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5. 09:21

최근 동성애 차별논란에 관하여

최근 서울시가 제정키로 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박원순 서울시장이 폐기하기로 하는 과정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조항을 둘러싸고 극우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일련의 소동이 있었다.


너무나도 황망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몇 마디 해 두도록 한다.


1. 근본주의자들이 왜 유독 동성애를 걸고 넘어지는가?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1.1 과연, 로마서 1장에 동성애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언급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언급된 다른 죄악들은 다 뭐란 말인가?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죄악들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악에서 자유로울까?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심판 선언은 반드시 3장 이후 천명되는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근본주의자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동성애자들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고? 근본주의자들 자신들이 그 수많은 죄악을 행하면서도 구원의 길에 있다고 자부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결코 그럴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동성애가 성령모독죄나 배교라도 되는가?


1.2 모세오경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 역시 죄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이지, 유독 동성애를 저주하라든지 동성애자에게 폭력과 차별을 행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구약율법의 규정으로 사람에게 정신적, 물리적 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범죄자 취급해도 된다면, 구약제사규례며, 음식규례 따위도 다 지키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은 21세기에 사사들과 함께 사악한 이방인들을 "진멸"해야 할까?


1.3 성경의 문자를 문맥과 취지에 상관 없이 원하는 대로 똑 떼어서 침소봉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사이비이단이 애용하는 자의적 성경해석과 거의 구분될 수 없을 지경이다.


2. 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절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절대로 아니라고? 이들은 선천적인 동성애자들을 만나보지 못했거나 만났어도 인간 취급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에는 기형아도 있고 장애우도 있듯이 동성애자도 있다. 자연세계에도 기형과 장애가 있으며 동성애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2.1 동성애는 세상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행과 소외와 변두리로서 교회가 기도하고 긍휼히 여길 연약함에 해당하지, 진 밖으로 끌고 가 진멸할 성령모독죄가 아니다. 교회는 이들과 공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세워주라고 부름 받았지, 이들을 정죄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이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3.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성애라는 특정사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미국근본주의자들의 어젠다들을 그대로 흉내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1 미국 서민대중들이 부패한 우파정치가들에게 비호 받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에게 부당하게 해고와 착취 당한 뒤 하는 일이란 고작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를 규탄하는 시위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딱하고 한심한 것은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같이, 그네들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떠는 문제들보다 더 시급하고 절박한 어젠다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서민대중들이 간단한 의료처치조차 병원 가서 하기엔 너무 비싸서 집에서 직접 꿰매고 자가처방하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하고 야만적인 사회구조에 맞서 저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가 하고 있는 짓이란? 고작 베리칩 음모론과 임박한 대환란의 종교적 망상으로 서민대중을 위협하여 미국 우파 보수층의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의료처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에 서민대중이 저항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약간의 교인들을 긁어 모아 자신들보다 배나 악한 광신도로 만드는 것 정도? 나머지가 있다면, 부패한 공화당 세력이 다수의 미국대중들의 충성을 갈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덕분에 미국의 기독교인구는 매년 감소추세에 있고, 기독교내 공화당 지지자들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 근본주의의 약진? 아니다. 미국교회가 부패한 공화당이라는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놀라운 부흥성장을 하면 할수록 미국교회는 미국사회가 극복하고 일소해야 할 민중의 아편이자 악의 축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근본주의라는 역병의 창궐이다!


어째서? 미국의 극우주의와 근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아
억압된 분노와 불안을 표출하는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병리적 현상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때 독일에서 나타났던 병리적 사회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극우 근본주의는 전체주의의 서막이다. 미국사회는 지금 세계자본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3.2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는? 한국교회도 동성애보다 시급한 사회적 어젠다들이 널려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내부적으로 정리되고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진적 깨어 대비해야 할 진정한 적수인데, 자꾸 외부에서 엉뚱한 적을 상정하고 있다. 동성애자, 이슬람, 종북빨갱이, 로마가톨릭, 프리메이슨 -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외부의 적을 타도하고 배타함으로써 내부결속을 다지는 얕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미래는?


안타깝게도, 정신줄 놓은 군중에게 선전선동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간다.

교회 회중이 예외인가?

저 악랄한 서북청년단을 태동한 것이 한국교회인 판국에,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사대강과 부정선거와 서북청년단.

이제 대한민국에 무엇이 올 것인가...

한국교회여, 한국교회여,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느냐...


