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6. 03:32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예장통합 내 논란에 관하여


현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신단다. 세상에……

댓통이 대선후보시절 "내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100% 국민" 따위의 같잖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돌아다닐 때, 저걸 막지 못하면 역사의 어두운 기운이 또 다시 대한민국을 덮게 되리라는 스산한 예감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후보가 식민사관 망언으로 낙마했을 때 최소한 식민사관과 친일행적의 문제성에 관해 조금이라도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겸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당초…... "자기 아비의 명예회복"을 대통령직의 목적이라고 공언한 자가 쉽게 생각을 바꿀 리 만무했다.

대체 박정희가 회복할 명예가 있나? 박정희를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결국 역사를 뜯어 고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댓통의 역사왜곡은 친일반공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따위의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댓통에게 있어서 아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이니까. 100% 국민? 댓통의 꿈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북괴추종세력, 종북빨갱이로 간주한다는 암호통신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장통합교단의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잘 내주고 있다.

- 장신대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이 비교적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내주셨다.
- 올해 예장통합교단의 신입총회장 채영남 목사님도 마침 진보적인 성향이셔서 역사교과서국정화에 반대의견을 표명해 주셨다.
- 장신대 신대원 학우회의 촌철살인 현수막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다.


실로 예장통합교단의 면류관과 같은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예장통합의 목회자들, 특히 중견교회 담임목사 다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쪽일 것이다. 이 추정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긴 하지만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 8:2나 7:3,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6.5:3.5 정도를 넘을 수 없을 듯.) 따라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 신약학)이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의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비판한 것은 예장통합교단 정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철홍 교수님의 비판글은 좀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가볍게 매도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 김철홍 교수님과 그와 의견을 같이 대변하는 예장통합의 목사님들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조금 뒷북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일개 개인블로거인만큼 부디 양해들 하시길 바란다.)


1. 친일반공주의 미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 혹은 친일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인가? 대한민국의 국시는 민주주의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친일파와 그 후손 정치가와 언론, 재벌들에게 있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2. 친일반공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인가? 친일반공주의를 세뇌할 목적의 교육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다양성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비민주주의적 발상인가? 오히려 친일파 후예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모든 다양한 견해와 관점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친일반공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의 이념적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 아닌가?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단 말인가?
   

3. 식민사관 비판이 종북인가? 식민사관 비판과 극복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사학계가 힘들여 이룩한 성과였다.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거부하면 종북빨갱이가 되었단 말인가?


4. 역사가 살아있는 권력의 힘으로 바뀔 수 있나? 역사라는 공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공론의 장에서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부역하는 어용역사학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또, 그 어용역사학에서 기독교, 아니 개신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영광된 측면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한국개신교에 영광이 될 수 있을까?
   

5. 전국민을 획일적인 역사관을 주입시키면 대한민국이 복음으로 통일되나? 권력자의 위신을 현양하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반포하던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해야 하는 무지몽매한 시대도 지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의 서로 다른 세계과정 이해가 만나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이다. 획일적인 역사관이 남북통일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공론을 통해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이 서로 통합적인 소통을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대승적 통합의 역사관이야말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끌 자격과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 물리적 통일은 반드시 정신적 통합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인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을 보장함으로써만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한반도가 복음으로 통일되기를 기도하여 왔다. 복음의 정신은 주술적 부적처럼 오용되는 십자가상이나 모종의 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충만한 소통과 상호순환의 역사 가운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계시되었다.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역사라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에서 주역이 되어야 마땅한 전국민들을 상대로 역사적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통일로 이르게 할 복음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2015. 10. 8. 21:34

소위 얌니아공의회의 신화

유대교에서 주후 70~132/135년경 열렸다고 주장되어 온 얌니아공의회는 20세기 후반 성경개론서나 단행본, 연구논문 등에 등장하는 이슈다. 얌니아공의회 가설은 19세기 말 유대계 프로이센 학자 하인리히 그랫츠(d.1891)의 제안(1871년)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수용함으로써 한동안 성경학계에 정설처럼 알려졌다. 20세기 후반 무렵 공부하신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아래 내용들을 아직도 그대로 얘기하시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

- 주후 90년경 얌니아공의회에서 (1) 구약성경의 완결과 (2) 구약외경 배척을 결의했다.

- 주후 90년경 얌니아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저주기도 제정을 결의했다.

그러나 얌니아공의회 "이론"은 오늘날 성경학계의 축적된 연구성과를 토대로 돌아보면 한 마디로 증거 없이 부풀려진 20세기 신화였다.

신화1: 얌니아공의회가 (1) 구약성경 완결과 (2) 구약외경배척을 결의했다?

얌니아공의회 가설의 주창자 그랫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두 번째 문제는 솔로몬 임금에게 저작권이 돌려지는 두 문헌, 전도서와 아가서의 거룩성에 관한 것이었다. 샴마이 학파는 그들을 거룩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 해묵은 논쟁은 이제 ...... 72인의 학회(College)가 재연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명백하지 않았다. 후일 이들 할라카들(=전도서와 아가서: 옮긴이)은 성문서 모음, 즉 정경에 포함되었다. 이후 정경은 완결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예닐곱 책들은 외경으로서 배척되었다. 시락의 잠언집이나 마카비 1서 같은 몇몇 책들이 그것이었다...." [Graetz, History of the Jews,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893, vol.2:343-4]

당시 서구성경학계는 방대한 랍비문헌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 그랫츠의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랫츠가 얌니아공의회 가설에서 기반으로 한 랍비문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실질적으로 그랫츠의 근거란 m.Yadayim 3:5 한 곳밖에 없다. m.Yadayim 3:5은 전도서와 아가서가 거룩하냐, 즉 정경적인 영감성이 있느냐는 문제를 토의한 기록이다. 하인리히 그랫츠는 이 기록으로부터 (1) 히브리정경완결 (2) 구약외경배척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얌니아와 결부시켜 기술한다.

그러나 탈무드 원문에서는 정경완결이나 구약외경배척 같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전도서와 아가서의 정경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무엇이 더해지거나 빼버린 바 없이 기존 관행을 재확인했을 따름이다. 더욱이 히브리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논의는 소위 얌니아 이후 후대랍비문헌에서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얌니아에서 무엇을 완결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을 회의로 완결한다는 그랫츠의 주장에서 결국 실체로 남는 것은 하인리히 그랫츠와 당대 서구성경학자들의 뇌리에 익숙했던 서방그리스도교적 프레임 밖에 없다.

신화 2: 얌니아"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기도문이 결의되었다?

얌니아공의회의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 결의라는 신화는 여러 가지 잘못된 시대착오적 관념이 결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얌니아회의가 저주와 파문을 결의할 위상의 "공의회"였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얌니아(오늘날의 야브네)는 예루살렘 인근 해안가의 소도시인데, 예루살렘 붕괴 이후 이곳에서 요하난 벤 자카이를 좌장으로 하여 70여명의 랍비들이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은 주후 70년부터 135년 정도까지 지속되었다. 135년은 바르코크바의 무장봉기가 비극적인 실패로 돌아갔던 해였다. 과연 주후 70~135년 얌니아에서 이루어진 랍비들의 회합은 "공의회"였는가?

여기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예루살렘 붕괴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교는 랍비유대교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유대교가 공존하는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 샴마이학파 바리새파: 예루살렘 성전을 중시.
- 힐렐학파 바리새파: 토라의 연구와 실천을 중시. 랍비유대교는 토라의 연구와 실천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형태의 새로운 유대교 형태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시하는 샴마이학파의 노선이 135년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은 이후 힐렐학파의 노선이 주도하게 됨으로써 성립된다.
- 묵시문학가그룹: 에스라 4서, 바룩 2서 등 신구약중간기 묵시문학가들과 그 그룹들.
- 무장봉기노선: 이들은 열심당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이들에게서 로마제국에 대한 제3차유대전쟁(132~135/6년경)을 일으켰던 바르코크바와 그 추종자들이 나왔다고 본다.
- 유대그리스도교
- 사실상 유대교의 범주 바깥으로 나간 집단으로 볼 수 있겠지만, 여기에 유대교영지주의집단도 덧붙일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유대인들이 얌니아 진영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다."(Katz) 얌니아에 모인 랍비들은 아직까지 유대교 전체를 대변할 만한 공적 위상에 이르지 못했다. 요세푸스와 같은 당대 유대교 소식에 정통한 재외유대지식인조차 얌니아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구심점이었던 예루살렘성전을 상실한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얌니아에 모인 랍비들 가운데 미래에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게 될 노선을 채택한 유력한 집단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논쟁과 설득, 교육을 통해 서서히 유대교세계에서 권위 있는 집단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얌니아의 회합에서 토론된 사항들은 당대 유대교에 바로 반영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얌니아 당대 랍비유대교가 자신들이 채택할 견해를 대내외적으로 전파할 효과적인 수단을 갖고 있었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다. 얌니아의 후예들이 그러한 시스템을 이루는 데는 최소한 백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게 된다.

얌니아회의에 대한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일까?

얌니아회의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기도문을 매일 올리는 아미다기도에 넣기로 결의했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Bavli Berakhot 28b-29a)에 따른 것이다. 이 기록을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얌니아공의회"가 있었을 것만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과연 문자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록물이었을까? 왜냐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유대랍비들의 전승이 9세기 경 집대성된 문헌이기 때문이다.(*1) 더욱이 지금까지 알려진 소위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11세기 카이로 게니자 사본이다. 1세기말 2세기 초 (있었다는) 얌니아 회의의 사건을 팔백 년 이후, 심지어 어쩌면 천 년 이후 기록된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과연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기록할 수 있을까? 물론 역사비평을 거치지 않은 근본주의적 읽기방법으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얌니아 회의에 대한 정확(무오)한 (문자적) 역사기록이어야 한다. 요하난 벤 자카이가 예루살렘 멸망 때 얌니아로 피신하여 얌니아공의회를 창설했다는 식의 전설로부터 모든 세부사항이 자동으로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현대유대교학자들이 방대한 랍비문헌들을 토대로 진행하는 논의에 대한 소개는 이 글의 한계와 목적을 벗어날 것이므로 굳이 하지 않도록 한다. 거칠게나마 결론만 간추리자면,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를테면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삼한정벌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탈무드와 같은 유의 기록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료비평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1) 구전의 신빙성과 (2) 편집자의 편집의도라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하는 역사비평적 검토과정이 필요하다.

역사비평적 검증 이후 신공왕후 삼한정벌설이 일본역사학계가 아니라 일본극우파가 애용하는 신화로 드러나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말하는 얌니아에서의 저주기도 제정 기록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바빌로니아 탈무드 편집자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800년 전 (있었다는) 사건에 시대착오적으로 투영된 일종의 근본주의 신화에 가깝다.(*2)

따라서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깥의 역사기록에 견주는 우회로의 접근이 필요하다.

교부문헌에 나타난 유대교 저주기도문의 흔적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도교의 유대교 관계 기록들은 유대교 저주기도문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먼저 1세기 얌니아회의 어간에 초대교회의 기록인 신약성경에 유대교 저주기도문의 흔적이 있을까? 개신교성경학계 일각에서는 1968년 미국루터교회의 신약학자 루이스 마틴의 제안 이후 주로 영어권을 중심으로 얌니아의 저주기도 제정 흔적이 요한복음의 두어 구절에 반영되어 있으며, 저주기도로 말미암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Parting of the Ways)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방향의 연구를 진행해 왔다.


결론이 어떻게 났겠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런 가설은 애당초 방향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지되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은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 성경학계 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 1977년 오스트리아 카톨릭교회의 유대교학자 귄터 슈템베르거에 따르면, 요한복음 기사와 얌니아"공의회"의 탈무드 기록에 묘사된 그리스도교인 축출은 서로 중대한 차이들이 있기 때문에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얌니아회의는 애당초 "공의회"가 아니었으며, 예루살렘 서쪽 해안에 위치한 얌니아에는 북사마리아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던 그리스도교의 존재 자체가 거의 희박했기 때문에 유독 그리스도교를 지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결의 같은 것 때문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Parting of the Ways)가 일어났을 수 없다.


- 20세기 미국의 지도적인 가톨릭신약학자 레이먼드 브라운은 얌니아공의회 신화를 1960년대에 비판했던 가장 초기의 반대자 가운데 한 분이었으나 저주기도 제정문제에 대해서만은 루이스 마틴의 학설에 거의 설득되었다. 그러나 말년의 "신약성경개론"에서는 이 학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사후 출간된 브라운의 "요한복음서 개론"을 편집한 프랜시스 몰로니는 이 학설에 대해 상세하게 반박했고, 미국 가톨릭성경주석총서 Sacra Pagina를 위해 집필한 그의 요한복음서 주석에서도 유대교의 박해를 지역적인 것으로 국한했다.


- 2001년 발표된 교황청성경위원회 문서 "유대백성과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서의 그들의 성경" 69번 단락에서 위와 같은 인식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기술한다. "유대교 저주기도(birkat ha-minim), 즉 분리주의자들(non-conformists)에 대한 "축복기도"(실제로는 저주기도)가 흔히 인용된다. 그러나 저주기도의 연대가 주후 85년인지는 불확실하다. 아울러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편적인 유대교의 교령이었다는 생각도 거의 확실하게 틀렸다."

주후 1세기 신약성경에서 저주기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2-3세기 교부문헌에서는 어떨까?

