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3. 14:31

슈테판 츠바이크의 칼뱅 전기에 대한 단상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1936)라는 책은 종교개혁자 칼뱅을 자기 견해와 다르면 검열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히틀러와 다름없는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1) 꽤 오래되었지만 칼뱅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즐겨 입에 오르내리는 책이다.

칼뱅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이미 종교개혁 당시부터 로마가톨릭 호교가들이나 칼뱅의 정치적 적수였던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이 유포해 온 일종의 진부한 신화에 불과하다. 이런 진부한 신화의 진원지인 로마가톨릭에서조차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부정적 신화의 일방적 이미지가 걷혀진 연구들이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근대적 가톨릭문화에 익숙한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에 대한 태생적 가능성이 전근대적 가톨릭문화를 토양으로 히틀러가 득세한 암울한 1930년대 유럽의 상황이라는 기후를 만나면서 열매맺게 된 그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유독 칼뱅과 종교개혁인가?

사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칼뱅과 종교개혁을 겨냥해 히틀러의 전제정치와 같다고 비난한 유일한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은 아니었다.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에리히 프롬 역시 루터와 칼뱅을 히틀러에 견준 바 있다. 다시 말해, 당대 유대계 독일어권 지식인들에게 칼뱅과 종교개혁교회가 히틀러와 다름없다고 규탄할 건덕지가 뭔가 있었던 게다. 그게 뭘까?

칼뱅과 종교개혁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의 규탄만 들으면 정말 뭔가 칼뱅과 종교개혁 자체에 히틀러스러운 뭔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정짓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규탄은 중상과 뜬소문과 오독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었고, 번짓수도 합당치 못했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내적 동기가 그들의 규탄을 규정짓고 있는 측면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이 칼뱅과 종교개혁, 나아가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하게 된 그들 자신의 내적 동기로서 히틀러에 대한 당대 독일개신교의 ('독일 그리스도인' Die Deutsche Christen 이라는 조직을 매개로 한) 어용적 행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소통속도의 한계로 말미암아 농민들에 대해 잔인한 무력진압을 독려한 꼴이 되어 버렸던 마르틴 루터와 달리, 쟝 칼뱅가 '박해'했던 적수는 세르베투스(*2)나 카스텔리오 같은 당대의 (나름 저명한) 소수파 인문주의 지식인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칼뱅은 이들 모두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자들의 운명만 화형이나 추방이었던 것이 아니라, 제네바에서 칼뱅이 사역한 처음 4년 동안 58명이 사형당했고, 76명이 추방당했으며, 처음 5년 동안 35명이 화형당했고, 13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식의 숫자는 전시상황이나 다름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힌다.(*3) 따라서 독일 그리스도인 교단의 준동에 따라 히틀러의 어용종교 노릇을 한 독일개신교에 대한 분노와 환멸에 치를 떨었던 이 유대계 유럽지식인들에게 칼뱅이 루터보다 먹음직스런 떡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분노와 환멸의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사실 유럽의 개신교인들조차 독일개신교회가 저 히틀러의 악마적 어용종교 노릇을 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와 마르틴 니묄러 등이 바르멘 신학선언을 발표하고, 독일고백교단이 세워졌으며, 이 교단의 주요 지도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암살기도에 가담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아까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개신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루터와 칼뱅에게 분노와 증오를 전이한 유럽개신교인들도 있었다. 제네바 교회의 목사였던 쟝 쇼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츠바이크를 부추겨 칼뱅에 악마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카스텔리오를 미화하는 전기를 쓰도록 독려했다.

