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24. 23:54

그리스도 지옥강하와 에녹 전승

1. 그리스도 지옥강하는 사도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신경 같은 서방신경에서 나타나는 신앙조항이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한글판 사도신경에서는 19~20세기 미국감리교회의 영향으로 이 조항이 빠져 있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의 후예인 미국연합감리교회는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이 조항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여 이 조항을 다시 회복했다. 따라서 이 조항이 빠진 사도신경을 갖고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한국개신교가 유일한 셈이다. 한국교회는 이 조항을 회복해야 마땅하다.


2.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전거로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든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 개역개정)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옥"이 지옥/하계이고, "가셨다"는 것은 하계강하, 즉 지옥으로 내려가심을 뜻하며, "옥에 있는 영들"은 지옥/하계에 떨어진 죽은 자의 영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3세기 동방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서 시작되었고, 동방교회의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되었다. 서방교회 역시 이 해석을 큰 틀에서 받아들여 왔다.


이 해석의 난점은 여러가지다. 우선 신약성경 헬라어 용법의 측면에서 난점이 있다.

- "옥"은 지옥 또는 하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 않았다.

- (형용어 없는) "영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이지 않는다.

- "가셨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강하/하강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니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베드로전서 3장 20절)이 언급되어 있는가 라는 물음이 이 해석방식의 중요한 난점이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는 왜 안 되며, 모든 시대의 악인들은 왜 안 되겠는가? 이 해석은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하기 보다는 모든 시대의 악인들에 대한 두 번째 구원기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약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울러, 이러한 해석의 비약에 베드로전서 4장 6절["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이 근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 비록 오랜 해석전통을 보유한 읽기이기는 하나 -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언급된 "영으로는/육으로는"의 대조를 헬라철학적 인간론으로부터 잘못 읽어 들어간 결과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다. 즉, "영으로는/육으로는"이라는 대조는 바울에게서도 이미 나타났던 대조이므로, 이를 다르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본디 그리스도 하계강하나 불신자의 사후구원기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전통적인 이 구절의 해석은 본문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3.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서방교회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서방교회에는 동방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하계에 강하하셔서 (사실상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에게 이와 같은 에보디우스가 질문한 이와 같은 견해를 비판하면서, 성육신 이전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 시대 악인들에게도 환상으로 나타나곤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해석과는 별도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전통적인 그리스도 지옥강하 관념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테오도르 베자 이후 개혁 정통주의를 통하여 삭감되고 수정된 형태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유력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란 문자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징적으로는 버림받은 죄인들의 번민을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민을 가리키며,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노아시대에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 정통주의의 그리스도 지옥강하론은 루터나 칼뱅의 이해와도 상당부분 다르다. 


- 루터와 칼뱅은 버림받은 자의 정신적 번민을 지옥강하로 해석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동기를 아울러 언급했다. 

-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관하여는 하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칼뱅은 구약 족장들로 구원의 범위를 제한했으나 구약 족장들이 그리스도의 하계강하를 대망하면서 "망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 루터나 멜란히톤의 경우는 하계강하를 통한 사후구원가능성까지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 정통주의는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전복한다.


- 개혁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정신적 번민의 요소는 계승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삭감된 형태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던 바, 고대로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중세에도 유행한 신화적 내러티브의 한 요소였던 승리의 하계강하라는 동기는 배제했다.

- 그리스도 지옥강하나 베드로전서 3장 19절 해석에서 하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이 힘을 얻게 되었다.

- 하계강하를 통한 사후구원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의하여" 교회 바깥에서도 구원 받을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개혁 정통주의는 루터란 정통주의나 로마카톨릭, 또는 동방정교회와 같은 타 교회전통들과 달리, 그야말로 전례 없이 배타적인 논조로 일체의 사후구원가능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 정통주의의 해석방식은 중세적인 내세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자연히 이러한 해석방식은 전통적 해석의 추종자들에게 많은 저항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도도한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이 탈신화적인 합리적 해석방식은 개혁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감리교의 창설자 존 웨슬리도 이 해석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웨슬리가 개혁교회와 다른 점은 신경의 권위와 세부항목에 대한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였다. 이리하여, 존 웨슬리가 영국성공회의 39개 신조로부터 24개 항으로 요약해 준 신조요약에는 신경의 권위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고,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도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여전히 자신이 즐겨 시행했던 아침/저녁 기도회에서 사용되는 사도신경을 전통적인 버전으로 암송했다.


미국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요약신조에 1개 항을 덧붙여 25개 항으로 이루어진 "종교신조"를 신앙적 표준으로 삼았다. 한편, 존 웨슬리가 시행했던 아침/저녁 기도회는 얼마 가지 않아 미국감리교회에서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결과적으로 미국 감리교회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탈락되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을 삭제한 것은 존 웨슬리가 아니라 미국감리교회였으며, 그것도 우발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어권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번역했던 한국초대교회의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삭제된 경위는 그 출발점에 미국감리교회의 관행과 개혁교회의 특정한 해석전통이 있었다.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한국에 파견된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협의과정에서 본국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을 뺀 버전의 사도신경을 배운 감리교 선교사들의 의견이 개혁교회의 해석전통을 배경으로 했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 삭제론자들이 내세우는 신학적 논거는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개혁정통주의-웨슬리 전통의 해석노선에 의존해 있다. 본디 미국감리교회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탈락된 과정이 일정부분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면,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나 현대의 지옥강하 조항 삭제론자들은 이 탈락을 나름의 신학적 명분을 통하여 보다 의식적으로 주장한다.