2012. 9. 11. 00:49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
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2011. 7. 24. 21:49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경찰이 발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크롬의 영어번역서비스를 통해 보니 노르웨이 언론에서도 경찰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로 지칭했다고 전하는 보도가 있다.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60705175-Anders-Breivik-From-Document-No.pdf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2011. 3. 12. 13:4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근본주의 교회는 흔히 숫적 부흥을 자랑하곤 한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대외적으로 '좋은 열매'라고 내세우는 가장 자신만만한 미덕이다. 물론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는 자부심도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좋은 열매'일 것이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다.

과연 이런 것들이 좋은 열매일까? 

1. 굳이 머릿수를 논하고 싶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목회한 삼위일체 교회에도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신자들이 돌아와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해두고 싶다. 그들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라는 식의 변명을 하려면 근본주의자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꿩잡는 게 매'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실천강령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가? (슐라이어마허라는 기독교사상사의 거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경심은 젖혀 놓고서라도 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논점이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성경에서 열매에 관한 말씀이 과연 숫적 팽창을 가리킨 경우가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예수님도 바울도 '열매'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말씀하셨지 머릿수가 몇인가를 두고 '좋은 열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게 마련"(누가복음 17:37)이라고 하셨다.

근본주의자들이 숫적 '부흥'에 관해 스스로 확신하고 퍼뜨리는 대표적인 어젠다가 바로 자유주의 교회는 숫적으로 쇠퇴한다는 얘기다. 서구교회가 쇠퇴한 원인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구교회의 쇠퇴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를 방불하는 분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라는 작고 강력한 나라를 일으킨 정신적 토대 노릇을 한 영광스러운 교회였다. 20세기초만 해도 개신교회의 교세는 가톨릭을 압도했고, 50-70년대까지만 해도 우세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가 가톨릭의 절반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네덜란드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들어서? 베르까우어 같은 지도적 신학자가 사악한 '자유주의의 괴수' 칼 바르트를 추종하는 바르티안이어서? 천만에! 네덜란드가톨릭도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어 있지만 교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신학 자체가 교세감소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개신교의 쇠퇴는 오히려 개혁교회가 '보수적 신앙' 때문에 이전투구하고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내 교단이 낫니 네 교단이 낫니 도토리키재기를 하지만, 결국 그 피해는 모두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 이전투구와 교회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주로 '보수적으로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다.

[표 설명] 첫번째 짙은 파란색은 무종교, 연두색은 카톨릭, 빨간색은 개혁교회, 노란색은 개혁교단, 보라색은 화란개신교단, 옅은 파란색은 기타 종교를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인 1970년대 초에 교세가 약간 늘어났다가 90년대에는 다시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집필된 네덜란드주교회의 새교리서(1966)를 교황청이 검열한 '화란교리서사건'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보수화, 경직화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 영국교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공회든 개혁교회든 할 것 없이 오늘날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던 영광스러운 영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존 로빈슨 주교가 '신에게 솔직히'를 외쳐서? 존 힉 목사가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퍼뜨려서? 소위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천만에! 비록 세속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영국교회가 쇠퇴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60년대 이전만 해도 영국교회는 아직 건재했다. 영국교회의 몰락은 다름아닌 복음주의 진영의 자중지란에서 촉발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거룩한 분리주의를 주창하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복음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었다. 당장은 분리주의자들이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복음의 텃밭으로서의 한 사회 속에서 복음의 신뢰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만든다.

- 미국교회? 오늘날 미국교회 역시 서서히 영국교회 짝 나고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교회건물이 술집이 되고 모슬렘사원이 되는 현상이 미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왜 미국교회가 저 지경이 되고 있을까? 자유주의의 누룩 때문에? 그 별로 미덥지도 못한 축자영감설과 창조과학과 베리칩 이론을 신봉하지 않아서? 혹은 사악한 프리메이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명하고 신실한 목사 수가 부족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선명성 경쟁에 뛰어드는 데 열심이 부족해서? '한줌도 안 되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회중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미국교회가 기울고 있지 않은가?

- 결국 서구교회 쇠퇴의 가장 깊은 뿌리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지엽말단의 명분싸움으로 갈갈이 찢어졌던 데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회의주의가 서구사회를 휩쓸게 된 배경이 바로 교파분열이었다는 교회사가 후스토 곤잘레스의 지적이 합당하지 않은가. 서구세계가 세속주의, 회의주의에 먹힌 까닭은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시점은 근본주의의 한 형태인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이 터졌던 90년대초였다. 종교다원주의든, 칼 바르트든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사회의 혐오감을 자라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최근 몇 년간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절에 땅밟기를 하고, 불 지르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장로대통령을 세우겠다면서 기득권자들을 감싸고 도는 희한한 시민운동을 하고, 대통령을 무릎꿀리고, 자기 이익관계에 반하는 사안에 대해선 불 일듯 일어나 총궐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신실하고 영웅적인 신앙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고 있을까? 왜 사회적 지탄에 날마다 치명상을 입고 있을까? "이게 다 자유주의 때문"인가? 도대체 이번엔 애꿎은 누굴 희생양으로 지목하려는가? 자유주의 핑계 대기 어려우면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15:17-19, 요한일서3:13)는 성경말씀을 갖다 붙여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만드는 둔갑신공을 발휘하는 이들이 꼭 있다. 언제부터 둔갑신공의 마술적 신앙과 순교자 콤플렉스가 참 신앙이 되었단 말인가?

