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 14:27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1. 고대와 중세까지 이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인 답변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고대교회 문헌이나 오리게네스를 필두로 한 (특히 동방) 교부들 다수의 답변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동방교회에서 먼저 주장했고, 동방의 신학적 영향력 아래 서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러한 답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그릇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악마적) 발명'이라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면서 이 주장의 외연을 자유주의로 좁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으리라는 주장을 "현대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대교회의 문헌증거들을 통해 쉽게 반박되는 단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사후 구원 기회에 한계가 없다는 희망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고대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방식처럼 단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무런 형벌 없이 구원 받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사후에 모든 사람은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에 힘입어 혹독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정화의 과정은 이미 현세에서 고통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현세(가 지옥 같을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되었다.


요컨대, 사후 구원 기회에 대한 고대교회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 은혜의 승리가 그 범위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달리 표현하면, 고대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지옥 세력의 일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승리하시어 굴복시키셨다. 지옥은 비어있다!


2.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희망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관념은 인정하나, 아무나 다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악인들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위협과 경고는 다 뭐란 말인가? 구원 받을 자는 은혜의 선택을 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옥이 비어 있다고? 천만에!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구원의 희망에 전거를 제공한다고 믿어졌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노아 안에서, 환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지옥이 비어 있으리라는 대중적 희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불신자들일지라도 - 그들 자신의 덕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확실한 인간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적어도 개혁교회 이외의 서방전통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온 내세관념이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고 죄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방교회에 퍼져 있던 또 다른 대중적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사후 어떤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purgatorium)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소위 정화의 가능성이 그레고리우스 1세를 거치면서 중세서방에서는 자명한 믿음의 대상인 연옥으로 굳어졌다. 중세 연옥설은 동방교회의 내세관과 어떻게 다른가?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 따르면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정화의 과정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예외없다. 여기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가 철저하게 미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지옥과 천국은 구분되나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화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연옥이라 일반적으로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세는 (농노에서 교황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적 변주를 거치면서 지옥-연옥-천국이라는 서로 구분되고 단절된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내세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는 지옥에는 악인이, 연옥에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보통사람이, 천국에는 선인이 들어가도록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러한 서방중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동방교회에서도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중세서방에서는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 지상교회 신자들의 행업의 공로를 통해 연옥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동방교회에 다르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과정은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동방교회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의 행업에서 나오는 대리적 보속이나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같은 서방의 중세적 관습은 낯설고 새롭다.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서는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가 내세의 모든 영혼들에게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에 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 내세론에서는 그리스도 지옥강하가 "천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운동"(토마스 아퀴나스)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점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았던 악인들에게는 지옥강하의 발생을 인지할 수 있을 뿐 구원의 효력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보속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들이 그 공로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되리라는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 더욱이 구체적으로 드라마화되기까지 한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은 중세말기에 이르러 거의 집단 히스테리 수준의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저 참담한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 남용의 광기는 이 집단 히스테리의 현세적 귀결이었다. 그 누가 두려운 연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라, 지옥만 만원인 게 아니다. 연옥도 만원이다!!


