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빈치코드 이후 다빈치코드에 담긴 반기독교적 개념들이 사실로 둔갑하여 보도되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가룟 유다 복음서에 대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터무니없는 과장광고가 그랬고,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나의 아내"라고 불렀다는 콥트어 단편이 발견되었다는 하버드신학대 캐런 킹 박사의 학술적 발표를 선정적으로 기사화하는 보도행태가 그랬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먹고 살려니 별 짓을 다한다, 이런 얘기를 받아적기하는 기자들도 신학적 기본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탓이지 하고 웃어넘겨 왔는데, 이런 간단한 유언비어에조차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마저 낚여서 헤매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있는 것 같다. 교회의 선포와 교육의 장에서는 이런 내용이 다루어지기가 여의치 않은 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간단하게라도 사실관계를 밝혀둘 책임을 느낀다.
우선,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진실을 새로 밝힌 것은 없다. 작가 댄 브라운은 거기에 나오는 사실관계가 "모두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이것부터가 거짓말이다. 그가 한 일은 고대 영지주의 문헌에서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그것도 부정확하게 끄집어내어 자신의 반기독교적 의도에 맞게 개작했을 따름이다.
고대 영지주의 문헌이라면 소위 역사적 사실 여부에 정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웃어넘겨주어야 한다. 영지주의란 요새 말로 '의미', '뜻'이 중요하지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열등하다고 간주한다는 주의였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 복음서니, 무슨 콥트어 단편이니 하는 것들을 교회와 신학이 몰랐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목록과 내용이 다 알려져 있다. 여기에 대한 새로운 발굴성과나 연구결과가 나오는 것은 영지주의 연구라는 특정 신학분과의 성과에 벽돌 한두 장 얹어놓는 정도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실관계 측면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란? 고대인들이 예수에 관해 구라친 역사적 기록, 또는 화장실에 애들이 끄적거린 낙서 비슷한 성질의 것이 하나 더 얹어졌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경, 그 안에 담긴 사복음서야말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대교회의 검증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게 기독교에 불신과 의혹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곧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기록이 전설의 고향 쯤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코메디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성경의 기록을 전설의 고향 쯤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싶어할 정도로 투철하게 "비판적인", "역사비판적인", "반기독교적 현대인"이 고대 영지주의 문헌에 나온 쉰 떡밥을 덥썩 물고 희희낙낙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무슨 얘길 해도 기독교 안티질을 그만두고 싶지 않으실 분들이야 쉰 떡밥으로 무엇을 하시든 더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쉰 떡밥 덥썩 물고 배탈나시는 해프닝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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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2015.07.19]
캐런 킹 박사가 발표했던 문제의 콥트어 단편이 위조된 것이었다는 쪽으로 결론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둘 내용:
- 가룟유다복음서와 마리아(막달레나)복음서 자체는 이미 그 존재와 내용의 윤곽이 알려져 있다. [예컨대, 각각 Schneelmelcher (ET1990):386f, 391f.] 따라서 이런 영지주의 계통 신약외경들의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 그러면 캐런 킹 박사의 콥트어 단편에 왜들 이리 호들갑인가? 가룟유다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노이즈마케팅에 불과한 비루한 짓거리다. 모르긴 몰라도 캐런 킹 박사도 좀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알려져 있던 신약외경 일부의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정도 얘기를 갖고 신약정경의 예수상이 무너졌다고 나팔 부는 자들은 도대체 뭔가? 양심불량이 아니라면 자신의 무식과 태만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 그나마 문제의 콥트어 단편조차 조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고대의 종교적 낙서 유물이 발견된 줄 알았더니 현대의 고대낙서유물 흉내질이었던 얘기. 저명한 초기그리스도교연구가 캐런 킹 박사 개인이 조작질에 연루되지 않았으리라는 건 다행이고. 반기독교적 떡밥이 뭐가 더 남았나?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룩은 CFR 관련기관인 RIIA에 참여했는데 CFR은 프리메이슨 기관이다. 그는 로드차일드은행에도 관여되어 있는데 로드차일드 역시 프리메이슨에 관련이 있다. (중략) 프리메이슨이 분명한 그가 빌리 그래함의 메시지가 미국에 필요하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이 아닐까?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이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가장 세속적인 언론재벌이었다. 그런 그가 빌리 그래함을 처음 언론에 소개했고, 비행청소년선도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Youth for Christ에 관심을 보였다. Youth for Christ는 빌리 그래함이 주도한 단체다. (중략) 허스트는 유산이나 AIDS치료를 장려하는 단체에 지원금을 주기도 했고, 소위 기독교적이면서도 친게이 성향이고 오컬트적인 책을 출판했다. (이런 사람이 빌리 그래함을 띄워줬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다.)"
간추린 글에서조차 역력히 나타나는 난삽함은 둘째치고라도, 그 하나하나가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정확한 근거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어차피 실체가 베일에 싸인 비밀결사에 관한 얘기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프리메이슨을 빌리 그래함에 연결짓는 까닭이라는 게 참 빈약하지 않은가? 해석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이를테면, 바룩이 빌리 그래함의 메시지가 미국에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유명인사가 자신의 이해력과 포용력을 과시하기 위해 내뱉은 의례적 언사였을수도 있다. 이게 "빌리 그래함 = 프리메이슨"의 증거로 보인다면 모든 것을 프리메이슨으로 몰아넣는 깔때기가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서는 아닐까?
언론재벌 허스트 이야기의 경우 Youth for Christ에 대한 사실관계도 미심쩍거니와, 빌리 그래함을 띄워준 언론재벌이 세속적인 인물이었다는 얘기는 정치인들이 주로 쓰는 저열한 인신공격과 별 다름이 없다. 언론재벌이 빌리 그래함의 전도사역에서 화제성과 스타성, 한 마디로 '돈이 될 만한 냄새'를 맡았을 수 있다. 그렇다고 빌리 그래함의 부도덕함이나 거짓됨이 입증되는 걸까?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여러 블로그에 올라온 글에 기록된 그의 발언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은 전세계의 크리스천 그룹뿐만이 아니고 크리스천 그룹이 아닌 자들로도 구성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안다면,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간에, 그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인 것입니다. 나는 온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큰 부흥이 조만간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사도행전에서 말했듯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 모슬렘 세계에서나, 불교도 세계에서나, 기독교 세계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세계에서 백성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르셨으므로,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인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마음속에서 자기들이 갖고 있지 않으나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알며, 자기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빛으로 돌아서려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받은 것이고, 우리와 함께 천국에 가게되는 것입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 혹은 그룹 등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눈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