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통합'에 해당되는 글 7건
- 2015.11.06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예장통합 내 논란에 관하여
- 2012.10.08 최근 개신교 교세와 근본주의의 향배 (개정판) 1
- 2012.09.11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4
- 2011.05.13 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 2011.02.18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2)
- 2011.01.31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 2010.10.08 작가 최윤희님의 자살소식을 접하면서 2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예장통합 내 논란에 관하여
현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신단다. 세상에……
댓통이 대선후보시절 "내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100% 국민" 따위의 같잖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돌아다닐 때, 저걸 막지 못하면 역사의 어두운 기운이 또 다시 대한민국을 덮게 되리라는 스산한 예감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후보가 식민사관 망언으로 낙마했을 때 최소한 식민사관과 친일행적의 문제성에 관해 조금이라도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겸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당초…... "자기 아비의 명예회복"을 대통령직의 목적이라고 공언한 자가 쉽게 생각을 바꿀 리 만무했다.
대체 박정희가 회복할 명예가 있나? 박정희를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결국 역사를 뜯어 고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댓통의 역사왜곡은 친일반공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따위의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댓통에게 있어서 아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이니까. 100% 국민? 댓통의 꿈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북괴추종세력, 종북빨갱이로 간주한다는 암호통신문이었다.
어쨌든 불행 중 다행으로, 예장통합교단의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잘 내주고 있다.
- 장신대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이 비교적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내주셨다.
- 올해 예장통합교단의 신입총회장 채영남 목사님도 마침 진보적인 성향이셔서 역사교과서국정화에 반대의견을 표명해 주셨다.
- 장신대 신대원 학우회의 촌철살인 현수막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다.
실로 예장통합교단의 면류관과 같은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예장통합의 목회자들, 특히 중견교회 담임목사 다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쪽일 것이다. 이 추정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긴 하지만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 8:2나 7:3,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6.5:3.5 정도를 넘을 수 없을 듯.) 따라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 신약학)이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의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비판한 것은 예장통합교단 정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철홍 교수님의 비판글은 좀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가볍게 매도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 김철홍 교수님과 그와 의견을 같이 대변하는 예장통합의 목사님들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조금 뒷북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일개 개인블로거인만큼 부디 양해들 하시길 바란다.)
1. 친일반공주의 미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 혹은 친일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인가? 대한민국의 국시는 민주주의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친일파와 그 후손 정치가와 언론, 재벌들에게 있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2. 친일반공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인가? 친일반공주의를 세뇌할 목적의 교육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다양성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비민주주의적 발상인가? 오히려 친일파 후예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모든 다양한 견해와 관점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친일반공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의 이념적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 아닌가?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단 말인가?
3. 식민사관 비판이 종북인가? 식민사관 비판과 극복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사학계가 힘들여 이룩한 성과였다.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거부하면 종북빨갱이가 되었단 말인가?
4. 역사가 살아있는 권력의 힘으로 바뀔 수 있나? 역사라는 공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공론의 장에서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부역하는 어용역사학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또, 그 어용역사학에서 기독교, 아니 개신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영광된 측면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한국개신교에 영광이 될 수 있을까?
5. 전국민을 획일적인 역사관을 주입시키면 대한민국이 복음으로 통일되나? 권력자의 위신을 현양하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반포하던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해야 하는 무지몽매한 시대도 지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의 서로 다른 세계과정 이해가 만나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이다. 획일적인 역사관이 남북통일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공론을 통해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이 서로 통합적인 소통을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대승적 통합의 역사관이야말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끌 자격과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 물리적 통일은 반드시 정신적 통합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인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을 보장함으로써만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한반도가 복음으로 통일되기를 기도하여 왔다. 복음의 정신은 주술적 부적처럼 오용되는 십자가상이나 모종의 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충만한 소통과 상호순환의 역사 가운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계시되었다.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역사라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에서 주역이 되어야 마땅한 전국민들을 상대로 역사적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통일로 이르게 할 복음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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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신교 교세와 근본주의의 향배 (개정판)
1. 예장합동 (295만명)
2. 예장통합 (285만명)
3. 감리교회 (153만명)
4. 하나님의 성회 (120만명?)
5. 침례교 (100만명)
6. 예장백석 (87만명)
7. 기독교 성결교 (56만명)
8. 예장고신 (42만명)
9. 기독교장로회 (33만명)
10. 예수교 성결교 (28만명?)
