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8. 01:35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2)

3. 릭 워렌

빌리 그래함의 뒤를 이어 아마도 미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서 위상을 지니게 될 차세대 복음주의 지도자 릭 워렌 목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관심을 갖는 대목은 그가 불치의 질병을 무릅쓰고서도 탁월한 설교자로서 우뚝 섰다는 점이 아니다. "목적이 이끄는" 시리즈의 책 인세만 해도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10의 9조를 헌금하며,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과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거절하고, 교회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다지 흥미의 대상이 못 된다. 그들의 눈에는 릭 워렌의 탁월한 기독교적 실천조차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기 위해 사탄의 선지자가 벌이는 쇼일 따름이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릭 워렌은 또다른 최악의 프리메이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릭 워렌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다룬 빌리 그래함이나 한스 큉의 경우와 별 다름 없다. 자기들이 서로 제기한 의혹이 부풀려지고 굳어지면서 사실처럼 통하고, 거짓말도 자꾸 하다 보니 어느새 사실로 둔갑해버린 얘기들이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아무개와 가깝거나 만난 적이 있다, 관상기도를 퍼뜨린다, 따라서 친가톨릭적이다, 설교에 나타난 그의 교리가 맘에 안 든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기관과 관련이 있다는 식이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데도 굳이 릭 워렌의 사례를 살펴 보려는 까닭은 복음주의 계통에서 릭 워렌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와 대표성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릭 워렌이 음모론자들이 프리메이슨 산하기관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CFR의 실제 회원(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CFR이라고 하니까 무슨 비밀결사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미국외교관계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미국의 유력한 민간국가전략연구소의 줄임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귀에도 익숙한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미국의 정책연구단체이다. 미국외교관계평의회는 브루킹스연구소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중도성향의 단체로서, 진보와 보수 정권 양쪽 내각의 인물 상당수가 이 단체와 연관을 맺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문 위키백과 해당항목에 따르면 릭 워렌 목사는 2005-06년 미국외교관계평의회의 선출회원이었다. UN이나 다보스포럼 등에서 연설을 하고, PEACE플랜을 통해 화해와 빈곤퇴치, 교육 등을 확산하고자 해 온 그의 사회참여적 행보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면, 미외교관계평의회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물론 이 단체가 미국정치외교계에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어림짐작이라면 세상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비밀결사단체사람이어야 하리라는 점에서 터무니없다.

이런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군가? 다름 아닌 미국극우정치조직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그 수장인 래리 맥도날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해당항목 기술에 따르면 그들이 제기한 의혹은 사실무근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와 더불어 1960년대 음모론자들의 영화나 책도 한몫한 게 틀림없다.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래리 맥도날드가 이들의 말에 낚였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극우단체가 이 주제를 하위문화 레벨이 아닌 정가라는 공적 영역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논의했다는 데 있다.) 우파세력이 미국의 기득권을 쥐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민간조직을 흠집내고자 반프리메이슨정서를 이용한 정치공세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관계가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음에도, 미국정가에서 음모론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뜬 음모론자들이 기꺼이 받아 적어 퍼뜨렸고, 그 중에 기독교근본주의자들도 열성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베리칩 음모론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의 극우세력과 근본주의자들이 손과 발과 입을 맞추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4.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워낙 많이 퍼져 있는데, 막상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했는가 살펴 보면 별로 나오는 게 없다. 하지만 역시 개신교 최대의 연합단체인만큼 세계교회협의회를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이를테면 존 콜먼의 '300 Committe'라는 음모론 책에 나온다. 이 책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언급하는 해당단락(한글번역은 예컨대, →여기.)을 보면,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기술과 사실관계를 입증하기 보다 단정하고 강변하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걸 보고 믿으라는 건가? 세계교회협의회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모르는 사람만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만한 내용이라는 점만 말해 두겠다.

여기서 국내 유명목사님 아무개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고, 따라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식의 루머에 대해서도 간단히 덧붙여 둔다. (루머의 본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를 참조할 것.)

국내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인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국내에도 성공회, 감리교, 기독교장로회, 예장통합, 구세군, 복음교회, 순복음교단 등이 정교회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맹한 교단들이기 때문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면 이 교단들도 프리메이슨 산하조직일까? 무슨 신통한 '영적 분별력' 따위를 들먹이기 전에 상식수준에서만이라도 이게 정말 그런 건지 헤아려 보라. 실로 밑도 끝도 없는 중상모략 아닌가?

게다가, 국내 유명 목사님들은 바쁜 목회활동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여력이 없으실 것이다. 하물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단체로 규정하고 가맹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예장합동 소속이신 길자연 목사 같은 분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까닭은 전혀 없다. 국내 유명 목사님들도 프리메이슨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장본인들이 이 정도로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

국내외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은 이쯤하면 왠만큼 드러난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근본주의가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까닭을 짚어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