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7. 06:41

영화 "손님": 처절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

이제 더 이상 못 믿을 신문방송을 보거나 듣지 않고 관심 가는 분들이 페이스북 계정에 올려주시는 목소리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 언론장악과 여론조작의 이 시대에 이 편이 훨씬 정확하고 공정하다.


다만 구독중인 페이스북 계정이 이제 한 200여 종쯤 되니까 올라오는 소식들이 하도 많아 너무 빠르게 업데이트된다. 해서 찬찬히 정독할 새 없이 쭉 훑어 읽다 보면 한 번 읽었던 좋은 글을 다시 찾아내기 어려울 때가 꽤 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독하는 소식들을 훑어보던 중 영화 "손님"에 대해 어떤 분이 써주셨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훑어 보면서도, 글에서 풍기는 아우라만으로도 야 이거 뭔가 있는 영화로구나, 한 번쯤 봐야겠구나 라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정말 좋은 글이었다. 근데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다 보니, 뒤늦게 어느 분이 어떤 내용으로 쓰신 글인지 궁금해지는 거였다. 어떤 분 글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용은 틀이 근사하다는 것만 눈길을 주었던 터라 더더욱 모르겠다. 언제 다시 마주쳐질지나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글 검색기능도 없어서 어찌 해 볼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 (아마 느부갓네살왕이 간밤에 꾼 중대한 꿈이 기억나지 않아 환장했던 심정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여간 찬란한 아우라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 글 덕분에 나도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잘 알려진 동화의 플롯을 전유하여 처절하게 분단된 우리 한국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내러티브에 담아낸 근래에 잘 못 보았던 놀라운 영화다. 글재주가 워낙 미천하여 어떻게 더 감탄의 마음을 표시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진부한 동화의 제재로부터 이토록 탁월하게 우리 현대사의 전망을 오롯이 담은 내러티브로 빚어내신 감독과 이 영화를 용기있게 제작하신 제작자분들께 진심으로 경의와 찬사를 보내드린다. 이런 분들을 소중하게 잘 지켜드리는 것도 우리 시대의 깊은 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영화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1.1 지도에조차 없는 한센병 환자 마을에 전쟁피난민들이 와서 한센병 환자들과 무당을 죽이고 마을을 빼앗았던 배경은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와 전쟁중일 때 친일파와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부역한 자들이 일제항거세력인 빨치산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고 사회기득권으로 변신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1.2 촌장은 일제시대 군인과 같은 유의 사람이었다. 당연히 촌장은 국가권력을 찬탈한 박아무개 무녀와 그 부역세력(일본도와 군복), 그리고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게 셋팅해 준 이승만(짧은 머리와 두루마기)을 합친 캐릭터에 상응한다.


1.2.1 영화 속에서 절대권력자인 촌장은 가장 많이 배웠고, 가장 경륜이 풍부한 인물이다. 이땅의 기득권자들은 결코 얕볼 수 없는 정보망과 경륜과 선동능력을 소유했다. 증오와 대결 프레임이 갇히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대상을 너무 우습게 보는 패착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결코 무식하거나 우습지 않다!


1.3 예전 한센병자 마을 시절 실질적 촌장이었을 무당이 사회적 소외계층 내지 약자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진정한 정신적 지도층이 형상화한 캐릭터라면, 손님들이 거짓과 폭력으로 빼앗은 마을의 선무당은 지배층의 거짓과 폭력에 영합함으로써 생존(과 번영)을 꾀한 한국현대사의 어용종교 및 어용지식인계층에 해당된다. 어용종교의 부끄러운 선무당질에 견주면 그래도 영화 속 선무당은 일말의 고운 순정이라도 남아 있는 수동적 캐릭터였지, 한국사회의 어용종교는 정말..... 에휴.

 

1.4 주인공 피리부는 사나이는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이 땅의 민주적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다. 탄압세력과 투쟁하는 가운데 다리를 절게 되셨던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나라의 주인인 시민들 앞에서 광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가 기득권자들의 여론조작질로 사회적 타살을 당하셨지만 노란 색 바람개비와 리본으로 민주시민들에게 추모와 그리움의 대상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 피리부는 사나이의 캐릭터는 두 분 대통령의 특징을 모두 담았다.


1.5 쥐새끼들로 들끓는 마을은 친일기득권자들이 내세우고 세뇌시킨 바, 생존이 우선한다는 얄팍한 명분의 성장신화, 성공신화를 숭배하면서 공평과 정의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억압해 온 대한민국의 현재에 상응한다.


