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사대강사업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정권, 친기득권적 행보를 보이면서 김수환 추기경을 그리워하던 한국천주교 안팎의 많은 사람 가슴이 더욱 휑하고 추웠다.
그나마 정의구현사제단의 지속적이고 올곧은 정권비판이 있어서 위안이 됐지만, 이 역시 천주교 일부 고위층의 억압과 견제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만난 상태였다.
이 나라의 공평과 정의가 심각한 위협을 맞이하고 있는 이 암울한 시국에 원로사제들이 추기경에게 용기있게 용퇴권고를 한데 대해 아낌없는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개신교 목회자들도 조국의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담긴 성명을 내주길 촉구한다.
특히 개신교회가 역사의 현실에 동참하는 데 장애물 노릇을 하고 있는 정교분리원리라는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해 재고하기를 요구한다.
정교분리원리는 어용교회가 실제로는 불의한 정권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역하면서도 표면적 무관심과 몰가치한 중립으로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 왔다. 좌파빨갱이정치목사를 힐난하는 바로 그들이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반동적 극우주의 행태를 보이면서 이를 신앙과 민주주의의 미명으로 포장해 왔다. 적어도 주기도문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단지 교회나 영적 세계만이 아니라 피조세계와 역사의 현실에도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금과 같이 정교분리원리가 악용되어 온 현실에 대한 정당하고 겸허한 신학적 비판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사제들의 기도와 호소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5,26)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1. 우리는 평생토록 사목에 헌신하다가 이미 사목 현장에서 물러났거나 조만간 은거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노년의 사제들입니다. 우리는 지난 12월 8일, '4대강사업'과 관련한 서울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말씀을 들으며 서글프고 안타까운 심정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신앙의 책무로 알고, 세상 만민에게 봉사하며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제의 신원과 사명을 생각할 때 매우 부끄럽고 비통하였습니다.
사제단의 충정을 지지한다.
2. 우선 이 문제에 대해 사흘 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서의 취지에 지지와 동감을 표하고자 합니다. 부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줄기차게 헌신해온 이 젊은 사제들의 충정과 호소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견을 제기하였다고 하나 이는 사회의 일각에서 오해하듯이 장상에 겨냥한 비난이나 반박으로 볼 일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교회공동체를 향한 그들의 사랑과 헌신의 열정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보더라도 4대강사업은 중단되어야 맞다.
3.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은 국론을 크게 분열시킨 4대강사업에 또 하나의 의견을 보태고자 함이 아닙니다. 물론 저희로서는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평화를 위해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교황들의 거듭된 가르침에 성찰할수록, 재앙을 경고하는 대다수 환경토목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우려와 반대를 참고하더라도, 혹은 주교회의의 가르침 외에 이웃종교들의 일치된 염원을 보더라도, 더구나 소신공양으로 공사 중지를 애원했던 불교의 문수스님과 그 이전에 장장 4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인적 오체투지순례로 생명평화를 호소했던 성직자들의 기도를 기억하더라도, 또 이미 드러난 자연 파괴의 참상만 보더라도 4대강사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 추기경의 과오는 한국천주교회 전체의 실책이다. 우리가 사죄드린다.
4. 우리는 서울교구장 발언 파문을, 교회공동체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와 '역할'이 무엇인지 재확인하고, 그 동안의 삶을 뉘우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의 애끓는 호소와 세상의 아픔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정추기경의 오류를 한국천주교회 전체의 실책으로 여기고 함께 뉘우치며 회개합니다. 아울러 이번 파문으로 상심하고 번뇌에 시달렸을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청하고자 합니다.
정 추기경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용서를 구하셔야 한다.
5. 개인의 견해가 다를 때라도 주교회의 전체의 합의와 결론을 존중하는 것은 교회공동체의 오랜 전통입니다. 그런데 주교회의의 구성원 가운데 하필 교회공동체의 일치와 연대를 보증해야 할 추기경이 주교단 전체의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결론에 위배되는 해석으로 사회적 혼란과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할 문제입니다. 동료 주교들에게 그리고 평신도, 수도자, 사제 등 교회의 모든 지체를 향하여 용서를 구하고 용퇴의 결단으로 그 진정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소통와 연민은 사목자의 기본 덕목
6. 주교는 자신 역시 교구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자, 수도자, 사제들과 더불어 우정을 나누는 벗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과의 소통은 주교의 기본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주교가 교구사제들과의 대화를 기피하고 흔히 독단을 자행하거나, 사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교회공동체의 신문과 방송 등 대중매체의 공정성을 제한하고 있다면 그는 교회 본연의 공동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용산참사의 비극이나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불안에는 눈을 감고, 총리와 장관 같은 정치 권력자들에게만 환대의 문을 열어주는 차별과 불통은 불의한 세상과 이익을 나누는 크나큰 잘못입니다.
