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6. 03:32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예장통합 내 논란에 관하여


현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신단다. 세상에……

댓통이 대선후보시절 "내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100% 국민" 따위의 같잖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돌아다닐 때, 저걸 막지 못하면 역사의 어두운 기운이 또 다시 대한민국을 덮게 되리라는 스산한 예감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후보가 식민사관 망언으로 낙마했을 때 최소한 식민사관과 친일행적의 문제성에 관해 조금이라도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겸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당초…... "자기 아비의 명예회복"을 대통령직의 목적이라고 공언한 자가 쉽게 생각을 바꿀 리 만무했다.

대체 박정희가 회복할 명예가 있나? 박정희를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결국 역사를 뜯어 고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댓통의 역사왜곡은 친일반공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따위의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댓통에게 있어서 아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이니까. 100% 국민? 댓통의 꿈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북괴추종세력, 종북빨갱이로 간주한다는 암호통신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장통합교단의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잘 내주고 있다.

- 장신대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이 비교적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내주셨다.
- 올해 예장통합교단의 신입총회장 채영남 목사님도 마침 진보적인 성향이셔서 역사교과서국정화에 반대의견을 표명해 주셨다.
- 장신대 신대원 학우회의 촌철살인 현수막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다.


실로 예장통합교단의 면류관과 같은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예장통합의 목회자들, 특히 중견교회 담임목사 다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쪽일 것이다. 이 추정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긴 하지만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 8:2나 7:3,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6.5:3.5 정도를 넘을 수 없을 듯.) 따라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 신약학)이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의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비판한 것은 예장통합교단 정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철홍 교수님의 비판글은 좀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가볍게 매도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 김철홍 교수님과 그와 의견을 같이 대변하는 예장통합의 목사님들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조금 뒷북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일개 개인블로거인만큼 부디 양해들 하시길 바란다.)


1. 친일반공주의 미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 혹은 친일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인가? 대한민국의 국시는 민주주의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친일파와 그 후손 정치가와 언론, 재벌들에게 있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2. 친일반공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인가? 친일반공주의를 세뇌할 목적의 교육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다양성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비민주주의적 발상인가? 오히려 친일파 후예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모든 다양한 견해와 관점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친일반공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의 이념적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 아닌가?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단 말인가?
   

3. 식민사관 비판이 종북인가? 식민사관 비판과 극복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사학계가 힘들여 이룩한 성과였다.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거부하면 종북빨갱이가 되었단 말인가?


4. 역사가 살아있는 권력의 힘으로 바뀔 수 있나? 역사라는 공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공론의 장에서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부역하는 어용역사학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또, 그 어용역사학에서 기독교, 아니 개신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영광된 측면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한국개신교에 영광이 될 수 있을까?
   

5. 전국민을 획일적인 역사관을 주입시키면 대한민국이 복음으로 통일되나? 권력자의 위신을 현양하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반포하던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해야 하는 무지몽매한 시대도 지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의 서로 다른 세계과정 이해가 만나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이다. 획일적인 역사관이 남북통일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공론을 통해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이 서로 통합적인 소통을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대승적 통합의 역사관이야말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끌 자격과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 물리적 통일은 반드시 정신적 통합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인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을 보장함으로써만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한반도가 복음으로 통일되기를 기도하여 왔다. 복음의 정신은 주술적 부적처럼 오용되는 십자가상이나 모종의 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충만한 소통과 상호순환의 역사 가운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계시되었다.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역사라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에서 주역이 되어야 마땅한 전국민들을 상대로 역사적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통일로 이르게 할 복음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2015. 3. 21. 02:11

사이비이단의 숙주, 근본주의

1


최근 부정선거로 불법집권중이신 극우정당 ㅅㄴㄹ 모 의원 왈, 새정치민주연합은 종북의 숙주란다.

주한미국대사 피습사건을 기화로, 애시당초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요주의 인물이었던 범인을 야권에 엮어 종북몰이하다가 튀어나온 얘기다.

아니, 당초에 문제를 일으킨 전력이 화려한 인물을 아무 조처 없이 입장시킨 게 누군데 종북 운운?


도대체 누가 북한을 따라하는 진짜 종북인가?

누가 일인숭배를 위해 여론을 세뇌, 조작, 선동해 왔는가?

누가 불의하게 찬탈한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반민주적인 짓거리를 하고 있나?

누가 일당독재를 공고히 하고 야당을 관제, 관변박수부대로 만들고자 정치공작을 일삼는가?

누가 백성들에게서 각종 명목으로 삥 뜯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호의호식하고 있는가?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자유 대한민국에서 북한과 동급의 이따위 부끄러운 사건들이 벌어지게 만들고 있는 비루하고 간악한 무리들이 누구인가?

이런 더러운 짓거리들이 과연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에 값하기조차 하는가?

누가 과연 진짜 종북의 숙주인가?!


2


요즘 사이비집단 ㅅㅊㅈ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황당무개한 것은, 패륜적 짓거리가 폭로되자 그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역시나 그 수법 그대로 여론 물타기로 대한민국을 기망하려 들고 있다!


어디 ㅅㅊㅈ 뿐이겠는가?

사이비이단들은 거짓과 폭력의 반석 위에 세워졌다.


도대체 사이비이단이 나오게 된 원인과 기원이 무엇인가?

근본주의자들 왈, 사이비이단은 자유주의에서 나온단다.


헐...

자유주의에서 사이비이단이 나와?

자유주의가 사이비이단의 숙주라고?

대한민국 사이비이단치고 자유주의가 배경인 집단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자유주의 핑계 대는 재주 밖에 못 배운 것이 근본주의라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3


사이비이단의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뿌리를 알 수 있다.


1. 누가 성경의 문자를 갖고 정반대의 뜻을 갖다붙여 들이대가며 자기 "적들"을 참소하는가?

2. 누가 없는 혐의를 조작하여 자기 "적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가?

3. 누가 없는 증거를 조작하여 자기 문자적 해석을 입증했다고 선전하는가?

4. 누가 전도로 몸집불리기하는 것 자체를 절대선으로 떠받들고 있는가?

5. 누가 세력을 동원하여 자기 사적 이익관계를 관철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가?

6. 누가 정확히 따져 들어가 보면 별 미덥지도 못한 내용에 불과한 자기들의 믿음만이 절대진리요 절대선이라며 "불신지옥"을 외쳐왔는가?

기타등등.


이 모든 거짓과 폭력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
누가 과연 사이비이단의 숙주
인가?


근본주의다!

2014. 10. 4. 20:33

가톨릭도 그리스도교냐고? 예장합동 제99차 총회 유감

예장합동 제99차 총회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에게 재세례하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을 처벌키로 결의했다.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및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조처일 것이다. 합동측의 결의는 한 마디로 너무 많이 나간 근본주의 교회론의 결정판으로서, 자신들의 공교회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장자교단을 외치는 대형교단의 결의이므로, 합동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1. 합동측의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의 권능을 부정한다.


가톨릭는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합동측의 결의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가톨릭이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가톨릭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로서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는 사실관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령 가톨릭이 이단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가톨릭에서 시행한 세례를 부정할 신학적 명분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단교회가 시행한 세례가 효력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즉, 비록 이단교회라 할지라도, 심지어 타락한 교역자가 시행한 세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할 때 온전히 효력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도나투스파가 자신들만이 진짜 교회라고 참칭하면서 보편교회의 세례를 인정치 않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그런 도나투스파의 세례더라도 공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효력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전통, 자기 믿음만이 진짜라며 상대방이 교회일 수 없다고 매도하는 쪽과 격렬한 이단논쟁의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의 넓은 범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쪽, 하나는 분파주의 이단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의 태도이다. 한 마디로 배타적인 독단이냐 포용적인 관용이냐, 과연 어느 쪽이 합동측의 태도에 가까운가?


합동측은 가톨릭이 심지어 이단도 아니고 타종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는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실은 조금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톨릭교회에서 십자가의 도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유의 얘기는 합동측에서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비록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충분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의 도가 분명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또한 여느 개신교 이단들의 그것과 다르게 충분히 정통적이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종교?


이단이라면 그나마 고려의 대상이 되겠거니와, 타종교라면 들이대는 범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타종교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십자가 복음이 존재하지 않고, 가르쳐지거나 흔적 자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방교회도 그들의 눈에는 타종교여야 하고, 이들과 대화와 교류를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들도 타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는 종교혼합주의겠고? 이런 식으로 분파주의적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교회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재세례라니, 당신들은 재세례파인가, 칼뱅의 후예들인가?


2. 합동측의 결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세가톨릭교회 비판과도 동떨어져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을 퍼부어 해 대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에 부합한다고 믿어 의심지 않는 것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 일색이었는가?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에 중요한 쟝 칼뱅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쟝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비교하면서 중세가톨릭교회의 전횡과 교리적 일탈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교황 제도의 폭압 아래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째서?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되는 세례와 성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기초에 따른 것이다. 칼뱅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를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동요와 분열을 겪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기독교강요 4.2.11.)


