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파이퍼 John Piper'에 해당되는 글 5건
- 2015.06.29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부쳐
- 2013.07.05 민간사찰의 일상화 시대를 경계하라
- 2011.07.15 관상기도에 대한 김남준 목사의 견해 12
- 2011.07.11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 2011.01.31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부쳐
소위 동성애 문제에 대해 요즘 인터넷에서 논쟁이 진행중인 걸로 알고 있다.
딱히 여기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부질없는 댓글놀이나 하고 있을 만큼 힘이 남아돌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 이미 본인의 대략적인 생각을 밝혀 둔 바도 있다.
다만,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은 우리나라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터이므로 몇 마디 적어둔다.
몇 마디라도 해두지 않으면 할 말 않고 잠잠히 있느라 불편한 속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1. 소수자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의 언명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꼭 성적 소수자들의 생각에 반드시 동의하진 않는다.
특히 소위 퀴어신학 쪽의 성경해석은 기본발상부터가 궤변스러워 탐구욕을 확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몰트만이 언젠가 말했듯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짧다는 게 그들에게 구원 가능성이 없다는 증거가 되나?
구원 가능성도 구원 가능성이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도록 숨통은 틔워 주어야지 않겠나?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다 몰아내 음지에 가둬 놓고 죄중에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건가?
그런 게 과연 정의이고 공의인가?
병든 사람, 장애인,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온갖 소수자들을 율법서를 들이대며 찍어내 버려야 할까?
적어도 예수님 제자이길 원한다면 그럴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은 왜 그런 소수자들의 처지에도 들지 못할까?
근본주의자들이여,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늘의 심판을 벌써 다 내렸나?
2. 만만한 동성애자들을 걸고 넘어지는 것은 비겁하다.
한국교회의 온갖 추문들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으라"를 외치면서 왜 애꿎은 동성애자들만 괴롭히나?
그야 당신들 보기에 만만해서지.
결국 당신들의 선전선동은 애꿎은 희생양 삼아 자기결집하려는 얄팍하고 얕은 술수에 불과하다.
당신들이 교회개혁에 그만큼 목숨걸고 나섰다면 진정성 만큼은 약간 인정해 줬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진정성조차 없고, 그냥 개독뻘짓이다.
당신들이 개독뻘짓하는 딱 그만큼 당신들은 예수님 욕 먹이고 있는 거다.
3. 침소봉대와 적반하장의 거짓 영성 좀 집어치우라
본 블로그의 유입검색어 중 줄곧 3위 안에 드는 낱말이 관상기도다.
근데 관상기도에 "이단"이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붙는다.
관상기도가 이단이라는 거지.
심지어 존 파이퍼도 관상기도를 배제하지 않았다,
존 파이퍼가 맛이 간 프리메이슨이거나 배교한 게 아니라면 재고해 보든지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존 파이퍼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얼마나 광신의 도가 심한지 말 다 했지.
오늘도 말씀묵상 큐티한다고 난리법석이면서 관상기도를 흔들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소위 큐티라는 게 렉시오 디비나라는 고대의 관상기도법을 약간 고친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어불성설을 거짓말과 선전선동을 동원해서라도 관철시키겠다는 찬란한 똥고집들이다.
이미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며 교황 프란체스코 방한 때 아주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셨지?
똥고집을 똥고집이라고 하면 핍박이고, 협잡을 협잡이라고 하면 당신들의 고귀한 진리에 대한 박해이고?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오늘도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낚여서 들떠 있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딴 음모론의 근거란 부풀려진 헛소문들에 불과하다.
헛소문의 진앙지는 물론 근본주의자들 자신이고.
당신은 근본주의자이지만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낚이지 않았다고?
잘 하셨다.
근데 동성애 음모론에는 낚이셨네?
프리메이슨 음모론하고 동성애 음모론하고 얼마나 다를 성 싶은가?
이리저리 낚이면서 그게 정말인지 확인은 해 보셨나?
제발 좀.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근본주의자들이여, 언제 이 말씀이 폐기된 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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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사찰의 일상화 시대를 경계하라
본 블로그의 검색유입어에서 줄곧 상위에 올라 있는 낱말 가운데 하나가 "베리칩"이다. 베리칩 음모론자들이 설레여 하는 꿈은 그들의 영적 아비인 1992년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그것 만큼이나 터무니 없다.
