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9. 00:41

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1. 요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어수선하다. 이광선 전총회장이 물러나면서 금권선거사실을 '양심고백'했고, 길자연 현총회장에게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처분을 받아내 압력을 가하고 있다. 세간의 눈은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길자연 목사에게는 따갑다.

2. 글쎄. 양심고백이라. 과연 그럴까? 
이광선 목사는 마치 길자연 목사가 금권선거의 원흉인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교계의 금권선거는 어제 오늘의 관행이 아니다. 몇십만 원을 받은 아무개 목사가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이게 어디 그렇게 새로운 일이었던가. 이건 일을 터뜨리기 위해 새삼 터뜨리는 전략적 행동이 아닌가. 결국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특정인에게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게 뻔히 보이는 석연치 않은 모양새다. 이런 경우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당사자 역시 뭔가 구린 구석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배후 알력관계가 짐작되긴 한다. 짐작이 맞다면 이건 소위 양심선언을 들먹일 성질의 것이라기보다 추하고 부끄러운 교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태의 본질이다. 거기에 세간의 여론까지 끌어들인 셈이고.

3. 작은 공동체든 교회기구 차원에서든 결국 이런 진흙탕 싸움은 제딴에는 공평과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내 편은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고 네 편은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는 사탄의 졸개라는 흑백논리가 난무하게 된다. 각자 제딴에는 성전을 치르는 십자군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십자군 전쟁'의 미몽을 헤매게 된다. 제딴에는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하나님은 이들의 승패에 하등 상관이 없으시지 않을까.

4. 이들의 진흙탕싸움 자체엔 탄식과 한숨 외엔 별 감흥이 없다. 다만 무겁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는 분들이 저러고 나서 뒷수습은 고스란히 한국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특히 사이비이단문제에 관해 이광선 총회장 재임기간에 벌어진 혼란상이 염려된다. 길자연 목사는 직전 사이비이단대책위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대책위를 새로 꾸리기로 했었다. 혼란한 한국교회의 사이비이단문제 대처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조처였다. 최근 길자연 총회장의 직무정지처분은 이와 같은 범교회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 손봉호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시는 것 같다.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금권선거시비가 없는 것과 달리 보수진영은 박형룡 목사 이래로 돈문제로 끊임없이 시비가 붙고 있으니 부끄러워들 하실 법도 하다. 원래 한경직 목사 등이 한기총 설립을 추진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어엿한 한국개신교회의 공교회적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공교회성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아울러, 적어도 초창기의 한기총은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등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독교정신을 구현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나아가 남북화해에 물꼬를 트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제기되는 한기총해체론은 주된 배경과 근거가 된 금권선거문제가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반동적 권력기관 노릇을 극우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으며, 한기총 설립정신을 거슬러 일개 이익기관으로 전락해 있다. 현재 한기총의 정체성과 관행 자체가 원래 시작되었을 때의 정신과 전망을 거스르고 있는 서글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드러내준다.
사회여론?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에 대해 쌓인 것들이 많으시다. 특히 현 정권 들어서 장로대통령이 뽑혔답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기라도 한 줄로 믿으시는 분들의 혁혁한 공로 덕분에 사회여론은 분명 교회권력을 엎어버릴 틈을 노리고들 있다. 이러던 차에 한기총 해체 얘기가 교계 내부에서 나오니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6. 앞서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교회가 쇠락을 맞이하는 가장 심각한 원인은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비복음적 보수주의"에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의 쇠퇴를 일으켰다고들 하면서 마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하다면 정말 크게 착각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울어가는 현상은 소위 보수적 신앙인들의 비복음적 행태에서 99%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과 한기총 (그리고 각 교단)의 금권선거문제는 비복음적 보수성의 진부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기총 해체? 답답한 분들 심정에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비복음적 보수성이라는 한국교회의 정신적 토대의 문제다. 어차피 한국교회는 공교회로서 조직을 이루어가려고 하게 될텐데, 정신성이 잘못 뿌리내려 있는 한 문제는 늘상 터질 수밖에 없다. 저 찬송가공회의 착잡한 난맥상은 그 '공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과 영향력과 성공과 인기와,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 한 이 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2) 교회의 존재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이다. 한기총해체론은 한국교회에 닥친 심각한 위기, 참된 토대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가 여부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7. 교회는 실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계시의 정신이 주어져 있는 한, "고백자 베드로"(바르트, 쿨만, 래드) 위에 교회는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마태복음16:13-20)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한국교회의 현재 위기로부터 새롭게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기다린다. 한국교회가 아집과 욕심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뉘우쳐 돌이키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덧붙임] 
(*1) 글을 쓰고 나서 한기총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에 지난 2010년 4월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내놓은 탁월한 분석에 대한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지방 기자는 한기총의 설립과 성장 배경 가운데 반공주의와 교회의 대형화라는 요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렵다고 진단한다. (→발제문전문)
다만 당시 교계원로들의 한기총 설립정신을 반공주의로 뭉뚱그리기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본 블로그에서도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비판적인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기총이) 반공주의라는 정신성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대목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가능성으로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결과적으로는 보수진영만의 연합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아쉬우나마 한국교회에 공교회성을 표현하는 그릇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이비이단문제 역시 각 교단들의 단죄가 공교회성을 담보하는 틀을 제공했다는 데서 한기총의 긍정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문제는 이 긍정적인 역할마저 높으신 분들의 진흙탕 싸움으로 말미암아 흐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2) 한국보수주의교회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본격적인 분석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망라하는 국내 중진신학자들에 의해 3년 공동프로젝트로 이뤄질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김진호, 강인철, 구미정님등 눈에 익은 학자들의 이름이 보여 신뢰감과 기대감을 더한다. 다만, 문제는 대형교단들 스스로 자기성찰을 해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주로 기장, 성공회와 같은 진보성향의 중소교단에 의한 분석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석이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같은 곳에서 나와줘야 할텐데, 서슬퍼런 교권 앞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을테니 아쉽고 안타까울 다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들인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을 뒤엎은 것과 같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이 교계의 주류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Trackback 0 Comment 3
  1. 2011.03.31 23:15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멋진비움 2011.04.01 14:11 신고 address edit & del

