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0. 16:25

헤르만 바빙크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고집했나?

우리나라 회중들에게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이 성경적이며, 성경비평학은 자유주의 이단이라는 근본주의 신화가 워낙 공고하게 널리 퍼져 있다.


사실 소위 보수성향의 학문적 주석총서라도 들춰 보면 이런 얘기가 얼마나 황당한 매카시즘이요 신기루 같이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성경비평학 자체는 성경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로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도구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느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신학훈련을 받지 않은 교회회중들에게 이런 얘기가 대체로 금시초문에 속한다.


왜 그럴까? 아무리 보수성향 교단일지라도 (대표적으로 NIC나 WBC 같은 보수성향의) 학문적 주석총서를 도구 삼아 설교준비 하는 목회자라면 근본주의 신화가 글자 그대로 신화임을 모를 수 없을텐데,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해서 자기 목회경력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큰 평신도와 교권주의자들이 사상검증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자유주의니 이단이니 빨간 낙인을 찍어 버리면 일개 목사가 뭘 어쩌겠는가. 그냥 극보수적인 회중의 눈높이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근본주의 신화를 숭배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보수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의 주저 "개혁교의학"을 보면 한국교회에서 "보수" "정통" "개혁주의"로 통하고 있는 근본주의 신화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몇몇 신학자들이 ... 성경이 모든 문제에서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추론한다면, 이것은 성경에 오류와 실수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다른 이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일면적이다. 성경은 가장 확실하게 참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자체가 의도하는 의미에서 참되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우리의 엄밀한 자연과학적, 역사학적 지식이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미 이 논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성경은 지질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혹은 역사학의 교과서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진술을 담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 각각의 사례에서 저자가 그 진술로 말하고자 의미한 바를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의 독자들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또는 경세적) 진리, 형식적 오류와 내용적 오류, 엄밀하게 자연과학적인, 혹은 역사학적인 진리와 문예적, 시적 진리 일반, 우리가 역사를 저술하는 방식과 고대셈족 사람들의 방식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이 구분을 주의깊게 염두에 두고 성경에 대한 우리의 비평과 주석에 적용한다면, ....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관찰해 온 바에 따르면 - 우리 의미에서 역사로 입증되지 않으며, 저자에 의해서, 따라서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렇게 의도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이 부분들은 우화와 신화와 사화와 전설과 알레고리와 시적 표현들일 수 있다. 이들은 성경기자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른 출저로부터 혹은 대중적 구전으로부터 취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예시로써 종교적,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고자 한다. 이것은 창조이야기와 낙원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의 많은 이야기들과 족장사 등에 해당된다. 성경 책들의 진정성 여부까지도 자유롭게 관찰되어야 한다. 모세오경이 모세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고 다윗에게 돌려지는 많은 시편들이 다윗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고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옮긴이 주: 이사야서 40-66장 = 소위 제2이사야)이 첫 번째 부분과는 다른 저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성경의 영감은 확실하다. 그러나 저작권의 진정성은 열려 있는 문제다. 하나님의 책으로서 성경은 모든 비평을 능가하지만, 인간의 책으로서 다른 모든 문헌과 마찬가지로 역사비평학적 방법과 표준에 의해 연구될 수 있다."(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1, Prolegomena, 412-13)


역사비평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전통적인 저작권 진정성 주장에 대해 유연한 헤르만 바빙크?

역사비평학을 저주하고 전통적 저작권 진정성 주장을 신성불가침으로 수호하는 우리나라 "정통" "보수" "개혁주의"에서 그를 표준적인 신학자로 생각한다고?

그러면서도 역사비평학은 사탄의 전략전술이요 자유주의의 찌르는 가시인가?


한 마디 더 해두겠다. 근본주의 신화의 신봉자들 가운데 어떤 부류는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하는 최악의 자유주의 신학자요 이단선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한다고? 과연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읽어는 봤는지, 읽었다면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성과 역사비평학 문제에 대한 사고방향에 있어서 바르트와 바빙크는 서로 기본기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 칼 바르트를 그토록 저주하는 자들이 바빙크에 대해서는 순한 양처럼 침묵하고 있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편가르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시겠는가?