쟝 쇼레와 같은 정신적 동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종교개혁자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는 엄정한 사태 자체의 사실관계에 부합되는지 여부에 비추어 가늠할 필요가 있다. 내적 동기가 앞선 나머지 사실관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츠바이크의 칼뱅에 대한 비난 자체는 사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츠바이크 자신의 내적 동기가 너무 앞선 나머지 엄정한 사실관계를 가리워서, 그의 강렬한 규탄에 진부한 선입견의 무비판적 추종으로서의 악(한나 아렌트)이라는 작가 자신이 목도한 시대적 악의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히틀러와 전체주의, 그리고 그러한 체재가 배제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호소라는 내적 동기 자체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 검열과 협박, 폭력을 들이대는 행태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요즘 현 정권과 대형교회, 개신교계, 심지어 가톨릭 쪽에서까지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건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어둡고 답답하게 한다. 특히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우리 한국개신교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나름대로 그린 '사악한 교조주의자 칼뱅'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4)


[덧붙임]
*1: 유명세가 덜하긴 하지만 이보다 한 세대쯤 앞서서 영국의 역사가 로드 액턴도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역사화했다. 로드 액턴 역시 열렬한 가톨릭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칼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처음 역사화한 장본인은 아니었다.

*2: 세르베투스를 '무지막지한 개신교 교조주의자' 칼뱅에게 '부당하게' 희생당한 '인문학자'로 보는 시각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에 있어서 세르베투스를 부당한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칼뱅의 소위 '잔혹함'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애당초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시의회를 장악한 '방종파(the Libertine)' 세력의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었다. 방종파도 세르베투스 문제를 기화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조차 세르베투스에게서 결국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베투스는 특히나 기존신학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지만 딱히 혁신적이거나 참신한 구석이 없는 황당하고 괴상한 이론들을 늘어놓아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을 즐겨한 일종의 극단적인 '악플러' 같은 인물로서, 당시 유럽 어디를 가나 가톨릭권과 프로테스탄트권 공히 이단자로 낙인찍혀서 당시 사회통념상 어떤 식으로 처형되느냐만 남아 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마지막 관용으로서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한 참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칼뱅이 아니라 가깝게는 제네바 시의회요 크게는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한 유럽사회의 법적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세르베투스는 화형으로 사형집행된 것이다. 왜 칼뱅을 축출하고 싶어했던 제네바 시의회 방종파 세력이 세르베투스에게 극형을 내렸을까? 방종파 세력에게도 당대의 법적 통념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도덕적 명분을 시위할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한 채 칼뱅이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칼뱅과 제네바 시의회를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통념에 따라 단순하게 동일시한 세속화한 후세사람들이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3: 유시민씨가 최근(2013년) 출간한 그의 책에서 칼뱅을 전체주의자요 자신의 신학이론에 오류가 없다고 믿었고 공포정치를 감행했던 광신자라고 평했던 것 같다. 유시민씨의 발언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받아쓰기한 카스텔리오의 중상모략을 칼뱅의 학살설의 사실관계 증언으로 받아들인 케이스가 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감스럽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인으로서 책을 통해 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마 유시민씨는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재생산하기에 충분히 정당하고, 반면 칼뱅이나 한국개신교가 허술하고 만만하면서도 부조리하게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어서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발언은 칼뱅에 대한 왜곡의 도가 지나치다. 본인은 유시민씨에 관해 정치인으로서는 기대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 아닌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말조심을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잘 모르는 문제에 끼어들어 말을 함부로 하면서 쓸데없이 적을 만드는 처사는 적어도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면 실망스러운 처신이기 때문이다.

2011. 7. 26. 13:47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2)

노르웨이 테러사건에 대해 지난 포스트에서는 테러범 브레이빅에게서 통상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의 특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적 의미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반다문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그가 dokument.no에 올린 글모음과 노르웨이 언론기사들을 주로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범이 앤드류 버윅(Andrew Berwick)이라는 이름으로 유포한 1500여쪽 분량의 '2083 유럽독립선언문'은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이때문에 과연 정말 사실관계에 부합한 것인지 여전히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해서, 문제의 '선언문'을 구해서 검토해 본 결과 앞의 포스트에서 제기했던 필자의 주장을 상당부분 뒤집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 대한 의혹과 분노를 세상에 대한 악마시와 자유주의신학 단죄와 음모론, 그리고 수구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력행사로 푸는데 머물러 있지 않고 테러라는 행동으로 옮기는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라니, 불쾌감을 넘어 정말 놀라움과 전율마저 느껴졌다. dokument.no의 글모음에서 과대망상끼만이 풍겨나왔다면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이 '선언문'에서는 기괴한 정연함이 느껴졌다.