최근 한겨레21에 "대통령보다 세고 헌법보다 무서운 목사님"이라는 기사가 떴다. 세상 언론에서조차 주목할 만큼 근본주의 진영의 드라이브는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이 기사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성시대를 맞이했는데 거꾸로 한국교회는 역풍을 맞아 기울게 되리라는 것이 요지다.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한국교회는 기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염치를 불안과 증오의 음모론과 맞바꾼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2. 주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은 "두려움을 내어쫓는 사랑"(요한일서4:18)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계시된 용서와 화해의 복음, 공평과 정의의 복음이다. 보혈의 은혜를 믿는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얘기다. 칭의의 복음을 믿는다면서 기득권자들을 싸고 도는 부조리와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끊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도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지금껏 살면서 근본주의자들이 복음의 정신인 조건없는 화해와 포용(Miroslav Volf)을 부르짖는 것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의 근본주의자들, 특히 소위 반공목사들은 상대방이 무릎꿇고 빌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극히 세속적인 원리를 성경과 참신앙의 이름으로 둔갑시킨다. (석기현 목사의 "빨갱이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설교를 들어보라!) 이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살해한 공산군을 자기 양아들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신앙의 위인으로 떠받드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지 않은가? 

오히려 근본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신봉하는 '복음'은 베리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성경과 상관없는 밑도 끝도 없는 희생양신화들이 아닌가? 다른 글들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런 근본주의의 희생양신화들이 거짓말에 기초해 있다. 한갖 거짓말로 불안과 증오를 끝없이 부추겨 영향력을 얻는 근본주의의 기본행태가 과연 성경적이고 복음적일까? 그런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낚였다는 사실이 과연 좋은 열매라는 자랑거리일 수 있을까?

이런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서 공감을 얻고 세력을 얻는 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암적인 존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교회의 사도성과 공교회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1)

[덧붙임]
*1: 최덕성은 2013년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WCC 찬반토론회에서 이 글에서 지적한 근본주의의 주장을 또다시 그대로 되풀이했다. 재차 강조해두거니와, 바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태도 때문에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


2011. 3. 2. 04:43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

양화진에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묻혀 있다.


이들이 증거라고 제시한 사진들에는 이들이 선교사나 목사나 그들의 가족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기록조차 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은 양화진에 묻혀 있으면 다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은데, 100주년 기념교회가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양화진문화원에 따르면 양화진에는 현재 417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선교사와 그 가족은 145명이다. 양화진 묘역에서 프리메이슨 마크 사진을 찍었다고 곧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다.

양화진문화원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145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다가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고마운 분들이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싶다면 최소한 145명의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 명단을 확인해서 그중 몇 명이나 '프리메이슨'인지 확인해 보는 게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염치가 아닐까?

2011. 3. 1. 04:06

베리칩발명자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했다고?

인터넷에서 베리칩을 발명한 칼 샌더스(Carl W Sanders) 박사가 회개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와 베리칩이 666표라고 '폭로'했다는 얘기를 국내외 인터넷에서 종종 읽을 수 있다. 동영상도 대대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인상적인 얘기이긴 한데, 이런 유의 음모론에서 늘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다. 


칼 샌더스 박사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폭로'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관계의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1. 칼 샌더스는 베리칩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박사다.
2. 칼 샌더스 박사는 베리칩을 발명했다.
3. 칼 샌더스 박사는 베리칩 발명을 뉘우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왔다.


이에 따르면, 
1. 칼 샌더스는 베리칩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박사였던 적이 없다.
2. 칼 샌더스는 베리칩을 발명한 적이 없다.
3. 칼 샌더스는 베리칩 발명을 뉘우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럼 칼 샌더스는 도대체 누군가? 이런저런 얘기를 소거하고 남는 사항은 그가 근본주의의 베리칩 음모론을 추종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관계 하나 뿐이다.

