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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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6. 19:40

그들의 정의

현정부 들어 정권친화적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이 군인사가 공정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총장을 꼬투리잡아 끌어내리고 영남출신이 요직을 독식했는데 공정했단다.

헛웃음이 나온다. 날치기예산통과로 영포라인 예산은 실컷 챙기면서 '이것이 정의'라고 외치고, 영유아예방접종, 결식아동급식 예산은 전액삭감, 노동자들의 임금하락폭 OECD국가 중 1위, 인권이 70년대로 후퇴한 터라 인권위원장이 주는 상도 수상자들이 줄줄이 거부하고, 무사국무총리실 등 다양한 기관에서 경쟁적으로 민간인사찰을 공공연히 저지르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 뭐가 대체 그렇게 공정했을까. 백성의 고혈을 짜내 당신들끼리 사이좋게 나눠먹는 것이 공정인가.

500년을 지탱해오던 조선은 소수특권집단의 전횡 때문에 사회의 창조적 역량이 질식되어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망한 것은 일본이 사악하고 악랄한 술수로 강제병탄시켰기 때문인 것만도 아니라, 조선사회에 참다운 공평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나라 이 땅에 과연 온전한 공평과 정의가 있는가. 온전한 인권과 자유가 있는가.
불쌍하고 딱한 우리 형제 북한의 처참한 상황과 견주면서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짓일랑 당장 멈춰야 한다. 그런 자기기만이 이 땅에 파멸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거대하고 막강한 이웃나라들에 둘러싸여 전범국이 아니면서도 국토가 두동강이 난 채 반 세기를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작은 분단국가다.
또다시 소수특권층의 전횡이 저질러져서는 이 땅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역사 앞에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살라질 것이다.

소수특권층의 전횡에 대해 시민사회의 강력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뛰어난 공평과 정의, 탁월한 인권과 자유가 이 땅에 이룩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뭇백성의 비상한 창조적 역량이 꽃피울 수 있다.
공평과 정의, 인권과 자유의 힘이 우리 사회에 가득히 흘러 넘칠 때 비로소 이웃나라들의 버거운 존재에도 불구하고 두동강난 한반도가 하나로 힘차게 이어질 수 있다.


2010. 12. 13. 15:44

천주교 원로사제들의 성명에 존경과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최근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사대강사업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정권, 친기득권적 행보를 보이면서 김수환 추기경을 그리워하던 한국천주교 안팎의 많은 사람 가슴이 더욱 휑하고 추웠다. 

그나마 정의구현사제단의 지속적이고 올곧은 정권비판이 있어서 위안이 됐지만, 이 역시 천주교 일부 고위층의 억압과 견제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만난 상태였다.

이 나라의 공평과 정의가 심각한 위협을 맞이하고 있는 이 암울한 시국에 원로사제들이 추기경에게 용기있게 용퇴권고를 한데 대해 아낌없는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개신교 목회자들도 조국의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담긴 성명을 내주길 촉구한다.

특히 개신교회가 역사의 현실에 동참하는 데 장애물 노릇을 하고 있는 정교분리원리라는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해 재고하기를 요구한다.

정교분리원리는 어용교회가 실제로는 불의한 정권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역하면서도 표면적 무관심과 몰가치한 중립으로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 왔다. 좌파빨갱이정치목사를 힐난하는 바로 그들이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반동적 극우주의 행태를 보이면서 이를 신앙과 민주주의의 미명으로 포장해 왔다. 적어도 주기도문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단지 교회나 영적 세계만이 아니라 피조세계와 역사의 현실에도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금과 같이 정교분리원리가 악용되어 온 현실에 대한 정당하고 겸허한 신학적 비판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2010. 11. 27. 01:16

한반도전쟁예언과 한반도의 운명

북한에 원조를 주거나 대화와 협상을 하는 것이 이적행위라고 굳게 믿고, 북한의 붕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생각보다 적지 않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북한을 붕괴시키면 한반도 북부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느냐고 꼭 물어본다.

적어도 지난 몇해동안은 북한붕괴론의 귀결을 분명히 깨닫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었다. 북한이 미워서 붕괴를 외치긴 하는데 막상 그 다음을 생각하니 그곳이 대한민국의 영토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캥겼던 걸게다. 