시리아 출신 이방그리스도인이었던 2세기 초 사도적 교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소아시아의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두어 구절에서 유대교 회당예배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면했다.(마그네시아서 8:1, 10:1-3, 빌라델비아서 6:1) 그러나 여기서도 딱히 저주기도의 흔적이랄 만한 것은 없다. 따라서 적어도 소아시아에서 저주기도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명백한 저주를 담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그랬다면 이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 주교라는 위치에 있었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회당예배 참석을 만류하면서 언급하지 않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2세기 중반 변증가인 순교자 유스티노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사마리아 출신 이방그리스도인으로서 2세기 초대교회 지도자 중 누구보다도 유대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했을 인물이다. 그가 남긴 유대교 랍비 "트리포와의 대화"를 보면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방과 저주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여러 곳에 많이 나온다. 이 모든 기록이 저주기도에 대한 언급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읽기다. 미국의 유대교 학자인 랍비 르우벤 키멜먼의 검토에 따르면, 실상 회당 바깥을 배경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방과 저주에 대한 기록들을 소거하고 나면 회당 안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서너 군데 뿐이다. (이를테면 96:2) 그나마 예전적인 활동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이다. (137:2) 그러나 여기서조차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말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저주의 워딩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고대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매일기도에서 저주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고대교회 문헌에서 당대 유대교가 그리스도인들의 회당예배를 환영했다는 기록은 풍부하다."(R Kimelman)

저주기도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교부문헌 쪽 기록은 결국 4세기 말, 5세기 초의 교부 에피파니우스와 특히 히에로니무스 정도까지 내려와야 한다. 즉, 4세기 말 이전 저주기도의 존재와 형태는 교부문헌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피파니우스의 경우는 하루 세 번 그리스도교를 저주한다는 보도를 하고 있어서 저주기도의 예전활동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 역시 저주기도의 구체적인 형태가 암시되어 있지는 않다. 유대랍비와 가장 빈번하고 밀접한 접촉을 했던 고대교부인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은 나사렛당('notzerim')이라는 표현이 이 무렵의 저주기도문에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 확인해 주는 가장 확실한 기록으로 본다. 그러나 이마저도 히에로니무스는 저주기도문이 겨냥한 나사렛당의 정체를 유대교의 행습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이단적 유대그리스도인들이라고 전한다. 저주기도문이 그리스도교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마저도 에피파니우스와 히에로니무스가 증언하는 예루살렘을 벗어나면 상황이 또 다르다. 동시대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예배보다 유대교회당예배에 더 많이 참석했다는 데 대해 분개했으나 유대인들 쪽에서 저주가 있었다는 유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이 당시 안디옥의 유대교에 퍼져 있었던 행습은 예루살렘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는 점, 바꿔 말하면 저주기도에 관련된 예루살렘 지역 유대교의 행습이 안디옥 지역 유대교에 아직까지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이란 4-5세기 경에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니까 유대교 저주기도문이 "그리스도교 저주기도문"이 된 것은 중세 때 얘기가 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깥의 랍비문헌에 나타난 저주기도문의 흔적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깥의 랍비문헌에도 저주기도문의 흔적은 발견된다. 그러나 4세기 말 이전 저주기도문은 어떠했을지, 오늘날 서로 상충된 형태로 전해진 기록들만으로는 원래의 정확한 워딩을 알 길은 사실상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저주기도문에 관한 기록들에 암시되어 있는 저주기도문의 워딩은 후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저주기도문의 문구에 처음부터 - 그 처음이 언제든지간에 - 존재했을 것이 확실시되는 낱말은 minim 한 낱말 정도이다. 나머지는 기술적인 용어와 표현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minim(이단자들, 분리주의자들)도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시대와 장소마다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낱말이다. 요세푸스는 minim에 대응하는 헬라어 αἱρεσις(하이레시스)에 이단자나 분리주의자라는 함의를 담지 않았다. min/minim/minut라는 낱말들이 - 더 구체적인 정의 없이 - 이단자나 분리주의자라는 함의로 팔레스타인의 랍비유대교에서 애용된 것은 주후 3세기부터였다.


그렇다면 minim은 누구인가? 앞서 지적했다시피 다른 많은 집단들 사이에서 경쟁해야 했던 랍비유대교는 유대교세계의 헤게모니를 잡아가고 있었던 초기일수록 랍비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얌니아 진영 바깥에 있는 일체의 유대인들을 minim으로 경계지음으로써 독점적 권위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독 당대 유대교의 소종파에 지나지 않았던 그리스도교만을 겨냥해서 min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나 4세기 말 이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랍비유대교는 랍비체재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던 반면,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공인종교가 됨에 따라 박해하는 자와 박해 받는 자의 처지가 서로 달라지게 된다. 이에 따라 랍비유대교는 저주기도에 소멸되기를 탄원하는 대상으로서의 "이단자", "배교자" 등등의 표현이 명시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아울러, 유대교 학자들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다른 유대문헌들의 "저주기도" 행습이 서로 달랐음을 지적한다. 즉,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기도문선창자는 다른 축복기도문을 선창하지 못하더라도 선창자의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으나 저주기도를 선창하지 못하면 배제되도록 했다. 그러나 4세기 이전 고대유대교의 다른 기록들에서는 서너 가지 정도 축복기도문을 외워서 선창하지 못해도 선창자의 직무에서 배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과 같은 엄격한 형태의 저주기도는 보다 후대에나 시행될 수 있었다.

결국 9세기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기록한 얌니아회의의 저주기도 제정 기사나 11세기 카이로 게니자 사본이 전해주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저주기도문은 소위 얌니아회의 당시에 제정되었다는 저주기도 원문이 아니다. 문제의 저주기도문은 1세기가 아니라 4세기 말 5세기 초 이후 중세적 상황을 반영한다.


요컨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저주기도 제정 기사는 중세 유대교가 minim를 그리스도교 내지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일시하는 자신들의 이해로부터 이 '오래된 기억'을 1세기 랍비유대교가 출발한 신성한 원점에 투영시켜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편집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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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이 글을 읽고 가톨릭성서학연구소인 한님성서연구소의 송혜경, 김명숙 연구원 두 분이 본인의 논지에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글을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려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약간 오해가 발생한 듯해서 첨언한다.

(1) 히브리어로 쓰여진 예닐곱 권의 책들(several writings in the Hebrew language)을 언급한 그랫츠의 인용문은 문자 그대로 그랫츠의 주장이다. 예닐곱 권의 책들이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졌다고 바꾸어야 할 까닭은? 집회서의 히브리어원문이 7할 정도 발견되어 있는 것을 비롯하여 히브리어 단편도 약간이나마 나와 있는 구약외경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어로 쓰여졌다"고 기술을 바꾼다고 해도 어차피 더 정확한 내용이 되지는 않는다.

(2)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성립연대가 9세기라는 나의 기술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전체의 성립연대를 논하는 문맥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기록된 유대교 저주기도 제정 기사의 성립연대가 9세기라는 의미이다. 구전기록의 성격상 탈무드 기록 시작이 7세기라든지, 혹은 4-5세기나 그 이상까지도 올려잡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최종편집성립이 언제, 어떤 동기에서 이루어졌느냐를 고려해야 한다. [Langer 2011:6과 6 n.7 등 참조.]

*2: 물론 "얌니아공의회"에 관한 바빌로니아 탈무드 기록 자체는 일종의 '전근대적' 신화이다. '전근대적' 신화는 역사비평학적 필터링을 거쳐 알아들으면 된다. 문제는 현대에도 여전히 전근대적 신화를 문자적으로 정확무오한 역사기록이라고 들이대는 경우다. 이런 시대착오적 해석방식은 근본주의 신화이다.


[주요참고문헌] N Tom Wright,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1992); Ruth Langer, Cursing Christians? (2011)

2015. 6. 29. 00:57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부쳐

소위 동성애 문제에 대해 요즘 인터넷에서 논쟁이 진행중인 걸로 알고 있다.

딱히 여기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부질없는 댓글놀이나 하고 있을 만큼 힘이 남아돌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 이미 본인의 대략적인 생각을 밝혀 둔 바도 있다.

다만,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은 우리나라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터이므로 몇 마디 적어둔다.
몇 마디라도 해두지 않으면 할 말 않고 잠잠히 있느라 불편한 속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1. 소수자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의 언명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꼭 성적 소수자들의 생각에 반드시 동의하진 않는다.

특히 소위 퀴어신학 쪽의 성경해석은 기본발상부터가 궤변스러워 탐구욕을 확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몰트만이 언젠가 말했듯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 짧다는 게 그들에게 구원 가능성이 없다는 증거가 되나?

구원 가능성도 구원 가능성이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도록 숨통은 틔워 주어야지 않겠나?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다 몰아내 음지에 가둬 놓고 죄중에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건가?

그런 게 과연 정의이고 공의인가?

병든 사람, 장애인,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 온갖 소수자들을 율법서를 들이대며 찍어내 버려야 할까?

적어도 예수님 제자이길 원한다면 그럴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은 왜 그런 소수자들의 처지에도 들지 못할까?

근본주의자들이여,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늘의 심판을 벌써 다 내렸나?


2. 만만한 동성애자들을 걸고 넘어지는 것은 비겁하다.


한국교회의 온갖 추문들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으라"를 외치면서 왜 애꿎은 동성애자들만 괴롭히나?

그야 당신들 보기에 만만해서지.


결국 당신들의 선전선동은 애꿎은 희생양 삼아 자기결집하려는 얄팍하고 얕은 술수에 불과하다.

당신들이 교회개혁에 그만큼 목숨걸고 나섰다면 진정성 만큼은 약간 인정해 줬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진정성조차 없고, 그냥 개독뻘짓이다.

당신들이 개독뻘짓하는 딱 그만큼 당신들은 예수님 욕 먹이고 있는 거다.


3. 침소봉대와 적반하장의 거짓 영성 좀 집어치우라


본 블로그의 유입검색어 중 줄곧 3위 안에 드는 낱말이 관상기도다.

근데 관상기도에 "이단"이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붙는다.

관상기도가 이단이라는 거지.

심지어 존 파이퍼도 관상기도를 배제하지 않았다,

존 파이퍼가 맛이 간 프리메이슨이거나 배교한 게 아니라면 재고해 보든지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존 파이퍼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얼마나 광신의 도가 심한지 말 다 했지.


오늘도 말씀묵상 큐티한다고 난리법석이면서 관상기도를 흔들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소위 큐티라는 게 렉시오 디비나라는 고대의 관상기도법을 약간 고친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어불성설을 거짓말과 선전선동을 동원해서라도 관철시키겠다는 찬란한 똥고집들이다.

이미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며 교황 프란체스코 방한 때 아주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셨지?

똥고집을 똥고집이라고 하면 핍박이고, 협잡을 협잡이라고 하면 당신들의 고귀한 진리에 대한 박해이고?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오늘도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낚여서 들떠 있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딴 음모론의 근거란 부풀려진 헛소문들에 불과하다.

헛소문의 진앙지는 물론 근본주의자들 자신이고.


당신은 근본주의자이지만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낚이지 않았다고?

잘 하셨다.

근데 동성애 음모론에는 낚이셨네?


프리메이슨 음모론하고 동성애 음모론하고 얼마나 다를 성 싶은가?

이리저리 낚이면서 그게 정말인지 확인은 해 보셨나?

제발 좀.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근본주의자들이여, 언제 이 말씀이 폐기된 적이 있었나?


2015. 6. 18. 12:41

메르스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한국개신교근본주의자들이 또 한 건 하셨다.

메르스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네.

동성애, 할랄푸드문제를 비롯한 친이슬람 정책 등등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예전에 쓰나미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더니, 이 사람들 아직도 정신들 못 차렸네.


굳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면,

솔직히 박근혜 정부와 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봐야하지 않겠나?


왜냐고?


성경에 보면 사람보다 돈과 권력에 정신 팔리는 것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회의 특징이다.


거라사광인 기사를 보라. (마가복음 5:1~20)

거라사 사람들은 정신이 온전해 진 자기 이웃이 귀하고 반갑지 않았다.

몰살당한 돼지떼가 아까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악한 영들의 소원에 부응하여 예수님을 쫓아낸다.


빌립보의 점치는 계집종 기사는 어떤가. (사도행전 16:16~24)

사도 바울이 계집종에게서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자 그 주인은 종이 온전하여져서 기쁘지 않았다.

사라진 물질적 이득이 아까웠다.

계집종의 주인은 화가 나서 바울 일행을 반사회적, 반문화적 집단으로 매도했다.

빌립보도성 사람들이 여기에 선동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악한 영들의 소원에 부응하여 바울 일행을 옥에 가둬 버린다.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가?

성경의 표준으로부터 보건대,

대한민국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회다.


세월호 참사에 단적으로 드러난대로 현정권은 사람보다 돈과 자기 기득권이 중요하다.


우리 국민은?

이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을 뽑아주고 무슨 짓을 해도 30%이상 지지율을 안겨준다.

저들이 약속하는 물질적 이익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싸매주기를 그렇게 거부하더니만
끝내 돈 얘기, 종북좌파 애기밖에 안 하더니만

이번엔 메르스가 터졌다.


이번엔 또 어떻게 하실랑가?

종북좌파가 메르스를 퍼뜨리고 다닌다고 하실랑가?


노무현만 아니면 돼!를 부르짖으며 어렵사리 마련한 방대한 재난대응매뉴얼을 전량폐기하더니

메르스 사태 같은 엄중한 문제에 대해 허둥지둥 초동대처를 엉망으로 해놓았다.

그러면서 유언비어를 엄단하신다고라?
감염상황정보공개를 결단한 박원순 서울시장을 검찰수사 하시겠다고라?

어이고... 손발이 짝짝 들어맞네 그려.


이 사람들이 수백 명이 죽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차지철이 100~200만쯤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현 정권은 아무런 반성 없는 그 후신이니 오죽할까.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저 경제를 살리잔다.

근데 대한민국의 정권을 찬탈한 현 기득권 세력이 집권했던 때 경제가 살았던 때가 도대체 있었나?

정말 있기는 했나?


게다가 대한민국의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인 삼성.

여기서 의료민영화를 위해 운영하는 삼성병원이 말하는 뽄새 보소.

지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국가가 뚫려?

세상에 이런 오만방자한 망발이 어딨나?

뭐 할 말 없으니 사과야 할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얼마나 진심일까?

이 사람들이 중요한 건 병원 이미지와 거기서 직결되는 물질적 이익이지 사람 목숨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구색이 잘 맞게 그 병원 우두머리는 현정부여당에서 감투 하나 맡아 쓰고 계시다지.

쉬쉬하면서 감염차단대책을 똑바로 강구하지 않은 결과는?