2014. 4. 2. 14:27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1. 고대와 중세까지 이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인 답변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고대교회 문헌이나 오리게네스를 필두로 한 (특히 동방) 교부들 다수의 답변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동방교회에서 먼저 주장했고, 동방의 신학적 영향력 아래 서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러한 답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그릇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악마적) 발명'이라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면서 이 주장의 외연을 자유주의로 좁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으리라는 주장을 "현대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대교회의 문헌증거들을 통해 쉽게 반박되는 단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사후 구원 기회에 한계가 없다는 희망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고대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방식처럼 단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무런 형벌 없이 구원 받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사후에 모든 사람은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에 힘입어 혹독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정화의 과정은 이미 현세에서 고통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현세(가 지옥 같을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되었다.


요컨대, 사후 구원 기회에 대한 고대교회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 은혜의 승리가 그 범위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달리 표현하면, 고대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지옥 세력의 일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승리하시어 굴복시키셨다. 지옥은 비어있다!


2.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희망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관념은 인정하나, 아무나 다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악인들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위협과 경고는 다 뭐란 말인가? 구원 받을 자는 은혜의 선택을 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옥이 비어 있다고? 천만에!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구원의 희망에 전거를 제공한다고 믿어졌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노아 안에서, 환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지옥이 비어 있으리라는 대중적 희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불신자들일지라도 - 그들 자신의 덕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확실한 인간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적어도 개혁교회 이외의 서방전통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온 내세관념이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고 죄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방교회에 퍼져 있던 또 다른 대중적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사후 어떤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purgatorium)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소위 정화의 가능성이 그레고리우스 1세를 거치면서 중세서방에서는 자명한 믿음의 대상인 연옥으로 굳어졌다. 중세 연옥설은 동방교회의 내세관과 어떻게 다른가?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 따르면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정화의 과정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예외없다. 여기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가 철저하게 미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지옥과 천국은 구분되나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화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연옥이라 일반적으로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세는 (농노에서 교황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적 변주를 거치면서 지옥-연옥-천국이라는 서로 구분되고 단절된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내세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는 지옥에는 악인이, 연옥에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보통사람이, 천국에는 선인이 들어가도록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러한 서방중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동방교회에서도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중세서방에서는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 지상교회 신자들의 행업의 공로를 통해 연옥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동방교회에 다르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과정은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동방교회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의 행업에서 나오는 대리적 보속이나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같은 서방의 중세적 관습은 낯설고 새롭다.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서는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가 내세의 모든 영혼들에게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에 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 내세론에서는 그리스도 지옥강하가 "천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운동"(토마스 아퀴나스)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점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았던 악인들에게는 지옥강하의 발생을 인지할 수 있을 뿐 구원의 효력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보속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들이 그 공로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되리라는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 더욱이 구체적으로 드라마화되기까지 한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은 중세말기에 이르러 거의 집단 히스테리 수준의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저 참담한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 남용의 광기는 이 집단 히스테리의 현세적 귀결이었다. 그 누가 두려운 연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라, 지옥만 만원인 게 아니다. 연옥도 만원이다!!


