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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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분별기준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이 교회회중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잡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소동이나 베리칩=666표 루머의 확대재생산현상 모두 결국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1. 시한부종말을 얘기하는 소위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뉴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 3. 장황한 세대주의식 성경인용을 통해 자기확신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의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당대에도 임박한 시한부종말론과 '휴거'(*1)를 주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절에 이들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양태가 나타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하고 있듯이 1.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여러 가지 소문, 3. 사도들의 말과 같은 것들로 시한부종말론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퍼뜨리는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써야 했다.

3-4절은 종말을 식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친다. 주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도를 떠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참칭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개혁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을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중세교황권은 복음의 도리를 떠나 세속권력에 취해 무서운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고,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한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여길 만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성경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도 로마가톨릭은 복음의 도리를 떠난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세계종교통합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로마가톨릭의 향배는 분명 조심스럽게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배교와 악행이 횡횡하던 중세로마교회를 향해서조차 그 가운데 교회가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바 있는데(칼뱅, 기독교강요 4.2.11,12), 우리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현교황 베네딕토16세가 전임자인 요한바오로2세와는 달리 욕을 먹곤 하는 편이지만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별 근거가 없다. 본문 4절은 극단적인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베네딕토16세는 가톨릭에서도 손꼽을 만한 종교다원주의의 공공연한 반대자다. 베네딕토16세 같은 타입의 가톨릭보수파가 상대적으로 이런 데 무관심한 진보파와 달리 개신교와 정교회에서 신자를 빼내 개종시키려고 애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종교통합음모라니 터무니없다.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야말로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 아닐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에큐메니칼 문서들이야말로 세계교회가 복음의 도를 떠나는 배교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루머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세대주의 종말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루머를 퍼뜨리는 분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공식문헌을 얼마나 확인해 보셨는지,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방식이 다르면 죄다 배교고 이단이라면 대체 배교 아닌 것이 무엇이고 이단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런 식의 분파주의야말로 이단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스도께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지 협소하고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게다가, 멸망의 아들은 대체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혹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마부스'를 들먹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일개 점성술사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마부스'가 멸망의 아들이라고 해보자. 그가 과연 누굴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국방부의 그 아무개? 혹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면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유로화의 발권국 유럽연합의 별 권한도 없는 수장? '그들' 중 그 누구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4절의 예언에 들어맞지 않는다. 적어도 예언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양태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로선 그렇다.

세상의 악의 향배에 대해서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종말의 기준이 충족되기 전에 괜히 들뜰 필요가 없다. 그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저명하고 신령한 아무개가 재림과 말세의 징조를 말하는 영음을 얘기하거나, 신통하게 예언을 여러 차례 맞춘 아무개가 뭘 보거나 듣거나 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런저런 종말의 소문을 듣더라도,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해 보니 재림과 휴거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하더라도 휩쓸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시한부종말론 대처법이다. 

[덧붙임]
(*1) 여기서 나는 '휴거'라는 말로 예수재림을 시한부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예수님이 비밀히 신자들을 한 번 또는 두세 차례에 걸쳐 하늘로 데려가고 공중재림은 또다시 별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휴거'는 존 다비 이후 세대주의자들이 발명해낸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관념이지, 초대교회의 신앙이 아니었다. 밀리오레의 지적대로, 이 관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아 이 땅의 고통을 품고 부조리에 거룩한 저항을 하기 보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끔 그릇되게 이끈다. 예수재림을 진정 기다리는 삶은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2010. 11. 24. 15:02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한반도의 운명

연평도에서 북한군이 연평도에서 훈련중이던 우리 군과 주민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목숨을 잃은 서정우 병장과 문광욱 이병에게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북한의 도발은 미국과 현정권의 강경일변도의 대북관계노선이라는 환경 속에서 김정일-김정은 후계구도의 안정화라는 동기에서 나온 계산된 행동이었다. 아울러 G20정상회의 이후 터져나오리라 예상되던 정부여당의 악재들이 이 도발을 통해 한동안 묻힐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남북한 집권층의 상호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사전교감이 있었든 없었든, 결과적으로 이번 연평도 사건을 통해 북한 집권층은 내부 반발을 잠재우면서 김정은 후계구도를 공고화하고, 남한 집권층 역시 대중의 증오심과 분노를 북한으로 돌림으로써 지지층을 재결집시켜 집권 후반기의 동력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1)

한반도의 집권세력들이 희생양을 만들어 기득권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이 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관행은 슬프게도 벌써 두 세대를 이어온 오랜 버릇이다. 남한은 북한에게, 북한은 남한에게 서로 희생양노릇을 떠넘기고, 남북한은 각기 내부적으로 또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긴장을 조성하고 거슬리는 의견을 묵살하고 '정의와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함으로써 자기 체재를 유지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이런 걸 어떻게 정의라고 하겠는가. 이런 걸 두고 역사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희생양만들기로는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 수 없다.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들이 흔하게 겪는 희생양의 하나로 그칠 뿐이다. 희생양만들기는 생명의 문화가 아니라 의분으로 자기 살의를 정당화하는(Erich Fromm) 죽음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희생양만들기는 자멸의 역사를 만들 뿐이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의 갈등을 기화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외교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현재로선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므로 이런 상황이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북한이 '희생양만들기놀이'를 하다가 어느 시점엔가 장난 아닌 상황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남북한은 희생양만들기놀음을 그쳐야 한다. 희생양만들기로는 언제까지나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와 증오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원한이 사회를 흔들고 좀먹는다.