3.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광신적 연옥관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사람이 어딜 가냐고? 연옥밖에 없지 않겠냐고? 바로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약성경, 특히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 바울의 구원론을 못 알아들은 소치이다! 실로 '불쌍한 연옥영혼들'을 건질 산 자들의 잉여공로를 운운하는 연옥은 그리스도의 대속효과를 폐기하는 무서운 사탄의 발명품이다! 불쌍한 현세의 영혼들아, 연옥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중세 연옥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저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인 발언을 부정하면 안 될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서방신학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관심 두기 보다 현세의 삶을 하나님께 자리매김하도록 권면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취지와 다르게 중세 연옥론은 현세의 삶을 단지 연옥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중간과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 표상을 내세에 대한 무익한 공상으로서 거절하고 현세에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독려했던 것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내세에 관한 사고방향은 비교적 온건한 루터파와 보다 철저한 개혁파의 그것으로 나뉘었다. 루터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멜란히톤은 루터와 일정부분 교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 때 가장 뛰어난 이교도들을 구원하셨으리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생각은 이후 루터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구원론은 연옥의 잔재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개혁파는 사후구원가능성에 관해 교회역사상 어느 교회전통보다도 단호하고도 강경한 어조로 부정해 왔다. 이미 쟝 칼뱅의 베드로전서 3장 19절 주석은 - 비록 동일한 형태로 답습되지는 않더라도 - 이후 개혁전통에서 되풀이될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웅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내세의 망대에 임하셨다. 이 망대에는 내세에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대망하던 구약족장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의 광채와 효력을 통하여 족장들을 구원하셨으나, 악인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셨다. 그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예외 없이 철저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종교개혁의 사고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가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해 절반만 이기셨는가?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옥 권세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영혼들 대부분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일체의 사후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그릇은 천하게 여길 자유가 없단 말인가?" 지엄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이중예정론을 통해 관철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일군의 사람들은 선택되기로,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구원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르트 시노드의 소위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도 강경한 형태로 갈무리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와 지옥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계시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모든 신학적 사고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중예정 교리를 통해 충족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르침 없이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의지는 과연 충족되는가? 이중예정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지 않는가? 과연 그런 폭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성경의 하나님인가? 세상 죄를 모두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대신하여 버림 받으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그를 그렇게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경륜이 온 우주에 이루기가지 만유에 편만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자비롭고 온유한 성령님 -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이중예정이 말하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정의의 차원을 계시하지 않는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너무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만을 관철시키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적 정의'(틸리히),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처음부터 다 다시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의 생각처럼 지옥이 만원일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개혁전통에 익숙한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까지 확정적인 상태까지는 못 된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지옥을 포함한 내세표상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실체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몇 갈래의 서로 다른 사고들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내세표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해당문맥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영원 지옥형벌을 강변하고자 할 때 그런 면밀한 검토보다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고 단정짓는 강박적인 해석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성경이 영원한 지옥형벌을 인간 대부분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형벌에 관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불붙는 듯 상처 입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예언자적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요나의 예언 목적이 앗수르 사람들의 회개에 있고 멸망에 있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의 지옥형벌에 대한 위협과 경고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교회에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의지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세상과 지상교회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에 속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 모두, 혹은 대다수를 구원하셔야 하거나, 거꾸로 소수, 혹은 극소수만을 구원하셔야 할 신학적 필연에 갇혀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은 죄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자유로운 주권과 경륜에 따라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에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었고, 지옥의 밑바닥이 드러난 바 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자, 이제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를 동원해서 뭔가 단정적으로 답변하면 아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변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그런 답변들은 교황론이나 마리아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연역으로 정당화된 불필요한 진리의 곁가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방교회의 구원론이나 최근 만인구원론으로 기울고 있는 최근 서구신학의 내세론적 사고(몰트만, 판넨베르크, 존 로빈슨, 칼 라너, 폰 발타자르, 한스 큉 등) 역시 약점이 있다. 모두가 예외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역시 신학적 필연의 연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위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에 대한 물음에 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당신의 독생자가 모두 겪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의 경륜을 확증하셨다.

셋째, 따라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모두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영원한 구원의지를 확증하신 하나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그것은 온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하시든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견줄 수 없이 공정하고도 자비로운 판결이 될 것이다.

넷째,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내어 주시기까지 확증하셨다는 것을 바로 산 자인 당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응하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다!

2011. 9. 9. 18:57

어느 대북선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중국 단둥에서 대북선교활동 중이던 선교사 김모씨가 백화점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문채 숨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정황상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대북선교활동은 일차적으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북한정권의 학정 아래에서 굶주림에 못 이긴 북한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넘어가고자 하는데, 여기서 수많은 사람이 국경수비대에 의해 피살된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넘어가도 북한주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탈북자를 색출해 내도록 파견된 북한보위부 사람들과 중국공안당국의 무자비한 감시, 중국 한족과 조선족들의 잔인한 멸시와 학대다. 특히 여성들은 이들에 의해 비인간적인 성적 착취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탈북자를 위한 선교는 이들을 도와 굶주림을 해결해 주고 은신처를 제공해 주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으로 진행된다. 이 활동은 실로 위험이 가득하다. 북한보위부 요원에게 속아 북한으로 납치, 억류되는 경우도 있고, 중국 공안당국에 발각되어 고문과 감금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다가 추방되는 일도 허다하다.