그런데 현 정권 들어서 차라리 꼴보기 싫은 북한을 중국에 던져주자는 답변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참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 정권은 김대중, 노무현 시대의 남북관계에 대한 공헌을 계승, 발전시키기 보다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이루는 사람들의 뜻대로 송두리째 부정하고 북한을 백안시하는 강경노선을 택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이 10년 동안 차근차근 발전시켜왔던 경제적 영향력과 국제적 주도권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모두 잃어 버렸다. 작금의 연평도 사태는 현 정권의 강경노선이 시작된 때부터, 북한에 대한 주도권을 급속도로 잃어 버리면서부터 이미 어떤 식으로든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대체 어떻게 할 건가? 사실 우리 쪽이 들고 있는 패가 별로 없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유라시아철도건설 모두 물 건너가 버렸고, 남북정상회담은 10년간 일군 성과를 일언지하에 가볍게 부정해 버린 터라 더 말할 것도 없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이제 대한민국은 또다시 주변열강들의 파워게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 문제에 있어서도 대한민국의 지분은 거의 주장하기 어렵게 됐다. 


바로 옆의 그림이 미 국방부가 구상한 북한붕괴시 분할시나리오라고 한다. 중국이 그린 지도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혈맹이라는 미국이 그린 지도라는데, 대한민국의 지분이 없고 중국의 지분이 가장 크다. 

대한민국 사회가 증오심과 분노를 차분히 다스리면서 남북문제를 대처해나갔다면 미 국방부든 중국 지도부든 감히 이런 지도를 그리고 있지 못하지 않았을까? 증오심과 분노에 눈이 멀어 북한을 백안시한 결과가 이런 수모와 어두운 전망이다.

특별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묻는다. 북한이 붕괴하기를 피를 토하듯 기도하는 목사 장로 집사 청년들이여, 당신들 제정신인가? 이 지도를 똑똑히 보라! 이것이 당신들이 바라는 지도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보여주신 비전인가? 당신들은 북한땅을 수복하려는 꿈이 없는가? 

언젠가 한반도에 대한 예언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밝혔다시피, 그 예언 자체는 하등 무서울 것이 없다. 진정 무서운 것은 이 땅의 불의와 더러움이다. 이렇게 갈갈이 찢겨져 나간 한반도를 보면서도 자기들의 증오와 분노를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려 드는 사람들의 모질고 독한 완악함이 진정 무섭다. 그 독한 죄성으로 점철된 이 땅의 불의와 부조리가 진정 두렵다.

성경의 예언은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니다.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 도성이 이 예언을 듣고 지도자와 백성이 마음을 낮춰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자 니느웨에 대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으로 그 어느 누가 예언하든 마찬가지다. 그것은 운명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 초대하는 부름이다. 

이땅의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북한이 붕괴하길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한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인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라! 

대한민국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의 완고함을 두려워하고 돌이키라!

원수 북한이 붕괴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 
하나님은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를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북한에 인권과 자유와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에 대한민국을 견주며 자만하지 말라! 
저들은 한없이 연약하고 가련한 우리의 동포다.

오히려 대한민국에 불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을 애통하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가 메마른 데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나님 앞에 신음하라! 

이땅에서 공평과 정의가 하수처럼 가득 흘러 저 북녘땅까지 적실 때 이 땅에 평화통일이 임할 것이다. 

[덧붙임]
*1.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실제로 미국방부 CSIS의 한반도분과가 이 문제를 토의하는 데 사용한 문서가 올라와 있지만 아쉽게도 문제의 지도는 CSIS에서 아직 찾지 못했다. 
대신 북한붕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최근 글만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이 교묘하게 결정적인 논점과 질문에 대한 대답은 회피하면서 쓰여졌음에도, 이명박정권이 미국방성과 북한붕괴문제에 관해 대화를 진행해왔음을 내비쳤다.("...Bilateral planning has been stepped up with South Korea under the Lee Myung-bak administration.") 
문제의 지도를 CSIS가 작성했다면 현 정권에서도 이를 모를 리가 없고, 심지어 그 지도의 경계선을 긋는데 동참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문제의 지도가 국내언론에 보도됐을 때 대한민국 정부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역사상 모든 대한민국 정부에서 한반도 북부 국토수복은 당연한 권리요 책무였던 걸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다. 
혹은 문제의 지도가 CSIS가 작성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 작성해서 여론의 간을 보는 것이었다면? 참으로 착잡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2. 조금 다른 각도에서 미국과 한국정부가 지난 3년간 북한붕괴를 논의해왔다는 폭로가 가디언지에서 나왔다. 국내보도를 보면 여기엔 중국에 경제적 편의를 제공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되어 있다. 북한붕괴든 북한분할이든 중국에 뭔가를 팔아넘기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 황당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왜 우리 영토를 당사자끼리 얘기하지 못하고 주변 열강을 끌어들여야 한단 말인가. 박선원 미국 브루킹즈연구소 초빙연구원에 따르면, 문제의 '경제적 편의'란 영토를 떼어주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한심한 것들...
2010. 10. 8. 17:43