칼 샌더스에 대해 굳이 더 길게 풀어써야 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존 토렐 목사의 '폭로'가 진실인지 궁금하다면 위의 링크를 열어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존 토렐 목사의 증언은 과연 신빙성 있을까? 샌더스를 음해하기 위해 급조된 인물인 것은 아닐까? 
- 우선 미국 아마존에서 그가 70-80년대에 펴냈던 근본주의 계통의 책들이 검색되기 때문에, 적어도 70-80년대에 책을 펴낼 정도 연령(아마도 당시 30~50대)의 목회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존 토렐 목사가 운영하는 선교웹사이트 European American Evangelistic Crusades에 올려진 그의 사진으로 봐도 나이 지긋한 목사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그의 선교웹사이트에는 천사와 악마, 세대주의적 도식의 종말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세대주의 성향의 아티클이 다수 올려져 있다.
따라서, 존 토렐 목사가 급조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말뿐 아니라 인적 사항도 종잡을 수 없는샌더스와 달리 토렐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충분히 신빙성 있다고 생각된다.

존 토렐 목사는 이미 1994년에 칼 샌더스가 거짓말장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런데 20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이 거짓말에 낚이고 있는 셈이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귀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여! 거짓말과 부풀려진 헛소문을 덮어놓고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부디 여기서 돌이켜 오직 믿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시기 바란다.

2011. 2. 19. 16:00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3)

5. 근본주의는 왜 음모론에 열광하는가?

알다시피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세속의 물결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으로 생겨난 사조다. 자신들이 근본으로 지목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 외의 거의 모든 대상은 잠재적으로 이미 세속에 물든 '순수한 신앙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심지어 근본주의자들 자신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근본'이냐에 대해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영문흠정역성경이 권위의 원천이냐 자신들의 흠정역성경번역이 권위의 원천이냐 라는 식의 논쟁과 같이, 근본주의 바깥에서 볼 땐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견해차이 때문에 서로를 '참신앙의 적'으로 돌려 버린다.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신들이 나름대로 설정한 한계 바깥을 적으로 돌리고, 따라서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으로 바라본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니 억측이 무성하고,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의 이유는 차곡차곡 쌓이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근본주의는 감정배설의 통로를 신앙의 근본진리라는 명분으로, 의분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Erich Fromm) 정당화하게 된다. 자기가 그어놓은 한계 바깥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과 신학이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마음과 눈과 귀를 닫아 버린 채 터무니없이 희화화해 버린다.

그와 같은 희화화가 사리에 맞는 것일 수 없다. 논리의 비약과 일방적이고 성급한 단정이 난무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조차 예리한 영분별을 빙자하여 무시된다. 상대방을 대화와 이해의 대상으로 품고 서로 배우기 보다 터무니없이 희화화하는 거기에는 상대방의 의도나 지향점에 대한 정확하고도 진정성 있는 파악이 고스란히 빠져 있다. 적으로 돌린 상대방은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되고, 신비화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음모론은 근본주의가 안착하기 쉬운 편리하고 매력적인 함정이 된다. 초창기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이젠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상대방을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해야 하는데 근본주의가 자유주의라고 매도하는 종류의 신학은 심지어 자신들의 자매인 복음주의 계통 신학에서조차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여서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임팩트가 적다. 이에 비해 자기 적을 사탄의 졸개로 못 박는데 프리메이슨과 같은 딱지만큼 손쉬운 게 또 없다. 거슬리는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의혹을 계속 제기하다가 의혹이 짙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몰아 타도의 대상으로 세우면 증오와 분노를 터뜨릴 공동의 통로가 만들어진 덕분에 결집하고 유지할 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희생양만들기와 무슨 차이점이 있단 말인가? 바로 얼마전 타블로음모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음모론에 열광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더이상 사랑, 화해, 용서, 공의, 관용과 같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율법과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강조했던 기독교 실천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에 대해 양심에 일말의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런 덕목들은 어차피 프리메이슨들이 온 세상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뻔뻔스러운 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에서 역사의 지평은 7년 대환란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휴거 따위로 대체된지 오래다. 어차피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모든 역사과정이 깔끔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근본주의자들은 프리메이슨을 쓰러뜨리자고 공격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굉장하고 대단한 단체라고 정말 믿는다면 한줌밖에 안 되는 근본주의자들로선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공격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불안과 적대감을 증폭시켜 근본주의 시스템에 더욱 매달리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면 족할 뿐이다.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언뜻 성경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요한복음 20:29, 로마서 8:24-25 등)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행동을 인간의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감각과 제한된 사고범위에 의지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씀이지, 자의적으로 꾸며낸 음모론을 믿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니 빨갱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가며 혐오해마지 않을 헤겔이나 맑스나 블로흐, 마르쿠제 같은 신맑스주의자들이 현상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실증주의적 인식방법을 불신하고 존재에서 무를, 아직 없는 것에서 참 존재를 보고자 했던 사고방식이 오히려 성경에 그나마 가깝다. 이런 격조높은 철학을 근본주의 음모론에 견주는 것이 도리어 철학에 대한 큰 실례와 굴욕이 될 지경이다.

