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에 해당되는 글 13건
- 2014.12.05 최근 동성애 차별논란에 관하여 2
- 2012.09.11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4
- 2011.11.14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 2011.07.24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4
- 2011.03.1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4
- 2011.03.02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 2
- 2011.03.01 베리칩발명자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했다고? 3
- 2011.02.19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3) 2
- 2011.02.18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2)
- 2011.02.1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1
- 2010.12.15 종말의 분별기준
- 2010.12.08 베리칩에 관한 몇 가지 루머 짚어보기 3
- 2010.10.03 백워드마스킹의 실체
최근 동성애 차별논란에 관하여
최근 서울시가 제정키로 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박원순 서울시장이 폐기하기로 하는 과정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조항을 둘러싸고 극우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일련의 소동이 있었다.
너무나도 황망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몇 마디 해 두도록 한다.
1. 근본주의자들이 왜 유독 동성애를 걸고 넘어지는가?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1.1 과연, 로마서 1장에 동성애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언급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언급된 다른 죄악들은 다 뭐란 말인가?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죄악들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악에서 자유로울까?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심판 선언은 반드시 3장 이후 천명되는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근본주의자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동성애자들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고? 근본주의자들 자신들이 그 수많은 죄악을 행하면서도 구원의 길에 있다고 자부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결코 그럴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동성애가 성령모독죄나 배교라도 되는가?
1.2 모세오경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 역시 죄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이지, 유독 동성애를 저주하라든지 동성애자에게 폭력과 차별을 행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구약율법의 규정으로 사람에게 정신적, 물리적 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범죄자 취급해도 된다면, 구약제사규례며, 음식규례 따위도 다 지키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은 21세기에 사사들과 함께 사악한 이방인들을 "진멸"해야 할까?
1.3 성경의 문자를 문맥과 취지에 상관 없이 원하는 대로 똑 떼어서 침소봉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사이비이단이 애용하는 자의적 성경해석과 거의 구분될 수 없을 지경이다.
2. 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절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절대로 아니라고? 이들은 선천적인 동성애자들을 만나보지 못했거나 만났어도 인간 취급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에는 기형아도 있고 장애우도 있듯이 동성애자도 있다. 자연세계에도 기형과 장애가 있으며 동성애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2.1 동성애는 세상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행과 소외와 변두리로서 교회가 기도하고 긍휼히 여길 연약함에 해당하지, 진 밖으로 끌고 가 진멸할 성령모독죄가 아니다. 교회는 이들과 공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세워주라고 부름 받았지, 이들을 정죄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이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3.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성애라는 특정사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미국근본주의자들의 어젠다들을 그대로 흉내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1 미국 서민대중들이 부패한 우파정치가들에게 비호 받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에게 부당하게 해고와 착취 당한 뒤 하는 일이란 고작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를 규탄하는 시위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딱하고 한심한 것은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같이, 그네들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떠는 문제들보다 더 시급하고 절박한 어젠다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서민대중들이 간단한 의료처치조차 병원 가서 하기엔 너무 비싸서 집에서 직접 꿰매고 자가처방하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하고 야만적인 사회구조에 맞서 저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가 하고 있는 짓이란? 고작 베리칩 음모론과 임박한 대환란의 종교적 망상으로 서민대중을 위협하여 미국 우파 보수층의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의료처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에 서민대중이 저항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약간의 교인들을 긁어 모아 자신들보다 배나 악한 광신도로 만드는 것 정도? 나머지가 있다면, 부패한 공화당 세력이 다수의 미국대중들의 충성을 갈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덕분에 미국의 기독교인구는 매년 감소추세에 있고, 기독교내 공화당 지지자들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 근본주의의 약진? 아니다. 미국교회가 부패한 공화당이라는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놀라운 부흥성장을 하면 할수록 미국교회는 미국사회가 극복하고 일소해야 할 민중의 아편이자 악의 축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근본주의라는 역병의 창궐이다!
