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에 해당되는 글 15건
- 2015.05.30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2
- 2012.10.29 말씀의 사유화, 역기능적 신앙 4
- 2012.09.11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4
- 2012.07.07 이찬수 목사님의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을 환영하며 1
- 2011.11.14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 2011.07.24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4
- 2011.07.15 관상기도에 대한 김남준 목사의 견해 12
- 2011.07.11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 2011.04.29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 2011.03.29 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3
- 2011.03.1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4
- 2011.02.19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3) 2
- 2011.01.31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 2011.01.25 신앙의 항체
- 2010.10.03 한반도전쟁예언의 사각지대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왜 로마카톨릭사제 흉내는 내는가?
별 굉장하지도 않은 목회자복식사까지 시시콜콜 세세하게 파고들 필요성은 없겠고...
그저 그림 몇 컷과 더불어 기초적인 사실관계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1. 목회자컬러는 이미 세계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두루 착용하고 있다.
목회자 컬러 가운데 특히 소위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특정 타입에 대해 오해들이 꽤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림1] 올라프 트베이트 목사 (노르웨이 루터교회)
[그림1]은 올라프 트베이트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노르웨이 루터교회 목사님)가 부산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 개막연설할 당시 장면이다.
응? 총무목사님이 목회자컬러를 입으셨네?
사도적 계승 의식이 강한 북유럽 루터교회라서 그렇다고?
그럼 다른 루터교회는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루터교회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주리주 루터교회의 선교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소위 사도계승 운운하는 데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국루터교회 목사님들 복장은 어떨까?
[그림2] 엄현섭 목사 (한국루터교회)
[그림2]는 2010년 당시 한국루터회 총회장이신 엄현섭 목사님이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한 사진이다.
이분은 어쩐 일로 카톨릭신부처럼 입고 계실꼬?
카톨릭신부가 좋아 보여서 신부코스프레중이신가?
[그림3] 제임스 앤더먼 목사 (미국연합감리교회)
[그림3]은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감리교회 목사님 모습을 구경할 차례다. 우리나라 감리교회 목사님 가운데서는 김아무개 목사님 사진이 바로 검색되어 나오는데 썩 유쾌한 얼굴도 아닌지라 미국연합감리교회 소속 어떤 교회 담임목사님 사진을 걸어두겠다.
이분도 담임목사님으로서 권위있게 보이고 싶으셨나?
성공회는 성직복을 입는 교회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넘어가... 자니 성경대로 믿는 복음주의자는 절대 그렇지 않을끼다 하실까 싶어...
한 장 보고 넘어가자.
[그림4] 제임스 패커 신부 (캐나다성공회)
[그림4] 자... 이 할아버지는 누구실까?
물론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계의 원로 제임스 패커 되시겠다. 무려 동성결혼을 인정한다는 결정에 반대하여 캐나다성공회를 떠나 "보수적" 성공회네트워크로 옮기셨다는 기사에 실린 그림이다.
응? 아무리 성공회라도 그렇지, 성경대로 하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분이 비성경적이게시리 왜 카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고 난리지? 권위있게 보이고 싶었나? 이거 혹시...? "제임스 패커 프리메이슨", "제임스 패커 배교", "제임스 패커 종교통합"으로 검색해 봐야겠다!
혹은..
뭐야.. 제임스 패커가 신부였어?
책 다 태워버려야겠네!
아마도 이런 생각 하시는 근본주의 성향 신자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게다.
위와 같은 검색유입어가 생겨날 확률이 한 70%는 되지 않을까.
(==> 빙고! 실제로 이런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물론 제임스 패커 책은 찢지 않아도 된다. 사도계승을 중시하는 고교회적 경향이 강한 한국성공회는 목회자(pastor)를 사제/신부라고 지칭하고, 같은 용어를 종교개혁 전통을 중시하는 저교회적 경향이 강한 일본성공회는 목사라고 일컫는다. 목사로 부를 것이냐, 신부로 부를 것이냐는 번역상 문제일 뿐 결국 성공회목회자를 일컫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임스 패커를 성공회목회자로 보신다면 굳이 아까운 책 다 태워버릴 건 없다. 아니, 그렇더라도 좌우간 "카톨릭신부처럼 보이는 옷"을 입었으니 책 다 태워버리셔야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다만 이 글 읽으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어쨌든, 성공회목회자는 정말 "가톨릭신부처럼" 옷을 입느냐? 목회자복장이라는 걸 왜 꼭 굳이 하느냐 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 한국교회 전통에선 낯설게 보이지만 이분들은 신기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다. 왜 그럴까?
성공회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그러면, 장로교회는 어떨까?
[그림5] 유리 베리토 목사(미국장로교회)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리폼드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우리나라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에서 유독 좋아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포스팅하는 미국의 한 블로그 필진 가운데 장로교회 목사님 서너 분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프로필사진을 걸어놓으셨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근본주의 진영에서 동성애 문제를 승인했다며 분노해 마지 않으시는 PCUSA교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모르니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타고 가셔서 잘 찾아보시고 있으면 기탄없이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중 맨 위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추종자라고 자기소개하신 목사님 한 분 사진만 걸어두겠다.
왜 굳이 이렇게 하고 있을까?
영국목사님은?
