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1. 02:11

사이비이단의 숙주, 근본주의

1


최근 부정선거로 불법집권중이신 극우정당 ㅅㄴㄹ 모 의원 왈, 새정치민주연합은 종북의 숙주란다.

주한미국대사 피습사건을 기화로, 애시당초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요주의 인물이었던 범인을 야권에 엮어 종북몰이하다가 튀어나온 얘기다.

아니, 당초에 문제를 일으킨 전력이 화려한 인물을 아무 조처 없이 입장시킨 게 누군데 종북 운운?


도대체 누가 북한을 따라하는 진짜 종북인가?

누가 일인숭배를 위해 여론을 세뇌, 조작, 선동해 왔는가?

누가 불의하게 찬탈한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반민주적인 짓거리를 하고 있나?

누가 일당독재를 공고히 하고 야당을 관제, 관변박수부대로 만들고자 정치공작을 일삼는가?

누가 백성들에게서 각종 명목으로 삥 뜯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호의호식하고 있는가?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자유 대한민국에서 북한과 동급의 이따위 부끄러운 사건들이 벌어지게 만들고 있는 비루하고 간악한 무리들이 누구인가?

이런 더러운 짓거리들이 과연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에 값하기조차 하는가?

누가 과연 진짜 종북의 숙주인가?!


2


요즘 사이비집단 ㅅㅊㅈ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황당무개한 것은, 패륜적 짓거리가 폭로되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역시나 그 수법 그대로 여론 물타기로 대한민국을 기망하려 들고 있다!


어디 ㅅㅊㅈ 뿐이겠는가?

사이비이단들은 거짓과 폭력의 반석 위에 세워졌다.


도대체 사이비이단이 나오게 된 원인과 기원이 무엇인가?

근본주의자들 왈, 사이비이단은 자유주의에서 나온단다.


헐...

자유주의에서 사이비이단이 나와?

자유주의가 사이비이단의 숙주라고?

대한민국 사이비이단치고 자유주의가 배경인 집단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자유주의 핑계 대는 재주 밖에 못 배운 것이 근본주의라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3


사이비이단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뿌리를 알 수 있다.


1. 누가 성경의 문자를 갖고 정반대의 뜻을 갖다붙여 들이대가며 자기 "적들"을 참소하는가?

2. 누가 없는 혐의를 조작하여 자기 "적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가?

3. 누가 없는 증거를 조작하여 자기 문자적 해석을 입증했다고 선전하는가?

4. 누가 전도로 몸집불리기하는 것 자체를 절대선으로 떠받들고 있는가?

5. 누가 세력을 동원하여 자기 사적 이익관계를 관철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가?

6. 누가 정확히 따져 들어가 보면 별 미덥지도 못한 내용에 불과한 자기들의 믿음만이 절대진리요 절대선이라며 "불신지옥"을 외쳐왔는가?

기타등등.


이 모든 거짓과 폭력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
누가 과연 사이비이단의 숙주
인가?


근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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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22:10

예수님도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는가?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는가?


우리 한국교회 회중들에게는 근본주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 개인이나 근본주의 계통의 스터디 바이블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해 온갖 경건하고도 허탄한 신화가 유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통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다는 주장일 것이다.


과연 예수님도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는가? 그 말이 과연 정말인지, 근거구절 두어 개만 살펴 보도록 하자.


1.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율법서(토라)를 "모세의 율법"이라고 지칭하셨다.

어째서 이렇게 지칭하셨을까?


"모세의 율법"이란 표현이 율법서를 가리키는 지시어로서 통하던 당대의 언어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당대에 율법서가 모세의 율법이라고 널리 지칭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저작권에 대한 당대 통념이 "무오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당대 유대교의 통념을 "무오한 성경"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 본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아무 상관 없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오경저작권은 오경 자체의 내적 증거와 성경개론의 전체맥락을 고려함으로써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당대 언어관습을 따라 율법서를 지칭하는 지시어로 쓰셨다고 해서 저절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 유다서에서는 "아담의 칠세손 에녹의 예언"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에녹1서를 비롯한 에녹전승을 가리키는 지시어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인정"했으니까 에녹1서, 또는 2서나 3서는 영감받은 예언인가? 혹은 문자 그대로 에녹이 한 예언일까? 유다서기자는 이 문제에서 에녹저작권의 "인정"이니 뭐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전승이 가리키는 진리의 요소를 독자들에게 가리켜주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에녹저작권을 운운하고 싶다면 어째서 에녹1서는 성경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물음에 답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언급하셨다는 이유로 모세저작권이 확립된다면, 또 이 글에서는 따로 더는 다루지 않겠지만 사도들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언급했다는 이유로 모세저작권이 확립된다면, 사도가 에녹의 예언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에녹저작권이 확립된다는 말도 성립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저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2 요한복음 5:46~4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는 아예 율법서(토라)가 모세라고 지칭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인가? "모세저작설을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 그러나 모세저작설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이런 뜻이 되는가?


이것이 정확하다면 이로부터 모세저작설을 믿지 않는 (사실상 자기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인 바)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도, 성경도 믿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추론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추론이 과연 합당한 추론인가? 과연 본문의 정신과 취지가 이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갖다 붙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유대인들은 "소위 모세저작설도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통념에 따라서 당연하게도 모세저작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모세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까?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계시의 정신을 철저히 외면했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지, 애시당초 모세저작설을 믿으라는 요구가 아니다.


이런 구절이 오경의 모세저작설 증거라고?

오경의 모세저작설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냐고?


나는 근본주의자들이 매사에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아님 말고 식으로 성경인용을 하니 어떻게 예수님을 똑바로 믿겠냐고 되묻겠다.


심지어 성경인용을 틀리게 하는 것도 궁극적인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틀린 줄 깨달으면 피차 고치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틀린 성경인용을 고치기는 커녕 전가의 보도 삼아 동료그리스도인들을 자유주의자니 비정통이니 이단이니 낙인찍는 처사는 정말 고약하다.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성경구절을 갖다 붙여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는 행위야말로 계시의 정신은 철저히 외면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유대인들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폭력적인 성경인용을 일삼는다면 온갖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성경인용으로 스스로 멸망길로 달려가는 사이비이단자들과 과연 무엇이 구분될 수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경을 가르친다는 목사들이 이젠 좀 이런 허탄한 근본주의 신화를 집착하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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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 2015.06.26 00:19 address edit & del reply

    목사님, 비평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성서신학 관련 책들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관련 서적이 워낙 많아 어떤게 표준적인지 잘 모르겠네요. 중도적이거나 조금 진보적인 쪽으로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지 목사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2. 멋진비움 2015.06.26 19:0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방문을 환영합니다.
    1. 존 헤이즈 & 칼 홀러데이, 성경주해 핸드북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표준적입니다. 총신대 쪽 신학자가 번역하셨군요.
    2. 스티븐 헤이네스 & 스티븐 맥켄지 엮음, 성서비평방법론과 그 적용 (기독교서회, 1997): 앞 책에 포함되지 않거나 소략하게 기술하고 넘어간 비평방법들이 약간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3. 이동수, 구약주석과 설교 (장신대출판부, 2011): 2번 책과 비슷한 방향입니다. 이동수 교수님은 구약성경의 수사학 비평 분야 전문가이셨습니다.

  3. JJ 2015.06.26 20:49 address edit & del reply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전부터 자주 블로그에 들렀는데 직접 글을 써보긴 처음이네요. 제가 블로그를 통해 좀 열린 자세를 갖게 되었는데,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4. 멋진비움 2015.06.27 16: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네, 감사합니다

2014. 10. 4. 20:33

가톨릭도 그리스도교냐고? 예장합동 제99차 총회 유감

예장합동 제99차 총회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에게 재세례하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을 처벌키로 결의했다.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및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조처일 것이다. 합동측의 결의는 한 마디로 너무 많이 나간 근본주의 교회론의 결정판으로서, 자신들의 공교회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장자교단을 외치는 대형교단의 결의이므로, 합동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1. 합동측의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의 권능을 부정한다.


가톨릭는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합동측의 결의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가톨릭이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가톨릭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로서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는 사실관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령 가톨릭이 이단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가톨릭에서 시행한 세례를 부정할 신학적 명분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단교회가 시행한 세례가 효력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즉, 비록 이단교회라 할지라도, 심지어 타락한 교역자가 시행한 세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할 때 온전히 효력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도나투스파가 자신들만이 진짜 교회라고 참칭하면서 보편교회의 세례를 인정치 않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그런 도나투스파의 세례더라도 공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효력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전통, 자기 믿음만이 진짜라며 상대방이 교회일 수 없다고 매도하는 쪽과 격렬한 이단논쟁의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의 넓은 범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쪽, 하나는 분파주의 이단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의 태도이다. 한 마디로 배타적인 독단이냐 포용적인 관용이냐, 과연 어느 쪽이 합동측의 태도에 가까운가?


합동측은 가톨릭이 심지어 이단도 아니고 타종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는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실은 조금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톨릭교회에서 십자가의 도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유의 얘기는 합동측에서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비록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충분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의 도가 분명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또한 여느 개신교 이단들의 그것과 다르게 충분히 정통적이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종교?


이단이라면 그나마 고려의 대상이 되겠거니와, 타종교라면 들이대는 범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타종교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십자가 복음이 존재하지 않고, 가르쳐지거나 흔적 자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방교회도 그들의 눈에는 타종교여야 하고, 이들과 대화와 교류를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들도 타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는 종교혼합주의겠고? 이런 식으로 분파주의적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교회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재세례라니, 당신들은 재세례파인가, 칼뱅의 후예들인가?


2. 합동측의 결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세가톨릭교회 비판과도 동떨어져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을 퍼부어 해 대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에 부합한다고 믿어 의심지 않는 것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 일색이었는가?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에 중요한 쟝 칼뱅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쟝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비교하면서 중세가톨릭교회의 전횡과 교리적 일탈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교황 제도의 폭압 아래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째서?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되는 세례와 성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기초에 따른 것이다. 칼뱅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를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동요와 분열을 겪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기독교강요 4.2.11.)


칼뱅은 중세서방교회에서 거의 주술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던 문자적인 사효성(ex opere operato) 개념은 거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세례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고는 유지한다. 로마교회가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 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심지어 거기에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였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교황이다."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에 관한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교회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압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남겨두셨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면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합당한 교회라고 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교회론 전체를 거쳐 이 문제를 주의깊게 논증해 나간다. 즉, 로마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로마교회에 "이단"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칼뱅의 판단에 로마교회는 매우 "이단적"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격렬했던 교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종교개혁 교회조차 이 정도로 신중했는데, 과연 합동측에 이런 균형감각이 남아 있는가? 합동측의 반가톨릭적 결의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과 달리 로마교회에조차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표지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혹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관해 "이단" 선언을 남발하지 않아서 칼뱅도 미운가? (그럴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인가?


끝으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얘기에 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얘기는 근본주의자들이 처음 성경에서 발견한 발견이 아니라 중세교황권의 전횡과 더불어 권력에서 축출된 프란치스코회의 강경파나 후스파 등을 통해 이미 나왔던 얘기다. 종교개혁 시대나 정통주의 시대에 이 해석전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특정해석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까지는 못 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근본주의자들, 혹은 세대주의자들은 꽤 지나친 종교적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세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의 가장된 미소에 온 세상을 미혹하여 택하신 자라도 멸망케 하려고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얘기에 뒷받침이 되는 소위 근거들이라는 게 거의 한결같이 낭설과 유언비어라는 근본주의의 딱한 사정에 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조악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데 대해 어째서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신학적 배경이 해방신학이라서? 예수회 출신이라서? 이건 아무개의 신학적 배경이 자유주의라서, 바르트주의라서 다 거짓말이라는 식이라는 말과 똑같이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 바르트신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도대체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가.


