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9. 16:00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3)

5. 근본주의는 왜 음모론에 열광하는가?

알다시피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세속의 물결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으로 생겨난 사조다. 자신들이 근본으로 지목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 외의 거의 모든 대상은 잠재적으로 이미 세속에 물든 '순수한 신앙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심지어 근본주의자들 자신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근본'이냐에 대해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영문흠정역성경이 권위의 원천이냐 자신들의 흠정역성경번역이 권위의 원천이냐 라는 식의 논쟁과 같이, 근본주의 바깥에서 볼 땐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견해차이 때문에 서로를 '참신앙의 적'으로 돌려 버린다.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신들이 나름대로 설정한 한계 바깥을 적으로 돌리고, 따라서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으로 바라본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니 억측이 무성하고,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의 이유는 차곡차곡 쌓이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근본주의는 감정배설의 통로를 신앙의 근본진리라는 명분으로, 의분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Erich Fromm) 정당화하게 된다. 자기가 그어놓은 한계 바깥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과 신학이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마음과 눈과 귀를 닫아 버린 채 터무니없이 희화화해 버린다.

그와 같은 희화화가 사리에 맞는 것일 수 없다. 논리의 비약과 일방적이고 성급한 단정이 난무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조차 예리한 영분별을 빙자하여 무시된다. 상대방을 대화와 이해의 대상으로 품고 서로 배우기 보다 터무니없이 희화화하는 거기에는 상대방의 의도나 지향점에 대한 정확하고도 진정성 있는 파악이 고스란히 빠져 있다. 적으로 돌린 상대방은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되고, 신비화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음모론은 근본주의가 안착하기 쉬운 편리하고 매력적인 함정이 된다. 초창기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이젠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상대방을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해야 하는데 근본주의가 자유주의라고 매도하는 종류의 신학은 심지어 자신들의 자매인 복음주의 계통 신학에서조차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여서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임팩트가 적다. 이에 비해 자기 적을 사탄의 졸개로 못 박는데 프리메이슨과 같은 딱지만큼 손쉬운 게 또 없다. 거슬리는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의혹을 계속 제기하다가 의혹이 짙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몰아 타도의 대상으로 세우면 증오와 분노를 터뜨릴 공동의 통로가 만들어진 덕분에 결집하고 유지할 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희생양만들기와 무슨 차이점이 있단 말인가? 바로 얼마전 타블로음모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음모론에 열광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더이상 사랑, 화해, 용서, 공의, 관용과 같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율법과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강조했던 기독교 실천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에 대해 양심에 일말의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런 덕목들은 어차피 프리메이슨들이 온 세상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뻔뻔스러운 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에서 역사의 지평은 7년 대환란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휴거 따위로 대체된지 오래다. 어차피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모든 역사과정이 깔끔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근본주의자들은 프리메이슨을 쓰러뜨리자고 공격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굉장하고 대단한 단체라고 정말 믿는다면 한줌밖에 안 되는 근본주의자들로선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공격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불안과 적대감을 증폭시켜 근본주의 시스템에 더욱 매달리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면 족할 뿐이다.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언뜻 성경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요한복음 20:29, 로마서 8:24-25 등)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행동을 인간의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감각과 제한된 사고범위에 의지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씀이지, 자의적으로 꾸며낸 음모론을 믿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니 빨갱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가며 혐오해마지 않을 헤겔이나 맑스나 블로흐, 마르쿠제 같은 신맑스주의자들이 현상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실증주의적 인식방법을 불신하고 존재에서 무를, 아직 없는 것에서 참 존재를 보고자 했던 사고방식이 오히려 성경에 그나마 가깝다. 이런 격조높은 철학을 근본주의 음모론에 견주는 것이 도리어 철학에 대한 큰 실례와 굴욕이 될 지경이다.

