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30. 05:58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개신교 목사가 목회자컬러는 왜 착용하는가?

왜 로마카톨릭사제 흉내는 내는가?


별 굉장하지도 않은 목회자복식사까지 시시콜콜 세세하게 파고들 필요성은 없겠고...

그저 그림 몇 컷과 더불어 기초적인 사실관계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1. 목회자컬러는 이미 세계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두루 착용하고 있다.


목회자 컬러 가운데 특히 소위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특정 타입에 대해 오해들이 꽤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림1] 올라프 트베이트 목사 (노르웨이 루터교회)


[그림1]은 올라프 트베이트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노르웨이 루터교회 목사님)가 부산에서 열린 WCC 제10차 총회 개막연설할 당시 장면이다.

응? 총무목사님이 목회자컬러를 입으셨네?

사도적 계승 의식이 강한 북유럽 루터교회라서 그렇다고? 


그럼 다른 루터교회는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루터교회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주리주 루터교회의 선교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소위 사도계승 운운하는 데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국루터교회 목사님들 복장은 어떨까?


[그림2] 엄현섭 목사 (한국루터교회)


[그림2]는
2010년 당시 한국루터회 총회장이신 엄현섭 목사님이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한 사진이다.
이분은 어쩐 일로 카톨릭신부처럼 입고 계실꼬?

카톨릭신부가 좋아 보여서 신부코스프레중이신가?


[그림3] 제임스 앤더먼 목사 (미국연합감리교회)


[그림3]은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감리교회 목사님 모습을 구경할 차례다. 우리나라 감리교회 목사님 가운데서는 김아무개 목사님 사진이 바로 검색되어 나오는데 썩 유쾌한 얼굴도 아닌지라 미국연합감리교회 소속 어떤 교회 담임목사님 사진을 걸어두겠다.

이분도 담임목사님으로서 권위있게 보이고 싶으셨나?


성공회는 성직복을 입는 교회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넘어가... 자니 성경대로 믿는 복음주의자는 절대 그렇지 않을끼다 하실까 싶어...


한 장 보고 넘어가자.

[그림4] 제임스 패커 신부 (캐나다성공회)


[그림4] 자... 이 할아버지는 누구실까?

물론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시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계의 원로 제임스 패커 되시겠다. 무려 동성결혼을 인정한다는 결정에 반대하여 캐나다성공회를 떠나 "보수적" 성공회네트워크로 옮기셨다는 기사에 실린 그림이다.


응? 아무리 성공회라도 그렇지, 성경대로 하는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분이 비성경적이게시리 왜 카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고 난리지? 권위있게 보이고 싶었나? 이거 혹시...? "제임스 패커 프리메이슨", "제임스 패커 배교", "제임스 패커 종교통합"으로 검색해 봐야겠다!


혹은..


뭐야.. 제임스 패커가 신부였어?

책 다 태워버려야겠네!


아마도 이런 생각 하시는 근본주의 성향 신자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게다.

위와 같은 검색유입어가 생겨날 확률이 한 70%는 되지 않을까.

(==> 빙고! 실제로 이런 검색유입어가 생겼다.)


물론 제임스 패커 책은 찢지 않아도 된다. 사도계승을 중시하는 고교회적 경향이 강한 한국성공회는 목회자(pastor)를 사제/신부라고 지칭하고, 같은 용어를 종교개혁 전통을 중시하는 저교회적 경향이 강한 일본성공회는 목사라고 일컫는다. 목사로 부를 것이냐, 신부로 부를 것이냐는 번역상 문제일 뿐 결국 성공회목회자를 일컫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임스 패커를 성공회목회자로 보신다면 굳이 아까운 책 다 태워버릴 건 없다. 아니, 그렇더라도 좌우간 "카톨릭신부처럼 보이는 옷"을 입었으니 책 다 태워버리셔야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다만 이 글 읽으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잘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어쨌든, 성공회목회자는 정말 "가톨릭신부처럼" 옷을 입느냐? 목회자복장이라는 걸 왜 꼭 굳이 하느냐 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 한국교회 전통에선 낯설게 보이지만 이분들은 신기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다. 왜 그럴까?