영국교회는 다 죽었고 영국목사는 다 자유주의 엉터리라는 근본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분들이 참고해 보시라고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그림7] 케네쓰 스튜어트 목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케네쓰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이 목사님은 영국의 도완베일자유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개혁장로교단에 가입을 청원한 목사님이라고 최근 기사에 나온다. 이 목사님의 교단에 관해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 원래 스코틀랜드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였는데, 이 교단은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에 통합되지 않은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장로교단으로서, 무려 예배 시 악기까지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 목사님이 도완베일자유교회에 보낸 목회서신과 다른 관련기사들을 대충 훑어 보니 이 목사님은 이 교단이 보수적인 예배의식에 변화를 주는 데 반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사임하고 더 보수적인 "개혁장로교단"으로 가입하신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떠 있다.
원래 종교개혁자 칼뱅이나 존 녹스는 시편송 이외의 다른 노래를 엄격히 제한했고, 악기도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원조보수를 외치는 우리나라 근본주의 장로교단 소속 교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 기타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로 예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분은 어떤가? 찬송을 노래로 부르고 악기를 사용하는 예배의식의 변화 문제로 선후배로 동문수학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함께 연대하여 사역하는 동료목사님들, 함께 신앙생활해 온 교우들이 있는 정든 소속교단을 떠나겠다고 하신 거다! 이거 제대로 보수 아닌가? 그런데 이 보수적이라는 목사님도 목회자컬러를 하셨네? 이 무슨?
카톨릭과 종교통합 하려는 프리메이슨의 지령을 받은 WCC의 음모인가?
2. 왜 개신교 목사가 로만컬러를 입고 가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나?
유독 한국교회에선 소위 로만컬러라고도 불리는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해 말들이 많다.(*1)
여기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꽤 크다.
법원에서 개신교목사들은 카톨릭코스프레하지 마라며 카톨릭 손을 들어주신 해프닝도 있으시고.
뭐...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 문제였다면 굳이 글을 남겨둘 필요가 없을터.
근데 소위 교회개혁 얘기하는 분들 가운데 이 부질없는 목소리에 부화뇌동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이건 예전에도 몇 번 보고 별 책임 맡은 분이 아닌 듯 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번에는... 책까지 내셨다는 분이 말도 안 되는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언론사까지 차려놓고 나름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 같은데...
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일단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니신 만큼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실명까지 거론하진 않겠다.
그분이 인터넷 구석에 짱박혀 있는 이 글을 읽으실 일도 거의 없을 성 싶지만....예전 같으면 이런 분의 사이트에 직접 글을 올렸을 수도 있겠다만
이것도 공연한 논쟁의 먹잇감을 던지는 피곤한 짓인지라 한가하게 그럴 새가 없다.
에구... 그래도 이건 너무 답답한 노릇인거다.
혹시라도 보시거든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니하셔도 별 수 없긴 하겠지만...
부디 잘 좀 다시 생각해 보시라.
본인이 모르는 문제에 대해 잘 조사해 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많은 말을 무책임하게들 쏟아 놓는다.
할 때 하더라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과 글을 뱉지 마시길.
제발 좀 어느 정도 알아보신 연후에 그렇게 하셔도 늦지 않다고 정중히 권해 드리고 싶다.
필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한 일이거늘, 특히 영향력 있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3. 목회자컬러 내지 목사가운 문제를 말하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
첫째, 앞서 사진을 통해 분명한 사실: 소위 로만컬러라는 특정형태의 목회자컬러는 세계개신교회에서 널리 착용한다.
둘째, 소위 로만컬러가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까닭은? 가톨릭 신부들이 의무적으로 착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관용적으로 통하게 된 명칭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래 전부터 목회자컬러를 입어왔다. 카톨릭과 다른 점이라면, 목회자들이 소위 로만컬러만이 아니라 개인의 목회철학과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갖고 있었다.
셋째, 과연 오늘날 목회자컬러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고, 양복은 그렇지 않을까? 목회자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많은 목사들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와 와이셔츠와 고급외제승용차 따위를 지니는 것이 세속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의 훈장 같은 것을 과시하는 게 아닌가?
교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공궤받는 처지에 그럴싸하게 비싼 양복과 구두까지 받아서 목사 복장을 구분하여 세속적 성공을 뽐내라고 대체 성경 어디에 쓰여있나? 레위기라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의 하나 혹여라도 제사장 예복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레위기 연구 다시 똑바로 하셔야 한다.
4. 목사가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은?
목회자컬러 착용이 단지 종교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대한민국 개신교회 대부분이 미국의 제2차 대부흥운동의 지류 전통을 이어받아 출발한 데서 비롯된 그릇된 발상이다.
만인제사장론에 입각해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는 목회자컬러 착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일부 동감한다. 그러나 거듭 지적하거니와, 현재 한국교회에서 만인제사장론은 명목(de jure)의 피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실질적으로(de facto) 고가의 양복과 구두와 와이셔츠와 외제승용차 따위로 자기 신분을 구별하는 행태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는 데 불과하다. 더욱이, 만인제사장론 운운하는 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이유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관계의 출발점은 아니다.
목회자컬러 착용관습이 제2차 대부흥운동 전통에서 낯설게 된 까닭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고 본다. 즉, 드와이트 무디를 비롯한 대부흥운동의 대중전도자들 상당수는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전도자로서 목회자컬러를 착용할 일이 없었다.
