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4. 17:49

구약성경의 외경 혹은 제2정경과 위경에 관하여

천주교나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경은 개신교처럼 39권이 아니다. 천주교의 경우 7권의 책이 더 있으며, 정교회는 지역교회마다 조금씩 다른 책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책들을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경이라 부르고, 천주교에서는 제2정경이라 부른다.


외경, 혹은 제2정경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또 위경이라는 책들은 무엇인가?

 

1. 왜 개신교와 천주교/정교회의 구약성경은 차이가 나는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개신교의 39권 구약성경은 히브리성경의 전통이며,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46권 내외의 구약성경은 그리스어구약성경의 전통이다

이 두 가지 정경의 전통을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타인정경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2.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타인 정경?

그리스어구약성경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유대인들(재외유대인들)이 즐겨 읽던 책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본토유대인들에게 이 책들은 신적 권위가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20세기의 성경개론학은 알렉산드리아 전통(=칠십인경)과 유대 전통(=히브리성경) 두 가지가 양립 내지 대립해 있다고 여겼다.


2.1 "얌니아회의"

19세기 유대학자 하인리히 그랫츠의 주장 이후 20세기 중반 정도까지 "얌니아회의"의 가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유대 팔레스타인 전통을 반영하는 히브리성경은 주후 90년경 얌니아회의에서 제정되었고, 알렉산드리아 전통을 반영하는 칠십인경은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을 계승한 이방초대교회의 전통을 반영한다고 여겨지곤 했다.


2.2 얌니아회의에 관련한 가톨릭근본주의 호교론의 주장들

가톨릭근본주의 호교론은 얌니아회의 가설로부터 다음과 같이 개신교를 공격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만들어냈다.

(1) 얌니아회의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문이 선언되었다. 개신교는 그 얌니아회의의 성경을 받아들인 것이다.

(2)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칠십인경을 읽었다. 개신교는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읽었던 성경을 부정했다.

(3) 신약성경에는 외경이 300여 군데 인용되어 있다. 개신교는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읽었던 성경을 부정했다.

기타등등.


이런 주장이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가?

 

3.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타인 정경의 구분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 성경학계의 연구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방향에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구체적인 근거로서 (1) 당시 재외유대인이 남긴 문헌적 증거 (2) 소위 얌니아회의의 허구성 (3) 헬라어번역성경인 70인경을 통한 증거 등을 들 수 있다.


3.1 재외유대인들의 사례들

소위 디아스포라 유대지식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요세푸스나 필로의 기록에서도 히브리성경과 나머지 문서들은 인용 빈도수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나며, 권위있게 받아들여지는 정도 역시 달랐다. 오히려 요세푸스나 필로는 오늘날의 히브리성경 24 (=개신교 구약성경 39)과 비슷한 22권을 정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오늘날 히브리성경은 24권으로 계수되나, 계수방법에 따라 22권이 될 수 있다22권이 24권으로 계수된 것은 아마도 완전수 12+12라는 히브리적 숫자관념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재외유대인들은 평생 적어도 한 번은 본토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유대교의 표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2 얌니아회의?

그렇다면 얌니아회의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한 마디로, 얌니아회의란 주후 90년이라고 때를 특정하기조차 곤란하게 느슨하게 지속된 랍비들의 회합이었다. 이 모임은 산 헤드린 공회와는 달리 학파간의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으며, 어떤 구속력 있는 법적 결정이 내려지는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공의회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 유대지식인인 요세푸스가 그 시대 가장 앞선 소식통이었음에도 얌니아에서 공의회적 성격의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소위 얌니아회의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역사가였던 하인리히 그랫츠가 발표한 이래로 20세기 중반 정도까지 유행했지만 1960년대 이후 개연성이 없는 것으로서 이미 기각된지 반 세기가 넘는 낡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랫츠가 '얌니아회의'를 말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공의회 개념에 의한 유비적으로 유추한 결과이다. 이를 20세기 서구성경학계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었다.