그런 말들이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참소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이 전혀 미치지들 않는가? 근본주의자들이여, 어쩌면 당신들 생각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당신은 절대 적그리스도적이 아니게 될 성 싶은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0~11)


당돌하게 비방하는 대상이 사탄이면 자동으로 당신이 사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세에 교회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비단 교황이 적그리스도여서만이 아니다. 악마적인 참소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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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3 18:3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2014.11.03 22:23 address edit & del

      비밀댓글입니다

2012. 10. 29. 03:25

말씀의 사유화, 역기능적 신앙

한국교회가 요즘 사이비이단들의 창궐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비이단들은 한국교회가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 말씀에 더욱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탄의 가시다. 사탄의 가시를 두려워하거나 저주할 게 아니라, 이 문제 너머 계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왜 사이비이단들이 창궐하는가? 결국 말씀의 사유화, 교회의 사유화에서 비롯된다. 하나님 말씀은 사도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유대 안에 있는 전 세계의 공교회에 선사된 것으로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유화될 수 없다. 그것이 교황과 같은 역사와 전통과 힘의 아이콘이든, 유력한 특정 교회전통이든, 또는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는 특정 계층이든 말이다. 하물며 일개 교주, 일개 목사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구절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이익관계에 맞도록, 자기 원한관계를 풀기 위해서 갖다 붙여가며 해석질을 하고 있다. 이들의 해석질은 성경본문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주석적 이해와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복음의 정신, 계시의 정신에 충실한 자유로운 인용도 아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가 파악한 좁다란 율법주의적이고도 영지주의적인 하나님상과 자기중심적인 은원관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하잘 것 없는 소망에 대한 일개 종교권력자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쉴새없이 성경을 인용해대는데 성경의 정신은 쏙 빠져 있다. 쉴새없이 성경을 증빙전으로 들이대는데 그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정신으로 나온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알리가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성경 안의 새로운 세계"(칼 바르트)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 말씀을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로 제한하려드는 우상숭배행위 아니겠는가!


그 결과 그들의 성경인용이나 성경해석은 더 이상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하시고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복음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을 옥죄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협잡과 다를 바가 없다.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은 더 이상 성경구절이기를 그친다. 자기가 진짜로 섬기는 대상에 대한 우상숭배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이며,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하고자 세뇌하는 정서적, 영적, 심리적 지배테크닉(manipulation technique: Margaret Singer)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장 숭앙하는 듯 용의주도하게 가장 하나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진정한 속내로는 마술주문이나 다름없이 천하게 취급한다.


그들의 말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듯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자비와 용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진짜 속내는 자기 아집과 편견이며, 자기 권력과 이익의 증진에 있다. 그들의 입술은 아름다운 말을 그럴듯하게 하나 늘 독을 품었다. 귀 있는 자는 그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보라. 예수님은 결코 욕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독사의 자식들이다!


말씀의 사유화가 고약하고 지독한 까닭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 그것이 소위 보수개혁주의든, 복음주의든, 바르트주의든, 진보주의든 상관없이 -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영악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규신학교육을 받아서 어떻게 하면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지 안다. 차라리 사이비이단자들에 관해서는 그 허무맹랑하고 무식한 성경해석과 교리를 콕 집어서 교회공동체에 경고해 줄 수라도 있다. 그러나 말씀의 사유화는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사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렵다. 중세 말 종교개혁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게 곪고 썩은 뒤에나 모두의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창궐해 있는 사이비이단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토양으로 자라나고 있을 따름이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똑바로 깨어 있다면 사이비이단자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사이비이단자들이 수많은 이단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더욱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중 모두 말씀의 사유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저들 사교집단을 위한 비옥한 토양 노릇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증 아니겠는가?


흔히 사이비이단자들을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세워놓고 그들을 욕하고 저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패착에 다름 없다. 진짜 문제는 말씀 앞에 엎드리어 경청하기 보다는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내 맘대로 소유하려 드는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이단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잘못되었다. 그들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밝혀두는 것이 소위 근본주의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사이비이단을 옹호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밝히는 진리의 일꾼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비이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쏟아내어 자기 의를 충족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 나 자신이 십자가의 말씀 앞에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가득한 교만과 아집과 욕망을 하나님 말씀 따라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한국교회에 사이비이단이 창궐하는가? 하나님 말씀이 사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이 어디 우연인가? 하나님 말씀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개 개인, 일개 집단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만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 특히 억눌리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해방하시는 기쁜 소식이기를 그치며, 죽음과 멸망으로 악순환해 빠져들어가는 역기능적 행태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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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화된밤 2012.11.07 14:56 address edit & del reply

    오랫만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말씀을 빙자해서 하고싶은 말을 하는 것은 이단이든 기성교회 목사든 자유로울 수 없겠지요. 다만 '신학'이라는 객관적인 기준 아래 본문 자체가 말하는 말씀에 집중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조심하며 경계해야 할터인데 그 과정이 생략되버리게 되면 결국 멀쩡했던 사람도 망가지는것은 순식간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끊임없이 조언해 줄 수 있는 accountablity의 중요성을 생각해봅니다.

    오래 전에 '나눔'블로그에서 주인장님이 한국교회와 이단이란 포스팅을 통해 한국교회에 신천지같은 이단(사실 이단보다는 사이비에 가깝죠)이 판을 치는 이유가 "한국 특유의 근본주의적 성서해석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글을 쓰신 적이 있죠. 읽고 나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성서를 하나님 위에 올려놓다보면 얼마던지 가능한 일일테지요. 성경가지고 단어놀이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다른 번역본 하나만 가져와도 쉽게 깨져버리는 그런 단어놀이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걸 보면 정말 미혹의 영이 있구나~란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은 많이 추워졌죠? 건강 조심하시고 평안하세요!

  2. LUXYSAL 2012.11.09 12:07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감사합니다. 성경을 인용하지만 성경의 정신이 쏙 빠진 교회.
    요즘 한스큉의 '교회'를 읽고 있는데 역자 서론에 있는 글이 떠오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자기보존과 성장에만 치우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회피한다면, 결국 교회는 생맹력을 잃고 교회를 등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2012. 3. 17. 08:20

불법사찰의 시대

민간인 불법사찰에 청와대비서실이 개입되어 있고, 조직적인 증거인멸시도와 위증종용 따위가 있었다는 데 대한 폭로가 이어져서 검찰재수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비서관 윗선에 연결되었을 것이 불보듯 뻔한데 과연 검찰이 여기까지 수사할 뜻이 있을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권력의 수단을 갖고 있는 자들이 진실과 정의를 자기 입맛대로 조작하고 규정해 온 것이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댓글알바, 언론방송장악, 검찰과 경찰의 기득권 감싸기, 청와대와 '그 윗선'의 개입에 이르기까지 현정권기에는 유독 이런 일이 아주 대놓고 벌어지고 있다.

비단 정치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내부에서조차 
이들과 비슷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자들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형교회와 그들의 권익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아바타를 자처한 이들이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게시물을 블라인드시키거나 고소고발을 남발해서 입막음하려고 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도 확인해 보니 무상급식 반대로 드러난 대형교회들의 친기득권적 행보를 비판한 글모 대형교회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사건에 대해 안타까워한 글이 블라인드됐다.

원래 이런 치졸한 짓은 2000년대에는 사이비이단집단들이나 했다.
이걸 대형교회에서 따라하고 있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과 정의를 조작한다는 푸코적 명제가 90년대도 아닌데 새삼스레 와닿고 있다. 
대형교회가 권력기관에 다름없다는 명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역시 고전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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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
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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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6. 13:47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2)

노르웨이 테러사건에 대해 지난 포스트에서는 테러범 브레이빅에게서 통상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의 특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적 의미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반다문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그가 dokument.no에 올린 글모음과 노르웨이 언론기사들을 주로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범이 앤드류 버윅(Andrew Berwick)이라는 이름으로 유포한 1500여쪽 분량의 '2083 유럽독립선언문'은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이때문에 과연 정말 사실관계에 부합한 것인지 여전히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해서, 문제의 '선언문'을 구해서 검토해 본 결과 앞의 포스트에서 제기했던 필자의 주장을 상당부분 뒤집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 대한 의혹과 분노를 세상에 대한 악마시와 자유주의신학 단죄와 음모론, 그리고 수구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력행사로 푸는데 머물러 있지 않고 테러라는 행동으로 옮기는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라니, 불쾌감을 넘어 정말 놀라움과 전율마저 느껴졌다. dokument.no의 글모음에서 과대망상끼만이 풍겨나왔다면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이 '선언문'에서는 기괴한 정연함이 느껴졌다.

테러범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윤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하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선언문'의 쪽수를 나타낸다.)

1. 성경을 신비화, 절대화하고 자기 신념의 전거로 삼는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근본주의적 특징은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의 원천으로 보고 성경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며, 성경의 전거를 대어가며 자기 신념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점에 있다. 

- '남성들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성경을 읽기 보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역할이나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시대분위기'를 개탄한다.(28)
- 무슬림들에게 성경이 모독당했지만 기독교에서 별 반응이 없는 파키스탄의 사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한다. (428) 
- 꾸란에 견주어 성경이 문학적으로 더욱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블로거 Fjordman의 글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했다.(706f.) (자신은 Fjordman의 글을 자신에게 중요한 책 목록에 넣었다.(1407) 그러나 Fjordman가 2005년 이후 활동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2009년 이후 구체적으로 테러를 준비하면서 자신 혹은 자기 신념을 중요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예전에 쓰던 아이디를 일종의 멀티아이디로 언급했을 수 있다. 그가 '선언문'의 심화연구 파트에 실어놓은 성전기사와의 인터뷰에 나오는 성전기사도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1349ff.))
- 그리스도인의 '자기방어'의 성경적 정당성을 상당히 길게 주장한다.(1327-34) (여기서 말하는 '자기방어'란 무슬림의 공세에 대한 자기방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자의적인 취사선택이라는 근본주의 성경인용의 맹점을 그대로 답습했다.)
- 성경을 모독하거나 공격한 무신론자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서부터 볼테르와 맑스를 거쳐 도킨스에 이르는 인물들이 열거된다.(1341ff.) (근본주의에서 성경을 신비화하는 전형적인 설교내용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의 성경에 대한 집착은 성경영감론을 기독교의 시금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본주의과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구유럽전통의 모체로서의 기독교전통이며, 성경은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기보다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경외와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의 그것에 가깝다.

2. 성경의 왜곡과 변개를 주장한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근본주의적 특징은 성경이 원문에서 왜곡되고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는 현대성경이 가부장적 어휘가 아니라 양성평등적 어휘를 사용하고, 문자적 일치가 아니라 역동적 일치, 즉 문자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 아니라 뜻이 통하도록 옮기는 번역으로 자기 해석과 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왜곡되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들, 즉 서구인들의 뿌리는 불가타성경이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이며, 이것이 무슬림에 대항하여 자기방어를 행사하는 기독교세계를 대변하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1137)

그러나 1611년 흠정역 성경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근본주의 집단 가운데서도 이단시되는 특정한 부류의 주장에 국한된다. 게다가, 흠정역과 무슬림 대항을 연관짓는 것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원문판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1611년판 흠정역 성경을 절대시하는 그룹들의 주장과도 다르며, 더더군다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것과 아무런 역사적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브레이빅이 이들의 주장을 인터넷을 통해 접한 뒤에 자기 신념에 나름대로 갖다 붙이고 빼고 한 것으로 보인다.

