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3. 14:31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1936)라는 책은 종교개혁자 칼뱅을 자기 견해와 다르면 검열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히틀러와 다름없는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1) 꽤 오래되었지만 칼뱅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즐겨 입에 오르내리는 책이다.

칼뱅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이미 종교개혁 당시부터 로마가톨릭 호교가들이나 칼뱅의 정치적 적수였던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이 유포해 온 일종의 진부한 신화에 불과하다. 이런 진부한 신화의 진원지인 로마가톨릭에서조차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부정적 신화의 일방적 이미지가 걷혀진 연구들이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근대적 가톨릭문화에 익숙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에 대한 태생적 가능성이 전근대적 가톨릭문화를 토양으로 히틀러가 득세한 암울한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이라는 기후를 만나면서 열매맺게 된 그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유독 칼뱅과 종교개혁인가?

사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칼뱅과 종교개혁을 겨냥해 히틀러의 전제정치와 같다고 비난한 유일한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은 아니었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에리히 프롬 역시 루터와 칼뱅을 히틀러에 견준 바 있다. 다시 말해, 당대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들에게 칼뱅과 종교개혁교회가 히틀러와 다름없다고 규탄할 건덕지가 뭔가 있었던 게다. 그게 뭘까?

칼뱅과 종교개혁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의 규탄만 들으면 정말 뭔가 칼뱅과 종교개혁 자체에 히틀러스러운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정짓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규탄은 중상과 뜬소문과 오독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었고, 번짓수도 합당치 못했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내적 동기가 그들의 규탄을 규정짓고 있는 측면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이 칼뱅과 종교개혁, 나아가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그들 자신의 내적 동기로서 히틀러에 대한 당대 독일개신교의 ('독일 그리스도인' Die Deutsche Christen 이라는 조직을 매개로 한) 어용적 행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소통속도의 한계로 말미암아 농민들에 대해 잔인한 무력진압을 독려한 꼴이 되어 버렸던 마르틴 루터와 달리, 쟝 칼뱅가 '박해'했던 적수는 세르베투스(*2)나 카스텔리오 같은 당대의 (나름 저명한) 소수파 인문주의 지식인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칼뱅은 이들 모두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자들의 운명만 화형이나 추방이었던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칼뱅이 사역한 처음 4년 동안 58명이 사형당했고, 76명이 추방당했으며, 처음 5년 동안 35명이 화형당했고, 13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식의 숫자는 전시상황이나 다름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힌다.(*3) 따라서 독일 그리스도인 교단의 준동에 따라 히틀러의 어용종교 노릇을 한 독일개신교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치를 떨었던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에게 칼뱅이 루터보다 먹음직스런 떡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분노와 환멸의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사실 유럽의 개신교인들조차 독일개신교회가 저 히틀러의 악마적 어용종교 노릇을 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와 마르틴 니묄러 등이 바르멘 신학선언을 발표하고, 독일고백교단이 세워졌으며, 이 교단의 주요 지도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암살기도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아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개신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루터와 칼뱅에게 분노와 증오를 전이한 유럽개신교인들도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목사였던 쟝 쇼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츠바이크를 부추겨 칼뱅에 악마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카스텔리오를 미화하는 전기를 쓰도록 독려했다.

쟝 쇼레와 같은 정신적 동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종교개혁자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는 엄정한 사태 자체의 사실관계에 부합되는지 여부에 비추어 가늠할 필요가 있다. 내적 동기가 앞선 나머지 사실관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칼뱅에 대한 비난 자체는 사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츠바이크 자신의 내적 동기가 너무 앞선 나머지 엄정한 사실관계를 가리워서, 그의 강렬한 규탄에 진부한 선입견의 무비판적 추종으로서의 악(한나 아렌트)이라는 작가 자신이 목도한 시대적 악의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히틀러와 전체주의, 그리고 그러한 체재가 배제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호소라는 내적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 검열과 협박, 폭력을 들이대는 행태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요즘 현 정권과 대형교회, 개신교계, 심지어 가톨릭 쪽에서까지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건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어둡고 답답하게 한다. 특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우리 한국개신교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나름대로 그린 '사악한 교조주의자 칼뱅'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4)


[덧붙임]
*1: 유명세가 덜하긴 하지만 이보다 한 세대쯤 앞서서 영국의 역사가 로드 액턴도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역사화했다. 로드 액턴 역시 열렬한 가톨릭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처음 역사화한 장본인은 아니었다.

*2: 세르베투스를 '무지막지한 개신교 교조주의자' 칼뱅에게 '부당하게' 희생당한 '인문학자'로 보는 시각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에 있어서 세르베투스를 부당한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칼뱅의 소위 '잔혹함'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애당초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한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의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었다. 방종파도 세르베투스 문제를 기화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조차 세르베투스에게서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베투스는 특히나 기존신학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지만 딱히 혁신적이거나 참신한 구석이 없는 황당하고 괴상한 이론들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을 즐겨한 일종의 극단적인 '악플러' 같은 인물로서, 당시 유럽 어디를 가나 가톨릭권과 프로테스탄트권 공히 이단자로 낙인찍혀서 당시 사회통념상 어떤 식으로 처형되느냐만 남아 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마지막 관용으로서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한 참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칼뱅이 아니라 가깝게는 제네바 시의회요 크게는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한 유럽사회의 법적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세르베투스는 화형으로 사형집행된 것이다. 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던 제네바 시의회 방종파 세력이 세르베투스에게 극형을 내렸을까? 방종파 세력에게도 당대의 법적 통념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도덕적 명분을 시위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칼뱅이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칼뱅과 제네바 시의회를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통념에 따라 단순하게 동일시한 세속화한 후세사람들이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3: 유시민씨가 최근(2013년) 출간한 그의 책에서 칼뱅을 전체주의자요 자신의 신학이론에 오류가 없다고 믿었고 공포정치를 감행했던 광신자라고 평했던 것 같다. 유시민씨의 발언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받아쓰기한 카스텔리오의 중상모략을 칼뱅의 학살설의 사실관계 증언으로 받아들인 케이스가 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감스럽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인으로서 책을 통해 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마 유시민씨는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기에 충분히 정당하고, 반면 칼뱅이나 한국개신교가 허술하고 만만하면서도 부조리하게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어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발언은 칼뱅에 대한 왜곡의 도가 지나치다. 본인은 유시민씨에 관해 정치인으로서는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 아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말조심을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잘 모르는 문제에 끼어들어 말을 함부로 하면서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처사는 적어도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면 실망스러운 처신이기 때문이다.