선교사 김모씨의 피살 소식은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동족의 상처를 싸매주던 누군가가 그런 활동을 못마땅해 하던 세력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소식에 대해 한 포탈사이트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니 우려스럽기 그지 없다. 물론 국내에서 안티기독교적 여론이 늘어가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한국교회에 이런 현상에 대한 책임의 큰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긴 하다. 대북선교의 내용에 대해 대중들이 자세히 알지 못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요즘 여론의 동향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안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위험한 사회심리적 이상기류가 감지된다. 즉, 기독교에 대한 규탄만이 아니라 탈북자, 귀순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 자체를 달가워 하지 않는 분위기로까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내에 체류중인 외국인노동자들의 존재를 달가워 하지 않는 태도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국인노동자들의 경우, 비록 불법적으로 체류중인 경우더라도 국내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우리 국민이 대부분 일하기 꺼려하는 직종에 공급되어 일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고마워해야 할 이땅의 나그네들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부려먹을 때는 실컷 부려먹어 놓고서 이들에 대한 처우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를테면, 산업재해를 입어 평생 일을 할 수 없게 된 외국인노동자들을 보상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쫓아내 버린다든지 하는 짓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설혹 이들이 치안에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또는 조선족의 경우 이들이 같은 민족으로서 일하러 오는 게 아니라 단지 돈 벌러 오는 한국말 할 줄 아는 중국인으로서 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자행하는 이런 비인간적인 짓들은 정당화될 수 없다.

탈북자와 귀순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 문제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민간의 영역이며, 이 영역의 필요는 아주 많은 부분이 우리 개신교의 선교활동에 의해 채워져 왔다. 당신들더러 이걸 하라는 것도 아닌데, 이것 자체를 달가워 하지 않을 까닭이 도대체 뭔가? 사람같지도 않은 개독이 하는 일이면 일단 까고 보고 싶어서? 개독을 박멸해야 이 나라가 살기 때문에?

대북선교활동에 대한 반대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강인철은 한국개신교의 대북선교가 북한 내부에 공산당에 의해 세워진 허수아비 교회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를 해야 한다는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는 개신교 반공주의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시각에 많은 부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북선교에 대한 그의 시각은 정말 북한교회가 공산당의 하수인이 아닌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국개신교를 오염시켜온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에 함몰된 나머지 탈북자들이 중국와 북한 국경지대에서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참상들을 간과한 결과다.

이런 시각들에 대해 나는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탈북자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 동족인 탈북자들이 중국과 북한 국경지역에서 온갖 비인간적인 대우를 겪어도 당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가? 지금 우리 사회가 그들의 고난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멸시하기까지 한다면 나중에 혹시 통일이 되더라도 그들이 과연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당신들에게 북한사람들은 노예나 종인가?

설마 동족으로서, 동료인간으로서 그렇게 생각할 리는 없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부디 대북선교활동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재고해 주시기 바란다.
2011. 8. 16. 18:38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반도


1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연주 내한공연이 있었다. 특히 임진각에서의 합창교향곡 연주는 베를린장벽붕괴 때 레너드 번스타인이 통일된 독일과 유럽에서 모여든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오케스트라와 함께 감동적인 합창교향곡을 연주했던 벅찬 광경이 한반도에도 펼쳐질 것만 같은 예감을 들게 해주는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바렌보임은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가는 음악가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피아노실력으로 베를린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의 총애를 받았던 신동이었고,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하여 현재까지 피아노와 지휘 양 분야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원로급 현역거장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영국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했다가 뒤 프레가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난치병에 걸리자 그와 갈라섰다는 이유로 국내에선 '건방지고 재수없는 놈' 정도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뒤 프레 자신도 질병의 불운과는 별개로 지나친 자유분방함으로 말미암아 결혼생활을 망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바렌보임에 대한 비난은 좀 일방적인 것 같다.

게다가 바렌보임의 음악은 이런 가십거리에 묻힐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바로크에서 현대, 클래식과 재즈, 탱고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광범위한 레퍼토리, 우아하면서도 귀엽기까지 한 프레이징과 선굵고 저돌적인 박력의 조화에서 번뜩이곤 하는 천재성 같은 것은 그의 음악의 굉장한 강점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와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오페라 전곡사이클을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들보다 즐겨 듣고 있다. 재즈와 탱고도 그의 연주로 처음으로 귀담아 들어보았다. 