대중전도자들의 영향으로 교세가 커진 교회들이 늘어나면서, 그 절대적인 수혜자였던 미국 근본주의나 오순절 계열 교회들에서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 목회자컬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의 장점과는 별개로 -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그림7] 브루스 코놀드 목사 (미국 근본주의 계통 무디 성경학교 출신)
무디성경학교 출신 브루스 코놀드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목회자 컬러를 착용하고자 하는 소수의 미국 근본주의 계통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자신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한 가지로 정리한다.
1. 목회자가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한 성경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2. 시각적으로 목회적 소명을 표현하기 위해
3. 세계의 다른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4. 역사적으로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5. 우리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 목회자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6. 선교사적 마인드로 옷입기 위해
7. 나의 소명을 일깨워주는 표지로서 세속적 복장을 부인하기 위해
8. 개인적 거룩성을 강화하기 위해
9. 나 자신을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0. 우리의 역사적이고도 동시대적인 가치를 살아내기 위해
11. 사순절 기간 동안 일종의 "베옷과 재"로서 목회예복을 입기 위해
나 자신의 입장은?
코놀드 목사님의 경우 근본주의적 교회환경 가운데 자신을 변호해야 할 상황을 만날 수 있는지라 주의깊게 성찰해 오셨던 것 같은데, 나는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못 느끼는 터라 굳이 말하면 실용적인 입장이다.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나 목회자컬러 혹은 제복이나 예복 같은 것은 결국 지엽말단의 비본질적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현장의 요구에 유의하여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대처할 수밖에 없는데, 감사하게도 섬기는 교회에서는 회중들이 이 문제에 대해 너그럽고 털털한 편이다. 해서 딱히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 색깔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냥 걸쳐 입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지엽말단에 관련하여 온갖 쓸데없는 수군거림 때문에 목회활동을 번잡하게 만드는 교회공동체가 의외로 꽤 있다.
아니, 목사 옷이 자주 바뀌지 않아서 덕이 안 된다고라?
와이셔츠 색깔이 새하얀 흰 색이 아니라서 시험에 드신다고라?
어이쿠... 예수님은 전도여행할 때 두 벌 옷도 갖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마태복음 10:10)
예수님 말씀은 어디로 가고 이 무슨 희한한 율법인가...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목회자컬러 챙겨입고 말겠다.
나 일하는 중이요 하는 공개적인 표시니까!
[덧붙임]
*1: 스톨(영대)이나 수단에 대해서도 참 쓸데없는 말들이 많다. 한 마디만 해둔다. 이게 무슨 종교적으로 권위있게 보이기 위해 걸친다느니,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전통만의 고유복장이라느니 하는 어쭙잖은 원조시비 같은 것들이 따라붙는데...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나?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교회전통의 소중한 고유복장 운운하는 분들은 스톨과 수단에 관해 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이라도 한 번 열어나 보고들 하는 소린가? 또, 상징적 의미 없이 고가의 세속적 양복을 목사가 걸치고 다니면 만인제사장직에 더 잘 어울리나? 상징적 의미를 담는 예복이면 종교적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엉뚱한 딴생각들 좀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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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사유화, 역기능적 신앙
한국교회가 요즘 사이비이단들의 창궐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비이단들은 한국교회가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 말씀에 더욱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탄의 가시다. 사탄의 가시를 두려워하거나 저주할 게 아니라, 이 문제 너머 계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왜 사이비이단들이 창궐하는가? 결국 말씀의 사유화, 교회의 사유화에서 비롯된다. 하나님 말씀은 사도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유대 안에 있는 전 세계의 공교회에 선사된 것으로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유화될 수 없다. 그것이 교황과 같은 역사와 전통과 힘의 아이콘이든, 유력한 특정 교회전통이든, 또는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는 특정 계층이든 말이다. 하물며 일개 교주, 일개 목사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구절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이익관계에 맞도록, 자기 원한관계를 풀기 위해서 갖다 붙여가며 해석질을 하고 있다. 이들의 해석질은 성경본문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주석적 이해와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복음의 정신, 계시의 정신에 충실한 자유로운 인용도 아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가 파악한 좁다란 율법주의적이고도 영지주의적인 하나님상과 자기중심적인 은원관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하잘 것 없는 소망에 대한 일개 종교권력자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쉴새없이 성경을 인용해대는데 성경의 정신은 쏙 빠져 있다. 쉴새없이 성경을 증빙전으로 들이대는데 그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정신으로 나온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알리가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성경 안의 새로운 세계"(칼 바르트)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 말씀을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로 제한하려드는 우상숭배행위 아니겠는가!
그 결과 그들의 성경인용이나 성경해석은 더 이상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하시고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복음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을 옥죄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협잡과 다를 바가 없다.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은 더 이상 성경구절이기를 그친다. 자기가 진짜로 섬기는 대상에 대한 우상숭배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이며,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하고자 세뇌하는 정서적, 영적, 심리적 지배테크닉(manipulation technique: Margaret Singer)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장 숭앙하는 듯 용의주도하게 가장 하나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진정한 속내로는 마술주문이나 다름없이 천하게 취급한다.
그들의 말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듯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자비와 용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진짜 속내는 자기 아집과 편견이며, 자기 권력과 이익의 증진에 있다. 그들의 입술은 아름다운 말을 그럴듯하게 하나 늘 독을 품었다. 귀 있는 자는 그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보라. 예수님은 결코 욕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독사의 자식들이다!