성공회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그러면, 장로교회는 어떨까?

[그림5] 유리 베리토 목사(미국장로교회)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리폼드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우리나라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에서 유독 좋아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포스팅하는 미국의 한 블로그 필진 가운데 장로교회 목사님 서너 분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한 프로필사진을 걸어놓으셨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근본주의 진영에서 동성애 문제를 승인했다며 분노해 마지 않으시는 PCUSA교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모르니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타고 가셔서 잘 찾아보시고 있으면 기탄없이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중 맨 위에 아브라함 카이퍼의 추종자라고 자기소개하신 목사님 한 분 사진만 걸어두겠다.

왜 굳이 이렇게 하고 있을까?


영국목사님은?


영국교회는 다 죽었고 영국목사는 다 자유주의 엉터리라는 근본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분들이 참고해 보시라고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그림7] 케네쓰 스튜어트 목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케네쓰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이 목사님은 영국의 도완베일자유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개혁장로교단에 가입을 청원한 목사님이라고 최근 기사에 나온다. 이 목사님의 교단에 관해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 원래 스코틀랜드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였는데, 이 교단은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에 통합되지 않은 독립적인 스코틀랜드장로교단으로서, 무려 예배 시 악기까지 사용하지 않았었다. 이 목사님이 도완베일자유교회에 보낸 목회서신과 다른 관련기사들을 대충 훑어 보니 이 목사님은 이 교단이 보수적인 예배의식에 변화를 주는 데 반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교회를 사임하고 더 보수적인 "개혁장로교단"으로 가입하신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떠 있다.


원래 종교개혁자 칼뱅이나 존 녹스는 시편송 이외의 다른 노래를 엄격히 제한했고, 악기도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원조보수를 외치는 우리나라 근본주의 장로교단 소속 교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 기타치고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로 예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분은 어떤가? 찬송을 노래로 부르고 악기를 사용하는 예배의식의 변화 문제로 선후배로 동문수학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함께 연대하여 사역하는 동료목사님들, 함께 신앙생활해 온 교우들이 있는 정든 소속교단을 떠나겠다고 하신 거다! 이거 제대로 보수 아닌가? 그런데 이 보수적이라는 목사님도 목회자컬러를 하셨네? 이 무슨?


이밖에도 구글링을 조금만 해 보면 침례교회오순절교회 목사들까지도 목회자컬러를 한 사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왜들 이러시나?
카톨릭과 종교통합 하려는 프리메이슨의 지령을 받은 WCC의 음모인가?


2. 왜 개신교 목사가 로만컬러를 입고 가톨릭신부코스프레를 하나?


유독 한국교회에선 소위 로만컬러라고도 불리는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해 말들이 많다.(*1)

여기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와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꽤 크다.

법원에서 개신교목사들은 카톨릭코스프레하지 마라며 카톨릭 손을 들어주신 해프닝도 있으시고.

뭐...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 문제였다면 굳이 글을 남겨둘 필요가 없을터.


근데 소위 교회개혁 얘기하는 분들 가운데 이 부질없는 목소리에 부화뇌동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이건 예전에도 몇 번 보고 별 책임 맡은 분이 아닌 듯 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번에는... 책까지 내셨다는 분이 말도 안 되는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언론사까지 차려놓고 나름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 같은데...

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일단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니신 만큼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실명까지 거론하진 않겠다.

그분이 인터넷 구석에 짱박혀 있는 이 글을 읽으실 일도 거의 없을 성 싶지만....

예전 같으면 이런 분의 사이트에 직접 글을 올렸을 수도 있겠다만

이것도 공연한 논쟁의 먹잇감을 던지는 피곤한 짓인지라 한가하게 그럴 새가 없다.

에구... 그래도 이건 너무 답답한 노릇인거다.


