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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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분별기준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이 교회회중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잡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소동이나 베리칩=666표 루머의 확대재생산현상 모두 결국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1. 시한부종말을 얘기하는 소위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뉴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 3. 장황한 세대주의식 성경인용을 통해 자기확신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의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당대에도 임박한 시한부종말론과 '휴거'(*1)를 주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절에 이들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양태가 나타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하고 있듯이 1.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여러 가지 소문, 3. 사도들의 말과 같은 것들로 시한부종말론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퍼뜨리는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써야 했다.

3-4절은 종말을 식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친다. 주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도를 떠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참칭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개혁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을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중세교황권은 복음의 도리를 떠나 세속권력에 취해 무서운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고,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한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여길 만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성경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도 로마가톨릭은 복음의 도리를 떠난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세계종교통합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로마가톨릭의 향배는 분명 조심스럽게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배교와 악행이 횡횡하던 중세로마교회를 향해서조차 그 가운데 교회가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바 있는데(칼뱅, 기독교강요 4.2.11,12), 우리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현교황 베네딕토16세가 전임자인 요한바오로2세와는 달리 욕을 먹곤 하는 편이지만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별 근거가 없다. 본문 4절은 극단적인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베네딕토16세는 가톨릭에서도 손꼽을 만한 종교다원주의의 공공연한 반대자다. 베네딕토16세 같은 타입의 가톨릭보수파가 상대적으로 이런 데 무관심한 진보파와 달리 개신교와 정교회에서 신자를 빼내 개종시키려고 애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종교통합음모라니 터무니없다.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야말로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 아닐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에큐메니칼 문서들이야말로 세계교회가 복음의 도를 떠나는 배교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루머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세대주의 종말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루머를 퍼뜨리는 분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공식문헌을 얼마나 확인해 보셨는지,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방식이 다르면 죄다 배교고 이단이라면 대체 배교 아닌 것이 무엇이고 이단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런 식의 분파주의야말로 이단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스도께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지 협소하고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게다가, 멸망의 아들은 대체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혹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마부스'를 들먹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일개 점성술사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마부스'가 멸망의 아들이라고 해보자. 그가 과연 누굴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국방부의 그 아무개? 혹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면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유로화의 발권국 유럽연합의 별 권한도 없는 수장? '그들' 중 그 누구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4절의 예언에 들어맞지 않는다. 적어도 예언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양태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로선 그렇다.

세상의 악의 향배에 대해서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종말의 기준이 충족되기 전에 괜히 들뜰 필요가 없다. 그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저명하고 신령한 아무개가 재림과 말세의 징조를 말하는 영음을 얘기하거나, 신통하게 예언을 여러 차례 맞춘 아무개가 뭘 보거나 듣거나 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런저런 종말의 소문을 듣더라도,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해 보니 재림과 휴거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하더라도 휩쓸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시한부종말론 대처법이다. 

[덧붙임]
(*1) 여기서 나는 '휴거'라는 말로 예수재림을 시한부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예수님이 비밀히 신자들을 한 번 또는 두세 차례에 걸쳐 하늘로 데려가고 공중재림은 또다시 별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휴거'는 존 다비 이후 세대주의자들이 발명해낸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관념이지, 초대교회의 신앙이 아니었다. 밀리오레의 지적대로, 이 관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아 이 땅의 고통을 품고 부조리에 거룩한 저항을 하기 보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끔 그릇되게 이끈다. 예수재림을 진정 기다리는 삶은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2010. 11. 13. 06:05

한국교회와 사이비이단문제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를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를 이루는 종교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인척 하거나, 오직 자신들의 (정당한 근거를 결여한) 주장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때 교회는 이들을 사이비 혹은 이단으로 분류하여 교회 안팎에 경각심을 촉구해 왔다.

문제는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만한 뉴스거리를 빈번하게 제공하게 되면서 교회나 사이비이단이나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큰 차이가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교회가 나름 고군분투함에도 사람들에게 사이비이단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한낱 집안의 밥그릇싸움 정도로 비쳐질 정도가 됐다.

