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9. 18:25

쟝 칼뱅이 학살자라고?

당당뉴스에 교회비판 칼럼을 쓰고 계신 신성남 집사님이 최근 칼럼에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정확히 말하면 카스텔리오 전기) 내용에 따라 칼뱅의 제네바가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칼뱅과 중세교회사 연구가인 합동측 권현익 선교사님이 당당뉴스에 1차반론을 올렸고, 신 집사님의 반박댓글 이후 합동헤럴드에 2차반론을, 다시 신 집사님의 2차답글에 이어 3차반론, 신 집사님의 2차기고 이후 4차반론을 기고하셨다. 전체적으로 권현익 선교사님 쪽이 중세불어로 쓰여진 1차 자료를 해독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훌륭하게 적시함으로써 그간 학살자 칼뱅 이미지가 날조된 것임을 잘 해명해 주었다. 이런 내용은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본 블로그에서도 근본주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화두로 보아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 문제에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고, 신성남 집사님에 대해선 그가 신학훈련을 받지 않고 목회적 책임을 맡지도 않은 평신도임을 감안해 그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포스팅했던 다른 글에서 우회적으로 언급했던 바 있어서 이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 보았다.(*1) 이제 여기에 대해 간단한 관전평을 남겨두고자 한다.


1. 두 분의 논쟁은 사실 논쟁이랄 것도 없다. 한 쪽은 칼뱅에 대한 낡은 중상모략에 낚여있는 상태요, 다른 한 쪽은 1차 자료에 근거한 정당한 논거를 갖고 있다. 상대방의 1차 자료 읽기를 뒤집을 만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근거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 순간 논쟁은 이미 판가름났다. 1차 자료에 의한 논거가 없는 쪽에선 최소한 자기 주장이 근거가 없었고, 연구 없이 츠바이크의 말만 믿고 한 얘기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그러나 신성남 집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과연 교회개혁을 말할 지적 정직성과 겸허함이 있는지 묻고 싶다.


2. 나는 칼뱅을 이천 년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몇 안 되는 비중을 지닌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종교개혁자로서 존경한다. 하지만 모든 행적을 반드시 다 호교론적으로 정당화해야만 하는 무슨 신주단지 같은 존재라곤 생각지 않는다. 카스텔리오이든, 볼셱이든, 세르베투스든 억울하게 죄가 뒤집어씌어진 경우가 있다면 그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 잘못 알려진 헛소문과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든 조목조목 반박할 필요가 있다. 칼뱅이든, 카스텔리오든, 볼셱이든, 세르베투스든 말이다. 그런데 권현익 선교사님이 잘 밝혀 주었듯이 엄정한 사실관계에 의해 지지받고 변호되어야 할 쪽은 카스텔리오나 볼셱이나 세르베투스가 아니라 칼뱅 쪽으로 드러난다.


3. 슈테판 츠바이크가 카스텔리오의 주장을 받아쓰기 한 다음 부분이 결국 신성남 집사님에게 가장 핵심적인 논거가 될 것이다.


"칼뱅과 그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과 4년 동안 적어도 58명을 처형하고, 76명을 시외로 강제 추방했다고 한다. 그 중에 10명은 참수형이었고, 35명은 마녀사냥처럼 처참한 화형이었다. 그들은 "이 부패한 도시에 실질적인 도덕과 기율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칠, 팔백명을 처형할 교수대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겠냐는 거다. 사실은 권현익 선교사님이 훌륭하게 반박을 제시했다시피, 칼뱅과 종교개혁 이전 공포정치의 학정을 저지른 카톨릭세력의 행적이 제네바 사역 시대 칼뱅의 행적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나는 이전 글에서 츠바이크의 기술이 신뢰할 수 없다는 선에서만 대충 넘어가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이 문제인지 좀 더 파고들어 해명해 두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다. 카스텔리오 같이 증오와 시기심으로 눈이 먼 타입의 인물이 너무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한다면 오히려 거짓말이었을 가능성을 더 의심해 보아야 했다.


4. 그런데도 칼뱅을 변호하면 근본주의자가 되는가? 근본주의자라는 말로 대체 무슨 개념을 상상들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엔 사실관계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못하고 자유롭게 칼뱅을 헐뜯는 자들이 오히려 특정 이념에 종속되어 정신적으로 많이 병들어 있는 "근본주의자"들은 아닌가?


5. 특히 당당뉴스의 해당게시판에 유창윤 목사님이라는 분의 글은 내용 하나하나가 거짓된 날조이다. 독일아마존과 영어권아마존을 검색해 보면 이분이 인용했던 책과 저자 하나하나가 거짓말이거나 엉뚱한 내용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칼뱅주의의 이단>이라는 책 제목을 독일의 역사신학자들이 썼다고? (이 책의 저자로 언급된 역사신학자들은 이레네 딩엘과 헤르만 셀더위스이다. 이레네 딩엘의 이름은 내게 생소하지만, 셀더위스는 네덜란드의 칼뱅연구가로서 그의 칼뱅전기는 카스텔리오의 칼뱅상을 일일이 교정해 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분들이 공저한 책 제목도 다르다. "칼뱅과 칼뱅주의: 유럽의 전망"으로, 칼뱅주의의 소위 이단성을 논하는 책이 아니다.) 데이브 헌트 같은 일개 반칼뱅주의적 세대주의자의 선동서적에서 무슨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나온단 말인가? 심지어 19세기 말 미국에서 나온, 신학과 별 상관 없는 저널리스트의 소책자를 누군가 2015년에 재인쇄해 놓은 것까지 학문적 레퍼런스랍시고 적어 놓았다. 이걸 보고 믿으라고? 이분이 걸어놓은 것과 같은 "우와 대단한" 이력을 정말 거쳐 왔다면 레퍼런스를 도저히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고 엉성하게 인용할 수 없다. 당당뉴스 같은 공교단의 여론을 담당하는 언론기관에서 어떻게 이런 무책임하고 허탄한 글이 올라올 수 있었는지, 참 안타까운 일이다.