3.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광신적 연옥관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사람이 어딜 가냐고? 연옥밖에 없지 않겠냐고? 바로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약성경, 특히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 바울의 구원론을 못 알아들은 소치이다! 실로 '불쌍한 연옥영혼들'을 건질 산 자들의 잉여공로를 운운하는 연옥은 그리스도의 대속효과를 폐기하는 무서운 사탄의 발명품이다! 불쌍한 현세의 영혼들아, 연옥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중세 연옥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저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인 발언을 부정하면 안 될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서방신학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관심 두기 보다 현세의 삶을 하나님께 자리매김하도록 권면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취지와 다르게 중세 연옥론은 현세의 삶을 단지 연옥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중간과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 표상을 내세에 대한 무익한 공상으로서 거절하고 현세에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독려했던 것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내세에 관한 사고방향은 비교적 온건한 루터파와 보다 철저한 개혁파의 그것으로 나뉘었다. 루터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멜란히톤은 루터와 일정부분 교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 때 가장 뛰어난 이교도들을 구원하셨으리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생각은 이후 루터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구원론은 연옥의 잔재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개혁파는 사후구원가능성에 관해 교회역사상 어느 교회전통보다도 단호하고도 강경한 어조로 부정해 왔다. 이미 쟝 칼뱅의 베드로전서 3장 19절 주석은 - 비록 동일한 형태로 답습되지는 않더라도 - 이후 개혁전통에서 되풀이될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웅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내세의 망대에 임하셨다. 이 망대에는 내세에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대망하던 구약족장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의 광채와 효력을 통하여 족장들을 구원하셨으나, 악인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셨다. 그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예외 없이 철저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종교개혁의 사고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가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해 절반만 이기셨는가?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옥 권세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영혼들 대부분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일체의 사후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그릇은 천하게 여길 자유가 없단 말인가?" 지엄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이중예정론을 통해 관철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일군의 사람들은 선택되기로,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구원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르트 시노드의 소위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도 강경한 형태로 갈무리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와 지옥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계시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모든 신학적 사고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중예정 교리를 통해 충족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르침 없이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의지는 과연 충족되는가? 이중예정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지 않는가? 과연 그런 폭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성경의 하나님인가? 세상 죄를 모두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대신하여 버림 받으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그를 그렇게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경륜이 온 우주에 이루기가지 만유에 편만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자비롭고 온유한 성령님 -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이중예정이 말하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정의의 차원을 계시하지 않는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너무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만을 관철시키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적 정의'(틸리히),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처음부터 다 다시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의 생각처럼 지옥이 만원일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개혁전통에 익숙한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까지 확정적인 상태까지는 못 된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지옥을 포함한 내세표상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실체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몇 갈래의 서로 다른 사고들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내세표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해당문맥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영원 지옥형벌을 강변하고자 할 때 그런 면밀한 검토보다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고 단정짓는 강박적인 해석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성경이 영원한 지옥형벌을 인간 대부분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형벌에 관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불붙는 듯 상처 입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예언자적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요나의 예언 목적이 앗수르 사람들의 회개에 있고 멸망에 있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의 지옥형벌에 대한 위협과 경고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교회에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의지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세상과 지상교회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에 속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 모두, 혹은 대다수를 구원하셔야 하거나, 거꾸로 소수, 혹은 극소수만을 구원하셔야 할 신학적 필연에 갇혀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은 죄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자유로운 주권과 경륜에 따라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에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었고, 지옥의 밑바닥이 드러난 바 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자, 이제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를 동원해서 뭔가 단정적으로 답변하면 아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변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그런 답변들은 교황론이나 마리아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연역으로 정당화된 불필요한 진리의 곁가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방교회의 구원론이나 최근 만인구원론으로 기울고 있는 최근 서구신학의 내세론적 사고(몰트만, 판넨베르크, 존 로빈슨, 칼 라너, 폰 발타자르, 한스 큉 등) 역시 약점이 있다. 모두가 예외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역시 신학적 필연의 연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위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에 대한 물음에 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당신의 독생자가 모두 겪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의 경륜을 확증하셨다.

셋째, 따라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모두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영원한 구원의지를 확증하신 하나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그것은 온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하시든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견줄 수 없이 공정하고도 자비로운 판결이 될 것이다.

넷째,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내어 주시기까지 확증하셨다는 것을 바로 산 자인 당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응하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다!

2011. 5. 18. 20:16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이정석 교수님의 안타까운 부고를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미인박명이라더니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가.
20년은 우리 곁에 더 계셨어야 할 분이었는데... 

언젠가는 꼭 가까이서 뵙고 말씀 나눌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던 분인데 너무나 아쉽다.

이제 후학들에게 짐을 나눠주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빈다.