현상의 인식에 있어서 눈앞에 드러나는 겉보기 배후에 진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들처럼 피상적인 겉보기에 속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승리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실패하거나 패배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 승승장구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일을 어둠 속에 숨기기 위해 행하는 온갖 더럽고 비뚤어진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겉보기 현상이나 소식에 대한 합리적이고 엄밀한 의심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해야 할 믿음의 책무가 있다. 이 믿음의 책무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자기만족이어선 안 되고, 반드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나가야 한다. 몰트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각자가 속한 역사의 지평에서 부르시고, 다시금 역사의 지평으로 보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의 지평은 어떤 상황인가? 질병과 고통, 죄악과 부조리를 겪는 개인사의 지평이 있고, 세대와 지역과 계층과 남북으로 갈라져서 신음하는 한반도의 역사라는 지평도 있다. 세계자본과 세계권력이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물화하고 비역사화하는 자본주의의 악마적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세계사적 지평도 있다. 교회사적으로는 제3세계에서 폭발적으로 기독교가 성장하는 한편 그동안 세계교회의 대들보 노릇을 해왔던 서구교회가 무너지고 있고, 한국교회도 구태의연한 이전 패러다임의 되풀이와 악순환 속에서 심지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심각한 영적 위기 내지 전환기에 봉착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짐이요,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해결할 열쇠는 프리메이슨 음모론과 같은 유의 음모론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기보다는 역사의 지평과 공적 영역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 채 '바깥에 사자가 있다'면서 분노하고 불평하는 영적 게으름과 무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열쇠는 오로지 세상 죄짐을 담당하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무거운 죄악의 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십자가를 지고 구체적인 삶을 던지고, 목숨을 다해서 그분을 뒤따르는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믿는 참된 길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의 지평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 속에 종말론적 희망의 약속이 있다.
2011. 2. 18. 01:35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2)

3. 릭 워렌

빌리 그래함의 뒤를 이어 아마도 미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서 위상을 지니게 될 차세대 복음주의 지도자 릭 워렌 목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관심을 갖는 대목은 그가 불치의 질병을 무릅쓰고서도 탁월한 설교자로서 우뚝 섰다는 점이 아니다. "목적이 이끄는" 시리즈의 책 인세만 해도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10의 9조를 헌금하며,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과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거절하고, 교회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다지 흥미의 대상이 못 된다. 그들의 눈에는 릭 워렌의 탁월한 기독교적 실천조차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기 위해 사탄의 선지자가 벌이는 쇼일 따름이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릭 워렌은 또다른 최악의 프리메이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릭 워렌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다룬 빌리 그래함이나 한스 큉의 경우와 별 다름 없다. 자기들이 서로 제기한 의혹이 부풀려지고 굳어지면서 사실처럼 통하고, 거짓말도 자꾸 하다 보니 어느새 사실로 둔갑해버린 얘기들이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아무개와 가깝거나 만난 적이 있다, 관상기도를 퍼뜨린다, 따라서 친가톨릭적이다, 설교에 나타난 그의 교리가 맘에 안 든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기관과 관련이 있다는 식이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데도 굳이 릭 워렌의 사례를 살펴 보려는 까닭은 복음주의 계통에서 릭 워렌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와 대표성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릭 워렌이 음모론자들이 프리메이슨 산하기관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CFR의 실제 회원(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CFR이라고 하니까 무슨 비밀결사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미국외교관계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미국의 유력한 민간국가전략연구소의 줄임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귀에도 익숙한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미국의 정책연구단체이다. 미국외교관계평의회는 브루킹스연구소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중도성향의 단체로서, 진보와 보수 정권 양쪽 내각의 인물 상당수가 이 단체와 연관을 맺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문 위키백과 해당항목에 따르면 릭 워렌 목사는 2005-06년 미국외교관계평의회의 선출회원이었다. UN이나 다보스포럼 등에서 연설을 하고, PEACE플랜을 통해 화해와 빈곤퇴치, 교육 등을 확산하고자 해 온 그의 사회참여적 행보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면, 미외교관계평의회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물론 이 단체가 미국정치외교계에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어림짐작이라면 세상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비밀결사단체사람이어야 하리라는 점에서 터무니없다.

