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0. 16:25

헤르만 바빙크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고집했나?

우리나라 회중들에게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이 성경적이며, 성경비평학은 자유주의 이단이라는 근본주의 신화가 워낙 공고하게 널리 퍼져 있다.


사실 소위 보수성향의 학문적 주석총서라도 들춰 보면 이런 얘기가 얼마나 황당한 매카시즘이요 신기루 같이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성경비평학 자체는 성경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로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도구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느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신학훈련을 받지 않은 교회회중들에게 이런 얘기가 대체로 금시초문에 속한다.


왜 그럴까? 아무리 보수성향 교단일지라도 (대표적으로 NIC나 WBC 같은 보수성향의) 학문적 주석총서를 도구 삼아 설교준비 하는 목회자라면 근본주의 신화가 글자 그대로 신화임을 모를 수 없을텐데,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해서 자기 목회경력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큰 평신도와 교권주의자들이 사상검증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자유주의니 이단이니 빨간 낙인을 찍어 버리면 일개 목사가 뭘 어쩌겠는가. 그냥 극보수적인 회중의 눈높이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근본주의 신화를 숭배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보수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의 주저 "개혁교의학"을 보면 한국교회에서 "보수" "정통" "개혁주의"로 통하고 있는 근본주의 신화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몇몇 신학자들이 ... 성경이 모든 문제에서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추론한다면, 이것은 성경에 오류와 실수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다른 이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일면적이다. 성경은 가장 확실하게 참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자체가 의도하는 의미에서 참되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우리의 엄밀한 자연과학적, 역사학적 지식이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미 이 논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성경은 지질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혹은 역사학의 교과서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 분야에 대한 다양한 진술을 담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 각각의 사례에서 저자가 그 진술로 말하고자 의미한 바를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의 독자들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또는 경세적) 진리, 형식적 오류와 내용적 오류, 엄밀하게 자연과학적인, 혹은 역사학적인 진리와 문예적, 시적 진리 일반, 우리가 역사를 저술하는 방식과 고대셈족 사람들의 방식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이 구분을 주의깊게 염두에 두고 성경에 대한 우리의 비평과 주석에 적용한다면, ....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관찰해 온 바에 따르면 - 우리 의미에서 역사로 입증되지 않으며, 저자에 의해서, 따라서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렇게 의도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이 부분들은 우화와 신화와 사화와 전설과 알레고리와 시적 표현들일 수 있다. 이들은 성경기자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른 출저로부터 혹은 대중적 구전으로부터 취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예시로써 종교적, 윤리적 진리를 가르치고자 한다. 이것은 창조이야기와 낙원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의 많은 이야기들과 족장사 등에 해당된다. 성경 책들의 진정성 여부까지도 자유롭게 관찰되어야 한다. 모세오경이 모세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고 다윗에게 돌려지는 많은 시편들이 다윗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고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옮긴이 주: 이사야서 40-66장 = 소위 제2이사야)이 첫 번째 부분과는 다른 저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성경의 영감은 확실하다. 그러나 저작권의 진정성은 열려 있는 문제다. 하나님의 책으로서 성경은 모든 비평을 능가하지만, 인간의 책으로서 다른 모든 문헌과 마찬가지로 역사비평학적 방법과 표준에 의해 연구될 수 있다."(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1, Prolegomena, 412-13)


역사비평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전통적인 저작권 진정성 주장에 대해 유연한 헤르만 바빙크?

역사비평학을 저주하고 전통적 저작권 진정성 주장을 신성불가침으로 수호하는 우리나라 "정통" "보수" "개혁주의"에서 그를 표준적인 신학자로 생각한다고?

그러면서도 역사비평학은 사탄의 전략전술이요 자유주의의 찌르는 가시인가?


한 마디 더 해두겠다. 근본주의 신화의 신봉자들 가운데 어떤 부류는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하는 최악의 자유주의 신학자요 이단선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한다고? 과연 칼 바르트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읽어는 봤는지, 읽었다면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성과 역사비평학 문제에 대한 사고방향에 있어서 바르트와 바빙크는 서로 기본기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왜 칼 바르트를 그토록 저주하는 자들이 바빙크에 대해서는 순한 양처럼 침묵하고 있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편가르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시겠는가?


