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1. 00:49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1. 5. 14. 12:36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한국교회에는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 등을 자기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신학도들이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하면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곤 한다. 따라서 소위 개혁주의신학에 대해 개념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개혁주의신학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범위의 뜻을 지닌 표현이다.

1. 로마가톨릭신학과 대비되는 의미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종교개혁 원리를 받아들이는 개신교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에(F L Cross &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formed Churches' 항목) 이 경우 개신교신학 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1.1 개혁신학의 영향권: 아울러 아래 2나 3의 개혁교회전통의 영향을 받아 그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개신교의 교파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루터교신학과 대비되는 칼뱅과 스위스종교개혁전통: 이 표현을 쓸 권리가 있는 교회전통은 해당 종교개혁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에서부터 우리나라 장로교회에 이르는 개혁교회 전통 일체이다. 대체로 다른 신학전통들과 마찬가지로 특정전통에 대한 배타적 권리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현대성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공교회적 신학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칼뱅 이후 개신교전통에서 슐라이어마허와 칼 바르트, 몰트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거인들을 배출해왔다. 이런 의미의 개혁신학에 관한 논의의 예로는 루카스 피셔가 편집한 The Reformed Family Worldwide나 미하엘 벨커가 편집자로 참여한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에서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3의 그룹과도 함께 대화하고자 한다.(*1)

3.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의 전통: 종교개혁자 칼뱅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원조보수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이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2의 의미에서 '개혁신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가짜네, 개혁신학이 아니네 공격하는 일이 잦다. (*1)

이들의 공격패턴은 대체로 자기들이 신봉하는 아무개 신학자를 비롯한 '(17세기) 개혁신학'(과 그 후예들의 신학)에서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개는 감히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 개혁교회 출신이라도 '개혁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신학'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베자와 투레틴, 영국의 청교도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17세기 개혁정통주의신학은 20세기초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까지 이어져 왔고, 미국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따르는 루이스 벌코프와 반틸, 워필드, 찰스 핫지, 존 머레이 등의 구프린스턴학파와 그 후예들에게서 존중되어 왔다.

이 가운데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정통주의는 실은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세계교회에 통해왔음에도 '진짜 개혁신학'을 한다는 이들이 언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미계 장로교회전통과 거기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통을 통해 소위 '원조보수 개혁주의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실체가 바로 이 그룹이다. 폴 틸리히가 정의한 그대로, 현대의 상황을 신학화하기를 거부하고 일체를 정죄하면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고정되어 되풀이하고 흉내내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2)

근본주의 신학은 분명 신실한 최선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통', '원조보수'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 외에 다른 생각을 진리의 적으로 돌리는 호전성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자연히 교리주의와 교회분열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나마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탁월하고 차원높은 개념적 세련성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 놓쳐 버리면 자기중심적인 분파주의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롯한 온갖 착잡한 기형적 현상까지 배태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의 의미에서 개혁주의 원조보수를 별 반성없이 계속 부르짖는 분들은 내가 근본주의자라는 걸 알아주시오 자랑스레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개혁주의를 들먹이면서 개혁주의에 근본주의의 이미지까지 착색시킴으로써 다른 개혁신학전통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는 근본주의자라고 아예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켜 당당히 나서시라고 권해드린다.

[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
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2010. 10. 3. 17:15

외계생명체와 기독교신앙

개인적으로 SF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팬이라 외계행성의 발견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눈여겨 보면서 광활한 우주의 신비에 새삼 감탄하곤 한다.

요 며칠새 새로 발견된 글리제581g 행성 보도는 특히 눈에 띈다. 이 행성은 약 20광년 떨어진 적색왜성 글리제581 둘레를 도는 골디락스 행성, 즉 차지도 덥지도 않은 지구형 행성이다. 질량은 지구의 3-4배 정도이고, 밤낮이 없어서 밤낮의 경계면이 고정되어 있는데, 이 곳의 기후가 지구 극지방 정도여서 생명체가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고 한다.

UN에서 외계문명이 접촉해 왔을 경우 공식적으로 영접하는 업부를 맡는 대사를 임명했다는 소식도 나왔었다. 다 '뻥'이라는 UN의 반박기사가 바로 나오기도 했지만, 외계생명의 발견 내지 외계문명의 접촉에 대해 기대감이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다 보니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없는 게 아닌가 라는 오래된 물음이 떠오르는 것 같다. 심지어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기독교의 신의 부재로 연결짓는 시각을 기사에서 공공연히 표현한 경우조차 볼 수 있다.(*1)

이런 대중의 호기심은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은 첫째,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구에만 생명을 창조했다고 기록했을 거라는 짐작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런 짐작은 별 근거가 없다. 창세기 1장은 지구를 배경으로 한 기록이다. 창조과학회에서 하는 식으로 문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적시하자면 창세기 1장에도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고 쓰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의 생명과 더불어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지구의 생명'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온 우주,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되풀이하여 기록한다.

