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9. 03:25

말씀의 사유화, 역기능적 신앙

한국교회가 요즘 사이비이단들의 창궐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이비이단들은 한국교회가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 말씀에 더욱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탄의 가시다. 사탄의 가시를 두려워하거나 저주할 게 아니라, 이 문제 너머 계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왜 사이비이단들이 창궐하는가? 결국 말씀의 사유화, 교회의 사유화에서 비롯된다. 하나님 말씀은 사도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유대 안에 있는 전 세계의 공교회에 선사된 것으로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유화될 수 없다. 그것이 교황과 같은 역사와 전통과 힘의 아이콘이든, 유력한 특정 교회전통이든, 또는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는 특정 계층이든 말이다. 하물며 일개 교주, 일개 목사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구절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이익관계에 맞도록, 자기 원한관계를 풀기 위해서 갖다 붙여가며 해석질을 하고 있다. 이들의 해석질은 성경본문에 대한 엄밀하고 정확한 주석적 이해와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복음의 정신, 계시의 정신에 충실한 자유로운 인용도 아니다.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가 파악한 좁다란 율법주의적이고도 영지주의적인 하나님상과 자기중심적인 은원관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하잘 것 없는 소망에 대한 일개 종교권력자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쉴새없이 성경을 인용해대는데 성경의 정신은 쏙 빠져 있다. 쉴새없이 성경을 증빙전으로 들이대는데 그 말씀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정신으로 나온 말씀인지에 대해서는 알리가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성경 안의 새로운 세계"(칼 바르트)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 말씀을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로 제한하려드는 우상숭배행위 아니겠는가!


그 결과 그들의 성경인용이나 성경해석은 더 이상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하시고 안식과 평화를 주시는 복음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을 옥죄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협잡과 다를 바가 없다.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은 더 이상 성경구절이기를 그친다. 자기가 진짜로 섬기는 대상에 대한 우상숭배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이며,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하고자 세뇌하는 정서적, 영적, 심리적 지배테크닉(manipulation technique: Margaret Singer)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가장 숭앙하는 듯 용의주도하게 가장 하나 자기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진정한 속내로는 마술주문이나 다름없이 천하게 취급한다.


그들의 말은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듯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자비와 용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진짜 속내는 자기 아집과 편견이며, 자기 권력과 이익의 증진에 있다. 그들의 입술은 아름다운 말을 그럴듯하게 하나 늘 독을 품었다. 귀 있는 자는 그들의 말을 정말 잘 들어보라. 예수님은 결코 욕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독사의 자식들이다!


말씀의 사유화가 고약하고 지독한 까닭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 그것이 소위 보수개혁주의든, 복음주의든, 바르트주의든, 진보주의든 상관없이 -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영악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규신학교육을 받아서 어떻게 하면 정통교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지 안다. 차라리 사이비이단자들에 관해서는 그 허무맹랑하고 무식한 성경해석과 교리를 콕 집어서 교회공동체에 경고해 줄 수라도 있다. 그러나 말씀의 사유화는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사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그 실체가 드러나기 어렵다. 중세 말 종교개혁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처럼 이미 걷잡을 수 없게 곪고 썩은 뒤에나 모두의 시야에 드러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창궐해 있는 사이비이단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토양으로 자라나고 있을 따름이다. 교회가 이 부분에서 똑바로 깨어 있다면 사이비이단자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사이비이단자들이 수많은 이단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지어 더욱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회중 모두 말씀의 사유화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저들 사교집단을 위한 비옥한 토양 노릇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반증 아니겠는가?


