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교회'에 해당되는 글 5건
- 2014.04.02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 2014.03.24 그리스도 지옥강하와 에녹 전승
- 2012.09.11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4
- 2011.05.14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 2010.12.27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1. 고대와 중세까지 이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인 답변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고대교회 문헌이나 오리게네스를 필두로 한 (특히 동방) 교부들 다수의 답변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동방교회에서 먼저 주장했고, 동방의 신학적 영향력 아래 서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러한 답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그릇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악마적) 발명'이라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면서 이 주장의 외연을 자유주의로 좁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으리라는 주장을 "현대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대교회의 문헌증거들을 통해 쉽게 반박되는 단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사후 구원 기회에 한계가 없다는 희망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고대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방식처럼 단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무런 형벌 없이 구원 받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사후에 모든 사람은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에 힘입어 혹독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정화의 과정은 이미 현세에서 고통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현세(가 지옥 같을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되었다.
요컨대, 사후 구원 기회에 대한 고대교회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 은혜의 승리가 그 범위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달리 표현하면, 고대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지옥 세력의 일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승리하시어 굴복시키셨다. 지옥은 비어있다!
2.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희망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관념은 인정하나, 아무나 다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악인들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위협과 경고는 다 뭐란 말인가? 구원 받을 자는 은혜의 선택을 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옥이 비어 있다고? 천만에!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구원의 희망에 전거를 제공한다고 믿어졌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노아 안에서, 환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지옥이 비어 있으리라는 대중적 희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불신자들일지라도 - 그들 자신의 덕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확실한 인간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적어도 개혁교회 이외의 서방전통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온 내세관념이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고 죄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방교회에 퍼져 있던 또 다른 대중적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사후 어떤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purgatorium)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소위 정화의 가능성이 그레고리우스 1세를 거치면서 중세서방에서는 자명한 믿음의 대상인 연옥으로 굳어졌다. 중세 연옥설은 동방교회의 내세관과 어떻게 다른가?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 따르면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정화의 과정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예외없다. 여기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가 철저하게 미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지옥과 천국은 구분되나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화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연옥이라 일반적으로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세는 (농노에서 교황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적 변주를 거치면서 지옥-연옥-천국이라는 서로 구분되고 단절된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내세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는 지옥에는 악인이, 연옥에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보통사람이, 천국에는 선인이 들어가도록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러한 서방중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동방교회에서도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중세서방에서는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 지상교회 신자들의 행업의 공로를 통해 연옥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동방교회에 다르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과정은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동방교회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의 행업에서 나오는 대리적 보속이나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같은 서방의 중세적 관습은 낯설고 새롭다.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서는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가 내세의 모든 영혼들에게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에 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 내세론에서는 그리스도 지옥강하가 "천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운동"(토마스 아퀴나스)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점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았던 악인들에게는 지옥강하의 발생을 인지할 수 있을 뿐 구원의 효력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보속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들이 그 공로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되리라는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 더욱이 구체적으로 드라마화되기까지 한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은 중세말기에 이르러 거의 집단 히스테리 수준의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저 참담한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 남용의 광기는 이 집단 히스테리의 현세적 귀결이었다. 그 누가 두려운 연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라, 지옥만 만원인 게 아니다. 연옥도 만원이다!!