혹시라도 보시거든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니하셔도 별 수 없긴 하겠지만...

부디 잘 좀 다시 생각해 보시라.


본인이 모르는 문제에 대해 잘 조사해 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많은 말을 무책임하게들 쏟아 놓는다.

할 때 하더라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과 글을 뱉지 마시길.

제발 좀 어느 정도 알아보신 연후에 그렇게 하셔도 늦지 않다고 정중히 권해 드리고 싶다.

필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한 일이거늘, 특히 영향력 있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3. 목회자컬러 내지 목사가운 문제를 말하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


첫째, 앞서 사진을 통해 분명한 사실: 소위 로만컬러라는 특정형태의 목회자컬러는 세계개신교회에서 널리 착용한다.


둘째, 소위 로만컬러가 로만컬러라고 불리는 까닭은? 가톨릭 신부들이 의무적으로 착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관용적으로 통하게 된 명칭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래 전부터 목회자컬러를 입어왔다. 카톨릭과 다른 점이라면, 목회자들이 소위 로만컬러만이 아니라 개인의 목회철학과 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갖고 있었다.


셋째, 과연 오늘날 목회자컬러는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고, 양복은 그렇지 않을까? 목회자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한 많은 목사들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고가의 양복과 넥타이와 와이셔츠와 고급외제승용차 따위를 지니는 것이 세속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의 훈장 같은 것을 과시하는 게 아닌가?


교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공궤받는 처지에 그럴싸하게 비싼 양복과 구두까지 받아서 목사 복장을 구분하여 세속적 성공을 뽐내라고 대체 성경 어디에 쓰여있나? 레위기라고?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의 하나 혹여라도 제사장 예복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레위기 연구 다시 똑바로 하셔야 한다.


4. 목사가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은?


목회자컬러 착용이 단지 종교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대한민국 개신교회 대부분이 미국의 제2차 대부흥운동의 지류 전통을 이어받아 출발한 데서 비롯된 그릇된 발상이다.


만인제사장론에 입각해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차별하는 목회자컬러 착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일부 동감한다. 그러나 거듭 지적하거니와, 현재 한국교회에서 만인제사장론은 명목(de jure)의 피상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실질적으로(de facto) 고가의 양복과 구두와 와이셔츠와 외제승용차 따위로 자기 신분을 구별하는 행태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는 데 불과하다. 더욱이, 만인제사장론 운운하는 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이유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관계의 출발점은 아니다.


목회자컬러 착용관습이 제2차 대부흥운동 전통에서 낯설게 된 까닭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고 본다. 즉, 드와이트 무디를 비롯한 대부흥운동의 대중전도자들 상당수는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전도자로서 목회자컬러를 착용할 일이 없었다. 대중전도자들의 영향으로 교세가 커진 교회들이 늘어나면서, 그 절대적인 수혜자였던 미국 근본주의나 오순절 계열 교회들에서 목회자컬러 착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 목회자컬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의 장점과는 별개로 -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그림7] 브루스 코놀드 목사 (미국 근본주의 계통 무디 성경학교 출신)


무디성경학교 출신 브루스 코놀드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목회자 컬러를 착용하고자 하는 소수의 미국 근본주의 계통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자신이 목회자컬러를 착용하는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한 가지로 정리한다.


1. 목회자가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한 성경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2. 시각적으로 목회적 소명을 표현하기 위해
3. 세계의 다른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4. 역사적으로 목회자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5. 우리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 목회자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6. 선교사적 마인드로 옷입기 위해
7. 나의 소명을 일깨워주는 표지로서 세속적 복장을 부인하기 위해
8. 개인적 거룩성을 강화하기 위해
9. 나 자신을 모두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0. 우리의 역사적이고도 동시대적인 가치를 살아내기 위해
11. 사순절 기간 동안 일종의 "베옷과 재"로서 목회예복을 입기 위해


나 자신의 입장은?