6. 루터와 칼뱅의 공과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전근대적 로마카톨릭 호교론에서부터 반칼뱅주의적 세대주의를 거쳐 이들에 묻어가려는 각종 사이비이단 댓글부대와 개신교안티들에 이르는 다양한 진영의 비방과 중상은 루터와 칼뱅에 대한 정직한 비판적 평가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들은 루터와 칼뱅의 공과를 조명하기 보다 종교개혁의 가치를 폄하하고 파괴하는 데는 목적이 일치하나, 엄정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관계에 대해 별 부담도, 의무감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공론의 장에서 책임있는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공교회가 세력다툼의 비루한 전장이 아니라 진리의 소통을 통해 충만한 통합을 이루어가는 공교회일 수 있으려면 사실관계에 대한 철저한 추구와 그 결과에 대한 존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지금 과연 공교회다운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과연 공교회를 이루어가는 처신을 보여주었는가. 세계교회협의회 부산대회와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과 칼 바르트와 관상기도와 그밖에도 정말 수많은 황당무계한 일련의 소란들은 한국교회가 공교회다운 공론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다툼의 근본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을 드러낸다.


칼뱅 논쟁 이후로도 박수쳐 주는 독자가 있으니 사과공지 한 마디 없이 계속 쓰겠다는 마인드나, 어떤 왜곡과 흑색선전이든 추종해 주는 신도들이 있으니 대놓고 하겠다는 마인드나, 서로 그리 멀지 않다. 청출어람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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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본 블로그에서 언론에 문제가 된 인사가 아닌 한 평신도의 실명을 직접 거론한 것은 내 기억으론 신성남 집사가 처음이다. 신성남 집사의 실명을 밝혀두는 까닭은 그의 행각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선동 하던 다른 평신도들의 경우는 특정 음모론과 같이 특정 부류에 국한되어 있어서 해당 문제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반면, 신 집사의 경우는 교회개혁이라는 그럴싸한 가치를 쥐고 있는 듯 행동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2015. 10. 8. 21:34

소위 얌니아공의회의 신화

유대교에서 주후 70~132/135년경 열렸다고 주장되어 온 얌니아공의회는 20세기 후반 성경개론서나 단행본, 연구논문 등에 등장하는 이슈다. 얌니아공의회 가설은 19세기 말 유대계 프로이센 학자 하인리히 그랫츠(d.1891)의 제안(1871년)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수용함으로써 한동안 성경학계에 정설처럼 알려졌다. 20세기 후반 무렵 공부하신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아래 내용들을 아직도 그대로 얘기하시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

- 주후 90년경 얌니아공의회에서 (1) 구약성경의 완결과 (2) 구약외경 배척을 결의했다.

- 주후 90년경 얌니아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저주기도 제정을 결의했다.

그러나 얌니아공의회 "이론"은 오늘날 성경학계의 축적된 연구성과를 토대로 돌아보면 한 마디로 증거 없이 부풀려진 20세기 신화였다.

신화1: 얌니아공의회가 (1) 구약성경 완결과 (2) 구약외경배척을 결의했다?

얌니아공의회 가설의 주창자 그랫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두 번째 문제는 솔로몬 임금에게 저작권이 돌려지는 두 문헌, 전도서와 아가서의 거룩성에 관한 것이었다. 샴마이 학파는 그들을 거룩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 해묵은 논쟁은 이제 ...... 72인의 학회(College)가 재연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명백하지 않았다. 후일 이들 할라카들(=전도서와 아가서: 옮긴이)은 성문서 모음, 즉 정경에 포함되었다. 이후 정경은 완결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예닐곱 책들은 외경으로서 배척되었다. 시락의 잠언집이나 마카비 1서 같은 몇몇 책들이 그것이었다...." [Graetz, History of the Jews,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893, vol.2:343-4]

당시 서구성경학계는 방대한 랍비문헌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 그랫츠의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랫츠가 얌니아공의회 가설에서 기반으로 한 랍비문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실질적으로 그랫츠의 근거란 m.Yadayim 3:5 한 곳밖에 없다. m.Yadayim 3:5은 전도서와 아가서가 거룩하냐, 즉 정경적인 영감성이 있느냐는 문제를 토의한 기록이다. 하인리히 그랫츠는 이 기록으로부터 (1) 히브리정경완결 (2) 구약외경배척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얌니아와 결부시켜 기술한다.

그러나 탈무드 원문에서는 정경완결이나 구약외경배척 같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전도서와 아가서의 정경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무엇이 더해지거나 빼버린 바 없이 기존 관행을 재확인했을 따름이다. 더욱이 히브리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논의는 소위 얌니아 이후 후대랍비문헌에서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얌니아에서 무엇을 완결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을 회의로 완결한다는 그랫츠의 주장에서 결국 실체로 남는 것은 하인리히 그랫츠와 당대 서구성경학자들의 뇌리에 익숙했던 서방그리스도교적 프레임 밖에 없다.

신화 2: 얌니아"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기도문이 결의되었다?

얌니아공의회의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 결의라는 신화는 여러 가지 잘못된 시대착오적 관념이 결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얌니아회의가 저주와 파문을 결의할 위상의 "공의회"였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얌니아(오늘날의 야브네)는 예루살렘 인근 해안가의 소도시인데, 예루살렘 붕괴 이후 이곳에서 요하난 벤 자카이를 좌장으로 하여 70여명의 랍비들이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은 주후 70년부터 135년 정도까지 지속되었다. 135년은 바르코크바의 무장봉기가 비극적인 실패로 돌아갔던 해였다. 과연 주후 70~135년 얌니아에서 이루어진 랍비들의 회합은 "공의회"였는가?