지금 알려진 통계만으로도 메르스 환자 절반이 삼성병원에서 나왔다.


온갖 협잡과 거짓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물질적 이익이 많아지면 좋은 거라고 성경에 그러던가?

아합왕 같은 위정자라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분이기 때문에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하던가?


이런데도 메르스는 동성애와 친이슬람정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이여!

정신 좀 차려라.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아합왕의 하나님인가?

2015. 5. 30. 05:58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왜 로마카톨릭사제 흉내는 내는가?


별 굉장하지도 않은 목회자복식사까지 시시콜콜 세세하게 파고들 필요성은 없겠고...

그저 그림 몇 컷과 더불어 기초적인 사실관계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1. 목회자컬러는 이미 세계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두루 착용하고 있다.


목회자 컬러 가운데 특히 소위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특정 타입에 대해 오해들이 꽤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림1] 올라프 트베이트 목사 (노르웨이 루터교회)


[그림1]은 올라프 트베이트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노르웨이 루터교회 목사님)가 부산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 개막연설할 당시 장면이다.

응? 총무목사님이 목회자컬러를 입으셨네?

사도적 계승 의식이 강한 북유럽 루터교회라서 그렇다고? 


그럼 다른 루터교회는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루터교회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주리주 루터교회의 선교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소위 사도계승 운운하는 데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국루터교회 목사님들 복장은 어떨까?


[그림2] 엄현섭 목사 (한국루터교회)


[그림2]는
2010년 당시 한국루터회 총회장이신 엄현섭 목사님이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한 사진이다.
이분은 어쩐 일로 카톨릭신부처럼 입고 계실꼬?

카톨릭신부가 좋아 보여서 신부코스프레중이신가?


[그림3] 제임스 앤더먼 목사 (미국연합감리교회)


[그림3]은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감리교회 목사님 모습을 구경할 차례다. 우리나라 감리교회 목사님 가운데서는 김아무개 목사님 사진이 바로 검색되어 나오는데 썩 유쾌한 얼굴도 아닌지라 미국연합감리교회 소속 어떤 교회 담임목사님 사진을 걸어두겠다.

이분도 담임목사님으로서 권위있게 보이고 싶으셨나?


성공회는 성직복을 입는 교회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넘어가... 자니 성경대로 믿는 복음주의자는 절대 그렇지 않을끼다 하실까 싶어...


한 장 보고 넘어가자.

[그림4] 제임스 패커 신부 (캐나다성공회)


[그림4] 자... 이 할아버지는 누구실까?

물론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계의 원로 제임스 패커 되시겠다. 무려 동성결혼을 인정한다는 결정에 반대하여 캐나다성공회를 떠나 "보수적" 성공회네트워크로 옮기셨다는 기사에 실린 그림이다.


응? 아무리 성공회라도 그렇지, 성경대로 하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분이 비성경적이게시리 왜 카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고 난리지? 권위있게 보이고 싶었나? 이거 혹시...? "제임스 패커 프리메이슨", "제임스 패커 배교", "제임스 패커 종교통합"으로 검색해 봐야겠다!


혹은..


뭐야.. 제임스 패커가 신부였어?

책 다 태워버려야겠네!


아마도 이런 생각 하시는 근본주의 성향 신자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게다.

위와 같은 검색유입어가 생겨날 확률이 한 70%는 되지 않을까.

(==> 빙고! 실제로 이런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물론 제임스 패커 책은 찢지 않아도 된다. 사도계승을 중시하는 고교회적 경향이 강한 한국성공회는 목회자(pastor)를 사제/신부라고 지칭하고, 같은 용어를 종교개혁 전통을 중시하는 저교회적 경향이 강한 일본성공회는 목사라고 일컫는다. 목사로 부를 것이냐, 신부로 부를 것이냐는 번역상 문제일 뿐 결국 성공회목회자를 일컫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임스 패커를 성공회목회자로 보신다면 굳이 아까운 책 다 태워버릴 건 없다. 아니, 그렇더라도 좌우간 "카톨릭신부처럼 보이는 옷"을 입었으니 책 다 태워버리셔야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다만 이 글 읽으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어쨌든, 성공회목회자는 정말 "가톨릭신부처럼" 옷을 입느냐? 목회자복장이라는 걸 왜 꼭 굳이 하느냐 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 한국교회 전통에선 낯설게 보이지만 이분들은 신기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다. 왜 그럴까?



성공회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그러면, 장로교회는 어떨까?

[그림5] 유리 베리토 목사(미국장로교회)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리폼드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우리나라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에서 유독 좋아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포스팅하는 미국의 한 블로그 필진 가운데 장로교회 목사님 서너 분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프로필사진을 걸어놓으셨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근본주의 진영에서 동성애 문제를 승인했다며 분노해 마지 않으시는 PCUSA교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모르니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타고 가셔서 잘 찾아보시고 있으면 기탄없이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중 맨 위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추종자라고 자기소개하신 목사님 한 분 사진만 걸어두겠다.

왜 굳이 이렇게 하고 있을까?


영국목사님은?


영국교회는 다 죽었고 영국목사는 다 자유주의 엉터리라는 근본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분들이 참고해 보시라고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그림7] 케네쓰 스튜어트 목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케네쓰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이 목사님은 영국의 도완베일자유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개혁장로교단에 가입을 청원한 목사님이라고 최근 기사에 나온다. 이 목사님의 교단에 관해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 원래 스코틀랜드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였는데, 이 교단은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에 통합되지 않은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장로교단으로서, 무려 예배 시 악기까지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 목사님이 도완베일자유교회에 보낸 목회서신과 다른 관련기사들을 대충 훑어 보니 이 목사님은 이 교단이 보수적인 예배의식에 변화를 주는 데 반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사임하고 더 보수적인 "개혁장로교단"으로 가입하신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떠 있다.


원래 종교개혁자 칼뱅이나 존 녹스는 시편송 이외의 다른 노래를 엄격히 제한했고, 악기도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원조보수를 외치는 우리나라 근본주의 장로교단 소속 교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 기타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로 예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분은 어떤가? 찬송을 노래로 부르고 악기를 사용하는 예배의식의 변화 문제로 선후배로 동문수학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함께 연대하여 사역하는 동료목사님들, 함께 신앙생활해 온 교우들이 있는 정든 소속교단을 떠나겠다고 하신 거다! 이거 제대로 보수 아닌가? 그런데 이 보수적이라는 목사님도 목회자컬러를 하셨네? 이 무슨?


이밖에도 구글링을 조금만 해 보면 침례교회오순절교회 목사들까지도 목회자컬러를 한 사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왜들 이러시나?
카톨릭과 종교통합 하려는 프리메이슨의 지령을 받은 WCC의 음모인가?


2. 왜 개신교 목사가 로만컬러를 입고 가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나?


유독 한국교회에선 소위 로만컬러라고도 불리는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해 말들이 많다.(*1)

여기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꽤 크다.

법원에서 개신교목사들은 카톨릭코스프레하지 마라며 카톨릭 손을 들어주신 해프닝도 있으시고.

뭐...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 문제였다면 굳이 글을 남겨둘 필요가 없을터.


근데 소위 교회개혁 얘기하는 분들 가운데 이 부질없는 목소리에 부화뇌동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이건 예전에도 몇 번 보고 별 책임 맡은 분이 아닌 듯 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번에는... 책까지 내셨다는 분이 말도 안 되는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언론사까지 차려놓고 나름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 같은데...

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일단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니신 만큼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실명까지 거론하진 않겠다.

그분이 인터넷 구석에 짱박혀 있는 이 글을 읽으실 일도 거의 없을 성 싶지만....

예전 같으면 이런 분의 사이트에 직접 글을 올렸을 수도 있겠다만

이것도 공연한 논쟁의 먹잇감을 던지는 피곤한 짓인지라 한가하게 그럴 새가 없다.

에구... 그래도 이건 너무 답답한 노릇인거다.


혹시라도 보시거든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니하셔도 별 수 없긴 하겠지만...

부디 잘 좀 다시 생각해 보시라.


본인이 모르는 문제에 대해 잘 조사해 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많은 말을 무책임하게들 쏟아 놓는다.

할 때 하더라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과 글을 뱉지 마시길.

제발 좀 어느 정도 알아보신 연후에 그렇게 하셔도 늦지 않다고 정중히 권해 드리고 싶다.

필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한 일이거늘, 특히 영향력 있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3. 목회자컬러 내지 목사가운 문제를 말하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


첫째, 앞서 사진을 통해 분명한 사실: 소위 로만컬러라는 특정형태의 목회자컬러는 세계개신교회에서 널리 착용한다.


둘째, 소위 로만컬러가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까닭은? 가톨릭 신부들이 의무적으로 착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관용적으로 통하게 된 명칭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래 전부터 목회자컬러를 입어왔다. 카톨릭과 다른 점이라면, 목회자들이 소위 로만컬러만이 아니라 개인의 목회철학과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갖고 있었다.


셋째, 과연 오늘날 목회자컬러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고, 양복은 그렇지 않을까? 목회자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많은 목사들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와 와이셔츠와 고급외제승용차 따위를 지니는 것이 세속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의 훈장 같은 것을 과시하는 게 아닌가?


교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공궤받는 처지에 그럴싸하게 비싼 양복과 구두까지 받아서 목사 복장을 구분하여 세속적 성공을 뽐내라고 대체 성경 어디에 쓰여있나? 레위기라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의 하나 혹여라도 제사장 예복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레위기 연구 다시 똑바로 하셔야 한다.


4. 목사가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은?


목회자컬러 착용이 단지 종교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대한민국 개신교회 대부분이 미국의 제2차 대부흥운동의 지류 전통을 이어받아 출발한 데서 비롯된 그릇된 발상이다.


만인제사장론에 입각해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는 목회자컬러 착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일부 동감한다. 그러나 거듭 지적하거니와, 현재 한국교회에서 만인제사장론은 명목(de jure)의 피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실질적으로(de facto) 고가의 양복과 구두와 와이셔츠와 외제승용차 따위로 자기 신분을 구별하는 행태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는 데 불과하다. 더욱이, 만인제사장론 운운하는 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이유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관계의 출발점은 아니다.


목회자컬러 착용관습이 제2차 대부흥운동 전통에서 낯설게 된 까닭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고 본다. 즉, 드와이트 무디를 비롯한 대부흥운동의 대중전도자들 상당수는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전도자로서 목회자컬러를 착용할 일이 없었다. 대중전도자들의 영향으로 교세가 커진 교회들이 늘어나면서, 그 절대적인 수혜자였던 미국 근본주의나 오순절 계열 교회들에서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 목회자컬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의 장점과는 별개로 -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그림7] 브루스 코놀드 목사 (미국 근본주의 계통 무디 성경학교 출신)


무디성경학교 출신 브루스 코놀드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목회자 컬러를 착용하고자 하는 소수의 미국 근본주의 계통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자신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한 가지로 정리한다.


1. 목회자가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한 성경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2. 시각적으로 목회적 소명을 표현하기 위해
3. 세계의 다른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4. 역사적으로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5. 우리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 목회자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6. 선교사적 마인드로 옷입기 위해
7. 나의 소명을 일깨워주는 표지로서 세속적 복장을 부인하기 위해
8. 개인적 거룩성을 강화하기 위해
9. 나 자신을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0. 우리의 역사적이고도 동시대적인 가치를 살아내기 위해
11. 사순절 기간 동안 일종의 "베옷과 재"로서 목회예복을 입기 위해


나 자신의 입장은?


코놀드 목사님의 경우 근본주의적 교회환경 가운데 자신을 변호해야 할 상황을 만날 수 있는지라 주의깊게 성찰해 오셨던 것 같은데, 나는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못 느끼는 터라 굳이 말하면 실용적인 입장이다.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나 목회자컬러 혹은 제복이나 예복 같은 것은 결국 지엽말단의 비본질적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현장의 요구에 유의하여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대처할 수밖에 없는데, 감사하게도 섬기는 교회에서는 회중들이 이 문제에 대해 너그럽고 털털한 편이다. 해서 딱히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 색깔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냥 걸쳐 입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지엽말단에 관련하여 온갖 쓸데없는 수군거림 때문에 목회활동을 번잡하게 만드는 교회공동체가 의외로 꽤 있다.

아니, 목사 옷이 자주 바뀌지 않아서 덕이 안 된다고라?

와이셔츠 색깔이 새하얀 흰 색이 아니라서 시험에 드신다고라?

어이쿠... 예수님은 전도여행할 때 두 벌 옷도 갖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마태복음 10:10)

예수님 말씀은 어디로 가고 이 무슨 희한한 율법인가...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목회자컬러 챙겨입고 말겠다.

나 일하는 중이요 하는 공개적인 표시니까!



[덧붙임]

*1: 스톨(영대)이나 수단에 대해서도 참 쓸데없는 말들이 많다. 한 마디만 해둔다. 이게 무슨 종교적으로 권위있게 보이기 위해 걸친다느니,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전통만의 고유복장이라느니 하는 어쭙잖은 원조시비 같은 것들이 따라붙는데...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나?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교회전통의 소중한 고유복장 운운하는 분들은 스톨수단에 관해 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이라도 한 번 열어나 보고들 하는 소린가? 또, 상징적 의미 없이 고가의 세속적 양복을 목사가 걸치고 다니면 만인제사장직에 더 잘 어울리나? 상징적 의미를 담는 예복이면 종교적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엉뚱한 딴생각들 좀 하지 마시라.

2015. 4. 16. 05:00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며..

세월호 참사 1주기...


무고하게 숨진 희생자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겨 편히 쉬길 빌고..

국가적 기만에 더 깊은 고통을 당하시는 유가족 여러분들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돌보심이 함께 하시길 기원드린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신학도로서

부끄럽다.


국가와 교회의 근본주의 미몽은 스올과도 같은데...

나는 여전히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이 죄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2015. 3. 21. 02:11

사이비이단의 숙주, 근본주의

1


최근 부정선거로 불법집권중이신 극우정당 ㅅㄴㄹ 모 의원 왈, 새정치민주연합은 종북의 숙주란다.

