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30. 05:58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왜 로마카톨릭사제 흉내는 내는가?


별 굉장하지도 않은 목회자복식사까지 시시콜콜 세세하게 파고들 필요성은 없겠고...

그저 그림 몇 컷과 더불어 기초적인 사실관계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1. 목회자컬러는 이미 세계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두루 착용하고 있다.


목회자 컬러 가운데 특히 소위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특정 타입에 대해 오해들이 꽤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림1] 올라프 트베이트 목사 (노르웨이 루터교회)


[그림1]은 올라프 트베이트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노르웨이 루터교회 목사님)가 부산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 개막연설할 당시 장면이다.

응? 총무목사님이 목회자컬러를 입으셨네?

사도적 계승 의식이 강한 북유럽 루터교회라서 그렇다고? 


그럼 다른 루터교회는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루터교회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주리주 루터교회의 선교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소위 사도계승 운운하는 데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국루터교회 목사님들 복장은 어떨까?


[그림2] 엄현섭 목사 (한국루터교회)


[그림2]는
2010년 당시 한국루터회 총회장이신 엄현섭 목사님이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한 사진이다.
이분은 어쩐 일로 카톨릭신부처럼 입고 계실꼬?

카톨릭신부가 좋아 보여서 신부코스프레중이신가?


[그림3] 제임스 앤더먼 목사 (미국연합감리교회)


[그림3]은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감리교회 목사님 모습을 구경할 차례다. 우리나라 감리교회 목사님 가운데서는 김아무개 목사님 사진이 바로 검색되어 나오는데 썩 유쾌한 얼굴도 아닌지라 미국연합감리교회 소속 어떤 교회 담임목사님 사진을 걸어두겠다.

이분도 담임목사님으로서 권위있게 보이고 싶으셨나?


성공회는 성직복을 입는 교회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넘어가... 자니 성경대로 믿는 복음주의자는 절대 그렇지 않을끼다 하실까 싶어...


한 장 보고 넘어가자.

[그림4] 제임스 패커 신부 (캐나다성공회)


[그림4] 자... 이 할아버지는 누구실까?

물론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계의 원로 제임스 패커 되시겠다. 무려 동성결혼을 인정한다는 결정에 반대하여 캐나다성공회를 떠나 "보수적" 성공회네트워크로 옮기셨다는 기사에 실린 그림이다.


응? 아무리 성공회라도 그렇지, 성경대로 하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분이 비성경적이게시리 왜 카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고 난리지? 권위있게 보이고 싶었나? 이거 혹시...? "제임스 패커 프리메이슨", "제임스 패커 배교", "제임스 패커 종교통합"으로 검색해 봐야겠다!


혹은..


뭐야.. 제임스 패커가 신부였어?

책 다 태워버려야겠네!


아마도 이런 생각 하시는 근본주의 성향 신자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게다.

위와 같은 검색유입어가 생겨날 확률이 한 70%는 되지 않을까.

(==> 빙고! 실제로 이런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물론 제임스 패커 책은 찢지 않아도 된다. 사도계승을 중시하는 고교회적 경향이 강한 한국성공회는 목회자(pastor)를 사제/신부라고 지칭하고, 같은 용어를 종교개혁 전통을 중시하는 저교회적 경향이 강한 일본성공회는 목사라고 일컫는다. 목사로 부를 것이냐, 신부로 부를 것이냐는 번역상 문제일 뿐 결국 성공회목회자를 일컫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임스 패커를 성공회목회자로 보신다면 굳이 아까운 책 다 태워버릴 건 없다. 아니, 그렇더라도 좌우간 "카톨릭신부처럼 보이는 옷"을 입었으니 책 다 태워버리셔야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다만 이 글 읽으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어쨌든, 성공회목회자는 정말 "가톨릭신부처럼" 옷을 입느냐? 목회자복장이라는 걸 왜 꼭 굳이 하느냐 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 한국교회 전통에선 낯설게 보이지만 이분들은 신기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다. 왜 그럴까?



성공회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그러면, 장로교회는 어떨까?

[그림5] 유리 베리토 목사(미국장로교회)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리폼드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우리나라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에서 유독 좋아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포스팅하는 미국의 한 블로그 필진 가운데 장로교회 목사님 서너 분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프로필사진을 걸어놓으셨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근본주의 진영에서 동성애 문제를 승인했다며 분노해 마지 않으시는 PCUSA교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모르니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타고 가셔서 잘 찾아보시고 있으면 기탄없이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중 맨 위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추종자라고 자기소개하신 목사님 한 분 사진만 걸어두겠다.

왜 굳이 이렇게 하고 있을까?


영국목사님은?


영국교회는 다 죽었고 영국목사는 다 자유주의 엉터리라는 근본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분들이 참고해 보시라고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그림7] 케네쓰 스튜어트 목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케네쓰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이 목사님은 영국의 도완베일자유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개혁장로교단에 가입을 청원한 목사님이라고 최근 기사에 나온다. 이 목사님의 교단에 관해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 원래 스코틀랜드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였는데, 이 교단은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에 통합되지 않은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장로교단으로서, 무려 예배 시 악기까지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 목사님이 도완베일자유교회에 보낸 목회서신과 다른 관련기사들을 대충 훑어 보니 이 목사님은 이 교단이 보수적인 예배의식에 변화를 주는 데 반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사임하고 더 보수적인 "개혁장로교단"으로 가입하신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떠 있다.


원래 종교개혁자 칼뱅이나 존 녹스는 시편송 이외의 다른 노래를 엄격히 제한했고, 악기도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원조보수를 외치는 우리나라 근본주의 장로교단 소속 교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 기타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로 예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분은 어떤가? 찬송을 노래로 부르고 악기를 사용하는 예배의식의 변화 문제로 선후배로 동문수학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함께 연대하여 사역하는 동료목사님들, 함께 신앙생활해 온 교우들이 있는 정든 소속교단을 떠나겠다고 하신 거다! 이거 제대로 보수 아닌가? 그런데 이 보수적이라는 목사님도 목회자컬러를 하셨네? 이 무슨?


이밖에도 구글링을 조금만 해 보면 침례교회오순절교회 목사들까지도 목회자컬러를 한 사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왜들 이러시나?
카톨릭과 종교통합 하려는 프리메이슨의 지령을 받은 WCC의 음모인가?


2. 왜 개신교 목사가 로만컬러를 입고 가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나?


유독 한국교회에선 소위 로만컬러라고도 불리는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해 말들이 많다.(*1)

여기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꽤 크다.

법원에서 개신교목사들은 카톨릭코스프레하지 마라며 카톨릭 손을 들어주신 해프닝도 있으시고.

뭐...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 문제였다면 굳이 글을 남겨둘 필요가 없을터.


근데 소위 교회개혁 얘기하는 분들 가운데 이 부질없는 목소리에 부화뇌동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이건 예전에도 몇 번 보고 별 책임 맡은 분이 아닌 듯 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번에는... 책까지 내셨다는 분이 말도 안 되는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언론사까지 차려놓고 나름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 같은데...

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일단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니신 만큼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실명까지 거론하진 않겠다.

그분이 인터넷 구석에 짱박혀 있는 이 글을 읽으실 일도 거의 없을 성 싶지만....

예전 같으면 이런 분의 사이트에 직접 글을 올렸을 수도 있겠다만

이것도 공연한 논쟁의 먹잇감을 던지는 피곤한 짓인지라 한가하게 그럴 새가 없다.

에구... 그래도 이건 너무 답답한 노릇인거다.


혹시라도 보시거든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니하셔도 별 수 없긴 하겠지만...

부디 잘 좀 다시 생각해 보시라.


본인이 모르는 문제에 대해 잘 조사해 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많은 말을 무책임하게들 쏟아 놓는다.

할 때 하더라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과 글을 뱉지 마시길.

제발 좀 어느 정도 알아보신 연후에 그렇게 하셔도 늦지 않다고 정중히 권해 드리고 싶다.

필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한 일이거늘, 특히 영향력 있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3. 목회자컬러 내지 목사가운 문제를 말하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


첫째, 앞서 사진을 통해 분명한 사실: 소위 로만컬러라는 특정형태의 목회자컬러는 세계개신교회에서 널리 착용한다.


둘째, 소위 로만컬러가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까닭은? 가톨릭 신부들이 의무적으로 착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관용적으로 통하게 된 명칭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래 전부터 목회자컬러를 입어왔다. 카톨릭과 다른 점이라면, 목회자들이 소위 로만컬러만이 아니라 개인의 목회철학과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갖고 있었다.


셋째, 과연 오늘날 목회자컬러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고, 양복은 그렇지 않을까? 목회자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많은 목사들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와 와이셔츠와 고급외제승용차 따위를 지니는 것이 세속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의 훈장 같은 것을 과시하는 게 아닌가?


교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공궤받는 처지에 그럴싸하게 비싼 양복과 구두까지 받아서 목사 복장을 구분하여 세속적 성공을 뽐내라고 대체 성경 어디에 쓰여있나? 레위기라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의 하나 혹여라도 제사장 예복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레위기 연구 다시 똑바로 하셔야 한다.


4. 목사가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은?


목회자컬러 착용이 단지 종교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대한민국 개신교회 대부분이 미국의 제2차 대부흥운동의 지류 전통을 이어받아 출발한 데서 비롯된 그릇된 발상이다.


만인제사장론에 입각해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는 목회자컬러 착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일부 동감한다. 그러나 거듭 지적하거니와, 현재 한국교회에서 만인제사장론은 명목(de jure)의 피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실질적으로(de facto) 고가의 양복과 구두와 와이셔츠와 외제승용차 따위로 자기 신분을 구별하는 행태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는 데 불과하다. 더욱이, 만인제사장론 운운하는 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이유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관계의 출발점은 아니다.


목회자컬러 착용관습이 제2차 대부흥운동 전통에서 낯설게 된 까닭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고 본다. 즉, 드와이트 무디를 비롯한 대부흥운동의 대중전도자들 상당수는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전도자로서 목회자컬러를 착용할 일이 없었다. 대중전도자들의 영향으로 교세가 커진 교회들이 늘어나면서, 그 절대적인 수혜자였던 미국 근본주의나 오순절 계열 교회들에서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 목회자컬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의 장점과는 별개로 -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그림7] 브루스 코놀드 목사 (미국 근본주의 계통 무디 성경학교 출신)


무디성경학교 출신 브루스 코놀드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목회자 컬러를 착용하고자 하는 소수의 미국 근본주의 계통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자신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한 가지로 정리한다.


1. 목회자가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한 성경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2. 시각적으로 목회적 소명을 표현하기 위해
3. 세계의 다른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4. 역사적으로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5. 우리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 목회자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6. 선교사적 마인드로 옷입기 위해
7. 나의 소명을 일깨워주는 표지로서 세속적 복장을 부인하기 위해
8. 개인적 거룩성을 강화하기 위해
9. 나 자신을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0. 우리의 역사적이고도 동시대적인 가치를 살아내기 위해
11. 사순절 기간 동안 일종의 "베옷과 재"로서 목회예복을 입기 위해


나 자신의 입장은?