그러나 본인이 그들의 "비전" 가운데 나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대목은 예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정보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아마겟돈이 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소위 "아마겟돈"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광신적 시나리오보다는 정보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묘사된 빅브라더의 세상에 가까울 것이다.(*1)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거의 현실로 다가오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근 대한민국의 저울추가 매우 심각한 국면으로 기울고 있다. 국정원의 개입에 의한 부정선거 사실의 폭로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에 모여 절규하고 있지만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어차피 그들이 백성의 절반 이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모든 법과 선전수단과 자본을 쥐고 있는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당파적 목적과 이익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비판세력을 빨갱이 또는 종북좌파라는 얼토당토 않은 딱지를 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프레임으로 시민들의 생명과 권리와 재산을 극히 안정적으로 수탈하여 왔다. 그것은 어쩌면 광장에서 시민 몇 명이 모여 만세삼창 하는 것 정도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수준을 오래 전에 넘어선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은 그들의 죄상에 비추어 전면해체 내지 전면개혁이 필요함에도, 현 정권은 오히려 인터넷 사찰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사참조)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사람들이 지금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다.
관상기도가 이단이라고 누군가 빨간 딱지를 붙이면 관상기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돌팔매질을 해대고 있다. 최일도 목사나 이동원 목사, 혹은 존 파이퍼 목사나 릭 워렌 목사, 제 아무리 저명한 지도자들이라도 일단 관상기도를 입에 올렸다면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들은 이미 이단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누군가 빨간 딱지를 붙이면 세계교회협의회가 어떤 기관인지도 모르면서 돌팔매질을 해댄다. 원래 세계교회협의회에 반대했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A)조차 세계교회협의회가 천명한 노선을 사실상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 이들의 극렬한 입장은 저 칼 맥킨타이어의 악명높은 국제기독교연맹(ICCC)의 철지난 분리주의 결사에나 어울린다는 사실, 종교혼합주의가 정말 뭔지, 종교간 대화와 협력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실은 자신들이 별로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고, 다만 악의적으로 왜곡된 피상적인 몇 가지 풍문에 분개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되지 않는다. 이들 머릿속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미 적그리스도의 졸개들로 낙찰되어 있기 때문이다!(*2)
도대체 애먼 사람을 프리메이슨 = 사탄의 졸개로 빨간 딱지를 붙여 명예살인을 해대는 몰지각한 음모론자들이나 인민재판으로 학살을 자행한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이 무엇이 다른가? 이들중 어떤 이들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몰지각함을 비웃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이렇게 엉뚱한 데 힘을 낭비하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정작 세상에 대한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이 사람들아!) "영적 분별력"(로마서 12:1~2)을 잃어 버리고 반공근본주의에 기대여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에 기꺼이 동참할 뿐 아니라 앞장서기까지 하고 있다. 저들이 만들어내는 아마겟돈의 예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로나 한국교회로나 지금이 중요한 기로에 있다. 한국사회가, 시민들이 기득권자들의 "아마겟돈 프로젝트"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짐승정권"의 공포정치가 행해지는 "대환란"이 도래할 것이다. 그 기간이 "7년"이 될는지, 혹은 70년이나 그 이상의 세월이 될지, 아니 그 정도 세월이나 주어지게 될지, "그 때와 그 날은 아무도 모르나니 ... 아버지만 아신다." 그 다음에는? 분명한 것은 이런 불의와 부패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불의와 부패에 올인한 사회는 반드시 망한다. 한국교회는? 이대로 개념 없이 넋놓고 있으면 불의와 부패에 올인한 세상에 박수해 주면서 축복을 선언한 수치스러운 거짓예언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한국사회에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다. 부디 이 희망의 빛이 무사히 살아있기를 바라고, 한국교회가 일어나 한반도에 희망의 빛을 밝히 비추는 소임을 감당하기를. 부디 이 모든 묵시문학적 시나리오가 그저 한 때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아멘.
[덧붙임]
*1: 이러면 조지 오웰이 프리메이슨이었다고 우기는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꼭 있다. 어휴...못말린다 정말...
*2: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정병준님의 글이 적절한 반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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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에 대한 김남준 목사의 견해
특히 첫 번째 발제자 김남준 목사의 발언이 눈에 띈다. 발언 전문을 보지 못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기사에 나온 대로라면 그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으로 봤을 때 관상기도는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이 주장에 따르면, 김남준 목사는 존 파이퍼를 포함하여 관상기도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불건전하고 그릇된 신학적 판단'을 저질렀다고 에둘러서 말한 셈이 된다. 나아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치는 미국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가 '불건전하고 그릇된 신학적 판단'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한 셈이 된다.(*1)
도대체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의 기준이 뭔가? 김남준 목사 자신의 판단인가? 혹은 예장합동 신학부의 판단인가? 혹은 그들에게 암묵적 자기검열을 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넣고 있는 예장합동의 교권세력의 의중인가? 혹은 '그들'이 이해하고 파악한 한계 안에서의 '오직 성경'인가? 자신(들)과 판단이 다르면 불건전하고 그릇된 판단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딱한 독선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의 내용이라는 것이, 겨우 '관상기도가 이교적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로 흘렀거나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식이다. 미안하지만 바울과 요한의 '성경적 신비주의'라는 것도 있으며,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이교주의'가 구원사 안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 두고자 한다.