여기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예루살렘 붕괴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교는 랍비유대교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유대교가 공존하는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 샴마이학파 바리새파: 예루살렘 성전을 중시.
- 힐렐학파 바리새파: 토라의 연구와 실천을 중시. 랍비유대교는 토라의 연구와 실천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형태의 새로운 유대교 형태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시하는 샴마이학파의 노선이 135년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은 이후 힐렐학파의 노선이 주도하게 됨으로써 성립된다.
- 묵시문학가그룹: 에스라 4서, 바룩 2서 등 신구약중간기 묵시문학가들과 그 그룹들.
- 무장봉기노선: 이들은 열심당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이들에게서 로마제국에 대한 제3차유대전쟁(132~135/6년경)을 일으켰던 바르코크바와 그 추종자들이 나왔다고 본다.
- 유대그리스도교
- 사실상 유대교의 범주 바깥으로 나간 집단으로 볼 수 있겠지만, 여기에 유대교영지주의집단도 덧붙일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유대인들이 얌니아 진영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다."(Katz) 얌니아에 모인 랍비들은 아직까지 유대교 전체를 대변할 만한 공적 위상에 이르지 못했다. 요세푸스와 같은 당대 유대교 소식에 정통한 재외유대지식인조차 얌니아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구심점이었던 예루살렘성전을 상실한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얌니아에 모인 랍비들 가운데 미래에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게 될 노선을 채택한 유력한 집단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논쟁과 설득, 교육을 통해 서서히 유대교세계에서 권위 있는 집단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얌니아의 회합에서 토론된 사항들은 당대 유대교에 바로 반영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얌니아 당대 랍비유대교가 자신들이 채택할 견해를 대내외적으로 전파할 효과적인 수단을 갖고 있었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다. 얌니아의 후예들이 그러한 시스템을 이루는 데는 최소한 백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게 된다.

얌니아회의에 대한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일까?

얌니아회의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기도문을 매일 올리는 아미다기도에 넣기로 결의했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Bavli Berakhot 28b-29a)에 따른 것이다. 이 기록을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얌니아공의회"가 있었을 것만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과연 문자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록물이었을까? 왜냐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유대랍비들의 전승이 9세기 경 집대성된 문헌이기 때문이다.(*1) 더욱이 지금까지 알려진 소위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11세기 카이로 게니자 사본이다. 1세기말 2세기 초 (있었다는) 얌니아 회의의 사건을 팔백 년 이후, 심지어 어쩌면 천 년 이후 기록된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과연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기록할 수 있을까? 물론 역사비평을 거치지 않은 근본주의적 읽기방법으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얌니아 회의에 대한 정확(무오)한 (문자적) 역사기록이어야 한다. 요하난 벤 자카이가 예루살렘 멸망 때 얌니아로 피신하여 얌니아공의회를 창설했다는 식의 전설로부터 모든 세부사항이 자동으로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현대유대교학자들이 방대한 랍비문헌들을 토대로 진행하는 논의에 대한 소개는 이 글의 한계와 목적을 벗어날 것이므로 굳이 하지 않도록 한다. 거칠게나마 결론만 간추리자면,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를테면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삼한정벌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탈무드와 같은 유의 기록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료비평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1) 구전의 신빙성과 (2) 편집자의 편집의도라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하는 역사비평적 검토과정이 필요하다.

역사비평적 검증 이후 신공왕후 삼한정벌설이 일본역사학계가 아니라 일본극우파가 애용하는 신화로 드러나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말하는 얌니아에서의 저주기도 제정 기록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바빌로니아 탈무드 편집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800년 전 (있었다는) 사건에 시대착오적으로 투영된 일종의 근본주의 신화에 가깝다.(*2)

따라서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깥의 역사기록에 견주는 우회로의 접근이 필요하다.

교부문헌에 나타난 유대교 저주기도문의 흔적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도교의 유대교 관계 기록들은 유대교 저주기도문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먼저 1세기 얌니아회의 어간에 초대교회의 기록인 신약성경에 유대교 저주기도문의 흔적이 있을까? 개신교성경학계 일각에서는 1968년 미국루터교회의 신약학자 루이스 마틴의 제안 이후 주로 영어권을 중심으로 얌니아의 저주기도 제정 흔적이 요한복음의 두어 구절에 반영되어 있으며, 저주기도로 말미암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Parting of the Ways)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방향의 연구를 진행해 왔다.


결론이 어떻게 났겠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런 가설은 애당초 방향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지되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은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성경학계 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 1977년 오스트리아 카톨릭교회의 유대교학자 귄터 슈템베르거에 따르면, 요한복음 기사와 얌니아"공의회"의 탈무드 기록에 묘사된 그리스도교인 축출은 서로 중대한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얌니아회의는 애당초 "공의회"가 아니었으며, 예루살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얌니아에는 북사마리아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던 그리스도교의 존재 자체가 거의 희박했기 때문에 유독 그리스도교를 지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결의 같은 것 때문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Parting of the Ways)가 일어났을 수 없다.


- 20세기 미국의 지도적인 가톨릭신약학자 레이먼드 브라운은 얌니아공의회 신화를 1960년대에 비판했던 가장 초기의 반대자 가운데 한 분이었으나 저주기도 제정문제에 대해서만은 루이스 마틴의 학설에 거의 설득되었다. 그러나 말년의 "신약성경개론"에서는 이 학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사후 출간된 브라운의 "요한복음서 개론"을 편집한 프랜시스 몰로니는 이 학설에 대해 상세하게 반박했고, 미국 가톨릭성경주석총서 Sacra Pagina를 위해 집필한 그의 요한복음서 주석에서도 유대교의 박해를 지역적인 것으로 국한했다.


- 2001년 발표된 교황청성경위원회 문서 "유대백성과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서의 그들의 성경" 69번 단락에서 위와 같은 인식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기술한다. "유대교 저주기도(birkat ha-minim), 즉 분리주의자들(non-conformists)에 대한 "축복기도"(실제로는 저주기도)가 흔히 인용된다. 그러나 저주기도의 연대가 주후 85년인지는 불확실하다. 아울러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편적인 유대교의 교령이었다는 생각도 거의 확실하게 틀렸다."