A. 개신교는 얌니아회의를 계승했다?

그렇다면 얌니아회의에 기초한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주장은 개신교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20세기의 발명품일 뿐이다.


B. 얌니아회의의 저주선언?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문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랍비들의 기도문에 지나지 않는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을 얌니아회의에 갖다 붙인 가공의 얌니아'공회의' 저주선언(anathema) 버전으로 둔갑시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의 저주기도(birkat ha-minim) 제정을 포함한 얌니아공의회 이론이 일종의 신화라는 현재 논의상황에 관해, 나의 글 "소위 얌니아공의회의 신화"를 참조하라.)


3.3 개신교는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읽었던 칠십인경을 버렸다?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칠십인경을 읽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A.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모국어는 아람어였으며, 그리스어의 이해 정도는 제한적이었을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인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고백했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들의 그리스어 구사 능력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을 위시한 1세기 후반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외경이 디아스포라 유대인 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성경으로 통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3.1항과 아래 3.3.B항을 참조하라.)


B. 칠십인경에 포함된 나머지 책들이 예루살렘과 유대 본토에서 성경으로 읽혔어야 한다

그러나:

- 외경이 예루살렘과 유대본토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 칠십인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있는 칠십인경과 동일한 범위를 가졌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다. 칠십인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모세오경만을 갖고 있으며, 외경을 포함한 후대의 고대사본들에 수록된 외경 목록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 있는 칠십인경은 서로 다른 외경을 갖고 있는 후대사본들로부터 그보다 더 후대의 교회가 재배열하고 종합한 재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쿰란문헌은 어떤가? 어쨌든 외경이 발견되지 않았는가? 이 역시 조금도 가톨릭근본주의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 외경이 발견되었으나 극히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 인용빈도수 역시 극히 빈약하다.


C. 신약성경의 구약외경 인용 문제

신약성경에서 구약외경은 어느 정도 인용되는가? 300여회 인용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300여회 인용되었다는 숫자는 신약성경 원전 뒷면에 성경 인용 및 암시 목록(Loci citati vel allegati)의 숫자가 그 정도 되는데, 이걸 두고 하는 얘기인 것 같다. 그러나 목록을 조금만 검토해 보아도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성경인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단순히 인용되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성경이라는 뜻도 아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외경만이 아니라 위경과 심지어 그리스 시인의 글이나 속담까지 인용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외경이 인용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외경이 구약성경과 더불어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었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약성경의 구약외경 인용 문제에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성경으로 인용할 경우에는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인용한다는 점이다히브리성경의 경우 약 2/3 정도가 성경으로 인용되었다따라서 적어도 이 책들은 당시 이미 성경으로 통했다는 것이 입증된다나머지 1/3 정도는 (최소한 일부는성경으로서 권위를 얻어가는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하물며 구약외경은 그런 식으로 인용된 바가 없다. (오히려 구약위경인 에녹1서가 신약성경 시대에 성경으로 여겨졌다면 모를까!)

요컨대, 신약성경의 구약외경 인용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 구약외경이 외경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이다.

 

4.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 구약성경이 존재했는가?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 구약성경과 외경 사이에 구분이 없었는가? 구약성경 22/24권 또는 39권은 당대에 아직 완결되지 않았는가?

확실히 오늘날과 같이 뚜렷하게 구획짓는 성격의 구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경과 외경/위경 사이의 구분은 오늘날보다 느슨하고 유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과 비정경문헌 사이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미 앞의 기술을 통해 22권이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점과 구약성경의 적어도 2/3 정도는 성경으로 인용된 반면, 외경은 성경으로 인용된 사례가 없으며, 성경으로 읽혔던 증거도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3.3항 참조.)