주한미국대사 피습사건을 기화로, 애시당초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요주의 인물이었던 범인을 야권에 엮어 종북몰이하다가 튀어나온 얘기다.

아니, 당초에 문제를 일으킨 전력이 화려한 인물을 아무 조처 없이 입장시킨 게 누군데 종북 운운?


도대체 누가 북한을 따라하는 진짜 종북인가?

누가 일인숭배를 위해 여론을 세뇌, 조작, 선동해 왔는가?

누가 불의하게 찬탈한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반민주적인 짓거리를 하고 있나?

누가 일당독재를 공고히 하고 야당을 관제, 관변박수부대로 만들고자 정치공작을 일삼는가?

누가 백성들에게서 각종 명목으로 삥 뜯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호의호식하고 있는가?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자유 대한민국에서 북한과 동급의 이따위 부끄러운 사건들이 벌어지게 만들고 있는 비루하고 간악한 무리들이 누구인가?

이런 더러운 짓거리들이 과연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에 값하기조차 하는가?

누가 과연 진짜 종북의 숙주인가?!


2


요즘 사이비집단 ㅅㅊㅈ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황당무개한 것은, 패륜적 짓거리가 폭로되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역시나 그 수법 그대로 여론 물타기로 대한민국을 기망하려 들고 있다!


어디 ㅅㅊㅈ 뿐이겠는가?

사이비이단들은 거짓과 폭력의 반석 위에 세워졌다.


도대체 사이비이단이 나오게 된 원인과 기원이 무엇인가?

근본주의자들 왈, 사이비이단은 자유주의에서 나온단다.


헐...

자유주의에서 사이비이단이 나와?

자유주의가 사이비이단의 숙주라고?

대한민국 사이비이단치고 자유주의가 배경인 집단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자유주의 핑계 대는 재주 밖에 못 배운 것이 근본주의라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3


사이비이단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뿌리를 알 수 있다.


1. 누가 성경의 문자를 갖고 정반대의 뜻을 갖다붙여 들이대가며 자기 "적들"을 참소하는가?

2. 누가 없는 혐의를 조작하여 자기 "적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가?

3. 누가 없는 증거를 조작하여 자기 문자적 해석을 입증했다고 선전하는가?

4. 누가 전도로 몸집불리기하는 것 자체를 절대선으로 떠받들고 있는가?

5. 누가 세력을 동원하여 자기 사적 이익관계를 관철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가?

6. 누가 정확히 따져 들어가 보면 별 미덥지도 못한 내용에 불과한 자기들의 믿음만이 절대진리요 절대선이라며 "불신지옥"을 외쳐왔는가?

기타등등.


이 모든 거짓과 폭력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
누가 과연 사이비이단의 숙주
인가?


근본주의다!

2015. 3. 11. 15:47

불평등의 대가

업무중 지하철로 이동하다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청년의 대화를 원치 않게 듣게 되었는데...

이들의 대화가 실로 충격적이었다.

꽤 똑똑하고 유복한 집 자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여성차별, 지역차별은 해주어야 한다는 요지로 말하니까

여학생이 수긍하면서(!) 그래야하는 이유에 대해 남학생의 답을 듣고 싶어했다.
(이때만 해도 당연히 별 관심 두지 않고 내 책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남학생의 답인즉슨,
특정지역사람들이나 여성들은 사회불만세력이기 때문에 차별해줘야 맞다는 거였다.

...
...
응?
뭐라고?
설마 그런 내용이었어?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근데 리와인드해본 내용이 분명 그거였다.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이 곤두서서 이들의 다음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제 내릴 때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커플은 "나라사랑해야겠네요"라고 결론짓고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아니, 도대체 얘들이 말하는 나라사랑이란 뭔가?
지역차별 여성차별이 나라사랑이야?

아니, 그럴리가 있나...
그럴 리가 없어...
부디 내가 정반대로 들었길 바란다.
청년들의 때묻지 않은 정의감과 양식을 믿고 싶다.

하지만 얼마전 강남고교생 50%가 일베를 한다는 보도가 새삼 생각난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나라야 어찌 되었든,
지들 돈벌이 이권몰이하는데 혈안이 되어
부정선거에 여론조작하는 것도 부족하여,
패륜사이트를 육성함으로써 청년과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마저 세뇌시키려는
저들의 전략이 주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부쩍 우리 사회가 일본의 무신적 사회상과 너무나 닮아간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부패한 욕심 때문에
청년들에게 마땅한 사회적 출구가 없는데...

이들을 기득권층이 정신적 노예로 삼아가고 있다.

이 정신적 억압기제는 반드시 억울한 희생자를 양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집단적 억울함은 반드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공평과 정의에 대한 민감성에 의해 판가름난다.

교육불균형, 지역불균형, 양성불균형을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불의한 희생양을 양산하여 제 기득권을 보전하려는
망할 놈의 기득권 근본주의는
당장은 성공하는 것 같아도
필멸할 역병이요 암덩어리에 불과하다.

기득권 근본주의가 창궐한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은 불평등의 대가(J Stiglitz)를 혹독하게 치를 날이 반드시 닥칠 것이다!


2015. 1. 20. 16:25

헤르만 바빙크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고집했나?

우리나라 회중들에게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이 성경적이며, 성경비평학은 자유주의 이단이라는 근본주의 신화가 워낙 공고하게 널리 퍼져 있다.


사실 소위 보수성향의 학문적 주석총서라도 들춰 보면 이런 얘기가 얼마나 황당한 매카시즘이요 신기루 같이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성경비평학 자체는 성경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로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도구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느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신학훈련을 받지 않은 교회회중들에게 이런 얘기가 대체로 금시초문에 속한다.


왜 그럴까? 아무리 보수성향 교단일지라도 (대표적으로 NIC나 WBC 같은 보수성향의) 학문적 주석총서를 도구 삼아 설교준비 하는 목회자라면 근본주의 신화가 글자 그대로 신화임을 모를 수 없을텐데,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해서 자기 목회경력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큰 평신도와 교권주의자들이 사상검증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자유주의니 이단이니 빨간 낙인을 찍어 버리면 일개 목사가 뭘 어쩌겠는가. 그냥 극보수적인 회중의 눈높이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근본주의 신화를 숭배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보수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의 주저 "개혁교의학"을 보면 한국교회에서 "보수" "정통" "개혁주의"로 통하고 있는 근본주의 신화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몇몇 신학자들이 ... 성경이 모든 문제에서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추론한다면, 이것은 성경에 오류와 실수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다른 이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일면적이다. 성경은 가장 확실하게 참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자체가 의도하는 의미에서 참되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우리의 엄밀한 자연과학적, 역사학적 지식이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미 이 논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성경은 지질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혹은 역사학의 교과서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진술을 담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 각각의 사례에서 저자가 그 진술로 말하고자 의미한 바를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의 독자들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또는 경세적) 진리, 형식적 오류와 내용적 오류, 엄밀하게 자연과학적인, 혹은 역사학적인 진리와 문예적, 시적 진리 일반, 우리가 역사를 저술하는 방식과 고대셈족 사람들의 방식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이 구분을 주의깊게 염두에 두고 성경에 대한 우리의 비평과 주석에 적용한다면, ....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관찰해 온 바에 따르면 - 우리 의미에서 역사로 입증되지 않으며, 저자에 의해서, 따라서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렇게 의도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이 부분들은 우화와 신화와 사화와 전설과 알레고리와 시적 표현들일 수 있다. 이들은 성경기자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른 출저로부터 혹은 대중적 구전으로부터 취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예시로써 종교적,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고자 한다. 이것은 창조이야기와 낙원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의 많은 이야기들과 족장사 등에 해당된다. 성경 책들의 진정성 여부까지도 자유롭게 관찰되어야 한다. 모세오경이 모세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고 다윗에게 돌려지는 많은 시편들이 다윗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고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옮긴이 주: 이사야서 40-66장 = 소위 제2이사야)이 첫 번째 부분과는 다른 저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성경의 영감은 확실하다. 그러나 저작권의 진정성은 열려 있는 문제다. 하나님의 책으로서 성경은 모든 비평을 능가하지만, 인간의 책으로서 다른 모든 문헌과 마찬가지로 역사비평학적 방법과 표준에 의해 연구될 수 있다."(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1, Prolegomena, 412-13)


역사비평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전통적인 저작권 진정성 주장에 대해 유연한 헤르만 바빙크?

역사비평학을 저주하고 전통적 저작권 진정성 주장을 신성불가침으로 수호하는 우리나라 "정통" "보수" "개혁주의"에서 그를 표준적인 신학자로 생각한다고?

그러면서도 역사비평학은 사탄의 전략전술이요 자유주의의 찌르는 가시인가?


한 마디 더 해두겠다. 근본주의 신화의 신봉자들 가운데 어떤 부류는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하는 최악의 자유주의 신학자요 이단선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한다고? 과연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읽어는 봤는지, 읽었다면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성과 역사비평학 문제에 대한 사고방향에 있어서 바르트와 바빙크는 서로 기본기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 칼 바르트를 그토록 저주하는 자들이 바빙크에 대해서는 순한 양처럼 침묵하고 있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편가르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시겠는가?


2014. 12. 23. 22:10

예수님도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는가?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는가?


우리 한국교회 회중들에게는 근본주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 개인이나 근본주의 계통의 스터디 바이블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해 온갖 경건하고도 허탄한 신화가 유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통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다는 주장일 것이다.


과연 예수님도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는가? 그 말이 과연 정말인지, 근거구절 두어 개만 살펴 보도록 하자.


1.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율법서(토라)를 "모세의 율법"이라고 지칭하셨다.

어째서 이렇게 지칭하셨을까?


"모세의 율법"이란 표현이 율법서를 가리키는 지시어로서 통하던 당대의 언어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당대에 율법서가 모세의 율법이라고 널리 지칭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저작권에 대한 당대 통념이 "무오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당대 유대교의 통념을 "무오한 성경"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 본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아무 상관 없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오경저작권은 오경 자체의 내적 증거와 성경개론의 전체맥락을 고려함으로써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당대 언어관습을 따라 율법서를 지칭하는 지시어로 쓰셨다고 해서 저절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 유다서에서는 "아담의 칠세손 에녹의 예언"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에녹1서를 비롯한 에녹전승을 가리키는 지시어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인정"했으니까 에녹1서, 또는 2서나 3서는 영감받은 예언인가? 혹은 문자 그대로 에녹이 한 예언일까? 유다서기자는 이 문제에서 에녹저작권의 "인정"이니 뭐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전승이 가리키는 진리의 요소를 독자들에게 가리켜주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에녹저작권을 운운하고 싶다면 어째서 에녹1서는 성경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물음에 답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언급하셨다는 이유로 모세저작권이 확립된다면, 또 이 글에서는 따로 더는 다루지 않겠지만 사도들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언급했다는 이유로 모세저작권이 확립된다면, 사도가 에녹의 예언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에녹저작권이 확립된다는 말도 성립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저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2 요한복음 5:46~4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는 아예 율법서(토라)가 모세라고 지칭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인가? "모세저작설을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 그러나 모세저작설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이런 뜻이 되는가?


이것이 정확하다면 이로부터 모세저작설을 믿지 않는 (사실상 자기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인 바)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도, 성경도 믿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추론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추론이 과연 합당한 추론인가? 과연 본문의 정신과 취지가 이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갖다 붙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유대인들은 "소위 모세저작설도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통념에 따라서 당연하게도 모세저작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모세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까?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계시의 정신을 철저히 외면했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지, 애시당초 모세저작설을 믿으라는 요구가 아니다.


이런 구절이 오경의 모세저작설 증거라고?

오경의 모세저작설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냐고?


나는 근본주의자들이 매사에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아님 말고 식으로 성경인용을 하니 어떻게 예수님을 똑바로 믿겠냐고 되묻겠다.


심지어 성경인용을 틀리게 하는 것도 궁극적인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틀린 줄 깨달으면 피차 고치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틀린 성경인용을 고치기는 커녕 전가의 보도 삼아 동료그리스도인들을 자유주의자니 비정통이니 이단이니 낙인찍는 처사는 정말 고약하다.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성경구절을 갖다 붙여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는 행위야말로 계시의 정신은 철저히 외면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유대인들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폭력적인 성경인용을 일삼는다면 온갖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성경인용으로 스스로 멸망길로 달려가는 사이비이단자들과 과연 무엇이 구분될 수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경을 가르친다는 목사들이 이젠 좀 이런 허탄한 근본주의 신화를 집착하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2014. 12. 5. 09:21

최근 동성애 차별논란에 관하여

최근 서울시가 제정키로 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박원순 서울시장이 폐기하기로 하는 과정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조항을 둘러싸고 극우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일련의 소동이 있었다.


너무나도 황망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몇 마디 해 두도록 한다.


1. 근본주의자들이 왜 유독 동성애를 걸고 넘어지는가?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1.1 과연, 로마서 1장에 동성애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언급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언급된 다른 죄악들은 다 뭐란 말인가?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죄악들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악에서 자유로울까?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심판 선언은 반드시 3장 이후 천명되는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근본주의자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동성애자들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고? 근본주의자들 자신들이 그 수많은 죄악을 행하면서도 구원의 길에 있다고 자부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결코 그럴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동성애가 성령모독죄나 배교라도 되는가?


1.2 모세오경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 역시 죄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이지, 유독 동성애를 저주하라든지 동성애자에게 폭력과 차별을 행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구약율법의 규정으로 사람에게 정신적, 물리적 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범죄자 취급해도 된다면, 구약제사규례며, 음식규례 따위도 다 지키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은 21세기에 사사들과 함께 사악한 이방인들을 "진멸"해야 할까?


1.3 성경의 문자를 문맥과 취지에 상관 없이 원하는 대로 똑 떼어서 침소봉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사이비이단이 애용하는 자의적 성경해석과 거의 구분될 수 없을 지경이다.


