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
2010. 11. 11. 03:51

다원사회 속의 한국교회

다원사회라는 말은 한국교회 다수에게 절대악으로 낙인찍혀 있는 '종교다원주의'와 가리키는 대상이 같지 않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유일성 내지 독특성을 포기하자는 종교적 도그마이지만, 다원사회는 여러 가지 종교와 가치체계와 세력이 글자 그대로 양립하고 공존하고 있는 다면적이고 복잡한 사회현실을 가리킨다. 교회는 개인이든 공동체로서든 타종교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를 그들의 동료와 친구와 가족으로 받아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 현실 자체는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다.

다원사회에서 교회가 다른 종교나 세상과 공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소위 종교다원주의의 외연을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교회가 현대다원사회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이냐 라는 문제로 직결된다. 

1. 세상 속의 교회
교회가 타종교가 이웃하고 있거나, 내 이웃과 동료와 친구가 타종교나 무신론자라는 것은 당위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차원이다. 
이것은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어떤 신학적 입장의 스펙트럼에 자리를 잡고 있든지 수긍할 것이다.

2. 타종교 = 명목상 이웃
교회가 타종교나 무신론자, 혹은 안티를 아파트 주민과 다름없는 명목상 이웃으로 간주하고 피차 무관심하게 살 수 있다. 물론 그러다가 유사시에 이해관계의 충돌에 따라 무관심이 증오로 바뀔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수긍 여부 이전에 이미 거의 모든 한국개신교회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방식이다.

3. 타종교와의 상호존중
교회가 자신의 대의를 추구하되 비기독교인을 명목상 이웃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받아들여 무관심과 증오, 갈등 대신 상호존중를 위한 소극적이고 자구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기까지도 적지 않은 한국개신교회가 이 시대를 사는 데 있어서 낯설지만은 않은 방식일 것이다.

4. 타종교와의 공동대의를 위한 협력
교회가 비기독교인들과 더불어 공동의 사회적, 윤리적 대의를 이루어가는 공존과 협력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이 방식의 공존까지도 한국개신교회 가운데 상당수는 삼일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과 같은 영역을 통해 이미 살아보고 겪어본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종교다원주의의 의혹이 짙다고 보는 입장을 갖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5. 타종교와의 정확하고 깊이있는 이해를 동반한 대화
교회가 비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대의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이해하고, 비기독교인들이 교회가 추구하는 대의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상호대화와 상호이해의 실천을 통해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이라는 대의를 새롭게 이해하는 보다 적극적인 공존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이 방식의 공존은 아직까지 한국개신교회 주류가 별로 실천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냐는 의혹이 노골화하여 거의 확신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이와 같은 대화의 선구적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타종교는 결국 기독교와 하나
교회가 비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대의와 대화한 결과 기독교의 구원이 결국 타종교의 구원과 일맥상통한다고 인정하고 타종교와의 공존을 통해 '더 큰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다.
신론에 대해 새로운 도그마를 전제하는 이러한 방식의 공존은 기술적으로 소위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theocentric plural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종교다원주의라는 어젠다를 독점하다시피 해온 급진적 진보그룹의 생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상과 같은 다원사회의 종교간 대화와 공존방식 가운데 과연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종교다원주의'로 잡아야 할까.

현재 한국개신교회 주류는 타종교에 대하여 그냥 명목상 이웃으로 지내거나(1,2) 또는 서로 큰 충돌이나 갈등이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정도(1,2,3)가 안전한 선택이다. 공동대의를 위해 협력하는 것(4)은 위험하고, 타종교를 알아보거나 대화하는 것(5)은 틀렸으며,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6)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악한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타종교와 공동대의를 위해 협력하거나 정확한 상호이해를 위해 대화하는 작업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킴과 동시에 이웃과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타종교와의 상호존중이라는 공존방식(3)과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이 '종교다원주의'라면, 삼일운동 민족대표33인 가운데 기독교계 인사들은 종교다원주의자였던가? 또는 아레오바고연설을 한 사도 바울은 종교다원주의자였던가? 