3. 종교간 대화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진보적 어젠다를 비난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종교간 대화와 상대종교를 공존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각종 진보적 이슈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노동당 교회'가 된 현대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특히 1403등) 이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한다.

4. 예언에 대한 근본주의적 집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왜 하필이면 '2083년'인가에 대해 주목해 본다. 혹시 특정예언에 따라 시간표를 만드는 부류의 근본주의대로 기독교나 서구세계에 전해지는 소위 미래예언과 관련있는 게 아닐까? 이슬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브레이빅이 이슬람에 관한 예언에 따라 자신의 시간표를 짰던 것은 아닐까?

이슬람과 범유럽세계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언에 대한 집착을 물려 받았다면 찾아내게 되었을 예언가로 바바뱅가라는 이가 있다. 그는 이슬람이 서구세계를 석권하리라는 내용의 예언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달리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바바뱅가의 예언이 원용된 경우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시간표를 짜고자 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바바뱅가에 따르면 유럽은 2010년 11월에 시작될 제3차 세계대전에서 핵전쟁을 겪고, 핵전쟁 이후 이슬람과 전쟁을 하여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2043년에도 이슬람은 유럽을 지배하고, 이슬람에 대한 무장봉기가 이루어지며, 2066년에는 미국이 이슬람 치하의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2076년에는 계급없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2084년은 '자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브레이빅이 유독 2083년에 맞출 때 이 '예언'을 의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명확하게 브레이빅 자신의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근본주의 프레임을 따라 적용해 본 나의 추측임을 밝혀둔다. 

(4번을 제외하더라도) 이상과 같은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타입과 겹치는 면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점에 무게를 두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브레이빅 유형'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근본주의로서, 일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온전히 구분된다. 이점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5. 그가 (근본주의) 기독교를 (취사)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성 때문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의 컬트적 속성와는 거리가 멀다. 즉, 전형적인 근본주의는 성경으로부터(만) 취사선택한 신념체계로서 근본주의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배타적인 창이 되고자 하는 데 비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인 척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종교는 약한 사람의 버팀목일 뿐이다. 자신은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진 않았지만 거사를 치를 때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기독교는 "참호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다.(1344)
그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 기도나 성찬참여를 들고 있다.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음 이후에 내세가 있다는 믿음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1345)
아울러 그가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그룹과 연대하기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많은 민족주의 그룹이 기독교의 깃발 아래 싸우기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하긴 하지만, 기독교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하나로 묶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380ff.)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며 새삼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며 좋아하는 기독교안티와 이웃종교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당신들이 신봉하는 신념이나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신념체계나 종교든 실용적인 이유에서 악용될 수 있다.


6.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한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03f.)

이것은 dokument.no 글모음에서도 일관되게 나온 얘기다. 이 주장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범유럽주의에 대한 '실용적' 관심과 일맥상통한다.

7. 그는 자신을 템플러기사라고 지칭하면서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 지칭한다.  

문제의 '선언문' 표지에서부터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의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신을 Justiciar Knight Commander, Knight Templar Europe, Knight Templar Norway 등의 프리메이슨 칭호로 지칭했다. 앞의 포스트에서 지적했다시피 통상적인 근본주의자라면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포스트에서 소개했듯이 노르웨이 프리메이슨 측은 사건이 일어나자 브레이빅을 제명하고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서둘러 부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그는 2010년에서 2030년까지 '첫번째 국면' 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템플기사단그룹인 PCCTS에 개인이 가입의식을 치르도록 했다.(1113f에 가입의식이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템플기사단은 기독교의 '자기방어'를 위한 저항운동단체를 뜻한다.(1118) 저항은 비폭력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1121f.) 그는 '청년유럽운동'(1127)과 같은 전위조직을 통해 우익자유주의자, 기독교 극단주의 무장단체, 전투적 민족주의 등의 그룹을 묶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고 슬쩍 흘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 뒤에 뭔가 굉장한 배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위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느냐이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이라면 치를 떠는 것과 달리, 브레이빅은 프리메이슨 템플 기사단이 서구 기독교세계의 이슬람교에 대한 자기방어를 위한 것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가톨릭에서는 아직도 프리메이슨과 별개로 '기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브레이빅은 자신이 말하는 '기사단'을 기독교의 또다른 양태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범유럽주의를 위해 실용적으로 선택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허울이고, 실체는 범유럽주의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프리메이슨의 연결은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에서 나타나는 적대관계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브레이빅의 '선언문'을 검토하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거기 나오는 내용들이 도대체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어디부터가 그의 망상 또는 희망사항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과연 브레이빅 배후에 어떤 무장단체가 있는지, 혹은 허세인지 여부는 노르웨이 경찰 당국의 수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브레이빅 개인의 허세로만 보자니 정신착란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배후에 정말 어떤 그룹이 있다고 보자니 이 또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건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이 약간 길어졌기 때문에 결론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 브레이빅이 말하는 타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와 프리메이슨 템플기사단을 합한 형태로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자기방어'를 위한 범유럽주의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자기 나름의 기독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같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원리주의 내지, 자신이 표현한 대로 기독교 극단주의라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정신적 안정과 범유럽주의라는 사회문화적 가치의 활용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1)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 심지어 그의 의심스러운 정신상태가 아니라, 테러범이 유럽의 다문화주의와 관용에 반대하여 테러를 저지른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도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2)


[덧붙임]
*1: "그는 단순한 테러범일 뿐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국민일보 기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브레이비크가 잘못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는 선언서 1307쪽에 표현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종교적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문화와 사회, 도덕적 토대 안에서 기독교를 믿는다. 이것이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근본주의 성향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두 분 신학자들이 근본주의 기독교와 테러범의 '기독교'를 구분짓는 주장도 대체로 괜찮았는데, 제목은 교계의 딱한 현실부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좀 민망스럽다. 아예 확 세게 나가야 한다는 심산이셨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원... 사고치고 집나간 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어야 할 사실관계는, 이 기사에서 근본주의와 테러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고 한 부분은 명백히 틀렸다는 점이다. 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찾아보면서 새삼 인식하게 된 부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그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백인기독교근본주의그룹 KKK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 '그리스도의 어린 양(the Lamb of Christ)' 등이 낙태, 애국심 등과 같은 특정사안에 대해 테러를 저지른 극단적 근본주의 그룹들이 존재해 왔고, 오늘도 미국 어디에선가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기독교 테러리즘에 관한 온라인자료로서 영문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을 참고할 것.) 더 나아가, 기독교는 북아일랜드, 세르비아 등 세계분쟁지역에서 폭력과 테러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독교는 분명 잘못되고 거짓된 형태의 기독교이지만, 이건 기독교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말했든 간에 그의 교회관은 왜곡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론으로는 애시당초 공교회의 회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교회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삼일절주일에 한국개신교회 강단에서 민족대표33인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고, 개신교가 삼일운동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회주체였다는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기억하고, 주기철, 길선주 목사 같은 극소수 목회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의 참람된 변절과 배교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며, 공교회적인 참회를 행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유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관는 근본주의적이다. 테러리즘을 저지르지 않고 음모론이나 사이비이단, 자유주의, 공산주의 단죄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그 배타적인 폭력성이 당장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근본주의가 테러리즘으로 발전하는 것은 단지 한끝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희망사항과 본인의 주장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어두고 싶다.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나는 두 편의 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이에 관해 노르웨이 테러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기독교 근본주의가 결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본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논지를 재확인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극히 위험한 폭력성과 폐쇄성,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적 관계의 폭력을 저지르는 형태로 이미 수없이 표출되어 왔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한 사례도 결코 없지 않다.
문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스스로가 근본주의자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다른 이름으로 진짜 정체성을 남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공교회의 형제요 친구인 근본주의자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더하시기를! 죄많고 허물많은 우리 자신과 모든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동일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2: 미국이 조지 W 부시 시대에 테러 이후 교회는 근본주의화하고 국가는 경찰국가로 돌변한 것과 달리 노르웨이 사회는 이 비극적 사건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서 노르웨이에 대한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통합전략으로서의 관용에 관해서는 좀더 심도있는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포기할 까닭은 없다. 테러의 비극을 겪은 노르웨이 사회의 의연한 대처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부디 우리 한국사회도 자유와 관용의 가치가 뿌리내리는 위대한 사회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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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un 2011.07.27 23:18 address edit & del reply

    그의 종교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군요. 범인에 대한 수사가 진행 될 수록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어떤 교리가 그의 범행 동기로 이어졌는지는 아직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방어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지만, 자기방어는 기독교 만이 아닌 오늘날 왠만한 사회에서 인정 되고 지지 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그의 테러 동기였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미흡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테러에 동기를 부여한 것은 극단적 배타주의라고 보여집니다; 특정 기독교의 교리가 그를 그런 극단적 배타주의로 몰고 갔음이 입증 되지 않는 한 이 사건을 기독교 원리주의자의 범행으로 기술하는 것은 삼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인에 의한 테러, 예를 들자면 무슬림에 의한 테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의 특정 교리가 범인을 그런 테러로 몰고 갔다는 것이 입증 될 때만 '무슬림 과격사상에 의한 테러'라고 기술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멋진비움 2011.07.28 04:35 신고 address edit & del

      특정종교의 교리가 테러로 몰고 갈 때만 원리주의라고 해야 한다는 게 Hun님의 생각이시군요.

      그러나 예컨대 독어판 위키의 근본주의 항목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뿌리로의 복고를 요구하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철저하고 특히 불관용적인 수단으로 강제하는 종교적이거나 세계관적인 운동"을 '근본주의'라고 지칭합니다.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근본주의자'라고 표현한 것도 이 넓은 범주로 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낱말의 정의상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브레이빅은 기독교를 자기 테러의 이데올로기적 전거로 들먹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말에서는 근본주의가 미국의 특정 신학사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엉뚱한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첫 번째 글은 이 점을 밝히면서 미국적 근본주의와 혼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리주의'라는 용어가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힌 것이고, 두 번째 글은 브레이빅의 글을 좀더 검토해 보니 내 견해를 확인해주기도 하지만 생각보다는 미국 근본주의와 닮은 점들이 있더라는 내용입니다.

  2. Hun 2011.07.28 10:54 address edit & del reply

    테러로 몰고 가야만 원리주의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원리주의자일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원리주의가 어떻게 그를 테러로 몰고 갔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원리주의가 테러의 동기였던 것 처럼 기술하는 몇몇 언론들이 있어서 의견을 달아 보았습니다.