현상의 인식에 있어서 눈앞에 드러나는 겉보기 배후에 진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들처럼 피상적인 겉보기에 속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승리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실패하거나 패배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 승승장구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일을 어둠 속에 숨기기 위해 행하는 온갖 더럽고 비뚤어진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겉보기 현상이나 소식에 대한 합리적이고 엄밀한 의심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해야 할 믿음의 책무가 있다. 이 믿음의 책무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자기만족이어선 안 되고, 반드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나가야 한다. 몰트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각자가 속한 역사의 지평에서 부르시고, 다시금 역사의 지평으로 보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의 지평은 어떤 상황인가? 질병과 고통, 죄악과 부조리를 겪는 개인사의 지평이 있고, 세대와 지역과 계층과 남북으로 갈라져서 신음하는 한반도의 역사라는 지평도 있다. 세계자본과 세계권력이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물화하고 비역사화하는 자본주의의 악마적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세계사적 지평도 있다. 교회사적으로는 제3세계에서 폭발적으로 기독교가 성장하는 한편 그동안 세계교회의 대들보 노릇을 해왔던 서구교회가 무너지고 있고, 한국교회도 구태의연한 이전 패러다임의 되풀이와 악순환 속에서 심지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심각한 영적 위기 내지 전환기에 봉착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짐이요,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해결할 열쇠는 프리메이슨 음모론과 같은 유의 음모론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기보다는 역사의 지평과 공적 영역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 채 '바깥에 사자가 있다'면서 분노하고 불평하는 영적 게으름과 무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열쇠는 오로지 세상 죄짐을 담당하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무거운 죄악의 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십자가를 지고 구체적인 삶을 던지고, 목숨을 다해서 그분을 뒤따르는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믿는 참된 길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의 지평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 속에 종말론적 희망의 약속이 있다.
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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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분별기준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이 교회회중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잡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소동이나 베리칩=666표 루머의 확대재생산현상 모두 결국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1. 시한부종말을 얘기하는 소위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뉴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 3. 장황한 세대주의식 성경인용을 통해 자기확신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의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당대에도 임박한 시한부종말론과 '휴거'(*1)를 주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절에 이들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양태가 나타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하고 있듯이 1.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여러 가지 소문, 3. 사도들의 말과 같은 것들로 시한부종말론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퍼뜨리는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써야 했다.

3-4절은 종말을 식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친다. 주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도를 떠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참칭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개혁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을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중세교황권은 복음의 도리를 떠나 세속권력에 취해 무서운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고,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한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여길 만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성경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도 로마가톨릭은 복음의 도리를 떠난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세계종교통합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로마가톨릭의 향배는 분명 조심스럽게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배교와 악행이 횡횡하던 중세로마교회를 향해서조차 그 가운데 교회가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바 있는데(칼뱅, 기독교강요 4.2.11,12), 우리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현교황 베네딕토16세가 전임자인 요한바오로2세와는 달리 욕을 먹곤 하는 편이지만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별 근거가 없다. 본문 4절은 극단적인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베네딕토16세는 가톨릭에서도 손꼽을 만한 종교다원주의의 공공연한 반대자다. 베네딕토16세 같은 타입의 가톨릭보수파가 상대적으로 이런 데 무관심한 진보파와 달리 개신교와 정교회에서 신자를 빼내 개종시키려고 애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종교통합음모라니 터무니없다.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야말로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 아닐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에큐메니칼 문서들이야말로 세계교회가 복음의 도를 떠나는 배교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루머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세대주의 종말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루머를 퍼뜨리는 분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공식문헌을 얼마나 확인해 보셨는지,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방식이 다르면 죄다 배교고 이단이라면 대체 배교 아닌 것이 무엇이고 이단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런 식의 분파주의야말로 이단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스도께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지 협소하고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게다가, 멸망의 아들은 대체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혹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마부스'를 들먹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일개 점성술사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마부스'가 멸망의 아들이라고 해보자. 그가 과연 누굴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국방부의 그 아무개? 혹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면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유로화의 발권국 유럽연합의 별 권한도 없는 수장? '그들' 중 그 누구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4절의 예언에 들어맞지 않는다. 적어도 예언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양태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로선 그렇다.

세상의 악의 향배에 대해서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종말의 기준이 충족되기 전에 괜히 들뜰 필요가 없다. 그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저명하고 신령한 아무개가 재림과 말세의 징조를 말하는 영음을 얘기하거나, 신통하게 예언을 여러 차례 맞춘 아무개가 뭘 보거나 듣거나 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런저런 종말의 소문을 듣더라도,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해 보니 재림과 휴거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하더라도 휩쓸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시한부종말론 대처법이다. 

[덧붙임]
(*1) 여기서 나는 '휴거'라는 말로 예수재림을 시한부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예수님이 비밀히 신자들을 한 번 또는 두세 차례에 걸쳐 하늘로 데려가고 공중재림은 또다시 별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휴거'는 존 다비 이후 세대주의자들이 발명해낸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관념이지, 초대교회의 신앙이 아니었다. 밀리오레의 지적대로, 이 관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아 이 땅의 고통을 품고 부조리에 거룩한 저항을 하기 보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끔 그릇되게 이끈다. 예수재림을 진정 기다리는 삶은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