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26. 13:47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2)

노르웨이 테러사건에 대해 지난 포스트에서는 테러범 브레이빅에게서 통상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의 특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적 의미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반다문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그가 dokument.no에 올린 글모음과 노르웨이 언론기사들을 주로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범이 앤드류 버윅(Andrew Berwick)이라는 이름으로 유포한 1500여쪽 분량의 '2083 유럽독립선언문'은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이때문에 과연 정말 사실관계에 부합한 것인지 여전히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해서, 문제의 '선언문'을 구해서 검토해 본 결과 앞의 포스트에서 제기했던 필자의 주장을 상당부분 뒤집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 대한 의혹과 분노를 세상에 대한 악마시와 자유주의신학 단죄와 음모론, 그리고 수구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력행사로 푸는데 머물러 있지 않고 테러라는 행동으로 옮기는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라니, 불쾌감을 넘어 정말 놀라움과 전율마저 느껴졌다. dokument.no의 글모음에서 과대망상끼만이 풍겨나왔다면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이 '선언문'에서는 기괴한 정연함이 느껴졌다.

테러범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윤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하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선언문'의 쪽수를 나타낸다.)

1. 성경을 신비화, 절대화하고 자기 신념의 전거로 삼는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근본주의적 특징은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의 원천으로 보고 성경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며, 성경의 전거를 대어가며 자기 신념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점에 있다. 

- '남성들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성경을 읽기 보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역할이나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시대분위기'를 개탄한다.(28)
- 무슬림들에게 성경이 모독당했지만 기독교에서 별 반응이 없는 파키스탄의 사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한다. (428) 
- 꾸란에 견주어 성경이 문학적으로 더욱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블로거 Fjordman의 글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했다.(706f.) (자신은 Fjordman의 글을 자신에게 중요한 책 목록에 넣었다.(1407) 그러나 Fjordman가 2005년 이후 활동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2009년 이후 구체적으로 테러를 준비하면서 자신 혹은 자기 신념을 중요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예전에 쓰던 아이디를 일종의 멀티아이디로 언급했을 수 있다. 그가 '선언문'의 심화연구 파트에 실어놓은 성전기사와의 인터뷰에 나오는 성전기사도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1349ff.))
- 그리스도인의 '자기방어'의 성경적 정당성을 상당히 길게 주장한다.(1327-34) (여기서 말하는 '자기방어'란 무슬림의 공세에 대한 자기방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자의적인 취사선택이라는 근본주의 성경인용의 맹점을 그대로 답습했다.)
- 성경을 모독하거나 공격한 무신론자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서부터 볼테르와 맑스를 거쳐 도킨스에 이르는 인물들이 열거된다.(1341ff.) (근본주의에서 성경을 신비화하는 전형적인 설교내용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의 성경에 대한 집착은 성경영감론을 기독교의 시금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본주의과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구유럽전통의 모체로서의 기독교전통이며, 성경은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기보다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경외와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의 그것에 가깝다.

2. 성경의 왜곡과 변개를 주장한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근본주의적 특징은 성경이 원문에서 왜곡되고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는 현대성경이 가부장적 어휘가 아니라 양성평등적 어휘를 사용하고, 문자적 일치가 아니라 역동적 일치, 즉 문자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 아니라 뜻이 통하도록 옮기는 번역으로 자기 해석과 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왜곡되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들, 즉 서구인들의 뿌리는 불가타성경이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이며, 이것이 무슬림에 대항하여 자기방어를 행사하는 기독교세계를 대변하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1137)

그러나 1611년 흠정역 성경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근본주의 집단 가운데서도 이단시되는 특정한 부류의 주장에 국한된다. 게다가, 흠정역과 무슬림 대항을 연관짓는 것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원문판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1611년판 흠정역 성경을 절대시하는 그룹들의 주장과도 다르며, 더더군다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것과 아무런 역사적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브레이빅이 이들의 주장을 인터넷을 통해 접한 뒤에 자기 신념에 나름대로 갖다 붙이고 빼고 한 것으로 보인다.

3. 종교간 대화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진보적 어젠다를 비난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종교간 대화와 상대종교를 공존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각종 진보적 이슈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노동당 교회'가 된 현대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특히 1403등) 이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한다.