'누가 이론을 제기할지라도 관상기도는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김남준 목사의 주장이 자기억견의 일방적인 선포와 무엇이 다른가? '누가 이론을 제기할지라도'라니, 이 얼마나 막무가내식 사고방식인가? 관상기도를 한다고 곧 종교다원주의가 된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개혁교회가 복음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 원천으로 삼고 있는 서방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상기도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연 종교다원주의로 흘렀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사에서도 거의 마니교적 이원론에 방불한 배타적 교회중심구원론의 대변자라는 것이 엄연한 사실관계다.
관상기도가 또다른 의미에서의 정신적 번영주의라느니, 자아 중심의 실용적 사고니 하는 김남준 목사의 비판은 그가 얼마나 관상기도를 모르고 있는지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관상기도는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뒤따르는 기도로서, 정신적 번영주의나 자아 중심성과 극명하게 대치되기 때문이다.
김남준 목사말고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은 어차피 비슷비슷하니만큼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관상기도를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복음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이 근본주의자들의 독선적인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심히 의문일 따름이다. 자신이 이해하고 파악한 범위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가두는 행위야말로 가장 반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자기중심적 선민의식과 협소한 자신들의 계시이해로 동료그리스도인들과 이웃종교에 섣부른 총질을 해대는 행태를 빼다박았고, 가깝게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동생으로서 부족함 없는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 합동교단이 추구하는 신학의 형님뻘쯤 되는 미국 웨스트민스턴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 마이클 호튼이 펴낸 The Christian Faith (2011)를 훑어 보고 있다.(*2) 루이스 벌코프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신학의 흐름에 대해 상당한 구색을 갖추면서도 비교적 덜 무지막지한 논조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개혁 정통주의적 견해를 재확인하고자 하기 때문에 조만간 이른바 원조보수개혁주의를 외치는 노선에서 즐겨 인용될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은 1000쪽 정도의 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논점에 대해선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얼버무리곤 하는 게 감지된다. 더욱이 유감스러운 것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신학자들의 견해를 학문적 서술스타일에 맞지 않게 비꼬고 희화화해 버리곤 한다. 이를테면, 호튼은 몰트만이 기존 신학에서 비성경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자기 신학을 펼쳤다고 기술하면서, 곧바로 그 신학의 배경은 블로흐와 헤겔의 철학, 유대교 카발라사상 따위라고 쓴다. 그러니까, 몰트만의 생각은 비성경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에둘러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17세기 개혁정통주의를 따르는 자기 견해가 '성경적'이라면서 몰트만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몰트만이 끌어오는 모든 성경적 전거와 문제의식은 싹 무시하고 내가 읽은 성경만이 진짜 성경이라는 식의 그의 논조에는 스스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척 하지만 비성경적인 오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호튼은 그와 같은 그림자에 정작 중요한 논점이 가리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는 책의 부제를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했지만, 순례자의 신학에 마땅한 겸손과 사려깊음, 성경적 관용과 공교회의 연합정신에 관해서는 자신이 권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충분히 고려해 봤는지 의문스럽다.
김남준 목사와 예장합동 신학부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문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안은 다르지만 저변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국의 동생들은 아직 미국의 형님에게서 자기 확신을 (그나마) 덜 노골적이고 덜 일방적으로, 덜 전투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미국의 형님이나 한국의 동생이나 협소한 자기 확신이 비성경적인 오만으로 진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덧붙임]
*1: 미국의 건전한 복음주의 계통 신학교 대부분이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의 '나그네'님 글을 참고하라.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하고 가르친다. 렉시오 디비나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주요한 채널이며, 특히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동원 목사의 경우 관상기도는 주로 렉시오 디비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그네님은 실질적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관상기도를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 '관상'의 상태에서 기도했느냐와는 별개로 - 사실상 관상기도이다. 앞서 포스팅한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의 두 번째 덧붙임 글에서 밝힌 필자의 나그네님에 대한 코멘트도 참고하라.
*2: 이 글을 쓸 당시 마이클 호튼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조직신학 교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분은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의 조직신학 교수이다. 영문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분교로 출발했다가 독립한 또다른 학교이다. 그러나 신학노선은 분명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보수개혁신학노선을 이어 받았다. (20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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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가? 근본주의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의 보수개혁주의노선의 저명한 지도적 목회자 존 파이퍼 목사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언젠가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두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발언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여기에 제시된 생각들을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파이퍼 목사는 영어성경으로부터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인용된 성경은 파이퍼 목사의 의미를 살려 영어성경으로부터 옮겼으며, 굵은 글씨는 모두 글을 옮긴 필자의 강조이다.