코놀드 목사님의 경우 근본주의적 교회환경 가운데 자신을 변호해야 할 상황을 만날 수 있는지라 주의깊게 성찰해 오셨던 것 같은데, 나는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못 느끼는 터라 굳이 말하면 실용적인 입장이다.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나 목회자컬러 혹은 제복이나 예복 같은 것은 결국 지엽말단의 비본질적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현장의 요구에 유의하여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대처할 수밖에 없는데, 감사하게도 섬기는 교회에서는 회중들이 이 문제에 대해 너그럽고 털털한 편이다. 해서 딱히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 색깔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냥 걸쳐 입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지엽말단에 관련하여 온갖 쓸데없는 수군거림 때문에 목회활동을 번잡하게 만드는 교회공동체가 의외로 꽤 있다.

아니, 목사 옷이 자주 바뀌지 않아서 덕이 안 된다고라?

와이셔츠 색깔이 새하얀 흰 색이 아니라서 시험에 드신다고라?

어이쿠... 예수님은 전도여행할 때 두 벌 옷도 갖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마태복음 10:10)

예수님 말씀은 어디로 가고 이 무슨 희한한 율법인가...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목회자컬러 챙겨입고 말겠다.

나 일하는 중이요 하는 공개적인 표시니까!



[덧붙임]

*1: 스톨(영대)이나 수단에 대해서도 참 쓸데없는 말들이 많다. 한 마디만 해둔다. 이게 무슨 종교적으로 권위있게 보이기 위해 걸친다느니,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전통만의 고유복장이라느니 하는 어쭙잖은 원조시비 같은 것들이 따라붙는데...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나?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교회전통의 소중한 고유복장 운운하는 분들은 스톨수단에 관해 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이라도 한 번 열어나 보고들 하는 소린가? 또, 상징적 의미 없이 고가의 세속적 양복을 목사가 걸치고 다니면 만인제사장직에 더 잘 어울리나? 상징적 의미를 담는 예복이면 종교적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엉뚱한 딴생각들 좀 하지 마시라.

2014. 10. 4. 20:33

가톨릭도 그리스도교냐고? 예장합동 제99차 총회 유감

예장합동 제99차 총회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에게 재세례하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을 처벌키로 결의했다.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및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조처일 것이다. 합동측의 결의는 한 마디로 너무 많이 나간 근본주의 교회론의 결정판으로서, 자신들의 공교회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장자교단을 외치는 대형교단의 결의이므로, 합동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1. 합동측의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의 권능을 부정한다.


가톨릭는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합동측의 결의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가톨릭이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가톨릭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로서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는 사실관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령 가톨릭이 이단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가톨릭에서 시행한 세례를 부정할 신학적 명분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단교회가 시행한 세례가 효력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즉, 비록 이단교회라 할지라도, 심지어 타락한 교역자가 시행한 세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할 때 온전히 효력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도나투스파가 자신들만이 진짜 교회라고 참칭하면서 보편교회의 세례를 인정치 않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그런 도나투스파의 세례더라도 공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효력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전통, 자기 믿음만이 진짜라며 상대방이 교회일 수 없다고 매도하는 쪽과 격렬한 이단논쟁의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의 넓은 범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쪽, 하나는 분파주의 이단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의 태도이다. 한 마디로 배타적인 독단이냐 포용적인 관용이냐, 과연 어느 쪽이 합동측의 태도에 가까운가?


합동측은 가톨릭이 심지어 이단도 아니고 타종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는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실은 조금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톨릭교회에서 십자가의 도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유의 얘기는 합동측에서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비록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충분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의 도가 분명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또한 여느 개신교 이단들의 그것과 다르게 충분히 정통적이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종교?


이단이라면 그나마 고려의 대상이 되겠거니와, 타종교라면 들이대는 범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타종교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십자가 복음이 존재하지 않고, 가르쳐지거나 흔적 자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방교회도 그들의 눈에는 타종교여야 하고, 이들과 대화와 교류를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들도 타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는 종교혼합주의겠고? 이런 식으로 분파주의적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교회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재세례라니, 당신들은 재세례파인가, 칼뱅의 후예들인가?


2. 합동측의 결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세가톨릭교회 비판과도 동떨어져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을 퍼부어 해 대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에 부합한다고 믿어 의심지 않는 것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 일색이었는가?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에 중요한 쟝 칼뱅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쟝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비교하면서 중세가톨릭교회의 전횡과 교리적 일탈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교황 제도의 폭압 아래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째서?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되는 세례와 성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기초에 따른 것이다. 칼뱅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를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동요와 분열을 겪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기독교강요 4.2.11.)


칼뱅은 중세서방교회에서 거의 주술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던 문자적인 사효성(ex opere operato) 개념은 거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세례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고는 유지한다. 로마교회가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 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심지어 거기에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였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교황이다."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에 관한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교회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압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남겨두셨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면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합당한 교회라고 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교회론 전체를 거쳐 이 문제를 주의깊게 논증해 나간다. 즉, 로마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로마교회에 "이단"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칼뱅의 판단에 로마교회는 매우 "이단적"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격렬했던 교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종교개혁 교회조차 이 정도로 신중했는데, 과연 합동측에 이런 균형감각이 남아 있는가? 합동측의 반가톨릭적 결의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과 달리 로마교회에조차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표지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혹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관해 "이단" 선언을 남발하지 않아서 칼뱅도 미운가? (그럴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인가?


끝으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얘기에 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얘기는 근본주의자들이 처음 성경에서 발견한 발견이 아니라 중세교황권의 전횡과 더불어 권력에서 축출된 프란치스코회의 강경파나 후스파 등을 통해 이미 나왔던 얘기다. 종교개혁 시대나 정통주의 시대에 이 해석전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특정해석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까지는 못 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근본주의자들, 혹은 세대주의자들은 꽤 지나친 종교적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세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의 가장된 미소에 온 세상을 미혹하여 택하신 자라도 멸망케 하려고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얘기에 뒷받침이 되는 소위 근거들이라는 게 거의 한결같이 낭설과 유언비어라는 근본주의의 딱한 사정에 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조악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데 대해 어째서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신학적 배경이 해방신학이라서? 예수회 출신이라서? 이건 아무개의 신학적 배경이 자유주의라서, 바르트주의라서 다 거짓말이라는 식이라는 말과 똑같이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 바르트신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도대체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가.


그런 말들이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참소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이 전혀 미치지들 않는가? 근본주의자들이여, 어쩌면 당신들 생각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당신은 절대 적그리스도적이 아니게 될 성 싶은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0~11)


당돌하게 비방하는 대상이 사탄이면 자동으로 당신이 사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세에 교회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비단 교황이 적그리스도여서만이 아니다. 악마적인 참소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일 수 있다!

2014. 9. 3. 12:53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 수호가 오늘날 우리 한국개신교의 진정한 과제?

우리 시대 교회, 한국개신교의 진정한 과제는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를 로마카톨릭에 맞서 지켜내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소위 개혁주의가 정통인가?

그런 것을 말하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보수라는 게 정말 지켜야 할 복음적 보수인가? 

그들이 말하는 정통이라는 게 정말 정통인가, 그들이 말하는 개혁주의라는 게 정말 개혁주의인가?

혹은 소위 로마가톨릭에 맞서 정말 그런 것을 지켜내야 하는가?


그들의 모든 주장이 실은 매우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란 결국 근본주의에 불과하다.

이 근본주의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의 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그러한 근본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과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십자가피켓남 왈, 종북빨갱이들이 세월호를 이용해 먹는단다. 근본주의자들이여, 이들이 당신들과 얼마나 다른가? [사진출처: 트위터 https://twitter.com/histopian/status/505664183493341184]

그동안 드러난 열매로 보건대 저들은 지금 로마카톨릭교회가 어떻고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란 것이 살아 있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 거짓선지자로 나타나는지 재를 뒤집어쓰고 통탄해야 마땅하다. (교황방한 때 저들이 했어야 할 일은 맞불집회 같은 무례하고 몰상식한 짓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의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는 회개성회여야 했다!)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부분은 나의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반공)근본주의에 눈이 멀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처신은 정말 뼈아프리만큼 우매하고 미개하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참상을 당신 자신 안에 받아들이시기까지 공감(com-passion)하신 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인데, 우리 한국교회는 도대체 이게 안 되면 그 모든 같잖고 시덥잖은 교리논쟁이 무슨 소용이 있나? 렉시오 디비나가 이방혼합주의고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괴수라고 매도하며 광분하는 유치찬란한 판국에 교리논쟁을 제대로 할 역량은 되고?


대형교회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저 중세적 소교황들이 말했다지, 교황보다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냐고.


물론 못하지 않다, 정진석 추기경이나 염수정 추기경 같은 노회한 부류의 사람들에 견주어서는.

뭐, 같은 개신교인으로서 정리가 있으니 그 사람들보다야 낫다고 해두자.


하지만 어딜 감히 프란체스코 교황과 자신을 견주는가!

당신들이 그토록 자랑거리로 삼는 바, 당신들이 지금까지 쓰고 말하고 다닌 모든 설교원고를 다 합쳐도 교황권고서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 담긴 이 시대를 위한 영적 통찰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망발이 가능했을터다.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의 미명하에 혼돈과 기만으로 가득한 거짓증거에 이리저리 낚여서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니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이니 하는 세계적인 손님맞이의 자리에서 적그리스도 운운하는 맞불집회를 하는가 하면, 교황권고서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같이 읽고 토론한다는 이유로 교황의 품으로 달려간다는 따위의, 자기 - 형제가 아니라면 - 이웃에 대한 거짓증거와 참소를 그치지 않는 처참한 영적 상태의 회중과 지도자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아, 이 사람들, 정말 부끄러워 해야 마땅할텐데, 절대 그러지 않을 성 싶다.

이런 일은 내 제한된 경험으로 단정짓지 않고 그저 주님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다.

부디 선하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빨갛게 될 수 있는 얼굴 주시길!

2013. 7. 11. 00:57

WCC의 소위 종교다원주의 논란을 보며

지난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찬반토론회 동영상을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편협성과 정치적 속내에 따른 막무가내식 우기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점들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 글의 주제는 6월 24일 토론회 중 소위 종교다원주의 부분에 국한할 것인데, 그 까닭은 근본주의자들이 여전히 토론의 상황에 대해 착각하고 있거나 거짓말로 덮으려 하는 것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1. 우선 위 동영상을 편집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라는 성구(디모데전서 2:5)를 영상 말미에 제시함으로써 이 토론회에서 반WCC진영이 얻고 싶어하는 바, 즉 WCC는 종교다원주의 노선이라는 혐의를 각인시키고 싶어한 것 같다.