작가 최윤희님의 자살소식을 접하면서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최윤희님최근 2년간 지병이 악화되면서 이를 비관하여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싶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삼가 고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나를 지탱해오던 삶의 목표와 의미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생의 의욕도 사라진다. 오만 가지 극단적인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나 자신이 투병 중이다보니 최윤희씨의 그 벼랑 끝에 선 듯한 심정이 절절하게 맘에 와닿는다. 그 처절함과 비참함은 겪어 보지 않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어두운 심연의 끝도 없는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 고통은 행복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던 작가마저 죽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만큼 실로 잔혹하다.

과연 나를 지탱하는 삶의 목표와 의미가 무너지고 고통과 수치가 나를 압도하여 모든 생의 의욕을 질식시킬 때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이것은 최윤희님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실존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정말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특별히 내 경우엔 최근 투병생활 중에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질병보다도, 내가 목표요, 보람을 삼아왔던 것들이 좌절되는 고통보다도 더 괴롭고 아픈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거의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이야말로 모든 고통과 좌절을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힘이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내게 가장 뼈아픈 것은 바로 이 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내 갈 길을 밝혀주었다. 내가 어두워 헤매고 넘어질 때에도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손길이 나를 인도해 주셨다. 성경말씀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통해, 신학연구와 묵상을 통해, 기도 중 지극히 뛰어난 평강이 임하는 은혜를 통해, 앞길을 환히 보여주시는 꿈과 환상과 음성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흔들림없이 붙들어주셨다. 어떤 신학적 물음도 늘 쉬워 보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님이 내게 완전히 침묵하신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음성으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심지어 성경을 읽을 때도,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도, 기도할 때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쇠약해진 건강으로 신학연구와 묵상도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이젠 신학적 물음 앞에 말문이 턱 막힌다.

그동안 그토록 섬세하게 나를 인도하셨던 손길이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가. 지금 가장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대체 어디 계시단 말인가. 그동안 그토록 자비롭게 인도하셨으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침묵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우는" 처지란 말인가. 도대체 왜? 포이에르바하의 생각처럼 하나님이 애당초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다만 내 인간성을 투사한 신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녕 나를 버리신 게로구나. 내가 도대체 무얼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다. 죽고 싶을 만큼 분하다... 자살이 내 마음에 늘 가까이 있다.

내가 지금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미지다.

첫 번째 이미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미지다.

나사로는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이름 뜻과 달리 하나님께조차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받지 못했다. 나사로도 하나님을 믿는 자였으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나사로는 구걸하다가 쫓겨나고(*1), 온 몸이 헐어 고름이 나고, 그 고름을 개들이 와서 핥아 먹는 비참한 굴욕과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죽을 때 이름없는 걸인의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죽어야 했다. 누가 그의 시신을 거들떠나 봤을까. 나사로는 이 모든 치욕과 고통을 겪어내다가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반전은 내세에서 일어났다. 그가 구걸하던 부자집 주인은 현세에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누렸지만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으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이름의 뜻과 달리 이생에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죽지 못해 살았던 고독한 나사로는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깊은 위로를 받으며 쉰다.(*2)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영원히 위로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의 진정한 의미를 보았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차원으로서의 지옥에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현존하신다는 것이다.(*3)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마치 나를 조롱하고 힐난하듯 어처구니없이 좌절되어 버린 내 삶의 목표와 보람, 그 모든 좌절과 고통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짙어만 가는 나의 어두운 고통이 숨막히게 내 목을 조여온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을 기억한다. 나의 이 비참한 삶의 자리, 아니 죽음의 자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침묵하시는 듯한 바로 이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비록 예전처럼 손에 잡히고,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듣지 못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버림받은 자리에 현존하신다. 

