. 그들의 눈에는 릭 워렌의 탁월한 기독교적 실천조차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기 위해 사탄의 선지자가 벌이는 쇼일 따름이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릭 워렌은 또다른 최악의 프리메이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릭 워렌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다룬 빌리 그래함이나 한스 큉의 경우와 별 다름 없다. 자기들이 서로 제기한 의혹이 부풀려지고 굳어지면서 사실처럼 통하고, 거짓말도 자꾸 하다 보니 어느새 사실로 둔갑해버린 얘기들이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아무개와 가깝거나 만난 적이 있다, 관상기도를 퍼뜨린다, 따라서 친가톨릭적이다, 설교에 나타난 그의 교리가 맘에 안 든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기관과 관련이 있다는 식이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데도 굳이 릭 워렌의 사례를 살펴 보려는 까닭은 복음주의 계통에서 릭 워렌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와 대표성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릭 워렌이 음모론자들이 프리메이슨 산하기관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CFR의 실제 회원(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CFR이라고 하니까 무슨 비밀결사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미국외교관계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미국의 유력한 민간국가전략연구소의 줄임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귀에도 익숙한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미국의 정책연구단체이다. 미국외교관계평의회는 브루킹스연구소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중도성향의 단체로서, 진보와 보수 정권 양쪽 내각의 인물 상당수가 이 단체와 연관을 맺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문 위키백과 해당항목에 따르면 릭 워렌 목사는 2005-06년 미국외교관계평의회의 선출회원이었다. UN이나 다보스포럼 등에서 연설을 하고, PEACE플랜을 통해 화해와 빈곤퇴치, 교육 등을 확산하고자 해 온 그의 사회참여적 행보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면, 미외교관계평의회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물론 이 단체가 미국정치외교계에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어림짐작이라면 세상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비밀결사단체사람이어야 하리라는 점에서 터무니없다.

이런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군가? 다름 아닌 미국극우정치조직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그 수장인 래리 맥도날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해당항목 기술에 따르면 그들이 제기한 의혹은 사실무근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와 더불어 1960년대 음모론자들의 영화나 책도 한몫한 게 틀림없다.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래리 맥도날드가 이들의 말에 낚였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극우단체가 이 주제를 하위문화 레벨이 아닌 정가라는 공적 영역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논의했다는 데 있다.) 우파세력이 미국의 기득권을 쥐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민간조직을 흠집내고자 반프리메이슨정서를 이용한 정치공세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관계가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음에도, 미국정가에서 음모론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뜬 음모론자들이 기꺼이 받아 적어 퍼뜨렸고, 그 중에 기독교근본주의자들도 열성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베리칩 음모론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의 극우세력과 근본주의자들이 손과 발과 입을 맞추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4.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워낙 많이 퍼져 있는데, 막상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했는가 살펴 보면 별로 나오는 게 없다. 하지만 역시 개신교 최대의 연합단체인만큼 세계교회협의회를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이를테면 존 콜먼의 '300 Committe'라는 음모론 책에 나온다. 이 책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언급하는 해당단락(한글번역은 예컨대, →여기.)을 보면,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기술과 사실관계를 입증하기 보다 단정하고 강변하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걸 보고 믿으라는 건가? 세계교회협의회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모르는 사람만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만한 내용이라는 점만 말해 두겠다.

여기서 국내 유명목사님 아무개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고, 따라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식의 루머에 대해서도 간단히 덧붙여 둔다. (루머의 본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를 참조할 것.)

국내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인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국내에도 성공회, 감리교, 기독교장로회, 예장통합, 구세군, 복음교회, 순복음교단 등이 정교회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맹한 교단들이기 때문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면 이 교단들도 프리메이슨 산하조직일까? 무슨 신통한 '영적 분별력' 따위를 들먹이기 전에 상식수준에서만이라도 이게 정말 그런 건지 헤아려 보라. 실로 밑도 끝도 없는 중상모략 아닌가?

게다가, 국내 유명 목사님들은 바쁜 목회활동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여력이 없으실 것이다. 하물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단체로 규정하고 가맹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예장합동 소속이신 길자연 목사 같은 분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까닭은 전혀 없다. 국내 유명 목사님들도 프리메이슨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장본인들이 이 정도로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

국내외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은 이쯤하면 왠만큼 드러난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근본주의가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까닭을 짚어 본다.

