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02:02

칼 바르트와 좌파

칼 바르트는 20세기 이후 현대신학의 교부로 자리매김되었다. 바르트가 제기한 문제, 그리고 그의 신학정신을 이어받은 신학적 후예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현대신학의 화두를 규정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바르트의 신학적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르트가 이렇게든 저렇게든 형편없다고 폄훼하는 것이다. 후자의 방식은 신학적 근본주의 진영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국내에서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워낙 큰 만큼 이 태도가 단호하고 고결한 것처럼 그럴싸하게 먹혀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는 세계신학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할 수 있는 태도다.

반면, 정치적 근본주의 진영의 태도는 좀더 교묘하다. 
예컨대, 지난 번 무상급식 논쟁 때 나타났듯이 자신들의 수구적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전거로서 어처구니 없게도 칼 바르트를 들먹인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바르트의 신학적 위대함을 일단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신학적 입장, 즉 어용적이고 반공적이고 친기득권적인 우파 노선을 선전하는데 바르트를 들먹인다. 문맥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 할 뿐 아니라, 바르트가 좌파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했던 시대에 우파 복음주의로 전향해서 궤멸시켰다는 식의 논조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 두어야 할 사실관계가 있다.

첫째, 칼 바르트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좌파적 정치성향을 여러 차례 분명히 표현했다. 그러니까 반공주의 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때 칼 바르트는 빨갱이목사였던 거다! 수구목사들이여, 차라리 칼 바르트가 빨갱이라며 참소하시라. 

둘째, 수구목사들은 정치적 좌파와 소위 신학적 '좌파'를 혼동하고 있다. 바르트 이전 자유주의 신학은 정치적 좌파와 우파 모두에 걸쳐 있었다. 독일의 전쟁선언을 지지한 친기득권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과오를 저질렀지만, 영향력에 있어서 그들에 결코 못하지 않았던 19세기 영국성공회의 위대한 광교회주의자 프레드릭 모리스나 유럽대륙의 종교사회주의자들은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 좌파였다.

소위 복음주의 신학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그야말로 한줌에 지나지 않는 소수의 이른바 '좌파' 복음주의자들 외에 수구적인 친기득권성향의 '복음주의자'들이 대부분이 아닌가? 
우리나라 복음주의자들이 오매불망 사모하는 미국 복음주의도 사정은 그렇게 나을 것이 없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그러나 복음을 들먹이면서도 수구적 기득권을 결사옹위하는 이들의 진면목은 정치적 근본주의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바로 이들 정치적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히틀러와 같은 자가 나타났을 때 저 독일 그리스도인 교단(Die Deutsche Christen)이 그렇게 했듯이, 박정희, 전두환 때 그랬듯이 '우리 민족을 위한 메시아'라면서 두 손 들고 아멘을 부르짖으며 영접할 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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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3. 14:31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1936)라는 책은 종교개혁자 칼뱅을 자기 견해와 다르면 검열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히틀러와 다름없는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1) 꽤 오래되었지만 칼뱅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즐겨 입에 오르내리는 책이다.

칼뱅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이미 종교개혁 당시부터 로마가톨릭 호교가들이나 칼뱅의 정치적 적수였던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이 유포해 온 일종의 진부한 신화에 불과하다. 이런 진부한 신화의 진원지인 로마가톨릭에서조차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부정적 신화의 일방적 이미지가 걷혀진 연구들이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근대적 가톨릭문화에 익숙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에 대한 태생적 가능성이 전근대적 가톨릭문화를 토양으로 히틀러가 득세한 암울한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이라는 기후를 만나면서 열매맺게 된 그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유독 칼뱅과 종교개혁인가?

사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칼뱅과 종교개혁을 겨냥해 히틀러의 전제정치와 같다고 비난한 유일한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은 아니었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에리히 프롬 역시 루터와 칼뱅을 히틀러에 견준 바 있다. 다시 말해, 당대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들에게 칼뱅과 종교개혁교회가 히틀러와 다름없다고 규탄할 건덕지가 뭔가 있었던 게다. 그게 뭘까?