2014. 12. 23. 22:10

예수님도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는가?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는가?


우리 한국교회 회중들에게는 근본주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 개인이나 근본주의 계통의 스터디 바이블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해 온갖 경건하고도 허탄한 신화가 유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통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다는 주장일 것이다.


과연 예수님도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인정하셨는가? 그 말이 과연 정말인지, 근거구절 두어 개만 살펴 보도록 하자.


1.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율법서(토라)를 "모세의 율법"이라고 지칭하셨다.

어째서 이렇게 지칭하셨을까?


"모세의 율법"이란 표현이 율법서를 가리키는 지시어로서 통하던 당대의 언어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당대에 율법서가 모세의 율법이라고 널리 지칭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저작권에 대한 당대 통념이 "무오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당대 유대교의 통념을 "무오한 성경"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 본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아무 상관 없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오경저작권은 오경 자체의 내적 증거와 성경개론의 전체맥락을 고려함으로써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당대 언어관습을 따라 율법서를 지칭하는 지시어로 쓰셨다고 해서 저절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예로, 유다서에서는 "아담의 칠세손 에녹의 예언"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에녹1서를 비롯한 에녹전승을 가리키는 지시어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인정"했으니까 에녹1서, 또는 2서나 3서는 영감받은 예언인가? 혹은 문자 그대로 에녹이 한 예언일까? 유다서기자는 이 문제에서 에녹저작권의 "인정"이니 뭐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전승이 가리키는 진리의 요소를 독자들에게 가리켜주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에녹저작권을 운운하고 싶다면 어째서 에녹1서는 성경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물음에 답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언급하셨다는 이유로 모세저작권이 확립된다면, 또 이 글에서는 따로 더는 다루지 않겠지만 사도들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언급했다는 이유로 모세저작권이 확립된다면, 사도가 에녹의 예언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에녹저작권이 확립된다는 말도 성립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저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2 요한복음 5:46~4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는 아예 율법서(토라)가 모세라고 지칭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인가? "모세저작설을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 그러나 모세저작설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이런 뜻이 되는가?


이것이 정확하다면 이로부터 모세저작설을 믿지 않는 (사실상 자기들 이외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인 바)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도, 성경도 믿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추론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추론이 과연 합당한 추론인가? 과연 본문의 정신과 취지가 이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갖다 붙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유대인들은 "소위 모세저작설도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통념에 따라서 당연하게도 모세저작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모세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까?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계시의 정신을 철저히 외면했고,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지, 애시당초 모세저작설을 믿으라는 요구가 아니다.


이런 구절이 오경의 모세저작설 증거라고?

오경의 모세저작설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예수님을 믿겠냐고?


나는 근본주의자들이 매사에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아님 말고 식으로 성경인용을 하니 어떻게 예수님을 똑바로 믿겠냐고 되묻겠다.


심지어 성경인용을 틀리게 하는 것도 궁극적인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틀린 줄 깨달으면 피차 고치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틀린 성경인용을 고치기는 커녕 전가의 보도 삼아 동료그리스도인들을 자유주의자니 비정통이니 이단이니 낙인찍는 처사는 정말 고약하다.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성경구절을 갖다 붙여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는 행위야말로 계시의 정신은 철저히 외면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유대인들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폭력적인 성경인용을 일삼는다면 온갖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성경인용으로 스스로 멸망길로 달려가는 사이비이단자들과 과연 무엇이 구분될 수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경을 가르친다는 목사들이 이젠 좀 이런 허탄한 근본주의 신화를 집착하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2014. 12. 5. 09:21

최근 동성애 차별논란에 관하여

최근 서울시가 제정키로 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박원순 서울시장이 폐기하기로 하는 과정에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조항을 둘러싸고 극우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일련의 소동이 있었다.


너무나도 황망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몇 마디 해 두도록 한다.


1. 근본주의자들이 왜 유독 동성애를 걸고 넘어지는가? 물론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1.1 과연, 로마서 1장에 동성애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언급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언급된 다른 죄악들은 다 뭐란 말인가? 로마서 1-3장에 언급된 죄악들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악에서 자유로울까?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심판 선언은 반드시 3장 이후 천명되는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근본주의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근본주의자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동성애자들도 구원의 길에 있을 수 있다고? 근본주의자들 자신들이 그 수많은 죄악을 행하면서도 구원의 길에 있다고 자부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결코 그럴 수 없는 저주에 빠졌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동성애가 성령모독죄나 배교라도 되는가?