3.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광신적 연옥관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사람이 어딜 가냐고? 연옥밖에 없지 않겠냐고? 바로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약성경, 특히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 바울의 구원론을 못 알아들은 소치이다! 실로 '불쌍한 연옥영혼들'을 건질 산 자들의 잉여공로를 운운하는 연옥은 그리스도의 대속효과를 폐기하는 무서운 사탄의 발명품이다! 불쌍한 현세의 영혼들아, 연옥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중세 연옥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저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인 발언을 부정하면 안 될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서방신학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관심 두기 보다 현세의 삶을 하나님께 자리매김하도록 권면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취지와 다르게 중세 연옥론은 현세의 삶을 단지 연옥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중간과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 표상을 내세에 대한 무익한 공상으로서 거절하고 현세에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독려했던 것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내세에 관한 사고방향은 비교적 온건한 루터파와 보다 철저한 개혁파의 그것으로 나뉘었다. 루터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멜란히톤은 루터와 일정부분 교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 때 가장 뛰어난 이교도들을 구원하셨으리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생각은 이후 루터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구원론은 연옥의 잔재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개혁파는 사후구원가능성에 관해 교회역사상 어느 교회전통보다도 단호하고도 강경한 어조로 부정해 왔다. 이미 쟝 칼뱅의 베드로전서 3장 19절 주석은 - 비록 동일한 형태로 답습되지는 않더라도 - 이후 개혁전통에서 되풀이될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웅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내세의 망대에 임하셨다. 이 망대에는 내세에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대망하던 구약족장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의 광채와 효력을 통하여 족장들을 구원하셨으나, 악인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셨다. 그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예외 없이 철저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종교개혁의 사고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가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해 절반만 이기셨는가?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옥 권세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영혼들 대부분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일체의 사후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그릇은 천하게 여길 자유가 없단 말인가?" 지엄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이중예정론을 통해 관철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일군의 사람들은 선택되기로,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구원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르트 시노드의 소위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도 강경한 형태로 갈무리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와 지옥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계시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모든 신학적 사고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중예정 교리를 통해 충족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르침 없이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의지는 과연 충족되는가? 이중예정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지 않는가? 과연 그런 폭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성경의 하나님인가? 세상 죄를 모두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대신하여 버림 받으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그를 그렇게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경륜이 온 우주에 이루기가지 만유에 편만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자비롭고 온유한 성령님 -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이중예정이 말하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정의의 차원을 계시하지 않는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너무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만을 관철시키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적 정의'(틸리히),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처음부터 다 다시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의 생각처럼 지옥이 만원일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개혁전통에 익숙한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까지 확정적인 상태까지는 못 된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지옥을 포함한 내세표상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실체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몇 갈래의 서로 다른 사고들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내세표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해당문맥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영원 지옥형벌을 강변하고자 할 때 그런 면밀한 검토보다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고 단정짓는 강박적인 해석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성경이 영원한 지옥형벌을 인간 대부분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형벌에 관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불붙는 듯 상처 입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예언자적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요나의 예언 목적이 앗수르 사람들의 회개에 있고 멸망에 있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의 지옥형벌에 대한 위협과 경고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교회에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의지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세상과 지상교회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에 속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 모두, 혹은 대다수를 구원하셔야 하거나, 거꾸로 소수, 혹은 극소수만을 구원하셔야 할 신학적 필연에 갇혀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은 죄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자유로운 주권과 경륜에 따라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에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었고, 지옥의 밑바닥이 드러난 바 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자, 이제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를 동원해서 뭔가 단정적으로 답변하면 아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변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그런 답변들은 교황론이나 마리아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연역으로 정당화된 불필요한 진리의 곁가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방교회의 구원론이나 최근 만인구원론으로 기울고 있는 최근 서구신학의 내세론적 사고(몰트만, 판넨베르크, 존 로빈슨, 칼 라너, 폰 발타자르, 한스 큉 등) 역시 약점이 있다. 모두가 예외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역시 신학적 필연의 연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위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에 대한 물음에 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당신의 독생자가 모두 겪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의 경륜을 확증하셨다.
셋째, 따라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모두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영원한 구원의지를 확증하신 하나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그것은 온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하시든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견줄 수 없이 공정하고도 자비로운 판결이 될 것이다.