2. 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절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절대로 아니라고? 이들은 선천적인 동성애자들을 만나보지 못했거나 만났어도 인간 취급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에는 기형아도 있고 장애우도 있듯이 동성애자도 있다. 자연세계에도 기형과 장애가 있으며 동성애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2.1 동성애는 세상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행과 소외와 변두리로서 교회가 기도하고 긍휼히 여길 연약함에 해당하지, 진 밖으로 끌고 가 진멸할 성령모독죄가 아니다. 교회는 이들과 공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세워주라고 부름 받았지, 이들을 정죄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이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3.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성애라는 특정사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미국근본주의자들의 어젠다들을 그대로 흉내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1 미국 서민대중들이 부패한 우파정치가들에게 비호 받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에게 부당하게 해고와 착취 당한 뒤 하는 일이란 고작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를 규탄하는 시위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딱하고 한심한 것은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같이, 그네들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떠는 문제들보다 더 시급하고 절박한 어젠다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서민대중들이 간단한 의료처치조차 병원 가서 하기엔 너무 비싸서 집에서 직접 꿰매고 자가처방하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하고 야만적인 사회구조에 맞서 저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가 하고 있는 짓이란? 고작 베리칩 음모론과 임박한 대환란의 종교적 망상으로 서민대중을 위협하여 미국 우파 보수층의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의료처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에 서민대중이 저항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약간의 교인들을 긁어 모아 자신들보다 배나 악한 광신도로 만드는 것 정도? 나머지가 있다면, 부패한 공화당 세력이 다수의 미국대중들의 충성을 갈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덕분에 미국의 기독교인구는 매년 감소추세에 있고, 기독교내 공화당 지지자들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 근본주의의 약진? 아니다. 미국교회가 부패한 공화당이라는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놀라운 부흥성장을 하면 할수록 미국교회는 미국사회가 극복하고 일소해야 할 민중의 아편이자 악의 축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근본주의라는 역병의 창궐이다!


어째서? 미국의 극우주의와 근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아
억압된 분노와 불안을 표출하는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병리적 현상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때 독일에서 나타났던 병리적 사회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극우 근본주의는 전체주의의 서막이다. 미국사회는 지금 세계자본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3.2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는? 한국교회도 동성애보다 시급한 사회적 어젠다들이 널려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내부적으로 정리되고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진적 깨어 대비해야 할 진정한 적수인데, 자꾸 외부에서 엉뚱한 적을 상정하고 있다. 동성애자, 이슬람, 종북빨갱이, 로마가톨릭, 프리메이슨 -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외부의 적을 타도하고 배타함으로써 내부결속을 다지는 얕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미래는?


안타깝게도, 정신줄 놓은 군중에게 선전선동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간다.

교회 회중이 예외인가?

저 악랄한 서북청년단을 태동한 것이 한국교회인 판국에,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사대강과 부정선거와 서북청년단.

이제 대한민국에 무엇이 올 것인가...

한국교회여, 한국교회여,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느냐...


2014. 10. 4. 20:33

가톨릭도 그리스도교냐고? 예장합동 제99차 총회 유감

예장합동 제99차 총회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에게 재세례하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을 처벌키로 결의했다.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및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조처일 것이다. 합동측의 결의는 한 마디로 너무 많이 나간 근본주의 교회론의 결정판으로서, 자신들의 공교회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장자교단을 외치는 대형교단의 결의이므로, 합동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1. 합동측의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의 권능을 부정한다.


가톨릭는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합동측의 결의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가톨릭이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가톨릭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로서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는 사실관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령 가톨릭이 이단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가톨릭에서 시행한 세례를 부정할 신학적 명분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단교회가 시행한 세례가 효력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즉, 비록 이단교회라 할지라도, 심지어 타락한 교역자가 시행한 세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할 때 온전히 효력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도나투스파가 자신들만이 진짜 교회라고 참칭하면서 보편교회의 세례를 인정치 않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그런 도나투스파의 세례더라도 공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효력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전통, 자기 믿음만이 진짜라며 상대방이 교회일 수 없다고 매도하는 쪽과 격렬한 이단논쟁의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의 넓은 범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쪽, 하나는 분파주의 이단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의 태도이다. 한 마디로 배타적인 독단이냐 포용적인 관용이냐, 과연 어느 쪽이 합동측의 태도에 가까운가?


합동측은 가톨릭이 심지어 이단도 아니고 타종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는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실은 조금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톨릭교회에서 십자가의 도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유의 얘기는 합동측에서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비록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충분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의 도가 분명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또한 여느 개신교 이단들의 그것과 다르게 충분히 정통적이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종교?


이단이라면 그나마 고려의 대상이 되겠거니와, 타종교라면 들이대는 범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타종교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십자가 복음이 존재하지 않고, 가르쳐지거나 흔적 자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방교회도 그들의 눈에는 타종교여야 하고, 이들과 대화와 교류를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들도 타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는 종교혼합주의겠고? 이런 식으로 분파주의적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교회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재세례라니, 당신들은 재세례파인가, 칼뱅의 후예들인가?


2. 합동측의 결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세가톨릭교회 비판과도 동떨어져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을 퍼부어 해 대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에 부합한다고 믿어 의심지 않는 것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 일색이었는가?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에 중요한 쟝 칼뱅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쟝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비교하면서 중세가톨릭교회의 전횡과 교리적 일탈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교황 제도의 폭압 아래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째서?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되는 세례와 성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기초에 따른 것이다. 칼뱅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를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동요와 분열을 겪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기독교강요 4.2.11.)


칼뱅은 중세서방교회에서 거의 주술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던 문자적인 사효성(ex opere operato) 개념은 거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세례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고는 유지한다. 로마교회가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 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심지어 거기에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였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교황이다."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에 관한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교회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압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남겨두셨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면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합당한 교회라고 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교회론 전체를 거쳐 이 문제를 주의깊게 논증해 나간다. 즉, 로마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로마교회에 "이단"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칼뱅의 판단에 로마교회는 매우 "이단적"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격렬했던 교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종교개혁 교회조차 이 정도로 신중했는데, 과연 합동측에 이런 균형감각이 남아 있는가? 합동측의 반가톨릭적 결의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과 달리 로마교회에조차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표지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혹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관해 "이단" 선언을 남발하지 않아서 칼뱅도 미운가? (그럴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인가?


끝으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얘기에 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얘기는 근본주의자들이 처음 성경에서 발견한 발견이 아니라 중세교황권의 전횡과 더불어 권력에서 축출된 프란치스코회의 강경파나 후스파 등을 통해 이미 나왔던 얘기다. 종교개혁 시대나 정통주의 시대에 이 해석전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특정해석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까지는 못 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근본주의자들, 혹은 세대주의자들은 꽤 지나친 종교적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세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의 가장된 미소에 온 세상을 미혹하여 택하신 자라도 멸망케 하려고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얘기에 뒷받침이 되는 소위 근거들이라는 게 거의 한결같이 낭설과 유언비어라는 근본주의의 딱한 사정에 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조악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데 대해 어째서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신학적 배경이 해방신학이라서? 예수회 출신이라서? 이건 아무개의 신학적 배경이 자유주의라서, 바르트주의라서 다 거짓말이라는 식이라는 말과 똑같이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 바르트신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도대체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가.


그런 말들이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참소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이 전혀 미치지들 않는가? 근본주의자들이여, 어쩌면 당신들 생각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당신은 절대 적그리스도적이 아니게 될 성 싶은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0~11)


당돌하게 비방하는 대상이 사탄이면 자동으로 당신이 사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세에 교회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비단 교황이 적그리스도여서만이 아니다. 악마적인 참소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일 수 있다!

2014. 9. 3. 12:53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 수호가 오늘날 우리 한국개신교의 진정한 과제?

우리 시대 교회, 한국개신교의 진정한 과제는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를 로마카톨릭에 맞서 지켜내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소위 개혁주의가 정통인가?

그런 것을 말하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보수라는 게 정말 지켜야 할 복음적 보수인가? 

그들이 말하는 정통이라는 게 정말 정통인가, 그들이 말하는 개혁주의라는 게 정말 개혁주의인가?

혹은 소위 로마가톨릭에 맞서 정말 그런 것을 지켜내야 하는가?


그들의 모든 주장이 실은 매우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란 결국 근본주의에 불과하다.

이 근본주의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의 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그러한 근본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과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십자가피켓남 왈, 종북빨갱이들이 세월호를 이용해 먹는단다. 근본주의자들이여, 이들이 당신들과 얼마나 다른가? [사진출처: 트위터 https://twitter.com/histopian/status/505664183493341184]

그동안 드러난 열매로 보건대 저들은 지금 로마카톨릭교회가 어떻고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란 것이 살아 있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 거짓선지자로 나타나는지 재를 뒤집어쓰고 통탄해야 마땅하다. (교황방한 때 저들이 했어야 할 일은 맞불집회 같은 무례하고 몰상식한 짓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의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는 회개성회여야 했다!)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부분은 나의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반공)근본주의에 눈이 멀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처신은 정말 뼈아프리만큼 우매하고 미개하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참상을 당신 자신 안에 받아들이시기까지 공감(com-passion)하신 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인데, 우리 한국교회는 도대체 이게 안 되면 그 모든 같잖고 시덥잖은 교리논쟁이 무슨 소용이 있나? 렉시오 디비나가 이방혼합주의고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괴수라고 매도하며 광분하는 유치찬란한 판국에 교리논쟁을 제대로 할 역량은 되고?


대형교회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저 중세적 소교황들이 말했다지, 교황보다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냐고.


물론 못하지 않다, 정진석 추기경이나 염수정 추기경 같은 노회한 부류의 사람들에 견주어서는.

뭐, 같은 개신교인으로서 정리가 있으니 그 사람들보다야 낫다고 해두자.


하지만 어딜 감히 프란체스코 교황과 자신을 견주는가!

당신들이 그토록 자랑거리로 삼는 바, 당신들이 지금까지 쓰고 말하고 다닌 모든 설교원고를 다 합쳐도 교황권고서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 담긴 이 시대를 위한 영적 통찰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망발이 가능했을터다.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의 미명하에 혼돈과 기만으로 가득한 거짓증거에 이리저리 낚여서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니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이니 하는 세계적인 손님맞이의 자리에서 적그리스도 운운하는 맞불집회를 하는가 하면, 교황권고서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같이 읽고 토론한다는 이유로 교황의 품으로 달려간다는 따위의, 자기 - 형제가 아니라면 - 이웃에 대한 거짓증거와 참소를 그치지 않는 처참한 영적 상태의 회중과 지도자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아, 이 사람들, 정말 부끄러워 해야 마땅할텐데, 절대 그러지 않을 성 싶다.

이런 일은 내 제한된 경험으로 단정짓지 않고 그저 주님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다.

부디 선하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빨갛게 될 수 있는 얼굴 주시길!

2014. 3. 21. 10:22

영화 "노아"와 에녹 전승

영화 "노아"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에 대한 기록을 문자적으로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후대의 해석인 구약위경 에녹1서의 설정을 제재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1)


- 영화의 우리말 자막 번역에서 "감시자"라고 옮긴 watchers는 에녹1서에서 반역한 천사들을 가리킨다. 

- 영화에서 "감시자" 무리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셈야자"는 본디 에녹1서의 "쉐미하자"(Shemihazah: שמיחזה/ Σεμιαζά)에서 따온 캐릭터이다.

에녹1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The Book of Watchers"의 기본줄거리에 따르면, 이 대천사와 그의 부하들은 인간의 딸들이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성관계를 하여 거인족속인 네피림을 낳는다. 또한 인간들에게 금속문화를 비롯한 모든 악을 전수함으로써 세상을 최악의 악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하여 영원한 심판을 내리신다.(*2)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러한 에녹1서의 이야기요소들 가운데 가인의 후손들이 금속문화를 바탕으로 땅을 지배하여 황폐하게 만든다는 설정을 끌어온다.


이 영화의 감독 내지 스토리작가는 에녹1서를 그대로 영화에 반영하지는 않았다. 아마 에녹1서 전체를 면밀히 재현해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고, 글자 그대로 제재만 취하여 나름의 이야기를 새롭게 짜려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 "감시자"가 돌거인으로서 노아를 돕는다는 설정은 영화의 새로운 아이디어이다. 

- "감시자"가 결국은 구원받으리라는 생각도 에녹1서 내용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이것은 굳이 특정하면 에녹1서보다는 타락한 천사들도 언젠가는 구원받으리라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매우 오래된 특정 해석전통의 사고에 해당된다.) 

- 영화는 이삭을 번제에 바친 아브라함의 이미지를 끌어와 노아에게 투영시켜 거의 광인에 가까운 캐릭터를 창조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되도록 유대-그리스도교적 색깔을 지움으로써 비그리스도인이 다수인 관객들에게 접근하고자 한 감독 내지 스토리작가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성경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을 기대하거나 그러한 재현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교회회중들에게는 상당한 당혹감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성경 이야기의 재현을 (사실은 성경 이야기를 잘 모르면서도) 진부하게 여기는 다수 관객들에게는 한결 덜 특정종교의 프로파간다로 여겨질 것이다. (심지어 감독 내지 스토리작가가 "안티개독"이 아니냐며 친근감을 느끼는 관객들도 있을 성 싶다!) 


하지만 어쨌거나 흥미롭게도 영화가 재구성한 이야기는 인간의 죄성과 악의 편재성, 자유와 선택, 정의와 자비, 신에 대한 순종, 그리고 삶 속에서 의미와 신의 섭리를 발견하는 내러티브의 문제와 같은 상당히 신학적인 문제제기들을 하고 있다. 솔직히 필자로서는 영화의 이야기 재구성이 중간에 스릴러물 분위기를 풍기면서 (아마도 유대-그리스도교를 겨냥한) 거부감 마저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라는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곱씹어 보면 영화의 문제제기에 대해 결국 관객이 어떤 식으로든 답변해 보게 되리라는 점은 나름 의미 있을 성 싶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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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덧붙여 둔다. 에녹1서가 구약위경이라는 것은 이 책의 기록이 읽어서는 안 될 가짜라는 뜻이 될 수 없다. 에녹1서는 신약성경기자들이 마치 "성경"처럼 인용했던, 성경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배경전승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 본인의 글 "구약성경의 외경 혹은 제2정경과 위경에 관하여" 6항과 "그리스도 지옥강하와 에녹전승" 참조.)