당시의 상황은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A. 완결되었다는 입장: 

필로가 히브리성경 22권의 존재를 증언했기 때문에 주전250년 경에서 주전 1세기 경 무렵에는 오늘날과 거의 같은 범위의 히브리성경이 정경적 개념으로 읽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외경인 예수 벤 시락의 집회서 서문에 기록된 대로 당시 히브리성경은 두 가지(율법과 선지자), 또는 세 가지(율법과 선지자와 시편 등)로 구분되었을 것인데, 오늘날 성문서라 불리는 문서들 가운데는 아직까지 정경적 권위가 의심되거나 논란되었던 문서들이 있었을 것이다.(에스더서, 전도서 등.) 그러나 이 역시 이미 정경으로 통용되었다는 정황을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

B. 완결되지 않았다는 입장:

쿰란공동체의 성서들은 아직까지 정경의 범위가 유동적이었으리라는 추론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또한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와 달리 성경의 범위를 정하여 구속력 있게 공표한 적이 없고, 서기관들의 사본길드를 통해 천천히 정경의 범위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본적 증거를 토대로 판단한다면 기원후, 심지어 중세까지도 내려 잡을 수 있다.

A안과 B안의 약점과 강점은 사본적 증거로 귀결된다. 

A안의 약점은 22권 정경을 뒷받침해 줄 단일한 (양피지)사본이 없다는 점이다. 

B안의 약점은 사본의 증거에만 의존해 있다는 점이다.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태로 개별 책자를 보관해 왔던 유대교 전통에서 정경의 범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했다는 점이 간과될 수밖에 없다. B안의 약점은 A안의 강점을 설명해 준다.

아마도 A안 쪽이 당시 대세였을 것이고, B안 쪽의 경향도 존재했을 것이다

본토유대그리스도인들 중심의 초대교회에서 디아스포라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주축으로 한 초대교회를 거쳐 이방인 개종자 중심의 초기교회로 넘어간 이후 교회가 - 비록 일치된 목록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 서서히 외경들을 구약성경에 포함시키는 추세를 보여주었던 것은 예루살렘모교회의 붕괴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의존하게 된 초대/초기교회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토유대인들과 교류를 지속했던 교부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는 A안의 우위성을 설파했다. 종교개혁 전야에 이르기까지 A안의 우위성에 대한 인식은 서방교회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성경에서 배제한 것은 그들의 개인적 발명이나 변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전통의 맥락에서 나온 조처였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 소위 종교개혁 '진영'만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종교개혁 전야에 생존했던 프란치스코 지메네스 데 시스데로스 추기경이 편찬한 다국어성경(Complutensian Polyglot) 역시 외경에 대해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5. 오늘날 구약외경 혹은 제2정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5.1 외경 혹은 제2정경의 용어문제

20세기 성경개론학에서 말했던 소위 알렉산드리아 정경의 개념은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즉 고대 그리스도교회가 구약성경 전통을 나름의 확장된 시각을 통해 재규정하려고 노력했다는 의의는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구약외경 내지 제2정경은 유대교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고대그리스도교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구약외경을 성경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고대교회의 큰 흐름이 결국 만장일치의 결과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은 "히브리적인 것의 우위성"(히에로니무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오늘날 외경의 책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교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고,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 단계 낮은 권위와 중요성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제2정경으로 부를 수 있다. 이는 역사적, 현실적 실재에 부합할 뿐 아니라, 이 책들에서 교리적 전거나 성경적 중심을 두려 하지 않는 개신교나 정교회의 경우에는 이런 의미에서 받아들여지는 한 큰 문제 없이 통용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 개신교 근본주의 노선에서 성경 66권의 의미를 너무 경직되고 편협하게 규정한 나머지 외경을 읽거나 제2정경을 받아들여 연구하는 것 자체를 - 비록 제2열에 속할 지언정 - 또 다른 '정경'을 제정하려는 불순한 행위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신이라거나 "하나님 말씀에 무엇을 더하는" 배교적 행위로 간주하여 백안시할 경우이다. 그러나 외경 내지 제2정경은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연구하고 이해하면 될 중요한 성경배경문헌일 뿐, 백안시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

로마가톨릭에서 제2정경이라 일컬을 때는 한 단계 낮은 권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중에 덧붙여 졌음을 의미한다. 로마가톨릭, 특히 중세버전에서는 제2정경의 특정 구절들이 매우 중요한 교리적 전거와 성경적 중심에 해당된다. 그러나 최근 로마가톨릭에서는 연옥표상에 대해 전면적인 재해석을 가하고 있다. 따라서 소위 제2정경의 특정 구절들이 예전처럼 중요할는지는 의문이다. 