코놀드 목사님의 경우 근본주의적 교회환경 가운데 자신을 변호해야 할 상황을 만날 수 있는지라 주의깊게 성찰해 오셨던 것 같은데, 나는 딱히 그럴 필요까지는 못 느끼는 터라 굳이 말하면 실용적인 입장이다.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나 목회자컬러 혹은 제복이나 예복 같은 것은 결국 지엽말단의 비본질적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현장의 요구에 유의하여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대처할 수밖에 없는데, 감사하게도 섬기는 교회에서는 회중들이 이 문제에 대해 너그럽고 털털한 편이다. 해서 딱히 양복이나 넥타이나 와이셔츠 색깔 같은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냥 걸쳐 입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지엽말단에 관련하여 온갖 쓸데없는 수군거림 때문에 목회활동을 번잡하게 만드는 교회공동체가 의외로 꽤 있다.

아니, 목사 옷이 자주 바뀌지 않아서 덕이 안 된다고라?

와이셔츠 색깔이 새하얀 흰 색이 아니라서 시험에 드신다고라?

어이쿠... 예수님은 전도여행할 때 두 벌 옷도 갖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마태복음 10:10)

예수님 말씀은 어디로 가고 이 무슨 희한한 율법인가...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목회자컬러 챙겨입고 말겠다.

나 일하는 중이요 하는 공개적인 표시니까!



[덧붙임]

*1: 스톨(영대)이나 수단에 대해서도 참 쓸데없는 말들이 많다. 한 마디만 해둔다. 이게 무슨 종교적으로 권위있게 보이기 위해 걸친다느니,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전통만의 고유복장이라느니 하는 어쭙잖은 원조시비 같은 것들이 따라붙는데...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딨나? 개신교목사가 착용하면 안 되는 특정교회전통의 소중한 고유복장 운운하는 분들은 스톨수단에 관해 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이라도 한 번 열어나 보고들 하는 소린가? 또, 상징적 의미 없이 고가의 세속적 양복을 목사가 걸치고 다니면 만인제사장직에 더 잘 어울리나? 상징적 의미를 담는 예복이면 종교적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엉뚱한 딴생각들 좀 하지 마시라.

2012. 9. 11. 00:49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본 블로그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표에 따라 포스팅을 해왔다. 지금 시점에 와서는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기를 꺼려한다. 근본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분하고 세대주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 세대주의적 근본주의가 있고, 신학적 근본주의가 있을 뿐이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가 깨끗이 나뉘는 서로 다른 실체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대주의로부터 선을 긋는다고 해서 자신이 근본주의의 자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현상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그래도 평판이 좀 나은 미사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자들로선 나름 영리하고 적절한 홍보전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특유의 독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원조보수' 운운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행태야말로 그들이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자임을 스스로 잘 폭로해주는 처사이다.


2. 근본주의는 인신공격의 범주가 아니라 기독교사상사의 패러다임을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몽주의의 대두에 즈음하여 개신교신학의 양대산맥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는 복고보수바람이 불어서 중세 스콜라신학의 개신교버전인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수립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미 유일무이한 정통이 불가능하게 된 서구근대에 정통을 자리매김해 보려고 애쓴 교회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음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던 종교개혁자들의 3대 개혁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의해 재단되고 제한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질문에 대해 사탄의 유혹으로 매도하면서 눈과 귀를 닫은 채 자기복제기능에 골몰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기독교 본연의 복음이 담지한 내러티브가 아닌 자신들이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특정입장에서 벗어나는 모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틸리히의 지적대로 현대의 근본주의는 서구 근대 초기 정통주의에 대한 열등한 현대적 모방이다. (왜 열등한지는 정통주의 신학의 놀랍고도 탁월한 성취를 일부만이라도 살펴 보면 아마 누구나 금방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근본주의는 근대 초기 정통주의 패러다임의 현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동류를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점,

- 그 정통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를 (자신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의) 성경에 거의 법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초시키려 한 점, 

- 자기와 다른 입장에 대해 종교재판과 (음모론과 같이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통한 힘의 과시와 행사를 통해 탄압을 가하려 하는 점


이상과 같은 특징은 근본주의가 서구근대주의의 정신성을 철저하게 재현, 답습하는 근대적 현상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사적 패러다임은 바로 이 근본주의 패러다임이며, 반공근본주의를 비롯한 그 구체적인 양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여러 포스트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3. 한국교회는 패러다임을 전환할 시점에 있다.