(계속)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
2011. 1. 31. 07:37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 올바른 길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교단에서 이재철 목사와 같이 이 시대에 드문 올바른 설교자를 사도신경의 그리스도 지옥강하조항에 대한 강해에서 본질과 상관없는 말꼬투리잡기로 이단시비를 걸고 목사면직까지 강행한 사례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재철 목사가 목회하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신자를 잃은 주변교회들과 양화진에 이익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인들이 담합과 공모를 했으리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가장 큰 기관인 한기총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미 개별교단들이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를 근거로 이단으로 단죄한 큰믿음교회 같은 문제단체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렸다는 것도 착잡한 희비극이다. 신임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이전 위원회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단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관상기도가 이단시비에 올라 있는 현실은 이런 사이비이단문제의 난맥상과 맞물려 있다. 관상기도가 일부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혼합주의 쯤으로 알려져 있으니 참 딱한 현실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상기도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을 성전이라도 치르듯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와 신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라고 봐도 큰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호전성이 영들을 분별한다는 그럴싸한 미명으로 포장되고 장려되기까지 하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복음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성경을 들먹인다고 해서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써야 한다면서 성경과 사도를 들먹이는 사이비집단이 있다. 공교회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가 성경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 = 토요일'을 지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일 =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공교회를 공격하는 태도가 성경적일 수도 없다. 

왜인가? 성경에 담긴 복음의 정신은 놓친 채 성경만 들먹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주의적 인용으로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며 의기양양하게 단죄할 수 있을까? 자전거가 성경에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며 득의만면하게 저주를 퍼붓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둔다.

둘째, 순전한 믿음은 소위 순혈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때 이방인과의 통혼을 비판하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했다. 그러나 성경을 면면히 흐르는 구원사의 큰 흐름은 이방인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이었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없었을 것이요, 아직도 정결례를 삼가 지켜야 했을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도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했다.

순혈주의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서 순혈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참사도로 여겨졌던가? 오히려 순혈주의를 고집할수록 그들은 구원사의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관상기도에서 본질과 알맹이가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순수한 믿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전한 믿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극단적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가까운가? 

관상기도가 '이방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평은 설득력 없는 순혈주의에 불과하다.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일체에 소위 종교혼합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성경의 역사적 과정 자체가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는 비평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관상기도가 그리스도중심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로부터 가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한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세계신학계의 보편적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이들에게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오늘의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의 거장들이 영성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거짓교사일터이므로!

그렇다면 영국의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책 Christian Spirituality를 보면 소위 영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향점을 갖는 여러 가지 신앙유형과 신학적 입장들이 아우러져 있다. 그 가운데는 관상기도가 예사로 등장함은 물론, 소위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편협한 근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거짓선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빌랴의 테레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요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토마스 머튼, C S 루이스, 칼 바르트, 본회퍼 등이 다양한 영성의 모습으로서 토의된다. 

자, 맥그라스는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텐가? 아니면 맥그라스 역시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배교한 거짓교사라고 할텐가?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존 파이퍼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관상과 명상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실재라고 긍정한다. 영성의 단계를 나누어 존재의 상승과 고양을 얘기하는 가톨릭신학의 '나쁜' 관상과 명상에 대해선 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긋지만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가 추천하고 격려하는 차세대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이머징교회 운동(*1)과 관상기도에 참여해 온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든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존 파이퍼나 드리스콜 목사 역시 이들의 눈에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아니고 배교한 거짓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할 교회의 교사가 몇이나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들에게 교회의 교사가 과연 필요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성령의 감동 덕분에 '오직 성경으로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관상기도에 대한 세계공교회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2)

[덧붙임]
"Emerging Church"는 '이머징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번역이다. 그렇다고 '신흥교회'라고 옮기자니 신흥종교가 연상되어 어감이 적절치 못하고, '(새로) 뜨는 교회'라는 식의 표현도 '요새 뜨는 교회'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할 것을 고민해야 할 낱말이다.
*2. 구글링을 잠시만 해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그들 스스로의 (소위 '영적인') 통찰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빌어온 얘기라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주장을 어디선가 빌어오거나 따오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그렇게 했느냐이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국근본주의의 복사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두고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