2. 반WCC진영의 속내는 토론 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WCC찬성진영 쪽 발제토론자 정병준 교수는 WCC의 의사결정구조에 관해 발제문과 토론과정에서 WCC총회가 채택하는 문서를 기준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점을 몇 차례 지적했다. 즉, 소위 바아르 문서는 WCC총회 이전 예비연구단계에서 신학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정에서 나온 목소리요, 정현경의 저 유명한(?) 퍼포먼스로 홍역을 치르면서 열렸던 WCC 캔버라총회는 바아르문서나 정현경의 입장을 공식입장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WCC에서 활동하는 개개인 몇이 종교다원주의 성향을 표방하는 것과 WCC가 공식적 레벨에서 표명하는 입장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 문제에서 유념해야 할 기본적인 사실관계이다. 정병준은 이 기본적 사실관계를 누차 지적했다.


그러나 반WCC진영 쪽 발제토론자 최덕성 교수나 토론회 사회를 맡은 이병수 목사 어느 쪽도 이 중요한 지적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들으려 할 뿐이었다. 최덕성의 막무가내 우기기야 그렇다 치고, 중립을 지켜야 할 진행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병수조차 "바아르 문서가 종교다원주의 노선이었다"고 정병준에게서 답변을 재차 유도한 다음 "솔직히 인정해 주셔서 고맙다"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어내어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면 이것으로써 WCC는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을 WCC찬성 쪽에서조차 인정한다는 뜻이 되는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반WCC쪽에서 여기저기 심어놓은 댓글알바들만이 아니라 토론당사자들까지도 하고 있었다면 참 황당무개한 일 아니겠는가?


3. 게다가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된 "생명"(요한복음 10:10 등)이 구원론적 의미의 ζωη(조에)이니까 이것을 βιος(비오스)에 해당하는 창조론적 의미로 인용하면 안 된다는 최덕성의 공격은 얼마나 유치한 바리새적 단견인가. 요한복음 1장 서문(요한복음 1:1-14)에서 요한은 이미 그 생명의 빛인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창조된 것은 없다고 밝혀두었고, 이 서문에 함축된 사상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펼쳐지게 된다. 이 가장 단순분명한 요한복음 해석의 출발점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얘기다. 미안하지만 이건 어설프게 원어를 들이대기 전에 우리말 성경만으로도 알고 있어야 할 요한복음 이해의 기초임을 환기해두겠다. 이런 수준의 독해력으로 WCC문서의 "성경인용"을 검증하겠다면 그 눈이 제대로 열려 있는지부터 상식적인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4. The Tradition(=복음)과 traditions(교회전통들)를 모두 '전통'으로 알아듣고 이걸 종교다원주의에 갖다붙이는 단장취의식 독해의 대단한 내공에 이르러선 할 말을 잃는다. 에큐메니칼 문서 읽기 클리닉 같은 거라도 해야 할 판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나가면 사이비이단 쪽 댓글알바들의 적반하장, 견강부회, 단장취의 내공과 구분이 희미해질 지경이다. 부디 논란 당사자들과 이런저런 추종자들께서는 더욱 정진하시기 전에 이점을 한 번쯤 심각하게 유의해 보셔야 할텐데... 이게 누가 말리거나 나무란다고 될 문제가 아닌지라. 참 씁쓸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5. 가장 기초적으로, 늘 그렇듯이, 비그리스도교를 이웃하면서 대화와 공존의 필요성 가운데 있는 현대 그리스도교가 처한 현실을 가리키는 종교다원성(religious plurality)과 어떤 종교든 구원에 이르는 정당하고 온당한 길이라는 주의를 가리키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근본주의 진영에서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세계복음주의연맹 (WEA)는 최소한 이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했던 방향으로 수렴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이걸 두고 또 종교통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을테니... 참 갈 길이 멀다.

2012. 10. 8. 09:09

최근 개신교 교세와 근본주의의 향배 (개정판)

각 교단 홈페이지와 교계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를 종합해 보면 2012년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 주요 개신교단들이 보유한 신자수는 다음과 같다.  물론 각 교단들이나 교계언론을 통해 알려진 아래의 신자수는 보유한 교적부의 신자수를 단순집계한 것으로 교인이동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계청이 발표한 개신교인수를 훨씬 웃돈다. 실제 숫자는 절반 정도 에누리해서 알아듣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 정도 의미는 있을 것으로 본다.

1. 예장합동 (295만명)
2. 예장통합 (285만명)
3. 감리교회 (153만명)
4. 하나님의 성회 (120만명?)
5. 침례교 (100만명)
6. 예장백석 (87만명)
7. 기독교 성결교 (56만명)
8. 예장고신 (42만명)
9. 기독교장로회 (33만명) 
10. 예수교 성결교 (28만명?)
11. 예장대신 (23만명)
12. 예장합신 (12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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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34만명

1. 통계상 추정치에 관하여

이 가운데 최근까지 교단통합선언 이후에도 교단분열이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성회 쪽 교세는 언론에 발표된 추정치인데, 일단 하나님의 성회 계통의 3개 교단들의 총 신자수가 2000년대 이전에 침례교를 웃돌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님의 성회 계통 교단들은 여전히 교단통합 협상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하나의 교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단은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대표하는 기하성(=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의 신자수만 쳤지만, 교단통합이 성사될 경우 신자수는 이보다 좀더 많게 되어 감리교의 그것에 육박하게 될 것이다.

예수교 성결교회도 정확한 교세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NCC 가입 문제로 분열할 당시 기성 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었고, 기성, 예성, 나사렛 성결교 세 교단이 합하여 96만명 정도라는 2005년도 기사가 나와 있기 때문에 기성측의 최소한 절반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 신도수 6만명의 성공회1만명 내외의 루터교, 구세군, 복음교회 등은 우리 사회에서 인지도가 비교적 높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지형을 바꿀 만큼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군소교단들이다. 이밖에 예장합동계열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군소교단들이 있는데,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위에 열거한 상위 12위 안의 중소교단 하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2. 주요 장로교단들에 대한 분석

한국개신교 보유신자수 상위 12개 교단 가운데 7개 교단은 장로교회의 교단들이다. 장로교 교단들의 신자수 총계는 777만명으로, 한국개신교 총수의 약 63%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소위 보수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들은 합동, 백석, 고신, 대신, 합신의 5개 교단으로, 장로교회 특유의 소위 '신학적 근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이들의 신자수는 459만명이다. 장로교회 가운데 비교적 개방적인 개혁주의 노선에 서 있는 예장통합(285만명)과 기장(33만명)에 견주면 59:41 정도 비율이고, 상위 주요교단 신자수의 총합 1234만 가운데 1/3을 조금 넘는 수치(37%)이다.

소위 보수개혁주의 장로교 교단들은 주로 근본주의 특유의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해왔기 때문에 교계에서나 인터넷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큰 편이다. 이들의 신학노선에서 '사탄의 궤계'로,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는 칼 바르트나 관상기도에 관해 인터넷에서 얼마나 네거티브한 선동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지 상기해 보면 이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큰지 실감할 수 있다.

단일교단으로서 최대교단은 예장합동측이 2000년 전후부터 합동계통 중소교단들과 교단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예장통합을 제치고 최대단일교단으로 발돋움했다. 

물론 통합측은 최근 300만 신자운동을 벌여 자체집계 결과 목표를 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통합측의 교세성장률은 줄곧 합동측을 앞서왔기 때문에 통합측 신자수가 합동측 신자수를 넘어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장합동측이 최대단일교단으로 발돋움한 배경의 핵심은 개별교단의 교세성장률을 넘어서는 몸집불리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데 있다. 즉 몸집불리기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상당한 교세를 갖춘 다른 합동계열 교단들이나 보수개혁주의 노선 교단들이 서로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교단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보수개혁주의노선의 5개 장로교단들은 - 당장은 현실적 장벽이 높겠지만 - 적당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교단통합을 이루어 최대 459만명 규모의 거대교단을 이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단통합논의는 무엇보다도 백석과 대신 교단 사이에서 활발하다. 백석 쪽에서 대신과의 교단통합협상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대신 쪽에서 - 특히 백석의 여성안수안 통과를 두고 - 상당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회원교회 70% 정도가 이미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두 교단이 합쳐진다면 신자수 100만명을 헤아리는 또 하나의 대형교단이 생겨나게 된다.

백석측은 예장통합과는 2009년에 교단통합 얘기가 나왔었는데 현재는 별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백석 측이 예장통합과 가진 신학적 공통분모는 여성목사안수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 정도를 들 수 있겠지만, 배타적인 보수개혁주의신학을 부르짖어 왔다는 점, WCC가입 문제에 대해 음모론을 동원하면서 반대하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점 등은 극복해야 할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어쨌든, 백석과 예장통합의 교단통합시도는 보수장로교 5개 교단의 결속력 내지 동질성이 반드시 공고한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백석과 대신이 예장통합과 더불어 합동 주도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을 탈퇴하고 한교연(=한국교회연합)에 가입한 상황이 주목해 볼 만하다. 두말할 것 없이 합동측의 무리한 권력욕은 그들 자신에게 덫이 되고 있다. 스스로 근본주의 장로교단들 사이에서 리더쉽을 깎아먹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지기반이자 존재기반이 되는 보수개혁주의 교단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1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에 대한 분석과 전망

두 장로교단은 국내 개신교의 판세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예장합동의 리더쉽은 결국 보수개혁주의 노선 장로교단들에서 나오며, 신자수 확보와 더불어 이들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보수적 선명성 확보가 이루어질 때 이들의 맏형이 될 수 있다. 