칼뱅은 중세서방교회에서 거의 주술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던 문자적인 사효성(ex opere operato) 개념은 거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세례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고는 유지한다. 로마교회가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 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심지어 거기에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였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교황이다."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에 관한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교회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압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남겨두셨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면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합당한 교회라고 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교회론 전체를 거쳐 이 문제를 주의깊게 논증해 나간다. 즉, 로마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로마교회에 "이단"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칼뱅의 판단에 로마교회는 매우 "이단적"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격렬했던 교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종교개혁 교회조차 이 정도로 신중했는데, 과연 합동측에 이런 균형감각이 남아 있는가? 합동측의 반가톨릭적 결의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과 달리 로마교회에조차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표지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혹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관해 "이단" 선언을 남발하지 않아서 칼뱅도 미운가? (그럴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인가?


끝으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얘기에 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얘기는 근본주의자들이 처음 성경에서 발견한 발견이 아니라 중세교황권의 전횡과 더불어 권력에서 축출된 프란치스코회의 강경파나 후스파 등을 통해 이미 나왔던 얘기다. 종교개혁 시대나 정통주의 시대에 이 해석전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특정해석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까지는 못 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근본주의자들, 혹은 세대주의자들은 꽤 지나친 종교적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세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의 가장된 미소에 온 세상을 미혹하여 택하신 자라도 멸망케 하려고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얘기에 뒷받침이 되는 소위 근거들이라는 게 거의 한결같이 낭설과 유언비어라는 근본주의의 딱한 사정에 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조악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데 대해 어째서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신학적 배경이 해방신학이라서? 예수회 출신이라서? 이건 아무개의 신학적 배경이 자유주의라서, 바르트주의라서 다 거짓말이라는 식이라는 말과 똑같이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 바르트신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도대체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가.


그런 말들이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참소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이 전혀 미치지들 않는가? 근본주의자들이여, 어쩌면 당신들 생각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당신은 절대 적그리스도적이 아니게 될 성 싶은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0~11)


당돌하게 비방하는 대상이 사탄이면 자동으로 당신이 사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세에 교회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비단 교황이 적그리스도여서만이 아니다. 악마적인 참소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일 수 있다!

2014. 9. 3. 12:53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 수호가 오늘날 우리 한국개신교의 진정한 과제?

우리 시대 교회, 한국개신교의 진정한 과제는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를 로마카톨릭에 맞서 지켜내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소위 개혁주의가 정통인가?

그런 것을 말하는 이들이 말하는 소위 보수라는 게 정말 지켜야 할 복음적 보수인가? 

그들이 말하는 정통이라는 게 정말 정통인가, 그들이 말하는 개혁주의라는 게 정말 개혁주의인가?

혹은 소위 로마가톨릭에 맞서 정말 그런 것을 지켜내야 하는가?


그들의 모든 주장이 실은 매우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란 결국 근본주의에 불과하다.

이 근본주의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의 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그러한 근본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과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십자가피켓남 왈, 종북빨갱이들이 세월호를 이용해 먹는단다. 근본주의자들이여, 이들이 당신들과 얼마나 다른가? [사진출처: 트위터 https://twitter.com/histopian/status/505664183493341184]

그동안 드러난 열매로 보건대 저들은 지금 로마카톨릭교회가 어떻고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란 것이 살아 있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한심한 거짓선지자로 나타나는지 재를 뒤집어쓰고 통탄해야 마땅하다. (교황방한 때 저들이 했어야 할 일은 맞불집회 같은 무례하고 몰상식한 짓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의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는 회개성회여야 했다!)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부분은 나의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반공)근본주의에 눈이 멀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처신은 정말 뼈아프리만큼 우매하고 미개하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참상을 당신 자신 안에 받아들이시기까지 공감(com-passion)하신 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인데, 우리 한국교회는 도대체 이게 안 되면 그 모든 같잖고 시덥잖은 교리논쟁이 무슨 소용이 있나? 렉시오 디비나가 이방혼합주의고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괴수라고 매도하며 광분하는 유치찬란한 판국에 교리논쟁을 제대로 할 역량은 되고?


대형교회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저 중세적 소교황들이 말했다지, 교황보다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냐고.


물론 못하지 않다, 정진석 추기경이나 염수정 추기경 같은 노회한 부류의 사람들에 견주어서는.

뭐, 같은 개신교인으로서 정리가 있으니 그 사람들보다야 낫다고 해두자.


하지만 어딜 감히 프란체스코 교황과 자신을 견주는가!

당신들이 그토록 자랑거리로 삼는 바, 당신들이 지금까지 쓰고 말하고 다닌 모든 설교원고를 다 합쳐도 교황권고서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 담긴 이 시대를 위한 영적 통찰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망발이 가능했을터다.


소위 개혁정통보수교리의 미명하에 혼돈과 기만으로 가득한 거짓증거에 이리저리 낚여서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니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이니 하는 세계적인 손님맞이의 자리에서 적그리스도 운운하는 맞불집회를 하는가 하면, 교황권고서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을 같이 읽고 토론한다는 이유로 교황의 품으로 달려간다는 따위의, 자기 - 형제가 아니라면 - 이웃에 대한 거짓증거와 참소를 그치지 않는 처참한 영적 상태의 회중과 지도자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아, 이 사람들, 정말 부끄러워 해야 마땅할텐데, 절대 그러지 않을 성 싶다.

이런 일은 내 제한된 경험으로 단정짓지 않고 그저 주님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다.

부디 선하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빨갛게 될 수 있는 얼굴 주시길!

2014. 6. 13. 03:27

총리후보지명자의 역사인식, 그리고 한국교회

전 중앙일보 주필 문창극씨가 총리후보로 지명됐는데, 이분이 용산 온누리교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나타난 역사인식이 비판 받고 있다.


1. 먼저 KBS가 길환영 사장 퇴진을 이끌어 낸 뒤 정권의 나팔수 노릇하는 수치스런 행태에서 탈피하는 몸부림을 보여주어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그러나 조만간 MBC를 망가뜨린 저들이 길 전사장보다 일곱 배는 악한 어용바지사장을 앉힌 뒤 KBS의 인적 구성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이런 식으로 전횡을 일삼으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갈수록 칠흙 같이 캄캄한 터널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2. 문창극, 혹은 문 장로의 역사인식은 한 마디로 일제 관학자들이 만들어낸 식민사관을 빼다박았다. 그런데도 문씨가 교회장로라는 이유로 두둔해 주는 한국교회연합의 처신은 개탄스럽다. 한 마디로 뭐가 문제인지조차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관이 무엇인가?


- 타율성론: 한반도 역사는 중국대륙과 일본의 역사적 부침에 따라 영향받아온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웃나라의 영향 없는 역사도 있나? 타율성론에 따르면 명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도 망했어야 한다.

- 정체성론: 한반도 역사는 자생적 자본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체된 역사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조선 말기에 벌열정치, 혹은 세도정치에 의해 사회발전이 지체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조선 후기 사회는 실학과 상공업 발전을 통해 자생적 자본주의의 맹아가 발전되어 있었다.

- 민족성론: 조선인의 민족성이 태생적으로 의타적이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역사에 희망이란 없다는 것이다. 성격이란 변화되기 마련인데, 사회적 성격과 분위기가 고정불변하는 실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가?

- 지정학적 결정론: 한반도 역사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반도역사이기 때문에 강대국의 부속국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이 역시 궤변에 불과하다. 로마도 주변에 강대국들이 있는 반도역사지만 강대국의 부속국 운운할 수 없다. 지정학적 요인은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역사의 운명과 향배를 결정짓지 못한다.


한국사학계가 이 문제를 두고 해방 이후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현재는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둔 상태다. 즉, 이러한 식민사관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거의 두 세대 전의 문제이고, 적어도 한 세대 전에 총론적으로 비판적으로 극복되었다.[각주:1]


그런데 문씨가 조선왕조 500년이 게으름의 악습을 이어 왔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인식의 시계를 두 세대 전으로 돌린 황당무계한 처사가 아닌가?


게다가 윤치호 같은 친일변절자의 편향된 시각을 통해서 그런 판단을 함으로써 전혀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촉발시키고 있다. 우리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황실보존노력을 일방적으로 폄하했던 윤치호나 조선망국의 원인을 기득권의 전횡이 아니라 당쟁으로 지목했던 김활란 같은 친일변절자의 편향된 시각을 수용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이 일제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지난 두 세대에 걸쳐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했고, 이에 관해 21세기에 새삼스레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은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씨 자신이 이들의 부적절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되풀이함으로써 퇴행적인 논란을 부추겼다면 한 나라의 총리라는 공적 직무를 수행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뜻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3. 문씨는 이밖에도 이승만에 대한 찬양, 미국 원조와 한국전쟁, 일제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등의 발언과 반공주의적 암시를 함으로써 비판을 자초했다. 친일파적 역사인식의 바탕에 반공주의의 층위까지 얹었다. 딱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아닌가? 박근혜정부가 문씨를 낙점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뉴라이트에서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이 그렇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국부"인가? 이승만이 젊은 시절에 썼다는 글이야 개화기 젊은 지식인들이라면 능히 해 볼 법한 생각이지, 딱히 이승만이 탁월해서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후 나이 들고 나서 어떤 행보를 보여주었느냐인데, 친일파를 중용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탄압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 과연 출세지향적인 행보 끝에 부패로 자멸한 그의 행보가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불행한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친일파적 역사인식, 그리고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잘 살게 됐으니 됐지 않느냐고?