개들이 와서 내 상처의 피고름을 핥는 기막힌 삶의 자리이지만,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나의 희망이요, 내 삶의 등불이시다.

[덧붙임]
- 10월10일 현재까지 총조회수가 110회쯤 되는데, 유입키워드를 보면 '최윤희 종교/신앙'이 무려 80여회에 이른다. 최윤희씨의 자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는 얘기다. 비슷한 현상을 얘기하는 블로그가 또 있는 걸 보면 내 블로그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하다.
아마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인들이 요새 자살을 많이 하던데, 최윤희씨가 생전에 전하던 행복의 메시지도 어딘가 기독교를 닮아 있다, 최윤희씨도 기독교인일 듯, 아니라면 종교는 무얼까' 라는 호기심에 글을 열어본 경우가 많은 걸로 보인다. 
사실 근본주의성향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자살문제에 율법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을 내려왔다.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자살에 이르게 된 당사자의 삶의 맥락을 주의깊게 삼가 고려하면서 애도의 심정으로 접근하기보다 단죄와 조롱을 일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자살자 가운데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닌가. 이것을 보더라도 기존의 자살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기존 대처가 썩 적절한 처방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포스팅이 필요할 것 같다.
*1. 나사로가 부자의 집 앞에 '버려졌다'라고 우리말 개역개정역에서 번역한 대목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ἐβεβλητο'라고 되어 있다. βαλλοω(던지다) 동사의 수동형으로, '내던져져있다'라는 뜻이 된다. 물론 βαλλοω 동사는 연결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을 것이다. 
*2. 이걸 보면 나사로는 이생에 위로와 도움을 줄 변변한 가족과 친척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나사로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고독한 상황을 함축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기만 했던 부자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겪는 것처럼, 나사로는 현세에서 아무도 도와주고 위로해 줄 이 없는 뼈아픈 고통을 내세에서 큰어른 아브라함이 직접 품에 안아 위로해준다.
*3. 한국개신교의 사도신경에는 세계교회적으로 볼 때 무척 드물게도 이 조항이 삭제되어 있다. 본래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초기한국교회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지, 종교개혁자들의 뜻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 조항에 대한 입장은 칼뱅, 기독교강요2.16.8에서 고전적인 진술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조항의 재삽입을 지지하는 국내교계인사로서 이정석교수(조직신학), 김정훈교수(신약학) 등을 들 수 있다. 이재철목사는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한 소속노회의 인식부족과 이익다툼으로 말미암은 오해와 왜곡으로부터 소속교단이었던 예장통합에서 이단시비와 목사면직처분까지 겪은 바 있다. 이 조항의 존재조차 모르는 신자들이 많은 상황이어서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2010. 10. 3. 17:19

희생양

MBC스페셜의 타블로편을 봤다. 참 저렇게 뛰어난 천재가 집단의 비뚤어진 시기와 증오를 받아내느라 너무 고생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타블로의 말대로 타진요나 상진세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봐도 믿지 않을 듯 싶다. 심지어 이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제기한 의혹의 사실관계조차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냥 아둥바둥 살아온 내 현실은 시궁창인데 타블로라는 캐나다 국적의 뛰어난 젊은이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힘들이지 않고 부와 명성을 누리는 걸로 보이는 게 고깝고 싫고 미운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타블로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제대상으로서의 '외인(外人)'(또는 '人外')일 수밖에 없다. 학력논란은 결국 그들의 불타는 증오심을 둘러대는 그럴싸한 자기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새삼 페노메논이라는 한 20년 전 영화가 생각난다. 미국 한 시골의 사람 좋은 한 젊은 남자가 하늘에서 이상한 빛을 본 뒤 갑자기 천재 초능력자가 된다. 이웃들과 두루 사이 좋았던 이 남자는 하루 아침에 외톨이, 왕따가 되어 버린다. 사실 당시 '파우더' 같은 비슷한 작품도 나왔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걸로 영화 한 편을 만들기엔 진부해지다시피 한 낡은 플롯이다.