말씀의 사유화가 고약하고 지독한 까닭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 그것이 소위 보수개혁주의든, 복음주의든, 바르트주의든, 진보주의든 상관없이 -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영악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규신학교육을 받아서 어떻게 하면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지 안다. 차라리 사이비이단자들에 관해서는 그 허무맹랑하고 무식한 성경해석과 교리를 콕 집어서 교회공동체에 경고해 줄 수라도 있다. 그러나 말씀의 사유화는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사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렵다. 중세 말 종교개혁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게 곪고 썩은 뒤에나 모두의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창궐해 있는 사이비이단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토양으로 자라나고 있을 따름이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똑바로 깨어 있다면 사이비이단자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사이비이단자들이 수많은 이단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더욱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중 모두 말씀의 사유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저들 사교집단을 위한 비옥한 토양 노릇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증 아니겠는가?
흔히 사이비이단자들을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세워놓고 그들을 욕하고 저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패착에 다름 없다. 진짜 문제는 말씀 앞에 엎드리어 경청하기 보다는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내 맘대로 소유하려 드는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이단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잘못되었다. 그들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밝혀두는 것이 소위 근본주의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사이비이단을 옹호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밝히는 진리의 일꾼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비이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쏟아내어 자기 의를 충족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 나 자신이 십자가의 말씀 앞에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가득한 교만과 아집과 욕망을 하나님 말씀 따라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한국교회에 사이비이단이 창궐하는가? 하나님 말씀이 사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이 어디 우연인가? 하나님 말씀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개 개인, 일개 집단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만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 특히 억눌리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해방하시는 기쁜 소식이기를 그치며, 죽음과 멸망으로 악순환해 빠져들어가는 역기능적 행태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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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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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목사님의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을 환영하며
이찬수 목사님이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분당우리교회의 대형교회화를 포기하고 잘 훈련된 신자들을 지역교회로 파송하는 쪽으로 전환해 나가겠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한 사람의 개신교인으로서, 또한 교역자로서, 신학도로서, 요 며칠 사이 무척 기쁘다.
한 10년 전쯤 청소년 사역을 말끔하게 잘 하시는 스타성 있는 목사님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야말로 괄목상대, 사역자로서 놀라운 발전과 성숙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적 입지조건이 좋은 지역에서 교인수가 늘어났다는 외적인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얄팍한 소영웅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층 깊어진 사귐, 매우 치열해진 목회적 문제의식, 상당히 탄탄한 주석적, 신학적 근거지움 등을 통해 당신 자신의 표현을 빌면 바야흐로 '사역의 전성기'를 맞이하신 것으로 보여서 나 자신에게도 마음 뿌듯하면서도 강력한 도전이 되었다.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이야말로 그가 사역의 진정한 전성기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 故 옥한흠 목사님의 말년 발자취를 이어가는 듯한 목사님의 신선한 행보는 참으로 그가 속한 예장합동교단에도 영광의 면류관일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도 그야말로 '소금과 빛' 같은 건강한 촉매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케빈 밴후저의 말대로, 교회 안에 자본주의 원리가 복음의 원리를 대체해 버리는 현상이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다. 내 몸집을 어떻게든 불려서 살아남아보겠다는 '반동적 자본주의의' 못된 심보가 복음주의의 승리와 부흥과 성장이라는 미명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숨막히는 현실인데, "이게 과연 옳으냐?"라는 합당한 질문을 이찬수 목사님과 같은 주류 대형교회 목사님이 던지고, "그렇지 않다!"면서 구체적으로 자기 목회현장에서 결단할 수 있었다는 사실, 이것은 정말 성령의 역사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주류 대형교회 담임목사라는 자리는 혼자만의 자리가 아니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대변자로서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형교회의 아바타를 자처한 어떤 분 덕분에 지워진 포스트에서 조금은 체념 섞인 논조로 그래도 우리나라 대형교회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본다고 적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그것도 신학적 근본주의의 아성인 합동교단에서 일어나다니,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시다!
그렇다,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부디 이찬수 목사님의 귀한 뜻이 그가 목회하시는 교회의 장로님 사이에서도 환영받게 되기를 기원드린다. 그것이야말로 그 교회의 진정한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멋진 비움의 사건이 한국교회에 가득히 퍼져 나가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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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 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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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60705175-Anders-Breivik-From-Document-No.pdf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 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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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에 대한 김남준 목사의 견해
특히 첫 번째 발제자 김남준 목사의 발언이 눈에 띈다. 발언 전문을 보지 못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기사에 나온 대로라면 그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으로 봤을 때 관상기도는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이 주장에 따르면, 김남준 목사는 존 파이퍼를 포함하여 관상기도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불건전하고 그릇된 신학적 판단'을 저질렀다고 에둘러서 말한 셈이 된다. 나아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치는 미국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가 '불건전하고 그릇된 신학적 판단'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한 셈이 된다.(*1)
도대체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의 기준이 뭔가? 김남준 목사 자신의 판단인가? 혹은 예장합동 신학부의 판단인가? 혹은 그들에게 암묵적 자기검열을 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넣고 있는 예장합동의 교권세력의 의중인가? 혹은 '그들'이 이해하고 파악한 한계 안에서의 '오직 성경'인가? 자신(들)과 판단이 다르면 불건전하고 그릇된 판단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딱한 독선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의 내용이라는 것이, 겨우 '관상기도가 이교적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로 흘렀거나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식이다. 미안하지만 바울과 요한의 '성경적 신비주의'라는 것도 있으며,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이교주의'가 구원사 안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 두고자 한다.
