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밴후저 Kevin J Vanhoozer'에 해당되는 글 4건
- 2012.07.07 이찬수 목사님의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을 환영하며 1
- 2011.05.18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 2011.04.29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 2011.01.25 신앙의 항체
이찬수 목사님의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을 환영하며
이찬수 목사님이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분당우리교회의 대형교회화를 포기하고 잘 훈련된 신자들을 지역교회로 파송하는 쪽으로 전환해 나가겠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한 사람의 개신교인으로서, 또한 교역자로서, 신학도로서, 요 며칠 사이 무척 기쁘다.
한 10년 전쯤 청소년 사역을 말끔하게 잘 하시는 스타성 있는 목사님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야말로 괄목상대, 사역자로서 놀라운 발전과 성숙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적 입지조건이 좋은 지역에서 교인수가 늘어났다는 외적인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얄팍한 소영웅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층 깊어진 사귐, 매우 치열해진 목회적 문제의식, 상당히 탄탄한 주석적, 신학적 근거지움 등을 통해 당신 자신의 표현을 빌면 바야흐로 '사역의 전성기'를 맞이하신 것으로 보여서 나 자신에게도 마음 뿌듯하면서도 강력한 도전이 되었다.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이야말로 그가 사역의 진정한 전성기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 故 옥한흠 목사님의 말년 발자취를 이어가는 듯한 목사님의 신선한 행보는 참으로 그가 속한 예장합동교단에도 영광의 면류관일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도 그야말로 '소금과 빛' 같은 건강한 촉매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케빈 밴후저의 말대로, 교회 안에 자본주의 원리가 복음의 원리를 대체해 버리는 현상이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다. 내 몸집을 어떻게든 불려서 살아남아보겠다는 '반동적 자본주의의' 못된 심보가 복음주의의 승리와 부흥과 성장이라는 미명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숨막히는 현실인데, "이게 과연 옳으냐?"라는 합당한 질문을 이찬수 목사님과 같은 주류 대형교회 목사님이 던지고, "그렇지 않다!"면서 구체적으로 자기 목회현장에서 결단할 수 있었다는 사실, 이것은 정말 성령의 역사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주류 대형교회 담임목사라는 자리는 혼자만의 자리가 아니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대변자로서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형교회의 아바타를 자처한 어떤 분 덕분에 지워진 포스트에서 조금은 체념 섞인 논조로 그래도 우리나라 대형교회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본다고 적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그것도 신학적 근본주의의 아성인 합동교단에서 일어나다니,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시다!
그렇다,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부디 이찬수 목사님의 귀한 뜻이 그가 목회하시는 교회의 장로님 사이에서도 환영받게 되기를 기원드린다. 그것이야말로 그 교회의 진정한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멋진 비움의 사건이 한국교회에 가득히 퍼져 나가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믿음의 지평 > 개혁교회와 공교회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근 개신교 교세와 근본주의의 향배 (개정판) (1) | 2012.10.08 |
---|---|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4) | 2012.09.11 |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0) | 2011.08.13 |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0) | 2011.05.18 |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0) | 2011.05.14 |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미인박명이라더니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가.
20년은 우리 곁에 더 계셨어야 할 분이었는데...
언젠가는 꼭 가까이서 뵙고 말씀 나눌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던 분인데 너무나 아쉽다.
이제 후학들에게 짐을 나눠주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빈다.
내게 있어서 이정석 교수님은 그 행보가 늘 궁금하고 눈여겨 보게 되는 어른이었다.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국교회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당신이 자란 교단의 지배적 신학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할 용기를 발휘했던, 정말 국내에서 드물게 정직한 신학자이셨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정석 교수님의 출신교단인 예장합동은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의 원흉'(서철원)이라고 매도해 온 교단이다.
칼 바르트는 세계교회에서, 소위 보수주의 교회에서 정말 자유주의의 원흉으로 통하고 있는가? 이정석 교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셨다.
교수님은 총신대에서 기독교철학으로 학사과정을 하셨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하셨다. 그리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세속화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칼 바르트 연구를 수행하여 박사학위를 하시고, 미국 풀러신학교 등에서 조직신학교수로 봉직하다가 몇 해 전 귀국하여 최근에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부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라면 총신대와 고신대 신학자들의 학문적 본향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곳들이다. 특히 화란 자유대학교는 국내 보수신학의 두 아이콘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활동했던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이정석 교수님은 바로 이곳에서 칼 바르트의 성화론으로 박사학위를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성화론은 자유주의의 원흉스럽다'이라는 사상비판을 잘 해서 박사학위를 하셨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칼 바르트의 성화론이 세속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논지였다. 이와 같은 이정석 교수님의 학문적 여정에 대해 교수님 당신자신의 글을 옮겨보자.