      미자아러다님 안녕하세요.
      문의하신 번호대로 답을 올려드립니다.
      1. 외경 / 제2경전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주장은 개신교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증거를 제시해도 말을 계속 바꾸겠죠. 미국가톨릭근본주의자들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니 유감입니다.
      2. 그분들 얘기는 오래된 가톨릭호교론의 레퍼토리중 하나입니다. 가톨릭호교론은 자신들에게 유리해보이는 내용을 그럴싸하게 엮은 일종의 선전선동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낚이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3. 죄송하지만 제가 지병 때문에 더이상 소모적인 논쟁에 참여하거나 관여할 정도로 청년과 같은 시간과 건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우리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 2011.04.01 15:4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1. 1. 4. 06:27

오직 성경으로만

루터와 칼뱅은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원칙을 통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 뿌리박은 개신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개혁자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은 공의회나 교황, 신학전통 따위의 진리값을 가늠하는 잣대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여하한 영적 현상, 영적 인물 따위라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의 권위 아래 있다.
-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명확한 부분으로부터 모호한 부분을 해석한다.

이런 개혁자들의 요구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상당부분 오해되고 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 일체를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읽기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실상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교단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은 공교회성을 부정하는 사이비이단집단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강변이다. 아울러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뒷얘기는 자기 교주나 자기 집단, 자기 선입견에 대한 복종의 요구로 귀결되곤 한다.