내게 있어서 이정석 교수님은 그 행보가 늘 궁금하고 눈여겨 보게 되는 어른이었다.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국교회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당신이 자란 교단의 지배적 신학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할 용기를 발휘했던, 정말 국내에서 드물게 정직한 신학자이셨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정석 교수님의 출신교단인 예장합동은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의 원흉'(서철원)이라고 매도해 온 교단이다. 

칼 바르트는 세계교회에서, 소위 보수주의 교회에서 정말 자유주의의 원흉으로 통하고 있는가? 이정석 교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셨다. 

교수님은
총신대에서 기독교철학으로 학사과정을 하셨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하셨다. 그리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세속화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칼 바르트 연구를 수행하여 박사학위를 하시고, 미국 풀러신학교 등에서 조직신학교수로 봉직하다가 몇 해 전 귀국하여 최근에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부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라면 총신대와 고신대 신학자들의 학문적 본향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곳들이다. 특히 화란 자유대학교는 국내 보수신학의 두 아이콘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활동했던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이정석 교수님은 바로 이곳에서 칼 바르트의 성화론으로 박사학위를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성화론은 자유주의의 원흉스럽다'이라는 사상비판을 잘 해서 박사학위를 하셨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칼 바르트의 성화론이 세속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논지였다. 이와 같은 이정석 교수님의 학문적 여정에 대해 교수님 당신자신의 글을 옮겨보자.

"......(화란대학교에서: 인용자) 나를 지도하는 환 에그몬드교수는 화란, 독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학회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실로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구해보고 싶은 신학자임에 틀림없었으나, 한국 보수신학자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개척분야로서 위험부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실로 총신대에서 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르트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서 바르트는 보다 균형있게 언급되었으며, 특히 바르트 아래서 친히 수학했던 클로스터교수는 그의 비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조건적 바르트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그와 한 학기동안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I/2를 읽으면서 개인지도를 받는 동안 나의 바르트에 대한 편견은 점차 제거되고 그의 신학이 주는 깊은 통찰력과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되었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위 인용문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한국에서 보수주의신학의 아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칼 바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칼 바르트를 최악의 자유주의자라고 터무니없이 매도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바르트에게 직접 배웠던 신학자가 지도교수였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는 아예 지도교수가 유럽의 바르트학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학자였다. 적어도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보수계통 해외신학교의 대표주자라고 할 두 학교에서 칼 바르트는 신학적 대화의 중심화두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근본주의의 기수역할을 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어떨까?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하신 복음주의 신학자 한 사람의 글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의 이름은 이 블로그에서 가끔 언급한 바 있는 케빈 밴후저다. 공공연하게 안티바르트를 부르짖었던 반틸의 영향력이 강력한 학교에서 신학의 형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 보면 칼 바르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요전거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칼 바르트를 기독교사상사에 몇 안 되는 신학의 거인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있기조차 하다.

이것이 세계신학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라든지, 세계신학이 배교와 변절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사고의 길로 들어설지 여부는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자여서 소위 '막 나가는' 진보신학계에서나 읽혀지는 게 아니라, 소위 보수신학계의 큰 산맥을 이룬다고 자부하는 저명한 신학교들에서도 칼 바르트가 내놓았던 복음적 통찰들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세계신학계를 더 둘러보면 지금은 바르트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칼 바르트가 남기고 간 신학적 통찰을 재해석하고 심화함으로써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장합동측은 아직도 외국신학교에서 멀쩡하게 바르트를 전공하고 돌아온 교단신학자들까지 안면몰수한 채 바르트를 매도하고 있고, 총회출판사를 통해 한종희 목사의 칼 바르트 신학비판이라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그 내용이야 바르트의 신학정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곡해와 아전인수로 가득하다. 국내 유수의 대교단에서 이런 참 낯 뜨거운 내용이 아직도 가르쳐지고 있다면 참 딱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신학이 자기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교권의 명시적, 암묵적 압력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바르트를 입에 올렸다가 사상시비로 교수직에서 축출된 분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예장합동만이 아니라 합신과 같은 합동계열의 중소교단도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새삼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귀하고 벌써부터 그립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탁한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가며 신학을 하셨으니 가히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자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래 글은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뤄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박사학위논문주제로: 인용자) 바르트를 연구하고저 했던 이유는 바르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진보계열의 조직신학에서는 바르트가 중심인 반면 보수계열에서는 바르트가 전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대화와 화해를 이룰 수 없었다. 바르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대가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마음 짠하게 하는 말인가...