교회로서는 물론 억울한 점이 많다. 사이비이단자들의 폭력적인 집단행동과 교묘한 거짓말과 선동이 언론에 동정적으로 비쳐짐에 따라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스스로 드리워놓은 그림자에 '낚시질' 당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돈과 여자와 권력을 밝히고, 마술적 카리스마를 연출하면서 독재적이고 비인격적인 교회운영을 하고, 성경해석은 면밀한 연구검토와 기도 없이 엉터리로 끼워맞추는 자기 모습이 혹시 사이비이단이라는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칼 융의 그림자 이론에 따르면 그림자는 자기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잠재의식 속으로 추방한 억압된 자신의 모습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자신의 억압된 모습을 강력하게 규탄하면 할수록, 그림자에 반응하면 할수록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삼켜 버려 그토록 규탄했던 그림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는다.

칼 융의 분석은 한국교회의 사례에도 들어맞는다. 한국교회는 더이상 사이비이단을 배격하는 정도로는 결백하고 의로운 자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기엔 한국교회의 규모와 위상이 한국사회 속에서 너무나 크고 강력해져서 자기보다 약한 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괴롭힘으로써 제 살 길을 찾으려는 부덕한 자로 떠오를 뿐이다. 한국교회가 사이비이단문제에 집착할수록 그 프레임에 갇혀버려서 갈수록 사이비이단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사이비이단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올바로 분별하는 것은 지나쳐선 안 될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비교대상이 사이비이단에 머물러 있어선 곤란하다. 사이비이단은 한국교회 자신의 죄된 모습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비교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든 죄악을 갖고 나아가 내려놓고 그의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총 앞에 서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뒤따름으로써만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라는 곤경에서 자신과 이웃을 구원받게 할 수 있다.
2010. 10. 8. 17:43

작가 최윤희님의 자살소식을 접하면서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최윤희님최근 2년간 지병이 악화되면서 이를 비관하여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싶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삼가 고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나를 지탱해오던 삶의 목표와 의미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생의 의욕도 사라진다. 오만 가지 극단적인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나 자신이 투병 중이다보니 최윤희씨의 그 벼랑 끝에 선 듯한 심정이 절절하게 맘에 와닿는다. 그 처절함과 비참함은 겪어 보지 않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어두운 심연의 끝도 없는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 고통은 행복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던 작가마저 죽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만큼 실로 잔혹하다.

과연 나를 지탱하는 삶의 목표와 의미가 무너지고 고통과 수치가 나를 압도하여 모든 생의 의욕을 질식시킬 때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이것은 최윤희님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실존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정말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특별히 내 경우엔 최근 투병생활 중에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질병보다도, 내가 목표요, 보람을 삼아왔던 것들이 좌절되는 고통보다도 더 괴롭고 아픈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거의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이야말로 모든 고통과 좌절을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힘이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내게 가장 뼈아픈 것은 바로 이 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내 갈 길을 밝혀주었다. 내가 어두워 헤매고 넘어질 때에도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손길이 나를 인도해 주셨다. 성경말씀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통해, 신학연구와 묵상을 통해, 기도 중 지극히 뛰어난 평강이 임하는 은혜를 통해, 앞길을 환히 보여주시는 꿈과 환상과 음성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흔들림없이 붙들어주셨다. 어떤 신학적 물음도 늘 쉬워 보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님이 내게 완전히 침묵하신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음성으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심지어 성경을 읽을 때도,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도, 기도할 때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쇠약해진 건강으로 신학연구와 묵상도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이젠 신학적 물음 앞에 말문이 턱 막힌다.

그동안 그토록 섬세하게 나를 인도하셨던 손길이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가. 지금 가장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대체 어디 계시단 말인가. 그동안 그토록 자비롭게 인도하셨으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침묵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우는" 처지란 말인가. 도대체 왜? 포이에르바하의 생각처럼 하나님이 애당초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다만 내 인간성을 투사한 신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녕 나를 버리신 게로구나. 내가 도대체 무얼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다. 죽고 싶을 만큼 분하다... 자살이 내 마음에 늘 가까이 있다.