1.2 모세오경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들 역시 죄에 대한 일반적인 고발이지, 유독 동성애를 저주하라든지 동성애자에게 폭력과 차별을 행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구약율법의 규정으로 사람에게 정신적, 물리적 폭력과 차별을 가하고 범죄자 취급해도 된다면, 구약제사규례며, 음식규례 따위도 다 지키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은 21세기에 사사들과 함께 사악한 이방인들을 "진멸"해야 할까?


1.3 성경의 문자를 문맥과 취지에 상관 없이 원하는 대로 똑 떼어서 침소봉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는" 사이비이단이 애용하는 자의적 성경해석과 거의 구분될 수 없을 지경이다.


2. 근본주의자들은 동성애가 절대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절대로 아니라고? 이들은 선천적인 동성애자들을 만나보지 못했거나 만났어도 인간 취급을 안 했던 것 같다. 세상에는 기형아도 있고 장애우도 있듯이 동성애자도 있다. 자연세계에도 기형과 장애가 있으며 동성애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2.1 동성애는 세상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행과 소외와 변두리로서 교회가 기도하고 긍휼히 여길 연약함에 해당하지, 진 밖으로 끌고 가 진멸할 성령모독죄가 아니다. 교회는 이들과 공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세워주라고 부름 받았지, 이들을 정죄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그런 것은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이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3.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근본주의에 경도되어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성애라는 특정사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미국근본주의자들의 어젠다들을 그대로 흉내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3.1 미국 서민대중들이 부패한 우파정치가들에게 비호 받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에게 부당하게 해고와 착취 당한 뒤 하는 일이란 고작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를 규탄하는 시위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딱하고 한심한 것은 낙태,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같이, 그네들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떠는 문제들보다 더 시급하고 절박한 어젠다들이 산적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서민대중들이 간단한 의료처치조차 병원 가서 하기엔 너무 비싸서 집에서 직접 꿰매고 자가처방하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하고 야만적인 사회구조에 맞서 저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가 하고 있는 짓이란? 고작 베리칩 음모론과 임박한 대환란의 종교적 망상으로 서민대중을 위협하여 미국 우파 보수층의 이해관계에 영합하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의료처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에 서민대중이 저항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약간의 교인들을 긁어 모아 자신들보다 배나 악한 광신도로 만드는 것 정도? 나머지가 있다면, 부패한 공화당 세력이 다수의 미국대중들의 충성을 갈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것 뿐이다.


덕분에 미국의 기독교인구는 매년 감소추세에 있고, 기독교내 공화당 지지자들은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국 근본주의의 약진? 아니다. 미국교회가 부패한 공화당이라는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놀라운 부흥성장을 하면 할수록 미국교회는 미국사회가 극복하고 일소해야 할 민중의 아편이자 악의 축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근본주의라는 역병의 창궐이다!


어째서? 미국의 극우주의와 근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자유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아
억압된 분노와 불안을 표출하는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병리적 현상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때 독일에서 나타났던 병리적 사회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극우 근본주의는 전체주의의 서막이다. 미국사회는 지금 세계자본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3.2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는? 한국교회도 동성애보다 시급한 사회적 어젠다들이 널려 있는데, 아니, 그보다 내부적으로 정리되고 개혁되어야 할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진적 깨어 대비해야 할 진정한 적수인데, 자꾸 외부에서 엉뚱한 적을 상정하고 있다. 동성애자, 이슬람, 종북빨갱이, 로마가톨릭, 프리메이슨 - 실체조차 분명치 않은 외부의 적을 타도하고 배타함으로써 내부결속을 다지는 얕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미래는?


안타깝게도, 정신줄 놓은 군중에게 선전선동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간다.

교회 회중이 예외인가?

저 악랄한 서북청년단을 태동한 것이 한국교회인 판국에,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사대강과 부정선거와 서북청년단.

이제 대한민국에 무엇이 올 것인가...

한국교회여, 한국교회여,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