특히 유대계인 바렌보임이 나치에 의해 악용되었던 바그너 오페라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공연에 바그너를 포함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을 겪은 바 있다. 그처럼 자기 동족의 선입견과 금기에 맞서는 행보를 걸어오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해서 나름 바렌보임의 팬인데 아쉽게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 공연에도 참석할 여유가 없었고, 티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임진각 실황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언론과 클래식동호회에 올라오는 평을 보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들이 꽤 나온다. 클래식애호가들 입장에선 회당 15만원이라는 나름 비싼 돈 내고 들은 연주가 기대에 못미쳤다는 얘긴데, 솔직히 바렌보임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같은 일류 오케스트라와 공연했다면 티켓가격은 래틀과 베를린필의 회당 약 50만원이라는 최고수준에 버금갔을 것이다. 따라서 바렌보임과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유대 - 아랍의 음악적 화해 프로젝트가 베토벤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하는 값어치, 그리고 그 위험부담까지가 티켓값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언론은 늘 그렇듯이 앙상블이 거칠었다거나 2번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안 좋다고 지휘를 관뒀다는 식의 자극적인 부분을 부풀려 바렌보임을 거만하고 재수없는 인간으로 희화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렌보임에 비난이 집중되게 하고, 바렌보임이 우리의 부끄러운 분단상황에 던지고 싶어하는 남북화해의 메시지는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한다.

어쨌든 연주가 매끄럽고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날카롭고 섬세한 귀를 지닌 바렌보임 자신에게 더욱 고역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그가 베토벤의 교향곡 2번 1악장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시원치 않다면서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고 할까. 다시 무대로 돌아온 바렌보임이 1악장부터 다시 연주한 것은 에어컨이 시원치 않았다기 보다 오케스트라의 빈약한 연주에 마에스트로 자신이 열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 혼자 들어간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대목 역시 마에스트로가 그저 냉방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당연히 오케스트라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거장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 오케스트라의 능력은 놀랄만큼 증폭되기 마련이다. 연주회평을 읽어 보면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기능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답게 웅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충분히 감동적으로 즐길 만한 연주를 해주었다는 평을 많이 볼 수 있다. 어색하고 어설프나마 화합과 화해와 조화를 위한 음악적 몸부림이 오케스트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게다.

2

갈라지고 찢어진 한반도의 현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빗대자면, 솔직히 한반도라는 오케스트라가 서동시집오케스트라보다 과연 더 잘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한반도에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사회주체와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바렌보임과 같은 지도자가 잘 눈에 띄지 않으며, 남과 북은 고사하고 남과 남 안에서조차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 신화에 기댄 자기이득의 극대화와 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안철수의 지적대로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는 공멸이다.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된다. 즉, 어색하고 어설프더라도 화합과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화해와 화합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때, 그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은폐하고 싶다는 자기 바람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처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군부독재의 후예들이 화해와 화합을 즐겨 말하면서 마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큰 잘못인 것인양 굴 때, 그것은 폭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말하기 전에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자 앞에서 뻔뻔하게 자랑하면서 심지어 자기 같이 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피해자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황당무개한 상황이다.

바렌보임은 가해자가 어떻게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그 가장 단순한 얼개를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날 이스라엘은 더이상 나치에 의해 600만이 학살된 연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유대계가 장악한 세계권력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와 아랍세계 일반)을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강력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 오로지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피해의식 때문에 더욱 비열하고 잔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렌보임은 유대계 음악가로서,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만일 바렌보임이 아랍인을 배제하는 유대선민주의적 배제의 논리와 태도에 집착했다면, 유대계 음악가로서 세상으로부터 자기 민족이 핍박받아왔고 아랍인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음악적 화해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자신들이 한국전쟁의 억울한 피해자라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가해자인 '빨갱이'들에 대한 증오에 의한 정교하고도 강력한 배제와 타도의 논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런 배제와 타도의 논리는 자신들의 보수기득권을 무제한적으로 확대증진하는데 남용되어 왔다. 이들은 무엇이든지 자신들과 견해와 의견이 다르면 '빨갱이'로 매도하며, 엄정한 사실관계를 흐리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악랄하고 잔인한 가해자의 면모가 있다. 그들은 조선시대 벌열정치로 나라를 기울게 한 것도 모자라서 외세에 빌붙어 공평과 정의를 굽게 한 친일파의 후예로서 서로 여러 겹의 혼맥과 이해관계의 사슬로 얽혀 우리 사회의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있으며, 심지어 사실관계를 바꿈으로써 명예까지 쥐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득세한 우리 사회의 배제와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에서 우리 사회 보수기득권층의 처지는 바렌보임의 태생적 배경인 이스라엘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보수기득권자들와 그 추종자들은 바렌보임이 보여주는 화해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들의 배제의 논리, 또는 울타리치기와 사다리걷어차기 전략을 포기하고 사회적 이익과 권리를 우리 사회 모두가 최대한 더불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다양성의 보장을 통해 창조적 잠재력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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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구사하는 배제의 논리가 자기 정체성과 자기정당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비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보수기득권을 대변하는 종교가 된 한국개신교에 강한 아쉬움을 느낀다. 한국개신교는 보수기득권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해왔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성향이 워낙 강한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과 다르면 이단, 자유주의, 프리메이슨 따위의 사탄의 졸개나 다름없는 존재로 적개심을 품도록 교인들을 세뇌시키며, 새롭고도 넓고 깊은 이해와 공감을 위한 공간적 여지를 내면에 남겨두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의 그리스도교는 강인철이 보여주었다시피 반공주의와 드러나게든 드러나지 않게든 연관되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세뇌논리에 알게 모르게 가장 잘 세뇌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이런 정신성은 보수기득권층의 배제의 논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

