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5. 12:53

신앙의 항체

우리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과 순결한 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이 명분이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특별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순수한 복음 혹은 순결한 교리라는 명분 하에 교파교단간의 대화와 연합이나 종교간 대화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교파교단간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서로 입장이 다른 교파, 교단, 신학학파간 대화와 교류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이 주제는 이미 공교회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교파교단간 대화는 종교개혁 이후 줄곧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미 칼뱅과 멜랑히톤, 크랜머 주교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 각 교파의 대표자들은 당대의 교회일치적 대화와 교류를 추진한 바 있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와 같은 한 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신학자들 역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유럽개신교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아우르는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범교회적 대화 노력을 계승한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운동이다.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와의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두어야겠다. 

과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지만 과연 시대사조나 종교간 대화 일체는 저주받아 마땅한 종교혼합주의일까?

오히려 성경 자체가 종교간 대화와 통섭의 역사를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창세기1장은 고대근동의 우주론인 신통기(신들의 탄생 연대기)를 탈신화하하여 아우른 결과였다. 
-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왕정을 비롯한 이방문화를 흡수했다.
- 잠언은 고대근동의 지혜문학을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씀이다.
-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문학사상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받았다.
-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공박하는 동시에 영지주의의 상징과 이미지를 흡수하여 신앙을 설명한다.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무한정 길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을 거친 하이브리드였다.(*1) 신앙의 선조들은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했다. 

이 상황은 히브리낱말 '바알(בע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바알이라는 낱말 자체는 가나안신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문맥에 따라 남편, 주인, 주민, 지배자, 지배하다, 결혼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용례들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순수주의에 매달렸다면 이런 일상적인 용례 자체가 없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신앙의 중심에 야웨 하나님의 구원행동 대신 풍요와 번영이 들어설 때 바알신앙이라는 혼합주의로 퇴행하는 위기가 일어났다. 혼합주의란 신앙이라는 원에서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이지 하이브리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바리새주의가 보여주듯이 소위 순혈주의도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진다면 똑같이 문제다. 

오늘날 '하이브리드'라면 배교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이들이 있다. 불교나 유교에서 비롯된 말을 쓰면 안 되고, 신비종교에서 비롯된 기도방법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아무개 목사나 아무개 신학자는 시대사조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이비이단이고 거짓선생이란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되고 안경을 쓰면 안 되고 수혈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기만 완고하고 옹졸하면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그 독소를 한국교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니 문제다.

다원사회 속에서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어떻게 차단하고 배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이미 흡수하고 있다. 이미 불식간에 수많은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을 흡수하고서 '오직 성경만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올린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정신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오히려 이미 그것조차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혹은 기도의 응답과 꿈과 환상과 영음을 통해 자기 신앙이 '순수하다'라고 입증되기라도 한 걸까?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부터가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건강하다는 것은 병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항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에 대해 결벽증을 갖는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올바르게 가늠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믿음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믿음을 잘 벼릴 때 신앙의 건강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덧붙임]
*1. 하나님은 그런 '하이브리드'에 담긴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신다.(마태복음 16:13-20)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동적 영감성이다.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 예컨대, 밴후저 같은 이들은 -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있다. 신적 측면은 성경이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요, 인간적 측면은 성경이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서 기록된 제한적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가현설에 빠지게 되듯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성경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가현설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가현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믿지 않는다.
2010. 11. 10. 05:55

과연 대통령이 장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대선이 되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장로를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거세다. 지금도 장로대통령을 지켜준다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의 주류개신교회는 이 어려운 시국에 너무나도 잠잠하다.

그러나 기독교인, 또는 장로가 대통령 노릇하는 그 자체를 과연 하나님이 바라실까?

1. 기독교인 혹은 장로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이라는 성경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약 열왕기나 역대기, 혹은 예언서를 읽어 보면,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임금들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힘써 살아낸 다윗과 요시야, 히스기야 같은 몇몇 임금들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 때 예언자의 예언이나 정치적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혹독한 책망과 징계를 겪어야 했다.

아무개 장로, 아무개 권사, 아무개 안수집사 따위의 신분 자체가 그가 지닌 정치적 비전이나 실천에 아무런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2. 기독교인 혹은 장로로서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남북전쟁 당시 남쪽도 북쪽도, 그들의 지도자들도 모두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치하의 교회도 하나님께 기도했다.