세계교회의 지평에서 볼 때, 제2정경이라는 용어는 개신교와 정교회, 로마가톨릭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5.2 외경의 유익

외경을 알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일어난 정신적 분위기의 변화 이유를 보다 쉽게 짐작할 수 있으므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굳이 외경으로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신교에서 외경이 교리에 반영할 수는 없으나 읽어서 유익이 된다고 가르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이것은 심지어 정교회에서도 동일하게 통용되는 외경에 대한 태도이다

외경의 특정구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특정교리를 이끌어낸 것은 로마가톨릭교회 뿐이며실상 이는 정확하고 정당한 주석에 뒷받침되지 않는 채 전통적 선입견을 시대착오적으로 비슷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특정구절에 연결시킨 결과일 뿐이다.

이점에 유의한다면 구약외경연구는 성경이해에 매우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다.

 

6. 위경은 거짓된 문서인가?


한 마디로 말해 그렇지 않다. 위경은 거짓된 성경이라는 뜻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름을 빌어서, 즉 저자가 가명으로 기록했다는 문헌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신구약중간기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중요한 문헌은 에녹 1서인데, 에녹의 이름을 빌어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은 에녹 1서를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받아들여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위경문학 자체가 읽어서는 안 될 거짓된 것은 아니다.

위경문학의 방법은 오늘날의 저작권 관념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을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고대에는 플라톤이 말했다시피 진짜 거짓말 보다는 거짓으로라도 참을 말하는 편이 낫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신구약중간기 문헌을 고대의 그리스도 교회에서 개작한 경우들도 있으며, '위디오니시우스'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중세까지도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서 유명한 위인들의 이름을 빌어쓰는 것은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서 선호되었다. 다만 발각되면 배제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구약 외경과 위경의 차이점은 위경의 경우 구약위인들의 이름을 빌어서 집필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추세를 말할 뿐이지 예외가 없지 않다. 가령 구약 외경 가운데 다수는 일종의 위경문학으로 봐야 하지만 외경으로 분류되어 있다. 아마도 위경문학 가운데 특별히 인기있었던 몇몇 문서들이 경전적 지위에 버금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위경문학 가운데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부 문헌들이다. 이 문헌들에 나타나는 영지주의는 사도적 복음의 역사적 진리에 배치되는 메시지가 담겨 있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부 영지주의 문헌들이 곧 위경 전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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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참고문헌] Lee Martin McDonald, The Biblical Canon (1995); Lee Martin McDonald and James Sanders ed., The Canon Debate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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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1. 18:13

소위 예수에게 부인이 있었다는 얘기에 관해

소설 다빈치코드 이후 다빈치코드에 담긴 반기독교적 개념들이 사실로 둔갑하여 보도되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가룟 유다 복음서에 대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터무니없는 과장광고가 그랬고,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나의 아내"라고 불렀다는 콥트어 단편이 발견되었다는 하버드신학대 캐런 킹 박사의 학술적 발표를 선정적으로 기사화하는 보도행태가 그랬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먹고 살려니 별 짓을 다한다, 이런 얘기를 받아적기하는 기자들도 신학적 기본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탓이지 하고 웃어넘겨 왔는데, 이런 간단한 유언비어에조차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마저 낚여서 헤매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있는 것 같다. 교회의 선포와 교육의 장에서는 이런 내용이 다루어지기가 여의치 않은 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간단하게라도 사실관계를 밝혀둘 책임을 느낀다. 