나는 이정석 교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은 한반도 분단의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움받는다. 바르트 신학의 참된 함의를 덮어버리려는 온갖 황당무개한 곡해와 매도가 걷힌다면 한국교회는 아마도 한반도의 잘라진 허리를 잇는 소임을 감당하게 되지 않을까!

故 이정석 교수님을 주님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주님께서 한국의 보수신학계에서 이런 가인(佳人)을 만나볼 날을 주시기를 고대한다.
2011. 5. 14. 12:36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한국교회에는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 등을 자기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신학도들이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하면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곤 한다. 따라서 소위 개혁주의신학에 대해 개념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개혁주의신학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범위의 뜻을 지닌 표현이다.

1. 로마가톨릭신학과 대비되는 의미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종교개혁 원리를 받아들이는 개신교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에(F L Cross &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formed Churches' 항목) 이 경우 개신교신학 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1.1 개혁신학의 영향권: 아울러 아래 2나 3의 개혁교회전통의 영향을 받아 그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개신교의 교파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루터교신학과 대비되는 칼뱅과 스위스종교개혁전통: 이 표현을 쓸 권리가 있는 교회전통은 해당 종교개혁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에서부터 우리나라 장로교회에 이르는 개혁교회 전통 일체이다. 대체로 다른 신학전통들과 마찬가지로 특정전통에 대한 배타적 권리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현대성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공교회적 신학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칼뱅 이후 개신교전통에서 슐라이어마허와 칼 바르트, 몰트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거인들을 배출해왔다. 이런 의미의 개혁신학에 관한 논의의 예로는 루카스 피셔가 편집한 The Reformed Family Worldwide나 미하엘 벨커가 편집자로 참여한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에서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3의 그룹과도 함께 대화하고자 한다.(*1)

3.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의 전통: 종교개혁자 칼뱅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원조보수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이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2의 의미에서 '개혁신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가짜네, 개혁신학이 아니네 공격하는 일이 잦다. (*1)

이들의 공격패턴은 대체로 자기들이 신봉하는 아무개 신학자를 비롯한 '(17세기) 개혁신학'(과 그 후예들의 신학)에서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개는 감히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 개혁교회 출신이라도 '개혁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신학'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베자와 투레틴, 영국의 청교도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17세기 개혁정통주의신학은 20세기초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까지 이어져 왔고, 미국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따르는 루이스 벌코프와 반틸, 워필드, 찰스 핫지, 존 머레이 등의 구프린스턴학파와 그 후예들에게서 존중되어 왔다.

이 가운데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정통주의는 실은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세계교회에 통해왔음에도 '진짜 개혁신학'을 한다는 이들이 언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미계 장로교회전통과 거기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통을 통해 소위 '원조보수 개혁주의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실체가 바로 이 그룹이다. 폴 틸리히가 정의한 그대로, 현대의 상황을 신학화하기를 거부하고 일체를 정죄하면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고정되어 되풀이하고 흉내내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2)

근본주의 신학은 분명 신실한 최선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통', '원조보수'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 외에 다른 생각을 진리의 적으로 돌리는 호전성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자연히 교리주의와 교회분열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나마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탁월하고 차원높은 개념적 세련성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 놓쳐 버리면 자기중심적인 분파주의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롯한 온갖 착잡한 기형적 현상까지 배태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의 의미에서 개혁주의 원조보수를 별 반성없이 계속 부르짖는 분들은 내가 근본주의자라는 걸 알아주시오 자랑스레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개혁주의를 들먹이면서 개혁주의에 근본주의의 이미지까지 착색시킴으로써 다른 개혁신학전통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는 근본주의자라고 아예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켜 당당히 나서시라고 권해드린다.

[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