이런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군가? 다름 아닌 미국극우정치조직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그 수장인 래리 맥도날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해당항목 기술에 따르면 그들이 제기한 의혹은 사실무근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와 더불어 1960년대 음모론자들의 영화나 책도 한몫한 게 틀림없다.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래리 맥도날드가 이들의 말에 낚였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극우단체가 이 주제를 하위문화 레벨이 아닌 정가라는 공적 영역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논의했다는 데 있다.) 우파세력이 미국의 기득권을 쥐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민간조직을 흠집내고자 반프리메이슨정서를 이용한 정치공세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관계가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음에도, 미국정가에서 음모론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뜬 음모론자들이 기꺼이 받아 적어 퍼뜨렸고, 그 중에 기독교근본주의자들도 열성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베리칩 음모론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의 극우세력과 근본주의자들이 손과 발과 입을 맞추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4.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워낙 많이 퍼져 있는데, 막상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했는가 살펴 보면 별로 나오는 게 없다. 하지만 역시 개신교 최대의 연합단체인만큼 세계교회협의회를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이를테면 존 콜먼의 '300 Committe'라는 음모론 책에 나온다. 이 책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언급하는 해당단락(한글번역은 예컨대, →여기.)을 보면,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기술과 사실관계를 입증하기 보다 단정하고 강변하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걸 보고 믿으라는 건가? 세계교회협의회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모르는 사람만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만한 내용이라는 점만 말해 두겠다.

여기서 국내 유명목사님 아무개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고, 따라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식의 루머에 대해서도 간단히 덧붙여 둔다. (루머의 본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를 참조할 것.)

국내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인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국내에도 성공회, 감리교, 기독교장로회, 예장통합, 구세군, 복음교회, 순복음교단 등이 정교회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맹한 교단들이기 때문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면 이 교단들도 프리메이슨 산하조직일까? 무슨 신통한 '영적 분별력' 따위를 들먹이기 전에 상식수준에서만이라도 이게 정말 그런 건지 헤아려 보라. 실로 밑도 끝도 없는 중상모략 아닌가?

게다가, 국내 유명 목사님들은 바쁜 목회활동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여력이 없으실 것이다. 하물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단체로 규정하고 가맹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예장합동 소속이신 길자연 목사 같은 분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까닭은 전혀 없다. 국내 유명 목사님들도 프리메이슨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장본인들이 이 정도로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

국내외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은 이쯤하면 왠만큼 드러난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근본주의가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까닭을 짚어 본다.

(계속)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
2010. 12. 15. 13:51

종말의 분별기준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이 교회회중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잡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소동이나 베리칩=666표 루머의 확대재생산현상 모두 결국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1. 시한부종말을 얘기하는 소위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뉴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 3. 장황한 세대주의식 성경인용을 통해 자기확신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의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당대에도 임박한 시한부종말론과 '휴거'(*1)를 주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절에 이들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양태가 나타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하고 있듯이 1.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여러 가지 소문, 3. 사도들의 말과 같은 것들로 시한부종말론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퍼뜨리는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써야 했다.

3-4절은 종말을 식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친다. 주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도를 떠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참칭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개혁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을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중세교황권은 복음의 도리를 떠나 세속권력에 취해 무서운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고,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한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여길 만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성경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도 로마가톨릭은 복음의 도리를 떠난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세계종교통합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로마가톨릭의 향배는 분명 조심스럽게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배교와 악행이 횡횡하던 중세로마교회를 향해서조차 그 가운데 교회가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바 있는데(칼뱅, 기독교강요 4.2.11,12), 우리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현교황 베네딕토16세가 전임자인 요한바오로2세와는 달리 욕을 먹곤 하는 편이지만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별 근거가 없다. 본문 4절은 극단적인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베네딕토16세는 가톨릭에서도 손꼽을 만한 종교다원주의의 공공연한 반대자다. 베네딕토16세 같은 타입의 가톨릭보수파가 상대적으로 이런 데 무관심한 진보파와 달리 개신교와 정교회에서 신자를 빼내 개종시키려고 애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종교통합음모라니 터무니없다.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야말로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 아닐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에큐메니칼 문서들이야말로 세계교회가 복음의 도를 떠나는 배교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루머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세대주의 종말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루머를 퍼뜨리는 분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공식문헌을 얼마나 확인해 보셨는지,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방식이 다르면 죄다 배교고 이단이라면 대체 배교 아닌 것이 무엇이고 이단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런 식의 분파주의야말로 이단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스도께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지 협소하고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게다가, 멸망의 아들은 대체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혹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마부스'를 들먹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일개 점성술사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마부스'가 멸망의 아들이라고 해보자. 그가 과연 누굴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국방부의 그 아무개? 혹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면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유로화의 발권국 유럽연합의 별 권한도 없는 수장? '그들' 중 그 누구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4절의 예언에 들어맞지 않는다. 적어도 예언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양태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로선 그렇다.