우선,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진실을 새로 밝힌 것은 없다. 작가 댄 브라운은 거기에 나오는 사실관계가 "모두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이것부터가 거짓말이다. 그가 한 일은 고대 영지주의 문헌에서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그것도 부정확하게 끄집어내어 자신의 반기독교적 의도에 맞게 개작했을 따름이다.


고대 영지주의 문헌이라면 소위 역사적 사실 여부에 정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웃어넘겨주어야 한다. 영지주의란 요새 말로 '의미', '뜻'이 중요하지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열등하다고 간주한다는 주의였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 복음서니, 무슨 콥트어 단편이니 하는 것들을 교회와 신학이 몰랐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목록과 내용이 다 알려져 있다. 여기에 대한 새로운 발굴성과나 연구결과가 나오는 것은 영지주의 연구라는 특정 신학분과의 성과에 벽돌 한두 장 얹어놓는 정도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실관계 측면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란? 고대인들이 예수에 관해 구라친 역사적 기록, 또는 화장실에 애들이 끄적거린 낙서 비슷한 성질의 것이 하나 더 얹어졌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경, 그 안에 담긴 사복음서야말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대교회의 검증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게 기독교에 불신과 의혹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곧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기록이 전설의 고향 쯤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코메디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성경의 기록을 전설의 고향 쯤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싶어할 정도로 투철하게 "비판적인", "역사비판적인", "반기독교적 현대인"이 고대 영지주의 문헌에 나온 쉰 떡밥을 덥썩 물고 희희낙낙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무슨 얘길 해도 기독교 안티질을 그만두고 싶지 않으실 분들이야 쉰 떡밥으로 무엇을 하시든 더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쉰 떡밥 덥썩 물고 배탈나시는 해프닝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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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2015.07.19]

캐런 킹 박사가 발표했던 문제의 콥트어 단편이 위조된 것이었다는 쪽으로 결론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둘 내용:

- 가룟유다복음서와 마리아(막달레나)복음서 자체는 이미 그 존재와 내용의 윤곽이 알려져 있다. [예컨대, 각각 Schneelmelcher (ET1990):386f, 391f.] 따라서 이런 영지주의 계통 신약외경들의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 그러면 캐런 킹 박사의 콥트어 단편에 왜들 이리 호들갑인가? 가룟유다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노이즈마케팅에 불과한 비루한 짓거리다. 모르긴 몰라도 캐런 킹 박사도 좀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알려져 있던 신약외경 일부의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정도 얘기를 갖고 신약정경의 예수상이 무너졌다고 나팔 부는 자들은 도대체 뭔가? 양심불량이 아니라면 자신의 무식과 태만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 그나마 문제의 콥트어 단편조차 조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고대의 종교적 낙서 유물이 발견된 줄 알았더니 현대의 고대낙서유물 흉내질이었던 얘기. 저명한 초기그리스도교연구가 캐런 킹 박사 개인이 조작질에 연루되지 않았으리라는 건 다행이고. 반기독교적 떡밥이 뭐가 더 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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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9. 03:25

말씀의 사유화, 역기능적 신앙

한국교회가 요즘 사이비이단들의 창궐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비이단들은 한국교회가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 말씀에 더욱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탄의 가시다. 사탄의 가시를 두려워하거나 저주할 게 아니라, 이 문제 너머 계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왜 사이비이단들이 창궐하는가? 결국 말씀의 사유화, 교회의 사유화에서 비롯된다. 하나님 말씀은 사도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유대 안에 있는 전 세계의 공교회에 선사된 것으로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유화될 수 없다. 그것이 교황과 같은 역사와 전통과 힘의 아이콘이든, 유력한 특정 교회전통이든, 또는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는 특정 계층이든 말이다. 하물며 일개 교주, 일개 목사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구절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이익관계에 맞도록, 자기 원한관계를 풀기 위해서 갖다 붙여가며 해석질을 하고 있다. 이들의 해석질은 성경본문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주석적 이해와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복음의 정신, 계시의 정신에 충실한 자유로운 인용도 아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가 파악한 좁다란 율법주의적이고도 영지주의적인 하나님상과 자기중심적인 은원관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하잘 것 없는 소망에 대한 일개 종교권력자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쉴새없이 성경을 인용해대는데 성경의 정신은 쏙 빠져 있다. 쉴새없이 성경을 증빙전으로 들이대는데 그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정신으로 나온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알리가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성경 안의 새로운 세계"(칼 바르트)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 말씀을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로 제한하려드는 우상숭배행위 아니겠는가!