은퇴를 앞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7. 교회공동체가 탄생한 자리는 예루살렘 성문 밖,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신 갈바리아 언덕 그곳이었습니다. 그런 희생과 죽음의 현장이 바로 성체성사와 기도, 전례와 영성의 고향입니다. 십자가의 자리와 거리를 두고 성당의 담장 안에서만 읊조리는 기도는 한낱 죽은 언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이 세례를 청하러 왔을 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했다는 것을 행실로서 보여라!"(마태오 3,7) 했던 세례자 요한의 질타, 왕과 벼슬아치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던 예수님의 책망과(마태오 23장), 특히 성전을 정화하시던 예수님의 분노와 슬픔이 오늘날 어디를 향해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울부짖음의 현장이 바로 종교의 영역, 사목자가 설 자리다.
8. 높은 담장의 보호 속에 안주하는 순간 사목자는 하느님의 길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아직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던 히브리 노예들이 신음하고 절규하자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고 과감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길'(탈출기 3,7-8참조)을 '인간의 길'로 특히 사목자의 길로 삼아야 합니다. 백성들의 고난과 울부짖음보다 더 순수한 민심은 없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격언에는 고통 받는 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더불어 애통해하신 하느님의 연민(compassion)이 담겨있습니다. 피조물과 백성이 울부짖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종교의 거처가 되어야 합니다. 전문가의 영역을 운운함으로써 판단을 유보하는 핑계를 지어내고 결과적으로 엉거주춤한 중립지대로 피하는 태도는 신중할지언정 사랑의 자세가 아닙니다. 일찌감치 종교권력의 이러한 양태를 내다보신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레위와 사제가 못 본 척 하더라" 하셨습니다.(루카 10,30-32 참조) 우리는 입으로만 사랑을 가르칠 뿐 약자들의 절망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유익을 돌보는 교회의 이중적인 처신에 너무나 시달려왔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원로사목자라고 부릅니다만 부디 후배들이 선배들의 한탄과 회한을 반복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천만다행으로 용산참사의 경우처럼 오늘날 많은 사제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4대강의 생명을 지켜내려는 활동가들과 함께 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백성의 시름을 애처롭게 여기고 지배층과 권력자들의 욕망과 교만을 당당하게 꾸짖다가 끝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얼굴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당부한다. 서로 치유해주면 기도하자.
9. 교회공동체의 역사는 무수한 오류와 실책, 그리고 죄악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성인들의 교회가 아니라 죄인들의 교회라는 점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 맙시다. 위기가 아닌 시대가 없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죄와 허물들을 보노라면 가슴 아프지만 교회의 줄기찬 생명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계제도는 교회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넓고 깊습니다. 특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지체를 이룬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깨달음을 심화시켜야겠습니다.
외곽에 서서 그저 교회를 비관하거나 냉소하는 방관자가 되도록 허락받은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냉담한 마음가짐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의 건강을 해친 악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히려 누가 잘못을 범하면 이를 공동의 허물로 여기고, 그런 일로 생긴 다른 지체의 상처를 기꺼이 돌보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미리 아시고 책망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이런 배려와 혜안이 교회의 참 덕목입니다. 우리 다 같이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교회의 어려움을 치유하고 극복해나갑시다.
10. 이번 한나라당의 날치기 예산에 얹혀서 통과된 친수구역활용특별법은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악법입니다. 4대강 예산 22조원으로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민생예산이 줄어들자 그 중 8조원을 수자원공사사업으로 돌렸는데, 수자원공사의 적자를 보존해 주기 위해서 4대강 수변에 위락시설과 선착장을 개발하도록 특혜를 주려는 악법이라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하느님,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주소서. 저희가 자연과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뵐 수 있도록 맑은 눈과 양심을 주소서. 정직하게 살게 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