11. 예장대신 (23만명)
12. 예장합신 (12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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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교 성결교회도 정확한 교세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NCC 가입 문제로 분열할 당시 기성 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었고, 기성, 예성, 나사렛 성결교 세 교단이 합하여 96만명 정도라는 2005년도 기사가 나와 있기 때문에 기성측의 최소한 절반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 신도수 6만명의 성공회, 1만명 내외의 루터교, 구세군, 복음교회 등은 우리 사회에서 인지도가 비교적 높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지형을 바꿀 만큼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군소교단들이다. 이밖에 예장합동계열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군소교단들이 있는데,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위에 열거한 상위 12위 안의 중소교단 하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백석측은 예장통합과는 2009년에 교단통합 얘기가 나왔었는데 현재는 별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백석 측이 예장통합과 가진 신학적 공통분모는 여성목사안수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 정도를 들 수 있겠지만, 배타적인 보수개혁주의신학을 부르짖어 왔다는 점, WCC가입 문제에 대해 음모론을 동원하면서 반대하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점 등은 극복해야 할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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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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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한국개신교는 분단 이전에 북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공산정권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북한공산당에 대해 누구보다도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반공주의자였다. 이들이 남한의 개신교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이 원형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전후복구과정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남한사회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보완해줄 반공주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것이 바로 강력한 반공주의로 소문난 개신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개신교에 여러가지 강력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 군종목사제도: 한국개신교의 주도적 건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군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미국군종제도보다 불과 10년 늦게 군종목사제도가 설치됐다. 개신교의 독점적 지위는 군사독재말기인 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유지됐다.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는 글자 그대로 배가하게 되었고, 불교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개신교는 성장에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대형광장/체육관집회: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한 전설적인 여의도광장집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형집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재정적 행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왜 개신교의 대형집회에 대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을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진보기독교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자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국제여론을 희석시키고 진보기독교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수기독교는 반공주의의 최전선과도 같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인식이었다. 보수기독교를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신교, 구체적으로 보수계통 개신교는 독재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대형광장집회, 80년대 들어서는 대형체육관집회를 통해 막강한 세과시를 통한 자신감과 대규모 결신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란 급성장의 그늘로서 성장주의, 물량주의, 교회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는 독재정권이 육성한 반공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양적 규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탄의 무신론사상인 공산주의"를 대적하려면 최소한 남한인구의 일정수준 이상이 '복음화'해야 하고, 남한사회 전체가 복음화할 때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민족복음화'론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명분을 주었다.
교회분열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근본주의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역색과 신학적 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다름'이 곧바로 '틀림'으로 못박힐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다르면 곧 자유주의고 이단이고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에 잠재되어 있었던 교회분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시비에 명분 노릇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시대는 한국개신교에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가 각인되게끔 했고, 내재되어 있던 근본주의 성향이 활짝 꽃피우도록 했다.
공산주의권이 패망한 지금 반공주의는 사실상 실체를 잃어 버린 철지난 시대정신이다. 반공주의 자체를 악마화할 까닭은 없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당시에는 반공주의였다. 개신교는 반공주의라는 시대의 물결을 가장 잘 탈 수 있었던 사회주체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반공주의 적응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반공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억압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사회주체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소수의 진보진영 기독교를 제외하면 인식 정도가 가장 뒤쳐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텐데, 아직도 철지난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성장주의, 물량주의를 선으로 여기는 반성경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유산은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이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깨어나라!
[덧붙임]
(*1) 이 글의 분석은 대부분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에 의존한다. 강인철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모두 논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난다.
딱 한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이 글에서는 한기총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라 - KNCC에서 1988년 '반공주의를 참회하는 선언문을 낸 데 대한 반발로 - 성립되었다는 강인철(과 아마도 많은 다른 분들)의 주장을 옮기지 않았다. 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반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KNCC의 선언문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조성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상깊게 가시화했던 세계적 화해무드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기총의 설립은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통일 이후 북한복음화를 염두에 두고자 한 보수교계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지금 보면 때이른 부푼 꿈이긴 했지만 북한에 단일한 개신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제안이 나왔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있다. 이점에 대해 해당분야 연구자들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간단하고 부담없는 메모와 같은 이 블로그에서 이를 구구하게 논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강인철은 적어도 책에 나타난 기술로만 보면 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총의 현재 모습이 대단히 문제적인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한기총을 애써 두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문에 한기총과 이와 관련된 보수교계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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