근본주의에 대해 역사적으로 반대되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역시 어떤 인신공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영향력을 수용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시대적 사조를 일컫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각각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하여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당연시 하는 반면, 근본주의는 역사비평적 성경읽기를 매우 꺼려하고 불편해 한다.


예컨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라는 주제에 관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양쪽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에 근거해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것이고, 자유주의는 역사비평을 동원해서 여성에 대한 바울서신에 대한 기록을 상대화해 버릴 것이다. 


두 패러다임의 약점은 분명하다. 


자유주의는 시대정신을 주로 섬기는 나머지 주로 섬겨야 할 성경의 내러티브를 파괴해 버린다. 자유주의가 근대의 정신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경에서 비롯되는 복음적 내러티브를 파괴한 역사적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오류가 명명백백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시대정신인 서구근대계몽주의 자체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구태의연하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신학이 보여주었던 최선의 의도에 배치된다. 


근본주의는 어떤가? 근본주의의 경우는 그래도 세계대전과 같은 대형사고를 치지는 않지 않았는가?(*1) 그러나 근본주의의 비복음적 시대착오성은 이미 기독교 전체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정신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가 복음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겨 펼쳐온 힘의 정치는 인간이 약한 데서 더욱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아울러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수적 증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적 부흥이라기 보다는 현대자본주의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윤추구 형태를 보다 닮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요청된다.


이 제3의 길은 기독교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러티브, 기독교 본연의 메시지에 충실한 방향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로 들자면, 성경의 문자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인간해방의 복음으로부터 여성이 더 이상 교회직제라는 수단을 통해 억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기록된 여성에 관련된 기록으로부터 이 인간해방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해석의 강조점을 두도록 하는 것이다.(*2)


역사비평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언제든지 성경 본연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역사비평방법의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복음적 해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방법이 아니라, 이미 널리 행해져온 성경해석방법이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혹자는 '후기자유주의'라고도 부르는 이 신앙의 길 역시 이미 칼 바르트 같은 분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뚜벅뚜벅 걸어온, 복음의 정신에 진정 부합하는 '좁은 길'이다.



[덧붙임]


*1: 근본주의의 정신적 조상인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유럽제국들의 세력다툼에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일종의 전쟁이데올로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30년 전쟁의 실상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스페인이라는 라이벌가톨릭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개신교국가들을 지원했던 데서 보듯이 각국의 세력다툼이 본질이었다.

*2: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여성안수를 허용하면 동성애자안수까지 허용하게 된다는 것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자신들의 성경주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장통합과 동일한 신학노선을 앞서 걸어간 미국 최대 규모의 장로교단인 PCUSA에서 최근 동성애자안수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비춰 볼 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우려와 별개로, 과연 그들의 성경주해가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한 정확한 읽기가 선행되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소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더 관심이 있는 분은 스탠리 그렌츠와 데니스 키예스보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하시라.) 여기서 문제는 여성사역자들의 입지에 대해 기존의 근본주의적 성경읽기가 간과했던 부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과연 성경전체에 흐르는 인간해방 메시지에 얼마만큼 부합하느냐 라는 물음이다.

동성애 문제도 근본주의의 문자적 해석방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단죄와 저주로 결론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성경의 문자 배후에 흐르는 진정한 계시의 정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아듣는 경청 없이 너무 성급하게 내려진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어야 한다거나, 인간해방 메시지에 비춰볼 때 동성애자에게 안수를 주는 게 합당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많은 다른 물음들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 않으며, 개별적인 사례별로 정확하고도 사려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