4.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높이 평가 받는 군주들은 단지 나라를 잘 살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그런 기준이라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나 아합 같은 자들이 칭송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가장 사악한 군주였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종교예식을 열심히 치렀다는 이유도 높이 평가 받는 이유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어디 종교예식이 부족해서 망국의 비극이 찾아왔는가?


따라서 단지 기독교신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이 칭송되어야 할 까닭은 되지 못한다. 박정희 때 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를 - 더욱이 반인반신 운운하기까지 하며 - 칭송해야 할 까닭도 되지 못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비그리스도인들보다도 그리스도인들, 보수성향의 개신교인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로 차단하고 억누르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당신들의 하나님은 맘몬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가?


5. 한국교회가 몰역사적이고 친기득권적인 신앙양태를 통해 성장해 왔다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대형교회에서 교역자들을 청빙할 때 장로들이 운동권 시위경력을 물어본다든지, 이런저런 질문으로 사상검증을 하려 든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강인철이 성공적으로 해명해 주었다시피, 이들의 신앙의 기초가 반공근본주의이며, 반공근본주의는 친일파로 변절한 한국초대교회 신앙유산의 업데이트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성장제일주의라는 정신적 층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신앙양태는 친일파에서 반공주의자로, 산업화의 기수로 성공적으로 변신해 간 "꺼삐딴 리"(전광용)의 세속적 처세술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한국교회는 친일파로 변절한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초대교회의 신앙유산의 토대 위에 반공주의라는 기둥과 성장제일주의라는 서까래로 이루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6. 문씨가 장로로서 보여준 역사인식의 퇴행성은 참으로 불행하고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문씨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결국 한국교회의 책임이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책임이다. 교회의 올바른 역사참여, 공평과 정의라는 성경적 역사관에 대해 제대로 들려주지 못했고, 그 자신들 상당수는 아예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회중들이 역사서와 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공평과 정의, 역사참여 같은 얘기를 들으면 색깔론부터 떠올리고, 친일파와 반공주의의 "적폐"를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편향"이라는 뒤틀린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자신들이 이미 친일반공주의적 기득권자들을 심히 편들어 주고 있다는 현실은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한 대형교회에서 사회명사의 퇴행적 역사인식을 특강 혹은 강연의 이름으로 교회회중에게 전파하도록 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연합이라는 공교회적 위상의 기관이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장로님을 두둔하기까지 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인식의 대형"참극"이 아닐 수 없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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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밖에도 식민사관의 주장들은 여러 가지가 더 있으나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 식민사관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에 관하여, 이기백 엮음, 한국사시민강좌 제1집, 1987을 참조하라. 이기백학파를 포함한 한국사학계에 식민사관의 그늘이 여전히 드러워있다는 비판이 영광된 상고사의 복원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상고사 문제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와 맞물려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이의제기는 앞으로 좀 더 경청해 볼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1) 이러한 일부 이의제기가 최소한 기존 국사학계가 이룩한 성과를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총론를 뒤집을 수 없는 각론적 사항이라고 본다. (2) 아울러, 이른바 영광된 상고사의 복원을 운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주장되는 환단고기와 같은 책의 친일파 기원론 같은 문제는 조심스럽게 분명히 규명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러한 의혹이 참이라면 식민사관과 영광된 상고사 복원 사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겠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14일 덧붙임) [본문으로]
  2. 한국교회의 한반도 역사인식이 식민사관의 영향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함석헌이 그의 나이 30대 초반 때 쓴 작품인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식민사관의 영향을 극복할 수 없었던 사실도 상당부분 그 까닭이 되고 있다고 본다. 물론 1930년대의 함석헌 자신의 손에는 식민사관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만한 역사적 도구가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온전히 함석헌의 과오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우파논객 복거일이 함석헌의 사관을 들먹이면서 문씨의 식민사관을 두둔하는 것은 빈곤한 문자주의적 독해에 불과하다. (근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문자주의도 막상막하이긴 하다!) 문씨의 역사인식 파동은 어쩌면 그 시대 그리스도교 지식인에게 익숙했을 함석헌을 문자적으로 되풀이한데서 빚어진 딱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 독자들은 이보다는 함석헌의 최선의 의도를 좀 더 입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상대화하여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013. 7. 5. 12:03

민간사찰의 일상화 시대를 경계하라

본 블로그의 검색유입어에서 줄곧 상위에 올라 있는 낱말 가운데 하나가 "베리칩"이다. 베리칩 음모론자들이 설레여 하는 꿈은 그들의 영적 아비인 1992년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그것 만큼이나 터무니 없다. 


그러나 본인이 그들의 "비전" 가운데 나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대목은 예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정보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아마겟돈이 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소위 "아마겟돈"은 시한부종말론자들의 광신적 시나리오보다는 정보통제를 통한 전체주의 사회라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묘사된 빅브라더의 세상에 가까울 것이다.(*1)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거의 현실로 다가오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근 대한민국의 저울추가 매우 심각한 국면으로 기울고 있다. 국정원의 개입에 의한 부정선거  사실의 폭로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에 모여 절규하고 있지만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어차피 그들이 백성의 절반 이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모든 법과 선전수단과 자본을 쥐고 있는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당파적 목적과 이익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비판세력을 빨갱이 또는 종북좌파라는 얼토당토 않은 딱지를 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프레임으로 시민들의 생명과 권리와 재산을 극히 안정적으로 수탈하여 왔다. 그것은 어쩌면 광장에서 시민 몇 명이 모여 만세삼창 하는 것 정도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수준을 오래 전에 넘어선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은 그들의 죄상에 비추어 전면해체 내지 전면개혁이 필요함에도, 현 정권은 오히려 인터넷 사찰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사참조)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사람들이 지금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다.


관상기도가 이단이라고 누군가 빨간 딱지를 붙이면 관상기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돌팔매질을 해대고 있다. 최일도 목사나 이동원 목사, 혹은 존 파이퍼 목사나 릭 워렌 목사, 제 아무리 저명한 지도자들이라도 일단 관상기도를 입에 올렸다면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들은 이미 이단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누군가 빨간 딱지를 붙이면 세계교회협의회가 어떤 기관인지도 모르면서 돌팔매질을 해댄다. 원래 세계교회협의회에 반대했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A)조차 세계교회협의회가 천명한 노선을 사실상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 이들의 극렬한 입장은 저 칼 맥킨타이어의 악명높은 국제기독교연맹(ICCC)의 철지난 분리주의 결사에나 어울린다는 사실, 종교혼합주의가 정말 뭔지, 종교간 대화와 협력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실은 자신들이 별로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고, 다만 악의적으로 왜곡된 피상적인 몇 가지 풍문에 분개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되지 않는다. 이들 머릿속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미 적그리스도의 졸개들로 낙찰되어 있기 때문이다!(*2)


도대체 애먼 사람을 프리메이슨 = 사탄의 졸개로 빨간 딱지를 붙여 명예살인을 해대는 몰지각한 음모론자들이나 인민재판으로 학살을 자행한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이 무엇이 다른가? 이들중 어떤 이들은 프리메이슨 음모론의 몰지각함을 비웃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이렇게 엉뚱한 데 힘을 낭비하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정작 세상에 대한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이 사람들아!) "영적 분별력"(로마서 12:1~2)을 잃어 버리고 반공근본주의에 기대여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에 기꺼이 동참할 뿐 아니라 앞장서기까지 하고 있다. 저들이 만들어내는 아마겟돈의 예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로나 한국교회로나 지금이 중요한 기로에 있다. 한국사회가, 시민들이 기득권자들의 "아마겟돈 프로젝트"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짐승정권"의 공포정치가 행해지는 "대환란"이 도래할 것이다. 그 기간이 "7년"이 될는지, 혹은 70년이나 그 이상의 세월이 될지, 아니 그 정도 세월이나 주어지게 될지, "그 때와 그 날은 아무도 모르나니 ... 아버지만 아신다." 그 다음에는? 분명한 것은 이런 불의와 부패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불의와 부패에 올인한 사회는 반드시 망한다. 한국교회는? 이대로 개념 없이 넋놓고 있으면 불의와 부패에 올인한 세상에 박수해 주면서 축복을 선언한 수치스러운 거짓예언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한국사회에 한 줄기 희망이 남아 있다. 부디 이 희망의 빛이 무사히 살아있기를 바라고, 한국교회가 일어나 한반도에 희망의 빛을 밝히 비추는 소임을 감당하기를. 부디 이 모든 묵시문학적 시나리오가 그저 한 때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아멘.


[덧붙임]

*1: 이러면 조지 오웰이 프리메이슨이었다고 우기는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꼭 있다. 어휴...못말린다 정말...

*2: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정병준님의 글이 적절한 반론이 될 것이다. 