“[문] 개혁주의와 청교도전통에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소책자 「비전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기도들이 우리 예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비전의 골짜기」는 청교도들의 기도집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기도들을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범주에 두고 싶습니다. 그 기도들은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일종의 운율 같은 것이 있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공동체적 셋팅에서 쓸 수 있도록 아마도 아주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기도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이 성경적 실재라고 답변드립니다.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명상하라"(시편 1편) 제 생각에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 이게 뭔가요? 이것은 육체적인 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조명받아 여러분의 소명을 알게 되기를!"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을 때 언급된 바로 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봄, 또는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멈춰서 들여다 보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으로 실재에 이르러 여러분이 영적 실재를 파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고 참되고 인격적이고 따스하고 강력한 일종의 기도를 일으킵니다. (* 옮긴이주: 파이퍼 목사가 일부러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채널인 렉시오 디비나의 네 계기, 즉 읽기(lectio), 명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가 모두 나타난다. 여러분도 꼭 렉시오 디비나나 관상기도라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 주의를 잡아 끌면서 읽기를 멈추고 깊은 묵상을 하면서 성령의 의도를 깨닫고 그 다음에 나올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확인해 가면서 이에 따라 기도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히에로니무스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는 성경읽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관하여 이연학,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in: 『활천』 2007.7:40-44을 참조할 것.)
그래서 제 답변은 제가 방금 정의한 대로의 관상기도와 명상의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 대해 "예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고, 그 사귐에 있어서 매우 신비적인 이런 종류의 깊이와 이런 종류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결을 발견하려면 주로 신비적인 가톨릭전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 수업들에 대해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레벨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 레벨에서 영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관상하며, 놀라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상이 일어난 이들의 훌륭한 대변자들을 찾기 위해 나쁜 신학, 즉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나쁜 신학을 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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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파이퍼 목사의 견해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논점이 드러난다.
-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서도 관상기도는 존재해 왔다.
- 가톨릭 전통이 아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하다.(*1)
파이퍼 목사는 가톨릭 전통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정교회의 더 깊고 풍부한 영성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관상기도에 관한 한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인 나쁜 신학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보수개혁주의적 시각에서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일단 '나쁜 신학'으로 치부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영성전통을 배제하고 배타함으로써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복음주의, 개혁주의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냐 아니냐, 혹은 복음주의냐 아니냐, 혹은 개신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존 파이퍼 목사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그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도 아니고, 오로지 통성기도와 큐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는 나머지 통성기도와 큐티 이외에도 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이라는 무지막지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답변을 본 다음에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 존 파이퍼 목사는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자다. 또는 관상기도는 성경에 없는데 존 파이퍼 목사가 가톨릭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존 파이퍼 목사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 등등.
아니면
- 적어도 관상기도의 성경적 실재를 인정하고 계발할 필요가 있다.(*3)
*1: 이것은 단지 파이퍼 목사만의 개인적인 견해만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만 있는 '이방풍습'이 아니라, 칼뱅과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들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 개혁교회 자신의 전통이다. 다만 한국교회가 미국의 대부흥운동 전통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배정웅, 「개혁주의 전통에 나타난 관상기도」 in: 『새들녘』 2010.11:3-5쪽을 참고할 것.) 이동원 목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목회리더십연구소를 통해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칼럼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복음주의적인 관상기도'라는 화두를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소위 큐티 역시 성경말씀에 따라 하루를 조직하는 수도원주의의 잔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Christian Spirituality :129) 큐티 외엔 말씀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동굴의 우상'(플라톤)이다.
*3: 좀더 인터넷을 뒤져 보니 지난 2010년 말쯤에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통 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하셨다고 자신을 밝힌 '나그네'라는 분이 이 게시판을 장악한 근본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댓글에서 이동원 목사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받은 답신을 이동원 목사님에게 추후 동의를 구하고서 공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동원 목사의 메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그네님의 발제글과 댓글에 나타나는 관상기도 혹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변호도 깊은 학문적 훈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보기엔 나그네님의 관상기도 개념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는 점이나 '비움'에서 오로지 '이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동원 목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복음주의의 협소한 교리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그네님은 미국교계에 관해 우리가 잘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관계를 전해준다. 즉, 미국에서 95%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교들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관상기도를 비난하는 것은 5%의 근본주의 계통 신학교라는 얘기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관상기도를 종교다원주의 이단으로 단죄해겠다고 기세등등해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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