안 그래도 진정한 화해와 화합은 쉽지 않다. 하물며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교가 화해가 아닌 배제가 정통이라도 되는 것인양 처신한다면? 여백의 미학이 없는 그리스도교, '비움의 멋'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실로 사람들과 한반도에 있어서 비참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층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구축해 온 배제의 논리에 따른 자기정체성을 비우고 자신들이 배제해온 서민들과 대화와 소통을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이루는 지지계층에게 인기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해야 할 공평과 정의의 문제다. 

그러나 특별히 그 배제의 논리를 제공해 온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그와 같은 비복음적이고 비성서적인 배제와 증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중지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두 팔을 벌려 인류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비움의 미학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수기득권층에게 자기정체성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화해의 촉매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야말로 지금 바렌보임처럼 화해와 화합의 음악을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할 당사자다. 우리 한국개신교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임을 감당할 때, 새로운 통일의 찬가가 이 한반도에도 울려 퍼질 날이 분명 올 것이다.
2011. 3. 12. 13:4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근본주의 교회는 흔히 숫적 부흥을 자랑하곤 한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대외적으로 '좋은 열매'라고 내세우는 가장 자신만만한 미덕이다. 물론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는 자부심도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좋은 열매'일 것이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다.

과연 이런 것들이 좋은 열매일까? 

1. 굳이 머릿수를 논하고 싶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목회한 삼위일체 교회에도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신자들이 돌아와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해두고 싶다. 그들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라는 식의 변명을 하려면 근본주의자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꿩잡는 게 매'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실천강령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가? (슐라이어마허라는 기독교사상사의 거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경심은 젖혀 놓고서라도 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논점이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성경에서 열매에 관한 말씀이 과연 숫적 팽창을 가리킨 경우가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예수님도 바울도 '열매'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말씀하셨지 머릿수가 몇인가를 두고 '좋은 열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게 마련"(누가복음 17:37)이라고 하셨다.

근본주의자들이 숫적 '부흥'에 관해 스스로 확신하고 퍼뜨리는 대표적인 어젠다가 바로 자유주의 교회는 숫적으로 쇠퇴한다는 얘기다. 서구교회가 쇠퇴한 원인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구교회의 쇠퇴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를 방불하는 분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라는 작고 강력한 나라를 일으킨 정신적 토대 노릇을 한 영광스러운 교회였다. 20세기초만 해도 개신교회의 교세는 가톨릭을 압도했고, 50-70년대까지만 해도 우세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가 가톨릭의 절반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네덜란드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들어서? 베르까우어 같은 지도적 신학자가 사악한 '자유주의의 괴수' 칼 바르트를 추종하는 바르티안이어서? 천만에! 네덜란드가톨릭도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어 있지만 교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신학 자체가 교세감소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개신교의 쇠퇴는 오히려 개혁교회가 '보수적 신앙' 때문에 이전투구하고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내 교단이 낫니 네 교단이 낫니 도토리키재기를 하지만, 결국 그 피해는 모두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 이전투구와 교회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주로 '보수적으로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다.

[표 설명] 첫번째 짙은 파란색은 무종교, 연두색은 카톨릭, 빨간색은 개혁교회, 노란색은 개혁교단, 보라색은 화란개신교단, 옅은 파란색은 기타 종교를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인 1970년대 초에 교세가 약간 늘어났다가 90년대에는 다시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집필된 네덜란드주교회의 새교리서(1966)를 교황청이 검열한 '화란교리서사건'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보수화, 경직화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 영국교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공회든 개혁교회든 할 것 없이 오늘날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던 영광스러운 영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존 로빈슨 주교가 '신에게 솔직히'를 외쳐서? 존 힉 목사가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퍼뜨려서? 소위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천만에! 비록 세속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영국교회가 쇠퇴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60년대 이전만 해도 영국교회는 아직 건재했다. 영국교회의 몰락은 다름아닌 복음주의 진영의 자중지란에서 촉발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거룩한 분리주의를 주창하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복음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었다. 당장은 분리주의자들이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복음의 텃밭으로서의 한 사회 속에서 복음의 신뢰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만든다.