4. 예언에 대한 근본주의적 집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왜 하필이면 '2083년'인가에 대해 주목해 본다. 혹시 특정예언에 따라 시간표를 만드는 부류의 근본주의대로 기독교나 서구세계에 전해지는 소위 미래예언과 관련있는 게 아닐까? 이슬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브레이빅이 이슬람에 관한 예언에 따라 자신의 시간표를 짰던 것은 아닐까?

이슬람과 범유럽세계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언에 대한 집착을 물려 받았다면 찾아내게 되었을 예언가로 바바뱅가라는 이가 있다. 그는 이슬람이 서구세계를 석권하리라는 내용의 예언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달리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바바뱅가의 예언이 원용된 경우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시간표를 짜고자 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바바뱅가에 따르면 유럽은 2010년 11월에 시작될 제3차 세계대전에서 핵전쟁을 겪고, 핵전쟁 이후 이슬람과 전쟁을 하여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2043년에도 이슬람은 유럽을 지배하고, 이슬람에 대한 무장봉기가 이루어지며, 2066년에는 미국이 이슬람 치하의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2076년에는 계급없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2084년은 '자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브레이빅이 유독 2083년에 맞출 때 이 '예언'을 의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명확하게 브레이빅 자신의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근본주의 프레임을 따라 적용해 본 나의 추측임을 밝혀둔다. 

(4번을 제외하더라도) 이상과 같은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타입과 겹치는 면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점에 무게를 두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브레이빅 유형'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근본주의로서, 일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온전히 구분된다. 이점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5. 그가 (근본주의) 기독교를 (취사)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성 때문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의 컬트적 속성와는 거리가 멀다. 즉, 전형적인 근본주의는 성경으로부터(만) 취사선택한 신념체계로서 근본주의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배타적인 창이 되고자 하는 데 비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인 척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종교는 약한 사람의 버팀목일 뿐이다. 자신은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진 않았지만 거사를 치를 때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기독교는 "참호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다.(1344)
그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 기도나 성찬참여를 들고 있다.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음 이후에 내세가 있다는 믿음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1345)
아울러 그가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그룹과 연대하기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많은 민족주의 그룹이 기독교의 깃발 아래 싸우기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하긴 하지만, 기독교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하나로 묶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380ff.)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며 새삼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며 좋아하는 기독교안티와 이웃종교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당신들이 신봉하는 신념이나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신념체계나 종교든 실용적인 이유에서 악용될 수 있다.


6.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한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03f.)

이것은 dokument.no 글모음에서도 일관되게 나온 얘기다. 이 주장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범유럽주의에 대한 '실용적' 관심과 일맥상통한다.

7. 그는 자신을 템플러기사라고 지칭하면서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 지칭한다.  

문제의 '선언문' 표지에서부터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의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신을 Justiciar Knight Commander, Knight Templar Europe, Knight Templar Norway 등의 프리메이슨 칭호로 지칭했다. 앞의 포스트에서 지적했다시피 통상적인 근본주의자라면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포스트에서 소개했듯이 노르웨이 프리메이슨 측은 사건이 일어나자 브레이빅을 제명하고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서둘러 부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그는 2010년에서 2030년까지 '첫번째 국면' 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템플기사단그룹인 PCCTS에 개인이 가입의식을 치르도록 했다.(1113f에 가입의식이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템플기사단은 기독교의 '자기방어'를 위한 저항운동단체를 뜻한다.(1118) 저항은 비폭력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1121f.) 그는 '청년유럽운동'(1127)과 같은 전위조직을 통해 우익자유주의자, 기독교 극단주의 무장단체, 전투적 민족주의 등의 그룹을 묶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고 슬쩍 흘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 뒤에 뭔가 굉장한 배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위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느냐이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이라면 치를 떠는 것과 달리, 브레이빅은 프리메이슨 템플 기사단이 서구 기독교세계의 이슬람교에 대한 자기방어를 위한 것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가톨릭에서는 아직도 프리메이슨과 별개로 '기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브레이빅은 자신이 말하는 '기사단'을 기독교의 또다른 양태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범유럽주의를 위해 실용적으로 선택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허울이고, 실체는 범유럽주의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프리메이슨의 연결은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에서 나타나는 적대관계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브레이빅의 '선언문'을 검토하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거기 나오는 내용들이 도대체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어디부터가 그의 망상 또는 희망사항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과연 브레이빅 배후에 어떤 무장단체가 있는지, 혹은 허세인지 여부는 노르웨이 경찰 당국의 수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브레이빅 개인의 허세로만 보자니 정신착란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배후에 정말 어떤 그룹이 있다고 보자니 이 또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건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이 약간 길어졌기 때문에 결론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 브레이빅이 말하는 타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와 프리메이슨 템플기사단을 합한 형태로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자기방어'를 위한 범유럽주의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자기 나름의 기독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같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원리주의 내지, 자신이 표현한 대로 기독교 극단주의라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정신적 안정과 범유럽주의라는 사회문화적 가치의 활용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1)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 심지어 그의 의심스러운 정신상태가 아니라, 테러범이 유럽의 다문화주의와 관용에 반대하여 테러를 저지른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도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2)