2013. 6. 26. 15:20

댓글알바의 실체.. 이 정도일줄이야!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지난 대통령선거는 주요방송언론만이 아니라 검찰과 경찰, 선관위, 국정원까지 총동원된 총체적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여기에 대해 대한민국이 정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자유국가라면 반드시 전국민적 항의와 비판이 뒤따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를 덮어볼 요량으로 국정원에서 NLL대화록이라는 것을 "깠다." 국가정상간 협상을 자기들의 정파적 위기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이유로 까발리는 극도로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한 건데, 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는지, 제정신들인가? 그만큼 지금 초조하신가들? 


이 대화록이라는 것도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국정원과 새누리당에서 꼬투리잡고 싶어하는 대목만 짜깁기한 발췌본에 지나지 않지만, 정말 웃기지도 않은 것이, 이 대화록이라는 걸 읽어 보면, 당췌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어디서 어떻게 포기했다는 건지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는 점만 똑똑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거기엔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의 진정한 대한민국 대통령들께서 일궈온 남북평화화해협력시대의 비전만이 빛나고 있을 따름이고, 오히려 NLL 뿐 아니라 개성과 해주까지도 포기하겠다며 '굴욕적인 협상'을 한 것은 김정일 쪽이었다.


이런데도 이런 짓을 벌인 자들은 지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잘못 뽑은 대통령이니 반역자니 운운하면서 또 다시 혹세무민하고 있다. 이런 같잖은 선동질에 넘어갈 사람이 있다는 것, 아니 충분히 많다는 걸 이 인간들이 알고서 이 짓을 저지르는 거다!!


정말 놀랍게도, 국정원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국정원 직원들이 노무현 서거 당시에도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악플을 달았다는 기사는 정말 충격이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이런 못된 짓을 한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그게 새누리당 만이 아니라, 국정원에서 저지른 짓이었다니, 이들은 국기문란의 도를 일상적으로 넘는 집단이었던 거다! (이명박정권은 이 카드를 5년 내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사참조)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런데... 대한민국은 참... 조용하다. 일본을 너무 많이 닮아가고 있다. 언론방송에서는 거짓된 소식들만이 유통되어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학생들과 청년들 사이에서는 '일베충'이 양산되고 있다. 검찰과 경찰, 국정원이 한통속이다. 새누리당은 이미 일본 자민당식 일당독재로 가는 프레임을 완성한 것 같다. 일상적 파시즘이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고 있는 중이다.


교회는? 칼뱅의 시민불복종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 한국교회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회가 운동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사회혁명의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기득권세력의 여론조작에 놀아나지는 말아야 할 게 아닌가. 한국교회가 모든 것을 "민주당과 좌빨종북세력" 탓으로 돌리는 희생양 신화에서 도대체 언제 놓여나게 될까? 


현재로선... 도무지 놓여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교회의 어른들은 머리가 너무 굳어 있어서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고, 교회의 학생들, 청년들은 정의를 얘기하는 걸 껄끄럽고 고깝게 듣는다. 보암직, 들음직한 것들,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에 미쳐 있으니, 시민불복종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 속이 썩어들어간다. 내가 믿음이 너무 없는 탓이다. 부디 누군가는 깨어 있어서 희망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기를...


[국정원 게이트는 내란입니다] 국정원의 오랜기간에 걸친 불법적 색깔론 여론조작이 없었으면, 12.16. 경찰의 허위 수사결과발표가 없었으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습니다. 국정원과 경찰을 이용한 쿠데타, 권력찬탈입니다. 박근혜, 사퇴해야 합니다 - 표창원


[덧붙임]

1. 검찰이 작성한 국정원 범죄 일람표란다. [→링크참조] 일베충이 따로 없다. 근데, 검찰이 왜 국정원을? 이건 뭘 뜻하는 것일꼬?

2012. 11. 23. 05:29

엉터리 지성을 경계함!

엉터리 지성을 경계함!


박동현 선생님 (전 장신대 구약학 교수)


자기는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사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데도)

남들보다 책을 더 많이 읽었고 (사실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도)

남들보다 사리분별력이 더 나아 (사실은 판단력이 크게 흐려져 있는데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사실은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을)

늘 이끌어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하는 생각에 스스로 속아,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 순진한 사람들,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보려는 사람들을

현란한 말솜씨와 감언이설로 속여

그들의 마음을 훔치는 한편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더할 나위 없이 무섭고 비열한 말과 태도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들에게 남겨주고도

조금도 잘못한 줄 모르며

날이 갈수록 그 정신적인 테러의 도를 더하며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어떤 식으로든 변명하고 합리화하여

잘못했다고 좀처럼 사과할 줄 모르며,

알량한 자신의 고상한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부려먹는데 주저하지 않으며,

고담준론을 펼치며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부르짖지만

정작 자신은 남을 짓밟고 불의를 행하며 미움을 퍼뜨리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는,

개혁을 내세우지만 그 자신이야말로 개혁의 영순위 대상인,

엉터리, 사이비, 짝퉁 지성인들...

그들의 그 잘난 지성(知性) 폭력에 시달려

거의 초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든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이런 정신적인 테러를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지!

그 테러에 시달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과연 듣고는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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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하다가 우연히 만난 글이다. 아마 박동현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인 것 같지만 지금은 글을 지우셨는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분들의 글에서 따왔는데 혹 선생님의 뜻에 반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먼 발치에서나마 박동현 선생님을 흠모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신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마음이 시원해오면서도 한켠에는 내 자신에게도(T_T;;) 심한 찔림이 오는 힘있는 글이어서 이곳을 들러주시는 방문객 여러분께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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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
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2011. 8. 16. 18:38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반도


1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연주 내한공연이 있었다. 특히 임진각에서의 합창교향곡 연주는 베를린장벽붕괴 때 레너드 번스타인이 통일된 독일과 유럽에서 모여든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오케스트라와 함께 감동적인 합창교향곡을 연주했던 벅찬 광경이 한반도에도 펼쳐질 것만 같은 예감을 들게 해주는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바렌보임은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가는 음악가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피아노실력으로 베를린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의 총애를 받았던 신동이었고,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하여 현재까지 피아노와 지휘 양 분야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원로급 현역거장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영국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했다가 뒤 프레가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난치병에 걸리자 그와 갈라섰다는 이유로 국내에선 '건방지고 재수없는 놈' 정도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뒤 프레 자신도 질병의 불운과는 별개로 지나친 자유분방함으로 말미암아 결혼생활을 망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바렌보임에 대한 비난은 좀 일방적인 것 같다.

게다가 바렌보임의 음악은 이런 가십거리에 묻힐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바로크에서 현대, 클래식과 재즈, 탱고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광범위한 레퍼토리, 우아하면서도 귀엽기까지 한 프레이징과 선굵고 저돌적인 박력의 조화에서 번뜩이곤 하는 천재성 같은 것은 그의 음악의 굉장한 강점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와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오페라 전곡사이클을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들보다 즐겨 듣고 있다. 재즈와 탱고도 그의 연주로 처음으로 귀담아 들어보았다. 

특히 유대계인 바렌보임이 나치에 의해 악용되었던 바그너 오페라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공연에 바그너를 포함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을 겪은 바 있다. 그처럼 자기 동족의 선입견과 금기에 맞서는 행보를 걸어오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해서 나름 바렌보임의 팬인데 아쉽게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 공연에도 참석할 여유가 없었고, 티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임진각 실황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언론과 클래식동호회에 올라오는 평을 보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들이 꽤 나온다. 클래식애호가들 입장에선 회당 15만원이라는 나름 비싼 돈 내고 들은 연주가 기대에 못미쳤다는 얘긴데, 솔직히 바렌보임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같은 일류 오케스트라와 공연했다면 티켓가격은 래틀과 베를린필의 회당 약 50만원이라는 최고수준에 버금갔을 것이다. 따라서 바렌보임과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유대 - 아랍의 음악적 화해 프로젝트가 베토벤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하는 값어치, 그리고 그 위험부담까지가 티켓값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언론은 늘 그렇듯이 앙상블이 거칠었다거나 2번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안 좋다고 지휘를 관뒀다는 식의 자극적인 부분을 부풀려 바렌보임을 거만하고 재수없는 인간으로 희화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렌보임에 비난이 집중되게 하고, 바렌보임이 우리의 부끄러운 분단상황에 던지고 싶어하는 남북화해의 메시지는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한다.

어쨌든 연주가 매끄럽고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날카롭고 섬세한 귀를 지닌 바렌보임 자신에게 더욱 고역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그가 베토벤의 교향곡 2번 1악장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시원치 않다면서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고 할까. 다시 무대로 돌아온 바렌보임이 1악장부터 다시 연주한 것은 에어컨이 시원치 않았다기 보다 오케스트라의 빈약한 연주에 마에스트로 자신이 열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 혼자 들어간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대목 역시 마에스트로가 그저 냉방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당연히 오케스트라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거장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 오케스트라의 능력은 놀랄만큼 증폭되기 마련이다. 연주회평을 읽어 보면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기능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답게 웅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충분히 감동적으로 즐길 만한 연주를 해주었다는 평을 많이 볼 수 있다. 어색하고 어설프나마 화합과 화해와 조화를 위한 음악적 몸부림이 오케스트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게다.