넷째,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내어 주시기까지 확증하셨다는 것을 바로 산 자인 당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응하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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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지옥강하와 에녹 전승
1. 그리스도 지옥강하는 사도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신경 같은 서방신경에서 나타나는 신앙조항이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한글판 사도신경에서는 19~20세기 미국감리교회의 영향으로 이 조항이 빠져 있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의 후예인 미국연합감리교회는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이 조항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여 이 조항을 다시 회복했다. 따라서 이 조항이 빠진 사도신경을 갖고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한국개신교가 유일한 셈이다. 한국교회는 이 조항을 회복해야 마땅하다.
2.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전거로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든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 개역개정)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옥"이 지옥/하계이고, "가셨다"는 것은 하계강하, 즉 지옥으로 내려가심을 뜻하며, "옥에 있는 영들"은 지옥/하계에 떨어진 죽은 자의 영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3세기 동방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서 시작되었고, 동방교회의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되었다. 서방교회 역시 이 해석을 큰 틀에서 받아들여 왔다.
이 해석의 난점은 여러가지다. 우선 신약성경 헬라어 용법의 측면에서 난점이 있다.
- "옥"은 지옥 또는 하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 않았다.
- (형용어 없는) "영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이지 않는다.
- "가셨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강하/하강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니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베드로전서 3장 20절)이 언급되어 있는가 라는 물음이 이 해석방식의 중요한 난점이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는 왜 안 되며, 모든 시대의 악인들은 왜 안 되겠는가? 이 해석은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하기 보다는 모든 시대의 악인들에 대한 두 번째 구원기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약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울러, 이러한 해석의 비약에 베드로전서 4장 6절["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이 근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 비록 오랜 해석전통을 보유한 읽기이기는 하나 -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언급된 "영으로는/육으로는"의 대조를 헬라철학적 인간론으로부터 잘못 읽어 들어간 결과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다. 즉, "영으로는/육으로는"이라는 대조는 바울에게서도 이미 나타났던 대조이므로, 이를 다르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본디 그리스도 하계강하나 불신자의 사후구원기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전통적인 이 구절의 해석은 본문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3.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서방교회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서방교회에는 동방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하계에 강하하셔서 (사실상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에게 이와 같은 에보디우스가 질문한 이와 같은 견해를 비판하면서, 성육신 이전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 시대 악인들에게도 환상으로 나타나곤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해석과는 별도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전통적인 그리스도 지옥강하 관념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테오도르 베자 이후 개혁 정통주의를 통하여 삭감되고 수정된 형태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유력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란 문자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징적으로는 버림받은 죄인들의 번민을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민을 가리키며,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노아시대에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 정통주의의 그리스도 지옥강하론은 루터나 칼뱅의 이해와도 상당부분 다르다.
- 루터와 칼뱅은 버림받은 자의 정신적 번민을 지옥강하로 해석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동기를 아울러 언급했다.
-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관하여는 하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칼뱅은 구약 족장들로 구원의 범위를 제한했으나 구약 족장들이 그리스도의 하계강하를 대망하면서 "망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 루터나 멜란히톤의 경우는 하계강하를 통한 사후구원가능성까지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 정통주의는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전복한다.
- 개혁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정신적 번민의 요소는 계승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삭감된 형태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던 바, 고대로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중세에도 유행한 신화적 내러티브의 한 요소였던 승리의 하계강하라는 동기는 배제했다.
- 그리스도 지옥강하나 베드로전서 3장 19절 해석에서 하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이 힘을 얻게 되었다.
- 하계강하를 통한 사후구원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의하여" 교회 바깥에서도 구원 받을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개혁 정통주의는 루터란 정통주의나 로마카톨릭, 또는 동방정교회와 같은 타 교회전통들과 달리, 그야말로 전례 없이 배타적인 논조로 일체의 사후구원가능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 정통주의의 해석방식은 중세적인 내세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자연히 이러한 해석방식은 전통적 해석의 추종자들에게 많은 저항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도도한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이 탈신화적인 합리적 해석방식은 개혁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감리교의 창설자 존 웨슬리도 이 해석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웨슬리가 개혁교회와 다른 점은 신경의 권위와 세부항목에 대한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였다. 이리하여, 존 웨슬리가 영국성공회의 39개 신조로부터 24개 항으로 요약해 준 신조요약에는 신경의 권위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고,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도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여전히 자신이 즐겨 시행했던 아침/저녁 기도회에서 사용되는 사도신경을 전통적인 버전으로 암송했다.
