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8. 09:09

최근 개신교 교세와 근본주의의 향배 (개정판)

각 교단 홈페이지와 교계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를 종합해 보면 2012년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 주요 개신교단들이 보유한 신자수는 다음과 같다.  물론 각 교단들이나 교계언론을 통해 알려진 아래의 신자수는 보유한 교적부의 신자수를 단순집계한 것으로 교인이동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계청이 발표한 개신교인수를 훨씬 웃돈다. 실제 숫자는 절반 정도 에누리해서 알아듣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 정도 의미는 있을 것으로 본다.

1. 예장합동 (295만명)
2. 예장통합 (285만명)
3. 감리교회 (153만명)
4. 하나님의 성회 (120만명?)
5. 침례교 (100만명)
6. 예장백석 (87만명)
7. 기독교 성결교 (56만명)
8. 예장고신 (42만명)
9. 기독교장로회 (33만명) 
10. 예수교 성결교 (28만명?)
11. 예장대신 (23만명)
12. 예장합신 (12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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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34만명

1. 통계상 추정치에 관하여

이 가운데 최근까지 교단통합선언 이후에도 교단분열이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성회 쪽 교세는 언론에 발표된 추정치인데, 일단 하나님의 성회 계통의 3개 교단들의 총 신자수가 2000년대 이전에 침례교를 웃돌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님의 성회 계통 교단들은 여전히 교단통합 협상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하나의 교단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단은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대표하는 기하성(=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의 신자수만 쳤지만, 교단통합이 성사될 경우 신자수는 이보다 좀더 많게 되어 감리교의 그것에 육박하게 될 것이다.

예수교 성결교회도 정확한 교세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NCC 가입 문제로 분열할 당시 기성 쪽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었고, 기성, 예성, 나사렛 성결교 세 교단이 합하여 96만명 정도라는 2005년도 기사가 나와 있기 때문에 기성측의 최소한 절반에 해당하는 교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 신도수 6만명의 성공회1만명 내외의 루터교, 구세군, 복음교회 등은 우리 사회에서 인지도가 비교적 높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지형을 바꿀 만큼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군소교단들이다. 이밖에 예장합동계열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군소교단들이 있는데,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위에 열거한 상위 12위 안의 중소교단 하나 규모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2. 주요 장로교단들에 대한 분석

한국개신교 보유신자수 상위 12개 교단 가운데 7개 교단은 장로교회의 교단들이다. 장로교 교단들의 신자수 총계는 777만명으로, 한국개신교 총수의 약 63%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소위 보수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들은 합동, 백석, 고신, 대신, 합신의 5개 교단으로, 장로교회 특유의 소위 '신학적 근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이들의 신자수는 459만명이다. 장로교회 가운데 비교적 개방적인 개혁주의 노선에 서 있는 예장통합(285만명)과 기장(33만명)에 견주면 59:41 정도 비율이고, 상위 주요교단 신자수의 총합 1234만 가운데 1/3을 조금 넘는 수치(37%)이다.

소위 보수개혁주의 장로교 교단들은 주로 근본주의 특유의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해왔기 때문에 교계에서나 인터넷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큰 편이다. 이들의 신학노선에서 '사탄의 궤계'로, 증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는 칼 바르트나 관상기도에 관해 인터넷에서 얼마나 네거티브한 선동들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지 상기해 보면 이들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큰지 실감할 수 있다.

단일교단으로서 최대교단은 예장합동측이 2000년 전후부터 합동계통 중소교단들과 교단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예장통합을 제치고 최대단일교단으로 발돋움했다. 

물론 통합측은 최근 300만 신자운동을 벌여 자체집계 결과 목표를 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통합측의 교세성장률은 줄곧 합동측을 앞서왔기 때문에 통합측 신자수가 합동측 신자수를 넘어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장합동측이 최대단일교단으로 발돋움한 배경의 핵심은 개별교단의 교세성장률을 넘어서는 몸집불리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데 있다. 즉 몸집불리기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상당한 교세를 갖춘 다른 합동계열 교단들이나 보수개혁주의 노선 교단들이 서로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교단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보수개혁주의노선의 5개 장로교단들은 - 당장은 현실적 장벽이 높겠지만 - 적당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교단통합을 이루어 최대 459만명 규모의 거대교단을 이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단통합논의는 무엇보다도 백석과 대신 교단 사이에서 활발하다. 백석 쪽에서 대신과의 교단통합협상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대신 쪽에서 - 특히 백석의 여성안수안 통과를 두고 - 상당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회원교회 70% 정도가 이미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두 교단이 합쳐진다면 신자수 100만명을 헤아리는 또 하나의 대형교단이 생겨나게 된다.