*2: 이에 관하여, 본인의 글 "그리스도 지옥강하와 에녹전승"의 덧붙임 1번의 기술 참조.


*3: 오마이뉴스에 실린 리뷰('노아'... 종교영화 아니다)는 영화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의 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종교적 기원을 굳이 얘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대런 아로콥스키 감독이 보수적 유대교 전통의 가정에서 성장한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비성경적이라고 비토해야 할 근거가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이여, 부디 편협한 근본주의의 반지성주의에서 놓여나시라!

2014. 1. 27. 05:31

소위 창조과학에 관하여

한국교회가 근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여러 가지 신학적(?) 편견들을 버려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창조과학의 문제이다. 소위 창조과학이 뿌려놓은 여러 가지 사이비과학적 명제들이 수많은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의 머리에 워낙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하여 마치 창조과학을 부정하거나 비판하기라도 하면 창조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착각하고들 있다.


정말 창조과학을 부정하면 창조신앙을 부정하는 것인가? 


소위 창조과학은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창조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나름의 방식 가운데 그저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관계이다.


그 방식의 선의나 최선의 의도 자체야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창조과학 신봉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창조과학은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곧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방식의 선의와 최선의 의도까지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의와 의도는 이해하겠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할 법한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거꾸로 표현하자면, 창조과학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창조과학에 반대되는 증거와 현상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분석틀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과 학문적 정직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쉽게 말해, 자기에게 유리해 보이는 얘기만 하고, 그와 다른 얘기를 용렬하게 단죄하고 진실에서 배제하는 아전인수격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윌리엄 페일리의 철지난 자연신학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거나, 안식교를 포함한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입을 거치면서 당치 않게 부풀려져 왔다는 태생적 한계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창조과학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창조와 진화가 도무지 양립할 수 없겠지만, 진화는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일 수 있다. 하나님이 어째서 진화의 방식으로 일하실 자유가 없는가?


이렇게 말하면 성경을 부인하는 것인가? 창세기 1장의 창조신학이 도대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부터 똑바로 이해해야 한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감이 번뜩이며 번개처럼 뚝 떨어져서 창세기 1장이 나왔다는 식의 근본주의 신화로는 본문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자연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자연과학을 계시한 말씀이 아니다. 당대 바빌로니아의 지배적인 과학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야웨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창세기 1장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창조신앙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행간의 여백에, 즉 수용결과가 아니라 수용과정에 있다. '무엇'이라는 문자적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신앙의 역동성에 창조신앙의 본질이 있다.


그래도 하나님이 진화의 방식으로 일하실 자유가 있다고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가? "오직 성경으로만" 판단할 때, "성경에 없으니까" 하나님은 진화의 방식으로는 결코 일하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근본주의자들이 읽은 대로의 성경에 없을 뿐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창세기 1장에도 진화적 요소가 담겨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를테면, 땅이 생명체들을 생산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은가? 땅에서 생명의 요소가 나타나도록 하는 생명의 진화를 명령하신 것이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해석에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일하신 것처럼 진화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과정이다.(위르겐 몰트만) 다윈 이래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근본주의자들은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2013. 7. 11. 00:57

WCC의 소위 종교다원주의 논란을 보며

지난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찬반토론회 동영상을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편협성과 정치적 속내에 따른 막무가내식 우기기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점들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 글의 주제는 6월 24일 토론회 중 소위 종교다원주의 부분에 국한할 것인데, 그 까닭은 근본주의자들이 여전히 토론의 상황에 대해 착각하고 있거나 거짓말로 덮으려 하는 것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1. 우선 위 동영상을 편집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라는 성구(디모데전서 2:5)를 영상 말미에 제시함으로써 이 토론회에서 반WCC진영이 얻고 싶어하는 바, 즉 WCC는 종교다원주의 노선이라는 혐의를 각인시키고 싶어한 것 같다.


2. 반WCC진영의 속내는 토론 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WCC찬성진영 쪽 발제토론자 정병준 교수는 WCC의 의사결정구조에 관해 발제문과 토론과정에서 WCC총회가 채택하는 문서를 기준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점을 몇 차례 지적했다. 즉, 소위 바아르 문서는 WCC총회 이전 예비연구단계에서 신학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정에서 나온 목소리요, 정현경의 저 유명한(?) 퍼포먼스로 홍역을 치르면서 열렸던 WCC 캔버라총회는 바아르문서나 정현경의 입장을 공식입장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WCC에서 활동하는 개개인 몇이 종교다원주의 성향을 표방하는 것과 WCC가 공식적 레벨에서 표명하는 입장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 문제에서 유념해야 할 기본적인 사실관계이다. 정병준은 이 기본적 사실관계를 누차 지적했다.


그러나 반WCC진영 쪽 발제토론자 최덕성 교수나 토론회 사회를 맡은 이병수 목사 어느 쪽도 이 중요한 지적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을 들으려 할 뿐이었다. 최덕성의 막무가내 우기기야 그렇다 치고, 중립을 지켜야 할 진행자의 자리에 있었던 이병수조차 "바아르 문서가 종교다원주의 노선이었다"고 정병준에게서 답변을 재차 유도한 다음 "솔직히 인정해 주셔서 고맙다"며 청중의 박수를 이끌어내어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면 이것으로써 WCC는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을 WCC찬성 쪽에서조차 인정한다는 뜻이 되는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반WCC쪽에서 여기저기 심어놓은 댓글알바들만이 아니라 토론당사자들까지도 하고 있었다면 참 황당무개한 일 아니겠는가?


3. 게다가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된 "생명"(요한복음 10:10 등)이 구원론적 의미의 ζωη(조에)이니까 이것을 βιος(비오스)에 해당하는 창조론적 의미로 인용하면 안 된다는 최덕성의 공격은 얼마나 유치한 바리새적 단견인가. 요한복음 1장 서문(요한복음 1:1-14)에서 요한은 이미 그 생명의 빛인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창조된 것은 없다고 밝혀두었고, 이 서문에 함축된 사상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펼쳐지게 된다. 이 가장 단순분명한 요한복음 해석의 출발점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얘기다. 미안하지만 이건 어설프게 원어를 들이대기 전에 우리말 성경만으로도 알고 있어야 할 요한복음 이해의 기초임을 환기해두겠다. 이런 수준의 독해력으로 WCC문서의 "성경인용"을 검증하겠다면 그 눈이 제대로 열려 있는지부터 상식적인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4. The Tradition(=복음)과 traditions(교회전통들)를 모두 '전통'으로 알아듣고 이걸 종교다원주의에 갖다붙이는 단장취의식 독해의 대단한 내공에 이르러선 할 말을 잃는다. 에큐메니칼 문서 읽기 클리닉 같은 거라도 해야 할 판이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나가면 사이비이단 쪽 댓글알바들의 적반하장, 견강부회, 단장취의 내공과 구분이 희미해질 지경이다. 부디 논란 당사자들과 이런저런 추종자들께서는 더욱 정진하시기 전에 이점을 한 번쯤 심각하게 유의해 보셔야 할텐데... 이게 누가 말리거나 나무란다고 될 문제가 아닌지라. 참 씁쓸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5. 가장 기초적으로, 늘 그렇듯이, 비그리스도교를 이웃하면서 대화와 공존의 필요성 가운데 있는 현대 그리스도교가 처한 현실을 가리키는 종교다원성(religious plurality)과 어떤 종교든 구원에 이르는 정당하고 온당한 길이라는 주의를 가리키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근본주의 진영에서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세계복음주의연맹 (WEA)는 최소한 이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했던 방향으로 수렴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이걸 두고 또 종교통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을테니... 참 갈 길이 멀다.

2012. 10. 29. 03:25

말씀의 사유화, 역기능적 신앙

한국교회가 요즘 사이비이단들의 창궐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비이단들은 한국교회가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 말씀에 더욱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탄의 가시다. 사탄의 가시를 두려워하거나 저주할 게 아니라, 이 문제 너머 계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왜 사이비이단들이 창궐하는가? 결국 말씀의 사유화, 교회의 사유화에서 비롯된다. 하나님 말씀은 사도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유대 안에 있는 전 세계의 공교회에 선사된 것으로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유화될 수 없다. 그것이 교황과 같은 역사와 전통과 힘의 아이콘이든, 유력한 특정 교회전통이든, 또는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는 특정 계층이든 말이다. 하물며 일개 교주, 일개 목사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구절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이익관계에 맞도록, 자기 원한관계를 풀기 위해서 갖다 붙여가며 해석질을 하고 있다. 이들의 해석질은 성경본문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주석적 이해와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복음의 정신, 계시의 정신에 충실한 자유로운 인용도 아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가 파악한 좁다란 율법주의적이고도 영지주의적인 하나님상과 자기중심적인 은원관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하잘 것 없는 소망에 대한 일개 종교권력자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쉴새없이 성경을 인용해대는데 성경의 정신은 쏙 빠져 있다. 쉴새없이 성경을 증빙전으로 들이대는데 그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정신으로 나온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알리가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성경 안의 새로운 세계"(칼 바르트)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 말씀을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로 제한하려드는 우상숭배행위 아니겠는가!


그 결과 그들의 성경인용이나 성경해석은 더 이상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하시고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복음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을 옥죄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협잡과 다를 바가 없다.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은 더 이상 성경구절이기를 그친다. 자기가 진짜로 섬기는 대상에 대한 우상숭배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이며,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하고자 세뇌하는 정서적, 영적, 심리적 지배테크닉(manipulation technique: Margaret Singer)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장 숭앙하는 듯 용의주도하게 가장 하나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진정한 속내로는 마술주문이나 다름없이 천하게 취급한다.


그들의 말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듯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자비와 용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진짜 속내는 자기 아집과 편견이며, 자기 권력과 이익의 증진에 있다. 그들의 입술은 아름다운 말을 그럴듯하게 하나 늘 독을 품었다. 귀 있는 자는 그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보라. 예수님은 결코 욕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독사의 자식들이다!


말씀의 사유화가 고약하고 지독한 까닭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 그것이 소위 보수개혁주의든, 복음주의든, 바르트주의든, 진보주의든 상관없이 -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영악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규신학교육을 받아서 어떻게 하면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지 안다. 차라리 사이비이단자들에 관해서는 그 허무맹랑하고 무식한 성경해석과 교리를 콕 집어서 교회공동체에 경고해 줄 수라도 있다. 그러나 말씀의 사유화는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사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렵다. 중세 말 종교개혁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게 곪고 썩은 뒤에나 모두의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창궐해 있는 사이비이단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토양으로 자라나고 있을 따름이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똑바로 깨어 있다면 사이비이단자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사이비이단자들이 수많은 이단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더욱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중 모두 말씀의 사유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저들 사교집단을 위한 비옥한 토양 노릇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증 아니겠는가?


흔히 사이비이단자들을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세워놓고 그들을 욕하고 저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패착에 다름 없다. 진짜 문제는 말씀 앞에 엎드리어 경청하기 보다는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내 맘대로 소유하려 드는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이단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잘못되었다. 그들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밝혀두는 것이 소위 근본주의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사이비이단을 옹호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밝히는 진리의 일꾼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비이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쏟아내어 자기 의를 충족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 나 자신이 십자가의 말씀 앞에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가득한 교만과 아집과 욕망을 하나님 말씀 따라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한국교회에 사이비이단이 창궐하는가? 하나님 말씀이 사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이 어디 우연인가? 하나님 말씀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개 개인, 일개 집단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만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 특히 억눌리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해방하시는 기쁜 소식이기를 그치며, 죽음과 멸망으로 악순환해 빠져들어가는 역기능적 행태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

2012. 10. 8. 09:09

최근 개신교 교세와 근본주의의 향배 (개정판)

각 교단 홈페이지와 교계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를 종합해 보면 2012년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 주요 개신교단들이 보유한 신자수는 다음과 같다.  물론 각 교단들이나 교계언론을 통해 알려진 아래의 신자수는 보유한 교적부의 신자수를 단순집계한 것으로 교인이동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계청이 발표한 개신교인수를 훨씬 웃돈다. 실제 숫자는 절반 정도 에누리해서 알아듣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 정도 의미는 있을 것으로 본다.

1. 예장합동 (295만명)
2. 예장통합 (285만명)
3. 감리교회 (153만명)
4. 하나님의 성회 (120만명?)
5. 침례교 (100만명)
6. 예장백석 (87만명)
7. 기독교 성결교 (56만명)
8. 예장고신 (42만명)
9. 기독교장로회 (33만명) 
10. 예수교 성결교 (28만명?)
11. 예장대신 (23만명)
12. 예장합신 (12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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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34만명

1. 통계상 추정치에 관하여

이 가운데 최근까지 교단통합선언 이후에도 교단분열이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성회 쪽 교세는 언론에 발표된 추정치인데, 일단 하나님의 성회 계통의 3개 교단들의 총 신자수가 2000년대 이전에 침례교를 웃돌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님의 성회 계통 교단들은 여전히 교단통합 협상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하나의 교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단은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대표하는 기하성(=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의 신자수만 쳤지만, 교단통합이 성사될 경우 신자수는 이보다 좀더 많게 되어 감리교의 그것에 육박하게 될 것이다.