세상의 악의 향배에 대해서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종말의 기준이 충족되기 전에 괜히 들뜰 필요가 없다. 그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저명하고 신령한 아무개가 재림과 말세의 징조를 말하는 영음을 얘기하거나, 신통하게 예언을 여러 차례 맞춘 아무개가 뭘 보거나 듣거나 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런저런 종말의 소문을 듣더라도,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해 보니 재림과 휴거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하더라도 휩쓸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시한부종말론 대처법이다. 

[덧붙임]
(*1) 여기서 나는 '휴거'라는 말로 예수재림을 시한부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예수님이 비밀히 신자들을 한 번 또는 두세 차례에 걸쳐 하늘로 데려가고 공중재림은 또다시 별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휴거'는 존 다비 이후 세대주의자들이 발명해낸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관념이지, 초대교회의 신앙이 아니었다. 밀리오레의 지적대로, 이 관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아 이 땅의 고통을 품고 부조리에 거룩한 저항을 하기 보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끔 그릇되게 이끈다. 예수재림을 진정 기다리는 삶은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2010. 12. 8. 01:51

베리칩에 관한 몇 가지 루머 짚어보기

베리칩에 관한 이런저런 루머가 인터넷에 하도 많이 퍼져 있어서 사실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루머는 오바마정부 들어 통과된 미국 의료보험개혁안에 미국민 전체가 36개월 이내에 베리칩을 삽입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바야흐로 짐승의 표 666을 받게 될 날이 머지 않았고, 예수재림이 가까웠다고 한다.

법령을 미국정부관련사이트에서 직접 찾아보면 이런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문제의 '1004쪽' 얘기는 이 글에 첨부한 파일에서는 1190쪽대가 되어 있다. '1004쪽'으로 나오는 버전은 내려받아 읽었던 파일이 손상되었는지 첨부하는데 약간 문제가 있어서 해당문서를 첨부하지 못했지만 일일이 견주어 문제의 법령 내용이 두 버전 사이에 한 글자 한 글자 동일한 것을 확인해 두었음을 밝혀둔다.

1. 법령에 나오는 '삽입할 수 있는 의료장치'는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법령에 나온 제2종 의료기구에 관한 기술에 나오는 implantable이라는 형용사가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안에 삽입하는 의료기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2. 미국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법령이 36개월 이내에 발효된다는 얘기다.
문제의 '의료기구'는 미국의 일반시민 전체가 아니라 환자(patient)에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위 법령에 명시되어 있다. 당뇨병이나 심장병 같은 만성질환환자에게 적용될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법령이 말하는 '36개월'이라는 시한(1196:5f 등 여러 곳)은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아야 하는 시한'이 아니라 당연히 새 의료보험법령의 발효기한을 가리킨다.

3. 베리칩이 이번 법령에 새로 포함된 것도 아니다.
베리칩은 이미 미국식약청에 의료기구로 등록되어 있다. 2010년11월5일자 업데이트본에 따르면, 베리칩은 2003년 등록되어[date received] 2004년 승인[decision date]되었고, 제3종 (Classs III)로 분류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식이 베리칩음모론자들에게는 더욱더 두렵고도 설렐지도 모르겠지만.) 요는, 베리칩은 의료기구로 사용된지 좀 됐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베리칩이 의료기구면 짐승의 표가 되는지, 의료목적으로 베리칩을 맞는다면 곧 666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2004년부터 의료기구로 사용되고 있던 베리칩을 두고 왜 하필 지금 이 난리들일까?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오바마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열악한 미국의료보험제도를 손보겠다는 걸 공화당은 사회주의를 연상케 한다며 흑색선전을 펼쳐왔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미국경제를 수십 년에 걸쳐 망가뜨린 장본인인 미공화당이 경기침체로 오바마의 지지율이 떨어진 틈을 타 선거에서 압승한 뒤 경제를 빌미로 오바마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희한한 모양새가 펼쳐지고 있다. 위헌시비까지 거시는 중이시란다. 이에 미국근본주의자들은 미공화당에 호응하여 묵시문학적 파국의 색깔을 덧칠하고 있다. 오바마는 빨갱이일뿐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를 예비하는 어둠의 세례요한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오바마가 바로 적그리스도?