2011. 7. 24. 21:49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경찰이 발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크롬의 영어번역서비스를 통해 보니 노르웨이 언론에서도 경찰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로 지칭했다고 전하는 보도가 있다.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60705175-Anders-Breivik-From-Document-No.pdf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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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5 19:3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Hun 2011.07.26 12:34 address edit & del reply

    어쨌든 범인의 특징인 "친 로마 가톨릭 개신교 프리메이슨 회원"은 일반적으로 통용 되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정의에 해당 되지 않습니다. 사실 기독교와 서구 역사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로마 가톨릭, 개신교, 프리메이슨' 정말 황당한 조합입니다. 좋게 말해 극우주의의 만행이지, 한 마디로 말해 이성이 꼬여버린 사람의 광기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 멋진비움 2011.07.26 14:09 신고 address edit & del

      새로운 글을 올렸는데 말씀하신 부분에 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2011. 7. 11. 00:00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최근 명설교가이신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가르치다가 우리나라 근본주의자들에게 맹공격을 당하신 끝에 관상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근본주의가 기세등등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막무가내로 들이대면서 악선전을 일삼는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신이 사이비이단집단들의 광란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국내의 거친 토양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도의 기풍을 소개하고자 애쓰신 이동원 목사님의 용기와 노고에 심심한 위로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가? 근본주의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의 보수개혁주의노선의 저명한 지도적 목회자 존 파이퍼 목사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언젠가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두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발언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여기에 제시된 생각들을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파이퍼 목사는 영어성경으로부터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인용된 성경은 파이퍼 목사의 의미를 살려 영어성경으로부터 옮겼으며, 굵은 글씨는 모두 글을 옮긴 필자의 강조이다.


“[문] 개혁주의와 청교도전통에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소책자 「비전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기도들이 우리 예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비전의 골짜기는 청교도들의 기도집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기도들을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범주에 두고 싶습니다. 그 기도들은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일종의 운율 같은 것이 있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공동체적 셋팅에서 쓸 수 있도록 아마도 아주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기도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이 성경적 실재라고 답변드립니다.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명상하라"(시편 1편) 제 생각에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 이게 뭔가요? 이것은 육체적인 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조명받아 여러분의 소명을 알게 되기를!"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을 때 언급된 바로 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봄, 또는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멈춰서 들여다 보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으로 실재에 이르러 여러분이 영적 실재를 파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고 참되고 인격적이고 따스하고 강력한 일종의 기도를 일으킵니다. (* 옮긴이주: 파이퍼 목사가 일부러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채널인 렉시오 디비나의 네 계기, 즉 읽기(lectio), 명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가 모두 나타난다. 여러분도 꼭 렉시오 디비나나 관상기도라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 주의를 잡아 끌면서 읽기를 멈추고 깊은 묵상을 하면서 성령의 의도를 깨닫고 그 다음에 나올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확인해 가면서 이에 따라 기도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히에로니무스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는 성경읽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관하여 이연학,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in: 『활천』 2007.7:40-44을 참조할 것.)

그래서 제 답변은 제가 방금 정의한 대로의 관상기도와 명상의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 대해 "예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고, 그 사귐에 있어서 매우 신비적인 이런 종류의 깊이와 이런 종류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결을 발견하려면 주로 신비적인 가톨릭전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 수업들에 대해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레벨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 레벨에서 영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관상하며, 놀라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상이 일어난 이들의 훌륭한 대변자들을 찾기 위해 나쁜 신학, 즉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나쁜 신학을 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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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파이퍼 목사의 견해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논점이 드러난다.

-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서도 관상기도는 존재해 왔다.
- 가톨릭 전통이 아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하다.(*1)

파이퍼 목사는 가톨릭 전통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정교회의 더 깊고 풍부한 영성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관상기도에 관한 한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인 나쁜 신학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보수개혁주의적 시각에서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일단 '나쁜 신학'으로 치부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영성전통을 배제하고 배타함으로써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복음주의, 개혁주의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냐 아니냐, 혹은 복음주의냐 아니냐, 혹은 개신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존 파이퍼 목사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그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도 아니고, 오로지 통성기도와 큐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는 나머지 통성기도와 큐티 이외에도 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이라는 무지막지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답변을 본 다음에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 존 파이퍼 목사는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자다. 또는 관상기도는 성경에 없는데 존 파이퍼 목사가 가톨릭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존 파이퍼 목사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 등등.
아니면
- 적어도 관상기도의 성경적 실재를 인정하고 계발할 필요가 있다.(*3)


[덧붙임]
*1: 이것은 단지 파이퍼 목사만의 개인적인 견해만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만 있는 '이방풍습'이 아니라, 칼뱅과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들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 개혁교회 자신의 전통이다. 다만 한국교회가 미국의 대부흥운동 전통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배정웅, 「개혁주의 전통에 나타난 관상기도」 in: 『새들녘』 2010.11:3-5쪽을 참고할 것.) 이동원 목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목회리더십연구소를 통해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칼럼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복음주의적인 관상기도'라는 화두를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소위 큐티 역시 성경말씀에 따라 하루를 조직하는 수도원주의의 잔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Christian Spirituality :129) 큐티 외엔 말씀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동굴의 우상'(플라톤)이다.
*3: 좀더 인터넷을 뒤져 보니 지난 2010년 말쯤에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통 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하셨다고 자신을 밝힌 '나그네'라는 분이 이 게시판을 장악한 근본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댓글에서 이동원 목사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받은 답신을 이동원 목사님에게 추후 동의를 구하고서 공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동원 목사의 메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그네님의 발제글과 댓글에 나타나는 관상기도 혹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변호도 깊은 학문적 훈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보기엔 나그네님의 관상기도 개념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는 점이나 '비움'에서 오로지 '이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동원 목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복음주의의 협소한 교리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그네님은 미국교계에 관해 우리가 잘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관계를 전해준다. 즉, 미국에서 95%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교들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관상기도를 비난하는 것은 5%의 근본주의 계통 신학교라는 얘기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관상기도를 종교다원주의 이단으로 단죄해겠다고 기세등등해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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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8. 22:11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4.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장21절)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들)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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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희 2011.06.22 07:39 address edit & del reply

    예수보혈 예수이름 없는 영성훈련은 아무 의미도 없고 쓰레기에 불가하다. 그영성훈련이 어찌되었는지 직접 참석하지 않아 알수는 없으나 판단과 심판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믿는다. 오직예수

  2. 산들에... 2011.12.05 16:47 address edit & del reply

    그 동안의 분쟁을 보면서 불신자들에게 창피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객관적이고 냉철한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새로운 인식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드네요.
    글 잘읽고, 박수를 올려 드리고 갑니다....

  3. 겸비 2011.12.05 18:05 address edit & del reply

    영성 수련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던 저로써도 참 유감스러운 글 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혼신의 기도와 힘으로 섬기는 다일영성수련이 오인 받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4. sj 2011.12.05 18:28 address edit & del reply

    오- 잘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네요 :)

  5. 아주 2011.12.07 10:08 address edit & del reply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고 비난 하시지 않으신데
    누가 이렇고 저렇다라고 비난하는 자세는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6. 주안의 평안 2011.12.07 10:13 address edit & del reply

    영성수련은 받은 사람으로 이렇게 논쟁이 된다는 것이 눈물이 납니다
    기도와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다일영성수련이 이런 것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7. 오리온 2011.12.07 13:14 address edit & del reply

    의미없는 논쟁이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 고통 당하실 주님을 생각 하며 가슴이 아픕니다.
    일방적인 글들 사이에서 균형을 조금이나마 잡을수 있도록 다른 시각으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8. 명현 2011.12.07 18:21 address edit & del reply

    음.. 이런 시비로 에너지 낭비하지 마시길.... 근데 정말 정리 짱인듯..

  9. 질기 2011.12.10 00:22 address edit & del reply

    믿음의 지평.. 글쓰신 분이 누구신지 궁금해지네요. 글 읽어내려가면서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듯 속이 다 후련합니다. 아주 객관성이 분명하면서도 정말이지 명쾌 통쾌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10. DAILROSE 2012.01.18 21:05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비움님,너무나 시원합니다.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신학을 갖춘 분 만이 쓸 수 있는 글을 통해 균형 있는 시각을 찾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신지 무척 궁금합니다. 알 수 없을 까요?

  11. 2012.01.18 23:16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멋진비움 2012.01.19 20:35 신고 address edit & del

      모두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AILROSE님께는 따로 메일 드렸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참소가 쉽게 없어지진 않겠지만 결국은 그들의 강변에 참된 영적 무게가 실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미 없는 참소에 주의를 빼앗기지 마시고, 주님과 그분의 뜻에만 더욱 집중하시면 좋겠습니다. 모두 다 잘 될 것입니다^^

  12. 질기 2012.01.28 16:40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비움님, 댓글에 대한 답변도 참 통쾌 상쾌 하시네요.
    벗진 비움님의 한 말씀 한 말씀에서 참된 진정성과 영적 권위가 느껴집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참소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결국은 참된 영적 무게가 승리할 것이므로,
    의미없는 참소 따위에 주의 빼앗기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에 집중하라는 말씀,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 순정 2012.11.03 02:37 address edit & del

      질기와 명현은 동일인물...도배까지하실필요가 ㅋ

  13. 예쁜여인 2012.02.25 20:31 address edit & del reply

    최일도목사님을 그렇게 욕질하시는 개신교복음주의자들의 태도가 저는 오히려 치가 떠네요? 최일도목사님이 무슨 사기꾼입니까? 목사님을 욕하시려면 먼저 인간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는바입니다!

  14. 2012.03.25 22:30 address edit & del reply

    영성수련을 받았던 사람으로 참 감사한 글이네요. ^-^

  15. 신학생 2012.08.09 17:01 address edit & del reply

    글쓰신 분 신학생이신가요? 굉장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신 분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최일도 목사님 좋아합니다. 하지만 비판하신 목사님과 사모님을 무조건적으로 맹비난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거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몰아가고 계십니다. 본인이 제시하신 논리도 상당부분 비판자들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길게는 안쓰여질 것 같으니 짧게 몇 자 적겠습니다. 먼저 WCC문제를 말씀하셨는데,, WCC가 추구하는 가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속한 사람들중에 다양한 급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있어서 오해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판자들이WCC를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그 말을 꺼낸 것처럼 연결하시는 것은 추측이며 비논리적입니다. 그리고 WCC에 속했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WCC는 성삼위일체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고백하면 가입할 수 있는 연합단체이지, 정통 복음과 신앙을 보장해주는 신앙단체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이단시되는 제7일 안식일교도 WCC소속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집회 역사상 자신을 누구라고 칭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분명히 이질적인 행동이며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담임 목사님을 북극성이라 부르실 수 있겠습니까? 또 한가지 최일도 목사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 여러가지 임상병리적인 방법들을, 타 종교의 수행법들을 인용한 것은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 것 자체는 돌봄이라는 관점에서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이 방법 자체가 복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들어가면 복음이다? 그럼 예수님이 없는 복음도 가능한가요? 복음은 예수님의 선하심과 같은 선함을 행하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의미하며 그 분을 믿고, 그 분 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참된 연합으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임상병리적인 방법 자체가 심리적인 해결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영성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신학공부하신 것 같은데 영성이 무엇인지는 잘 아시죠?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영성 집회라는 것은 그분과 교제하고 만나고 경험하고 맞아 들이는 것입니다. 임상병리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파악하고 살필수는 있겠지만 그 것 자체가 영성이 될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존 교회에서 쇠뇌를 시켰다고 하는데 그럼 그 쇠뇌를 받고 순교하신 분들은 믿지도 않고 쇠뇌된 것이므로 지옥에 갑니까? 물론 자발적인 신앙고백이 중요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관적인 신앙고백을 가지고 무조건 쇠뇌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줄이고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최일도 목사님의 집회가 비성서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기존의 세계 기독교 정통신앙과도 거리가 있고, 수도원 영성등의 영성 역사와 같이 일종의 훈련방법이라기 보다는 심리치료나 혼합주의 영성의 색깔로 오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영성훈련의 역사를 살펴보시면 납득이 되실 겁니다. 복음 안에서 무조건 다된다? 생각해보십시오

    • 멋진비움 2012.08.10 22:25 신고 address edit & del

      제가 굉장히 진보적이라기 보다 신학생님이 굉장히 '보수적인' 분일 수도 있겠죠^_^
      뭔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으신 것 같은데, 님이 제 논지나 전후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상태에서 글을 쓰신 게 역력하게 나타나니 저로선 별로 길게 쓸 말이 없군요. 게다가 죄송하지만 '세뇌'를 네 번이나 '쇠뇌'라고 쓰신 걸 보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16. 나그네 2012.09.13 06:00 address edit & del reply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무시하는 분이시군요

  17. 김한나 2012.10.03 07:47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비움님,
    정말 글은 멋지게 잘 쓰셨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비움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만 보시고 배후에 있는 것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최일도님은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칭찬받는 목사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는 그 수련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멋진 비움님의 글만 읽어도 그 수련회가 충분히 혼합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비록 그곳을 옹호하는 식으로 쓰셨지만)

2011. 5. 14. 12:36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한국교회에는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 등을 자기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신학도들이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하면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곤 한다. 따라서 소위 개혁주의신학에 대해 개념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개혁주의신학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범위의 뜻을 지닌 표현이다.