예수교 성결교회도 정확한 교세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NCC 가입 문제로 분열할 당시 기성 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었고, 기성, 예성, 나사렛 성결교 세 교단이 합하여 96만명 정도라는 2005년도 기사가 나와 있기 때문에 기성측의 최소한 절반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 신도수 6만명의 성공회1만명 내외의 루터교, 구세군, 복음교회 등은 우리 사회에서 인지도가 비교적 높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지형을 바꿀 만큼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군소교단들이다. 이밖에 예장합동계열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군소교단들이 있는데,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위에 열거한 상위 12위 안의 중소교단 하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2. 주요 장로교단들에 대한 분석

한국개신교 보유신자수 상위 12개 교단 가운데 7개 교단은 장로교회의 교단들이다. 장로교 교단들의 신자수 총계는 777만명으로, 한국개신교 총수의 약 63%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소위 보수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들은 합동, 백석, 고신, 대신, 합신의 5개 교단으로, 장로교회 특유의 소위 '신학적 근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이들의 신자수는 459만명이다. 장로교회 가운데 비교적 개방적인 개혁주의 노선에 서 있는 예장통합(285만명)과 기장(33만명)에 견주면 59:41 정도 비율이고, 상위 주요교단 신자수의 총합 1234만 가운데 1/3을 조금 넘는 수치(37%)이다.

소위 보수개혁주의 장로교 교단들은 주로 근본주의 특유의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해왔기 때문에 교계에서나 인터넷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큰 편이다. 이들의 신학노선에서 '사탄의 궤계'로,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는 칼 바르트나 관상기도에 관해 인터넷에서 얼마나 네거티브한 선동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지 상기해 보면 이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큰지 실감할 수 있다.

단일교단으로서 최대교단은 예장합동측이 2000년 전후부터 합동계통 중소교단들과 교단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예장통합을 제치고 최대단일교단으로 발돋움했다. 

물론 통합측은 최근 300만 신자운동을 벌여 자체집계 결과 목표를 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통합측의 교세성장률은 줄곧 합동측을 앞서왔기 때문에 통합측 신자수가 합동측 신자수를 넘어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장합동측이 최대단일교단으로 발돋움한 배경의 핵심은 개별교단의 교세성장률을 넘어서는 몸집불리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데 있다. 즉 몸집불리기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상당한 교세를 갖춘 다른 합동계열 교단들이나 보수개혁주의 노선 교단들이 서로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교단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보수개혁주의노선의 5개 장로교단들은 - 당장은 현실적 장벽이 높겠지만 - 적당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교단통합을 이루어 최대 459만명 규모의 거대교단을 이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단통합논의는 무엇보다도 백석과 대신 교단 사이에서 활발하다. 백석 쪽에서 대신과의 교단통합협상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대신 쪽에서 - 특히 백석의 여성안수안 통과를 두고 - 상당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회원교회 70% 정도가 이미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두 교단이 합쳐진다면 신자수 100만명을 헤아리는 또 하나의 대형교단이 생겨나게 된다.

백석측은 예장통합과는 2009년에 교단통합 얘기가 나왔었는데 현재는 별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백석 측이 예장통합과 가진 신학적 공통분모는 여성목사안수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 정도를 들 수 있겠지만, 배타적인 보수개혁주의신학을 부르짖어 왔다는 점, WCC가입 문제에 대해 음모론을 동원하면서 반대하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점 등은 극복해야 할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어쨌든, 백석과 예장통합의 교단통합시도는 보수장로교 5개 교단의 결속력 내지 동질성이 반드시 공고한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백석과 대신이 예장통합과 더불어 합동 주도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을 탈퇴하고 한교연(=한국교회연합)에 가입한 상황이 주목해 볼 만하다. 두말할 것 없이 합동측의 무리한 권력욕은 그들 자신에게 덫이 되고 있다. 스스로 근본주의 장로교단들 사이에서 리더쉽을 깎아먹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지기반이자 존재기반이 되는 보수개혁주의 교단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1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에 대한 분석과 전망

두 장로교단은 국내 개신교의 판세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예장합동의 리더쉽은 결국 보수개혁주의 노선 장로교단들에서 나오며, 신자수 확보와 더불어 이들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보수적 선명성 확보가 이루어질 때 이들의 맏형이 될 수 있다. 

예장합동이 여성안수를 시행하고 있는 예장백석에게서 최소한 전략적 동반적 수준에서라도 힘을 얻으려면 예장합동에서도 여성안수문제 사안에서 비슷한 결단이 있어야겠지만, 이것은 예장합동이 보수적 선명성 확보를 통해 보수개혁주의교단들의 맏형으로 자리매김되기를 추구해 온 전략에 변경이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보수적 선명성 경쟁을 통해 맏형지위를 확보한 예장합동의 목소리는 이들 교단들의 목소리와 대동소이하다고 보아도 크게 그르침이 없다. 이것은 예장합동의 강점이 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소위 보수개혁주의 노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예장합동의 리더쉽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는지가 늘 물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장합동의 전략은 보수적 선명성을 강화하면서 그 장점에 설득되고 감화되는 신자들과 타교단들이 늘어나도록 하는데 있다. 보수적 선명성 강화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미국 근본주의적 재현과 헤르만 바빙크로 대변되는 화란 신칼뱅주의의 절충과 종합이라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데, 미국 근본주의와 화란 신칼뱅주의 모두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을 정답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고 문제적이다. 그러나 보수적 선명성 강화는 분단상황의 불안정성이라는 선교적 배경에서 그동안 매우 잘 먹혀 들었던 전략이기 때문에 예장합동의 전략은 비록 폐쇄적일지언정 상당히 잘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예장통합의 리더쉽은 전통적으로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각 교단에 두루 통하는 신학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예장통합은 보수개혁주의 노선 장로교단들만이 아니라 타교단들에도 일정한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신학적 중도노선에 서 있다. 따라서 예장통합의 전략은 보수적 선명성 강화가 아니라 칼뱅,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몰트만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신학계보를 계승하여 개신교단들 전체에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개방적 소통능력, 또는 "중심에 서는"(김이태) 균형감각에 있다. 예장통합이 지향하는 리더쉽은 바람직한 방향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단상황의 불안정성이라는 선교적 배경에서 과연 어느 정도 먹혀들 수 있을까, 혹시 어중간한 회색지대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개신교 전체에 대한 분석과 전망

소위 정통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 5개 교단은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근본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와 비슷하게 침례교(100만명)과 예수교 성결교(28만명)도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으나, 이들은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칼뱅주의 계통 근본주의에 견주면 배타성과 폐쇄성이 상대적으로 강하지는 않아서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상당한 수용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본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교단들의 교세를 합하면 587만명으로서, 한국교회 전체 교세의 절반(47.5%)에 조금 못 미치는 인원에 여기에 속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다시피 비장로교 근본주의 교단들의 신학적 입지는 어느 정도 유동적이다. 근본주의 장로교단들과 이들의 유대관계는 '개혁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침례교에는 개혁주의 유산이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예성측에는 그만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칼뱅주의 계통의 예장통합(285만명)과 기독교 장로회(33만명), 웨슬리주의 계통의 기독교감리회(153만명), 하나님의 성회(120만명), 기독교 성결교회(56만명), 이상 5개 개신교단은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근본주의를 탈피하여, 근본주의 교단들이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등으로 낙인찍는 신학노선에 서 있다. 즉,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교세는 총 647만명으로서, 한국교회 전체 교세의 52.4%에 해당된다.

여기서 기감의 입지는 통합의 그것에 비해 한결 유리해 보인다. 예장통합은 합동측과 달리 신학적으로 보수개혁주의 노선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근본주의 장로교단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장로교회의 맏형노릇을 하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다. 반면, 기감쪽은 예장통합에 비해 절반 수준에 가까운 규모이지만 350만 웨슬리계통교단들의 맏형이라는 위상이 있다. 비근본주의 장로교단인 예장통합과 기장의 규모가 318만명이기 때문에, 예성을 제외한 비근본주의 웨슬리계통교단들만으로도 329만명이 되어 비근본주의 장로교단들에 근소한 교세의 우위에 있게 되며, 예성과의 협력을 강화한다면 350만명 규모의 효과를 보게 된다.

여기서 기독교감리회가 갖는 독특한 위상이 드러난다.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쇠퇴할수록 비장로교회 교단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감리교회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볼 수 있다. 반면, 예장통합의 리더쉽은 근본주의 장로교단들을 얼마나 설득하느냐를 중요과제 가운데 하나로 갖고 있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이미 수행한 바와 같이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공감적이고도 비판적인 신학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는 현재 보수와 진보진영 양쪽에 발을 걸쳐놓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최근 발언과 행보가 보수와 진보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오중복음과 삼박자축복"론에 대한 예장통합의 이단성 비판 이후 기하성측은 부단히 신학의 현대화를 추구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세대학교 신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보면 근본주의를 탈피해 있다고 보아도 크게 그르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성을 비근본주의 교단으로 치는 것은 여전히 상당히 망설이게 된다. 교단의 실권을 잡고 있는 조용기 목사와 그 주요측근들이 세대주의 종말론과 반공근본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하성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근본주의로 회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교단이다. 결국 오순절 계통 교단들은 근본주의와 비근본주의 사이에서 지형을 좌우할 수 있는 캐스팅보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 볼 수 있다.

4. 근본주의 이후 대체 프레임

현재 시점에서 보기엔 근본주의 프레임은 상당기간 영향력을 잃지 않을 것 같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입지조건과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희생양을 끊임없이 구하는 역기능적 정신구조의 종교화에 관한 수요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근본주의보다 여기에 잘 들어맞는 사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장합동을 비롯한 근본주의 교단들의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주의 프레임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역기능적 신앙유산이다. 근본주의 프레임의 역기능성이 근본주의 교단들이나 근본주의 지지자들에게도 그 심각성이 인지되고 대체 프레임을 모색하게 될 시점, 최소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긴 어렵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한국교회를 규정하는 프레임으로서 힘을 잃게 될 경우 이것을 대체할 프레임이 분명 등장할 것이다.

지배적 프레임의 교체가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가 보수개혁주의 형태로 나타난 데서 예컨대 복음주의, 보수적 웨슬리주의, 부흥주의 등과 같이 옷만 갈아입고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근본주의 프레임의 역기능적 신앙유산이 극복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앞으로 근본주의라는 지배적 프레임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 대해서 반드시 재고가 필요하다.

1. 성서비평학의 정당성과 한계에 대한 올바른 평가
2.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의 공헌에 대한 전향적 이해
3. 반공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치-경제적 기득권층과의 밀착관계
4. 증오와 배타의 대상을 설정하여 그들을 비방함으로써 자기정당성을 확인하는 형태의 희생양 메커니즘  또는 역기능적 신앙
5. 세력결집, 성장일변도의 자본주의 종교성 극복

이상과 같은 특징을 모두 담지한 세계교회적 흐름으로는 다른 글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칼 바르트 신학이나 "후기자유주의"가 있다. 그러나 이들 사조는 자유주의 신학에 견주더라도 - 적어도 아직은 - 목회현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까닭은 (1) 바르트 신학이 너무 방대하고 깊은 논의들을 담고 있어서 바쁜 목회현장에 쫓기는 목회자들이 충분히 집중적으로 연구하기에 난점이 있고, (2) 바르트 신학의 강력한 영향 아래 성립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기존 교회의 계급적 구조에 맞지 않아서 메노나이트교단과 같은 소규모 교파에서 적극적으로 실험,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근본주의의 대체프레임은 한꺼번에 칼 바르트 신학이나 "후기자유주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두 가지 탈근본주의적 특징들을 전유, 통합한 프레임들이 나타나면서 한동안 경쟁과 실험을 통한 검증과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선 진보적 복음주의가 경쟁과 검증에 유리한 신학적 자산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현실적으로 전망이 있어 보이지만 교단적 기반이 약하다. 웨슬리주의는 교단적 기반이 강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쉽게 부각될 수 있을 듯 하지만, 웨슬리주의만으로는 근본주의와 충분한 차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진보적 복음주의와 웨슬리주의가 상호결합된 형태의 대체프레임이 한동안 한국교회의 신앙적 틀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전망해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프레임이 적용되는 과정에서도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근본주의의 대체프레임이 인간을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정체성을 두면서도 근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역기능적 신앙양태와 그 정당화로서의 종교이데올로기들을 극복하는 방향이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5. 추가사항
- 이 글의 분석은 신자수 또는 교세가 교단의 영향력에 대한 직접적인 바로미터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물론 교단의 영향력 내지 감화력은 신자수나 교세로만 환원될 수는 없는 복합적인 것임이 간과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큰 흐름을 짚어보고 내다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의 용이성과 단순성을 위해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을 일단 배제한 상태에서 분석을 해 보았다.
- 특히 신자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별공동체가 얼마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을 실험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2012. 9. 11. 00:49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2. 3. 17. 08:20

불법사찰의 시대

민간인 불법사찰에 청와대비서실이 개입되어 있고, 조직적인 증거인멸시도와 위증종용 따위가 있었다는 데 대한 폭로가 이어져서 검찰재수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비서관 윗선에 연결되었을 것이 불보듯 뻔한데 과연 검찰이 여기까지 수사할 뜻이 있을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권력의 수단을 갖고 있는 자들이 진실과 정의를 자기 입맛대로 조작하고 규정해 온 것이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댓글알바, 언론방송장악, 검찰과 경찰의 기득권 감싸기, 청와대와 '그 윗선'의 개입에 이르기까지 현정권기에는 유독 이런 일이 아주 대놓고 벌어지고 있다.

비단 정치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내부에서조차 
이들과 비슷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자들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형교회와 그들의 권익을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아바타를 자처한 이들이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게시물을 블라인드시키거나 고소고발을 남발해서 입막음하려고 하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도 확인해 보니 무상급식 반대로 드러난 대형교회들의 친기득권적 행보를 비판한 글모 대형교회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사건에 대해 안타까워한 글이 블라인드됐다.

원래 이런 치졸한 짓은 2000년대에는 사이비이단집단들이나 했다.
이걸 대형교회에서 따라하고 있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과 정의를 조작한다는 푸코적 명제가 90년대도 아닌데 새삼스레 와닿고 있다. 
대형교회가 권력기관에 다름없다는 명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역시 고전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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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2. 23:00

한미 FTA 날치기 통과: 지옥문이 열리다


어이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늘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시는 우리 가카와 딴나라당.

IMF가 터질 때 강남부유층은 지금만 같아라를 외치며 희희낙락했다는데
그연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구나.

참 대단들하십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선 나라 팔아먹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시죠.
사대강을 쑥대밭으로 삽질해놓으시더니 또 한 건 하셨습니다 그려.