예장합동이 여성안수를 시행하고 있는 예장백석에게서 최소한 전략적 동반적 수준에서라도 힘을 얻으려면 예장합동에서도 여성안수문제 사안에서 비슷한 결단이 있어야겠지만, 이것은 예장합동이 보수적 선명성 확보를 통해 보수개혁주의교단들의 맏형으로 자리매김되기를 추구해 온 전략에 변경이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보수적 선명성 경쟁을 통해 맏형지위를 확보한 예장합동의 목소리는 이들 교단들의 목소리와 대동소이하다고 보아도 크게 그르침이 없다. 이것은 예장합동의 강점이 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소위 보수개혁주의 노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예장합동의 리더쉽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는지가 늘 물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장합동의 전략은 보수적 선명성을 강화하면서 그 장점에 설득되고 감화되는 신자들과 타교단들이 늘어나도록 하는데 있다. 보수적 선명성 강화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미국 근본주의적 재현과 헤르만 바빙크로 대변되는 화란 신칼뱅주의의 절충과 종합이라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데, 미국 근본주의와 화란 신칼뱅주의 모두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을 정답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고 문제적이다. 그러나 보수적 선명성 강화는 분단상황의 불안정성이라는 선교적 배경에서 그동안 매우 잘 먹혀 들었던 전략이기 때문에 예장합동의 전략은 비록 폐쇄적일지언정 상당히 잘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예장통합의 리더쉽은 전통적으로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각 교단에 두루 통하는 신학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예장통합은 보수개혁주의 노선 장로교단들만이 아니라 타교단들에도 일정한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신학적 중도노선에 서 있다. 따라서 예장통합의 전략은 보수적 선명성 강화가 아니라 칼뱅,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몰트만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신학계보를 계승하여 개신교단들 전체에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개방적 소통능력, 또는 "중심에 서는"(김이태) 균형감각에 있다. 예장통합이 지향하는 리더쉽은 바람직한 방향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단상황의 불안정성이라는 선교적 배경에서 과연 어느 정도 먹혀들 수 있을까, 혹시 어중간한 회색지대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개신교 전체에 대한 분석과 전망

소위 정통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 5개 교단은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근본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와 비슷하게 침례교(100만명)과 예수교 성결교(28만명)도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으나, 이들은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칼뱅주의 계통 근본주의에 견주면 배타성과 폐쇄성이 상대적으로 강하지는 않아서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상당한 수용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본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교단들의 교세를 합하면 587만명으로서, 한국교회 전체 교세의 절반(47.5%)에 조금 못 미치는 인원에 여기에 속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다시피 비장로교 근본주의 교단들의 신학적 입지는 어느 정도 유동적이다. 근본주의 장로교단들과 이들의 유대관계는 '개혁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침례교에는 개혁주의 유산이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예성측에는 그만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칼뱅주의 계통의 예장통합(285만명)과 기독교 장로회(33만명), 웨슬리주의 계통의 기독교감리회(153만명), 하나님의 성회(120만명), 기독교 성결교회(56만명), 이상 5개 개신교단은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근본주의를 탈피하여, 근본주의 교단들이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등으로 낙인찍는 신학노선에 서 있다. 즉,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교세는 총 647만명으로서, 한국교회 전체 교세의 52.4%에 해당된다.

여기서 기감의 입지는 통합의 그것에 비해 한결 유리해 보인다. 예장통합은 합동측과 달리 신학적으로 보수개혁주의 노선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근본주의 장로교단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장로교회의 맏형노릇을 하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다. 반면, 기감쪽은 예장통합에 비해 절반 수준에 가까운 규모이지만 350만 웨슬리계통교단들의 맏형이라는 위상이 있다. 비근본주의 장로교단인 예장통합과 기장의 규모가 318만명이기 때문에, 예성을 제외한 비근본주의 웨슬리계통교단들만으로도 329만명이 되어 비근본주의 장로교단들에 근소한 교세의 우위에 있게 되며, 예성과의 협력을 강화한다면 350만명 규모의 효과를 보게 된다.

여기서 기독교감리회가 갖는 독특한 위상이 드러난다.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쇠퇴할수록 비장로교회 교단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감리교회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볼 수 있다. 반면, 예장통합의 리더쉽은 근본주의 장로교단들을 얼마나 설득하느냐를 중요과제 가운데 하나로 갖고 있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이미 수행한 바와 같이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공감적이고도 비판적인 신학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는 현재 보수와 진보진영 양쪽에 발을 걸쳐놓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최근 발언과 행보가 보수와 진보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오중복음과 삼박자축복"론에 대한 예장통합의 이단성 비판 이후 기하성측은 부단히 신학의 현대화를 추구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세대학교 신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보면 근본주의를 탈피해 있다고 보아도 크게 그르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성을 비근본주의 교단으로 치는 것은 여전히 상당히 망설이게 된다. 교단의 실권을 잡고 있는 조용기 목사와 그 주요측근들이 세대주의 종말론과 반공근본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하성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근본주의로 회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교단이다. 결국 오순절 계통 교단들은 근본주의와 비근본주의 사이에서 지형을 좌우할 수 있는 캐스팅보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 볼 수 있다.

4. 근본주의 이후 대체 프레임

현재 시점에서 보기엔 근본주의 프레임은 상당기간 영향력을 잃지 않을 것 같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입지조건과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희생양을 끊임없이 구하는 역기능적 정신구조의 종교화에 관한 수요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근본주의보다 여기에 잘 들어맞는 사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장합동을 비롯한 근본주의 교단들의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주의 프레임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역기능적 신앙유산이다. 근본주의 프레임의 역기능성이 근본주의 교단들이나 근본주의 지지자들에게도 그 심각성이 인지되고 대체 프레임을 모색하게 될 시점, 최소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긴 어렵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한국교회를 규정하는 프레임으로서 힘을 잃게 될 경우 이것을 대체할 프레임이 분명 등장할 것이다.

지배적 프레임의 교체가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가 보수개혁주의 형태로 나타난 데서 예컨대 복음주의, 보수적 웨슬리주의, 부흥주의 등과 같이 옷만 갈아입고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근본주의 프레임의 역기능적 신앙유산이 극복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앞으로 근본주의라는 지배적 프레임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 대해서 반드시 재고가 필요하다.

1. 성서비평학의 정당성과 한계에 대한 올바른 평가
2.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의 공헌에 대한 전향적 이해
3. 반공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치-경제적 기득권층과의 밀착관계
4. 증오와 배타의 대상을 설정하여 그들을 비방함으로써 자기정당성을 확인하는 형태의 희생양 메커니즘  또는 역기능적 신앙
5. 세력결집, 성장일변도의 자본주의 종교성 극복

이상과 같은 특징을 모두 담지한 세계교회적 흐름으로는 다른 글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칼 바르트 신학이나 "후기자유주의"가 있다. 그러나 이들 사조는 자유주의 신학에 견주더라도 - 적어도 아직은 - 목회현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까닭은 (1) 바르트 신학이 너무 방대하고 깊은 논의들을 담고 있어서 바쁜 목회현장에 쫓기는 목회자들이 충분히 집중적으로 연구하기에 난점이 있고, (2) 바르트 신학의 강력한 영향 아래 성립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기존 교회의 계급적 구조에 맞지 않아서 메노나이트교단과 같은 소규모 교파에서 적극적으로 실험,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근본주의의 대체프레임은 한꺼번에 칼 바르트 신학이나 "후기자유주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두 가지 탈근본주의적 특징들을 전유, 통합한 프레임들이 나타나면서 한동안 경쟁과 실험을 통한 검증과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선 진보적 복음주의가 경쟁과 검증에 유리한 신학적 자산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현실적으로 전망이 있어 보이지만 교단적 기반이 약하다. 웨슬리주의는 교단적 기반이 강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쉽게 부각될 수 있을 듯 하지만, 웨슬리주의만으로는 근본주의와 충분한 차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진보적 복음주의와 웨슬리주의가 상호결합된 형태의 대체프레임이 한동안 한국교회의 신앙적 틀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전망해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프레임이 적용되는 과정에서도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근본주의의 대체프레임이 인간을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정체성을 두면서도 근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역기능적 신앙양태와 그 정당화로서의 종교이데올로기들을 극복하는 방향이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5. 추가사항
- 이 글의 분석은 신자수 또는 교세가 교단의 영향력에 대한 직접적인 바로미터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물론 교단의 영향력 내지 감화력은 신자수나 교세로만 환원될 수는 없는 복합적인 것임이 간과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큰 흐름을 짚어보고 내다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의 용이성과 단순성을 위해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을 일단 배제한 상태에서 분석을 해 보았다.
- 특히 신자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별공동체가 얼마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을 실험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2012. 9. 11. 00:49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2. 7. 7. 05:17

이찬수 목사님의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을 환영하며

이찬수 목사님이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분당우리교회의 대형교회화를 포기하고 잘 훈련된 신자들을 지역교회로 파송하는 쪽으로 전환해 나가겠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한 사람의 개신교인으로서, 또한 교역자로서, 신학도로서, 요 며칠 사이 무척 기쁘다.


한 10년 전쯤 청소년 사역을 말끔하게 잘 하시는 스타성 있는 목사님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야말로 괄목상대, 사역자로서 놀라운 발전과 성숙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적 입지조건이 좋은 지역에서 교인수가 늘어났다는 외적인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얄팍한 소영웅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층 깊어진 사귐, 매우 치열해진 목회적 문제의식, 상당히 탄탄한 주석적, 신학적 근거지움 등을 통해 당신 자신의 표현을 빌면 바야흐로 '사역의 전성기'를 맞이하신 것으로 보여서 나 자신에게도 마음 뿌듯하면서도 강력한 도전이 되었다.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이야말로 그가 사역의 진정한 전성기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 故 옥한흠 목사님의 말년 발자취를 이어가는 듯한 목사님의 신선한 행보는 참으로 그가 속한 예장합동교단에도 영광의 면류관일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도 그야말로 '소금과 빛' 같은 건강한 촉매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케빈 밴후저의 말대로, 교회 안에 자본주의 원리가 복음의 원리를 대체해 버리는 현상이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다. 내 몸집을 어떻게든 불려서 살아남아보겠다는 '반동적 자본주의의' 못된 심보가 복음주의의 승리와 부흥과 성장이라는 미명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숨막히는 현실인데, "이게 과연 옳으냐?"라는 합당한 질문을 이찬수 목사님과 같은 주류 대형교회 목사님이 던지고, "그렇지 않다!"면서 구체적으로 자기 목회현장에서 결단할 수 있었다는 사실, 이것은 정말 성령의 역사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주류 대형교회 담임목사라는 자리는 혼자만의 자리가 아니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대변자로서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형교회의 아바타를 자처한 어떤 분 덕분에 지워진 포스트에서 조금은 체념 섞인 논조로 그래도 우리나라 대형교회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본다고 적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그것도 신학적 근본주의의 아성인 합동교단에서 일어나다니,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시다!


그렇다,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부디 이찬수 목사님의 귀한 뜻이 그가 목회하시는 교회의 장로님 사이에서도 환영받게 되기를 기원드린다. 그것이야말로 그 교회의 진정한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멋진 비움의 사건이 한국교회에 가득히 퍼져 나가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2011. 8. 13. 14:31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1936)라는 책은 종교개혁자 칼뱅을 자기 견해와 다르면 검열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히틀러와 다름없는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1) 꽤 오래되었지만 칼뱅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즐겨 입에 오르내리는 책이다.

칼뱅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이미 종교개혁 당시부터 로마가톨릭 호교가들이나 칼뱅의 정치적 적수였던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이 유포해 온 일종의 진부한 신화에 불과하다. 이런 진부한 신화의 진원지인 로마가톨릭에서조차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부정적 신화의 일방적 이미지가 걷혀진 연구들이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근대적 가톨릭문화에 익숙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에 대한 태생적 가능성이 전근대적 가톨릭문화를 토양으로 히틀러가 득세한 암울한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이라는 기후를 만나면서 열매맺게 된 그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유독 칼뱅과 종교개혁인가?