미국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요약신조에 1개 항을 덧붙여 25개 항으로 이루어진 "종교신조"를 신앙적 표준으로 삼았다. 한편, 존 웨슬리가 시행했던 아침/저녁 기도회는 얼마 가지 않아 미국감리교회에서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결과적으로 미국 감리교회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탈락되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을 삭제한 것은 존 웨슬리가 아니라 미국감리교회였으며, 그것도 우발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어권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번역했던 한국초대교회의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삭제된 경위는 그 출발점에 미국감리교회의 관행과 개혁교회의 특정한 해석전통이 있었다.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한국에 파견된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협의과정에서 본국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을 뺀 버전의 사도신경을 배운 감리교 선교사들의 의견이 개혁교회의 해석전통을 배경으로 했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 삭제론자들이 내세우는 신학적 논거는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개혁정통주의-웨슬리 전통의 해석노선에 의존해 있다. 본디 미국감리교회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탈락된 과정이 일정부분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면,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나 현대의 지옥강하 조항 삭제론자들은 이 탈락을 나름의 신학적 명분을 통하여 보다 의식적으로 주장한다.
이 해석의 강점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특정 내세 관념을 전제하지 않아도 좋고,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실존적인 불안과 번민의 문제를 십자가 사건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개혁교회의 그리스도 지옥강하 이해는 트렌트공의회를 통하여 로마카톨릭교회의 저주를 받았으나, 오늘날 로마카톨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지도급 신학자들(라칭어, 뮬러 등)이 정신적 번민 모티브를 통하여 지옥강하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약점은 여전히 왜 하필 노아 시대만이 언급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해 정확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문제적인 것은 이와 같은 특정 해석을 근거로 세계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경 조항을 뜯어고치는 것은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세계교회 지체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오늘날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관한 성경주석적 논의는 에녹 전승을 배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데 대체적인 중론이 모여져 있다. 즉,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하필 노아 사건이 언급되는 까닭은 베드로전서 기자가 에녹전승, 특히 에녹1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베드로전서 기자가 에녹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첫째,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에녹/노아전승이 잘 알려져 있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아파메나 키보토스'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키보토스'는 방주(κιβοτός)와 음이 같다. 따라서 아파메나 키보토스는 고대세계에 방주의 노아 일행이 정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따라 소아시아에는 노아와 파국을 예언한 그의 선조 에녹에 대한 각종 전승이 전해졌고, 노아는 "의의 전도자"로서 이방세계에서도 존경받고 있었다.
둘째, 베드로전서 기자 자신이 에녹 1서와 같은 묵시문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에녹1서는 하나님의 사람 에녹이 후손 노아 시대에 있을 홍수심판을 예언했다는 신구약중간기 문헌으로서, 신약성경의 배경전승을 이룬다. (베드로후서 2:4이하; 유다서 4;14이하)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경우,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에녹이 반역한 천사들에게 예고했던 최종적 심판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이 반역한 천사들은 노아 시대에 활동하면서 땅위 사람들을 미혹했던 악한 영들이다. 그러니까 "옥에 있는 영들",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의 정체는 바로 이 반역한 천사들이며, 이 반역한 천사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관계하여 낳은 거인족 네피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부활 이후 "옥에 있는 영들", 즉 "노아시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들을 굴복시키셨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1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전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세례와 노아 시대 대홍수로부터의 구원이 견주어진다. 노아가 당대의 세속적 무관심과 멸시를 견뎌낸 뒤에야 방주의 구원에 이르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정사와 권세의 박해를 겪어내고서야 약속된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이 구원의 여정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범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사와 권세와 악한 천사들에 의해 죽기까지 고난을 겪으셨으니, 결국은 그들에게 부활승리를 선포하셨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따라서 베드로전서는 성도들이 모든 고난을 담대하고도 의롭게 겪어낼 것으로 권면한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 개역개정)
소위 지옥강하에 관련하여 본 구절은 강하가 아니라 오히려 상승을 말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가서(πορευθεις)"는 신약헬라어에서 하강을 지칭한 적이 없고 거의 언제나 상승을 뜻할 때 나타나는 표현이다.