1. 로마가톨릭신학과 대비되는 의미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종교개혁 원리를 받아들이는 개신교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에(F L Cross &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formed Churches' 항목) 이 경우 개신교신학 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1.1 개혁신학의 영향권: 아울러 아래 2나 3의 개혁교회전통의 영향을 받아 그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개신교의 교파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루터교신학과 대비되는 칼뱅과 스위스종교개혁전통: 이 표현을 쓸 권리가 있는 교회전통은 해당 종교개혁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에서부터 우리나라 장로교회에 이르는 개혁교회 전통 일체이다. 대체로 다른 신학전통들과 마찬가지로 특정전통에 대한 배타적 권리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현대성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공교회적 신학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칼뱅 이후 개신교전통에서 슐라이어마허와 칼 바르트, 몰트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거인들을 배출해왔다. 이런 의미의 개혁신학에 관한 논의의 예로는 루카스 피셔가 편집한 The Reformed Family Worldwide나 미하엘 벨커가 편집자로 참여한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에서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3의 그룹과도 함께 대화하고자 한다.(*1)

3.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의 전통: 종교개혁자 칼뱅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원조보수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이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2의 의미에서 '개혁신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가짜네, 개혁신학이 아니네 공격하는 일이 잦다. (*1)

이들의 공격패턴은 대체로 자기들이 신봉하는 아무개 신학자를 비롯한 '(17세기) 개혁신학'(과 그 후예들의 신학)에서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개는 감히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 개혁교회 출신이라도 '개혁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신학'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베자와 투레틴, 영국의 청교도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17세기 개혁정통주의신학은 20세기초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까지 이어져 왔고, 미국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따르는 루이스 벌코프와 반틸, 워필드, 찰스 핫지, 존 머레이 등의 구프린스턴학파와 그 후예들에게서 존중되어 왔다.

이 가운데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정통주의는 실은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세계교회에 통해왔음에도 '진짜 개혁신학'을 한다는 이들이 언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미계 장로교회전통과 거기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통을 통해 소위 '원조보수 개혁주의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실체가 바로 이 그룹이다. 폴 틸리히가 정의한 그대로, 현대의 상황을 신학화하기를 거부하고 일체를 정죄하면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고정되어 되풀이하고 흉내내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2)

근본주의 신학은 분명 신실한 최선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통', '원조보수'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 외에 다른 생각을 진리의 적으로 돌리는 호전성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자연히 교리주의와 교회분열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나마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탁월하고 차원높은 개념적 세련성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 놓쳐 버리면 자기중심적인 분파주의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롯한 온갖 착잡한 기형적 현상까지 배태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의 의미에서 개혁주의 원조보수를 별 반성없이 계속 부르짖는 분들은 내가 근본주의자라는 걸 알아주시오 자랑스레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개혁주의를 들먹이면서 개혁주의에 근본주의의 이미지까지 착색시킴으로써 다른 개혁신학전통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는 근본주의자라고 아예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켜 당당히 나서시라고 권해드린다.

[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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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29. 00:41

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1. 요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어수선하다. 이광선 전총회장이 물러나면서 금권선거사실을 '양심고백'했고, 길자연 현총회장에게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처분을 받아내 압력을 가하고 있다. 세간의 눈은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길자연 목사에게는 따갑다.

2. 글쎄. 양심고백이라. 과연 그럴까? 
이광선 목사는 마치 길자연 목사가 금권선거의 원흉인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교계의 금권선거는 어제 오늘의 관행이 아니다. 몇십만 원을 받은 아무개 목사가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이게 어디 그렇게 새로운 일이었던가. 이건 일을 터뜨리기 위해 새삼 터뜨리는 전략적 행동이 아닌가. 결국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특정인에게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게 뻔히 보이는 석연치 않은 모양새다. 이런 경우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당사자 역시 뭔가 구린 구석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배후 알력관계가 짐작되긴 한다. 짐작이 맞다면 이건 소위 양심선언을 들먹일 성질의 것이라기보다 추하고 부끄러운 교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태의 본질이다. 거기에 세간의 여론까지 끌어들인 셈이고.

3. 작은 공동체든 교회기구 차원에서든 결국 이런 진흙탕 싸움은 제딴에는 공평과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내 편은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고 네 편은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는 사탄의 졸개라는 흑백논리가 난무하게 된다. 각자 제딴에는 성전을 치르는 십자군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십자군 전쟁'의 미몽을 헤매게 된다. 제딴에는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하나님은 이들의 승패에 하등 상관이 없으시지 않을까.

4. 이들의 진흙탕싸움 자체엔 탄식과 한숨 외엔 별 감흥이 없다. 다만 무겁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는 분들이 저러고 나서 뒷수습은 고스란히 한국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특히 사이비이단문제에 관해 이광선 총회장 재임기간에 벌어진 혼란상이 염려된다. 길자연 목사는 직전 사이비이단대책위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대책위를 새로 꾸리기로 했었다. 혼란한 한국교회의 사이비이단문제 대처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조처였다. 최근 길자연 총회장의 직무정지처분은 이와 같은 범교회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 손봉호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시는 것 같다.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금권선거시비가 없는 것과 달리 보수진영은 박형룡 목사 이래로 돈문제로 끊임없이 시비가 붙고 있으니 부끄러워들 하실 법도 하다. 원래 한경직 목사 등이 한기총 설립을 추진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어엿한 한국개신교회의 공교회적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공교회성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아울러, 적어도 초창기의 한기총은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등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독교정신을 구현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나아가 남북화해에 물꼬를 트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제기되는 한기총해체론은 주된 배경과 근거가 된 금권선거문제가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반동적 권력기관 노릇을 극우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으며, 한기총 설립정신을 거슬러 일개 이익기관으로 전락해 있다. 현재 한기총의 정체성과 관행 자체가 원래 시작되었을 때의 정신과 전망을 거스르고 있는 서글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드러내준다.
사회여론?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에 대해 쌓인 것들이 많으시다. 특히 현 정권 들어서 장로대통령이 뽑혔답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기라도 한 줄로 믿으시는 분들의 혁혁한 공로 덕분에 사회여론은 분명 교회권력을 엎어버릴 틈을 노리고들 있다. 이러던 차에 한기총 해체 얘기가 교계 내부에서 나오니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6. 앞서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교회가 쇠락을 맞이하는 가장 심각한 원인은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비복음적 보수주의"에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의 쇠퇴를 일으켰다고들 하면서 마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하다면 정말 크게 착각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울어가는 현상은 소위 보수적 신앙인들의 비복음적 행태에서 99%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과 한기총 (그리고 각 교단)의 금권선거문제는 비복음적 보수성의 진부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기총 해체? 답답한 분들 심정에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비복음적 보수성이라는 한국교회의 정신적 토대의 문제다. 어차피 한국교회는 공교회로서 조직을 이루어가려고 하게 될텐데, 정신성이 잘못 뿌리내려 있는 한 문제는 늘상 터질 수밖에 없다. 저 찬송가공회의 착잡한 난맥상은 그 '공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과 영향력과 성공과 인기와,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 한 이 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2) 교회의 존재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이다. 한기총해체론은 한국교회에 닥친 심각한 위기, 참된 토대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가 여부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7. 교회는 실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계시의 정신이 주어져 있는 한, "고백자 베드로"(바르트, 쿨만, 래드) 위에 교회는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마태복음16:13-20)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한국교회의 현재 위기로부터 새롭게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기다린다. 한국교회가 아집과 욕심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뉘우쳐 돌이키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덧붙임] 
(*1) 글을 쓰고 나서 한기총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에 지난 2010년 4월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내놓은 탁월한 분석에 대한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지방 기자는 한기총의 설립과 성장 배경 가운데 반공주의와 교회의 대형화라는 요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렵다고 진단한다. (→발제문전문)
다만 당시 교계원로들의 한기총 설립정신을 반공주의로 뭉뚱그리기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본 블로그에서도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비판적인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기총이) 반공주의라는 정신성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대목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가능성으로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결과적으로는 보수진영만의 연합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아쉬우나마 한국교회에 공교회성을 표현하는 그릇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이비이단문제 역시 각 교단들의 단죄가 공교회성을 담보하는 틀을 제공했다는 데서 한기총의 긍정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문제는 이 긍정적인 역할마저 높으신 분들의 진흙탕 싸움으로 말미암아 흐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2) 한국보수주의교회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본격적인 분석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망라하는 국내 중진신학자들에 의해 3년 공동프로젝트로 이뤄질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김진호, 강인철, 구미정님등 눈에 익은 학자들의 이름이 보여 신뢰감과 기대감을 더한다. 다만, 문제는 대형교단들 스스로 자기성찰을 해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주로 기장, 성공회와 같은 진보성향의 중소교단에 의한 분석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석이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같은 곳에서 나와줘야 할텐데, 서슬퍼런 교권 앞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을테니 아쉽고 안타까울 다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들인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을 뒤엎은 것과 같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이 교계의 주류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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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31 23:15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멋진비움 2011.04.01 14:11 신고 address edit & del

      미자아러다님 안녕하세요.
      문의하신 번호대로 답을 올려드립니다.
      1. 외경 / 제2경전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주장은 개신교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증거를 제시해도 말을 계속 바꾸겠죠. 미국가톨릭근본주의자들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니 유감입니다.
      2. 그분들 얘기는 오래된 가톨릭호교론의 레퍼토리중 하나입니다. 가톨릭호교론은 자신들에게 유리해보이는 내용을 그럴싸하게 엮은 일종의 선전선동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낚이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3. 죄송하지만 제가 지병 때문에 더이상 소모적인 논쟁에 참여하거나 관여할 정도로 청년과 같은 시간과 건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우리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 2011.04.01 15:4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1. 1. 31. 07:37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 올바른 길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교단에서 이재철 목사와 같이 이 시대에 드문 올바른 설교자를 사도신경의 그리스도 지옥강하조항에 대한 강해에서 본질과 상관없는 말꼬투리잡기로 이단시비를 걸고 목사면직까지 강행한 사례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재철 목사가 목회하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신자를 잃은 주변교회들과 양화진에 이익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인들이 담합과 공모를 했으리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가장 큰 기관인 한기총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미 개별교단들이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를 근거로 이단으로 단죄한 큰믿음교회 같은 문제단체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렸다는 것도 착잡한 희비극이다. 신임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이전 위원회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단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관상기도가 이단시비에 올라 있는 현실은 이런 사이비이단문제의 난맥상과 맞물려 있다. 관상기도가 일부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혼합주의 쯤으로 알려져 있으니 참 딱한 현실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상기도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을 성전이라도 치르듯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와 신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라고 봐도 큰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호전성이 영들을 분별한다는 그럴싸한 미명으로 포장되고 장려되기까지 하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복음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성경을 들먹인다고 해서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써야 한다면서 성경과 사도를 들먹이는 사이비집단이 있다. 공교회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가 성경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 = 토요일'을 지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일 =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공교회를 공격하는 태도가 성경적일 수도 없다. 