미국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링컨은 참된 기도를 했고 나머지의 기도는 거짓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당신의 기도, 아무개 장로의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거짓기도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무엇인가. 승승장구 잘 나가기 때문인가. 자신의 기도야말로 참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형교회를 건설하거나 이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된 기도라는 증거가 되는가. 성경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승승장구가 그들의 선의나 공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개 장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예수께서 승인하신 기도는 바리새인의 유창하고 겉보기에 거룩한 기도가 아니라 죄많은 세리의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도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뉘우침과 돌이킴이야말로 성경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참된 기도의 증거이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개 장로의 정치적 비전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은 새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정치판에서 이런저런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면 교회는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 아니다. 그 아무개 장로가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비전을 품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도해왔느냐, 하나님의 응답에 어떻게 순종해왔느냐를 다른 누구보다도 까다롭고 꼼꼼하게 짚어주어야 한다.

3.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시기도 하신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수도 없이 제사를 드렸을 유다왕이나 그 후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고레스를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셨다. 고레스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할 비전과 역량을 지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그가 단지 독실한 기독교인이거나, 교회활동에 열심이고, 쓰는 언어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익숙하게 들어왔다는 까닭에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그와 그가 감당할 나라와 겨레가 맞이한 역사적 과제 앞에 어떤 종류의 비전과 역량을 지녔느냐 여부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과연 이 시금석에 따르면 지금까지 나온 장로대통령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들이었는가? 아니면 기독교라는 좁은 이익집단의 붕당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기득권집단화를 도모해주는 정상배에 지나지 않았는가?

아합왕과 같은 정치지도자라면 그가 기독교인이라도 교회가 예언자적 비판을 해야 마땅하다. 타종교를 믿는, 심지어 기독교에 비판적인 정치지도자라도, 그의 비전이 역사적 과제에 합당한 것이라면 교회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누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청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장로대통령을 뽑아야 하고, 장로대통령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로지 성원과 지지만을 보내야만 한다는 소리가 소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는 평판을 누리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교회는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탑재해야 한다.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아무개 대선후보, 아무개 국회의원후보가 기독교인이고, 교회직분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바알신앙적 행태를 그치고 예언자적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이다.
2010. 10. 3. 17:15

외계생명체와 기독교신앙

개인적으로 SF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팬이라 외계행성의 발견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눈여겨 보면서 광활한 우주의 신비에 새삼 감탄하곤 한다.

요 며칠새 새로 발견된 글리제581g 행성 보도는 특히 눈에 띈다. 이 행성은 약 20광년 떨어진 적색왜성 글리제581 둘레를 도는 골디락스 행성, 즉 차지도 덥지도 않은 지구형 행성이다. 질량은 지구의 3-4배 정도이고, 밤낮이 없어서 밤낮의 경계면이 고정되어 있는데, 이 곳의 기후가 지구 극지방 정도여서 생명체가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고 한다.

UN에서 외계문명이 접촉해 왔을 경우 공식적으로 영접하는 업부를 맡는 대사를 임명했다는 소식도 나왔었다. 다 '뻥'이라는 UN의 반박기사가 바로 나오기도 했지만, 외계생명의 발견 내지 외계문명의 접촉에 대해 기대감이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다 보니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없는 게 아닌가 라는 오래된 물음이 떠오르는 것 같다. 심지어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기독교의 신의 부재로 연결짓는 시각을 기사에서 공공연히 표현한 경우조차 볼 수 있다.(*1)

이런 대중의 호기심은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은 첫째,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구에만 생명을 창조했다고 기록했을 거라는 짐작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런 짐작은 별 근거가 없다. 창세기 1장은 지구를 배경으로 한 기록이다. 창조과학회에서 하는 식으로 문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적시하자면 창세기 1장에도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고 쓰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의 생명과 더불어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지구의 생명'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온 우주,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되풀이하여 기록한다.

아울러, 성경에는 외계인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에서 외계인을 기록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기괴한 이미지와 상징들이 많이 나타난다. 텍스트의 맥락과 배경을 주의깊게 고려하는 합당한 해석학적 과정을 밟아 성경을 이해한다면 이런 오해는 하지 않게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최소한 우주 안에서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미 표현되어 왔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외계생명체가 발견되면 거기에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야웨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신의 부재를 상상하게 된다.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이 야웨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모를 가능성은 물론 매우 높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신약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알려진 역사적 칭호들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야웨' 또는 '여호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해당 출애굽기 본문을 히브리성경 원문으로 보면 이것은 원래 이름을 가리키는 특수명사라기 보다는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그다(
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뜻을 새길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이다. 따라서 지적인 외계생명체가 이런 이름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자신의 맥락에서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길이 추구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 양심과 평화, 삶과 죽음 같은 문제는 수학이나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인간만의 것일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죄 문제 역시 인간만의 것일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무수한 종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문제와 씨름하는 흔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2)

그렇다면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들과, 거기에 더하여 우주의 수많은 종교들이 '백가쟁명'하는 상황 자체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일까?