사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칼뱅과 종교개혁을 겨냥해 히틀러의 전제정치와 같다고 비난한 유일한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은 아니었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에리히 프롬 역시 루터와 칼뱅을 히틀러에 견준 바 있다. 다시 말해, 당대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들에게 칼뱅과 종교개혁교회가 히틀러와 다름없다고 규탄할 건덕지가 뭔가 있었던 게다. 그게 뭘까?

칼뱅과 종교개혁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의 규탄만 들으면 정말 뭔가 칼뱅과 종교개혁 자체에 히틀러스러운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정짓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규탄은 중상과 뜬소문과 오독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었고, 번짓수도 합당치 못했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내적 동기가 그들의 규탄을 규정짓고 있는 측면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이 칼뱅과 종교개혁, 나아가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그들 자신의 내적 동기로서 히틀러에 대한 당대 독일개신교의 ('독일 그리스도인' Die Deutsche Christen 이라는 조직을 매개로 한) 어용적 행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소통속도의 한계로 말미암아 농민들에 대해 잔인한 무력진압을 독려한 꼴이 되어 버렸던 마르틴 루터와 달리, 쟝 칼뱅가 '박해'했던 적수는 세르베투스(*2)나 카스텔리오 같은 당대의 (나름 저명한) 소수파 인문주의 지식인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칼뱅은 이들 모두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자들의 운명만 화형이나 추방이었던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칼뱅이 사역한 처음 4년 동안 58명이 사형당했고, 76명이 추방당했으며, 처음 5년 동안 35명이 화형당했고, 13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식의 숫자는 전시상황이나 다름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힌다.(*3) 따라서 독일 그리스도인 교단의 준동에 따라 히틀러의 어용종교 노릇을 한 독일개신교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치를 떨었던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에게 칼뱅이 루터보다 먹음직스런 떡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분노와 환멸의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사실 유럽의 개신교인들조차 독일개신교회가 저 히틀러의 악마적 어용종교 노릇을 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와 마르틴 니묄러 등이 바르멘 신학선언을 발표하고, 독일고백교단이 세워졌으며, 이 교단의 주요 지도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암살기도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아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개신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루터와 칼뱅에게 분노와 증오를 전이한 유럽개신교인들도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목사였던 쟝 쇼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츠바이크를 부추겨 칼뱅에 악마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카스텔리오를 미화하는 전기를 쓰도록 독려했다.

쟝 쇼레와 같은 정신적 동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종교개혁자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는 엄정한 사태 자체의 사실관계에 부합되는지 여부에 비추어 가늠할 필요가 있다. 내적 동기가 앞선 나머지 사실관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칼뱅에 대한 비난 자체는 사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츠바이크 자신의 내적 동기가 너무 앞선 나머지 엄정한 사실관계를 가리워서, 그의 강렬한 규탄에 진부한 선입견의 무비판적 추종으로서의 악(한나 아렌트)이라는 작가 자신이 목도한 시대적 악의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히틀러와 전체주의, 그리고 그러한 체재가 배제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호소라는 내적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 검열과 협박, 폭력을 들이대는 행태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요즘 현 정권과 대형교회, 개신교계, 심지어 가톨릭 쪽에서까지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건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어둡고 답답하게 한다. 특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우리 한국개신교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나름대로 그린 '사악한 교조주의자 칼뱅'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4)


[덧붙임]
*1: 유명세가 덜하긴 하지만 이보다 한 세대쯤 앞서서 영국의 역사가 로드 액턴도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역사화했다. 로드 액턴 역시 열렬한 가톨릭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처음 역사화한 장본인은 아니었다.

*2: 세르베투스를 '무지막지한 개신교 교조주의자' 칼뱅에게 '부당하게' 희생당한 '인문학자'로 보는 시각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에 있어서 세르베투스를 부당한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칼뱅의 소위 '잔혹함'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애당초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한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의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었다. 방종파도 세르베투스 문제를 기화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조차 세르베투스에게서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베투스는 특히나 기존신학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지만 딱히 혁신적이거나 참신한 구석이 없는 황당하고 괴상한 이론들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을 즐겨한 일종의 극단적인 '악플러' 같은 인물로서, 당시 유럽 어디를 가나 가톨릭권과 프로테스탄트권 공히 이단자로 낙인찍혀서 당시 사회통념상 어떤 식으로 처형되느냐만 남아 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마지막 관용으로서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한 참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칼뱅이 아니라 가깝게는 제네바 시의회요 크게는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한 유럽사회의 법적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세르베투스는 화형으로 사형집행된 것이다. 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던 제네바 시의회 방종파 세력이 세르베투스에게 극형을 내렸을까? 방종파 세력에게도 당대의 법적 통념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도덕적 명분을 시위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칼뱅이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칼뱅과 제네바 시의회를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통념에 따라 단순하게 동일시한 세속화한 후세사람들이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3: 유시민씨가 최근(2013년) 출간한 그의 책에서 칼뱅을 전체주의자요 자신의 신학이론에 오류가 없다고 믿었고 공포정치를 감행했던 광신자라고 평했던 것 같다. 유시민씨의 발언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받아쓰기한 카스텔리오의 중상모략을 칼뱅의 학살설의 사실관계 증언으로 받아들인 케이스가 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감스럽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인으로서 책을 통해 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마 유시민씨는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기에 충분히 정당하고, 반면 칼뱅이나 한국개신교가 허술하고 만만하면서도 부조리하게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어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발언은 칼뱅에 대한 왜곡의 도가 지나치다. 본인은 유시민씨에 관해 정치인으로서는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 아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말조심을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잘 모르는 문제에 끼어들어 말을 함부로 하면서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처사는 적어도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면 실망스러운 처신이기 때문이다.

2011. 5. 18. 20:16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이정석 교수님의 안타까운 부고를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미인박명이라더니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가.
20년은 우리 곁에 더 계셨어야 할 분이었는데... 

언젠가는 꼭 가까이서 뵙고 말씀 나눌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던 분인데 너무나 아쉽다.

이제 후학들에게 짐을 나눠주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빈다.


내게 있어서 이정석 교수님은 그 행보가 늘 궁금하고 눈여겨 보게 되는 어른이었다.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국교회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당신이 자란 교단의 지배적 신학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할 용기를 발휘했던, 정말 국내에서 드물게 정직한 신학자이셨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정석 교수님의 출신교단인 예장합동은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의 원흉'(서철원)이라고 매도해 온 교단이다. 

칼 바르트는 세계교회에서, 소위 보수주의 교회에서 정말 자유주의의 원흉으로 통하고 있는가? 이정석 교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셨다. 

교수님은
총신대에서 기독교철학으로 학사과정을 하셨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하셨다. 그리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세속화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칼 바르트 연구를 수행하여 박사학위를 하시고, 미국 풀러신학교 등에서 조직신학교수로 봉직하다가 몇 해 전 귀국하여 최근에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부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라면 총신대와 고신대 신학자들의 학문적 본향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곳들이다. 특히 화란 자유대학교는 국내 보수신학의 두 아이콘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활동했던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이정석 교수님은 바로 이곳에서 칼 바르트의 성화론으로 박사학위를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성화론은 자유주의의 원흉스럽다'이라는 사상비판을 잘 해서 박사학위를 하셨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칼 바르트의 성화론이 세속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논지였다. 이와 같은 이정석 교수님의 학문적 여정에 대해 교수님 당신자신의 글을 옮겨보자.

"......(화란대학교에서: 인용자) 나를 지도하는 환 에그몬드교수는 화란, 독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학회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실로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구해보고 싶은 신학자임에 틀림없었으나, 한국 보수신학자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개척분야로서 위험부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실로 총신대에서 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르트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서 바르트는 보다 균형있게 언급되었으며, 특히 바르트 아래서 친히 수학했던 클로스터교수는 그의 비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조건적 바르트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그와 한 학기동안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I/2를 읽으면서 개인지도를 받는 동안 나의 바르트에 대한 편견은 점차 제거되고 그의 신학이 주는 깊은 통찰력과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되었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위 인용문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한국에서 보수주의신학의 아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칼 바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칼 바르트를 최악의 자유주의자라고 터무니없이 매도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바르트에게 직접 배웠던 신학자가 지도교수였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는 아예 지도교수가 유럽의 바르트학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학자였다. 적어도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보수계통 해외신학교의 대표주자라고 할 두 학교에서 칼 바르트는 신학적 대화의 중심화두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근본주의의 기수역할을 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어떨까?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하신 복음주의 신학자 한 사람의 글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의 이름은 이 블로그에서 가끔 언급한 바 있는 케빈 밴후저다. 공공연하게 안티바르트를 부르짖었던 반틸의 영향력이 강력한 학교에서 신학의 형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 보면 칼 바르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요전거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칼 바르트를 기독교사상사에 몇 안 되는 신학의 거인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있기조차 하다.

이것이 세계신학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라든지, 세계신학이 배교와 변절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사고의 길로 들어설지 여부는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자여서 소위 '막 나가는' 진보신학계에서나 읽혀지는 게 아니라, 소위 보수신학계의 큰 산맥을 이룬다고 자부하는 저명한 신학교들에서도 칼 바르트가 내놓았던 복음적 통찰들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세계신학계를 더 둘러보면 지금은 바르트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칼 바르트가 남기고 간 신학적 통찰을 재해석하고 심화함으로써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장합동측은 아직도 외국신학교에서 멀쩡하게 바르트를 전공하고 돌아온 교단신학자들까지 안면몰수한 채 바르트를 매도하고 있고, 총회출판사를 통해 한종희 목사의 칼 바르트 신학비판이라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그 내용이야 바르트의 신학정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곡해와 아전인수로 가득하다. 국내 유수의 대교단에서 이런 참 낯 뜨거운 내용이 아직도 가르쳐지고 있다면 참 딱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신학이 자기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교권의 명시적, 암묵적 압력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바르트를 입에 올렸다가 사상시비로 교수직에서 축출된 분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예장합동만이 아니라 합신과 같은 합동계열의 중소교단도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새삼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귀하고 벌써부터 그립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탁한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가며 신학을 하셨으니 가히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자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래 글은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뤄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박사학위논문주제로: 인용자) 바르트를 연구하고저 했던 이유는 바르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진보계열의 조직신학에서는 바르트가 중심인 반면 보수계열에서는 바르트가 전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대화와 화해를 이룰 수 없었다. 바르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대가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마음 짠하게 하는 말인가...

나는 이정석 교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은 한반도 분단의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움받는다. 바르트 신학의 참된 함의를 덮어버리려는 온갖 황당무개한 곡해와 매도가 걷힌다면 한국교회는 아마도 한반도의 잘라진 허리를 잇는 소임을 감당하게 되지 않을까!

故 이정석 교수님을 주님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주님께서 한국의 보수신학계에서 이런 가인(佳人)을 만나볼 날을 주시기를 고대한다.
2011. 5. 14. 12:36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한국교회에는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 등을 자기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신학도들이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하면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곤 한다. 따라서 소위 개혁주의신학에 대해 개념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개혁주의신학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범위의 뜻을 지닌 표현이다.