"......(화란대학교에서: 인용자) 나를 지도하는 환 에그몬드교수는 화란, 독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학회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실로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구해보고 싶은 신학자임에 틀림없었으나, 한국 보수신학자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개척분야로서 위험부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실로 총신대에서 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르트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서 바르트는 보다 균형있게 언급되었으며, 특히 바르트 아래서 친히 수학했던 클로스터교수는 그의 비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조건적 바르트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그와 한 학기동안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I/2를 읽으면서 개인지도를 받는 동안 나의 바르트에 대한 편견은 점차 제거되고 그의 신학이 주는 깊은 통찰력과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되었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위 인용문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한국에서 보수주의신학의 아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칼 바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칼 바르트를 최악의 자유주의자라고 터무니없이 매도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바르트에게 직접 배웠던 신학자가 지도교수였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는 아예 지도교수가 유럽의 바르트학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학자였다. 적어도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보수계통 해외신학교의 대표주자라고 할 두 학교에서 칼 바르트는 신학적 대화의 중심화두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근본주의의 기수역할을 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어떨까?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하신 복음주의 신학자 한 사람의 글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의 이름은 이 블로그에서 가끔 언급한 바 있는 케빈 밴후저다. 공공연하게 안티바르트를 부르짖었던 반틸의 영향력이 강력한 학교에서 신학의 형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 보면 칼 바르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요전거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칼 바르트를 기독교사상사에 몇 안 되는 신학의 거인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있기조차 하다.
이것이 세계신학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라든지, 세계신학이 배교와 변절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사고의 길로 들어설지 여부는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자여서 소위 '막 나가는' 진보신학계에서나 읽혀지는 게 아니라, 소위 보수신학계의 큰 산맥을 이룬다고 자부하는 저명한 신학교들에서도 칼 바르트가 내놓았던 복음적 통찰들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세계신학계를 더 둘러보면 지금은 바르트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칼 바르트가 남기고 간 신학적 통찰을 재해석하고 심화함으로써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장합동측은 아직도 외국신학교에서 멀쩡하게 바르트를 전공하고 돌아온 교단신학자들까지 안면몰수한 채 바르트를 매도하고 있고, 총회출판사를 통해 한종희 목사의 칼 바르트 신학비판이라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그 내용이야 바르트의 신학정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곡해와 아전인수로 가득하다. 국내 유수의 대교단에서 이런 참 낯 뜨거운 내용이 아직도 가르쳐지고 있다면 참 딱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신학이 자기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교권의 명시적, 암묵적 압력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바르트를 입에 올렸다가 사상시비로 교수직에서 축출된 분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예장합동만이 아니라 합신과 같은 합동계열의 중소교단도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새삼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귀하고 벌써부터 그립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탁한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가며 신학을 하셨으니 가히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자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래 글은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뤄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박사학위논문주제로: 인용자) 바르트를 연구하고저 했던 이유는 바르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진보계열의 조직신학에서는 바르트가 중심인 반면 보수계열에서는 바르트가 전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대화와 화해를 이룰 수 없었다. 바르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대가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마음 짠하게 하는 말인가...
나는 이정석 교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은 한반도 분단의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움받는다. 바르트 신학의 참된 함의를 덮어버리려는 온갖 황당무개한 곡해와 매도가 걷힌다면 한국교회는 아마도 한반도의 잘라진 허리를 잇는 소임을 감당하게 되지 않을까!
故 이정석 교수님을 주님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주님께서 한국의 보수신학계에서 이런 가인(佳人)을 만나볼 날을 주시기를 고대한다.
'믿음의 지평 > 개혁교회와 공교회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찬수 목사님의 대형교회화 포기선언을 환영하며 (1) | 2012.07.07 |
---|---|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0) | 2011.08.13 |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0) | 2011.05.14 |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0) | 2011.04.29 |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6) | 2011.04.15 |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최근 케빈 밴후저도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교회가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양태가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어떤가? 명목상으로는 개혁주의, 보수신앙,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한국교회의 실질은 개혁주의라기보다는 반공숭미주의요, 보수신앙이라기보다는 수구기득권신앙이요, 오직 내 생각으로만, 오직 내 신념으로만, 오직 미국의 은혜로만이 아닌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바로 실질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진짜 믿음의 현주소에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에 바로 나 자신부터 내 믿음과 삶의 명목상 명분이 아니라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살펴보고 정직하게 가늠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
'믿음의 지평 > 개혁교회와 공교회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0) | 2011.05.18 |
---|---|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0) | 2011.05.14 |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6) | 2011.04.15 |
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3) | 2011.03.29 |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4) | 2011.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