어째서? 미국의 극우주의와 근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아
억압된 분노와 불안을 표출하는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병리적 현상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때 독일에서 나타났던 병리적 사회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극우 근본주의는 전체주의의 서막이다. 미국사회는 지금 세계자본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3.2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는? 한국교회도 동성애보다 시급한 사회적 어젠다들이 널려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내부적으로 정리되고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진적 깨어 대비해야 할 진정한 적수인데, 자꾸 외부에서 엉뚱한 적을 상정하고 있다. 동성애자, 이슬람, 종북빨갱이, 로마가톨릭, 프리메이슨 -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외부의 적을 타도하고 배타함으로써 내부결속을 다지는 얕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미래는?
안타깝게도, 정신줄 놓은 군중에게 선전선동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간다.
교회 회중이 예외인가?
저 악랄한 서북청년단을 태동한 것이 한국교회인 판국에,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사대강과 부정선거와 서북청년단.
이제 대한민국에 무엇이 올 것인가...
한국교회여, 한국교회여,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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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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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 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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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60705175-Anders-Breivik-From-Document-No.pdf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 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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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워드마스킹의 실체
문제의 영상을 보니 상당히 여러 가지 주제를 언급하고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백워드마스킹에 대해서만 간단히 다루도록 한다.
1. 백워드마스킹에 따른 소리에서 음성패턴을 자의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일 수 있다.
유명가스펠송그룹 소리엘의 CCM을 똑같은 기법으로 돌려들어보면 황당한 내용이 나온다는 유튜브동영상이 벌써 떠 있다. (다른 CCM이나 찬송가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소리엘 그룹에 심각한 영적 문제가 있는 걸까? 사람은 다 죄인이니까 누구도 소리엘에 영적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할 수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특정낱말은 백워드마스킹에서 반드시 특정낱말로 옮겨지고, '민감한' 몇 개 낱말 앞 뒤로 문장을 만드는 것은 듣는 쪽이 ('바이블코드'와 마찬가지로) 자의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소리엘의 유튜브동영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백워드마스킹에서 말하는 사례 중 적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
2. 백워드마스킹이 잠재의식을 지배한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앞서 '적지 않은 경우'라고 쓴 까닭은 이 기법을 의도적으로 쓰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으로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법을 의도적으로 쓴 경우라도 이 기법의 '위험성'을 반드시 입증할 증거는 못 된다. 당연히 이보다 먼저 백워드마스킹의 영향을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필요하다.
백워드마스킹을 '사탄의 전술전략'으로 믿는 분들 가운데 아마 잠재의식을 활용한 광고기법이 그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백워드마스킹을 활용한 사례가 아니다. 즉, 거꾸로 돌려야 알 수 있도록 은폐된 메시지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 검증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잠재의식에 대한 메시지에 따른 정신적 왜곡에 인지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설혹 백워드마스킹이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공포영화의 주문처럼 불가항력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백워드마스킹을 두려워할 필요도, 그래야 할 까닭도 없다. 사탄이 유혹을 귓가에 속삭이는 것을 예수께서 인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대로 자신의 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덧붙임]
- 이 글은 영문위키의 백마스킹 항목의 기술을 비교, 참조했다.
- 이 글은 국내언론기사의 용어사용을 따라 '백워드마스킹'이라고 썼다. 그러나 백워드마스킹이라는 용어의 해당항목에 따르면 백워드마스킹이라는 용어는 최초의 시각적 자극 이후 즉시 또다른 자극을 주어 최초의 시각적 자극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한다. 백워드마스킹은 심리조작에 악용될 수 있고, 백마스킹을 가리키는 말로 부정확하게 전용되기도 한다.
- 영문위키의 백마스킹 항목에서 관련항목으로 링크돼 있는 Reverse speech는 모든 사람의 말을 거꾸로 돌리면 거기에 그 사람의 진정한 내적 관심사가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자기 자신도 진정한 내적 관심사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쉽고 간단한 지름길이 있는 셈이 되겠다. 위의 글에 나온 '소리엘'의 경우 거꾸로 돌리면 나오는 말을 고의로 썼을리는 없겠고, 굳이 의미부여를 하려 한다면 이 주장의 라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사이비과학'으로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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