종교다원주의의 외연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으로 국한하여 잡아야 한다. 

이 글은 논의를 단순하게 만들고자 유형으로 뭉뚱그렸지만, 6의 유형 역시 '도매금'으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종교다원주의의 논의는 4,5,6 또는 5,6에 좀더 섬세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종교다원주의자로 분류되곤 하는 한스 큉은 타종교와 더불어 공동의 대의를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세계윤리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4 유형) 그런가 하면 종교간 대화를 통해 보다 깊이있고 정확한 상호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기독교와 세계종교'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5 유형) 한스 큉의 저작에 나타나는 6 유형의 입장은 상당한 비약과 단정을 통해 나타나므로 주의깊게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큉의 4,5 유형에 관계된 논의는 이 사안에 관한 뛰어난 기독교적 성찰을 담고 있다. 이들 모두를 '도매급으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다.(*1)

이 여섯째 유형의 문제는 이 글의 논지와 목적에서 벗어날 정도의 장황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복잡한 사안이다. 여기서는 글이 목표하는 바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짚어 두고 싶다. 

종교간 대화의 결론이 반드시 '신중심적 다원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종교가 추구하는 구원의 길은 '구원'이라는 명칭조차 정확한 것일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르다. 신중심적 다원주의의 주장처럼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기독교에도 해탈이 있다, 불교에 더 충만한 구원이 있을 수 있고, 기독교에 더 충만한 해탈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나름 선의넘치고 너그러운 주장 같이 들리지만, 각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과 다르고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이 불교에 없으며, 불교의 해탈이 기독교에는 없다. 판넨베르크의 지적대로, 과연 어느 목표가 합당하고 진정한 것이냐 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과정과 종말을 통해 스스로 입증해야 할 과제이다.

다원사회 속에서 한국교회가 세상의 다원적 주체들과 공존하는 공존방식의 가능성으로서 위와 같은 유형들이 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의 배타적이고 수동적인 범위에 국한된 공존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런 배타성과 수동성은 반드시 성경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최근 '봉은사 땅밟기 사건'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매우 위험한 폭력성과 공격성으로 돌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파괴적 긴장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공존방식으로는 교회가 활동할 만한 공적 영역이 극히 협소할 수밖에 없다. '세상과 짝하여 타협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과 더이상 대화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개인의 양심과 종교심에 호소하거나, 자기 이해관계와 기득권을 대변하기 위해 반동적인 정치행동 정도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짝하게 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에 다름없다.

그러나 이렇게 공적 영역을 협소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은 정확하게 역사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신앙의 본질과 대치된다. 교회는 타종교나 세상의 세계관 앞에서 자신이 믿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다. 복음의 핵심과 본질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나의 나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교회는 공적 영역에서 타종교나 세상과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 그 대화는 물론 긴장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긴장은 파괴적 긴장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창조적 긴장이다. 교회는 역사의 하나님을 섬길 때 교회되기 때문이다.

[덧붙임]
*1. 한스 큉에게 종교다원주의자라는 낙인을 찍고 그 낙인을 이유로 그의 저작에 나타나는 최선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백안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근간을 형성하는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의 양성론이 오리게네스나 테르툴리아누스 같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된 고대신학자들이 성경으로부터 짜놓은 이해의 골격을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이나 테르툴리아누스의 제안 가운데 어떤 것은 교회에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어떤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공헌을 했다. 그들이 그와 같은 이바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영역을 과감하게 개척했기 때문이다. 한스 큉을 비롯한 여러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교회에 공헌할 수 있다. 그들이 던지는 화두를 주의깊게 분별하여 좋은 부분은 취하고 나쁜 부분은 취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기독교신앙은 무엇이든지 선하고 옳은 것은 받아들이는 관용과 아량의 정신, 사랑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