칼뱅과 종교개혁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의 규탄만 들으면 정말 뭔가 칼뱅과 종교개혁 자체에 히틀러스러운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정짓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규탄은 중상과 뜬소문과 오독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었고, 번짓수도 합당치 못했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내적 동기가 그들의 규탄을 규정짓고 있는 측면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이 칼뱅과 종교개혁, 나아가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그들 자신의 내적 동기로서 히틀러에 대한 당대 독일개신교의 ('독일 그리스도인' Die Deutsche Christen 이라는 조직을 매개로 한) 어용적 행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소통속도의 한계로 말미암아 농민들에 대해 잔인한 무력진압을 독려한 꼴이 되어 버렸던 마르틴 루터와 달리, 쟝 칼뱅가 '박해'했던 적수는 세르베투스(*2)나 카스텔리오 같은 당대의 (나름 저명한) 소수파 인문주의 지식인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칼뱅은 이들 모두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자들의 운명만 화형이나 추방이었던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칼뱅이 사역한 처음 4년 동안 58명이 사형당했고, 76명이 추방당했으며, 처음 5년 동안 35명이 화형당했고, 13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식의 숫자는 전시상황이나 다름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힌다.(*3) 따라서 독일 그리스도인 교단의 준동에 따라 히틀러의 어용종교 노릇을 한 독일개신교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치를 떨었던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에게 칼뱅이 루터보다 먹음직스런 떡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분노와 환멸의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사실 유럽의 개신교인들조차 독일개신교회가 저 히틀러의 악마적 어용종교 노릇을 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와 마르틴 니묄러 등이 바르멘 신학선언을 발표하고, 독일고백교단이 세워졌으며, 이 교단의 주요 지도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암살기도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아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개신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루터와 칼뱅에게 분노와 증오를 전이한 유럽개신교인들도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목사였던 쟝 쇼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츠바이크를 부추겨 칼뱅에 악마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카스텔리오를 미화하는 전기를 쓰도록 독려했다.

쟝 쇼레와 같은 정신적 동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종교개혁자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는 엄정한 사태 자체의 사실관계에 부합되는지 여부에 비추어 가늠할 필요가 있다. 내적 동기가 앞선 나머지 사실관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칼뱅에 대한 비난 자체는 사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츠바이크 자신의 내적 동기가 너무 앞선 나머지 엄정한 사실관계를 가리워서, 그의 강렬한 규탄에 진부한 선입견의 무비판적 추종으로서의 악(한나 아렌트)이라는 작가 자신이 목도한 시대적 악의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히틀러와 전체주의, 그리고 그러한 체재가 배제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호소라는 내적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 검열과 협박, 폭력을 들이대는 행태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요즘 현 정권과 대형교회, 개신교계, 심지어 가톨릭 쪽에서까지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건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어둡고 답답하게 한다. 특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우리 한국개신교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나름대로 그린 '사악한 교조주의자 칼뱅'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4)


[덧붙임]
*1: 유명세가 덜하긴 하지만 이보다 한 세대쯤 앞서서 영국의 역사가 로드 액턴도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역사화했다. 로드 액턴 역시 열렬한 가톨릭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처음 역사화한 장본인은 아니었다.

*2: 세르베투스를 '무지막지한 개신교 교조주의자' 칼뱅에게 '부당하게' 희생당한 '인문학자'로 보는 시각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에 있어서 세르베투스를 부당한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칼뱅의 소위 '잔혹함'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애당초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한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의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었다. 방종파도 세르베투스 문제를 기화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조차 세르베투스에게서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베투스는 특히나 기존신학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지만 딱히 혁신적이거나 참신한 구석이 없는 황당하고 괴상한 이론들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을 즐겨한 일종의 극단적인 '악플러' 같은 인물로서, 당시 유럽 어디를 가나 가톨릭권과 프로테스탄트권 공히 이단자로 낙인찍혀서 당시 사회통념상 어떤 식으로 처형되느냐만 남아 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마지막 관용으로서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한 참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칼뱅이 아니라 가깝게는 제네바 시의회요 크게는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한 유럽사회의 법적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세르베투스는 화형으로 사형집행된 것이다. 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던 제네바 시의회 방종파 세력이 세르베투스에게 극형을 내렸을까? 방종파 세력에게도 당대의 법적 통념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도덕적 명분을 시위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칼뱅이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칼뱅과 제네바 시의회를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통념에 따라 단순하게 동일시한 세속화한 후세사람들이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3: 유시민씨가 최근(2013년) 출간한 그의 책에서 칼뱅을 전체주의자요 자신의 신학이론에 오류가 없다고 믿었고 공포정치를 감행했던 광신자라고 평했던 것 같다. 유시민씨의 발언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받아쓰기한 카스텔리오의 중상모략을 칼뱅의 학살설의 사실관계 증언으로 받아들인 케이스가 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감스럽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인으로서 책을 통해 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마 유시민씨는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기에 충분히 정당하고, 반면 칼뱅이나 한국개신교가 허술하고 만만하면서도 부조리하게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어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발언은 칼뱅에 대한 왜곡의 도가 지나치다. 본인은 유시민씨에 관해 정치인으로서는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 아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말조심을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잘 모르는 문제에 끼어들어 말을 함부로 하면서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처사는 적어도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면 실망스러운 처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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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0. 05:55