1. 로마가톨릭신학과 대비되는 의미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종교개혁 원리를 받아들이는 개신교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에(F L Cross &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formed Churches' 항목) 이 경우 개신교신학 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1.1 개혁신학의 영향권: 아울러 아래 2나 3의 개혁교회전통의 영향을 받아 그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개신교의 교파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루터교신학과 대비되는 칼뱅과 스위스종교개혁전통: 이 표현을 쓸 권리가 있는 교회전통은 해당 종교개혁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에서부터 우리나라 장로교회에 이르는 개혁교회 전통 일체이다. 대체로 다른 신학전통들과 마찬가지로 특정전통에 대한 배타적 권리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현대성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공교회적 신학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칼뱅 이후 개신교전통에서 슐라이어마허와 칼 바르트, 몰트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거인들을 배출해왔다. 이런 의미의 개혁신학에 관한 논의의 예로는 루카스 피셔가 편집한 The Reformed Family Worldwide나 미하엘 벨커가 편집자로 참여한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에서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3의 그룹과도 함께 대화하고자 한다.(*1)

3.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의 전통: 종교개혁자 칼뱅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원조보수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이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2의 의미에서 '개혁신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가짜네, 개혁신학이 아니네 공격하는 일이 잦다. (*1)

이들의 공격패턴은 대체로 자기들이 신봉하는 아무개 신학자를 비롯한 '(17세기) 개혁신학'(과 그 후예들의 신학)에서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개는 감히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 개혁교회 출신이라도 '개혁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신학'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베자와 투레틴, 영국의 청교도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17세기 개혁정통주의신학은 20세기초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까지 이어져 왔고, 미국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따르는 루이스 벌코프와 반틸, 워필드, 찰스 핫지, 존 머레이 등의 구프린스턴학파와 그 후예들에게서 존중되어 왔다.

이 가운데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정통주의는 실은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세계교회에 통해왔음에도 '진짜 개혁신학'을 한다는 이들이 언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미계 장로교회전통과 거기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통을 통해 소위 '원조보수 개혁주의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실체가 바로 이 그룹이다. 폴 틸리히가 정의한 그대로, 현대의 상황을 신학화하기를 거부하고 일체를 정죄하면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고정되어 되풀이하고 흉내내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2)

근본주의 신학은 분명 신실한 최선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통', '원조보수'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 외에 다른 생각을 진리의 적으로 돌리는 호전성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자연히 교리주의와 교회분열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나마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탁월하고 차원높은 개념적 세련성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 놓쳐 버리면 자기중심적인 분파주의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롯한 온갖 착잡한 기형적 현상까지 배태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의 의미에서 개혁주의 원조보수를 별 반성없이 계속 부르짖는 분들은 내가 근본주의자라는 걸 알아주시오 자랑스레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개혁주의를 들먹이면서 개혁주의에 근본주의의 이미지까지 착색시킴으로써 다른 개혁신학전통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는 근본주의자라고 아예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켜 당당히 나서시라고 권해드린다.

[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2011. 4. 29. 03:06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나 자신을 살펴 봐도, 주변과 한국교회를 살펴 봐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명목상(de jure)믿음과 실질적(de facto) 믿음이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실질적 믿음을 무의식으로 용의주도하게 억압해 버려 그 실체를 거의 잊어버리기까지 하고, 그 빈 곳에 그럴싸하게 정당화, 합리화(rationalization: Erich Fromm)해줄만한 명목상 믿음을 채워넣게 되기 쉽다. 기독교신앙은 명목상 믿음으로 이데올로기화하기 좋은 이미지와 상징과 교리들을 풍요롭게 제공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영화 인셉션과 같은 허위의식의 세계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그야말로 끝도 없이) 펼쳐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칼뱅이 설파한 바 있었던 '우상공장'으로서의 인간의 진면목이 아닐까.

최근 케빈 밴후저도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교회가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양태가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어떤가? 명목상으로는 개혁주의, 보수신앙,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한국교회의 실질은 개혁주의라기보다는 반공숭미주의요, 보수신앙이라기보다는 수구기득권신앙이요, 오직 내 생각으로만, 오직 내 신념으로만, 오직 미국의 은혜로만이 아닌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바로 실질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진짜 믿음의 현주소에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에 바로 나 자신부터 내 믿음과 삶의 명목상 명분이 아니라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살펴보고 정직하게 가늠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
2011. 4. 15. 00:01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칼 바르트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 중상모략이나 다름없는 비난을 퍼부었던 반틸도 바르트에게 인사하려고 나왔다. 이미 반틸의 그에 대한 험한 소리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바르트는 반틸과 악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반틸(Cornelius van Til)이라는 신학자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주의 그룹에서 여전히 꽤 영향력 있다. 유독 국내에서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의 괴수'(*1)로 낙인찍히게 된 데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반틸의 신학을 한 분들이 국내에 많았고, 이분들의 전승이 후학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국내외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근본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다른 그럴싸한 칭호로 애써 꾸미고들 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현대주의를 포용하는데 반발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던 근본주의 그룹에 반틸이 들어 있었는데도 반틸이 근본주의가 아니란다.
현대사조에 대해 호전적이고 전투적으로 일관한 반틸의 면면이 근본주의의 프로필과 딱 맞아떨어지는데 반틸이 근본주의가 아니란다.

왜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조차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근본주의라는 멀쩡한 칭호가 부끄럽고 캥기기라도 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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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이 선동적인 표현은 서철원 교수가 박형용 박사의 표현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칼 바르트를 공격한 것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원흉" 기사 참조.) 그의 말은 과연 얼마나 이치에 맞는 걸까? 일례를 들어 보자. 서철원 교수는 2014년 11월6일자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에서 칼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제4/4권 65쪽에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죄를 고백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했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죄를 잘 고백했다"고 함으로써 칼 바르트가 예수님에게 죄가 있었다고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이 인터뷰에 나오는 다른 발언들도 황당무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 발언은 특히나 참 어처구니 없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서 교수의 말을 뜻도 모르고 대충 베낀 게 아니라 서 교수의 실제 워딩을 정말 반영한다면 말이다. 서 교수의 바르트 비판이 심각한 난독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럴까? 서 교수는 독일어원서 제4/4권 65쪽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다. 거기엔 정말 예수님이 "자기 죄를 고백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충 했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죄를 잘 고백했다"는 따위 말은 없다. 이건 서 교수가 (악의적으로가 아니라면) 엉터리로 왜곡한 해석이고, 바르트의 논지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당신과 별개의 것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바르트 자신의 말이다: "(그들의) 죄들을 저들의 것으로 돌리지 않으셨고 ... 그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저들의 죄들을 자기의 죄들이 되게 하셨고, 자기의 죄들로 고백하셨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는 소리인가? (참고로 한글판에서 이 대목은 92쪽에 나온다. 관심 있는 분들은 실제 전체문맥과 문장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직접 확인해 본 뒤 평가하기 바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독과 곡해가 과연 합동교단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이런 식의 오독과 곡해를 일삼는 사람들에 의해 국내 굴지의 교단(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유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하며, 애석하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2011. 3. 29. 00:41

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1. 요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어수선하다. 이광선 전총회장이 물러나면서 금권선거사실을 '양심고백'했고, 길자연 현총회장에게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처분을 받아내 압력을 가하고 있다. 세간의 눈은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길자연 목사에게는 따갑다.

2. 글쎄. 양심고백이라. 과연 그럴까? 
이광선 목사는 마치 길자연 목사가 금권선거의 원흉인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교계의 금권선거는 어제 오늘의 관행이 아니다. 몇십만 원을 받은 아무개 목사가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이게 어디 그렇게 새로운 일이었던가. 이건 일을 터뜨리기 위해 새삼 터뜨리는 전략적 행동이 아닌가. 결국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특정인에게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게 뻔히 보이는 석연치 않은 모양새다. 이런 경우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당사자 역시 뭔가 구린 구석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배후 알력관계가 짐작되긴 한다. 짐작이 맞다면 이건 소위 양심선언을 들먹일 성질의 것이라기보다 추하고 부끄러운 교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태의 본질이다. 거기에 세간의 여론까지 끌어들인 셈이고.

3. 작은 공동체든 교회기구 차원에서든 결국 이런 진흙탕 싸움은 제딴에는 공평과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내 편은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고 네 편은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는 사탄의 졸개라는 흑백논리가 난무하게 된다. 각자 제딴에는 성전을 치르는 십자군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십자군 전쟁'의 미몽을 헤매게 된다. 제딴에는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하나님은 이들의 승패에 하등 상관이 없으시지 않을까.