'누가 이론을 제기할지라도 관상기도는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김남준 목사의 주장이 자기억견의 일방적인 선포와 무엇이 다른가? '누가 이론을 제기할지라도'라니, 이 얼마나 막무가내식 사고방식인가? 관상기도를 한다고 곧 종교다원주의가 된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개혁교회가 복음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 원천으로 삼고 있는 서방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상기도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연 종교다원주의로 흘렀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사에서도 거의 마니교적 이원론에 방불한 배타적 교회중심구원론의 대변자라는 것이 엄연한 사실관계다.
관상기도가 또다른 의미에서의 정신적 번영주의라느니, 자아 중심의 실용적 사고니 하는 김남준 목사의 비판은 그가 얼마나 관상기도를 모르고 있는지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관상기도는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뒤따르는 기도로서, 정신적 번영주의나 자아 중심성과 극명하게 대치되기 때문이다.
김남준 목사말고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은 어차피 비슷비슷하니만큼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관상기도를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복음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이 근본주의자들의 독선적인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심히 의문일 따름이다. 자신이 이해하고 파악한 범위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가두는 행위야말로 가장 반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자기중심적 선민의식과 협소한 자신들의 계시이해로 동료그리스도인들과 이웃종교에 섣부른 총질을 해대는 행태를 빼다박았고, 가깝게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동생으로서 부족함 없는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 합동교단이 추구하는 신학의 형님뻘쯤 되는 미국 웨스트민스턴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 마이클 호튼이 펴낸 The Christian Faith (2011)를 훑어 보고 있다.(*2) 루이스 벌코프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신학의 흐름에 대해 상당한 구색을 갖추면서도 비교적 덜 무지막지한 논조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개혁 정통주의적 견해를 재확인하고자 하기 때문에 조만간 이른바 원조보수개혁주의를 외치는 노선에서 즐겨 인용될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은 1000쪽 정도의 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논점에 대해선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얼버무리곤 하는 게 감지된다. 더욱이 유감스러운 것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신학자들의 견해를 학문적 서술스타일에 맞지 않게 비꼬고 희화화해 버리곤 한다. 이를테면, 호튼은 몰트만이 기존 신학에서 비성경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자기 신학을 펼쳤다고 기술하면서, 곧바로 그 신학의 배경은 블로흐와 헤겔의 철학, 유대교 카발라사상 따위라고 쓴다. 그러니까, 몰트만의 생각은 비성경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에둘러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17세기 개혁정통주의를 따르는 자기 견해가 '성경적'이라면서 몰트만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몰트만이 끌어오는 모든 성경적 전거와 문제의식은 싹 무시하고 내가 읽은 성경만이 진짜 성경이라는 식의 그의 논조에는 스스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척 하지만 비성경적인 오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호튼은 그와 같은 그림자에 정작 중요한 논점이 가리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는 책의 부제를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했지만, 순례자의 신학에 마땅한 겸손과 사려깊음, 성경적 관용과 공교회의 연합정신에 관해서는 자신이 권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충분히 고려해 봤는지 의문스럽다.
김남준 목사와 예장합동 신학부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문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안은 다르지만 저변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국의 동생들은 아직 미국의 형님에게서 자기 확신을 (그나마) 덜 노골적이고 덜 일방적으로, 덜 전투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미국의 형님이나 한국의 동생이나 협소한 자기 확신이 비성경적인 오만으로 진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덧붙임]
*1: 미국의 건전한 복음주의 계통 신학교 대부분이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의 '나그네'님 글을 참고하라.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하고 가르친다. 렉시오 디비나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주요한 채널이며, 특히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동원 목사의 경우 관상기도는 주로 렉시오 디비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그네님은 실질적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관상기도를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 '관상'의 상태에서 기도했느냐와는 별개로 - 사실상 관상기도이다. 앞서 포스팅한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의 두 번째 덧붙임 글에서 밝힌 필자의 나그네님에 대한 코멘트도 참고하라.
*2: 이 글을 쓸 당시 마이클 호튼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조직신학 교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분은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의 조직신학 교수이다. 영문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분교로 출발했다가 독립한 또다른 학교이다. 그러나 신학노선은 분명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보수개혁신학노선을 이어 받았다. (20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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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가? 근본주의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의 보수개혁주의노선의 저명한 지도적 목회자 존 파이퍼 목사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언젠가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두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발언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여기에 제시된 생각들을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파이퍼 목사는 영어성경으로부터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인용된 성경은 파이퍼 목사의 의미를 살려 영어성경으로부터 옮겼으며, 굵은 글씨는 모두 글을 옮긴 필자의 강조이다.