그 결과 그들의 성경인용이나 성경해석은 더 이상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하시고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복음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을 옥죄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협잡과 다를 바가 없다.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은 더 이상 성경구절이기를 그친다. 자기가 진짜로 섬기는 대상에 대한 우상숭배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이며,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하고자 세뇌하는 정서적, 영적, 심리적 지배테크닉(manipulation technique: Margaret Singer)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장 숭앙하는 듯 용의주도하게 가장 하나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진정한 속내로는 마술주문이나 다름없이 천하게 취급한다.


그들의 말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듯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자비와 용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진짜 속내는 자기 아집과 편견이며, 자기 권력과 이익의 증진에 있다. 그들의 입술은 아름다운 말을 그럴듯하게 하나 늘 독을 품었다. 귀 있는 자는 그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보라. 예수님은 결코 욕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독사의 자식들이다!


말씀의 사유화가 고약하고 지독한 까닭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 그것이 소위 보수개혁주의든, 복음주의든, 바르트주의든, 진보주의든 상관없이 -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영악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규신학교육을 받아서 어떻게 하면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지 안다. 차라리 사이비이단자들에 관해서는 그 허무맹랑하고 무식한 성경해석과 교리를 콕 집어서 교회공동체에 경고해 줄 수라도 있다. 그러나 말씀의 사유화는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사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렵다. 중세 말 종교개혁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게 곪고 썩은 뒤에나 모두의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창궐해 있는 사이비이단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토양으로 자라나고 있을 따름이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똑바로 깨어 있다면 사이비이단자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사이비이단자들이 수많은 이단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더욱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중 모두 말씀의 사유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저들 사교집단을 위한 비옥한 토양 노릇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증 아니겠는가?


흔히 사이비이단자들을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세워놓고 그들을 욕하고 저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패착에 다름 없다. 진짜 문제는 말씀 앞에 엎드리어 경청하기 보다는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내 맘대로 소유하려 드는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이단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잘못되었다. 그들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밝혀두는 것이 소위 근본주의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사이비이단을 옹호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밝히는 진리의 일꾼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비이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쏟아내어 자기 의를 충족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 나 자신이 십자가의 말씀 앞에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가득한 교만과 아집과 욕망을 하나님 말씀 따라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한국교회에 사이비이단이 창궐하는가? 하나님 말씀이 사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이 어디 우연인가? 하나님 말씀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개 개인, 일개 집단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만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 특히 억눌리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해방하시는 기쁜 소식이기를 그치며, 죽음과 멸망으로 악순환해 빠져들어가는 역기능적 행태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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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화된밤 2012.11.07 14:56 address edit & del reply

    오랫만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말씀을 빙자해서 하고싶은 말을 하는 것은 이단이든 기성교회 목사든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다만 '신학'이라는 객관적인 기준 아래 본문 자체가 말하는 말씀에 집중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조심하며 경계해야 할터인데 그 과정이 생략되버리게 되면 결국 멀쩡했던 사람도 망가지는것은 순식간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끊임없이 조언해 줄 수 있는 accountablity의 중요성을 생각해봅니다.

    오래 전에 '나눔'블로그에서 주인장님이 한국교회와 이단이란 포스팅을 통해 한국교회에 신천지같은 이단(사실 이단보다는 사이비에 가깝죠)이 판을 치는 이유가 "한국 특유의 근본주의적 성서해석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글을 쓰신 적이 있죠. 읽고 나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성서를 하나님 위에 올려놓다보면 얼마던지 가능한 일일테지요. 성경가지고 단어놀이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다른 번역본 하나만 가져와도 쉽게 깨져버리는 그런 단어놀이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걸 보면 정말 미혹의 영이 있구나~란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은 많이 추워졌죠? 건강 조심하시고 평안하세요!