특히 남한사회의 책임이 크다. 북한은 경제발전과 민주화에서 갈 길이 아직도 아득히 멀다. 남한은 북한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입장으로서 북한과 같은 수준일 수 없다. 북한을 앞서 이끌어 나갈만한 포용력과 저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희생양만들기가 아니라 진정한 공평과 정의가 흘러넘치는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집권층은 사건으로 사건을 덮거나, 거짓정보를 흘림으로써 여론을 선동하여 정의를 흐리는 악행을 그쳐야 한다. 법조계는 돈이나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결을 굽게 하여 약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힘있는 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더러운 관행을 버려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공평과 정의로 처리된다는 믿음이 국민 사이에 가득해야 한다. 언론선전과 이데올로기 세뇌를 통한 허위의식으로 만들어진 거짓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함께 공평과 정의라는 대의로 진정 돌이킴으로써 이룩한 상호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상호신뢰는 공평과 정의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희생양만들기가 아니라 공평과 정의가 이 땅의 역사를 이끌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가 여기서 감당해야만 할 몫이 있다. 한국교회는 남한사회의 희생양만들기관행에 참여하기를 그쳐야 한다.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허위의식 주입하기를 그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이 아니라 반공이데올로기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인 것처럼 거들먹거릴 때가 많았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거리낌없이 내뱉으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굳게 믿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이런 목사들을 환영하며 적극 따라가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일을 그쳐야 한다. 희생양만들기가 이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도록 우리 사회의 방향을 돌이킬 때 평화통일이라는 한반도의 운명도 성취될 것이다.

[덧붙임]
*1.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 장기적 비전을 잃어 버린 채 내부결속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상태로 주민들을 내몰아야 하는 북한정권의 붕괴직전상태를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체재가 예전보다 덜 견고해졌다는 징후가 보인다는 점에서 이 분석에 일부 동의하지만 북한군부와 중국의 공고한 커넥션의 존재를 간과해선 안 된다. 김정일-김정은 부자가 무너진다고 북한이 곧 붕귀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0. 11. 10. 05:55

과연 대통령이 장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대선이 되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장로를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거세다. 지금도 장로대통령을 지켜준다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의 주류개신교회는 이 어려운 시국에 너무나도 잠잠하다.

그러나 기독교인, 또는 장로가 대통령 노릇하는 그 자체를 과연 하나님이 바라실까?

1. 기독교인 혹은 장로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이라는 성경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약 열왕기나 역대기, 혹은 예언서를 읽어 보면,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임금들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힘써 살아낸 다윗과 요시야, 히스기야 같은 몇몇 임금들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 때 예언자의 예언이나 정치적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혹독한 책망과 징계를 겪어야 했다.

아무개 장로, 아무개 권사, 아무개 안수집사 따위의 신분 자체가 그가 지닌 정치적 비전이나 실천에 아무런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2. 기독교인 혹은 장로로서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남북전쟁 당시 남쪽도 북쪽도, 그들의 지도자들도 모두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치하의 교회도 하나님께 기도했다.

미국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링컨은 참된 기도를 했고 나머지의 기도는 거짓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당신의 기도, 아무개 장로의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거짓기도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무엇인가. 승승장구 잘 나가기 때문인가. 자신의 기도야말로 참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형교회를 건설하거나 이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된 기도라는 증거가 되는가. 성경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승승장구가 그들의 선의나 공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개 장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예수께서 승인하신 기도는 바리새인의 유창하고 겉보기에 거룩한 기도가 아니라 죄많은 세리의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도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뉘우침과 돌이킴이야말로 성경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참된 기도의 증거이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개 장로의 정치적 비전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은 새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정치판에서 이런저런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면 교회는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 아니다. 그 아무개 장로가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비전을 품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도해왔느냐, 하나님의 응답에 어떻게 순종해왔느냐를 다른 누구보다도 까다롭고 꼼꼼하게 짚어주어야 한다.

3.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시기도 하신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수도 없이 제사를 드렸을 유다왕이나 그 후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고레스를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셨다. 고레스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할 비전과 역량을 지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그가 단지 독실한 기독교인이거나, 교회활동에 열심이고, 쓰는 언어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익숙하게 들어왔다는 까닭에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그와 그가 감당할 나라와 겨레가 맞이한 역사적 과제 앞에 어떤 종류의 비전과 역량을 지녔느냐 여부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과연 이 시금석에 따르면 지금까지 나온 장로대통령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들이었는가? 아니면 기독교라는 좁은 이익집단의 붕당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기득권집단화를 도모해주는 정상배에 지나지 않았는가?

아합왕과 같은 정치지도자라면 그가 기독교인이라도 교회가 예언자적 비판을 해야 마땅하다. 타종교를 믿는, 심지어 기독교에 비판적인 정치지도자라도, 그의 비전이 역사적 과제에 합당한 것이라면 교회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누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청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장로대통령을 뽑아야 하고, 장로대통령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로지 성원과 지지만을 보내야만 한다는 소리가 소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는 평판을 누리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교회는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탑재해야 한다.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아무개 대선후보, 아무개 국회의원후보가 기독교인이고, 교회직분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바알신앙적 행태를 그치고 예언자적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