2

갈라지고 찢어진 한반도의 현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빗대자면, 솔직히 한반도라는 오케스트라가 서동시집오케스트라보다 과연 더 잘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한반도에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사회주체와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바렌보임과 같은 지도자가 잘 눈에 띄지 않으며, 남과 북은 고사하고 남과 남 안에서조차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 신화에 기댄 자기이득의 극대화와 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안철수의 지적대로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는 공멸이다.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된다. 즉, 어색하고 어설프더라도 화합과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화해와 화합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때, 그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은폐하고 싶다는 자기 바람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처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군부독재의 후예들이 화해와 화합을 즐겨 말하면서 마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큰 잘못인 것인양 굴 때, 그것은 폭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말하기 전에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자 앞에서 뻔뻔하게 자랑하면서 심지어 자기 같이 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피해자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황당무개한 상황이다.

바렌보임은 가해자가 어떻게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그 가장 단순한 얼개를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날 이스라엘은 더이상 나치에 의해 600만이 학살된 연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유대계가 장악한 세계권력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와 아랍세계 일반)을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강력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 오로지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피해의식 때문에 더욱 비열하고 잔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렌보임은 유대계 음악가로서,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만일 바렌보임이 아랍인을 배제하는 유대선민주의적 배제의 논리와 태도에 집착했다면, 유대계 음악가로서 세상으로부터 자기 민족이 핍박받아왔고 아랍인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음악적 화해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자신들이 한국전쟁의 억울한 피해자라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가해자인 '빨갱이'들에 대한 증오에 의한 정교하고도 강력한 배제와 타도의 논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런 배제와 타도의 논리는 자신들의 보수기득권을 무제한적으로 확대증진하는데 남용되어 왔다. 이들은 무엇이든지 자신들과 견해와 의견이 다르면 '빨갱이'로 매도하며, 엄정한 사실관계를 흐리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악랄하고 잔인한 가해자의 면모가 있다. 그들은 조선시대 벌열정치로 나라를 기울게 한 것도 모자라서 외세에 빌붙어 공평과 정의를 굽게 한 친일파의 후예로서 서로 여러 겹의 혼맥과 이해관계의 사슬로 얽혀 우리 사회의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있으며, 심지어 사실관계를 바꿈으로써 명예까지 쥐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득세한 우리 사회의 배제와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에서 우리 사회 보수기득권층의 처지는 바렌보임의 태생적 배경인 이스라엘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보수기득권자들와 그 추종자들은 바렌보임이 보여주는 화해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들의 배제의 논리, 또는 울타리치기와 사다리걷어차기 전략을 포기하고 사회적 이익과 권리를 우리 사회 모두가 최대한 더불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다양성의 보장을 통해 창조적 잠재력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3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구사하는 배제의 논리가 자기 정체성과 자기정당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비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보수기득권을 대변하는 종교가 된 한국개신교에 강한 아쉬움을 느낀다. 한국개신교는 보수기득권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해왔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성향이 워낙 강한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과 다르면 이단, 자유주의, 프리메이슨 따위의 사탄의 졸개나 다름없는 존재로 적개심을 품도록 교인들을 세뇌시키며, 새롭고도 넓고 깊은 이해와 공감을 위한 공간적 여지를 내면에 남겨두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의 그리스도교는 강인철이 보여주었다시피 반공주의와 드러나게든 드러나지 않게든 연관되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세뇌논리에 알게 모르게 가장 잘 세뇌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이런 정신성은 보수기득권층의 배제의 논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

안 그래도 진정한 화해와 화합은 쉽지 않다. 하물며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교가 화해가 아닌 배제가 정통이라도 되는 것인양 처신한다면? 여백의 미학이 없는 그리스도교, '비움의 멋'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실로 사람들과 한반도에 있어서 비참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층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구축해 온 배제의 논리에 따른 자기정체성을 비우고 자신들이 배제해온 서민들과 대화와 소통을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이루는 지지계층에게 인기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해야 할 공평과 정의의 문제다. 

그러나 특별히 그 배제의 논리를 제공해 온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그와 같은 비복음적이고 비성서적인 배제와 증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중지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두 팔을 벌려 인류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비움의 미학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수기득권층에게 자기정체성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화해의 촉매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야말로 지금 바렌보임처럼 화해와 화합의 음악을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할 당사자다. 우리 한국개신교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임을 감당할 때, 새로운 통일의 찬가가 이 한반도에도 울려 퍼질 날이 분명 올 것이다.
2011. 5. 28. 22:11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4.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장21절)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들)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
2011. 5. 13. 04:02

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한국전쟁 이후 한국개신교의 양적 팽창은 반공주의와 맞물려 있다.(*1)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한국개신교는 분단 이전에 북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공산정권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북한공산당에 대해 누구보다도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반공주의자였다.  이들이 남한의 개신교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이 원형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전후복구과정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남한사회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보완해줄 반공주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것이 바로 강력한 반공주의로 소문난 개신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개신교에 여러가지 강력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 군종목사제도: 한국개신교의 주도적 건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군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미국군종제도보다 불과 10년 늦게 군종목사제도가 설치됐다. 개신교의 독점적 지위는 군사독재말기인 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유지됐다.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는 글자 그대로 배가하게 되었고, 불교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개신교는 성장에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대형광장/체육관집회: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한 전설적인 여의도광장집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형집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재정적 행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왜 개신교의 대형집회에 대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을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진보기독교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자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국제여론을 희석시키고 진보기독교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수기독교는 반공주의의 최전선과도 같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인식이었다. 보수기독교를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신교, 구체적으로 보수계통 개신교는 독재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대형광장집회, 80년대 들어서는 대형체육관집회를 통해 막강한 세과시를 통한 자신감과 대규모 결신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란 급성장의 그늘로서 성장주의, 물량주의, 교회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는 독재정권이 육성한 반공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양적 규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탄의 무신론사상인 공산주의"를 대적하려면 최소한 남한인구의 일정수준 이상이 '복음화'해야 하고, 남한사회 전체가 복음화할 때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민족복음화'론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명분을 주었다.

교회분열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근본주의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역색과 신학적 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다름'이 곧바로 '틀림'으로 못박힐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다르면 곧 자유주의고 이단이고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에 잠재되어 있었던 교회분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시비에 명분 노릇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시대는 한국개신교에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가 각인되게끔 했고, 내재되어 있던 근본주의 성향이 활짝 꽃피우도록 했다.

공산주의권이 패망한 지금 반공주의는 사실상 실체를 잃어 버린 철지난 시대정신이다. 반공주의 자체를 악마화할 까닭은 없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당시에는 반공주의였다. 개신교는 반공주의라는 시대의 물결을 가장 잘 탈 수 있었던 사회주체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반공주의 적응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반공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억압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사회주체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소수의 진보진영 기독교를 제외하면 인식 정도가 가장 뒤쳐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텐데, 아직도 철지난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성장주의, 물량주의를 선으로 여기는 반성경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유산은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이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깨어나라!


[덧붙임] 
(*1) 이 글의 분석은 대부분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에 의존한다. 강인철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모두 논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난다.
딱 한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이 글에서는 한기총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라 - KNCC에서 1988년 '반공주의를 참회하는 선언문을 낸 데 대한 반발로 - 성립되었다는 강인철(과 아마도 많은 다른 분들)의 주장을 옮기지 않았다. 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반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KNCC의 선언문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조성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상깊게 가시화했던 세계적 화해무드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기총의 설립은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통일 이후 북한복음화를 염두에 두고자 한 보수교계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지금 보면 때이른 부푼 꿈이긴 했지만 북한에 단일한 개신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제안이 나왔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있다. 이점에 대해 해당분야 연구자들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간단하고 부담없는 메모와 같은 이 블로그에서 이를 구구하게 논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강인철은 적어도 책에 나타난 기술로만 보면 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총의 현재 모습이 대단히 문제적인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한기총을 애써 두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문에 한기총과 이와 관련된 보수교계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2011. 4. 29. 03:06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나 자신을 살펴 봐도, 주변과 한국교회를 살펴 봐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명목상(de jure)믿음과 실질적(de facto) 믿음이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실질적 믿음을 무의식으로 용의주도하게 억압해 버려 그 실체를 거의 잊어버리기까지 하고, 그 빈 곳에 그럴싸하게 정당화, 합리화(rationalization: Erich Fromm)해줄만한 명목상 믿음을 채워넣게 되기 쉽다. 기독교신앙은 명목상 믿음으로 이데올로기화하기 좋은 이미지와 상징과 교리들을 풍요롭게 제공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영화 인셉션과 같은 허위의식의 세계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그야말로 끝도 없이) 펼쳐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칼뱅이 설파한 바 있었던 '우상공장'으로서의 인간의 진면목이 아닐까.