- 미국교회? 오늘날 미국교회 역시 서서히 영국교회 짝 나고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교회건물이 술집이 되고 모슬렘사원이 되는 현상이 미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왜 미국교회가 저 지경이 되고 있을까? 자유주의의 누룩 때문에? 그 별로 미덥지도 못한 축자영감설과 창조과학과 베리칩 이론을 신봉하지 않아서? 혹은 사악한 프리메이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명하고 신실한 목사 수가 부족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선명성 경쟁에 뛰어드는 데 열심이 부족해서? '한줌도 안 되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회중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미국교회가 기울고 있지 않은가?

- 결국 서구교회 쇠퇴의 가장 깊은 뿌리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지엽말단의 명분싸움으로 갈갈이 찢어졌던 데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회의주의가 서구사회를 휩쓸게 된 배경이 바로 교파분열이었다는 교회사가 후스토 곤잘레스의 지적이 합당하지 않은가. 서구세계가 세속주의, 회의주의에 먹힌 까닭은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시점은 근본주의의 한 형태인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이 터졌던 90년대초였다. 종교다원주의든, 칼 바르트든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사회의 혐오감을 자라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최근 몇 년간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절에 땅밟기를 하고, 불 지르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장로대통령을 세우겠다면서 기득권자들을 감싸고 도는 희한한 시민운동을 하고, 대통령을 무릎꿀리고, 자기 이익관계에 반하는 사안에 대해선 불 일듯 일어나 총궐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신실하고 영웅적인 신앙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고 있을까? 왜 사회적 지탄에 날마다 치명상을 입고 있을까? "이게 다 자유주의 때문"인가? 도대체 이번엔 애꿎은 누굴 희생양으로 지목하려는가? 자유주의 핑계 대기 어려우면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15:17-19, 요한일서3:13)는 성경말씀을 갖다 붙여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만드는 둔갑신공을 발휘하는 이들이 꼭 있다. 언제부터 둔갑신공의 마술적 신앙과 순교자 콤플렉스가 참 신앙이 되었단 말인가?

최근 한겨레21에 "대통령보다 세고 헌법보다 무서운 목사님"이라는 기사가 떴다. 세상 언론에서조차 주목할 만큼 근본주의 진영의 드라이브는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이 기사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성시대를 맞이했는데 거꾸로 한국교회는 역풍을 맞아 기울게 되리라는 것이 요지다.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한국교회는 기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염치를 불안과 증오의 음모론과 맞바꾼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2. 주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은 "두려움을 내어쫓는 사랑"(요한일서4:18)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계시된 용서와 화해의 복음, 공평과 정의의 복음이다. 보혈의 은혜를 믿는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얘기다. 칭의의 복음을 믿는다면서 기득권자들을 싸고 도는 부조리와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끊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도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지금껏 살면서 근본주의자들이 복음의 정신인 조건없는 화해와 포용(Miroslav Volf)을 부르짖는 것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의 근본주의자들, 특히 소위 반공목사들은 상대방이 무릎꿇고 빌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극히 세속적인 원리를 성경과 참신앙의 이름으로 둔갑시킨다. (석기현 목사의 "빨갱이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설교를 들어보라!) 이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살해한 공산군을 자기 양아들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신앙의 위인으로 떠받드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지 않은가? 

오히려 근본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신봉하는 '복음'은 베리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성경과 상관없는 밑도 끝도 없는 희생양신화들이 아닌가? 다른 글들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런 근본주의의 희생양신화들이 거짓말에 기초해 있다. 한갖 거짓말로 불안과 증오를 끝없이 부추겨 영향력을 얻는 근본주의의 기본행태가 과연 성경적이고 복음적일까? 그런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낚였다는 사실이 과연 좋은 열매라는 자랑거리일 수 있을까?

이런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서 공감을 얻고 세력을 얻는 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암적인 존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교회의 사도성과 공교회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1)

[덧붙임]
*1: 최덕성은 2013년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WCC 찬반토론회에서 이 글에서 지적한 근본주의의 주장을 또다시 그대로 되풀이했다. 재차 강조해두거니와, 바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태도 때문에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