내가 지금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미지다.

첫 번째 이미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미지다.

나사로는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이름 뜻과 달리 하나님께조차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받지 못했다. 나사로도 하나님을 믿는 자였으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나사로는 구걸하다가 쫓겨나고(*1), 온 몸이 헐어 고름이 나고, 그 고름을 개들이 와서 핥아 먹는 비참한 굴욕과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죽을 때 이름없는 걸인의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죽어야 했다. 누가 그의 시신을 거들떠나 봤을까. 나사로는 이 모든 치욕과 고통을 겪어내다가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반전은 내세에서 일어났다. 그가 구걸하던 부자집 주인은 현세에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누렸지만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으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이름의 뜻과 달리 이생에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죽지 못해 살았던 고독한 나사로는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깊은 위로를 받으며 쉰다.(*2)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영원히 위로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의 진정한 의미를 보았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차원으로서의 지옥에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현존하신다는 것이다.(*3)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마치 나를 조롱하고 힐난하듯 어처구니없이 좌절되어 버린 내 삶의 목표와 보람, 그 모든 좌절과 고통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짙어만 가는 나의 어두운 고통이 숨막히게 내 목을 조여온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을 기억한다. 나의 이 비참한 삶의 자리, 아니 죽음의 자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침묵하시는 듯한 바로 이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비록 예전처럼 손에 잡히고,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듣지 못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버림받은 자리에 현존하신다. 

개들이 와서 내 상처의 피고름을 핥는 기막힌 삶의 자리이지만,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나의 희망이요, 내 삶의 등불이시다.

[덧붙임]
- 10월10일 현재까지 총조회수가 110회쯤 되는데, 유입키워드를 보면 '최윤희 종교/신앙'이 무려 80여회에 이른다. 최윤희씨의 자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는 얘기다. 비슷한 현상을 얘기하는 블로그가 또 있는 걸 보면 내 블로그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하다.
아마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인들이 요새 자살을 많이 하던데, 최윤희씨가 생전에 전하던 행복의 메시지도 어딘가 기독교를 닮아 있다, 최윤희씨도 기독교인일 듯, 아니라면 종교는 무얼까' 라는 호기심에 글을 열어본 경우가 많은 걸로 보인다. 
사실 근본주의성향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자살문제에 율법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을 내려왔다.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자살에 이르게 된 당사자의 삶의 맥락을 주의깊게 삼가 고려하면서 애도의 심정으로 접근하기보다 단죄와 조롱을 일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자살자 가운데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닌가. 이것을 보더라도 기존의 자살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기존 대처가 썩 적절한 처방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포스팅이 필요할 것 같다.
*1. 나사로가 부자의 집 앞에 '버려졌다'라고 우리말 개역개정역에서 번역한 대목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ἐβεβλητο'라고 되어 있다. βαλλοω(던지다) 동사의 수동형으로, '내던져져있다'라는 뜻이 된다. 물론 βαλλοω 동사는 연결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을 것이다. 
*2. 이걸 보면 나사로는 이생에 위로와 도움을 줄 변변한 가족과 친척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나사로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고독한 상황을 함축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기만 했던 부자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겪는 것처럼, 나사로는 현세에서 아무도 도와주고 위로해 줄 이 없는 뼈아픈 고통을 내세에서 큰어른 아브라함이 직접 품에 안아 위로해준다.
*3. 한국개신교의 사도신경에는 세계교회적으로 볼 때 무척 드물게도 이 조항이 삭제되어 있다. 본래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초기한국교회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지, 종교개혁자들의 뜻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 조항에 대한 입장은 칼뱅, 기독교강요2.16.8에서 고전적인 진술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조항의 재삽입을 지지하는 국내교계인사로서 이정석교수(조직신학), 김정훈교수(신약학) 등을 들 수 있다. 이재철목사는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한 소속노회의 인식부족과 이익다툼으로 말미암은 오해와 왜곡으로부터 소속교단이었던 예장통합에서 이단시비와 목사면직처분까지 겪은 바 있다. 이 조항의 존재조차 모르는 신자들이 많은 상황이어서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