[덧붙임]
*1: "그는 단순한 테러범일 뿐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국민일보 기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브레이비크가 잘못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는 선언서 1307쪽에 표현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종교적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문화와 사회, 도덕적 토대 안에서 기독교를 믿는다. 이것이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근본주의 성향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두 분 신학자들이 근본주의 기독교와 테러범의 '기독교'를 구분짓는 주장도 대체로 괜찮았는데, 제목은 교계의 딱한 현실부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좀 민망스럽다. 아예 확 세게 나가야 한다는 심산이셨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원... 사고치고 집나간 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어야 할 사실관계는, 이 기사에서 근본주의와 테러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고 한 부분은 명백히 틀렸다는 점이다. 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찾아보면서 새삼 인식하게 된 부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그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백인기독교근본주의그룹 KKK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 '그리스도의 어린 양(the Lamb of Christ)' 등이 낙태, 애국심 등과 같은 특정사안에 대해 테러를 저지른 극단적 근본주의 그룹들이 존재해 왔고, 오늘도 미국 어디에선가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기독교 테러리즘에 관한 온라인자료로서 영문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을 참고할 것.) 더 나아가, 기독교는 북아일랜드, 세르비아 등 세계분쟁지역에서 폭력과 테러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독교는 분명 잘못되고 거짓된 형태의 기독교이지만, 이건 기독교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말했든 간에 그의 교회관은 왜곡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론으로는 애시당초 공교회의 회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교회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삼일절주일에 한국개신교회 강단에서 민족대표33인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고, 개신교가 삼일운동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회주체였다는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기억하고, 주기철, 길선주 목사 같은 극소수 목회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의 참람된 변절과 배교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며, 공교회적인 참회를 행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유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관는 근본주의적이다. 테러리즘을 저지르지 않고 음모론이나 사이비이단, 자유주의, 공산주의 단죄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그 배타적인 폭력성이 당장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근본주의가 테러리즘으로 발전하는 것은 단지 한끝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희망사항과 본인의 주장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어두고 싶다.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나는 두 편의 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이에 관해 노르웨이 테러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기독교 근본주의가 결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본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논지를 재확인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극히 위험한 폭력성과 폐쇄성,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적 관계의 폭력을 저지르는 형태로 이미 수없이 표출되어 왔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한 사례도 결코 없지 않다.
문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스스로가 근본주의자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다른 이름으로 진짜 정체성을 남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공교회의 형제요 친구인 근본주의자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더하시기를! 죄많고 허물많은 우리 자신과 모든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동일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2: 미국이 조지 W 부시 시대에 테러 이후 교회는 근본주의화하고 국가는 경찰국가로 돌변한 것과 달리 노르웨이 사회는 이 비극적 사건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서 노르웨이에 대한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통합전략으로서의 관용에 관해서는 좀더 심도있는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포기할 까닭은 없다. 테러의 비극을 겪은 노르웨이 사회의 의연한 대처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부디 우리 한국사회도 자유와 관용의 가치가 뿌리내리는 위대한 사회가 되길!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