주후 1세기 신약성경에서 저주기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2-3세기 교부문헌에서는 어떨까?

시리아 출신 이방그리스도인이었던 2세기 초 사도적 교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소아시아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두어 구절에서 유대교 회당예배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면했다.(마그네시아서 8:1, 10:1-3, 빌라델비아서 6:1) 그러나 여기서도 딱히 저주기도의 흔적이랄 만한 것은 없다. 따라서 적어도 소아시아에서 저주기도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명백한 저주를 담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그랬다면 이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주교라는 위치에 있었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회당예배 참석을 만류하면서 언급하지 않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2세기 중반 변증가인 순교자 유스티노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사마리아 출신 이방그리스도인으로서 2세기 초대교회 지도자 중 누구보다도 유대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했을 인물이다. 그가 남긴 유대교 랍비 "트리포와의 대화"를 보면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방과 저주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여러 곳에 많이 나온다. 이 모든 기록이 저주기도에 대한 언급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읽기다. 미국의 유대교 학자인 랍비 르우벤 키멜먼의 검토에 따르면, 실상 회당 바깥을 배경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방과 저주에 대한 기록들을 소거하고 나면 회당 안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서너 군데 뿐이다. (이를테면 96:2) 그나마 예전적인 활동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이다. (137:2) 그러나 여기서조차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말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저주의 워딩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고대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매일기도에서 저주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고대교회 문헌에서 당대 유대교가 그리스도인들의 회당예배를 환영했다는 기록은 풍부하다."(R Kimelman)

저주기도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교부문헌 쪽 기록은 결국 4세기 말, 5세기 초의 교부 에피파니우스와 특히 히에로니무스 정도까지 내려와야 한다. 즉, 4세기 말 이전 저주기도의 존재와 형태는 교부문헌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피파니우스의 경우는 하루 세 번 그리스도교를 저주한다는 보도를 하고 있어서 저주기도의 예전활동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 역시 저주기도의 구체적인 형태가 암시되어 있지는 않다. 유대랍비와 가장 빈번하고 밀접한 접촉을 했던 고대교부인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은 나사렛당('notzerim')이라는 표현이 이 무렵의 저주기도문에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 확인해 주는 가장 확실한 기록으로 본다. 그러나 이마저도 히에로니무스는 저주기도문이 겨냥한 나사렛당의 정체를 유대교의 행습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이단적 유대그리스도인들이라고 전한다. 저주기도문이 그리스도교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마저도 에피파니우스와 히에로니무스가 증언하는 예루살렘을 벗어나면 상황이 또 다르다. 동시대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예배보다 유대교회당예배에 더 많이 참석했다는 데 대해 분개했으나 유대인들 쪽에서 저주가 있었다는 유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이 당시 안디옥의 유대교에 퍼져 있었던 행습은 예루살렘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는 점, 바꿔 말하면 저주기도에 관련된 예루살렘 지역 유대교의 행습이 안디옥 지역 유대교에 아직까지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이란 4-5세기 경에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니까 유대교 저주기도문이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이 된 것은 중세 때 얘기가 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깥의 랍비문헌에 나타난 저주기도문의 흔적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깥의 랍비문헌에도 저주기도문의 흔적은 발견된다. 그러나 4세기 말 이전 저주기도문은 어떠했을지, 오늘날 서로 상충된 형태로 전해진 기록들만으로는 원래의 정확한 워딩을 알 길은 사실상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저주기도문에 관한 기록들에 암시되어 있는 저주기도문의 워딩은 후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저주기도문의 문구에 처음부터 - 그 처음이 언제든지간에 - 존재했을 것이 확실시되는 낱말은 minim 한 낱말 정도이다. 나머지는 기술적인 용어와 표현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minim(이단자들, 분리주의자들)도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시대와 장소마다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낱말이다. 요세푸스는 minim에 대응하는 헬라어 αἱρεσις(하이레시스)에 이단자나 분리주의자라는 함의를 담지 않았다. min/minim/minut라는 낱말들이 - 더 구체적인 정의 없이 - 이단자나 분리주의자라는 함의로 팔레스타인의 랍비유대교에서 애용된 것은 주후 3세기부터였다.


그렇다면 minim은 누구인가? 앞서 지적했다시피 다른 많은 집단들 사이에서 경쟁해야 했던 랍비유대교는 유대교세계의 헤게모니를 잡아가고 있었던 초기일수록 랍비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얌니아 진영 바깥에 있는 일체의 유대인들을 minim으로 경계지음으로써 독점적 권위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독 당대 유대교의 소종파에 지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만을 겨냥해서 min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나 4세기 말 이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랍비유대교는 랍비체재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던 반면,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공인종교가 됨에 따라 박해하는 자와 박해 받는 자의 처지가 서로 달라지게 된다. 이에 따라 랍비유대교는 저주기도에 소멸되기를 탄원하는 대상으로서의 "이단자", "배교자" 등등의 표현이 명시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아울러, 유대교 학자들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다른 유대문헌들의 "저주기도" 행습이 서로 달랐음을 지적한다. 즉,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기도문선창자는 다른 축복기도문을 선창하지 못하더라도 선창자의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으나 저주기도를 선창하지 못하면 배제되도록 했다. 그러나 4세기 이전 고대유대교의 다른 기록들에서는 서너 가지 정도 축복기도문을 외워서 선창하지 못해도 선창자의 직무에서 배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과 같은 엄격한 형태의 저주기도는 보다 후대에나 시행될 수 있었다.