사실 굳이 우주로 스케일을 넓힐 것까지도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과 수많은 신들은 유일신교가 얘기하는 유일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구해 보면 된다. 유일신교는 여기에 따로, 저기에 따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다신교의 믿음을 비판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의 힘으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 이를테면 글리제581와 태양계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한 분의 초월적인 인격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의 정의부터가 종교의 백가쟁명 운운하는 것이 번지수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셋째, 외계생명의 존재에서 신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창세기1장은 근본주의가 강변하는 것처럼 단순한 역사적, 자연과학적 보도로 읽혀져야 하는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 기록 당시 고대근동의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당대 바빌로니아 과학의 세계상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기록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과학의 세계상에 따르면 만물은 신들이고, 군주는 신들의 아들이며, 인간은 신의 아들인 군주에게 복종해야 할 노예로 창조되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기자는 세상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며, 군주가 아닌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창세기 기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과학적 세계상을 얼마든지 받아들여 비판적으로 소화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로 똑같은 알맹이의 창조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고백해야 한다. 인간은 오늘날 지배적인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그저 어쩌다가 생겨난 우주의 먼지 정도인 존재가 아니다.

* 9월 말경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덧붙임]
- 독일 슈피겔지에서 글리제581g에 살고 있을 생명체의 모습을 추정한 논문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는 보도가 있다. 이 기사는 2010년10월4일자 40호에 실렸는데 아쉽게도 아직 유료pdf기사로만 올라와있다. 기사를 찾으면서 2009년8월16일자 기사에서 호주의 한 과학잡지가 글리제581d의 (살고 있을지도 모를) 외계문명에 보낼 이메일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읽었다. 십중팔구 오버하는 거겠지만 재미는 있어 보인다. 연구자들이나 매니아층에선 이미 상당정도 이 행성계에 대한 관심이 진척되어 있었나보다. 
- 12월2일2시에 나사에서 외계생명체의 생존에 관한 중대발표를 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유독 국내에서 엄청 들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어김없이 기독교가 뭔가 곤란해지지 않을까 싶어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펴시는 분들이 많이 보였다. 나사의 발표는 비소를 신진대사의 기본으로 하는 수퍼미생물을 지구에서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문외한으로서 이 발견에 우주생물학 연구에 있어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성이 있다는 것 정도만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인을 구성요소로 하는 지구생명체만 기준으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후보군을 선정했는데, 이제부터는 최소한 비소 역시 행성후보군 선정에 고려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비소뿐이겠는가. 일찌기 브루노가 갈파했다시피 우주에 사람이 생각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생명의 파노라마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지 말란 법이 없다. 외계생명체연구가 언젠가는 우주에 펼쳐지는 생명의 거대한 드라마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 예컨대, 성경에 따르면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천사의 창조과정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다. 물론 이사야서나 에스겔서의 한두 구절을 천사장 루시퍼의 창조와 타락 장면으로 보는 주석전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 문맥상 맞지 않는다. 천사론이 유행중이던 신구약 중간기 유대교의 주석전통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미 종교개혁자 칼뱅도 이 주석전통을 거절했던 바 있다. 근본주의에서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전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 보는 것은 꽤 흥미로울 듯 하다.
*2. 독일계 미국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폴 틸리히는 그의 역작 Systematic Theology 제2권에서 같은 생각을 종교철학적 범주로 표현했던 바 있다.

2010. 10. 3. 17:10

한반도전쟁예언의 사각지대

최근 데이비드 오워 박사라는 케냐의 예언가가 한국(교회)의 죄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오워 박사의 홍보영상을 보면 티벳과 칠레와 미국서부와 아이티 등의 지진을 예언한 예언가라고 되어 있다. 그런 예언가가 한반도에 전쟁을 예언했다니 평신도들과 비그리스도인들사이에서조차 입소문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예언이 나왔다면 그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는지 주의깊게 시험하여 보고,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합당한 방향으로 돌이키면 될 일이다.

1.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예언인가?

오워 박사의 불분명한 신학적 배경이나 이현령비현령식 예언행태에 대한 이의제기가 많이 되고 있다. 이 의혹들을 간추리면 이렇다.

1) 오워 박사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초심자'이며,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두 여인과 동거했던 전력이 있다.
2) 오워박사의 부르심이야기에 성경에 낯선 the Ark of the New Covenant of The Lord in God's Throneroom이나 "천국 문 앞에 떠 있는 두 개의 결혼반지"와 같은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온다.
3) 오워 박사의 집회에서 '신사도운동' 계열에서 관찰되는 '쓰러짐' 현상이 나타난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을 처음 퍼뜨린 카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도 신사도운동 계통이고, 특히 이곳에는 92년 종말론파동 때 다미선교회 미국지부를 맡고 있던 장요셉 목사가 참여하고 있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 다수에서 통역으로 나오는 사랑과 진리 교회 벤자민 오 목사도 신사도운동가다. 신사도운동은 이미 교계에서 광범위하게 도입 내지 참여금지 판단이 내려진 기피단체다.