이 해석의 강점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특정 내세 관념을 전제하지 않아도 좋고,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실존적인 불안과 번민의 문제를 십자가 사건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개혁교회의 그리스도 지옥강하 이해는 트렌트공의회를 통하여 로마카톨릭교회의 저주를 받았으나, 오늘날 로마카톨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지도급 신학자들(라칭어, 뮬러 등)이 정신적 번민 모티브를 통하여 지옥강하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약점은 여전히 왜 하필 노아 시대만이 언급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해 정확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문제적인 것은 이와 같은 특정 해석을 근거로 세계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경 조항을 뜯어고치는 것은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세계교회 지체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오늘날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관한 성경주석적 논의는 에녹 전승을 배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데 대체적인 중론이 모여져 있다. 즉,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하필 노아 사건이 언급되는 까닭은 베드로전서 기자가 에녹전승, 특히 에녹1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베드로전서 기자가 에녹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첫째,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에녹/노아전승이 잘 알려져 있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아파메나 키보토스'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키보토스'는 방주(κιβοτός)와 음이 같다. 따라서 아파메나 키보토스는 고대세계에 방주의 노아 일행이 정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따라 소아시아에는 노아와 파국을 예언한 그의 선조 에녹에 대한 각종 전승이 전해졌고, 노아는 "의의 전도자"로서 이방세계에서도 존경받고 있었다.


둘째, 베드로전서 기자 자신이 에녹 1서와 같은 묵시문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에녹1서는 하나님의 사람 에녹이 후손 노아 시대에 있을 홍수심판을 예언했다는 신구약중간기 문헌으로서, 신약성경의 배경전승을 이룬다. (베드로후서 2:4이하; 유다서 4;14이하)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경우,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에녹이 반역한 천사들에게 예고했던 최종적 심판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이 반역한 천사들은 노아 시대에 활동하면서 땅위 사람들을 미혹했던 악한 영들이다. 그러니까 "옥에 있는 영들",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의 정체는 바로 이 반역한 천사들이며, 이 반역한 천사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관계하여 낳은 거인족 네피림을 가리킨다.[각주:1] 그리스도는 부활 이후 "옥에 있는 영들", 즉 "노아시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들을 굴복시키셨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전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세례와 노아 시대 대홍수로부터의 구원이 견주어진다. 노아가 당대의 세속적 무관심과 멸시를 견뎌낸 뒤에야 방주의 구원에 이르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정사와 권세의 박해를 겪어내고서야 약속된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이 구원의 여정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범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사와 권세와 악한 천사들에 의해 죽기까지 고난을 겪으셨으니, 결국은 그들에게 부활승리를 선포하셨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따라서 베드로전서는 성도들이 모든 고난을 담대하고도 의롭게 겪어낼 것으로 권면한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 개역개정)


소위 지옥강하에 관련하여 본 구절은 강하가 아니라 오히려 상승을 말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가서(πορευθεις)"는 신약헬라어에서 하강을 지칭한 적이 없고 거의 언제나 상승을 뜻할 때 나타나는 표현이다.

-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22절은 수미쌍관(inclusio)구조를 이룬다. 즉, πορευθεις는 22절에도 다시 나타나서 πορευθεις의 의미를 명확하게 다시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신 곳은 '아래'가 아니라 "하늘"이다.

- 신구약중간기에서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반역한 천사들의 형벌장소 내지 집결지는 하계가 아니라 궁창으로 생각되었다.

- 에녹1서에서도 에녹이 반역한 천사들에게 최종적 심판을 예고하는 장면은 하계가 아니라 하늘의 형벌장소이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5. 그렇다면 그리스도 지옥강하는 성경에 없는 후대의 신화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지옥강하의 관념은 신약성경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전제되어 있다.