-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22절은 수미쌍관(inclusio)구조를 이룬다. 즉, πορευθεις는 22절에도 다시 나타나서 πορευθεις의 의미를 명확하게 다시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신 곳은 '아래'가 아니라 "하늘"이다.
- 신구약중간기에서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반역한 천사들의 형벌장소 내지 집결지는 하계가 아니라 궁창으로 생각되었다.
- 에녹1서에서도 에녹이 반역한 천사들에게 최종적 심판을 예고하는 장면은 하계가 아니라 하늘의 형벌장소이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5. 그렇다면 그리스도 지옥강하는 성경에 없는 후대의 신화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지옥강하의 관념은 신약성경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전제되어 있다.
- 요나의 표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신화적 존재인 바다괴물을 통하여 스올강하, 즉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심을 예고한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났다는 마태복음서의 기록은 십자가 대속의 효력이 죽음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으로부터 십자가 죽음 이후 십자가 대속의 효력이 죽음의 세계에까지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이러한 죽임당하신 그리스도의 드라마에서 절정에 해당되므로, 넓은 의미에서, 혹은 간접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전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음 이후 토요일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의 이해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 아래 얽매여 있었던 시간이 아니라, (고대교회와 중세교회와 루터와 칼뱅과 루터교회의 이해처럼) 사망권세에 대하여 거두신 생명의 승리를 선언하는 승귀의 시간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의 토요일(Easter Saturday)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고난주간의 성 토요일은 세상의 눈에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 아래로 들어간 시간이며, 이런 한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실체는 사망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이며, 이런 의미에서 부활의 토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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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참고문헌] Bo Reicke, The Disobedient Spirits and Christian Baptism (1946); Werner Bieder, Die Vorstellung von der Höllenfahrt Christi (1949); Wilhelm Maas, Gott und die Hölle (1979); Rémi Gounelle ed. La descente du Christ aux enfers (2004); Markwart Herzog hrsg., Höllen-Fahrten (2006); Hilarion Alfeyev, Christ the Conqueror of Hell (2009); 그외 베드로전서 주석들; 노종문.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왜 음부행이 빠져있을까?” 『기독교 사상』 2003 no.9, 214~235.; 강창우,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의 지옥강하" (장신대 대학원 신학석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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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궁정에서 여호와 주변을 두른 천사들을 가리키므로, 이것은 신구약중간기의 성경이해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 자체의 이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뱅은 네피림이 반역천사의 후손이라는 창세기 6장 2절의 해석을 "고대의 꾸며낸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네피림이 경건한 셋의 혈통과 불경건한 가인의 혈통에서 나온 후손들이라는 해석을 따랐다. 이것은 칼뱅의 성경해석이 합리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은 개혁 정통주의, 예컨대 청교도 주석가 매튜 헨리에게도 계승되었다. 네피림=경건한 자들의 잡혼 결과라는 해석이 한국교회 회중에게 마치 정설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까닭은 칼뱅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해석이 근대에 영향력 있는 해석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칼뱅이나 개혁주의, 또는 이를 답습한 주석성경에 나오는 대중적 해설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오늘날 주요한 창세기 주석가들은 셋 후손 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회중들이 아직도 접하지 못했다는 것은 설교자들이 주어진 책임을 유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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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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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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