1.5.1 피리부는 사나이의 권능은 양심이라는 인간의 진정성 있는 욕망을 일깨워주는 데서 비롯된다. 피리부는 사나이가 쥐새끼들을 일소했던 것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에 이전 기득권자들의 패악질을 잠시나마 억제하면서 정의와 자유가 살아 숨쉬는, 부강한 민주복지국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에 견줄 수 있다.


1.5.2 문제는 피리부는 사나이의 공헌에 마을 사람들이 전혀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것. 아니, 내심 고마워하다가도 그놈의 종북좌빨 나팔질 한 방이면 모든 사실관계가 뒤엉켜 버리고, 감사와 존경 대신 인신에 대한 비겁한 흠집내기와 집단구타질 해대면서 지들 사는 데만 급급하느라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와 염치는 안드로메다로 고이 보내버린다는 거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자신들에게 은덕을 베푼 피리부는 사나이일지라도 수틀리면 빨갱이간첩으로 몰아 그 주변사람들에게까지 사회적 타살과 독살을 감행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파렴치하고 뻔뻔하다. 우리 모두가, 나 자신부터가 이모양 이꼴이다.


2. 영화는 한국사회의 앞날을 율법의 원리로부터 전망한다.


이 영화가 반드시 "율법의 원리"라는 신학적 전망을 의식했으리라는 뜻은 아니지만, 영화가 내러티브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학적으로 볼 때 (죄와 사망과) 율법의 원리에 상응한다.


2.1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 계속: 그는 죽음의 천사 캐릭터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글자 그대로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예언되었던 하늘의 진노와 심판을 수행하는 죽음의 천사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선무당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그의 역할은 "셈은 셈이니까!"라는 극중대사로 집약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로마서 6:23))


본인이 본 죽음의 천사 캐릭터에 관해 약간 설명의 우회로가 필요하다.


죽음의 천사란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유명한 열 재앙 이야기에도 나온다.(출애굽기 7~11장)

열 재앙 이야기란 착취하는 기득권자들에게 하나님은 약자들을 풀어주고 사람다운 삶을 회복해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무려 열 차례나 베푸신다는 이야기다.

죽음의 천사는 열 번째 재앙 때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진노의 심판을 수행할 때 언급된다.(출애굽기 12:23 "멸하는 자")


이 이야기에서 기득권자들은 막대한 손실과 타격을 입으면서도 절대로 기득권을 내어놓지 않았다.

하여,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 애굽 파라오의 장자에서부터 짐승의 첫 새끼까지 죽임 당하는, 그야말로 하드코어 최후통첩을 받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들과 애들까지 잔인하게 죽여야 하냐고?

하나님이 그렇게 치졸하고 쪼잔하냐고?

애굽 기득권자들의 패악질이 그보다 더 했을 거라는 생각은 왜 안 하나?

부모의 죄악이 그 자식들에게 똑같이 물려지고 있지 않은가?

그 죄값을 어찌 다 갚아야 하나?

생명은 생명으로, 죽음은 죽음으로다.

이 영화 대사처럼 "셈은 셈이니까!"

철모르는 애들이 걱정일 만큼 분별 있는 어른들이라면 진작에 잘 했어야지. 

경고가 있으면 이제라도 잘 했어야지.

근데 이 황당한 어른들 보소.

지금까지 아홉번이나 경고를 받고 빈말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텐데 들어 쳐 먹질 않네.

지 애들 목숨보다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입을 손해가 더 아까웠던 거다, 이 인간들은.

이때 하나님께서는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어야 할 약자 히브리인들에게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도록 한다.

사자나 곰의 피가 아니라, 앞뒤 분간 못하고 약간 모자라고 약한 짐승의 대명사 어린양의 피다.

어린양 피를 바른다는 건 이 집이 바로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약자 히브리인의 집이라는 표시였다.

이 피의 표시를 넘어 약자인 히브리인들의 피값에 대해 애굽의 죄를 묻는 정의로운 심판을 수행한 존재가 바로 죽음의 천사였다.

히브리인들이 지들이 약자랍시고 어린양의 피를 발라두지 않고 버텼다면?

그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가해자 신세인데 죽음의 천사 앞에서 무사할 리 없었다.

죽음의 천사는 결국 공의와 정의를 가차없이 적용했을 때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로서, 또한 고귀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존재를 훼손한 하나님 영광의 찬탈자로서 하늘의 진노를 아무도 피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영화 속 죽음의 천사 역할을 떠맡은 피리부는 사나이 자신도 인간으로서 죽음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2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 조금 더: 그는 하늘의 의를 수행하는 낯선 존재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손님, 낯선 이다.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낯선 존재다.