결국 9세기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기록한 얌니아회의의 저주기도 제정 기사나 11세기 카이로 게니자 사본이 전해주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저주기도문은 소위 얌니아회의 당시에 제정되었다는 저주기도 원문이 아니다. 문제의 저주기도문은 1세기가 아니라 4세기 말 5세기 초 이후 중세적 상황을 반영한다.


요컨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저주기도 제정 기사는 중세 유대교가 minim를 그리스도교 내지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일시하는 자신들의 이해로부터 이 '오래된 기억'을 1세기 랍비유대교가 출발한 신성한 원점에 투영시켜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편집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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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이 글을 읽고 가톨릭성서학연구소인 한님성서연구소의 송혜경, 김명숙 연구원 두 분이 본인의 논지에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글을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려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약간 오해가 발생한 듯해서 첨언한다.

(1) 히브리어로 쓰여진 예닐곱 권의 책들(several writings in the Hebrew language)을 언급한 그랫츠의 인용문은 문자 그대로 그랫츠의 주장이다. 예닐곱 권의 책들이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졌다고 바꾸어야 할 까닭은? 집회서의 히브리어원문이 7할 정도 발견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히브리어 단편도 약간이나마 나와 있는 구약외경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어로 쓰여졌다"고 기술을 바꾼다고 해도 어차피 더 정확한 내용이 되지는 않는다.

(2)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성립연대가 9세기라는 나의 기술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전체의 성립연대를 논하는 문맥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기록된 유대교 저주기도 제정 기사의 성립연대가 9세기라는 의미이다. 구전기록의 성격상 탈무드 기록 시작이 7세기라든지, 혹은 4-5세기나 그 이상까지도 올려잡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최종편집성립이 언제, 어떤 동기에서 이루어졌느냐를 고려해야 한다. [Langer 2011:6과 6 n.7 등 참조.]

*2: 물론 "얌니아공의회"에 관한 바빌로니아 탈무드 기록 자체는 일종의 '전근대적' 신화이다. '전근대적' 신화는 역사비평학적 필터링을 거쳐 알아들으면 된다. 문제는 현대에도 여전히 전근대적 신화를 문자적으로 정확무오한 역사기록이라고 들이대는 경우다. 이런 시대착오적 해석방식은 근본주의 신화이다.


[주요참고문헌] N Tom Wright,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1992); Ruth Langer, Cursing Christians? (2011)

2013. 10. 24. 17:49

구약성경의 외경 혹은 제2정경과 위경에 관하여

천주교나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개신교처럼 39권이 아니다. 천주교의 경우 7권의 책이 더 있으며, 정교회는 지역교회마다 조금씩 다른 책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책들을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경이라 부르고, 천주교에서는 제2정경이라 부른다.


외경, 혹은 제2정경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또 위경이라는 책들은 무엇인가?

 

1. 왜 개신교와 천주교/정교회의 구약성경은 차이가 나는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개신교의 39권 구약성경은 히브리성경의 전통이며,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46권 내외의 구약성경은 그리스어구약성경의 전통이다

이 두 가지 정경의 전통을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타인정경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2.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타인 정경?

그리스어구약성경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유대인들(재외유대인들)이 즐겨 읽던 책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본토유대인들에게 이 책들은 신적 권위가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20세기의 성경개론학은 알렉산드리아 전통(=칠십인경)과 유대 전통(=히브리성경) 두 가지가 양립 내지 대립해 있다고 여겼다.


2.1 "얌니아회의"

19세기 유대학자 하인리히 그랫츠의 주장 이후 20세기 중반 정도까지 "얌니아회의"의 가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유대 팔레스타인 전통을 반영하는 히브리성경은 주후 90년경 얌니아회의에서 제정되었고, 알렉산드리아 전통을 반영하는 칠십인경은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을 계승한 이방초대교회의 전통을 반영한다고 여겨지곤 했다.


2.2 얌니아회의에 관련한 가톨릭근본주의 호교론의 주장들

가톨릭근본주의 호교론은 얌니아회의 가설로부터 다음과 같이 개신교를 공격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만들어냈다.

(1) 얌니아회의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문이 선언되었다. 개신교는 그 얌니아회의의 성경을 받아들인 것이다.

(2)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칠십인경을 읽었다. 개신교는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읽었던 성경을 부정했다.

(3) 신약성경에는 외경이 300여 군데 인용되어 있다. 개신교는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읽었던 성경을 부정했다.

기타등등.


이런 주장이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가?

 

3.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타인 정경의 구분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 성경학계의 연구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방향에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구체적인 근거로서 (1) 당시 재외유대인이 남긴 문헌적 증거 (2) 소위 얌니아회의의 허구성 (3) 헬라어번역성경인 70인경을 통한 증거 등을 들 수 있다.


3.1 재외유대인들의 사례들

소위 디아스포라 유대지식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요세푸스나 필로의 기록에서도 히브리성경과 나머지 문서들은 인용 빈도수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나며, 권위있게 받아들여지는 정도 역시 달랐다. 오히려 요세푸스나 필로는 오늘날의 히브리성경 24 (=개신교 구약성경 39)과 비슷한 22권을 정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오늘날 히브리성경은 24권으로 계수되나, 계수방법에 따라 22권이 될 수 있다22권이 24권으로 계수된 것은 아마도 완전수 12+12라는 히브리적 숫자관념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재외유대인들은 평생 적어도 한 번은 본토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유대교의 표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2 얌니아회의?

그렇다면 얌니아회의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한 마디로, 얌니아회의란 주후 90년이라고 때를 특정하기조차 곤란하게 느슨하게 지속된 랍비들의 회합이었다. 이 모임은 산 헤드린 공회와는 달리 학파간의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으며, 어떤 구속력 있는 법적 결정이 내려지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공의회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 유대지식인인 요세푸스가 그 시대 가장 앞선 소식통이었음에도 얌니아에서 공의회적 성격의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소위 얌니아회의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역사가였던 하인리히 그랫츠가 발표한 이래로 20세기 중반 정도까지 유행했지만 1960년대 이후 개연성이 없는 것으로서 이미 기각된지 반 세기가 넘는 낡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랫츠가 '얌니아회의'를 말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공의회 개념에 의한 유비적으로 유추한 결과이다. 이를 20세기 서구성경학계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었다.