왜인가? 성경에 담긴 복음의 정신은 놓친 채 성경만 들먹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주의적 인용으로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며 의기양양하게 단죄할 수 있을까? 자전거가 성경에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며 득의만면하게 저주를 퍼붓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둔다.

둘째, 순전한 믿음은 소위 순혈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때 이방인과의 통혼을 비판하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했다. 그러나 성경을 면면히 흐르는 구원사의 큰 흐름은 이방인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이었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없었을 것이요, 아직도 정결례를 삼가 지켜야 했을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도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했다.

순혈주의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서 순혈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참사도로 여겨졌던가? 오히려 순혈주의를 고집할수록 그들은 구원사의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관상기도에서 본질과 알맹이가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순수한 믿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전한 믿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극단적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가까운가? 

관상기도가 '이방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평은 설득력 없는 순혈주의에 불과하다.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일체에 소위 종교혼합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성경의 역사적 과정 자체가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는 비평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관상기도가 그리스도중심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로부터 가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한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세계신학계의 보편적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이들에게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오늘의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의 거장들이 영성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거짓교사일터이므로!

그렇다면 영국의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책 Christian Spirituality를 보면 소위 영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향점을 갖는 여러 가지 신앙유형과 신학적 입장들이 아우러져 있다. 그 가운데는 관상기도가 예사로 등장함은 물론, 소위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편협한 근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거짓선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빌랴의 테레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요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토마스 머튼, C S 루이스, 칼 바르트, 본회퍼 등이 다양한 영성의 모습으로서 토의된다. 

자, 맥그라스는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텐가? 아니면 맥그라스 역시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배교한 거짓교사라고 할텐가?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존 파이퍼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관상과 명상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실재라고 긍정한다. 영성의 단계를 나누어 존재의 상승과 고양을 얘기하는 가톨릭신학의 '나쁜' 관상과 명상에 대해선 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긋지만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가 추천하고 격려하는 차세대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이머징교회 운동(*1)과 관상기도에 참여해 온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든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존 파이퍼나 드리스콜 목사 역시 이들의 눈에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아니고 배교한 거짓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할 교회의 교사가 몇이나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들에게 교회의 교사가 과연 필요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성령의 감동 덕분에 '오직 성경으로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관상기도에 대한 세계공교회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2)

[덧붙임]
"Emerging Church"는 '이머징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번역이다. 그렇다고 '신흥교회'라고 옮기자니 신흥종교가 연상되어 어감이 적절치 못하고, '(새로) 뜨는 교회'라는 식의 표현도 '요새 뜨는 교회'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할 것을 고민해야 할 낱말이다.
*2. 구글링을 잠시만 해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그들 스스로의 (소위 '영적인') 통찰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빌어온 얘기라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주장을 어디선가 빌어오거나 따오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그렇게 했느냐이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국근본주의의 복사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두고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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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25. 12:53

신앙의 항체

우리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과 순결한 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이 명분이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특별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순수한 복음 혹은 순결한 교리라는 명분 하에 교파교단간의 대화와 연합이나 종교간 대화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교파교단간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서로 입장이 다른 교파, 교단, 신학학파간 대화와 교류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이 주제는 이미 공교회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교파교단간 대화는 종교개혁 이후 줄곧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미 칼뱅과 멜랑히톤, 크랜머 주교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 각 교파의 대표자들은 당대의 교회일치적 대화와 교류를 추진한 바 있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와 같은 한 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신학자들 역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유럽개신교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아우르는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범교회적 대화 노력을 계승한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운동이다.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와의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두어야겠다. 

과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지만 과연 시대사조나 종교간 대화 일체는 저주받아 마땅한 종교혼합주의일까?

오히려 성경 자체가 종교간 대화와 통섭의 역사를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창세기1장은 고대근동의 우주론인 신통기(신들의 탄생 연대기)를 탈신화하하여 아우른 결과였다. 
-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왕정을 비롯한 이방문화를 흡수했다.
- 잠언은 고대근동의 지혜문학을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씀이다.
-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문학사상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받았다.
-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공박하는 동시에 영지주의의 상징과 이미지를 흡수하여 신앙을 설명한다.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무한정 길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을 거친 하이브리드였다.(*1) 신앙의 선조들은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했다. 

이 상황은 히브리낱말 '바알(בע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바알이라는 낱말 자체는 가나안신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문맥에 따라 남편, 주인, 주민, 지배자, 지배하다, 결혼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용례들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순수주의에 매달렸다면 이런 일상적인 용례 자체가 없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신앙의 중심에 야웨 하나님의 구원행동 대신 풍요와 번영이 들어설 때 바알신앙이라는 혼합주의로 퇴행하는 위기가 일어났다. 혼합주의란 신앙이라는 원에서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이지 하이브리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바리새주의가 보여주듯이 소위 순혈주의도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진다면 똑같이 문제다. 

오늘날 '하이브리드'라면 배교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이들이 있다. 불교나 유교에서 비롯된 말을 쓰면 안 되고, 신비종교에서 비롯된 기도방법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아무개 목사나 아무개 신학자는 시대사조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이비이단이고 거짓선생이란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되고 안경을 쓰면 안 되고 수혈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기만 완고하고 옹졸하면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그 독소를 한국교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니 문제다.

다원사회 속에서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어떻게 차단하고 배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이미 흡수하고 있다. 이미 불식간에 수많은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을 흡수하고서 '오직 성경만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올린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정신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오히려 이미 그것조차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혹은 기도의 응답과 꿈과 환상과 영음을 통해 자기 신앙이 '순수하다'라고 입증되기라도 한 걸까?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부터가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건강하다는 것은 병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항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에 대해 결벽증을 갖는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올바르게 가늠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믿음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믿음을 잘 벼릴 때 신앙의 건강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덧붙임]
*1. 하나님은 그런 '하이브리드'에 담긴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신다.(마태복음 16:13-20)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동적 영감성이다.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 예컨대, 밴후저 같은 이들은 -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있다. 신적 측면은 성경이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요, 인간적 측면은 성경이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서 기록된 제한적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가현설에 빠지게 되듯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성경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가현설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가현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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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항체  (0) 20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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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4. 06:27

오직 성경으로만

루터와 칼뱅은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원칙을 통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 뿌리박은 개신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개혁자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은 공의회나 교황, 신학전통 따위의 진리값을 가늠하는 잣대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여하한 영적 현상, 영적 인물 따위라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의 권위 아래 있다.
-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명확한 부분으로부터 모호한 부분을 해석한다.

이런 개혁자들의 요구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상당부분 오해되고 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 일체를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읽기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실상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교단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은 공교회성을 부정하는 사이비이단집단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강변이다. 아울러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뒷얘기는 자기 교주나 자기 집단, 자기 선입견에 대한 복종의 요구로 귀결되곤 한다.

그 누구의 성경읽기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누구의 이해력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릇된 전통과 선입견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칼뱅이 지적했다시피,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을 제한하심으로써 겸손하게 하시고, 더불어 사귐으로써 더욱 충만한 하나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적 토론영역에서 함께 겸허하게 지혜를 모아가는 사귐의 장이 바로 신학이다. 신학이 곧 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성찰과 검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참다움에 가깝게 된다. 신학이 추구하는 참다움은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성경읽기에 견줄 수 없는 보편적 권위를 지닌다. 전통이 성경본문과 성경의 정신이 지지하는 참된 전통이라면 거기엔 보편적 권위가 있다.(*1)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참다움조차 언제나 성경의 권위로써 재어지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둘째,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도록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낚이는 대목이 바로 영적인 '현상'이나 그런 현상의 매개자라고 주장하는 영적 인물의 인상적인 '말빨'이다. 그런 것에 낚일수록 신학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종교이고 죽은 교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 현상과 인물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증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신학이야말로 성령이 주관하시는 성도의 교통과 교제의 장이다. 아울러, 덜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의 은사(*2)도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비약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스스로를 거기에 매이도록 하신다. (요한복음16:7,13-14)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을 빌미로 그 누구도 성경을 비약할 수 없다. 

대개 이런 식으로 영적 현상과 인물을 따를수록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 신학이 비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마당에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반증도 한갖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짓거리 쯤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한 다음 성령의 초자연적 현상을 운운하는 행태야말로 사이비이단집단이 잘 닦아놓은 멸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성경의 자기해석과정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혹시 일체의 신학전통 따위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거절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종교개혁의 성경원리는 명확한 부분에서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전체 이해로서 다시 명확한 부분을 조명하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얘기한다.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은 일개 개인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 항상 동료(들)과의 상호의존적 해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해석에 접근해 간다. 모든 건전한 신학전통은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에 동참한다. 

앞서 밝혔다시피, 성경해석은 누구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신학의 장을 통해 함께 읽고 나눔으로써 건전성을 이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에는 전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처럼 성경과 전통에 동일한 권위를 돌리기를 거부한 것이었지, 전통 자체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대교부와 공의회, 중세신학에 정통한 당대일급의 신학자들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루터와 칼뱅에게 '오직 성경으로만'은 성경의 우위성(prima scriptura)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라는 원리를 밝힌 장본인들이 전통에 정통했다. 어떤 의미에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을 외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으로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전통의 빛과 그림자를 잘 이해하고 스스로가 속한 전통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3)(*4)

[덧붙임]
*1. 이미 신약성경 안에도 존중받아야 할 전통의 전승과정이 나타나 있다.(고린도전서 11:23, 15:3-4, 데살로니가후서 2:15, 디모데전서 2:2, 베드로전서1:18-19 등.) 정경사적으로 보면 성경이 전통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paradosis)이 성경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대로 교회가 성경을 만든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도베드로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든 게 아닌 것처럼(마태복음 16:13-20),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된 사도적 전승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했을 뿐이다. '교회가 정경을 도입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의 규범이 되기를 포기했고, 전승이 진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Oscar Cullmann)
참된 사도적 전승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에서 통일성을 이루지만 각 성경기자의 삶의 자리와 신학사상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는 사도신경의 공교회조항과 마찬가지로 전통의 다양성을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2. 아마도 최근 일어난 은사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를 '투시'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문맥상 합당치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문맥에 따르면 사도가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 믿음(8,9a절)을 주시고, 신유와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통변(9b,10절)을 주신다고 했을 때, 덜 초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더불어 열거하여 은사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빗나간 시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는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해명하는 데 사용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Calvin, Matthew Henry, Schlatter, Orr & Walther 등.) 아울러,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언을 앞일을 알아맞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교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고린도전서 14:)
*3. 자신이 특별히 따르는 전통이나 입장이 없(고 오직 성경만 믿는)다고 믿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미 우리의 성경읽기를 규정하곤 한다. 이를테면, '오직 믿음으로만'이야말로 성경의 정수라고 받아들일 때 이미 개신교전통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휴거와 7년 대환란을 기독교종말론의 내용이라고 믿을 때 이미 세대주의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전통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성경의 본래적 메시지로부터 비판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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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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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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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5. 13:51

종말의 분별기준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이 교회회중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잡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소동이나 베리칩=666표 루머의 확대재생산현상 모두 결국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1. 시한부종말을 얘기하는 소위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뉴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 3. 장황한 세대주의식 성경인용을 통해 자기확신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의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당대에도 임박한 시한부종말론과 '휴거'(*1)를 주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절에 이들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양태가 나타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하고 있듯이 1.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여러 가지 소문, 3. 사도들의 말과 같은 것들로 시한부종말론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퍼뜨리는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써야 했다.