백석측은 예장통합과는 2009년에 교단통합 얘기가 나왔었는데 현재는 별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백석 측이 예장통합과 가진 신학적 공통분모는 여성목사안수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 정도를 들 수 있겠지만, 배타적인 보수개혁주의신학을 부르짖어 왔다는 점, WCC가입 문제에 대해 음모론을 동원하면서 반대하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점 등은 극복해야 할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어쨌든, 백석과 예장통합의 교단통합시도는 보수장로교 5개 교단의 결속력 내지 동질성이 반드시 공고한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백석과 대신이 예장통합과 더불어 합동 주도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을 탈퇴하고 한교연(=한국교회연합)에 가입한 상황이 주목해 볼 만하다. 두말할 것 없이 합동측의 무리한 권력욕은 그들 자신에게 덫이 되고 있다. 스스로 근본주의 장로교단들 사이에서 리더쉽을 깎아먹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지기반이자 존재기반이 되는 보수개혁주의 교단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1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에 대한 분석과 전망

두 장로교단은 국내 개신교의 판세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예장합동의 리더쉽은 결국 보수개혁주의 노선 장로교단들에서 나오며, 신자수 확보와 더불어 이들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보수적 선명성 확보가 이루어질 때 이들의 맏형이 될 수 있다. 

예장합동이 여성안수를 시행하고 있는 예장백석에게서 최소한 전략적 동반적 수준에서라도 힘을 얻으려면 예장합동에서도 여성안수문제 사안에서 비슷한 결단이 있어야겠지만, 이것은 예장합동이 보수적 선명성 확보를 통해 보수개혁주의교단들의 맏형으로 자리매김되기를 추구해 온 전략에 변경이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보수적 선명성 경쟁을 통해 맏형지위를 확보한 예장합동의 목소리는 이들 교단들의 목소리와 대동소이하다고 보아도 크게 그르침이 없다. 이것은 예장합동의 강점이 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소위 보수개혁주의 노선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예장합동의 리더쉽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는지가 늘 물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장합동의 전략은 보수적 선명성을 강화하면서 그 장점에 설득되고 감화되는 신자들과 타교단들이 늘어나도록 하는데 있다. 보수적 선명성 강화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미국 근본주의적 재현과 헤르만 바빙크로 대변되는 화란 신칼뱅주의의 절충과 종합이라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데, 미국 근본주의와 화란 신칼뱅주의 모두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을 정답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고 문제적이다. 그러나 보수적 선명성 강화는 분단상황의 불안정성이라는 선교적 배경에서 그동안 매우 잘 먹혀 들었던 전략이기 때문에 예장합동의 전략은 비록 폐쇄적일지언정 상당히 잘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예장통합의 리더쉽은 전통적으로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각 교단에 두루 통하는 신학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예장통합은 보수개혁주의 노선 장로교단들만이 아니라 타교단들에도 일정한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신학적 중도노선에 서 있다. 따라서 예장통합의 전략은 보수적 선명성 강화가 아니라 칼뱅,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몰트만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신학계보를 계승하여 개신교단들 전체에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개방적 소통능력, 또는 "중심에 서는"(김이태) 균형감각에 있다. 예장통합이 지향하는 리더쉽은 바람직한 방향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단상황의 불안정성이라는 선교적 배경에서 과연 어느 정도 먹혀들 수 있을까, 혹시 어중간한 회색지대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개신교 전체에 대한 분석과 전망

소위 정통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 5개 교단은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근본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이와 비슷하게 침례교(100만명)과 예수교 성결교(28만명)도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으나, 이들은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칼뱅주의 계통 근본주의에 견주면 배타성과 폐쇄성이 상대적으로 강하지는 않아서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상당한 수용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본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교단들의 교세를 합하면 587만명으로서, 한국교회 전체 교세의 절반(47.5%)에 조금 못 미치는 인원에 여기에 속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다시피 비장로교 근본주의 교단들의 신학적 입지는 어느 정도 유동적이다. 근본주의 장로교단들과 이들의 유대관계는 '개혁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침례교에는 개혁주의 유산이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예성측에는 그만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칼뱅주의 계통의 예장통합(285만명)과 기독교 장로회(33만명), 웨슬리주의 계통의 기독교감리회(153만명), 하나님의 성회(120만명), 기독교 성결교회(56만명), 이상 5개 개신교단은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근본주의를 탈피하여, 근본주의 교단들이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등으로 낙인찍는 신학노선에 서 있다. 즉,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과 성서비평학에 대해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교세는 총 647만명으로서, 한국교회 전체 교세의 52.4%에 해당된다.

여기서 기감의 입지는 통합의 그것에 비해 한결 유리해 보인다. 예장통합은 합동측과 달리 신학적으로 보수개혁주의 노선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근본주의 장로교단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장로교회의 맏형노릇을 하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다. 반면, 기감쪽은 예장통합에 비해 절반 수준에 가까운 규모이지만 350만 웨슬리계통교단들의 맏형이라는 위상이 있다. 비근본주의 장로교단인 예장통합과 기장의 규모가 318만명이기 때문에, 예성을 제외한 비근본주의 웨슬리계통교단들만으로도 329만명이 되어 비근본주의 장로교단들에 근소한 교세의 우위에 있게 되며, 예성과의 협력을 강화한다면 350만명 규모의 효과를 보게 된다.