A. 개신교는 얌니아회의를 계승했다?

그렇다면 얌니아회의에 기초한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주장은 개신교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20세기의 발명품일 뿐이다.


B. 얌니아회의의 저주선언?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문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랍비들의 기도문에 지나지 않는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을 얌니아회의에 갖다 붙인 가공의 얌니아'공회의' 저주선언(anathema) 버전으로 둔갑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의 저주기도(birkat ha-minim) 제정을 포함한 얌니아공의회 이론이 일종의 신화라는 현재 논의상황에 관해, 나의 글 "소위 얌니아공의회의 신화"를 참조하라.)


3.3 개신교는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읽었던 칠십인경을 버렸다?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칠십인경을 읽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A.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모국어는 아람어였으며, 그리스어의 이해 정도는 제한적이었을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인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고백했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들의 그리스어 구사 능력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을 위시한 1세기 후반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외경이 디아스포라 유대인 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성경으로 통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3.1항과 아래 3.3.B항을 참조하라.)


B. 칠십인경에 포함된 나머지 책들이 예루살렘과 유대 본토에서 성경으로 읽혔어야 한다

그러나:

- 외경이 예루살렘과 유대본토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 칠십인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있는 칠십인경과 동일한 범위를 가졌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다. 칠십인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모세오경만을 갖고 있으며, 외경을 포함한 후대의 고대사본들에 수록된 외경 목록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있는 칠십인경은 서로 다른 외경을 갖고 있는 후대사본들로부터 그보다 더 후대의 교회가 재배열하고 종합한 재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쿰란문헌은 어떤가? 어쨌든 외경이 발견되지 않았는가? 이 역시 조금도 가톨릭근본주의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 외경이 발견되었으나 극히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 인용빈도수 역시 극히 빈약하다.


C. 신약성경의 구약외경 인용 문제

신약성경에서 구약외경은 어느 정도 인용되는가? 300여회 인용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300여회 인용되었다는 숫자는 신약성경 원전 뒷면에 성경 인용 및 암시 목록(Loci citati vel allegati)의 숫자가 그 정도 되는데, 이걸 두고 하는 얘기인 것 같다. 그러나 목록을 조금만 검토해 보아도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성경인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단순히 인용되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성경이라는 뜻도 아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외경만이 아니라 위경과 심지어 그리스 시인의 글이나 속담까지 인용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외경이 인용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외경이 구약성경과 더불어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었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약성경의 구약외경 인용 문제에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성경으로 인용할 경우에는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인용한다는 점이다히브리성경의 경우 약 2/3 정도가 성경으로 인용되었다따라서 적어도 이 책들은 당시 이미 성경으로 통했다는 것이 입증된다나머지 1/3 정도는 (최소한 일부는성경으로서 권위를 얻어가는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하물며 구약외경은 그런 식으로 인용된 바가 없다. (오히려 구약위경인 에녹1서가 신약성경 시대에 성경으로 여겨졌다면 모를까!)

요컨대, 신약성경의 구약외경 인용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 구약외경이 외경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이다.

 

4.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 구약성경이 존재했는가?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 구약성경과 외경 사이에 구분이 없었는가? 구약성경 22/24권 또는 39권은 당대에 아직 완결되지 않았는가?

확실히 오늘날과 같이 뚜렷하게 구획짓는 성격의 구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경과 외경/위경 사이의 구분은 오늘날보다 느슨하고 유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과 비정경문헌 사이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미 앞의 기술을 통해 22권이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점과 구약성경의 적어도 2/3 정도는 성경으로 인용된 반면, 외경은 성경으로 인용된 사례가 없으며, 성경으로 읽혔던 증거도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3.3항 참조.)

당시의 상황은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A. 완결되었다는 입장: 

필로가 히브리성경 22권의 존재를 증언했기 때문에 주전250년 경에서 주전 1세기 경 무렵에는 오늘날과 거의 같은 범위의 히브리성경이 정경적 개념으로 읽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외경인 예수 벤 시락의 집회서 서문에 기록된 대로 당시 히브리성경은 두 가지(율법과 선지자), 또는 세 가지(율법과 선지자와 시편 등)로 구분되었을 것인데, 오늘날 성문서라 불리는 문서들 가운데는 아직까지 정경적 권위가 의심되거나 논란되었던 문서들이 있었을 것이다.(에스더서, 전도서 등.) 그러나 이 역시 이미 정경으로 통용되었다는 정황을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

B. 완결되지 않았다는 입장:

쿰란공동체의 성서들은 아직까지 정경의 범위가 유동적이었으리라는 추론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또한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와 달리 성경의 범위를 정하여 구속력 있게 공표한 적이 없고, 서기관들의 사본길드를 통해 천천히 정경의 범위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본적 증거를 토대로 판단한다면 기원후, 심지어 중세까지도 내려 잡을 수 있다.

A안과 B안의 약점과 강점은 사본적 증거로 귀결된다. 

A안의 약점은 22권 정경을 뒷받침해 줄 단일한 (양피지)사본이 없다는 점이다. 

B안의 약점은 사본의 증거에만 의존해 있다는 점이다.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태로 개별 책자를 보관해 왔던 유대교 전통에서 정경의 범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했다는 점이 간과될 수밖에 없다. B안의 약점은 A안의 강점을 설명해 준다.