최근 케빈 밴후저도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교회가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양태가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어떤가? 명목상으로는 개혁주의, 보수신앙,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한국교회의 실질은 개혁주의라기보다는 반공숭미주의요, 보수신앙이라기보다는 수구기득권신앙이요, 오직 내 생각으로만, 오직 내 신념으로만, 오직 미국의 은혜로만이 아닌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바로 실질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진짜 믿음의 현주소에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에 바로 나 자신부터 내 믿음과 삶의 명목상 명분이 아니라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살펴보고 정직하게 가늠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
2011. 4. 28. 10:18

4 27 재보선 결과에서 그나마 희망을 본다

솔직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아니, 한나라당은 어떻게 이따위로 하고서도 이렇게나 표가 많이 나오나?
그 시커먼 속이 훤히 보이는 여론조작이며, 국민과 나라살림은 안중에도 없이 밀어붙이는 사대강사업이며, 지들 잇속 챙기려고 국정을 농단하는 저 작태며, 선거 때마다 때맞춰 북한 책동 운운하는 저 짓들이다 괜찮단 말인가? 저 사람들이 실제 정책으로 보호하고 대변하는 이 나라 국민이 한 5%나 될까. 그런데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지지자가 많을 수 있을까!

노전대통령이 조중동에 휘둘리고 황당무계한 사유의 탄핵이며 기침 깨나 한다는 사회원로들이며 어쭙잖게 이리저리 낚여 부화뇌동한 여론한테 처절하게 씹히며 지지율이 10% 밑으로 떨어졌던 그때 그 양반이 대체 무얼 그렇게나 잘못했던가? 무슨 전횡을 그렇게나 저질렀던가? 그게 무어라고 믿든 간에, 정말 현정권에서는 '그 정도 일'은 콧방귀 뀔 정도 깜밖에 안 된다!

왜 그들은 콧방귀를 뀌어왔는가.
어차피 표는 나오게 돼 있다는 거다.

이번 선거에서도 정말 우습지도 않게 표가 많이 나왔다.
그렇게나 전횡을 저지르고도!

노전대통령의 한이 서려 있는 김해을에서 비리 때문에 청문회 인선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인물이 '인물값'으로 당선됐다니 진짜 정말 괴이하다. 이런 사람을 국회에 보내주다니 말이 되는가. 지역구에 이런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당지역의 시민들은 모욕감을 느꼈어야 마땅했다.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건 한나라당 조직표이고, 조직적인 동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거꾸로, 유시민이 경기도지사선거에 이어 김해을에서도 쓴 맛을 본 것은 조직과 부정선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번 선거 패배를 유시민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진작 퇴출되었어야 할 수구정당이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아직도 새로운 정당과 정치인이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이 나라가 아직도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을 봤다고 결론을 맺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분당과 강원도가 어느 한 곳이라도 넘어갔다면 정말 억장이 무너질 뻔 했다. 무고한 이광재 전지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한나라당이 어처구니없는 엄기영을 내세워 강원도에서 승리해선 안 되는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특히 분당이 살아남아줘서 정말 고맙다. 시원한 물줄기와 같은 주권행사를 해 준 분당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부디 이대로 쭉 이어져서 강남3구에서도 기득권자들의 전횡에 대한 유권자들의 준엄한 심판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부디 강남에도 서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바란다.

이제 앞으로가 중요하다. 반한나라당 어젠다만으로는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를 기약할 수 없다. 반한나라당 어젠다는 분단현실을 고착화하여 제 잇속을 챙기려는 반통일세력으로서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를 방해해 온 사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반한나라당세력도 분단현실을 고착화하여 제 잇속 챙기는 반통일세력으로 전락한다면 그 역사적 정당성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다. 야권연대가 역사적 정당성을 담보하려면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대승적 합의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2011. 3. 2. 04:43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

양화진에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묻혀 있다.


이들이 증거라고 제시한 사진들에는 이들이 선교사나 목사나 그들의 가족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기록조차 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은 양화진에 묻혀 있으면 다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은데, 100주년 기념교회가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양화진문화원에 따르면 양화진에는 현재 417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선교사와 그 가족은 145명이다. 양화진 묘역에서 프리메이슨 마크 사진을 찍었다고 곧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다.

양화진문화원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145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다가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고마운 분들이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싶다면 최소한 145명의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 명단을 확인해서 그중 몇 명이나 '프리메이슨'인지 확인해 보는 게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염치가 아닐까?

2011. 3. 1. 04:06

베리칩발명자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했다고?

인터넷에서 베리칩을 발명한 칼 샌더스(Carl W Sanders) 박사가 회개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와 베리칩이 666표라고 '폭로'했다는 얘기를 국내외 인터넷에서 종종 읽을 수 있다. 동영상도 대대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인상적인 얘기이긴 한데, 이런 유의 음모론에서 늘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다. 


칼 샌더스 박사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폭로'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관계의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1. 칼 샌더스는 베리칩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박사다.
2. 칼 샌더스 박사는 베리칩을 발명했다.
3. 칼 샌더스 박사는 베리칩 발명을 뉘우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왔다.


이에 따르면, 
1. 칼 샌더스는 베리칩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박사였던 적이 없다.
2. 칼 샌더스는 베리칩을 발명한 적이 없다.
3. 칼 샌더스는 베리칩 발명을 뉘우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럼 칼 샌더스는 도대체 누군가? 이런저런 얘기를 소거하고 남는 사항은 그가 근본주의의 베리칩 음모론을 추종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관계 하나 뿐이다.

칼 샌더스에 대해 굳이 더 길게 풀어써야 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존 토렐 목사의 '폭로'가 진실인지 궁금하다면 위의 링크를 열어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존 토렐 목사의 증언은 과연 신빙성 있을까? 샌더스를 음해하기 위해 급조된 인물인 것은 아닐까? 
- 우선 미국 아마존에서 그가 70-80년대에 펴냈던 근본주의 계통의 책들이 검색되기 때문에, 적어도 70-80년대에 책을 펴낼 정도 연령(아마도 당시 30~50대)의 목회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존 토렐 목사가 운영하는 선교웹사이트 European American Evangelistic Crusades에 올려진 그의 사진으로 봐도 나이 지긋한 목사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그의 선교웹사이트에는 천사와 악마, 세대주의적 도식의 종말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세대주의 성향의 아티클이 다수 올려져 있다.
따라서, 존 토렐 목사가 급조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말뿐 아니라 인적 사항도 종잡을 수 없는샌더스와 달리 토렐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충분히 신빙성 있다고 생각된다.

존 토렐 목사는 이미 1994년에 칼 샌더스가 거짓말장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런데 20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이 거짓말에 낚이고 있는 셈이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귀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여! 거짓말과 부풀려진 헛소문을 덮어놓고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부디 여기서 돌이켜 오직 믿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시기 바란다.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
2011. 1. 31. 07:37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 올바른 길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교단에서 이재철 목사와 같이 이 시대에 드문 올바른 설교자를 사도신경의 그리스도 지옥강하조항에 대한 강해에서 본질과 상관없는 말꼬투리잡기로 이단시비를 걸고 목사면직까지 강행한 사례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재철 목사가 목회하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신자를 잃은 주변교회들과 양화진에 이익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인들이 담합과 공모를 했으리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가장 큰 기관인 한기총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미 개별교단들이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를 근거로 이단으로 단죄한 큰믿음교회 같은 문제단체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렸다는 것도 착잡한 희비극이다. 신임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이전 위원회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단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관상기도가 이단시비에 올라 있는 현실은 이런 사이비이단문제의 난맥상과 맞물려 있다. 관상기도가 일부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혼합주의 쯤으로 알려져 있으니 참 딱한 현실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상기도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을 성전이라도 치르듯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와 신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라고 봐도 큰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호전성이 영들을 분별한다는 그럴싸한 미명으로 포장되고 장려되기까지 하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복음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성경을 들먹인다고 해서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써야 한다면서 성경과 사도를 들먹이는 사이비집단이 있다. 공교회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가 성경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 = 토요일'을 지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일 =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공교회를 공격하는 태도가 성경적일 수도 없다. 

왜인가? 성경에 담긴 복음의 정신은 놓친 채 성경만 들먹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주의적 인용으로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며 의기양양하게 단죄할 수 있을까? 자전거가 성경에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며 득의만면하게 저주를 퍼붓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둔다.

둘째, 순전한 믿음은 소위 순혈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때 이방인과의 통혼을 비판하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했다. 그러나 성경을 면면히 흐르는 구원사의 큰 흐름은 이방인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이었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없었을 것이요, 아직도 정결례를 삼가 지켜야 했을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도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했다.

순혈주의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서 순혈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참사도로 여겨졌던가? 오히려 순혈주의를 고집할수록 그들은 구원사의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관상기도에서 본질과 알맹이가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순수한 믿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전한 믿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극단적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가까운가? 

관상기도가 '이방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평은 설득력 없는 순혈주의에 불과하다.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일체에 소위 종교혼합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성경의 역사적 과정 자체가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는 비평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관상기도가 그리스도중심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로부터 가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한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세계신학계의 보편적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이들에게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오늘의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의 거장들이 영성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거짓교사일터이므로!

그렇다면 영국의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책 Christian Spirituality를 보면 소위 영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향점을 갖는 여러 가지 신앙유형과 신학적 입장들이 아우러져 있다. 그 가운데는 관상기도가 예사로 등장함은 물론, 소위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편협한 근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거짓선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빌랴의 테레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요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토마스 머튼, C S 루이스, 칼 바르트, 본회퍼 등이 다양한 영성의 모습으로서 토의된다. 