아울러, 성경에는 외계인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에서 외계인을 기록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기괴한 이미지와 상징들이 많이 나타난다. 텍스트의 맥락과 배경을 주의깊게 고려하는 합당한 해석학적 과정을 밟아 성경을 이해한다면 이런 오해는 하지 않게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최소한 우주 안에서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미 표현되어 왔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외계생명체가 발견되면 거기에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야웨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신의 부재를 상상하게 된다.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야웨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모를 가능성은 물론 매우 높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신약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알려진 역사적 칭호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 또는 '여호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해당 출애굽기 본문을 히브리성경 원문으로 보면 이것은 원래 이름을 가리키는 특수명사라기 보다는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그다(
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뜻을 새길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이다. 따라서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이런 이름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자신의 맥락에서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길이 추구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 양심과 평화, 삶과 죽음 같은 문제는 수학이나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인간만의 것일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죄 문제 역시 인간만의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무수한 종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문제와 씨름하는 흔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2)

그렇다면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들과, 거기에 더하여 우주의 수많은 종교들이 '백가쟁명'하는 상황 자체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일까?

사실 굳이 우주로 스케일을 넓힐 것까지도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과 수많은 신들은 유일신교가 얘기하는 유일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구해 보면 된다. 유일신교는 여기에 따로, 저기에 따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다신교의 믿음을 비판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의 힘으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 이를테면 글리제581와 태양계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한 분의 초월적인 인격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의 정의부터가 종교의 백가쟁명 운운하는 것이 번지수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셋째, 외계생명의 존재에서 신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창세기1장은 근본주의가 강변하는 것처럼 단순한 역사적, 자연과학적 보도로 읽혀져야 하는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 기록 당시 고대근동의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당대 바빌로니아 과학의 세계상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기록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과학의 세계상에 따르면 만물은 신들이고, 군주는 신들의 아들이며, 인간은 신의 아들인 군주에게 복종해야 할 노예로 창조되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기자는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며, 군주가 아닌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창세기 기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과학적 세계상을 얼마든지 받아들여 비판적으로 소화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로 똑같은 알맹이의 창조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고백해야 한다. 인간은 오늘날 지배적인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그저 어쩌다가 생겨난 우주의 먼지 정도인 존재가 아니다.

* 9월 말경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덧붙임]
- 독일 슈피겔지에서 글리제581g에 살고 있을 생명체의 모습을 추정한 논문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는 보도가 있다. 이 기사는 2010년10월4일자 40호에 실렸는데 아쉽게도 아직 유료pdf기사로만 올라와있다. 기사를 찾으면서 2009년8월16일자 기사에서 호주의 한 과학잡지가 글리제581d의 (살고 있을지도 모를) 외계문명에 보낼 이메일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읽었다. 십중팔구 오버하는 거겠지만 재미는 있어 보인다. 연구자들이나 매니아층에선 이미 상당정도 이 행성계에 대한 관심이 진척되어 있었나보다. 
- 12월2일2시에 나사에서 외계생명체의 생존에 관한 중대발표를 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유독 국내에서 엄청 들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어김없이 기독교가 뭔가 곤란해지지 않을까 싶어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시는 분들이 많이 보였다. 나사의 발표는 비소를 신진대사의 기본으로 하는 수퍼미생물을 지구에서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문외한으로서 이 발견에 우주생물학 연구에 있어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성이 있다는 것 정도만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인을 구성요소로 하는 지구생명체만 기준으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후보군을 선정했는데, 이제부터는 최소한 비소 역시 행성후보군 선정에 고려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비소뿐이겠는가. 일찌기 브루노가 갈파했다시피 우주에 사람이 생각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생명의 파노라마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지 말란 법이 없다. 외계생명체연구가 언젠가는 우주에 펼쳐지는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 예컨대, 성경에 따르면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천사의 창조과정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다. 물론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의 한두 구절을 천사장 루시퍼의 창조와 타락 장면으로 보는 주석전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 문맥상 맞지 않는다. 천사론이 유행중이던 신구약 중간기 유대교의 주석전통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미 종교개혁자 칼뱅도 이 주석전통을 거절했던 바 있다. 근본주의에서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전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 보는 것은 꽤 흥미로울 듯 하다.
*2. 독일계 미국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의 역작 Systematic Theology 제2권에서 같은 생각을 종교철학적 범주로 표현했던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