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15. 00:01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칼 바르트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 중상모략이나 다름없는 비난을 퍼부었던 반틸도 바르트에게 인사하려고 나왔다. 이미 반틸의 그에 대한 험한 소리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바르트는 반틸과 악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반틸(Cornelius van Til)이라는 신학자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주의 그룹에서 여전히 꽤 영향력 있다. 유독 국내에서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의 괴수'(*1)로 낙인찍히게 된 데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반틸의 신학을 한 분들이 국내에 많았고, 이분들의 전승이 후학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국내외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근본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다른 그럴싸한 칭호로 애써 꾸미고들 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현대주의를 포용하는데 반발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던 근본주의 그룹에 반틸이 들어 있었는데도 반틸이 근본주의가 아니란다.
현대사조에 대해 호전적이고 전투적으로 일관한 반틸의 면면이 근본주의의 프로필과 딱 맞아떨어지는데 반틸이 근본주의가 아니란다.

왜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조차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근본주의라는 멀쩡한 칭호가 부끄럽고 캥기기라도 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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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이 선동적인 표현은 서철원 교수가 박형용 박사의 표현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칼 바르트를 공격한 것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원흉" 기사 참조.) 그의 말은 과연 얼마나 이치에 맞는 걸까? 일례를 들어 보자. 서철원 교수는 2014년 11월6일자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에서 칼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제4/4권 65쪽에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죄를 고백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했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죄를 잘 고백했다"고 함으로써 칼 바르트가 예수님에게 죄가 있었다고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이 인터뷰에 나오는 다른 발언들도 황당무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 발언은 특히나 참 어처구니 없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서 교수의 말을 뜻도 모르고 대충 베낀 게 아니라 서 교수의 실제 워딩을 정말 반영한다면 말이다. 서 교수의 바르트 비판이 심각한 난독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럴까? 서 교수는 독일어원서 제4/4권 65쪽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다. 거기엔 정말 예수님이 "자기 죄를 고백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충 했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죄를 잘 고백했다"는 따위 말은 없다. 이건 서 교수가 (악의적으로가 아니라면) 엉터리로 왜곡한 해석이고, 바르트의 논지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당신과 별개의 것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바르트 자신의 말이다: "(그들의) 죄들을 저들의 것으로 돌리지 않으셨고 ... 그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저들의 죄들을 자기의 죄들이 되게 하셨고, 자기의 죄들로 고백하셨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는 소리인가? (참고로 한글판에서 이 대목은 92쪽에 나온다. 관심 있는 분들은 실제 전체문맥과 문장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직접 확인해 본 뒤 평가하기 바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독과 곡해가 과연 합동교단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이런 식의 오독과 곡해를 일삼는 사람들에 의해 국내 굴지의 교단(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유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하며, 애석하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