그 누구의 성경읽기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누구의 이해력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릇된 전통과 선입견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칼뱅이 지적했다시피,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을 제한하심으로써 겸손하게 하시고, 더불어 사귐으로써 더욱 충만한 하나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적 토론영역에서 함께 겸허하게 지혜를 모아가는 사귐의 장이 바로 신학이다. 신학이 곧 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성찰과 검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참다움에 가깝게 된다. 신학이 추구하는 참다움은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성경읽기에 견줄 수 없는 보편적 권위를 지닌다. 전통이 성경본문과 성경의 정신이 지지하는 참된 전통이라면 거기엔 보편적 권위가 있다.(*1)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참다움조차 언제나 성경의 권위로써 재어지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둘째,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도록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낚이는 대목이 바로 영적인 '현상'이나 그런 현상의 매개자라고 주장하는 영적 인물의 인상적인 '말빨'이다. 그런 것에 낚일수록 신학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종교이고 죽은 교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 현상과 인물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증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신학이야말로 성령이 주관하시는 성도의 교통과 교제의 장이다. 아울러, 덜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의 은사(*2)도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비약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스스로를 거기에 매이도록 하신다. (요한복음16:7,13-14)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을 빌미로 그 누구도 성경을 비약할 수 없다. 

대개 이런 식으로 영적 현상과 인물을 따를수록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 신학이 비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마당에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반증도 한갖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짓거리 쯤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한 다음 성령의 초자연적 현상을 운운하는 행태야말로 사이비이단집단이 잘 닦아놓은 멸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성경의 자기해석과정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혹시 일체의 신학전통 따위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거절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종교개혁의 성경원리는 명확한 부분에서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전체 이해로서 다시 명확한 부분을 조명하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얘기한다.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은 일개 개인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 항상 동료(들)과의 상호의존적 해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해석에 접근해 간다. 모든 건전한 신학전통은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에 동참한다. 

앞서 밝혔다시피, 성경해석은 누구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신학의 장을 통해 함께 읽고 나눔으로써 건전성을 이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에는 전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처럼 성경과 전통에 동일한 권위를 돌리기를 거부한 것이었지, 전통 자체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대교부와 공의회, 중세신학에 정통한 당대일급의 신학자들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루터와 칼뱅에게 '오직 성경으로만'은 성경의 우위성(prima scriptura)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라는 원리를 밝힌 장본인들이 전통에 정통했다. 어떤 의미에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을 외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으로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전통의 빛과 그림자를 잘 이해하고 스스로가 속한 전통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3)(*4)

[덧붙임]
*1. 이미 신약성경 안에도 존중받아야 할 전통의 전승과정이 나타나 있다.(고린도전서 11:23, 15:3-4, 데살로니가후서 2:15, 디모데전서 2:2, 베드로전서1:18-19 등.) 정경사적으로 보면 성경이 전통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paradosis)이 성경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대로 교회가 성경을 만든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도베드로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든 게 아닌 것처럼(마태복음 16:13-20),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된 사도적 전승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했을 뿐이다. '교회가 정경을 도입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의 규범이 되기를 포기했고, 전승이 진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Oscar Cullmann)
참된 사도적 전승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에서 통일성을 이루지만 각 성경기자의 삶의 자리와 신학사상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는 사도신경의 공교회조항과 마찬가지로 전통의 다양성을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2. 아마도 최근 일어난 은사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를 '투시'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문맥상 합당치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문맥에 따르면 사도가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 믿음(8,9a절)을 주시고, 신유와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통변(9b,10절)을 주신다고 했을 때, 덜 초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더불어 열거하여 은사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빗나간 시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는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해명하는 데 사용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Calvin, Matthew Henry, Schlatter, Orr & Walther 등.) 아울러,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언을 앞일을 알아맞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교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고린도전서 14:)
*3. 자신이 특별히 따르는 전통이나 입장이 없(고 오직 성경만 믿는)다고 믿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미 우리의 성경읽기를 규정하곤 한다. 이를테면, '오직 믿음으로만'이야말로 성경의 정수라고 받아들일 때 이미 개신교전통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휴거와 7년 대환란을 기독교종말론의 내용이라고 믿을 때 이미 세대주의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전통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성경의 본래적 메시지로부터 비판하는 작업이다.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