“[문] 개혁주의와 청교도전통에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소책자 「비전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기도들이 우리 예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비전의 골짜기」는 청교도들의 기도집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기도들을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범주에 두고 싶습니다. 그 기도들은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일종의 운율 같은 것이 있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공동체적 셋팅에서 쓸 수 있도록 아마도 아주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기도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이 성경적 실재라고 답변드립니다.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명상하라"(시편 1편) 제 생각에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 이게 뭔가요? 이것은 육체적인 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조명받아 여러분의 소명을 알게 되기를!"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을 때 언급된 바로 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봄, 또는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멈춰서 들여다 보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으로 실재에 이르러 여러분이 영적 실재를 파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고 참되고 인격적이고 따스하고 강력한 일종의 기도를 일으킵니다. (* 옮긴이주: 파이퍼 목사가 일부러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채널인 렉시오 디비나의 네 계기, 즉 읽기(lectio), 명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가 모두 나타난다. 여러분도 꼭 렉시오 디비나나 관상기도라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 주의를 잡아 끌면서 읽기를 멈추고 깊은 묵상을 하면서 성령의 의도를 깨닫고 그 다음에 나올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확인해 가면서 이에 따라 기도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히에로니무스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는 성경읽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관하여 이연학,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in: 『활천』 2007.7:40-44을 참조할 것.)
그래서 제 답변은 제가 방금 정의한 대로의 관상기도와 명상의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 대해 "예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고, 그 사귐에 있어서 매우 신비적인 이런 종류의 깊이와 이런 종류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결을 발견하려면 주로 신비적인 가톨릭전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 수업들에 대해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레벨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 레벨에서 영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관상하며, 놀라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상이 일어난 이들의 훌륭한 대변자들을 찾기 위해 나쁜 신학, 즉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나쁜 신학을 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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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파이퍼 목사의 견해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논점이 드러난다.
-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서도 관상기도는 존재해 왔다.
- 가톨릭 전통이 아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하다.(*1)
파이퍼 목사는 가톨릭 전통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정교회의 더 깊고 풍부한 영성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관상기도에 관한 한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인 나쁜 신학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보수개혁주의적 시각에서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일단 '나쁜 신학'으로 치부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영성전통을 배제하고 배타함으로써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복음주의, 개혁주의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냐 아니냐, 혹은 복음주의냐 아니냐, 혹은 개신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존 파이퍼 목사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그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도 아니고, 오로지 통성기도와 큐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는 나머지 통성기도와 큐티 이외에도 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이라는 무지막지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답변을 본 다음에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 존 파이퍼 목사는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자다. 또는 관상기도는 성경에 없는데 존 파이퍼 목사가 가톨릭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존 파이퍼 목사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 등등.
아니면
- 적어도 관상기도의 성경적 실재를 인정하고 계발할 필요가 있다.(*3)
*1: 이것은 단지 파이퍼 목사만의 개인적인 견해만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만 있는 '이방풍습'이 아니라, 칼뱅과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들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 개혁교회 자신의 전통이다. 다만 한국교회가 미국의 대부흥운동 전통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배정웅, 「개혁주의 전통에 나타난 관상기도」 in: 『새들녘』 2010.11:3-5쪽을 참고할 것.) 이동원 목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목회리더십연구소를 통해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칼럼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복음주의적인 관상기도'라는 화두를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소위 큐티 역시 성경말씀에 따라 하루를 조직하는 수도원주의의 잔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Christian Spirituality :129) 큐티 외엔 말씀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동굴의 우상'(플라톤)이다.
*3: 좀더 인터넷을 뒤져 보니 지난 2010년 말쯤에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통 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하셨다고 자신을 밝힌 '나그네'라는 분이 이 게시판을 장악한 근본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댓글에서 이동원 목사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받은 답신을 이동원 목사님에게 추후 동의를 구하고서 공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동원 목사의 메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그네님의 발제글과 댓글에 나타나는 관상기도 혹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변호도 깊은 학문적 훈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보기엔 나그네님의 관상기도 개념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는 점이나 '비움'에서 오로지 '이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동원 목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복음주의의 협소한 교리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그네님은 미국교계에 관해 우리가 잘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관계를 전해준다. 즉, 미국에서 95%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교들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관상기도를 비난하는 것은 5%의 근본주의 계통 신학교라는 얘기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관상기도를 종교다원주의 이단으로 단죄해겠다고 기세등등해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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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최근 케빈 밴후저도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교회가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양태가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어떤가? 명목상으로는 개혁주의, 보수신앙,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한국교회의 실질은 개혁주의라기보다는 반공숭미주의요, 보수신앙이라기보다는 수구기득권신앙이요, 오직 내 생각으로만, 오직 내 신념으로만, 오직 미국의 은혜로만이 아닌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바로 실질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진짜 믿음의 현주소에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에 바로 나 자신부터 내 믿음과 삶의 명목상 명분이 아니라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살펴보고 정직하게 가늠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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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2. 글쎄. 양심고백이라. 과연 그럴까?
이광선 목사는 마치 길자연 목사가 금권선거의 원흉인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교계의 금권선거는 어제 오늘의 관행이 아니다. 몇십만 원을 받은 아무개 목사가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이게 어디 그렇게 새로운 일이었던가. 이건 일을 터뜨리기 위해 새삼 터뜨리는 전략적 행동이 아닌가. 결국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특정인에게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게 뻔히 보이는 석연치 않은 모양새다. 이런 경우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당사자 역시 뭔가 구린 구석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배후 알력관계가 짐작되긴 한다. 짐작이 맞다면 이건 소위 양심선언을 들먹일 성질의 것이라기보다 추하고 부끄러운 교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태의 본질이다. 거기에 세간의 여론까지 끌어들인 셈이고.
3. 작은 공동체든 교회기구 차원에서든 결국 이런 진흙탕 싸움은 제딴에는 공평과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내 편은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고 네 편은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는 사탄의 졸개라는 흑백논리가 난무하게 된다. 각자 제딴에는 성전을 치르는 십자군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십자군 전쟁'의 미몽을 헤매게 된다. 제딴에는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하나님은 이들의 승패에 하등 상관이 없으시지 않을까.