이들의 선전은 미국주의원들에게도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버지니아주의회는 중앙언론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리칩의 강제적 사용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현재 법안을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해 놓았다조지아주의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법안을 추진중이거나 이미 추진한 주의회가 더 있을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 조지아주 등에서 베리칩을 받도록 법제화했다는 식으로 국내인터넷에 소문이 퍼졌던 것과는 사실관계가 정반대다.) 이 모든 조처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정치적 구실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 역시 정부가 거짓말하고 있다든지, 자발적으로 받도록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할 거라는 등, 근본주의자들의 베리칩음모론을 결국 막지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판 색깔론이라고 하기조차 뭐한 진흙탕싸움인데 이걸 따라하는 한국사람이 대체 누군가? 앞의 링크를 유심히 보면 장죠셉 목사와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의 글을 열어볼 수 있다. 장죠셉 목사는 과거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했고,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 카페는 신사도운동 계통이다. 이들 모두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확산시킨 장본인들이다. 시한부적인 분위기가 이분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2010. 10. 3. 17:08

백워드마스킹의 실체

국민일보 쿠키뉴스에 백워드마스킹으로 모 아이돌그룹의 히트곡을 돌려들어보니 성관계를 표현하는 가사가 떴다는 기사가 떴다. 백워드마스킹은 예전부터 잊을만하면 근본주의 기독교 쪽에서 흘러나오는 얘깃거리였다. 하지만 국민일보라는 어엿한 언론기관에서 이런 얘기를 흘린다니 백워드마스킹의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던가. 이런 소재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쏠리는 현상도 착잡한 일이다.

문제의 영상을 보니 상당히 여러 가지 주제를 언급하고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백워드마스킹에 대해서만 간단히 다루도록 한다.

1. 백워드마스킹에 따른 소리에서 음성패턴을 자의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일 수 있다.

유명가스펠송그룹 소리엘의 CCM을 똑같은 기법으로 돌려들어보면 황당한 내용이 나온다는 유튜브동영상이 벌써 떠 있다. (다른 CCM이나 찬송가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소리엘 그룹에 심각한 영적 문제가 있는 걸까? 사람은 다 죄인이니까 누구도 소리엘에 영적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할 수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특정낱말은 백워드마스킹에서 반드시 특정낱말로 옮겨지고, '민감한' 몇 개 낱말 앞 뒤로 문장을 만드는 것은 듣는 쪽이 ('바이블코드'와 마찬가지로) 자의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소리엘의 유튜브동영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백워드마스킹에서 말하는 사례 중 적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

2. 백워드마스킹이 잠재의식을 지배한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앞서 '적지 않은 경우'라고 쓴 까닭은 이 기법을 의도적으로 쓰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으로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법을 의도적으로 쓴 경우라도 이 기법의 '위험성'을 반드시 입증할 증거는 못 된다. 당연히 이보다 먼저 백워드마스킹의 영향을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필요하다.

백워드마스킹을 '사탄의 전술전략'으로 믿는 분들 가운데 아마 잠재의식을 활용한 광고기법이 그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백워드마스킹을 활용한 사례가 아니다. 즉, 거꾸로 돌려야 알 수 있도록 은폐된 메시지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 검증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잠재의식에 대한 메시지에 따른 정신적 왜곡에 인지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설혹 백워드마스킹이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공포영화의 주문처럼 불가항력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백워드마스킹을 두려워할 필요도, 그래야 할 까닭도 없다. 사탄이 유혹을 귓가에 속삭이는 것을 예수께서 인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대로 자신의 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덧붙임] 
이 글은 영문위키의 백마스킹 항목의 기술을 비교, 참조했다.
- 이 글은 국내언론기사의 용어사용을 따라 '백워드마스킹'이라고 썼다. 그러나 백워드마스킹이라는 용어의 해당항목에 따르면 백워드마스킹이라는 용어는 최초의 시각적 자극 이후 즉시 또다른 자극을 주어 최초의 시각적 자극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한다. 백워드마스킹은 심리조작에 악용될 수 있고, 백마스킹을 가리키는 말로 부정확하게 전용되기도 한다.
- 영문위키의 백마스킹 항목에서 관련항목으로 링크돼 있는 Reverse speech는 모든 사람의 말을 거꾸로 돌리면 거기에 그 사람의 진정한 내적 관심사가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자기 자신도 진정한 내적 관심사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쉽고 간단한 지름길이 있는 셈이 되겠다. 위의 글에 나온 '소리엘'의 경우 거꾸로 돌리면 나오는 말을 고의로 썼을리는 없겠고, 굳이 의미부여를 하려 한다면 이 주장의 라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사이비과학'으로 소개되어 있다.

* 2010년 9월 5,6일 쯤 다른 블로그계정에 올렸던 글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