테러범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윤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하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선언문'의 쪽수를 나타낸다.)

1. 성경을 신비화, 절대화하고 자기 신념의 전거로 삼는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근본주의적 특징은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의 원천으로 보고 성경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며, 성경의 전거를 대어가며 자기 신념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점에 있다. 

- '남성들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성경을 읽기 보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역할이나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시대분위기'를 개탄한다.(28)
- 무슬림들에게 성경이 모독당했지만 기독교에서 별 반응이 없는 파키스탄의 사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한다. (428) 
- 꾸란에 견주어 성경이 문학적으로 더욱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블로거 Fjordman의 글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했다.(706f.) (자신은 Fjordman의 글을 자신에게 중요한 책 목록에 넣었다.(1407) 그러나 Fjordman가 2005년 이후 활동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2009년 이후 구체적으로 테러를 준비하면서 자신 혹은 자기 신념을 중요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예전에 쓰던 아이디를 일종의 멀티아이디로 언급했을 수 있다. 그가 '선언문'의 심화연구 파트에 실어놓은 성전기사와의 인터뷰에 나오는 성전기사도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1349ff.))
- 그리스도인의 '자기방어'의 성경적 정당성을 상당히 길게 주장한다.(1327-34) (여기서 말하는 '자기방어'란 무슬림의 공세에 대한 자기방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자의적인 취사선택이라는 근본주의 성경인용의 맹점을 그대로 답습했다.)
- 성경을 모독하거나 공격한 무신론자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서부터 볼테르와 맑스를 거쳐 도킨스에 이르는 인물들이 열거된다.(1341ff.) (근본주의에서 성경을 신비화하는 전형적인 설교내용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의 성경에 대한 집착은 성경영감론을 기독교의 시금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본주의과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구유럽전통의 모체로서의 기독교전통이며, 성경은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기보다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경외와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의 그것에 가깝다.

2. 성경의 왜곡과 변개를 주장한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근본주의적 특징은 성경이 원문에서 왜곡되고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는 현대성경이 가부장적 어휘가 아니라 양성평등적 어휘를 사용하고, 문자적 일치가 아니라 역동적 일치, 즉 문자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 아니라 뜻이 통하도록 옮기는 번역으로 자기 해석과 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왜곡되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들, 즉 서구인들의 뿌리는 불가타성경이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이며, 이것이 무슬림에 대항하여 자기방어를 행사하는 기독교세계를 대변하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1137)

그러나 1611년 흠정역 성경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근본주의 집단 가운데서도 이단시되는 특정한 부류의 주장에 국한된다. 게다가, 흠정역과 무슬림 대항을 연관짓는 것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원문판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1611년판 흠정역 성경을 절대시하는 그룹들의 주장과도 다르며, 더더군다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것과 아무런 역사적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브레이빅이 이들의 주장을 인터넷을 통해 접한 뒤에 자기 신념에 나름대로 갖다 붙이고 빼고 한 것으로 보인다.

3. 종교간 대화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진보적 어젠다를 비난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종교간 대화와 상대종교를 공존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각종 진보적 이슈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노동당 교회'가 된 현대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특히 1403등) 이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한다.

4. 예언에 대한 근본주의적 집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왜 하필이면 '2083년'인가에 대해 주목해 본다. 혹시 특정예언에 따라 시간표를 만드는 부류의 근본주의대로 기독교나 서구세계에 전해지는 소위 미래예언과 관련있는 게 아닐까? 이슬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브레이빅이 이슬람에 관한 예언에 따라 자신의 시간표를 짰던 것은 아닐까?