여기서 기독교감리회가 갖는 독특한 위상이 드러난다.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쇠퇴할수록 비장로교회 교단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감리교회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볼 수 있다. 반면, 예장통합의 리더쉽은 근본주의 장로교단들을 얼마나 설득하느냐를 중요과제 가운데 하나로 갖고 있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이미 수행한 바와 같이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공감적이고도 비판적인 신학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는 현재 보수와 진보진영 양쪽에 발을 걸쳐놓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최근 발언과 행보가 보수와 진보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오중복음과 삼박자축복"론에 대한 예장통합의 이단성 비판 이후 기하성측은 부단히 신학의 현대화를 추구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세대학교 신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보면 근본주의를 탈피해 있다고 보아도 크게 그르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성을 비근본주의 교단으로 치는 것은 여전히 상당히 망설이게 된다. 교단의 실권을 잡고 있는 조용기 목사와 그 주요측근들이 세대주의 종말론과 반공근본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하성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근본주의로 회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교단이다. 결국 오순절 계통 교단들은 근본주의와 비근본주의 사이에서 지형을 좌우할 수 있는 캐스팅보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 볼 수 있다.

4. 근본주의 이후 대체 프레임

현재 시점에서 보기엔 근본주의 프레임은 상당기간 영향력을 잃지 않을 것 같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입지조건과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희생양을 끊임없이 구하는 역기능적 정신구조의 종교화에 관한 수요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근본주의보다 여기에 잘 들어맞는 사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장합동을 비롯한 근본주의 교단들의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주의 프레임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역기능적 신앙유산이다. 근본주의 프레임의 역기능성이 근본주의 교단들이나 근본주의 지지자들에게도 그 심각성이 인지되고 대체 프레임을 모색하게 될 시점, 최소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긴 어렵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한국교회를 규정하는 프레임으로서 힘을 잃게 될 경우 이것을 대체할 프레임이 분명 등장할 것이다.

지배적 프레임의 교체가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가 보수개혁주의 형태로 나타난 데서 예컨대 복음주의, 보수적 웨슬리주의, 부흥주의 등과 같이 옷만 갈아입고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근본주의 프레임의 역기능적 신앙유산이 극복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앞으로 근본주의라는 지배적 프레임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 대해서 반드시 재고가 필요하다.

1. 성서비평학의 정당성과 한계에 대한 올바른 평가
2. 칼 바르트 이후 현대신학의 공헌에 대한 전향적 이해
3. 반공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치-경제적 기득권층과의 밀착관계
4. 증오와 배타의 대상을 설정하여 그들을 비방함으로써 자기정당성을 확인하는 형태의 희생양 메커니즘  또는 역기능적 신앙
5. 세력결집, 성장일변도의 자본주의 종교성 극복

이상과 같은 특징을 모두 담지한 세계교회적 흐름으로는 다른 글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칼 바르트 신학이나 "후기자유주의"가 있다. 그러나 이들 사조는 자유주의 신학에 견주더라도 - 적어도 아직은 - 목회현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까닭은 (1) 바르트 신학이 너무 방대하고 깊은 논의들을 담고 있어서 바쁜 목회현장에 쫓기는 목회자들이 충분히 집중적으로 연구하기에 난점이 있고, (2) 바르트 신학의 강력한 영향 아래 성립된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기존 교회의 계급적 구조에 맞지 않아서 메노나이트교단과 같은 소규모 교파에서 적극적으로 실험, 적용 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근본주의의 대체프레임은 한꺼번에 칼 바르트 신학이나 "후기자유주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두 가지 탈근본주의적 특징들을 전유, 통합한 프레임들이 나타나면서 한동안 경쟁과 실험을 통한 검증과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선 진보적 복음주의가 경쟁과 검증에 유리한 신학적 자산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현실적으로 전망이 있어 보이지만 교단적 기반이 약하다. 웨슬리주의는 교단적 기반이 강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쉽게 부각될 수 있을 듯 하지만, 웨슬리주의만으로는 근본주의와 충분한 차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진보적 복음주의와 웨슬리주의가 상호결합된 형태의 대체프레임이 한동안 한국교회의 신앙적 틀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전망해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프레임이 적용되는 과정에서도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근본주의의 대체프레임이 인간을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정체성을 두면서도 근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역기능적 신앙양태와 그 정당화로서의 종교이데올로기들을 극복하는 방향이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5. 추가사항
- 이 글의 분석은 신자수 또는 교세가 교단의 영향력에 대한 직접적인 바로미터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물론 교단의 영향력 내지 감화력은 신자수나 교세로만 환원될 수는 없는 복합적인 것임이 간과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큰 흐름을 짚어보고 내다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의 용이성과 단순성을 위해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을 일단 배제한 상태에서 분석을 해 보았다.
- 특히 신자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별공동체가 얼마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을 실험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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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