자, 맥그라스는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텐가? 아니면 맥그라스 역시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배교한 거짓교사라고 할텐가?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존 파이퍼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관상과 명상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실재라고 긍정한다. 영성의 단계를 나누어 존재의 상승과 고양을 얘기하는 가톨릭신학의 '나쁜' 관상과 명상에 대해선 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긋지만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가 추천하고 격려하는 차세대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이머징교회 운동(*1)과 관상기도에 참여해 온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든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존 파이퍼나 드리스콜 목사 역시 이들의 눈에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아니고 배교한 거짓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할 교회의 교사가 몇이나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들에게 교회의 교사가 과연 필요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성령의 감동 덕분에 '오직 성경으로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관상기도에 대한 세계공교회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2)

[덧붙임]
"Emerging Church"는 '이머징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번역이다. 그렇다고 '신흥교회'라고 옮기자니 신흥종교가 연상되어 어감이 적절치 못하고, '(새로) 뜨는 교회'라는 식의 표현도 '요새 뜨는 교회'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할 것을 고민해야 할 낱말이다.
*2. 구글링을 잠시만 해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그들 스스로의 (소위 '영적인') 통찰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빌어온 얘기라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주장을 어디선가 빌어오거나 따오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그렇게 했느냐이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국근본주의의 복사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두고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2011. 1. 4. 06:27

오직 성경으로만

루터와 칼뱅은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원칙을 통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 뿌리박은 개신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개혁자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은 공의회나 교황, 신학전통 따위의 진리값을 가늠하는 잣대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여하한 영적 현상, 영적 인물 따위라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의 권위 아래 있다.
-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명확한 부분으로부터 모호한 부분을 해석한다.

이런 개혁자들의 요구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상당부분 오해되고 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 일체를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읽기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실상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교단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은 공교회성을 부정하는 사이비이단집단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강변이다. 아울러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뒷얘기는 자기 교주나 자기 집단, 자기 선입견에 대한 복종의 요구로 귀결되곤 한다.

그 누구의 성경읽기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누구의 이해력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릇된 전통과 선입견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칼뱅이 지적했다시피,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을 제한하심으로써 겸손하게 하시고, 더불어 사귐으로써 더욱 충만한 하나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적 토론영역에서 함께 겸허하게 지혜를 모아가는 사귐의 장이 바로 신학이다. 신학이 곧 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성찰과 검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참다움에 가깝게 된다. 신학이 추구하는 참다움은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성경읽기에 견줄 수 없는 보편적 권위를 지닌다. 전통이 성경본문과 성경의 정신이 지지하는 참된 전통이라면 거기엔 보편적 권위가 있다.(*1)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참다움조차 언제나 성경의 권위로써 재어지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둘째,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도록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낚이는 대목이 바로 영적인 '현상'이나 그런 현상의 매개자라고 주장하는 영적 인물의 인상적인 '말빨'이다. 그런 것에 낚일수록 신학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종교이고 죽은 교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 현상과 인물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증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신학이야말로 성령이 주관하시는 성도의 교통과 교제의 장이다. 아울러, 덜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의 은사(*2)도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비약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스스로를 거기에 매이도록 하신다. (요한복음16:7,13-14)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을 빌미로 그 누구도 성경을 비약할 수 없다. 

대개 이런 식으로 영적 현상과 인물을 따를수록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 신학이 비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마당에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반증도 한갖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짓거리 쯤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한 다음 성령의 초자연적 현상을 운운하는 행태야말로 사이비이단집단이 잘 닦아놓은 멸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성경의 자기해석과정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혹시 일체의 신학전통 따위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거절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종교개혁의 성경원리는 명확한 부분에서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전체 이해로서 다시 명확한 부분을 조명하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얘기한다.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은 일개 개인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 항상 동료(들)과의 상호의존적 해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해석에 접근해 간다. 모든 건전한 신학전통은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에 동참한다. 

앞서 밝혔다시피, 성경해석은 누구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신학의 장을 통해 함께 읽고 나눔으로써 건전성을 이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에는 전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처럼 성경과 전통에 동일한 권위를 돌리기를 거부한 것이었지, 전통 자체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대교부와 공의회, 중세신학에 정통한 당대일급의 신학자들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루터와 칼뱅에게 '오직 성경으로만'은 성경의 우위성(prima scriptura)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라는 원리를 밝힌 장본인들이 전통에 정통했다. 어떤 의미에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을 외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으로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전통의 빛과 그림자를 잘 이해하고 스스로가 속한 전통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3)(*4)

[덧붙임]
*1. 이미 신약성경 안에도 존중받아야 할 전통의 전승과정이 나타나 있다.(고린도전서 11:23, 15:3-4, 데살로니가후서 2:15, 디모데전서 2:2, 베드로전서1:18-19 등.) 정경사적으로 보면 성경이 전통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paradosis)이 성경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대로 교회가 성경을 만든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도베드로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든 게 아닌 것처럼(마태복음 16:13-20),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된 사도적 전승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했을 뿐이다. '교회가 정경을 도입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의 규범이 되기를 포기했고, 전승이 진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Oscar Cullmann)
참된 사도적 전승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에서 통일성을 이루지만 각 성경기자의 삶의 자리와 신학사상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는 사도신경의 공교회조항과 마찬가지로 전통의 다양성을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2. 아마도 최근 일어난 은사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를 '투시'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문맥상 합당치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문맥에 따르면 사도가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 믿음(8,9a절)을 주시고, 신유와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통변(9b,10절)을 주신다고 했을 때, 덜 초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더불어 열거하여 은사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빗나간 시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는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해명하는 데 사용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Calvin, Matthew Henry, Schlatter, Orr & Walther 등.) 아울러,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언을 앞일을 알아맞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교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고린도전서 14:)
*3. 자신이 특별히 따르는 전통이나 입장이 없(고 오직 성경만 믿는)다고 믿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미 우리의 성경읽기를 규정하곤 한다. 이를테면, '오직 믿음으로만'이야말로 성경의 정수라고 받아들일 때 이미 개신교전통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휴거와 7년 대환란을 기독교종말론의 내용이라고 믿을 때 이미 세대주의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전통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성경의 본래적 메시지로부터 비판하는 작업이다.
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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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6. 19:40

그들의 정의

현정부 들어 정권친화적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이 군인사가 공정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총장을 꼬투리잡아 끌어내리고 영남출신이 요직을 독식했는데 공정했단다.

헛웃음이 나온다. 날치기예산통과로 영포라인 예산은 실컷 챙기면서 '이것이 정의'라고 외치고, 영유아예방접종, 결식아동급식 예산은 전액삭감, 노동자들의 임금하락폭 OECD국가 중 1위, 인권이 70년대로 후퇴한 터라 인권위원장이 주는 상도 수상자들이 줄줄이 거부하고, 무사국무총리실 등 다양한 기관에서 경쟁적으로 민간인사찰을 공공연히 저지르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 뭐가 대체 그렇게 공정했을까. 백성의 고혈을 짜내 당신들끼리 사이좋게 나눠먹는 것이 공정인가.

500년을 지탱해오던 조선은 소수특권집단의 전횡 때문에 사회의 창조적 역량이 질식되어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망한 것은 일본이 사악하고 악랄한 술수로 강제병탄시켰기 때문인 것만도 아니라, 조선사회에 참다운 공평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나라 이 땅에 과연 온전한 공평과 정의가 있는가. 온전한 인권과 자유가 있는가.
불쌍하고 딱한 우리 형제 북한의 처참한 상황과 견주면서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짓일랑 당장 멈춰야 한다. 그런 자기기만이 이 땅에 파멸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거대하고 막강한 이웃나라들에 둘러싸여 전범국이 아니면서도 국토가 두동강이 난 채 반 세기를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작은 분단국가다.
또다시 소수특권층의 전횡이 저질러져서는 이 땅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역사 앞에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살라질 것이다.

소수특권층의 전횡에 대해 시민사회의 강력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뛰어난 공평과 정의, 탁월한 인권과 자유가 이 땅에 이룩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뭇백성의 비상한 창조적 역량이 꽃피울 수 있다.
공평과 정의, 인권과 자유의 힘이 우리 사회에 가득히 흘러 넘칠 때 비로소 이웃나라들의 버거운 존재에도 불구하고 두동강난 한반도가 하나로 힘차게 이어질 수 있다.


2010. 12. 13. 15:44

천주교 원로사제들의 성명에 존경과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최근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사대강사업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정권, 친기득권적 행보를 보이면서 김수환 추기경을 그리워하던 한국천주교 안팎의 많은 사람 가슴이 더욱 휑하고 추웠다. 

그나마 정의구현사제단의 지속적이고 올곧은 정권비판이 있어서 위안이 됐지만, 이 역시 천주교 일부 고위층의 억압과 견제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만난 상태였다.

이 나라의 공평과 정의가 심각한 위협을 맞이하고 있는 이 암울한 시국에 원로사제들이 추기경에게 용기있게 용퇴권고를 한데 대해 아낌없는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개신교 목회자들도 조국의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담긴 성명을 내주길 촉구한다.

특히 개신교회가 역사의 현실에 동참하는 데 장애물 노릇을 하고 있는 정교분리원리라는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해 재고하기를 요구한다.