  2. LUXYSAL 2012.11.09 12:07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감사합니다. 성경을 인용하지만 성경의 정신이 쏙 빠진 교회.
    요즘 한스큉의 '교회'를 읽고 있는데 역자 서론에 있는 글이 떠오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자기보존과 성장에만 치우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회피한다면, 결국 교회는 생맹력을 잃고 교회를 등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2011. 1. 25. 12:53

신앙의 항체

우리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과 순결한 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이 명분이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특별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순수한 복음 혹은 순결한 교리라는 명분 하에 교파교단간의 대화와 연합이나 종교간 대화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교파교단간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서로 입장이 다른 교파, 교단, 신학학파간 대화와 교류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이 주제는 이미 공교회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교파교단간 대화는 종교개혁 이후 줄곧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미 칼뱅과 멜랑히톤, 크랜머 주교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 각 교파의 대표자들은 당대의 교회일치적 대화와 교류를 추진한 바 있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와 같은 한 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신학자들 역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유럽개신교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아우르는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범교회적 대화 노력을 계승한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운동이다.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와의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두어야겠다. 

과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지만 과연 시대사조나 종교간 대화 일체는 저주받아 마땅한 종교혼합주의일까?

오히려 성경 자체가 종교간 대화와 통섭의 역사를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창세기1장은 고대근동의 우주론인 신통기(신들의 탄생 연대기)를 탈신화하하여 아우른 결과였다. 
-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왕정을 비롯한 이방문화를 흡수했다.
- 잠언은 고대근동의 지혜문학을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씀이다.
-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문학사상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받았다.
-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공박하는 동시에 영지주의의 상징과 이미지를 흡수하여 신앙을 설명한다.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무한정 길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을 거친 하이브리드였다.(*1) 신앙의 선조들은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했다. 

이 상황은 히브리낱말 '바알(בע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바알이라는 낱말 자체는 가나안신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문맥에 따라 남편, 주인, 주민, 지배자, 지배하다, 결혼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용례들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순수주의에 매달렸다면 이런 일상적인 용례 자체가 없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신앙의 중심에 야웨 하나님의 구원행동 대신 풍요와 번영이 들어설 때 바알신앙이라는 혼합주의로 퇴행하는 위기가 일어났다. 혼합주의란 신앙이라는 원에서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이지 하이브리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바리새주의가 보여주듯이 소위 순혈주의도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진다면 똑같이 문제다. 

오늘날 '하이브리드'라면 배교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이들이 있다. 불교나 유교에서 비롯된 말을 쓰면 안 되고, 신비종교에서 비롯된 기도방법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아무개 목사나 아무개 신학자는 시대사조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이비이단이고 거짓선생이란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되고 안경을 쓰면 안 되고 수혈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기만 완고하고 옹졸하면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그 독소를 한국교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니 문제다.

다원사회 속에서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어떻게 차단하고 배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이미 흡수하고 있다. 이미 불식간에 수많은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을 흡수하고서 '오직 성경만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올린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정신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오히려 이미 그것조차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혹은 기도의 응답과 꿈과 환상과 영음을 통해 자기 신앙이 '순수하다'라고 입증되기라도 한 걸까?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부터가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건강하다는 것은 병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항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에 대해 결벽증을 갖는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올바르게 가늠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믿음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믿음을 잘 벼릴 때 신앙의 건강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덧붙임]
*1. 하나님은 그런 '하이브리드'에 담긴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신다.(마태복음 16:13-20)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동적 영감성이다.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 예컨대, 밴후저 같은 이들은 -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있다. 신적 측면은 성경이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요, 인간적 측면은 성경이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서 기록된 제한적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가현설에 빠지게 되듯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성경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가현설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가현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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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항체  (0) 20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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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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