4. 이들의 진흙탕싸움 자체엔 탄식과 한숨 외엔 별 감흥이 없다. 다만 무겁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는 분들이 저러고 나서 뒷수습은 고스란히 한국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특히 사이비이단문제에 관해 이광선 총회장 재임기간에 벌어진 혼란상이 염려된다. 길자연 목사는 직전 사이비이단대책위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대책위를 새로 꾸리기로 했었다. 혼란한 한국교회의 사이비이단문제 대처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조처였다. 최근 길자연 총회장의 직무정지처분은 이와 같은 범교회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 손봉호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시는 것 같다.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금권선거시비가 없는 것과 달리 보수진영은 박형룡 목사 이래로 돈문제로 끊임없이 시비가 붙고 있으니 부끄러워들 하실 법도 하다. 원래 한경직 목사 등이 한기총 설립을 추진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어엿한 한국개신교회의 공교회적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공교회성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아울러, 적어도 초창기의 한기총은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등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독교정신을 구현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나아가 남북화해에 물꼬를 트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제기되는 한기총해체론은 주된 배경과 근거가 된 금권선거문제가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반동적 권력기관 노릇을 극우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으며, 한기총 설립정신을 거슬러 일개 이익기관으로 전락해 있다. 현재 한기총의 정체성과 관행 자체가 원래 시작되었을 때의 정신과 전망을 거스르고 있는 서글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드러내준다.
사회여론?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에 대해 쌓인 것들이 많으시다. 특히 현 정권 들어서 장로대통령이 뽑혔답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기라도 한 줄로 믿으시는 분들의 혁혁한 공로 덕분에 사회여론은 분명 교회권력을 엎어버릴 틈을 노리고들 있다. 이러던 차에 한기총 해체 얘기가 교계 내부에서 나오니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6. 앞서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교회가 쇠락을 맞이하는 가장 심각한 원인은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비복음적 보수주의"에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의 쇠퇴를 일으켰다고들 하면서 마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하다면 정말 크게 착각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울어가는 현상은 소위 보수적 신앙인들의 비복음적 행태에서 99%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과 한기총 (그리고 각 교단)의 금권선거문제는 비복음적 보수성의 진부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기총 해체? 답답한 분들 심정에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비복음적 보수성이라는 한국교회의 정신적 토대의 문제다. 어차피 한국교회는 공교회로서 조직을 이루어가려고 하게 될텐데, 정신성이 잘못 뿌리내려 있는 한 문제는 늘상 터질 수밖에 없다. 저 찬송가공회의 착잡한 난맥상은 그 '공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과 영향력과 성공과 인기와,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 한 이 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2) 교회의 존재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이다. 한기총해체론은 한국교회에 닥친 심각한 위기, 참된 토대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가 여부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7. 교회는 실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계시의 정신이 주어져 있는 한, "고백자 베드로"(바르트, 쿨만, 래드) 위에 교회는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마태복음16:13-20)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한국교회의 현재 위기로부터 새롭게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기다린다. 한국교회가 아집과 욕심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뉘우쳐 돌이키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덧붙임]
(*1) 글을 쓰고 나서 한기총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에 지난 2010년 4월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내놓은 탁월한 분석에 대한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지방 기자는 한기총의 설립과 성장 배경 가운데 반공주의와 교회의 대형화라는 요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렵다고 진단한다. (→발제문전문)
다만 당시 교계원로들의 한기총 설립정신을 반공주의로 뭉뚱그리기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본 블로그에서도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비판적인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기총이) 반공주의라는 정신성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대목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가능성으로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결과적으로는 보수진영만의 연합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아쉬우나마 한국교회에 공교회성을 표현하는 그릇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이비이단문제 역시 각 교단들의 단죄가 공교회성을 담보하는 틀을 제공했다는 데서 한기총의 긍정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문제는 이 긍정적인 역할마저 높으신 분들의 진흙탕 싸움으로 말미암아 흐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2) 한국보수주의교회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본격적인 분석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망라하는 국내 중진신학자들에 의해 3년 공동프로젝트로 이뤄질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김진호, 강인철, 구미정님등 눈에 익은 학자들의 이름이 보여 신뢰감과 기대감을 더한다. 다만, 문제는 대형교단들 스스로 자기성찰을 해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주로 기장, 성공회와 같은 진보성향의 중소교단에 의한 분석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석이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같은 곳에서 나와줘야 할텐데, 서슬퍼런 교권 앞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을테니 아쉽고 안타까울 다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들인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을 뒤엎은 것과 같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이 교계의 주류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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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설명] 첫번째 짙은 파란색은 무종교, 연두색은 카톨릭, 빨간색은 개혁교회, 노란색은 개혁교단, 보라색은 화란개신교단, 옅은 파란색은 기타 종교를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인 1970년대 초에 교세가 약간 늘어났다가 90년대에는 다시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집필된 네덜란드주교회의 새교리서(1966)를 교황청이 검열한 '화란교리서사건'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보수화, 경직화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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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전쟁예언의 사각지대
일단 예언이 나왔다면 그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는지 주의깊게 시험하여 보고,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합당한 방향으로 돌이키면 될 일이다.
1.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예언인가?