4. 이들의 진흙탕싸움 자체엔 탄식과 한숨 외엔 별 감흥이 없다. 다만 무겁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는 분들이 저러고 나서 뒷수습은 고스란히 한국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특히 사이비이단문제에 관해 이광선 총회장 재임기간에 벌어진 혼란상이 염려된다. 길자연 목사는 직전 사이비이단대책위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대책위를 새로 꾸리기로 했었다. 혼란한 한국교회의 사이비이단문제 대처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조처였다. 최근 길자연 총회장의 직무정지처분은 이와 같은 범교회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 손봉호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시는 것 같다.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금권선거시비가 없는 것과 달리 보수진영은 박형룡 목사 이래로 돈문제로 끊임없이 시비가 붙고 있으니 부끄러워들 하실 법도 하다. 원래 한경직 목사 등이 한기총 설립을 추진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어엿한 한국개신교회의 공교회적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공교회성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아울러, 적어도 초창기의 한기총은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등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독교정신을 구현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나아가 남북화해에 물꼬를 트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제기되는 한기총해체론은 주된 배경과 근거가 된 금권선거문제가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반동적 권력기관 노릇을 극우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으며, 한기총 설립정신을 거슬러 일개 이익기관으로 전락해 있다. 현재 한기총의 정체성과 관행 자체가 원래 시작되었을 때의 정신과 전망을 거스르고 있는 서글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드러내준다.
사회여론?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에 대해 쌓인 것들이 많으시다. 특히 현 정권 들어서 장로대통령이 뽑혔답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기라도 한 줄로 믿으시는 분들의 혁혁한 공로 덕분에 사회여론은 분명 교회권력을 엎어버릴 틈을 노리고들 있다. 이러던 차에 한기총 해체 얘기가 교계 내부에서 나오니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6. 앞서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교회가 쇠락을 맞이하는 가장 심각한 원인은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비복음적 보수주의"에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의 쇠퇴를 일으켰다고들 하면서 마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하다면 정말 크게 착각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울어가는 현상은 소위 보수적 신앙인들의 비복음적 행태에서 99%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과 한기총 (그리고 각 교단)의 금권선거문제는 비복음적 보수성의 진부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기총 해체? 답답한 분들 심정에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비복음적 보수성이라는 한국교회의 정신적 토대의 문제다. 어차피 한국교회는 공교회로서 조직을 이루어가려고 하게 될텐데, 정신성이 잘못 뿌리내려 있는 한 문제는 늘상 터질 수밖에 없다. 저 찬송가공회의 착잡한 난맥상은 그 '공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과 영향력과 성공과 인기와,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 한 이 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2) 교회의 존재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이다. 한기총해체론은 한국교회에 닥친 심각한 위기, 참된 토대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가 여부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7. 교회는 실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계시의 정신이 주어져 있는 한, "고백자 베드로"(바르트, 쿨만, 래드) 위에 교회는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마태복음16:13-20)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한국교회의 현재 위기로부터 새롭게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기다린다. 한국교회가 아집과 욕심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뉘우쳐 돌이키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덧붙임] 
(*1) 글을 쓰고 나서 한기총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에 지난 2010년 4월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내놓은 탁월한 분석에 대한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지방 기자는 한기총의 설립과 성장 배경 가운데 반공주의와 교회의 대형화라는 요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렵다고 진단한다. (→발제문전문)
다만 당시 교계원로들의 한기총 설립정신을 반공주의로 뭉뚱그리기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본 블로그에서도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비판적인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기총이) 반공주의라는 정신성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대목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가능성으로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결과적으로는 보수진영만의 연합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아쉬우나마 한국교회에 공교회성을 표현하는 그릇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이비이단문제 역시 각 교단들의 단죄가 공교회성을 담보하는 틀을 제공했다는 데서 한기총의 긍정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문제는 이 긍정적인 역할마저 높으신 분들의 진흙탕 싸움으로 말미암아 흐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2) 한국보수주의교회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본격적인 분석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망라하는 국내 중진신학자들에 의해 3년 공동프로젝트로 이뤄질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김진호, 강인철, 구미정님등 눈에 익은 학자들의 이름이 보여 신뢰감과 기대감을 더한다. 다만, 문제는 대형교단들 스스로 자기성찰을 해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주로 기장, 성공회와 같은 진보성향의 중소교단에 의한 분석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석이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같은 곳에서 나와줘야 할텐데, 서슬퍼런 교권 앞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을테니 아쉽고 안타까울 다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들인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을 뒤엎은 것과 같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이 교계의 주류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1. 3. 12. 13:4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근본주의 교회는 흔히 숫적 부흥을 자랑하곤 한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대외적으로 '좋은 열매'라고 내세우는 가장 자신만만한 미덕이다. 물론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는 자부심도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좋은 열매'일 것이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다.

과연 이런 것들이 좋은 열매일까? 

1. 굳이 머릿수를 논하고 싶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목회한 삼위일체 교회에도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신자들이 돌아와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해두고 싶다. 그들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라는 식의 변명을 하려면 근본주의자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꿩잡는 게 매'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실천강령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가? (슐라이어마허라는 기독교사상사의 거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경심은 젖혀 놓고서라도 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논점이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성경에서 열매에 관한 말씀이 과연 숫적 팽창을 가리킨 경우가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예수님도 바울도 '열매'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말씀하셨지 머릿수가 몇인가를 두고 '좋은 열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게 마련"(누가복음 17:37)이라고 하셨다.

근본주의자들이 숫적 '부흥'에 관해 스스로 확신하고 퍼뜨리는 대표적인 어젠다가 바로 자유주의 교회는 숫적으로 쇠퇴한다는 얘기다. 서구교회가 쇠퇴한 원인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구교회의 쇠퇴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를 방불하는 분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라는 작고 강력한 나라를 일으킨 정신적 토대 노릇을 한 영광스러운 교회였다. 20세기초만 해도 개신교회의 교세는 가톨릭을 압도했고, 50-70년대까지만 해도 우세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가 가톨릭의 절반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네덜란드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들어서? 베르까우어 같은 지도적 신학자가 사악한 '자유주의의 괴수' 칼 바르트를 추종하는 바르티안이어서? 천만에! 네덜란드가톨릭도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어 있지만 교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신학 자체가 교세감소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개신교의 쇠퇴는 오히려 개혁교회가 '보수적 신앙' 때문에 이전투구하고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내 교단이 낫니 네 교단이 낫니 도토리키재기를 하지만, 결국 그 피해는 모두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 이전투구와 교회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주로 '보수적으로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다.

[표 설명] 첫번째 짙은 파란색은 무종교, 연두색은 카톨릭, 빨간색은 개혁교회, 노란색은 개혁교단, 보라색은 화란개신교단, 옅은 파란색은 기타 종교를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인 1970년대 초에 교세가 약간 늘어났다가 90년대에는 다시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집필된 네덜란드주교회의 새교리서(1966)를 교황청이 검열한 '화란교리서사건'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보수화, 경직화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 영국교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공회든 개혁교회든 할 것 없이 오늘날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던 영광스러운 영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존 로빈슨 주교가 '신에게 솔직히'를 외쳐서? 존 힉 목사가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퍼뜨려서? 소위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천만에! 비록 세속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영국교회가 쇠퇴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60년대 이전만 해도 영국교회는 아직 건재했다. 영국교회의 몰락은 다름아닌 복음주의 진영의 자중지란에서 촉발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거룩한 분리주의를 주창하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복음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었다. 당장은 분리주의자들이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복음의 텃밭으로서의 한 사회 속에서 복음의 신뢰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만든다.

- 미국교회? 오늘날 미국교회 역시 서서히 영국교회 짝 나고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교회건물이 술집이 되고 모슬렘사원이 되는 현상이 미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왜 미국교회가 저 지경이 되고 있을까? 자유주의의 누룩 때문에? 그 별로 미덥지도 못한 축자영감설과 창조과학과 베리칩 이론을 신봉하지 않아서? 혹은 사악한 프리메이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명하고 신실한 목사 수가 부족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선명성 경쟁에 뛰어드는 데 열심이 부족해서? '한줌도 안 되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회중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미국교회가 기울고 있지 않은가?

- 결국 서구교회 쇠퇴의 가장 깊은 뿌리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지엽말단의 명분싸움으로 갈갈이 찢어졌던 데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회의주의가 서구사회를 휩쓸게 된 배경이 바로 교파분열이었다는 교회사가 후스토 곤잘레스의 지적이 합당하지 않은가. 서구세계가 세속주의, 회의주의에 먹힌 까닭은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시점은 근본주의의 한 형태인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이 터졌던 90년대초였다. 종교다원주의든, 칼 바르트든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사회의 혐오감을 자라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최근 몇 년간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절에 땅밟기를 하고, 불 지르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장로대통령을 세우겠다면서 기득권자들을 감싸고 도는 희한한 시민운동을 하고, 대통령을 무릎꿀리고, 자기 이익관계에 반하는 사안에 대해선 불 일듯 일어나 총궐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신실하고 영웅적인 신앙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고 있을까? 왜 사회적 지탄에 날마다 치명상을 입고 있을까? "이게 다 자유주의 때문"인가? 도대체 이번엔 애꿎은 누굴 희생양으로 지목하려는가? 자유주의 핑계 대기 어려우면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15:17-19, 요한일서3:13)는 성경말씀을 갖다 붙여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만드는 둔갑신공을 발휘하는 이들이 꼭 있다. 언제부터 둔갑신공의 마술적 신앙과 순교자 콤플렉스가 참 신앙이 되었단 말인가?

최근 한겨레21에 "대통령보다 세고 헌법보다 무서운 목사님"이라는 기사가 떴다. 세상 언론에서조차 주목할 만큼 근본주의 진영의 드라이브는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이 기사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성시대를 맞이했는데 거꾸로 한국교회는 역풍을 맞아 기울게 되리라는 것이 요지다.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한국교회는 기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염치를 불안과 증오의 음모론과 맞바꾼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2. 주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은 "두려움을 내어쫓는 사랑"(요한일서4:18)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계시된 용서와 화해의 복음, 공평과 정의의 복음이다. 보혈의 은혜를 믿는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얘기다. 칭의의 복음을 믿는다면서 기득권자들을 싸고 도는 부조리와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끊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도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지금껏 살면서 근본주의자들이 복음의 정신인 조건없는 화해와 포용(Miroslav Volf)을 부르짖는 것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의 근본주의자들, 특히 소위 반공목사들은 상대방이 무릎꿇고 빌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극히 세속적인 원리를 성경과 참신앙의 이름으로 둔갑시킨다. (석기현 목사의 "빨갱이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설교를 들어보라!) 이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살해한 공산군을 자기 양아들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신앙의 위인으로 떠받드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지 않은가? 

오히려 근본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신봉하는 '복음'은 베리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성경과 상관없는 밑도 끝도 없는 희생양신화들이 아닌가? 다른 글들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런 근본주의의 희생양신화들이 거짓말에 기초해 있다. 한갖 거짓말로 불안과 증오를 끝없이 부추겨 영향력을 얻는 근본주의의 기본행태가 과연 성경적이고 복음적일까? 그런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낚였다는 사실이 과연 좋은 열매라는 자랑거리일 수 있을까?

이런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서 공감을 얻고 세력을 얻는 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암적인 존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교회의 사도성과 공교회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1)

[덧붙임]
*1: 최덕성은 2013년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WCC 찬반토론회에서 이 글에서 지적한 근본주의의 주장을 또다시 그대로 되풀이했다. 재차 강조해두거니와, 바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태도 때문에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


2011. 1. 4. 06:27

오직 성경으로만

루터와 칼뱅은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원칙을 통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 뿌리박은 개신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개혁자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은 공의회나 교황, 신학전통 따위의 진리값을 가늠하는 잣대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여하한 영적 현상, 영적 인물 따위라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의 권위 아래 있다.
-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명확한 부분으로부터 모호한 부분을 해석한다.

이런 개혁자들의 요구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상당부분 오해되고 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 일체를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읽기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실상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교단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은 공교회성을 부정하는 사이비이단집단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강변이다. 아울러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뒷얘기는 자기 교주나 자기 집단, 자기 선입견에 대한 복종의 요구로 귀결되곤 한다.

그 누구의 성경읽기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누구의 이해력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릇된 전통과 선입견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칼뱅이 지적했다시피,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을 제한하심으로써 겸손하게 하시고, 더불어 사귐으로써 더욱 충만한 하나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적 토론영역에서 함께 겸허하게 지혜를 모아가는 사귐의 장이 바로 신학이다. 신학이 곧 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성찰과 검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참다움에 가깝게 된다. 신학이 추구하는 참다움은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성경읽기에 견줄 수 없는 보편적 권위를 지닌다. 전통이 성경본문과 성경의 정신이 지지하는 참된 전통이라면 거기엔 보편적 권위가 있다.(*1)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참다움조차 언제나 성경의 권위로써 재어지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둘째,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도록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낚이는 대목이 바로 영적인 '현상'이나 그런 현상의 매개자라고 주장하는 영적 인물의 인상적인 '말빨'이다. 그런 것에 낚일수록 신학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종교이고 죽은 교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 현상과 인물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증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신학이야말로 성령이 주관하시는 성도의 교통과 교제의 장이다. 아울러, 덜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의 은사(*2)도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비약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스스로를 거기에 매이도록 하신다. (요한복음16:7,13-14)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을 빌미로 그 누구도 성경을 비약할 수 없다. 