노무현이 시작한 한미 FTA를 자기들이 끝내겠다는 게 그들의 선전이었다.
어떻게 그거랑 이게 같을 수 있는가?

노무현 때는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퇴임 후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지자 노무현도 한미FTA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금융서비스시스템에 가히 악마적인 근본적 구멍이 있다는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때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독소조항은 더이상 유지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한미 FTA?
게다가 날치기 통과까지?

결국 이런 사람들을 국회의원으로 앉혀놓은 국민들이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안이한 선택을 한 당사자들은 결코 책임지게 되지 않겠지.
다만 그 자손들, 젊은 세대와 어린 세대가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지 편한 세상'을 살아가시는 수꼴기득권이 활개치고
전국민의 수꼴화를 조종하시는 어용적 언론미디어에
수꼴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뜻과 가뿐하게 동일시해주시는 십자가군병들이 길길이 날뛰며 설쳐대는...

조국의 앞날이 참으로 암울해 보이니 걱정스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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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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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2011. 9. 8. 12:02

자기애적 성격장애와 집단괴롭힘의 한국사회

간혹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로 착각하는 듯한, '지 편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아이디어와 노력은 굉장히 특별하다고 굳게 믿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소중한지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써먹는다. 그렇게 써먹고 나서 그 열매를 다함께 공유하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공은 제 혼자 챙기고 자기가 써먹은 사람에 대해선 도리어 험담을 퍼뜨리거나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이들은 흔히 뒤에서 쑤군대는 것으로 '진심을 나누는' 친구를 만들어 자기가 써먹은 사람을 집단따돌림시킨다. 재주는 곰이 넘고 이득은 엉뚱한 놈이 챙길 뿐 아니라, 한 번 놀아보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척 하다가 멍석말이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커녕 자신들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런 식으로 집단따돌림으로 응징할 특권이 있다고 느끼기 까지 한다.

이들의 사람됨은 자연히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당위적 도덕률로 겉모습을 치장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양파껍질과도 같이 실체가 없다. 그들이 치장하는 당위적 도덕률이 실은 자기 자신에게 걸맞는 것이 아니다. 그럴수록 이들은 더욱 자기 바깥에서부터 주어지는 정당화가 필요하다. 해서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자기가 상대방보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의 속내에 은밀하게 숨겨진 불안한 강박적 욕구이다.

이런 뒤틀린 욕구의 실현이 오래 갈 수 없어야 건강하고 정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종종 혹은 자주 이들의 잔꾀와 꼼수가 아주 오래오래 먹혀들곤 한다.

최근에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있다는 것을 다룬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는데, 신학적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안으로 굽어 있는 사람(homo incurvatus in se)이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사람이 자기 안에 굽어 있는 죄된 상태가 나타나는 양태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자기 안에 굽어 있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게 꼭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찌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 나라가 자기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바 있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재를 놓고 보면 우리 사회도 자기애적 성격장애증을 앓고 있지 않을까? 다 함께 우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인데 특정지역, 특정집단을 차별하고 집단따돌림하는 사회적 인식을 퍼뜨리는 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좌파 따위의 주홍글씨를 박아 집단따돌림을 자행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정신적 기원은 군사독재요, 친일파요, 민중과 민족의 역사를 수탈한 벌열정치를 자행한 세도가집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못된 버릇은 결코 바뀌지 않고 있다. 몇 안 되는 무고한 지도자들에게 죄를 만들어 덮어 씌우고, 거짓증언과 거짓증거를 만들어 그들의 의를 죄로 바꾸면서 그들의 매장과 살해 소식에 서로 축하하고 안도한다.(*1) 이들은 자신들의 세치 혀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바꾸고 있다. 이들의 잔꾀와 꼼수가 대체 언제까지 먹혀들 것인가?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이 득세한 사회란 병든 사회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격장애의 병증으로 스스로 이득을 취할 뿐 아니라, 끼리끼리 패거리를 지어 다니면서 모종의 이득을 약속하면서 자기애적 성격장애에 감염된 좀비를 양산해 낸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특유의 반공근본주의를 통해 그런 좀비를 양산해 내는 강력한 감염진원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가 자기애적 성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한 통합과 화합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타도해야만 유지되고 뭉칠 수 있는 사회는 암과 같은 존재방식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려내지 않으면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들마저 함께 망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가 그렇게 패망했고, 로마제국이 그렇게 패망했으며,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렇게 패망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당시 유다왕국의 병든 사회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이사야 5:18-24)

남유다의 패망을 목도한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전하는 사회상은 더욱 어지럽다. 특히 종교권력의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거짓이상을 보고 거짓예언을 했으며 (에스겔 13장, 예레미야 23:23-32), 사람들의 영혼을 삼키고, 재산을 약탈하고 과부를 만들었다.(에스겔 22:25) 기득권자들의 부정부패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해주었다.(에스겔22:27-28, 예레미야 23:16-22) 성직자들 가운데 간음하는 자들이 가득했다.(예레미야 23:9-10)

한반도가 분단된 지 60년이 넘었다. 아직까지도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 수 없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자기 안으로 굽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았다는 교회는 뼈를 깎는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마땅하다.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생에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셨다. 그런데, 이 복음을 증거하기는 커녕 근본주의, 반공주의 따위의 비본질적인 데 함몰되어 복음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해 통곡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로 한국교회가 한반도에 진 복음의 빚이 무겁고도 무겁다. 




[덧붙임]
*1. 가까운 예로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총리, 곽노현 교육감에 대한 검찰의 표적수사와 주류언론의 받아쓰기를 들 수 있겠다. 특히 정권 실세가 분명 연루되어 있는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다룸에 있어서 로비 핵심인물 박태규가 금품수수를 했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 검찰 수사는 미적미적하고 주류언론은 기억 나지도 않을 만큼 보도를 하지 않으면서, 곽노현 수사 쪽을 부각시키고, 강호동, 김아중 등 애꿎은 연예인들의 탈세혐의까지 대중에게 흘려 대중의 에너지를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하고 있다. 짜고 치는 판이 정도껏 해야지, 이건 저열한 사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011. 8. 16. 18:38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반도


1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연주 내한공연이 있었다. 특히 임진각에서의 합창교향곡 연주는 베를린장벽붕괴 때 레너드 번스타인이 통일된 독일과 유럽에서 모여든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오케스트라와 함께 감동적인 합창교향곡을 연주했던 벅찬 광경이 한반도에도 펼쳐질 것만 같은 예감을 들게 해주는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바렌보임은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가는 음악가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피아노실력으로 베를린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의 총애를 받았던 신동이었고,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하여 현재까지 피아노와 지휘 양 분야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원로급 현역거장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영국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했다가 뒤 프레가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난치병에 걸리자 그와 갈라섰다는 이유로 국내에선 '건방지고 재수없는 놈' 정도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뒤 프레 자신도 질병의 불운과는 별개로 지나친 자유분방함으로 말미암아 결혼생활을 망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바렌보임에 대한 비난은 좀 일방적인 것 같다.

게다가 바렌보임의 음악은 이런 가십거리에 묻힐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바로크에서 현대, 클래식과 재즈, 탱고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광범위한 레퍼토리, 우아하면서도 귀엽기까지 한 프레이징과 선굵고 저돌적인 박력의 조화에서 번뜩이곤 하는 천재성 같은 것은 그의 음악의 굉장한 강점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와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오페라 전곡사이클을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들보다 즐겨 듣고 있다. 재즈와 탱고도 그의 연주로 처음으로 귀담아 들어보았다. 

특히 유대계인 바렌보임이 나치에 의해 악용되었던 바그너 오페라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공연에 바그너를 포함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을 겪은 바 있다. 그처럼 자기 동족의 선입견과 금기에 맞서는 행보를 걸어오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해서 나름 바렌보임의 팬인데 아쉽게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 공연에도 참석할 여유가 없었고, 티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임진각 실황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언론과 클래식동호회에 올라오는 평을 보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들이 꽤 나온다. 클래식애호가들 입장에선 회당 15만원이라는 나름 비싼 돈 내고 들은 연주가 기대에 못미쳤다는 얘긴데, 솔직히 바렌보임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같은 일류 오케스트라와 공연했다면 티켓가격은 래틀과 베를린필의 회당 약 50만원이라는 최고수준에 버금갔을 것이다. 따라서 바렌보임과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유대 - 아랍의 음악적 화해 프로젝트가 베토벤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하는 값어치, 그리고 그 위험부담까지가 티켓값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언론은 늘 그렇듯이 앙상블이 거칠었다거나 2번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안 좋다고 지휘를 관뒀다는 식의 자극적인 부분을 부풀려 바렌보임을 거만하고 재수없는 인간으로 희화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렌보임에 비난이 집중되게 하고, 바렌보임이 우리의 부끄러운 분단상황에 던지고 싶어하는 남북화해의 메시지는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한다.

어쨌든 연주가 매끄럽고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날카롭고 섬세한 귀를 지닌 바렌보임 자신에게 더욱 고역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그가 베토벤의 교향곡 2번 1악장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시원치 않다면서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고 할까. 다시 무대로 돌아온 바렌보임이 1악장부터 다시 연주한 것은 에어컨이 시원치 않았다기 보다 오케스트라의 빈약한 연주에 마에스트로 자신이 열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 혼자 들어간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대목 역시 마에스트로가 그저 냉방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당연히 오케스트라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거장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 오케스트라의 능력은 놀랄만큼 증폭되기 마련이다. 연주회평을 읽어 보면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기능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답게 웅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충분히 감동적으로 즐길 만한 연주를 해주었다는 평을 많이 볼 수 있다. 어색하고 어설프나마 화합과 화해와 조화를 위한 음악적 몸부림이 오케스트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게다.

2

갈라지고 찢어진 한반도의 현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빗대자면, 솔직히 한반도라는 오케스트라가 서동시집오케스트라보다 과연 더 잘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한반도에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사회주체와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바렌보임과 같은 지도자가 잘 눈에 띄지 않으며, 남과 북은 고사하고 남과 남 안에서조차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 신화에 기댄 자기이득의 극대화와 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안철수의 지적대로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는 공멸이다.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된다. 즉, 어색하고 어설프더라도 화합과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화해와 화합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때, 그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은폐하고 싶다는 자기 바람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처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군부독재의 후예들이 화해와 화합을 즐겨 말하면서 마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큰 잘못인 것인양 굴 때, 그것은 폭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말하기 전에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자 앞에서 뻔뻔하게 자랑하면서 심지어 자기 같이 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피해자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황당무개한 상황이다.

바렌보임은 가해자가 어떻게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그 가장 단순한 얼개를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날 이스라엘은 더이상 나치에 의해 600만이 학살된 연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유대계가 장악한 세계권력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와 아랍세계 일반)을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강력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 오로지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피해의식 때문에 더욱 비열하고 잔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렌보임은 유대계 음악가로서,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만일 바렌보임이 아랍인을 배제하는 유대선민주의적 배제의 논리와 태도에 집착했다면, 유대계 음악가로서 세상으로부터 자기 민족이 핍박받아왔고 아랍인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음악적 화해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자신들이 한국전쟁의 억울한 피해자라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가해자인 '빨갱이'들에 대한 증오에 의한 정교하고도 강력한 배제와 타도의 논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런 배제와 타도의 논리는 자신들의 보수기득권을 무제한적으로 확대증진하는데 남용되어 왔다. 이들은 무엇이든지 자신들과 견해와 의견이 다르면 '빨갱이'로 매도하며, 엄정한 사실관계를 흐리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악랄하고 잔인한 가해자의 면모가 있다. 그들은 조선시대 벌열정치로 나라를 기울게 한 것도 모자라서 외세에 빌붙어 공평과 정의를 굽게 한 친일파의 후예로서 서로 여러 겹의 혼맥과 이해관계의 사슬로 얽혀 우리 사회의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있으며, 심지어 사실관계를 바꿈으로써 명예까지 쥐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득세한 우리 사회의 배제와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에서 우리 사회 보수기득권층의 처지는 바렌보임의 태생적 배경인 이스라엘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보수기득권자들와 그 추종자들은 바렌보임이 보여주는 화해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들의 배제의 논리, 또는 울타리치기와 사다리걷어차기 전략을 포기하고 사회적 이익과 권리를 우리 사회 모두가 최대한 더불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다양성의 보장을 통해 창조적 잠재력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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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구사하는 배제의 논리가 자기 정체성과 자기정당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비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보수기득권을 대변하는 종교가 된 한국개신교에 강한 아쉬움을 느낀다. 한국개신교는 보수기득권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해왔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성향이 워낙 강한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과 다르면 이단, 자유주의, 프리메이슨 따위의 사탄의 졸개나 다름없는 존재로 적개심을 품도록 교인들을 세뇌시키며, 새롭고도 넓고 깊은 이해와 공감을 위한 공간적 여지를 내면에 남겨두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의 그리스도교는 강인철이 보여주었다시피 반공주의와 드러나게든 드러나지 않게든 연관되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세뇌논리에 알게 모르게 가장 잘 세뇌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이런 정신성은 보수기득권층의 배제의 논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

안 그래도 진정한 화해와 화합은 쉽지 않다. 하물며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교가 화해가 아닌 배제가 정통이라도 되는 것인양 처신한다면? 여백의 미학이 없는 그리스도교, '비움의 멋'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실로 사람들과 한반도에 있어서 비참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층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구축해 온 배제의 논리에 따른 자기정체성을 비우고 자신들이 배제해온 서민들과 대화와 소통을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이루는 지지계층에게 인기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해야 할 공평과 정의의 문제다. 

그러나 특별히 그 배제의 논리를 제공해 온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그와 같은 비복음적이고 비성서적인 배제와 증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중지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두 팔을 벌려 인류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비움의 미학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수기득권층에게 자기정체성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화해의 촉매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야말로 지금 바렌보임처럼 화해와 화합의 음악을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할 당사자다. 우리 한국개신교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임을 감당할 때, 새로운 통일의 찬가가 이 한반도에도 울려 퍼질 날이 분명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