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31. 07:37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 올바른 길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교단에서 이재철 목사와 같이 이 시대에 드문 올바른 설교자를 사도신경의 그리스도 지옥강하조항에 대한 강해에서 본질과 상관없는 말꼬투리잡기로 이단시비를 걸고 목사면직까지 강행한 사례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재철 목사가 목회하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신자를 잃은 주변교회들과 양화진에 이익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인들이 담합과 공모를 했으리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가장 큰 기관인 한기총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미 개별교단들이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를 근거로 이단으로 단죄한 큰믿음교회 같은 문제단체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렸다는 것도 착잡한 희비극이다. 신임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이전 위원회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단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관상기도가 이단시비에 올라 있는 현실은 이런 사이비이단문제의 난맥상과 맞물려 있다. 관상기도가 일부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혼합주의 쯤으로 알려져 있으니 참 딱한 현실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상기도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을 성전이라도 치르듯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와 신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라고 봐도 큰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호전성이 영들을 분별한다는 그럴싸한 미명으로 포장되고 장려되기까지 하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복음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성경을 들먹인다고 해서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써야 한다면서 성경과 사도를 들먹이는 사이비집단이 있다. 공교회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가 성경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 = 토요일'을 지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일 =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공교회를 공격하는 태도가 성경적일 수도 없다. 

왜인가? 성경에 담긴 복음의 정신은 놓친 채 성경만 들먹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주의적 인용으로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며 의기양양하게 단죄할 수 있을까? 자전거가 성경에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며 득의만면하게 저주를 퍼붓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둔다.

둘째, 순전한 믿음은 소위 순혈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때 이방인과의 통혼을 비판하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했다. 그러나 성경을 면면히 흐르는 구원사의 큰 흐름은 이방인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이었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없었을 것이요, 아직도 정결례를 삼가 지켜야 했을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도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했다.

순혈주의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서 순혈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참사도로 여겨졌던가? 오히려 순혈주의를 고집할수록 그들은 구원사의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관상기도에서 본질과 알맹이가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순수한 믿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전한 믿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극단적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가까운가? 

관상기도가 '이방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평은 설득력 없는 순혈주의에 불과하다.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일체에 소위 종교혼합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성경의 역사적 과정 자체가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는 비평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관상기도가 그리스도중심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로부터 가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한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세계신학계의 보편적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이들에게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오늘의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의 거장들이 영성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거짓교사일터이므로!

그렇다면 영국의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책 Christian Spirituality를 보면 소위 영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향점을 갖는 여러 가지 신앙유형과 신학적 입장들이 아우러져 있다. 그 가운데는 관상기도가 예사로 등장함은 물론, 소위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편협한 근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거짓선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빌랴의 테레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요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토마스 머튼, C S 루이스, 칼 바르트, 본회퍼 등이 다양한 영성의 모습으로서 토의된다. 

자, 맥그라스는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텐가? 아니면 맥그라스 역시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배교한 거짓교사라고 할텐가?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존 파이퍼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관상과 명상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실재라고 긍정한다. 영성의 단계를 나누어 존재의 상승과 고양을 얘기하는 가톨릭신학의 '나쁜' 관상과 명상에 대해선 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긋지만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가 추천하고 격려하는 차세대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이머징교회 운동(*1)과 관상기도에 참여해 온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든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존 파이퍼나 드리스콜 목사 역시 이들의 눈에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아니고 배교한 거짓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할 교회의 교사가 몇이나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들에게 교회의 교사가 과연 필요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성령의 감동 덕분에 '오직 성경으로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관상기도에 대한 세계공교회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2)

[덧붙임]
"Emerging Church"는 '이머징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번역이다. 그렇다고 '신흥교회'라고 옮기자니 신흥종교가 연상되어 어감이 적절치 못하고, '(새로) 뜨는 교회'라는 식의 표현도 '요새 뜨는 교회'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할 것을 고민해야 할 낱말이다.
*2. 구글링을 잠시만 해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그들 스스로의 (소위 '영적인') 통찰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빌어온 얘기라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주장을 어디선가 빌어오거나 따오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그렇게 했느냐이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국근본주의의 복사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두고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2011. 1. 25. 12:53

신앙의 항체

우리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과 순결한 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이 명분이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특별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순수한 복음 혹은 순결한 교리라는 명분 하에 교파교단간의 대화와 연합이나 종교간 대화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교파교단간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서로 입장이 다른 교파, 교단, 신학학파간 대화와 교류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이 주제는 이미 공교회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교파교단간 대화는 종교개혁 이후 줄곧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미 칼뱅과 멜랑히톤, 크랜머 주교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 각 교파의 대표자들은 당대의 교회일치적 대화와 교류를 추진한 바 있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와 같은 한 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신학자들 역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유럽개신교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아우르는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범교회적 대화 노력을 계승한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운동이다.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와의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두어야겠다. 

과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지만 과연 시대사조나 종교간 대화 일체는 저주받아 마땅한 종교혼합주의일까?

오히려 성경 자체가 종교간 대화와 통섭의 역사를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창세기1장은 고대근동의 우주론인 신통기(신들의 탄생 연대기)를 탈신화하하여 아우른 결과였다. 
-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왕정을 비롯한 이방문화를 흡수했다.
- 잠언은 고대근동의 지혜문학을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씀이다.
-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문학사상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받았다.
-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공박하는 동시에 영지주의의 상징과 이미지를 흡수하여 신앙을 설명한다.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무한정 길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을 거친 하이브리드였다.(*1) 신앙의 선조들은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했다. 

이 상황은 히브리낱말 '바알(בע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바알이라는 낱말 자체는 가나안신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문맥에 따라 남편, 주인, 주민, 지배자, 지배하다, 결혼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용례들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순수주의에 매달렸다면 이런 일상적인 용례 자체가 없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신앙의 중심에 야웨 하나님의 구원행동 대신 풍요와 번영이 들어설 때 바알신앙이라는 혼합주의로 퇴행하는 위기가 일어났다. 혼합주의란 신앙이라는 원에서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이지 하이브리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바리새주의가 보여주듯이 소위 순혈주의도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진다면 똑같이 문제다. 

오늘날 '하이브리드'라면 배교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이들이 있다. 불교나 유교에서 비롯된 말을 쓰면 안 되고, 신비종교에서 비롯된 기도방법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아무개 목사나 아무개 신학자는 시대사조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이비이단이고 거짓선생이란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되고 안경을 쓰면 안 되고 수혈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기만 완고하고 옹졸하면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그 독소를 한국교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니 문제다.

다원사회 속에서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어떻게 차단하고 배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이미 흡수하고 있다. 이미 불식간에 수많은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을 흡수하고서 '오직 성경만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올린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정신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오히려 이미 그것조차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혹은 기도의 응답과 꿈과 환상과 영음을 통해 자기 신앙이 '순수하다'라고 입증되기라도 한 걸까?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부터가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건강하다는 것은 병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항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에 대해 결벽증을 갖는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올바르게 가늠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믿음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믿음을 잘 벼릴 때 신앙의 건강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덧붙임]
*1. 하나님은 그런 '하이브리드'에 담긴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신다.(마태복음 16:13-20)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동적 영감성이다.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 예컨대, 밴후저 같은 이들은 -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있다. 신적 측면은 성경이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요, 인간적 측면은 성경이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서 기록된 제한적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가현설에 빠지게 되듯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성경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가현설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가현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믿지 않는다.
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