정교분리원리는 어용교회가 실제로는 불의한 정권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역하면서도 표면적 무관심과 몰가치한 중립으로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 왔다. 좌파빨갱이정치목사를 힐난하는 바로 그들이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반동적 극우주의 행태를 보이면서 이를 신앙과 민주주의의 미명으로 포장해 왔다. 적어도 주기도문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단지 교회나 영적 세계만이 아니라 피조세계와 역사의 현실에도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금과 같이 정교분리원리가 악용되어 온 현실에 대한 정당하고 겸허한 신학적 비판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2010. 12. 8. 01:51

베리칩에 관한 몇 가지 루머 짚어보기

베리칩에 관한 이런저런 루머가 인터넷에 하도 많이 퍼져 있어서 사실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루머는 오바마정부 들어 통과된 미국 의료보험개혁안에 미국민 전체가 36개월 이내에 베리칩을 삽입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바야흐로 짐승의 표 666을 받게 될 날이 머지 않았고, 예수재림이 가까웠다고 한다.

법령을 미국정부관련사이트에서 직접 찾아보면 이런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문제의 '1004쪽' 얘기는 이 글에 첨부한 파일에서는 1190쪽대가 되어 있다. '1004쪽'으로 나오는 버전은 내려받아 읽었던 파일이 손상되었는지 첨부하는데 약간 문제가 있어서 해당문서를 첨부하지 못했지만 일일이 견주어 문제의 법령 내용이 두 버전 사이에 한 글자 한 글자 동일한 것을 확인해 두었음을 밝혀둔다.

1. 법령에 나오는 '삽입할 수 있는 의료장치'는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법령에 나온 제2종 의료기구에 관한 기술에 나오는 implantable이라는 형용사가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안에 삽입하는 의료기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2. 미국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법령이 36개월 이내에 발효된다는 얘기다.
문제의 '의료기구'는 미국의 일반시민 전체가 아니라 환자(patient)에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위 법령에 명시되어 있다. 당뇨병이나 심장병 같은 만성질환환자에게 적용될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법령이 말하는 '36개월'이라는 시한(1196:5f 등 여러 곳)은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아야 하는 시한'이 아니라 당연히 새 의료보험법령의 발효기한을 가리킨다.

3. 베리칩이 이번 법령에 새로 포함된 것도 아니다.
베리칩은 이미 미국식약청에 의료기구로 등록되어 있다. 2010년11월5일자 업데이트본에 따르면, 베리칩은 2003년 등록되어[date received] 2004년 승인[decision date]되었고, 제3종 (Classs III)로 분류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식이 베리칩음모론자들에게는 더욱더 두렵고도 설렐지도 모르겠지만.) 요는, 베리칩은 의료기구로 사용된지 좀 됐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베리칩이 의료기구면 짐승의 표가 되는지, 의료목적으로 베리칩을 맞는다면 곧 666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2004년부터 의료기구로 사용되고 있던 베리칩을 두고 왜 하필 지금 이 난리들일까?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오바마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열악한 미국의료보험제도를 손보겠다는 걸 공화당은 사회주의를 연상케 한다며 흑색선전을 펼쳐왔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미국경제를 수십 년에 걸쳐 망가뜨린 장본인인 미공화당이 경기침체로 오바마의 지지율이 떨어진 틈을 타 선거에서 압승한 뒤 경제를 빌미로 오바마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희한한 모양새가 펼쳐지고 있다. 위헌시비까지 거시는 중이시란다. 이에 미국근본주의자들은 미공화당에 호응하여 묵시문학적 파국의 색깔을 덧칠하고 있다. 오바마는 빨갱이일뿐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를 예비하는 어둠의 세례요한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오바마가 바로 적그리스도?

이들의 선전은 미국주의원들에게도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버지니아주의회는 중앙언론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리칩의 강제적 사용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현재 법안을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해 놓았다조지아주의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법안을 추진중이거나 이미 추진한 주의회가 더 있을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 조지아주 등에서 베리칩을 받도록 법제화했다는 식으로 국내인터넷에 소문이 퍼졌던 것과는 사실관계가 정반대다.) 이 모든 조처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정치적 구실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 역시 정부가 거짓말하고 있다든지, 자발적으로 받도록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할 거라는 등, 근본주의자들의 베리칩음모론을 결국 막지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판 색깔론이라고 하기조차 뭐한 진흙탕싸움인데 이걸 따라하는 한국사람이 대체 누군가? 앞의 링크를 유심히 보면 장죠셉 목사와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의 글을 열어볼 수 있다. 장죠셉 목사는 과거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했고,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 카페는 신사도운동 계통이다. 이들 모두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확산시킨 장본인들이다. 시한부적인 분위기가 이분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2010. 12. 1. 15:01

권위주의 시대의 도래?

극단적인 경우 대한민국에 어쩌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체주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상황을 보면 여건이 어느 때보다 무르익어 있지 않나 싶어 우려스럽다. 

1. 남북갈등이 심화하여 여론이 한 방향으로 경직되기 쉽다. 
적절히 증오와 분노를 부추겨주면 그 다음은 스스로 동력을 얻어 돌아가게 될 것이다.

2. 현 대통령과 정권이 레임덕을 타개할 계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현 정권은 전 정권에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햇볕정책을 3년간 철저하게 중단하고 부정하면서 대북강경고립정책을 구사해 온 현 정권이 막상 일이 터지자 햇볕정책의 실패로 규정하는 데서 현 정권의 기본마음가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북갈등심화 덕분에 현 정권은 자신과 견해를 같이 하지 않는 비판세력을 북한과 동일시하여 통제하는 전략을 보다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어 악마화함으로써 자기칭의를 도모하기 위해 온라인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권비판세력에 대한 사찰과 검열이 의로운 분노의 이름으로 일상화될 수 있다. 민간인사찰과 대포폰의 존재 따위는 그 나쁜 조짐으로 보인다.

3. 언론방송장악이 사실상 거의 이루어진 상태다. 
언론방송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현재로선 실질적으로 없어 보인다. 정권과의 이해관계호응에 따라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도구역을 자임한다면 기득권층으로선 여론을 순식간에 조종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정권과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 골라서 내보내면서, 이에 동조하지 않는 시민이나 집단은 색깔론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제압할 것이다. 
이미 이것은 한나라당이 어느 정도 해왔고, 당대표가 공식적으로 '사이버전사'를 양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알바들이 내뱉는 몰상식한 극언이 정권의 정책이나 행동에 실제로 반영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정도가 되면 실질적으로 전체주의와 별 다를 것 없는 권위주의 사회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4. 야당과 시민사회가 구심점 없이 지리멸렬해졌다. 
김대중, 노무현 이후 실질적으로 민주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나오지 못했다. 야당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민의를 대변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5. 군검경이 현 정권과 긴밀히 호응하고 있다. 
군은 노무현 시절 제2 롯데월드 설립허가를 안보를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하다가 현 정권 들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검찰은 자신들에게 자율권을 준 노무현 대통령을 주변사람들을 꼬투리잡아 죽였지만, 동영상 증거까지 남아 있는 데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까지 나서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했다. 
경찰은 현 수장부터가 철저히 군사독재시대의 악습이 발상과 처신에 몸에 배어 출세를 거듭했다.
군검경은 현 정권의 이해관계에 적극부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몇 해전 저명한 찬송시인 송명희님이 '표'라는 소설에서 조만간 대한민국에 베리칩을 표로 받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대환란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666표를 두려워하고, 적그리스도가 교회와 세상을 커다란 고통에 빠뜨릴 대환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 휴거되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근본주의 내지 세대주의 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얘기다. 
조금만 찾아 보면 이와 비슷한 얘기들이 꽤 많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얘기하는 이들도 이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자는 그들의 최선의 의도는 존중하지만, 세대주의 종말론은 애시당초 성경적으로 합당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송명희 시인이 그리는 것과 같은 시나리오에 딱 한 가지 공감하는 부분은 이대로 가면 전체주의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아직 그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일말의 믿음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한 때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란다.
그러나 만일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이 온다면 체재의 속성상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고 의롭다고 굳게 믿으면서 모든 악행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대목에 대해 얼마나 깨어 있는가? 이 점에서 다시금 마음이 갑갑해진다. 
바르멘신학선언을 작성해 독일교회의 대히틀러투쟁을 고취했던 바르트나 히틀러암살계획에 가담했던 본회퍼를 신학교나 설교에서는 곧잘 들먹이지만, 막상 교회현장에서는 목회자나 대중 모두 워낙 몰역사적인 개인신앙에 절어 있어서 역사참여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반공이데올로기에 열광하면서 기득권의 행태에 철저히 호응하고 있으니 이 모순과 부조리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나님께서 도움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덧붙임]
- 미국의 유니테리언 목사이자 예수 세미나의 펠로우인 데이빗슨 뢰어는 미국에서 종교적 근본주의가 정치적 근본주의에 호응하여 새로운 파시즘을 초래할 것을 내다보며 우려와 비판을 표명한 바 있다. 뢰어의 유니테리언주의나 예수세미나식 역사적 예수 연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정치신학적 문제의식은 동감이다. 한국 상황은 미국과 딱 판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