대개 이런 식으로 영적 현상과 인물을 따를수록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 신학이 비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마당에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반증도 한갖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짓거리 쯤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한 다음 성령의 초자연적 현상을 운운하는 행태야말로 사이비이단집단이 잘 닦아놓은 멸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성경의 자기해석과정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혹시 일체의 신학전통 따위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거절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종교개혁의 성경원리는 명확한 부분에서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전체 이해로서 다시 명확한 부분을 조명하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얘기한다.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은 일개 개인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 항상 동료(들)과의 상호의존적 해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해석에 접근해 간다. 모든 건전한 신학전통은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에 동참한다. 

앞서 밝혔다시피, 성경해석은 누구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신학의 장을 통해 함께 읽고 나눔으로써 건전성을 이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에는 전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처럼 성경과 전통에 동일한 권위를 돌리기를 거부한 것이었지, 전통 자체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대교부와 공의회, 중세신학에 정통한 당대일급의 신학자들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루터와 칼뱅에게 '오직 성경으로만'은 성경의 우위성(prima scriptura)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라는 원리를 밝힌 장본인들이 전통에 정통했다. 어떤 의미에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을 외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으로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전통의 빛과 그림자를 잘 이해하고 스스로가 속한 전통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3)(*4)

[덧붙임]
*1. 이미 신약성경 안에도 존중받아야 할 전통의 전승과정이 나타나 있다.(고린도전서 11:23, 15:3-4, 데살로니가후서 2:15, 디모데전서 2:2, 베드로전서1:18-19 등.) 정경사적으로 보면 성경이 전통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paradosis)이 성경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대로 교회가 성경을 만든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도베드로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든 게 아닌 것처럼(마태복음 16:13-20),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된 사도적 전승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했을 뿐이다. '교회가 정경을 도입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의 규범이 되기를 포기했고, 전승이 진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Oscar Cullmann)
참된 사도적 전승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에서 통일성을 이루지만 각 성경기자의 삶의 자리와 신학사상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는 사도신경의 공교회조항과 마찬가지로 전통의 다양성을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2. 아마도 최근 일어난 은사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를 '투시'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문맥상 합당치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문맥에 따르면 사도가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 믿음(8,9a절)을 주시고, 신유와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통변(9b,10절)을 주신다고 했을 때, 덜 초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더불어 열거하여 은사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빗나간 시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는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해명하는 데 사용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Calvin, Matthew Henry, Schlatter, Orr & Walther 등.) 아울러,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언을 앞일을 알아맞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교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고린도전서 14:)
*3. 자신이 특별히 따르는 전통이나 입장이 없(고 오직 성경만 믿는)다고 믿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미 우리의 성경읽기를 규정하곤 한다. 이를테면, '오직 믿음으로만'이야말로 성경의 정수라고 받아들일 때 이미 개신교전통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휴거와 7년 대환란을 기독교종말론의 내용이라고 믿을 때 이미 세대주의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전통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성경의 본래적 메시지로부터 비판하는 작업이다.
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2010. 11. 11. 03:51

다원사회 속의 한국교회

다원사회라는 말은 한국교회 다수에게 절대악으로 낙인찍혀 있는 '종교다원주의'와 가리키는 대상이 같지 않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유일성 내지 독특성을 포기하자는 종교적 도그마이지만, 다원사회는 여러 가지 종교와 가치체계와 세력이 글자 그대로 양립하고 공존하고 있는 다면적이고 복잡한 사회현실을 가리킨다. 교회는 개인이든 공동체로서든 타종교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를 그들의 동료와 친구와 가족으로 받아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 현실 자체는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다.

다원사회에서 교회가 다른 종교나 세상과 공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소위 종교다원주의의 외연을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교회가 현대다원사회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이냐 라는 문제로 직결된다. 

1. 세상 속의 교회
교회가 타종교가 이웃하고 있거나, 내 이웃과 동료와 친구가 타종교나 무신론자라는 것은 당위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차원이다. 
이것은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어떤 신학적 입장의 스펙트럼에 자리를 잡고 있든지 수긍할 것이다.

2. 타종교 = 명목상 이웃
교회가 타종교나 무신론자, 혹은 안티를 아파트 주민과 다름없는 명목상 이웃으로 간주하고 피차 무관심하게 살 수 있다. 물론 그러다가 유사시에 이해관계의 충돌에 따라 무관심이 증오로 바뀔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수긍 여부 이전에 이미 거의 모든 한국개신교회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방식이다.

3. 타종교와의 상호존중
교회가 자신의 대의를 추구하되 비기독교인을 명목상 이웃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받아들여 무관심과 증오, 갈등 대신 상호존중를 위한 소극적이고 자구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기까지도 적지 않은 한국개신교회가 이 시대를 사는 데 있어서 낯설지만은 않은 방식일 것이다.

4. 타종교와의 공동대의를 위한 협력
교회가 비기독교인들과 더불어 공동의 사회적, 윤리적 대의를 이루어가는 공존과 협력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이 방식의 공존까지도 한국개신교회 가운데 상당수는 삼일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과 같은 영역을 통해 이미 살아보고 겪어본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종교다원주의의 의혹이 짙다고 보는 입장을 갖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5. 타종교와의 정확하고 깊이있는 이해를 동반한 대화
교회가 비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대의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이해하고, 비기독교인들이 교회가 추구하는 대의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상호대화와 상호이해의 실천을 통해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이라는 대의를 새롭게 이해하는 보다 적극적인 공존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이 방식의 공존은 아직까지 한국개신교회 주류가 별로 실천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냐는 의혹이 노골화하여 거의 확신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이와 같은 대화의 선구적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타종교는 결국 기독교와 하나
교회가 비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대의와 대화한 결과 기독교의 구원이 결국 타종교의 구원과 일맥상통한다고 인정하고 타종교와의 공존을 통해 '더 큰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다.
신론에 대해 새로운 도그마를 전제하는 이러한 방식의 공존은 기술적으로 소위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theocentric plural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종교다원주의라는 어젠다를 독점하다시피 해온 급진적 진보그룹의 생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상과 같은 다원사회의 종교간 대화와 공존방식 가운데 과연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종교다원주의'로 잡아야 할까.

현재 한국개신교회 주류는 타종교에 대하여 그냥 명목상 이웃으로 지내거나(1,2) 또는 서로 큰 충돌이나 갈등이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정도(1,2,3)가 안전한 선택이다. 공동대의를 위해 협력하는 것(4)은 위험하고, 타종교를 알아보거나 대화하는 것(5)은 틀렸으며,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6)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악한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타종교와 공동대의를 위해 협력하거나 정확한 상호이해를 위해 대화하는 작업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킴과 동시에 이웃과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타종교와의 상호존중이라는 공존방식(3)과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이 '종교다원주의'라면, 삼일운동 민족대표33인 가운데 기독교계 인사들은 종교다원주의자였던가? 또는 아레오바고연설을 한 사도 바울은 종교다원주의자였던가? 

종교다원주의의 외연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으로 국한하여 잡아야 한다. 

이 글은 논의를 단순하게 만들고자 유형으로 뭉뚱그렸지만, 6의 유형 역시 '도매금'으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종교다원주의의 논의는 4,5,6 또는 5,6에 좀더 섬세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종교다원주의자로 분류되곤 하는 한스 큉은 타종교와 더불어 공동의 대의를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세계윤리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4 유형) 그런가 하면 종교간 대화를 통해 보다 깊이있고 정확한 상호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기독교와 세계종교'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5 유형) 한스 큉의 저작에 나타나는 6 유형의 입장은 상당한 비약과 단정을 통해 나타나므로 주의깊게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큉의 4,5 유형에 관계된 논의는 이 사안에 관한 뛰어난 기독교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들 모두를 '도매급으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다.(*1)

이 여섯째 유형의 문제는 이 글의 논지와 목적에서 벗어날 정도의 장황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복잡한 사안이다. 여기서는 글이 목표하는 바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짚어 두고 싶다. 

종교간 대화의 결론이 반드시 '신중심적 다원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종교가 추구하는 구원의 길은 '구원'이라는 명칭조차 정확한 것일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르다. 신중심적 다원주의의 주장처럼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기독교에도 해탈이 있다, 불교에 더 충만한 구원이 있을 수 있고, 기독교에 더 충만한 해탈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나름 선의넘치고 너그러운 주장 같이 들리지만, 각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과 다르고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이 불교에 없으며, 불교의 해탈이 기독교에는 없다. 판넨베르크의 지적대로, 과연 어느 목표가 합당하고 진정한 것이냐 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과정과 종말을 통해 스스로 입증해야 할 과제이다.

다원사회 속에서 한국교회가 세상의 다원적 주체들과 공존하는 공존방식의 가능성으로서 위와 같은 유형들이 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의 배타적이고 수동적인 범위에 국한된 공존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런 배타성과 수동성은 반드시 성경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최근 '봉은사 땅밟기 사건'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매우 위험한 폭력성과 공격성으로 돌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파괴적 긴장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공존방식으로는 교회가 활동할 만한 공적 영역이 극히 협소할 수밖에 없다. '세상과 짝하여 타협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과 더이상 대화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개인의 양심과 종교심에 호소하거나, 자기 이해관계와 기득권을 대변하기 위해 반동적인 정치행동 정도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짝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에 다름없다.

그러나 이렇게 공적 영역을 협소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은 정확하게 역사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신앙의 본질과 대치된다. 교회는 타종교나 세상의 세계관 앞에서 자신이 믿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다. 복음의 핵심과 본질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나의 나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교회는 공적 영역에서 타종교나 세상과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 그 대화는 물론 긴장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긴장은 파괴적 긴장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창조적 긴장이다. 교회는 역사의 하나님을 섬길 때 교회되기 때문이다.

[덧붙임]
*1. 한스 큉에게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그 낙인을 이유로 그의 저작에 나타나는 최선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백안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근간을 형성하는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의 양성론이 오리게네스나 테르툴리아누스 같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된 고대신학자들이 성경으로부터 짜놓은 이해의 골격을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이나 테르툴리아누스의 제안 가운데 어떤 것은 교회에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어떤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공헌을 했다. 그들이 그와 같은 이바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영역을 과감하게 개척했기 때문이다. 한스 큉을 비롯한 여러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교회에 공헌할 수 있다. 그들이 던지는 화두를 주의깊게 분별하여 좋은 부분은 취하고 나쁜 부분은 취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기독교신앙은 무엇이든지 선하고 옳은 것은 받아들이는 관용과 아량의 정신, 사랑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