- 요나의 표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신화적 존재인 바다괴물을 통하여 스올강하, 즉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심을 예고한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났다는 마태복음서의 기록은 십자가 대속의 효력이 죽음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으로부터 십자가 죽음 이후 십자가 대속의 효력이 죽음의 세계에까지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이러한 죽임당하신 그리스도의 드라마에서 절정에 해당되므로, 넓은 의미에서, 혹은 간접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전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음 이후 토요일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의 이해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 아래 얽매여 있었던 시간이 아니라,  (고대교회와 중세교회와 루터와 칼뱅과 루터교회의 이해처럼) 사망권세에 대하여 거두신 생명의 승리를 선언하는 승귀의 시간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의 토요일(Easter Saturday)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고난주간의 성 토요일은 세상의 눈에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 아래로 들어간 시간이며, 이런 한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실체는 사망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이며, 이런 의미에서 부활의 토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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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참고문헌] Bo Reicke, The Disobedient Spirits and Christian Baptism (1946); Werner Bieder, Die Vorstellung von der Höllenfahrt Christi (1949); Wilhelm Maas, Gott und die Hölle (1979); Rémi Gounelle ed. La descente du Christ aux enfers (2004); Markwart Herzog hrsg., Höllen-Fahrten (2006); Hilarion Alfeyev, Christ the Conqueror of Hell (2009); 그외 베드로전서 주석들; 노종문.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왜 음부행이 빠져있을까?” 『기독교 사상』 2003 no.9, 214~235.; 강창우,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의 지옥강하" (장신대 대학원 신학석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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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궁정에서 여호와 주변을 두른 천사들을 가리키므로, 이것은 신구약중간기의 성경이해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 자체의 이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뱅은 네피림이 반역천사의 후손이라는 창세기 6장 2절의 해석을 "고대의 꾸며낸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네피림이 경건한 셋의 혈통과 불경건한 가인의 혈통에서 나온 후손들이라는 해석을 따랐다. 이것은 칼뱅의 성경해석이 합리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은 개혁 정통주의, 예컨대 청교도 주석가 매튜 헨리에게도 계승되었다. 네피림=경건한 자들의 잡혼 결과라는 해석이 한국교회 회중에게 마치 정설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까닭은 칼뱅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해석이 근대에 영향력 있는 해석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칼뱅이나 개혁주의, 또는 이를 답습한 주석성경에 나오는 대중적 해설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오늘날 주요한 창세기 주석가들은 셋 후손 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회중들이 아직도 접하지 못했다는 것은 설교자들이 주어진 책임을 유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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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4. 12:36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한국교회에는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 등을 자기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신학도들이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하면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곤 한다. 따라서 소위 개혁주의신학에 대해 개념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개혁주의신학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범위의 뜻을 지닌 표현이다.

1. 로마가톨릭신학과 대비되는 의미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종교개혁 원리를 받아들이는 개신교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에(F L Cross &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formed Churches' 항목) 이 경우 개신교신학 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1.1 개혁신학의 영향권: 아울러 아래 2나 3의 개혁교회전통의 영향을 받아 그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개신교의 교파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루터교신학과 대비되는 칼뱅과 스위스종교개혁전통: 이 표현을 쓸 권리가 있는 교회전통은 해당 종교개혁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에서부터 우리나라 장로교회에 이르는 개혁교회 전통 일체이다. 대체로 다른 신학전통들과 마찬가지로 특정전통에 대한 배타적 권리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현대성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공교회적 신학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칼뱅 이후 개신교전통에서 슐라이어마허와 칼 바르트, 몰트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거인들을 배출해왔다. 이런 의미의 개혁신학에 관한 논의의 예로는 루카스 피셔가 편집한 The Reformed Family Worldwide나 미하엘 벨커가 편집자로 참여한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에서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3의 그룹과도 함께 대화하고자 한다.(*1)

3.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의 전통: 종교개혁자 칼뱅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원조보수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이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2의 의미에서 '개혁신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가짜네, 개혁신학이 아니네 공격하는 일이 잦다. (*1)

이들의 공격패턴은 대체로 자기들이 신봉하는 아무개 신학자를 비롯한 '(17세기) 개혁신학'(과 그 후예들의 신학)에서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개는 감히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 개혁교회 출신이라도 '개혁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신학'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베자와 투레틴, 영국의 청교도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17세기 개혁정통주의신학은 20세기초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까지 이어져 왔고, 미국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따르는 루이스 벌코프와 반틸, 워필드, 찰스 핫지, 존 머레이 등의 구프린스턴학파와 그 후예들에게서 존중되어 왔다.

이 가운데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정통주의는 실은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세계교회에 통해왔음에도 '진짜 개혁신학'을 한다는 이들이 언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미계 장로교회전통과 거기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통을 통해 소위 '원조보수 개혁주의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실체가 바로 이 그룹이다. 폴 틸리히가 정의한 그대로, 현대의 상황을 신학화하기를 거부하고 일체를 정죄하면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고정되어 되풀이하고 흉내내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2)

근본주의 신학은 분명 신실한 최선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통', '원조보수'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 외에 다른 생각을 진리의 적으로 돌리는 호전성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자연히 교리주의와 교회분열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나마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탁월하고 차원높은 개념적 세련성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 놓쳐 버리면 자기중심적인 분파주의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롯한 온갖 착잡한 기형적 현상까지 배태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의 의미에서 개혁주의 원조보수를 별 반성없이 계속 부르짖는 분들은 내가 근본주의자라는 걸 알아주시오 자랑스레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개혁주의를 들먹이면서 개혁주의에 근본주의의 이미지까지 착색시킴으로써 다른 개혁신학전통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는 근본주의자라고 아예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켜 당당히 나서시라고 권해드린다.

[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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