2010. 12. 1. 15:01

권위주의 시대의 도래?

극단적인 경우 대한민국에 어쩌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체주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상황을 보면 여건이 어느 때보다 무르익어 있지 않나 싶어 우려스럽다. 

1. 남북갈등이 심화하여 여론이 한 방향으로 경직되기 쉽다. 
적절히 증오와 분노를 부추겨주면 그 다음은 스스로 동력을 얻어 돌아가게 될 것이다.

2. 현 대통령과 정권이 레임덕을 타개할 계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현 정권은 전 정권에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햇볕정책을 3년간 철저하게 중단하고 부정하면서 대북강경고립정책을 구사해 온 현 정권이 막상 일이 터지자 햇볕정책의 실패로 규정하는 데서 현 정권의 기본마음가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북갈등심화 덕분에 현 정권은 자신과 견해를 같이 하지 않는 비판세력을 북한과 동일시하여 통제하는 전략을 보다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어 악마화함으로써 자기칭의를 도모하기 위해 온라인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권비판세력에 대한 사찰과 검열이 의로운 분노의 이름으로 일상화될 수 있다. 민간인사찰과 대포폰의 존재 따위는 그 나쁜 조짐으로 보인다.

3. 언론방송장악이 사실상 거의 이루어진 상태다. 
언론방송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현재로선 실질적으로 없어 보인다. 정권과의 이해관계호응에 따라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도구역을 자임한다면 기득권층으로선 여론을 순식간에 조종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정권과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 골라서 내보내면서, 이에 동조하지 않는 시민이나 집단은 색깔론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제압할 것이다. 
이미 이것은 한나라당이 어느 정도 해왔고, 당대표가 공식적으로 '사이버전사'를 양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알바들이 내뱉는 몰상식한 극언이 정권의 정책이나 행동에 실제로 반영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정도가 되면 실질적으로 전체주의와 별 다를 것 없는 권위주의 사회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4. 야당과 시민사회가 구심점 없이 지리멸렬해졌다. 
김대중, 노무현 이후 실질적으로 민주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나오지 못했다. 야당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민의를 대변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5. 군검경이 현 정권과 긴밀히 호응하고 있다. 
군은 노무현 시절 제2 롯데월드 설립허가를 안보를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하다가 현 정권 들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검찰은 자신들에게 자율권을 준 노무현 대통령을 주변사람들을 꼬투리잡아 죽였지만, 동영상 증거까지 남아 있는 데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까지 나서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했다. 
경찰은 현 수장부터가 철저히 군사독재시대의 악습이 발상과 처신에 몸에 배어 출세를 거듭했다.
군검경은 현 정권의 이해관계에 적극부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몇 해전 저명한 찬송시인 송명희님이 '표'라는 소설에서 조만간 대한민국에 베리칩을 표로 받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대환란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666표를 두려워하고, 적그리스도가 교회와 세상을 커다란 고통에 빠뜨릴 대환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 휴거되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근본주의 내지 세대주의 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얘기다. 
조금만 찾아 보면 이와 비슷한 얘기들이 꽤 많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얘기하는 이들도 이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자는 그들의 최선의 의도는 존중하지만, 세대주의 종말론은 애시당초 성경적으로 합당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송명희 시인이 그리는 것과 같은 시나리오에 딱 한 가지 공감하는 부분은 이대로 가면 전체주의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아직 그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일말의 믿음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한 때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란다.
그러나 만일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이 온다면 체재의 속성상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고 의롭다고 굳게 믿으면서 모든 악행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대목에 대해 얼마나 깨어 있는가? 이 점에서 다시금 마음이 갑갑해진다. 
바르멘신학선언을 작성해 독일교회의 대히틀러투쟁을 고취했던 바르트나 히틀러암살계획에 가담했던 본회퍼를 신학교나 설교에서는 곧잘 들먹이지만, 막상 교회현장에서는 목회자나 대중 모두 워낙 몰역사적인 개인신앙에 절어 있어서 역사참여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반공이데올로기에 열광하면서 기득권의 행태에 철저히 호응하고 있으니 이 모순과 부조리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나님께서 도움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덧붙임]
- 미국의 유니테리언 목사이자 예수 세미나의 펠로우인 데이빗슨 뢰어는 미국에서 종교적 근본주의가 정치적 근본주의에 호응하여 새로운 파시즘을 초래할 것을 내다보며 우려와 비판을 표명한 바 있다. 뢰어의 유니테리언주의나 예수세미나식 역사적 예수 연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정치신학적 문제의식은 동감이다. 한국 상황은 미국과 딱 판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