과연 대통령이 장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대선이 되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장로를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거세다. 지금도 장로대통령을 지켜준다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의 주류개신교회는 이 어려운 시국에 너무나도 잠잠하다.

그러나 기독교인, 또는 장로가 대통령 노릇하는 그 자체를 과연 하나님이 바라실까?

1. 기독교인 혹은 장로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이라는 성경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약 열왕기나 역대기, 혹은 예언서를 읽어 보면,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임금들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힘써 살아낸 다윗과 요시야, 히스기야 같은 몇몇 임금들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 때 예언자의 예언이나 정치적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혹독한 책망과 징계를 겪어야 했다.

아무개 장로, 아무개 권사, 아무개 안수집사 따위의 신분 자체가 그가 지닌 정치적 비전이나 실천에 아무런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2. 기독교인 혹은 장로로서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남북전쟁 당시 남쪽도 북쪽도, 그들의 지도자들도 모두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치하의 교회도 하나님께 기도했다.

미국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링컨은 참된 기도를 했고 나머지의 기도는 거짓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당신의 기도, 아무개 장로의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거짓기도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무엇인가. 승승장구 잘 나가기 때문인가. 자신의 기도야말로 참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형교회를 건설하거나 이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된 기도라는 증거가 되는가. 성경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승승장구가 그들의 선의나 공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개 장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예수께서 승인하신 기도는 바리새인의 유창하고 겉보기에 거룩한 기도가 아니라 죄많은 세리의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도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뉘우침과 돌이킴이야말로 성경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참된 기도의 증거이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개 장로의 정치적 비전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은 새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정치판에서 이런저런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면 교회는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 아니다. 그 아무개 장로가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비전을 품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도해왔느냐, 하나님의 응답에 어떻게 순종해왔느냐를 다른 누구보다도 까다롭고 꼼꼼하게 짚어주어야 한다.

3.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시기도 하신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수도 없이 제사를 드렸을 유다왕이나 그 후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고레스를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셨다. 고레스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할 비전과 역량을 지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그가 단지 독실한 기독교인이거나, 교회활동에 열심이고, 쓰는 언어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익숙하게 들어왔다는 까닭에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그와 그가 감당할 나라와 겨레가 맞이한 역사적 과제 앞에 어떤 종류의 비전과 역량을 지녔느냐 여부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과연 이 시금석에 따르면 지금까지 나온 장로대통령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들이었는가? 아니면 기독교라는 좁은 이익집단의 붕당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기득권집단화를 도모해주는 정상배에 지나지 않았는가?

아합왕과 같은 정치지도자라면 그가 기독교인이라도 교회가 예언자적 비판을 해야 마땅하다. 타종교를 믿는, 심지어 기독교에 비판적인 정치지도자라도, 그의 비전이 역사적 과제에 합당한 것이라면 교회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누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청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장로대통령을 뽑아야 하고, 장로대통령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로지 성원과 지지만을 보내야만 한다는 소리가 소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는 평판을 누리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교회는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탑재해야 한다.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아무개 대선후보, 아무개 국회의원후보가 기독교인이고, 교회직분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바알신앙적 행태를 그치고 예언자적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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