오워 박사의 불분명한 신학적 배경이나 이현령비현령식 예언행태에 대한 이의제기가 많이 되고 있다. 이 의혹들을 간추리면 이렇다.
1) 오워 박사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초심자'이며,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두 여인과 동거했던 전력이 있다.
2) 오워박사의 부르심이야기에 성경에 낯선 the Ark of the New Covenant of The Lord in God's Throneroom이나 "천국 문 앞에 떠 있는 두 개의 결혼반지"와 같은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온다.
3) 오워 박사의 집회에서 '신사도운동' 계열에서 관찰되는 '쓰러짐' 현상이 나타난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을 처음 퍼뜨린 카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도 신사도운동 계통이고, 특히 이곳에는 92년 종말론파동 때 다미선교회 미국지부를 맡고 있던 장요셉 목사가 참여하고 있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 다수에서 통역으로 나오는 사랑과 진리 교회 벤자민 오 목사도 신사도운동가다. 신사도운동은 이미 교계에서 광범위하게 도입 내지 참여금지 판단이 내려진 기피단체다.
이 의혹들은 어찌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지나친 정죄로 보이기도 한다.
- 두 여인과 동거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케냐 같은 아프리카나라에 일부다처제가 남아있을 수 있다.
- 쓰러짐 현상은 부흥회를 아주 심하게 하다 보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전면에 내세운다는 게 치우치고 위험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때때로 성령은 주류교회에서 추방된 공동체 가운데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
다만, 그의 부르심이야기에서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오는 점은 걸린다. 이것은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펄시 콜레의 천국간증 때 비성경적인 표현이 그의 정체가 탄로나는 데 단서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펄시 콜레 역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얘기한 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었고, 천국간증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한낱 사기에 지나지 않았다.(*1)
사실 오워 박사의 예언은 주께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식으로 잘라 말하지 않으면 후련하고 시원하지 않다. 하지만 후련하고 시원한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정확한 답을 찾아가는 쪽이 낫다. 누군가를 사이비이단이라고 판단하는 일은 확고부동한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제기된 의혹들 가운데 위험천만한 대목도 있지만, 확고부동한 증거랄만한 신학적 오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관련자료를 좀더 충분히 수집해서 찬찬히 살펴 본 뒤에야 이 부분을 확실히 할 수 있다. 해서 판단을 유보해 둔다. 일단 정확하다고 확신되는 판단이 서면 이 부분의 서술은 보다 간명해질 것이다.
2. 예언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매김이다.
사실 오워 박사가 말하는 한국교회의 죄 자체는 누구나 공감할 만큼 상식적이고 원론적이다. 번영과 성공의 신학, 음란의 죄 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돌이킬까?
상대적으로 음란의 죄는 돌이킬 방향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번영과 성공의 신학은 어디로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돌이킬 수나 있을지, 문제가 참 간단치 않다.
한국교회의 성공신학은 한 마디로 힘의 숭배다. 번영신학, 성공신학의 죄를 회개하자고 말하는 그 자신들이 힘의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앙모해온 미국교회 복음주의와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주류는 어김없이 정의를 강탈한 기득권과 결탁하여 안녕을 도모한 야합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득권과 결탁한 나머지 그들의 이데올로기, 특히 반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 6.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한국교회가 북한에 대해 강한 트라우마를 갖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렇더라도 한국교회가 반석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진배 없이 내면화 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기득권를 비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득권을 비판하면 빨갱이라는 의혹의 따가운 눈길부터 주기 바쁘다. 나아가 기득권의 원의에 적극 봉사하기까지 한다. 현 정권을 지극정성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뉴라이트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자기 반석으로 삼은 한국교회는 기득권에 밀착하여 번영과 성공을 누리느라 예언자적인 비판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이 땅의 우파 기득권과 하나님의 뜻을 간단히 동일시하고, 소위 좌파를 사탄의 무리, 빨갱이로 즐겨 단죄하며, 북한에 대한 증오와 공포에 노예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런 수구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기득권층은 북한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안보장사를 해왔고, 한국교회는 이 비루한 안보장사에 이용당해 왔다. 그렇기에 불쌍하고 딱한 북한정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기 보다, 저 사악한 북한 정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폭싹 망하기를 피를 토하듯 기도한다. 이렇게 하면 기득권층과 기성세대에게 성공이라는 일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힘을 숭배하는 성공신학을 쉽게 버릴 수 없다.
구약예언자들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강력한 저항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비판은 바로 당대에 벌어지고 있었던 힘의 숭배라는 성공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검은 것을 희다하고, 흰 것을 검다 하며, 저울추를 속이고, 약자의 판결을 굽게 하고, 의인의 의를 거짓으로 강탈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평안이 성직자들의 축복으로 계속될 것으로 믿어 의심지 않는 시대의 불의와 신앙의 태만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구약예언자들은 그들 사회에 가득 퍼져 있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힘을 숭배하는 바알신앙을 우상숭배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 한국땅의 바알신앙은 다름아닌 반공이데올로기다. 반공이데올로기가 교회를 망치고 있다. 한국교회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추구할 힘마저 빼앗아 버리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때 이 땅의 교회를 오염시켜온 수많은 이세벨들이 외칠 것이다. "저 빨갱이 사탄의 무리를 잡아 죽여라!"
교회가 반공이데올로기에 안주해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통일은 멀고 전쟁과 폐허는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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