아마도 A안 쪽이 당시 대세였을 것이고, B안 쪽의 경향도 존재했을 것이다

본토유대그리스도인들 중심의 초대교회에서 디아스포라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주축으로 한 초대교회를 거쳐 이방인 개종자 중심의 초기교회로 넘어간 이후 교회가 - 비록 일치된 목록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 서서히 외경들을 구약성경에 포함시키는 추세를 보여주었던 것은 예루살렘모교회의 붕괴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의존하게 된 초대/초기교회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토유대인들과 교류를 지속했던 교부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는 A안의 우위성을 설파했다. 종교개혁 전야에 이르기까지 A안의 우위성에 대한 인식은 서방교회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성경에서 배제한 것은 그들의 개인적 발명이나 변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전통의 맥락에서 나온 조처였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 소위 종교개혁 '진영'만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종교개혁 전야에 생존했던 프란치스코 지메네스 데 시스데로스 추기경이 편찬한 다국어성경(Complutensian Polyglot) 역시 외경에 대해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5. 오늘날 구약외경 혹은 제2정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5.1 외경 혹은 제2정경의 용어문제

20세기 성경개론학에서 말했던 소위 알렉산드리아 정경의 개념은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즉 고대 그리스도교회가 구약성경 전통을 나름의 확장된 시각을 통해 재규정하려고 노력했다는 의의는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구약외경 내지 제2정경은 유대교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고대그리스도교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구약외경을 성경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고대교회의 큰 흐름이 결국 만장일치의 결과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은 "히브리적인 것의 우위성"(히에로니무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오늘날 외경의 책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교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고,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 단계 낮은 권위와 중요성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제2정경으로 부를 수 있다. 이는 역사적, 현실적 실재에 부합할 뿐 아니라, 이 책들에서 교리적 전거나 성경적 중심을 두려 하지 않는 개신교나 정교회의 경우에는 이런 의미에서 받아들여지는 한 큰 문제 없이 통용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 개신교 근본주의 노선에서 성경 66권의 의미를 너무 경직되고 편협하게 규정한 나머지 외경을 읽거나 제2정경을 받아들여 연구하는 것 자체를 - 비록 제2열에 속할 지언정 - 또 다른 '정경'을 제정하려는 불순한 행위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신이라거나 "하나님 말씀에 무엇을 더하는" 배교적 행위로 간주하여 백안시할 경우이다. 그러나 외경 내지 제2정경은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연구하고 이해하면 될 중요한 성경배경문헌일 뿐, 백안시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

로마가톨릭에서 제2정경이라 일컬을 때는 한 단계 낮은 권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중에 덧붙여 졌음을 의미한다. 로마가톨릭, 특히 중세버전에서는 제2정경의 특정 구절들이 매우 중요한 교리적 전거와 성경적 중심에 해당된다. 그러나 최근 로마가톨릭에서는 연옥표상에 대해 전면적인 재해석을 가하고 있다. 따라서 소위 제2정경의 특정 구절들이 예전처럼 중요할는지는 의문이다. 

세계교회의 지평에서 볼 때, 제2정경이라는 용어는 개신교와 정교회, 로마가톨릭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5.2 외경의 유익

외경을 알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일어난 정신적 분위기의 변화 이유를 보다 쉽게 짐작할 수 있으므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굳이 외경으로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신교에서 외경이 교리에 반영할 수는 없으나 읽어서 유익이 된다고 가르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이것은 심지어 정교회에서도 동일하게 통용되는 외경에 대한 태도이다

외경의 특정구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특정교리를 이끌어낸 것은 로마가톨릭교회 뿐이며실상 이는 정확하고 정당한 주석에 뒷받침되지 않는 채 전통적 선입견을 시대착오적으로 비슷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특정구절에 연결시킨 결과일 뿐이다.

이점에 유의한다면 구약외경연구는 성경이해에 매우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다.

 

6. 위경은 거짓된 문서인가?


한 마디로 말해 그렇지 않다. 위경은 거짓된 성경이라는 뜻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름을 빌어서, 즉 저자가 가명으로 기록했다는 문헌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신구약중간기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중요한 문헌은 에녹 1서인데, 에녹의 이름을 빌어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은 에녹 1서를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받아들여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위경문학 자체가 읽어서는 안 될 거짓된 것은 아니다.

위경문학의 방법은 오늘날의 저작권 관념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을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고대에는 플라톤이 말했다시피 진짜 거짓말 보다는 거짓으로라도 참을 말하는 편이 낫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신구약중간기 문헌을 고대의 그리스도 교회에서 개작한 경우들도 있으며, '위디오니시우스'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중세까지도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서 유명한 위인들의 이름을 빌어쓰는 것은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서 선호되었다. 다만 발각되면 배제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구약 외경과 위경의 차이점은 위경의 경우 구약위인들의 이름을 빌어서 집필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추세를 말할 뿐이지 예외가 없지 않다. 가령 구약 외경 가운데 다수는 일종의 위경문학으로 봐야 하지만 외경으로 분류되어 있다. 아마도 위경문학 가운데 특별히 인기있었던 몇몇 문서들이 경전적 지위에 버금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위경문학 가운데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부 문헌들이다. 이 문헌들에 나타나는 영지주의는 사도적 복음의 역사적 진리에 배치되는 메시지가 담겨 있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부 영지주의 문헌들이 곧 위경 전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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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참고문헌] Lee Martin McDonald, The Biblical Canon (1995); Lee Martin McDonald and James Sanders ed., The Canon Debate (2002).

2011. 8. 13. 14:31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1936)라는 책은 종교개혁자 칼뱅을 자기 견해와 다르면 검열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히틀러와 다름없는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1) 꽤 오래되었지만 칼뱅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즐겨 입에 오르내리는 책이다.

칼뱅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이미 종교개혁 당시부터 로마가톨릭 호교가들이나 칼뱅의 정치적 적수였던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이 유포해 온 일종의 진부한 신화에 불과하다. 이런 진부한 신화의 진원지인 로마가톨릭에서조차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부정적 신화의 일방적 이미지가 걷혀진 연구들이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근대적 가톨릭문화에 익숙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에 대한 태생적 가능성이 전근대적 가톨릭문화를 토양으로 히틀러가 득세한 암울한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이라는 기후를 만나면서 열매맺게 된 그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유독 칼뱅과 종교개혁인가?