3-4절은 종말을 식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친다. 주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도를 떠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참칭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개혁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을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중세교황권은 복음의 도리를 떠나 세속권력에 취해 무서운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고,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한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여길 만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성경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도 로마가톨릭은 복음의 도리를 떠난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세계종교통합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로마가톨릭의 향배는 분명 조심스럽게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배교와 악행이 횡횡하던 중세로마교회를 향해서조차 그 가운데 교회가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바 있는데(칼뱅, 기독교강요 4.2.11,12), 우리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현교황 베네딕토16세가 전임자인 요한바오로2세와는 달리 욕을 먹곤 하는 편이지만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별 근거가 없다. 본문 4절은 극단적인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베네딕토16세는 가톨릭에서도 손꼽을 만한 종교다원주의의 공공연한 반대자다. 베네딕토16세 같은 타입의 가톨릭보수파가 상대적으로 이런 데 무관심한 진보파와 달리 개신교와 정교회에서 신자를 빼내 개종시키려고 애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종교통합음모라니 터무니없다.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야말로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 아닐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에큐메니칼 문서들이야말로 세계교회가 복음의 도를 떠나는 배교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루머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세대주의 종말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루머를 퍼뜨리는 분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공식문헌을 얼마나 확인해 보셨는지,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방식이 다르면 죄다 배교고 이단이라면 대체 배교 아닌 것이 무엇이고 이단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런 식의 분파주의야말로 이단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스도께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지 협소하고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게다가, 멸망의 아들은 대체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혹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마부스'를 들먹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일개 점성술사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마부스'가 멸망의 아들이라고 해보자. 그가 과연 누굴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국방부의 그 아무개? 혹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면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유로화의 발권국 유럽연합의 별 권한도 없는 수장? '그들' 중 그 누구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4절의 예언에 들어맞지 않는다. 적어도 예언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양태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로선 그렇다.

세상의 악의 향배에 대해서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종말의 기준이 충족되기 전에 괜히 들뜰 필요가 없다. 그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저명하고 신령한 아무개가 재림과 말세의 징조를 말하는 영음을 얘기하거나, 신통하게 예언을 여러 차례 맞춘 아무개가 뭘 보거나 듣거나 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런저런 종말의 소문을 듣더라도,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해 보니 재림과 휴거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하더라도 휩쓸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시한부종말론 대처법이다. 

[덧붙임]
(*1) 여기서 나는 '휴거'라는 말로 예수재림을 시한부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예수님이 비밀히 신자들을 한 번 또는 두세 차례에 걸쳐 하늘로 데려가고 공중재림은 또다시 별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휴거'는 존 다비 이후 세대주의자들이 발명해낸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관념이지, 초대교회의 신앙이 아니었다. 밀리오레의 지적대로, 이 관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아 이 땅의 고통을 품고 부조리에 거룩한 저항을 하기 보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끔 그릇되게 이끈다. 예수재림을 진정 기다리는 삶은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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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8. 01:51

베리칩에 관한 몇 가지 루머 짚어보기

베리칩에 관한 이런저런 루머가 인터넷에 하도 많이 퍼져 있어서 사실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루머는 오바마정부 들어 통과된 미국 의료보험개혁안에 미국민 전체가 36개월 이내에 베리칩을 삽입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바야흐로 짐승의 표 666을 받게 될 날이 머지 않았고, 예수재림이 가까웠다고 한다.

법령을 미국정부관련사이트에서 직접 찾아보면 이런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문제의 '1004쪽' 얘기는 이 글에 첨부한 파일에서는 1190쪽대가 되어 있다. '1004쪽'으로 나오는 버전은 내려받아 읽었던 파일이 손상되었는지 첨부하는데 약간 문제가 있어서 해당문서를 첨부하지 못했지만 일일이 견주어 문제의 법령 내용이 두 버전 사이에 한 글자 한 글자 동일한 것을 확인해 두었음을 밝혀둔다.

1. 법령에 나오는 '삽입할 수 있는 의료장치'는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법령에 나온 제2종 의료기구에 관한 기술에 나오는 implantable이라는 형용사가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안에 삽입하는 의료기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2. 미국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법령이 36개월 이내에 발효된다는 얘기다.
문제의 '의료기구'는 미국의 일반시민 전체가 아니라 환자(patient)에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위 법령에 명시되어 있다. 당뇨병이나 심장병 같은 만성질환환자에게 적용될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법령이 말하는 '36개월'이라는 시한(1196:5f 등 여러 곳)은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아야 하는 시한'이 아니라 당연히 새 의료보험법령의 발효기한을 가리킨다.

3. 베리칩이 이번 법령에 새로 포함된 것도 아니다.
베리칩은 이미 미국식약청에 의료기구로 등록되어 있다. 2010년11월5일자 업데이트본에 따르면, 베리칩은 2003년 등록되어[date received] 2004년 승인[decision date]되었고, 제3종 (Classs III)로 분류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식이 베리칩음모론자들에게는 더욱더 두렵고도 설렐지도 모르겠지만.) 요는, 베리칩은 의료기구로 사용된지 좀 됐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베리칩이 의료기구면 짐승의 표가 되는지, 의료목적으로 베리칩을 맞는다면 곧 666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2004년부터 의료기구로 사용되고 있던 베리칩을 두고 왜 하필 지금 이 난리들일까?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오바마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열악한 미국의료보험제도를 손보겠다는 걸 공화당은 사회주의를 연상케 한다며 흑색선전을 펼쳐왔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미국경제를 수십 년에 걸쳐 망가뜨린 장본인인 미공화당이 경기침체로 오바마의 지지율이 떨어진 틈을 타 선거에서 압승한 뒤 경제를 빌미로 오바마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희한한 모양새가 펼쳐지고 있다. 위헌시비까지 거시는 중이시란다. 이에 미국근본주의자들은 미공화당에 호응하여 묵시문학적 파국의 색깔을 덧칠하고 있다. 오바마는 빨갱이일뿐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를 예비하는 어둠의 세례요한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오바마가 바로 적그리스도?

이들의 선전은 미국주의원들에게도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버지니아주의회는 중앙언론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리칩의 강제적 사용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현재 법안을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해 놓았다조지아주의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법안을 추진중이거나 이미 추진한 주의회가 더 있을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 조지아주 등에서 베리칩을 받도록 법제화했다는 식으로 국내인터넷에 소문이 퍼졌던 것과는 사실관계가 정반대다.) 이 모든 조처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정치적 구실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 역시 정부가 거짓말하고 있다든지, 자발적으로 받도록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할 거라는 등, 근본주의자들의 베리칩음모론을 결국 막지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판 색깔론이라고 하기조차 뭐한 진흙탕싸움인데 이걸 따라하는 한국사람이 대체 누군가? 앞의 링크를 유심히 보면 장죠셉 목사와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의 글을 열어볼 수 있다. 장죠셉 목사는 과거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했고,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 카페는 신사도운동 계통이다. 이들 모두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확산시킨 장본인들이다. 시한부적인 분위기가 이분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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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도인 2012.04.11 16:45 address edit & del reply

    그렇군요.
    위 내용으로보아 666이 베리칩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을 한방에 끝낼 수 있겠군요. 그돌또한 666이 베리칩인 근거를 오바마 의료개혁법 이야기하더군요.

  2. As 2012.11.10 21:16 address edit & del reply

    3번은 좀 미묘하네요
    FDA의 승인과 의료개혁 법안 통과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4196
    베리칩 = 짐승의 표? / 종교계의 논란 관련

    • 멋진비움 2012.11.12 07:42 신고 address edit & del

      미묘할 것 없습니다. 의료개혁법안은 FDA의 승인과 의료기기에 대한 정의를 전제합니다. 링크기사는 세대주의 종말론 쪽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쓰기한 편향된 기사입니다.

2010. 11. 13. 06:05

한국교회와 사이비이단문제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를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를 이루는 종교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인척 하거나, 오직 자신들의 (정당한 근거를 결여한) 주장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때 교회는 이들을 사이비 혹은 이단으로 분류하여 교회 안팎에 경각심을 촉구해 왔다.

문제는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만한 뉴스거리를 빈번하게 제공하게 되면서 교회나 사이비이단이나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큰 차이가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교회가 나름 고군분투함에도 사람들에게 사이비이단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한낱 집안의 밥그릇싸움 정도로 비쳐질 정도가 됐다.

교회로서는 물론 억울한 점이 많다. 사이비이단자들의 폭력적인 집단행동과 교묘한 거짓말과 선동이 언론에 동정적으로 비쳐짐에 따라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스스로 드리워놓은 그림자에 '낚시질' 당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돈과 여자와 권력을 밝히고, 마술적 카리스마를 연출하면서 독재적이고 비인격적인 교회운영을 하고, 성경해석은 면밀한 연구검토와 기도 없이 엉터리로 끼워맞추는 자기 모습이 혹시 사이비이단이라는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칼 융의 그림자 이론에 따르면 그림자는 자기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잠재의식 속으로 추방한 억압된 자신의 모습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자신의 억압된 모습을 강력하게 규탄하면 할수록, 그림자에 반응하면 할수록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삼켜 버려 그토록 규탄했던 그림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는다.

칼 융의 분석은 한국교회의 사례에도 들어맞는다. 한국교회는 더이상 사이비이단을 배격하는 정도로는 결백하고 의로운 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기엔 한국교회의 규모와 위상이 한국사회 속에서 너무나 크고 강력해져서 자기보다 약한 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괴롭힘으로써 제 살 길을 찾으려는 부덕한 자로 떠오를 뿐이다. 한국교회가 사이비이단문제에 집착할수록 그 프레임에 갇혀버려서 갈수록 사이비이단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사이비이단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올바로 분별하는 것은 지나쳐선 안 될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비교대상이 사이비이단에 머물러 있어선 곤란하다. 사이비이단은 한국교회 자신의 죄된 모습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비교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든 죄악을 갖고 나아가 내려놓고 그의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총 앞에 서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뒤따름으로써만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라는 곤경에서 자신과 이웃을 구원받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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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8. 17:43

작가 최윤희님의 자살소식을 접하면서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최윤희님최근 2년간 지병이 악화되면서 이를 비관하여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싶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삼가 고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나를 지탱해오던 삶의 목표와 의미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생의 의욕도 사라진다. 오만 가지 극단적인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나 자신이 투병 중이다보니 최윤희씨의 그 벼랑 끝에 선 듯한 심정이 절절하게 맘에 와닿는다. 그 처절함과 비참함은 겪어 보지 않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어두운 심연의 끝도 없는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 고통은 행복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던 작가마저 죽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만큼 실로 잔혹하다.

