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맥그라스 Alister McGrath'에 해당되는 글 3건
- 2014.01.27 소위 창조과학에 관하여 1
- 2011.07.11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 2011.01.31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소위 창조과학에 관하여
한국교회가 근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여러 가지 신학적(?) 편견들을 버려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창조과학의 문제이다. 소위 창조과학이 뿌려놓은 여러 가지 사이비과학적 명제들이 수많은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의 머리에 워낙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하여 마치 창조과학을 부정하거나 비판하기라도 하면 창조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착각하고들 있다.
정말 창조과학을 부정하면 창조신앙을 부정하는 것인가?
소위 창조과학은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창조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나름의 방식 가운데 그저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관계이다.
그 방식의 선의나 최선의 의도 자체야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창조과학 신봉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창조과학은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곧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방식의 선의와 최선의 의도까지 거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의와 의도는 이해하겠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할 법한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거꾸로 표현하자면, 창조과학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창조과학에 반대되는 증거와 현상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분석틀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과 학문적 정직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쉽게 말해, 자기에게 유리해 보이는 얘기만 하고, 그와 다른 얘기를 용렬하게 단죄하고 진실에서 배제하는 아전인수격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창조과학이 윌리엄 페일리의 철지난 자연신학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거나, 안식교를 포함한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입을 거치면서 당치 않게 부풀려져 왔다는 태생적 한계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창조과학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창조와 진화가 도무지 양립할 수 없겠지만, 진화는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일 수 있다. 하나님이 어째서 진화의 방식으로 일하실 자유가 없는가?
이렇게 말하면 성경을 부인하는 것인가? 창세기 1장의 창조신학이 도대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부터 똑바로 이해해야 한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감이 번뜩이며 번개처럼 뚝 떨어져서 창세기 1장이 나왔다는 식의 근본주의 신화로는 본문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자연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자연과학을 계시한 말씀이 아니다. 당대 바빌로니아의 지배적인 과학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야웨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창세기 1장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창조신앙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행간의 여백에, 즉 수용결과가 아니라 수용과정에 있다. '무엇'이라는 문자적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신앙의 역동성에 창조신앙의 본질이 있다.
그래도 하나님이 진화의 방식으로 일하실 자유가 있다고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가? "오직 성경으로만" 판단할 때, "성경에 없으니까" 하나님은 진화의 방식으로는 결코 일하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근본주의자들이 읽은 대로의 성경에 없을 뿐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창세기 1장에도 진화적 요소가 담겨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를테면, 땅이 생명체들을 생산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은가? 땅에서 생명의 요소가 나타나도록 하는 생명의 진화를 명령하신 것이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해석에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일하신 것처럼 진화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과정이다.(위르겐 몰트만) 다윈 이래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근본주의자들은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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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가? 근본주의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의 보수개혁주의노선의 저명한 지도적 목회자 존 파이퍼 목사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언젠가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두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발언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여기에 제시된 생각들을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파이퍼 목사는 영어성경으로부터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인용된 성경은 파이퍼 목사의 의미를 살려 영어성경으로부터 옮겼으며, 굵은 글씨는 모두 글을 옮긴 필자의 강조이다.
“[문] 개혁주의와 청교도전통에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소책자 「비전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기도들이 우리 예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비전의 골짜기」는 청교도들의 기도집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기도들을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범주에 두고 싶습니다. 그 기도들은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일종의 운율 같은 것이 있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공동체적 셋팅에서 쓸 수 있도록 아마도 아주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기도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이 성경적 실재라고 답변드립니다.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명상하라"(시편 1편) 제 생각에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 이게 뭔가요? 이것은 육체적인 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조명받아 여러분의 소명을 알게 되기를!"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을 때 언급된 바로 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봄, 또는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멈춰서 들여다 보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으로 실재에 이르러 여러분이 영적 실재를 파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고 참되고 인격적이고 따스하고 강력한 일종의 기도를 일으킵니다. (* 옮긴이주: 파이퍼 목사가 일부러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채널인 렉시오 디비나의 네 계기, 즉 읽기(lectio), 명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가 모두 나타난다. 여러분도 꼭 렉시오 디비나나 관상기도라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 주의를 잡아 끌면서 읽기를 멈추고 깊은 묵상을 하면서 성령의 의도를 깨닫고 그 다음에 나올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확인해 가면서 이에 따라 기도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히에로니무스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는 성경읽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관하여 이연학,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in: 『활천』 2007.7:40-44을 참조할 것.)
그래서 제 답변은 제가 방금 정의한 대로의 관상기도와 명상의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 대해 "예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고, 그 사귐에 있어서 매우 신비적인 이런 종류의 깊이와 이런 종류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결을 발견하려면 주로 신비적인 가톨릭전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 수업들에 대해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레벨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 레벨에서 영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관상하며, 놀라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상이 일어난 이들의 훌륭한 대변자들을 찾기 위해 나쁜 신학, 즉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나쁜 신학을 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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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파이퍼 목사의 견해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논점이 드러난다.
-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서도 관상기도는 존재해 왔다.
- 가톨릭 전통이 아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하다.(*1)
파이퍼 목사는 가톨릭 전통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정교회의 더 깊고 풍부한 영성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관상기도에 관한 한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인 나쁜 신학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보수개혁주의적 시각에서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일단 '나쁜 신학'으로 치부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영성전통을 배제하고 배타함으로써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복음주의, 개혁주의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냐 아니냐, 혹은 복음주의냐 아니냐, 혹은 개신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존 파이퍼 목사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그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도 아니고, 오로지 통성기도와 큐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는 나머지 통성기도와 큐티 이외에도 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이라는 무지막지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답변을 본 다음에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 존 파이퍼 목사는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자다. 또는 관상기도는 성경에 없는데 존 파이퍼 목사가 가톨릭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존 파이퍼 목사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 등등.
아니면
- 적어도 관상기도의 성경적 실재를 인정하고 계발할 필요가 있다.(*3)
*1: 이것은 단지 파이퍼 목사만의 개인적인 견해만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만 있는 '이방풍습'이 아니라, 칼뱅과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들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 개혁교회 자신의 전통이다. 다만 한국교회가 미국의 대부흥운동 전통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배정웅, 「개혁주의 전통에 나타난 관상기도」 in: 『새들녘』 2010.11:3-5쪽을 참고할 것.) 이동원 목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목회리더십연구소를 통해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칼럼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복음주의적인 관상기도'라는 화두를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소위 큐티 역시 성경말씀에 따라 하루를 조직하는 수도원주의의 잔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Christian Spirituality :129) 큐티 외엔 말씀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동굴의 우상'(플라톤)이다.
*3: 좀더 인터넷을 뒤져 보니 지난 2010년 말쯤에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통 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하셨다고 자신을 밝힌 '나그네'라는 분이 이 게시판을 장악한 근본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댓글에서 이동원 목사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받은 답신을 이동원 목사님에게 추후 동의를 구하고서 공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동원 목사의 메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그네님의 발제글과 댓글에 나타나는 관상기도 혹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변호도 깊은 학문적 훈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보기엔 나그네님의 관상기도 개념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는 점이나 '비움'에서 오로지 '이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동원 목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복음주의의 협소한 교리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그네님은 미국교계에 관해 우리가 잘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관계를 전해준다. 즉, 미국에서 95%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교들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관상기도를 비난하는 것은 5%의 근본주의 계통 신학교라는 얘기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관상기도를 종교다원주의 이단으로 단죄해겠다고 기세등등해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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