사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칼뱅과 종교개혁을 겨냥해 히틀러의 전제정치와 같다고 비난한 유일한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은 아니었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에리히 프롬 역시 루터와 칼뱅을 히틀러에 견준 바 있다. 다시 말해, 당대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들에게 칼뱅과 종교개혁교회가 히틀러와 다름없다고 규탄할 건덕지가 뭔가 있었던 게다. 그게 뭘까?

칼뱅과 종교개혁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의 규탄만 들으면 정말 뭔가 칼뱅과 종교개혁 자체에 히틀러스러운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정짓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규탄은 중상과 뜬소문과 오독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었고, 번짓수도 합당치 못했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내적 동기가 그들의 규탄을 규정짓고 있는 측면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이 칼뱅과 종교개혁, 나아가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그들 자신의 내적 동기로서 히틀러에 대한 당대 독일개신교의 ('독일 그리스도인' Die Deutsche Christen 이라는 조직을 매개로 한) 어용적 행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소통속도의 한계로 말미암아 농민들에 대해 잔인한 무력진압을 독려한 꼴이 되어 버렸던 마르틴 루터와 달리, 쟝 칼뱅가 '박해'했던 적수는 세르베투스(*2)나 카스텔리오 같은 당대의 (나름 저명한) 소수파 인문주의 지식인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칼뱅은 이들 모두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자들의 운명만 화형이나 추방이었던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칼뱅이 사역한 처음 4년 동안 58명이 사형당했고, 76명이 추방당했으며, 처음 5년 동안 35명이 화형당했고, 13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식의 숫자는 전시상황이나 다름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힌다.(*3) 따라서 독일 그리스도인 교단의 준동에 따라 히틀러의 어용종교 노릇을 한 독일개신교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치를 떨었던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에게 칼뱅이 루터보다 먹음직스런 떡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분노와 환멸의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사실 유럽의 개신교인들조차 독일개신교회가 저 히틀러의 악마적 어용종교 노릇을 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와 마르틴 니묄러 등이 바르멘 신학선언을 발표하고, 독일고백교단이 세워졌으며, 이 교단의 주요 지도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암살기도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아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개신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루터와 칼뱅에게 분노와 증오를 전이한 유럽개신교인들도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목사였던 쟝 쇼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츠바이크를 부추겨 칼뱅에 악마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카스텔리오를 미화하는 전기를 쓰도록 독려했다.

쟝 쇼레와 같은 정신적 동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종교개혁자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는 엄정한 사태 자체의 사실관계에 부합되는지 여부에 비추어 가늠할 필요가 있다. 내적 동기가 앞선 나머지 사실관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칼뱅에 대한 비난 자체는 사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츠바이크 자신의 내적 동기가 너무 앞선 나머지 엄정한 사실관계를 가리워서, 그의 강렬한 규탄에 진부한 선입견의 무비판적 추종으로서의 악(한나 아렌트)이라는 작가 자신이 목도한 시대적 악의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히틀러와 전체주의, 그리고 그러한 체재가 배제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호소라는 내적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 검열과 협박, 폭력을 들이대는 행태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요즘 현 정권과 대형교회, 개신교계, 심지어 가톨릭 쪽에서까지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건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어둡고 답답하게 한다. 특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우리 한국개신교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나름대로 그린 '사악한 교조주의자 칼뱅'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4)


[덧붙임]
*1: 유명세가 덜하긴 하지만 이보다 한 세대쯤 앞서서 영국의 역사가 로드 액턴도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역사화했다. 로드 액턴 역시 열렬한 가톨릭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처음 역사화한 장본인은 아니었다.

*2: 세르베투스를 '무지막지한 개신교 교조주의자' 칼뱅에게 '부당하게' 희생당한 '인문학자'로 보는 시각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에 있어서 세르베투스를 부당한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칼뱅의 소위 '잔혹함'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애당초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한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의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었다. 방종파도 세르베투스 문제를 기화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조차 세르베투스에게서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베투스는 특히나 기존신학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지만 딱히 혁신적이거나 참신한 구석이 없는 황당하고 괴상한 이론들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을 즐겨한 일종의 극단적인 '악플러' 같은 인물로서, 당시 유럽 어디를 가나 가톨릭권과 프로테스탄트권 공히 이단자로 낙인찍혀서 당시 사회통념상 어떤 식으로 처형되느냐만 남아 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마지막 관용으로서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한 참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칼뱅이 아니라 가깝게는 제네바 시의회요 크게는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한 유럽사회의 법적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세르베투스는 화형으로 사형집행된 것이다. 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던 제네바 시의회 방종파 세력이 세르베투스에게 극형을 내렸을까? 방종파 세력에게도 당대의 법적 통념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도덕적 명분을 시위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칼뱅이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칼뱅과 제네바 시의회를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통념에 따라 단순하게 동일시한 세속화한 후세사람들이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3: 유시민씨가 최근(2013년) 출간한 그의 책에서 칼뱅을 전체주의자요 자신의 신학이론에 오류가 없다고 믿었고 공포정치를 감행했던 광신자라고 평했던 것 같다. 유시민씨의 발언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받아쓰기한 카스텔리오의 중상모략을 칼뱅의 학살설의 사실관계 증언으로 받아들인 케이스가 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감스럽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인으로서 책을 통해 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마 유시민씨는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기에 충분히 정당하고, 반면 칼뱅이나 한국개신교가 허술하고 만만하면서도 부조리하게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어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발언은 칼뱅에 대한 왜곡의 도가 지나치다. 본인은 유시민씨에 관해 정치인으로서는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 아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말조심을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잘 모르는 문제에 끼어들어 말을 함부로 하면서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처사는 적어도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면 실망스러운 처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