이런 진부한 가락이 현실이 되어 반 년 동안이나 우리 사회에 울려퍼지고 있으니 참 답답한 세상이다. 가진 건 사람 밖에 없는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부대끼며 사는 주제에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애꿎은 희생양을 찾아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가 희생양을 만들어 억압하고 처단함으로써 보람과 힘을 느끼는 변태적 상태로 떨어진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1) 거슬러 올라가 보면 친일파세력이 이승만정권 하에서 권력을 거머쥐면서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에 대한 논란을 덮을 요량으로 반공이데올로기에 열을 올렸던 것이 아마 현대한국사회의 희생양만들기 관행의 싹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2) 역시 반공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으로 대중의 증오를 담당시킬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 논란을 덮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들의 후예인 한나라당이 오늘날까지도 이 비루한 짓을 하고 있다.

타블로의 학력논란이 새로운 점은 희생양만들기가 정권을 잡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3)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악플이라는 수단을 통해 집단적으로 희생양을 매겨놓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효순미선이 사건, 미국쇠고기파동 등의 집단적 항의와 저항에 좌절된 뒤로 터져나올 곳을 찾지 못한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가 이런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오고 있다.(*4) 기득권자들로서는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나 연예 영역에서 대중의 에너지가 분출되도록 내버려 두고, 심지어 조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정치적 이슈가 대중의 장에서 공론화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고도 조용하게 억압하는 전략이 한결 쉬울 수 밖에 없다. 대중의 눈이 기득권을 예리하게 감시하고 그 검은 속내를 꿰뚫어 보는 부담을 적당한 이슈를 흘려줌으로써 간단히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은 한국사회의 대중 가운데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이 이런 쓸데없는 논란에 빠져 힘을 뺀다면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과 억압은 한층 쉬워질 수밖에 없다. 타블로현상을 보니 타블로 개인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 겨레의 역사와 앞날에 대한 착잡하고 절박한 느낌에 입맛이 쓰다.(*5)(*6)

[덧붙임]
*1.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시각에서 그의 여러 책에서 사회가 사도마조키즘적 메커니즘에 빠진 병리적 상태에 관해 분석한 바 있다. 르네 지라르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사회의 주체들이 희생양을 만들어 죽이고 이 죄악을 덮는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사회주체간의 살인욕구를 잠재우는 현상을 갈파한 바 있다. 두 분석은 똑같은 실재를 서로 다른 언어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피력한 내 견해는 이들의 분석에 따라 한국사회를 생각해 본 것이다.
*2.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파논란은 주류언론이 집요하게 물타기하려는 이슈이다. 공산주의자 전력도 덮으려는 마당에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박정희는 공산주의 전력이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친일행적이 있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는 궤변에 다름없다.
*3.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조작은 굳이 증거를 더 들이댈 필요조차 없을 만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부한 가락이다. 이게 대중에게 그토록 잘 먹혀들다니 신기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4. 물론 이들의 카페매니저 '왓비컴즈'가 대중을 세뇌하여 그들의 에너지를 조작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트는 이데올로그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MBC스페셜 후편에서 민경배가 지적했다시피 이들의 시스템은 신흥종교의 교주와 신도들의 관계와 몹시도 닮아있다.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뤄본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봐도 적절한 분석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가렛 싱어도 신흥종교의 시스템이 세뇌에 의해 구축된다는 점을 지적했던 바 있다.
*5. 인터넷을 좀 뒤지다 보니 문화평론가 하재근이 나와 비슷한 논지로 레디앙에 쓴 글을 만날 수 있었다. 하재근은 일부 누리꾼들이 겨냥하는 타블로의 '죄목'이 사실은 특권층들의 죄목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번지수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타진요의 주장과 타진요 운영자 왓비컴즈에 대한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놓은 글은 방송 훨씬 이전에 이미 나와있었다.
*6. 원래 나는 타블로와 에픽하이, 대중음악 자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이번에 이 글을 포스팅하고 나서 에픽하이의 노래 중 '희생양'이라는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회비판적 논조의 가사와 곡 분위기가 맘에 든다. 어쩌면 에픽하이의 팬이 될지도 모르겠다.


2010. 10. 3. 17:15

외계생명체와 기독교신앙

개인적으로 SF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팬이라 외계행성의 발견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눈여겨 보면서 광활한 우주의 신비에 새삼 감탄하곤 한다.

