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11. 00:00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최근 명설교가이신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가르치다가 우리나라 근본주의자들에게 맹공격을 당하신 끝에 관상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근본주의가 기세등등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막무가내로 들이대면서 악선전을 일삼는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신이 사이비이단집단들의 광란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국내의 거친 토양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도의 기풍을 소개하고자 애쓰신 이동원 목사님의 용기와 노고에 심심한 위로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가? 근본주의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의 보수개혁주의노선의 저명한 지도적 목회자 존 파이퍼 목사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언젠가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두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발언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여기에 제시된 생각들을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파이퍼 목사는 영어성경으로부터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인용된 성경은 파이퍼 목사의 의미를 살려 영어성경으로부터 옮겼으며, 굵은 글씨는 모두 글을 옮긴 필자의 강조이다.


“[문] 개혁주의와 청교도전통에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소책자 「비전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기도들이 우리 예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비전의 골짜기는 청교도들의 기도집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기도들을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범주에 두고 싶습니다. 그 기도들은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일종의 운율 같은 것이 있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공동체적 셋팅에서 쓸 수 있도록 아마도 아주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기도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이 성경적 실재라고 답변드립니다.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명상하라"(시편 1편) 제 생각에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 이게 뭔가요? 이것은 육체적인 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조명받아 여러분의 소명을 알게 되기를!"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을 때 언급된 바로 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봄, 또는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멈춰서 들여다 보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으로 실재에 이르러 여러분이 영적 실재를 파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고 참되고 인격적이고 따스하고 강력한 일종의 기도를 일으킵니다. (* 옮긴이주: 파이퍼 목사가 일부러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채널인 렉시오 디비나의 네 계기, 즉 읽기(lectio), 명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가 모두 나타난다. 여러분도 꼭 렉시오 디비나나 관상기도라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 주의를 잡아 끌면서 읽기를 멈추고 깊은 묵상을 하면서 성령의 의도를 깨닫고 그 다음에 나올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확인해 가면서 이에 따라 기도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히에로니무스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는 성경읽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관하여 이연학,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in: 『활천』 2007.7:40-44을 참조할 것.)

그래서 제 답변은 제가 방금 정의한 대로의 관상기도와 명상의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 대해 "예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고, 그 사귐에 있어서 매우 신비적인 이런 종류의 깊이와 이런 종류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결을 발견하려면 주로 신비적인 가톨릭전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 수업들에 대해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레벨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 레벨에서 영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관상하며, 놀라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상이 일어난 이들의 훌륭한 대변자들을 찾기 위해 나쁜 신학, 즉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나쁜 신학을 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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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파이퍼 목사의 견해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논점이 드러난다.

-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서도 관상기도는 존재해 왔다.
- 가톨릭 전통이 아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하다.(*1)

파이퍼 목사는 가톨릭 전통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정교회의 더 깊고 풍부한 영성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관상기도에 관한 한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인 나쁜 신학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보수개혁주의적 시각에서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일단 '나쁜 신학'으로 치부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영성전통을 배제하고 배타함으로써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복음주의, 개혁주의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냐 아니냐, 혹은 복음주의냐 아니냐, 혹은 개신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존 파이퍼 목사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그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도 아니고, 오로지 통성기도와 큐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는 나머지 통성기도와 큐티 이외에도 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이라는 무지막지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답변을 본 다음에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 존 파이퍼 목사는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자다. 또는 관상기도는 성경에 없는데 존 파이퍼 목사가 가톨릭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존 파이퍼 목사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 등등.
아니면
- 적어도 관상기도의 성경적 실재를 인정하고 계발할 필요가 있다.(*3)


[덧붙임]
*1: 이것은 단지 파이퍼 목사만의 개인적인 견해만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만 있는 '이방풍습'이 아니라, 칼뱅과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들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 개혁교회 자신의 전통이다. 다만 한국교회가 미국의 대부흥운동 전통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배정웅, 「개혁주의 전통에 나타난 관상기도」 in: 『새들녘』 2010.11:3-5쪽을 참고할 것.) 이동원 목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목회리더십연구소를 통해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칼럼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복음주의적인 관상기도'라는 화두를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소위 큐티 역시 성경말씀에 따라 하루를 조직하는 수도원주의의 잔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Christian Spirituality :129) 큐티 외엔 말씀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동굴의 우상'(플라톤)이다.
*3: 좀더 인터넷을 뒤져 보니 지난 2010년 말쯤에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통 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하셨다고 자신을 밝힌 '나그네'라는 분이 이 게시판을 장악한 근본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댓글에서 이동원 목사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받은 답신을 이동원 목사님에게 추후 동의를 구하고서 공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동원 목사의 메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그네님의 발제글과 댓글에 나타나는 관상기도 혹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변호도 깊은 학문적 훈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보기엔 나그네님의 관상기도 개념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는 점이나 '비움'에서 오로지 '이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동원 목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복음주의의 협소한 교리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그네님은 미국교계에 관해 우리가 잘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관계를 전해준다. 즉, 미국에서 95%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교들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관상기도를 비난하는 것은 5%의 근본주의 계통 신학교라는 얘기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관상기도를 종교다원주의 이단으로 단죄해겠다고 기세등등해 있는 실정이다. 


2011. 5. 28. 22:11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4.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장21절)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들)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