그의 낯선 존재는 결국 마을사람들의 익숙한 삶이라는 우상을 완전히 깨뜨려 버릴 굴러 박힌 돌, 아니 뜨인 돌이었다.

물론 뜨인 돌은 구약 다니엘서(2장 특히34~35절)의 표현인데, 신약적 관점에서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피리부는 사나이는 영화속에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 채 죽음의 폐허만을 남기는 존재다.

이점에서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메시아적 구원자는 아니다.

그의 역할은 오로지 죽음의 천사, 즉 진노와 심판의 집행자였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원리(로마서 7:11 등)를 관철하여 그 끝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이 영화가 호러물적, 공포물적 내러티브로 자리매김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2.3 쥐떼들의 폭주는 누구 탓?


마을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욕보여서라도 자기들은 살아야겠었다.

현대한국사회도 무고한 사람들 죽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겠고, 좌우간 경제는 살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음험한 사기를 일삼는 협잡꾼을 나랏님 자리에 떠억하니 앉혔고...

이 나라엔 다시 온갖 쥐새끼들이 백주대낮에 들끓어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있다.

사대강을 녹조라떼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도 차지 않은 돈 놀이에, 허장성세 겉보기 치장을 위한 자원외교질에 시민들의 목숨과도 같은 혈세가 백조 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돈이 탕진되었다.

앞으로 얼마가 더, 또 얼마나 같쟎은 이유로 탕진될 지 누가 알겠는가?

나라꼴이 이 지경인데도 빨갱이종북놀음 나팔질 한 방이면 모든 게 가뿐히 덮이는 우리 한국사회는 위대하신 영도자 촌장님께 삼가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고 있다.

우리의 딱하고 안타까운 북한 동포들처럼 100%로 수렴해야 하는 충성이 아닌 건 그나마 다행이다.

100%의 대한민국을 꿈꾸는 자들이 비판하는 목소리를 종북좌빨로 매장시키려 들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1번만이 정답인 30%의 그네들에게 있어서 그 봉건적 충성은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근데 이 콘크리트적 충성이 자신들의 숨통을 점점 죄어 들어가고 있다는 걸 까맣게 깨닫지 못한다.

이놈도 싫고 저놈도 싫다는 헛똑똑이들은 지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숨통이 점점 죄어 들어가는 걸 그냥 넋놓고 보고만 있다.

그 눈먼 충성 때문에, 그 헛똑똑한 수수방관 때문에 자자손손 미래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도, 모든 경고의 징후들 앞에서도 눈앞의 이익과 안일함이라는 덧없는 신기루를 절대 포기못한다.

딱 출애굽 열재앙 이야기에 나오는 애굽 기득권자와 그 추종자들 얘기 아닌가?


이건 누구탓?

죽음의 천사가 빡 돌아버린 탓?

하나님이 쪼잔하고 속좁은 탓?

화해와 용서로 통크게 굴지 못하고 쪼잔하게스리 속좁게 한을 품고 울부짖는 이땅의 약자들탓?

어쨌든 니들 탓은 절대 아니지?


우리의 양심불량과 완고함 때문에 한반도의 주인이 될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오늘도 도둑맞고 있다.

피리부는 사나이에 이끌려 마을 아이들까지 죽음의 돌무덤, 스올의 어둠에 갇혀 서로 먹고 먹힐 비극적 최후를 암시하는 무서운 결말은 이대로라면 단지 영화의 판타지만으로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3. 영화에서 나오며: 복음의 원리로부터 전망 가능성은?


율법을 말했으니 복음을 말해야지 않겠냐고?

복음의 원리로부터 입에 발린 화해와 용서를 말하면 그게 과연 정말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일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먼저 이 진정성 있는 탄식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들려야 한다.

그 전에 어찌 감히 화해와 용서를 주문 읊어주는 기계처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이 탄식이 정말 진정성 있다면, 감히 가해자 주제에 지들이 억압한 피해자에게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고 강제하는 따위의 폭력을 백주대낮에 저지를 생각은 할 수 없다.

진정성 있는 탄식이 들려지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의 백주대낮에 파렴치한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진정성 있는 탄식으로 울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부끄러움과 아픔으로 심장이 터질듯 해야 한다.

그 자리에 한국교회가 최소한 있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어쩌면 다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재를 쓰고 내려와 있는 딱 그만큼이 진정한 한국교회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어두운 스올의 돌무덤 속에서 복음을 선언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지금 대체 어디 있는가?

아직도 어쭙잖게 사람 잡는 선무당 노릇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대체 종북좌빨 주문에 홀연히 정신줄 놓고 백주대낮에 쥐떼 노릇이나 하는 부끄럽고 딱한 신세는 아닌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