요 며칠새 새로 발견된 글리제581g 행성 보도는 특히 눈에 띈다. 이 행성은 약 20광년 떨어진 적색왜성 글리제581 둘레를 도는 골디락스 행성, 즉 차지도 덥지도 않은 지구형 행성이다. 질량은 지구의 3-4배 정도이고, 밤낮이 없어서 밤낮의 경계면이 고정되어 있는데, 이 곳의 기후가 지구 극지방 정도여서 생명체가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고 한다.

UN에서 외계문명이 접촉해 왔을 경우 공식적으로 영접하는 업부를 맡는 대사를 임명했다는 소식도 나왔었다. 다 '뻥'이라는 UN의 반박기사가 바로 나오기도 했지만, 외계생명의 발견 내지 외계문명의 접촉에 대해 기대감이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다 보니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없는 게 아닌가 라는 오래된 물음이 떠오르는 것 같다. 심지어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기독교의 신의 부재로 연결짓는 시각을 기사에서 공공연히 표현한 경우조차 볼 수 있다.(*1)

이런 대중의 호기심은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은 첫째,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구에만 생명을 창조했다고 기록했을 거라는 짐작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런 짐작은 별 근거가 없다. 창세기 1장은 지구를 배경으로 한 기록이다. 창조과학회에서 하는 식으로 문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적시하자면 창세기 1장에도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고 쓰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의 생명과 더불어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지구의 생명'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온 우주,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되풀이하여 기록한다.

아울러, 성경에는 외계인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에서 외계인을 기록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기괴한 이미지와 상징들이 많이 나타난다. 텍스트의 맥락과 배경을 주의깊게 고려하는 합당한 해석학적 과정을 밟아 성경을 이해한다면 이런 오해는 하지 않게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최소한 우주 안에서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미 표현되어 왔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외계생명체가 발견되면 거기에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야웨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신의 부재를 상상하게 된다.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야웨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모를 가능성은 물론 매우 높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신약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알려진 역사적 칭호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 또는 '여호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해당 출애굽기 본문을 히브리성경 원문으로 보면 이것은 원래 이름을 가리키는 특수명사라기 보다는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그다(
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뜻을 새길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이다. 따라서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이런 이름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자신의 맥락에서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길이 추구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 양심과 평화, 삶과 죽음 같은 문제는 수학이나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인간만의 것일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죄 문제 역시 인간만의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무수한 종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문제와 씨름하는 흔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2)

그렇다면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들과, 거기에 더하여 우주의 수많은 종교들이 '백가쟁명'하는 상황 자체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일까?

사실 굳이 우주로 스케일을 넓힐 것까지도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과 수많은 신들은 유일신교가 얘기하는 유일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구해 보면 된다. 유일신교는 여기에 따로, 저기에 따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다신교의 믿음을 비판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의 힘으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 이를테면 글리제581와 태양계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한 분의 초월적인 인격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의 정의부터가 종교의 백가쟁명 운운하는 것이 번지수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셋째, 외계생명의 존재에서 신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창세기1장은 근본주의가 강변하는 것처럼 단순한 역사적, 자연과학적 보도로 읽혀져야 하는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 기록 당시 고대근동의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당대 바빌로니아 과학의 세계상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기록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과학의 세계상에 따르면 만물은 신들이고, 군주는 신들의 아들이며, 인간은 신의 아들인 군주에게 복종해야 할 노예로 창조되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기자는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며, 군주가 아닌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창세기 기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과학적 세계상을 얼마든지 받아들여 비판적으로 소화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로 똑같은 알맹이의 창조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고백해야 한다. 인간은 오늘날 지배적인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그저 어쩌다가 생겨난 우주의 먼지 정도인 존재가 아니다.