이 의혹들은 어찌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지나친 정죄로 보이기도 한다.

- 두 여인과 동거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케냐 같은 아프리카나라에 일부다처제가 남아있을 수 있다.
- 쓰러짐 현상은 부흥회를 아주 심하게 하다 보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전면에 내세운다는 게 치우치고 위험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때때로 성령은 주류교회에서 추방된 공동체 가운데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

다만, 그의 부르심이야기에서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오는 점은 걸린다. 이것은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펄시 콜레의 천국간증 때 비성경적인 표현이 그의 정체가 탄로나는 데 단서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펄시 콜레 역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얘기한 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었고, 천국간증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한낱 사기에 지나지 않았다.(*1)

사실 오워 박사의 예언은 주께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식으로 잘라 말하지 않으면 후련하고 시원하지 않다. 하지만 후련하고 시원한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정확한 답을 찾아가는 쪽이 낫다. 누군가를 사이비이단이라고 판단하는 일은 확고부동한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제기된 의혹들 가운데 위험천만한 대목도 있지만, 확고부동한 증거랄만한 신학적 오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관련자료를 좀더 충분히 수집해서 찬찬히 살펴 본 뒤에야 이 부분을 확실히 할 수 있다. 해서 판단을 유보해 둔다. 일단 정확하다고 확신되는 판단이 서면 이 부분의 서술은 보다 간명해질  것이다.

2. 예언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매김이다.

사실 오워 박사가 말하는 한국교회의 죄 자체는 누구나 공감할 만큼 상식적이고 원론적이다. 번영과 성공의 신학, 음란의 죄 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돌이킬까?

상대적으로 음란의 죄는 돌이킬 방향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번영과 성공의 신학은 어디로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돌이킬 수나 있을지, 문제가 참 간단치 않다.

한국교회의 성공신학은 한 마디로 힘의 숭배다. 번영신학, 성공신학의 죄를 회개하자고 말하는 그 자신들이 힘의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앙모해온 미국교회 복음주의와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주류는 어김없이 정의를 강탈한 기득권과 결탁하여 안녕을 도모한 야합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득권과 결탁한 나머지 그들의 이데올로기, 특히 반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 6.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한국교회가 북한에 대해 강한 트라우마를 갖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렇더라도 한국교회가 반석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진배 없이 내면화 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기득권를 비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득권을 비판하면 빨갱이라는 의혹의 따가운 눈길부터 주기 바쁘다. 나아가 기득권의 원의에 적극 봉사하기까지 한다. 현 정권을 지극정성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뉴라이트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자기 반석으로 삼은 한국교회는 기득권에 밀착하여 번영과 성공을 누리느라 예언자적인 비판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이 땅의 우파 기득권과 하나님의 뜻을 간단히 동일시하고, 소위 좌파를 사탄의 무리, 빨갱이로 즐겨 단죄하며, 북한에 대한 증오와 공포에 노예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런 수구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기득권층은 북한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안보장사를 해왔고, 한국교회는 이 비루한 안보장사에 이용당해 왔다. 그렇기에 불쌍하고 딱한 북한정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기 보다, 저 사악한 북한 정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폭싹 망하기를 피를 토하듯 기도한다. 이렇게 하면 기득권층과 기성세대에게 성공이라는 일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힘을 숭배하는 성공신학을 쉽게 버릴 수 없다.

구약예언자들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강력한 저항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비판은 바로 당대에 벌어지고 있었던 힘의 숭배라는 성공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검은 것을 희다하고, 흰 것을 검다 하며, 저울추를 속이고, 약자의 판결을 굽게 하고, 의인의 의를 거짓으로 강탈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평안이 성직자들의 축복으로 계속될 것으로 믿어 의심지 않는 시대의 불의와 신앙의 태만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구약예언자들은 그들 사회에 가득 퍼져 있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힘을 숭배하는 바알신앙을 우상숭배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 한국땅의 바알신앙은 다름아닌 반공이데올로기다. 반공이데올로기가 교회를 망치고 있다. 한국교회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추구할 힘마저 빼앗아 버리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때 이 땅의 교회를 오염시켜온 수많은 이세벨들이 외칠 것이다. "저 빨갱이 사탄의 무리를 잡아 죽여라!"

교회가 반공이데올로기에 안주해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통일은 멀고 전쟁과 폐허는 가까울 것이다.

* 2010년 9월 5,7일경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덧붙임]
1. 일례로, 펄시 콜레가 솔로몬왕에 대해 책과 설교테이프에서 한 말은 서로 상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