과연 나를 지탱하는 삶의 목표와 의미가 무너지고 고통과 수치가 나를 압도하여 모든 생의 의욕을 질식시킬 때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이것은 최윤희님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실존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정말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특별히 내 경우엔 최근 투병생활 중에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질병보다도, 내가 목표요, 보람을 삼아왔던 것들이 좌절되는 고통보다도 더 괴롭고 아픈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거의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이야말로 모든 고통과 좌절을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힘이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내게 가장 뼈아픈 것은 바로 이 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내 갈 길을 밝혀주었다. 내가 어두워 헤매고 넘어질 때에도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손길이 나를 인도해 주셨다. 성경말씀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통해, 신학연구와 묵상을 통해, 기도 중 지극히 뛰어난 평강이 임하는 은혜를 통해, 앞길을 환히 보여주시는 꿈과 환상과 음성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흔들림없이 붙들어주셨다. 어떤 신학적 물음도 늘 쉬워 보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님이 내게 완전히 침묵하신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음성으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심지어 성경을 읽을 때도,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도, 기도할 때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쇠약해진 건강으로 신학연구와 묵상도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이젠 신학적 물음 앞에 말문이 턱 막힌다.

그동안 그토록 섬세하게 나를 인도하셨던 손길이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가. 지금 가장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대체 어디 계시단 말인가. 그동안 그토록 자비롭게 인도하셨으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침묵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우는" 처지란 말인가. 도대체 왜? 포이에르바하의 생각처럼 하나님이 애당초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다만 내 인간성을 투사한 신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녕 나를 버리신 게로구나. 내가 도대체 무얼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다. 죽고 싶을 만큼 분하다... 자살이 내 마음에 늘 가까이 있다.

내가 지금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미지다.

첫 번째 이미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미지다.

나사로는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이름 뜻과 달리 하나님께조차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받지 못했다. 나사로도 하나님을 믿는 자였으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나사로는 구걸하다가 쫓겨나고(*1), 온 몸이 헐어 고름이 나고, 그 고름을 개들이 와서 핥아 먹는 비참한 굴욕과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죽을 때 이름없는 걸인의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죽어야 했다. 누가 그의 시신을 거들떠나 봤을까. 나사로는 이 모든 치욕과 고통을 겪어내다가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반전은 내세에서 일어났다. 그가 구걸하던 부자집 주인은 현세에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누렸지만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으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이름의 뜻과 달리 이생에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죽지 못해 살았던 고독한 나사로는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깊은 위로를 받으며 쉰다.(*2)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영원히 위로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의 진정한 의미를 보았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차원으로서의 지옥에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현존하신다는 것이다.(*3)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마치 나를 조롱하고 힐난하듯 어처구니없이 좌절되어 버린 내 삶의 목표와 보람, 그 모든 좌절과 고통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짙어만 가는 나의 어두운 고통이 숨막히게 내 목을 조여온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을 기억한다. 나의 이 비참한 삶의 자리, 아니 죽음의 자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침묵하시는 듯한 바로 이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비록 예전처럼 손에 잡히고,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듣지 못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버림받은 자리에 현존하신다. 

개들이 와서 내 상처의 피고름을 핥는 기막힌 삶의 자리이지만,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나의 희망이요, 내 삶의 등불이시다.

[덧붙임]
- 10월10일 현재까지 총조회수가 110회쯤 되는데, 유입키워드를 보면 '최윤희 종교/신앙'이 무려 80여회에 이른다. 최윤희씨의 자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는 얘기다. 비슷한 현상을 얘기하는 블로그가 또 있는 걸 보면 내 블로그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하다.
아마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인들이 요새 자살을 많이 하던데, 최윤희씨가 생전에 전하던 행복의 메시지도 어딘가 기독교를 닮아 있다, 최윤희씨도 기독교인일 듯, 아니라면 종교는 무얼까' 라는 호기심에 글을 열어본 경우가 많은 걸로 보인다. 
사실 근본주의성향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자살문제에 율법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을 내려왔다.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자살에 이르게 된 당사자의 삶의 맥락을 주의깊게 삼가 고려하면서 애도의 심정으로 접근하기보다 단죄와 조롱을 일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자살자 가운데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닌가. 이것을 보더라도 기존의 자살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기존 대처가 썩 적절한 처방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포스팅이 필요할 것 같다.
*1. 나사로가 부자의 집 앞에 '버려졌다'라고 우리말 개역개정역에서 번역한 대목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ἐβεβλητο'라고 되어 있다. βαλλοω(던지다) 동사의 수동형으로, '내던져져있다'라는 뜻이 된다. 물론 βαλλοω 동사는 연결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을 것이다. 
*2. 이걸 보면 나사로는 이생에 위로와 도움을 줄 변변한 가족과 친척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나사로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고독한 상황을 함축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기만 했던 부자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겪는 것처럼, 나사로는 현세에서 아무도 도와주고 위로해 줄 이 없는 뼈아픈 고통을 내세에서 큰어른 아브라함이 직접 품에 안아 위로해준다.
*3. 한국개신교의 사도신경에는 세계교회적으로 볼 때 무척 드물게도 이 조항이 삭제되어 있다. 본래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초기한국교회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지, 종교개혁자들의 뜻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 조항에 대한 입장은 칼뱅, 기독교강요2.16.8에서 고전적인 진술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조항의 재삽입을 지지하는 국내교계인사로서 이정석교수(조직신학), 김정훈교수(신약학) 등을 들 수 있다. 이재철목사는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한 소속노회의 인식부족과 이익다툼으로 말미암은 오해와 왜곡으로부터 소속교단이었던 예장통합에서 이단시비와 목사면직처분까지 겪은 바 있다. 이 조항의 존재조차 모르는 신자들이 많은 상황이어서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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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14 20:49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0. 10. 3. 17:10

한반도전쟁예언의 사각지대

최근 데이비드 오워 박사라는 케냐의 예언가가 한국(교회)의 죄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오워 박사의 홍보영상을 보면 티벳과 칠레와 미국서부와 아이티 등의 지진을 예언한 예언가라고 되어 있다. 그런 예언가가 한반도에 전쟁을 예언했다니 평신도들과 비그리스도인들사이에서조차 입소문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예언이 나왔다면 그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는지 주의깊게 시험하여 보고,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합당한 방향으로 돌이키면 될 일이다.

1.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예언인가?

오워 박사의 불분명한 신학적 배경이나 이현령비현령식 예언행태에 대한 이의제기가 많이 되고 있다. 이 의혹들을 간추리면 이렇다.

1) 오워 박사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초심자'이며,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두 여인과 동거했던 전력이 있다.
2) 오워박사의 부르심이야기에 성경에 낯선 the Ark of the New Covenant of The Lord in God's Throneroom이나 "천국 문 앞에 떠 있는 두 개의 결혼반지"와 같은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온다.
3) 오워 박사의 집회에서 '신사도운동' 계열에서 관찰되는 '쓰러짐' 현상이 나타난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을 처음 퍼뜨린 카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도 신사도운동 계통이고, 특히 이곳에는 92년 종말론파동 때 다미선교회 미국지부를 맡고 있던 장요셉 목사가 참여하고 있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 다수에서 통역으로 나오는 사랑과 진리 교회 벤자민 오 목사도 신사도운동가다. 신사도운동은 이미 교계에서 광범위하게 도입 내지 참여금지 판단이 내려진 기피단체다.

이 의혹들은 어찌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지나친 정죄로 보이기도 한다.

- 두 여인과 동거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케냐 같은 아프리카나라에 일부다처제가 남아있을 수 있다.
- 쓰러짐 현상은 부흥회를 아주 심하게 하다 보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전면에 내세운다는 게 치우치고 위험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때때로 성령은 주류교회에서 추방된 공동체 가운데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

다만, 그의 부르심이야기에서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오는 점은 걸린다. 이것은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펄시 콜레의 천국간증 때 비성경적인 표현이 그의 정체가 탄로나는 데 단서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펄시 콜레 역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얘기한 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었고, 천국간증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한낱 사기에 지나지 않았다.(*1)

사실 오워 박사의 예언은 주께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식으로 잘라 말하지 않으면 후련하고 시원하지 않다. 하지만 후련하고 시원한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정확한 답을 찾아가는 쪽이 낫다. 누군가를 사이비이단이라고 판단하는 일은 확고부동한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제기된 의혹들 가운데 위험천만한 대목도 있지만, 확고부동한 증거랄만한 신학적 오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관련자료를 좀더 충분히 수집해서 찬찬히 살펴 본 뒤에야 이 부분을 확실히 할 수 있다. 해서 판단을 유보해 둔다. 일단 정확하다고 확신되는 판단이 서면 이 부분의 서술은 보다 간명해질  것이다.

2. 예언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매김이다.

사실 오워 박사가 말하는 한국교회의 죄 자체는 누구나 공감할 만큼 상식적이고 원론적이다. 번영과 성공의 신학, 음란의 죄 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돌이킬까?

상대적으로 음란의 죄는 돌이킬 방향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번영과 성공의 신학은 어디로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돌이킬 수나 있을지, 문제가 참 간단치 않다.

한국교회의 성공신학은 한 마디로 힘의 숭배다. 번영신학, 성공신학의 죄를 회개하자고 말하는 그 자신들이 힘의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앙모해온 미국교회 복음주의와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주류는 어김없이 정의를 강탈한 기득권과 결탁하여 안녕을 도모한 야합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득권과 결탁한 나머지 그들의 이데올로기, 특히 반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 6.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한국교회가 북한에 대해 강한 트라우마를 갖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렇더라도 한국교회가 반석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진배 없이 내면화 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기득권를 비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득권을 비판하면 빨갱이라는 의혹의 따가운 눈길부터 주기 바쁘다. 나아가 기득권의 원의에 적극 봉사하기까지 한다. 현 정권을 지극정성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뉴라이트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자기 반석으로 삼은 한국교회는 기득권에 밀착하여 번영과 성공을 누리느라 예언자적인 비판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이 땅의 우파 기득권과 하나님의 뜻을 간단히 동일시하고, 소위 좌파를 사탄의 무리, 빨갱이로 즐겨 단죄하며, 북한에 대한 증오와 공포에 노예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런 수구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기득권층은 북한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안보장사를 해왔고, 한국교회는 이 비루한 안보장사에 이용당해 왔다. 그렇기에 불쌍하고 딱한 북한정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기 보다, 저 사악한 북한 정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폭싹 망하기를 피를 토하듯 기도한다. 이렇게 하면 기득권층과 기성세대에게 성공이라는 일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힘을 숭배하는 성공신학을 쉽게 버릴 수 없다.

구약예언자들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강력한 저항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비판은 바로 당대에 벌어지고 있었던 힘의 숭배라는 성공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검은 것을 희다하고, 흰 것을 검다 하며, 저울추를 속이고, 약자의 판결을 굽게 하고, 의인의 의를 거짓으로 강탈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평안이 성직자들의 축복으로 계속될 것으로 믿어 의심지 않는 시대의 불의와 신앙의 태만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구약예언자들은 그들 사회에 가득 퍼져 있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힘을 숭배하는 바알신앙을 우상숭배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 한국땅의 바알신앙은 다름아닌 반공이데올로기다. 반공이데올로기가 교회를 망치고 있다. 한국교회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추구할 힘마저 빼앗아 버리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때 이 땅의 교회를 오염시켜온 수많은 이세벨들이 외칠 것이다. "저 빨갱이 사탄의 무리를 잡아 죽여라!"

교회가 반공이데올로기에 안주해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통일은 멀고 전쟁과 폐허는 가까울 것이다.

* 2010년 9월 5,7일경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덧붙임]
1. 일례로, 펄시 콜레가 솔로몬왕에 대해 책과 설교테이프에서 한 말은 서로 상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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