* 9월 말경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덧붙임]
- 독일 슈피겔지에서 글리제581g에 살고 있을 생명체의 모습을 추정한 논문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는 보도가 있다. 이 기사는 2010년10월4일자 40호에 실렸는데 아쉽게도 아직 유료pdf기사로만 올라와있다. 기사를 찾으면서 2009년8월16일자 기사에서 호주의 한 과학잡지가 글리제581d의 (살고 있을지도 모를) 외계문명에 보낼 이메일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읽었다. 십중팔구 오버하는 거겠지만 재미는 있어 보인다. 연구자들이나 매니아층에선 이미 상당정도 이 행성계에 대한 관심이 진척되어 있었나보다. 
- 12월2일2시에 나사에서 외계생명체의 생존에 관한 중대발표를 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유독 국내에서 엄청 들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어김없이 기독교가 뭔가 곤란해지지 않을까 싶어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시는 분들이 많이 보였다. 나사의 발표는 비소를 신진대사의 기본으로 하는 수퍼미생물을 지구에서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문외한으로서 이 발견에 우주생물학 연구에 있어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성이 있다는 것 정도만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인을 구성요소로 하는 지구생명체만 기준으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후보군을 선정했는데, 이제부터는 최소한 비소 역시 행성후보군 선정에 고려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비소뿐이겠는가. 일찌기 브루노가 갈파했다시피 우주에 사람이 생각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생명의 파노라마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지 말란 법이 없다. 외계생명체연구가 언젠가는 우주에 펼쳐지는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 예컨대, 성경에 따르면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천사의 창조과정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다. 물론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의 한두 구절을 천사장 루시퍼의 창조와 타락 장면으로 보는 주석전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 문맥상 맞지 않는다. 천사론이 유행중이던 신구약 중간기 유대교의 주석전통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미 종교개혁자 칼뱅도 이 주석전통을 거절했던 바 있다. 근본주의에서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전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 보는 것은 꽤 흥미로울 듯 하다.
*2. 독일계 미국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의 역작 Systematic Theology 제2권에서 같은 생각을 종교철학적 범주로 표현했던 바 있다.

2010. 10. 3. 17:11

한상렬 목사의 방북 논란

한상렬 목사의 방북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대한민국이 80년대 군부독재시대로 회귀했다는 느낌이 든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해대더니, 나라가 한 30년은 뒷걸음질쳤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과 만났을 때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씨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국내언론은 이들을 빨갱이로 매도했다. 그게 벌써 언제적 얘긴가.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와서야 이들의 노력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인정받았던 바 있다. 그런데 이젠 이들까지 다시 빨갱이가 될 판인가보다.

한상렬 목사의 경우 새롭게 생각되는 점은 극우세력이 조작된 기도문을 언론에 퍼뜨렸다는 사실이다.

한때 한상렬 목사가 평양 칠골교회에서 했다는 기도문을 조중동에서 들먹거렸다.(관련기사보기) 알다시피 그 기도문은 극우논객 지만원씨의 홈페이지를 드나드는 극우성향 누리꾼이 지어낸 작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극우언론 인사이더월드와 뉴데일리, 올인코리아가 악의적으로 사실로 둔갑시켜 기사로 올렸고, 이것을 조중동이 다시 받아쓰기했다.

기도문이 일개 누리꾼의 어쭙잖은 작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탄로났음에도 뉴데일리는 사과정정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올인코리아는 추가로 문제의 기도문을 작문한 누리꾼의 입을 빌어 "한상렬 목사가 빨갱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기사까지 올렸다. 조중동은 한상렬 목사의 명예를 훼손한데 대해 사과를 구하는 정정기사를 올렸던가? 늘 그랬듯이 아니면 말고 식이다.

사실관계는 온데간데 없고 인터넷에는 "종북친북빨갱이는 북에나 가라"는 극우적 악플이 넘쳐난다. 애초 분탕질을 시작한 지만원씨 홈페이지의 극우성향 누리꾼들은 '관심'도 받고 한상렬 목사에 대한 '응징의식'을 일깨웠다며 '전리품'에 흡족해 하고 있다.

이 나라가 어느 때서부터인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죽임으로써 존재를 확인하는 악마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난들 이상하지 않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덧붙임]
1. 예전에 보수교회 목사들이 소위 운동권 목사들에 대해 목사직함만 걸어놓고 종북친북활동을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한상렬 목사 목회활동 중이시다.
종교 본연의 활동은 봉사라며 봉사도 안 하는 주제에 종북친북활동을 한다는 얘기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 '비기독교인'의 글을 읽어보라. 한국교회에 과연 지역사회에서 이만큼 신망을 얻는 목사와 공동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 9월 14,15일 쯤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