흔히 사이비이단자들을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세워놓고 그들을 욕하고 저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또 다른 패착에 다름 없다. 진짜 문제는 말씀 앞에 엎드리어 경청하기 보다는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 내 맘대로 소유하려 드는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이단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잘못되었다. 그들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밝혀두는 것이 소위 근본주의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사이비이단을 옹호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밝히는 진리의 일꾼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이비이단자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쏟아내어 자기 의를 충족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코 복음에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 자신, 나 자신이 십자가의 말씀 앞에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 나 자신 안에 가득한 교만과 아집과 욕망을 하나님 말씀 따라 비워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한국교회에 사이비이단이 창궐하는가? 하나님 말씀이 사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이 어디 우연인가? 하나님 말씀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개 개인, 일개 집단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만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 특히 억눌리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고 해방하시는 기쁜 소식이기를 그치며, 죽음과 멸망으로 악순환해 빠져들어가는 역기능적 행태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

2011. 1. 25. 12:53

신앙의 항체

우리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과 순결한 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이 명분이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특별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순수한 복음 혹은 순결한 교리라는 명분 하에 교파교단간의 대화와 연합이나 종교간 대화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교파교단간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서로 입장이 다른 교파, 교단, 신학학파간 대화와 교류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이 주제는 이미 공교회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교파교단간 대화는 종교개혁 이후 줄곧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미 칼뱅과 멜랑히톤, 크랜머 주교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 각 교파의 대표자들은 당대의 교회일치적 대화와 교류를 추진한 바 있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와 같은 한 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신학자들 역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유럽개신교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아우르는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범교회적 대화 노력을 계승한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운동이다.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와의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두어야겠다. 

과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지만 과연 시대사조나 종교간 대화 일체는 저주받아 마땅한 종교혼합주의일까?

오히려 성경 자체가 종교간 대화와 통섭의 역사를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창세기1장은 고대근동의 우주론인 신통기(신들의 탄생 연대기)를 탈신화하하여 아우른 결과였다. 
-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왕정을 비롯한 이방문화를 흡수했다.
- 잠언은 고대근동의 지혜문학을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씀이다.
-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문학사상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받았다.
-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공박하는 동시에 영지주의의 상징과 이미지를 흡수하여 신앙을 설명한다.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무한정 길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을 거친 하이브리드였다.(*1) 신앙의 선조들은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했다. 

이 상황은 히브리낱말 '바알(בע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바알이라는 낱말 자체는 가나안신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문맥에 따라 남편, 주인, 주민, 지배자, 지배하다, 결혼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용례들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순수주의에 매달렸다면 이런 일상적인 용례 자체가 없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신앙의 중심에 야웨 하나님의 구원행동 대신 풍요와 번영이 들어설 때 바알신앙이라는 혼합주의로 퇴행하는 위기가 일어났다. 혼합주의란 신앙이라는 원에서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이지 하이브리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바리새주의가 보여주듯이 소위 순혈주의도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진다면 똑같이 문제다. 

오늘날 '하이브리드'라면 배교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이들이 있다. 불교나 유교에서 비롯된 말을 쓰면 안 되고, 신비종교에서 비롯된 기도방법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아무개 목사나 아무개 신학자는 시대사조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이비이단이고 거짓선생이란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되고 안경을 쓰면 안 되고 수혈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기만 완고하고 옹졸하면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그 독소를 한국교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니 문제다.

다원사회 속에서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어떻게 차단하고 배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이미 흡수하고 있다. 이미 불식간에 수많은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을 흡수하고서 '오직 성경만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올린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정신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오히려 이미 그것조차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혹은 기도의 응답과 꿈과 환상과 영음을 통해 자기 신앙이 '순수하다'라고 입증되기라도 한 걸까?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부터가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건강하다는 것은 병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항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에 대해 결벽증을 갖는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올바르게 가늠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믿음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믿음을 잘 벼릴 때 신앙의 건강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덧붙임]
*1. 하나님은 그런 '하이브리드'에 담긴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신다.(마태복음 16:13-20)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동적 영감성이다.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 예컨대, 밴후저 같은 이들은 -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있다. 신적 측면은 성경이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요, 인간적 측면은 성경이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서 기록된 제한적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가현설에 빠지게 되듯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성경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가현설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가현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