이슬람과 범유럽세계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언에 대한 집착을 물려 받았다면 찾아내게 되었을 예언가로 바바뱅가라는 이가 있다. 그는 이슬람이 서구세계를 석권하리라는 내용의 예언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달리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바바뱅가의 예언이 원용된 경우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시간표를 짜고자 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바바뱅가에 따르면 유럽은 2010년 11월에 시작될 제3차 세계대전에서 핵전쟁을 겪고, 핵전쟁 이후 이슬람과 전쟁을 하여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2043년에도 이슬람은 유럽을 지배하고, 이슬람에 대한 무장봉기가 이루어지며, 2066년에는 미국이 이슬람 치하의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2076년에는 계급없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2084년은 '자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브레이빅이 유독 2083년에 맞출 때 이 '예언'을 의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명확하게 브레이빅 자신의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근본주의 프레임을 따라 적용해 본 나의 추측임을 밝혀둔다. 

(4번을 제외하더라도) 이상과 같은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타입과 겹치는 면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점에 무게를 두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브레이빅 유형'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근본주의로서, 일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온전히 구분된다. 이점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5. 그가 (근본주의) 기독교를 (취사)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성 때문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의 컬트적 속성와는 거리가 멀다. 즉, 전형적인 근본주의는 성경으로부터(만) 취사선택한 신념체계로서 근본주의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배타적인 창이 되고자 하는 데 비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인 척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종교는 약한 사람의 버팀목일 뿐이다. 자신은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진 않았지만 거사를 치를 때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기독교는 "참호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다.(1344)
그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 기도나 성찬참여를 들고 있다.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음 이후에 내세가 있다는 믿음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1345)
아울러 그가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그룹과 연대하기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많은 민족주의 그룹이 기독교의 깃발 아래 싸우기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하긴 하지만, 기독교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하나로 묶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380ff.)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며 새삼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며 좋아하는 기독교안티와 이웃종교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당신들이 신봉하는 신념이나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신념체계나 종교든 실용적인 이유에서 악용될 수 있다.


6.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한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03f.)

이것은 dokument.no 글모음에서도 일관되게 나온 얘기다. 이 주장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범유럽주의에 대한 '실용적' 관심과 일맥상통한다.

7. 그는 자신을 템플러기사라고 지칭하면서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 지칭한다.  

문제의 '선언문' 표지에서부터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의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신을 Justiciar Knight Commander, Knight Templar Europe, Knight Templar Norway 등의 프리메이슨 칭호로 지칭했다. 앞의 포스트에서 지적했다시피 통상적인 근본주의자라면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포스트에서 소개했듯이 노르웨이 프리메이슨 측은 사건이 일어나자 브레이빅을 제명하고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서둘러 부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그는 2010년에서 2030년까지 '첫번째 국면' 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템플기사단그룹인 PCCTS에 개인이 가입의식을 치르도록 했다.(1113f에 가입의식이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템플기사단은 기독교의 '자기방어'를 위한 저항운동단체를 뜻한다.(1118) 저항은 비폭력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1121f.) 그는 '청년유럽운동'(1127)과 같은 전위조직을 통해 우익자유주의자, 기독교 극단주의 무장단체, 전투적 민족주의 등의 그룹을 묶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고 슬쩍 흘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 뒤에 뭔가 굉장한 배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위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느냐이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이라면 치를 떠는 것과 달리, 브레이빅은 프리메이슨 템플 기사단이 서구 기독교세계의 이슬람교에 대한 자기방어를 위한 것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가톨릭에서는 아직도 프리메이슨과 별개로 '기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브레이빅은 자신이 말하는 '기사단'을 기독교의 또다른 양태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범유럽주의를 위해 실용적으로 선택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허울이고, 실체는 범유럽주의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프리메이슨의 연결은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에서 나타나는 적대관계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브레이빅의 '선언문'을 검토하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거기 나오는 내용들이 도대체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어디부터가 그의 망상 또는 희망사항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과연 브레이빅 배후에 어떤 무장단체가 있는지, 혹은 허세인지 여부는 노르웨이 경찰 당국의 수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브레이빅 개인의 허세로만 보자니 정신착란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배후에 정말 어떤 그룹이 있다고 보자니 이 또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건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이 약간 길어졌기 때문에 결론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 브레이빅이 말하는 타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와 프리메이슨 템플기사단을 합한 형태로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자기방어'를 위한 범유럽주의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자기 나름의 기독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같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원리주의 내지, 자신이 표현한 대로 기독교 극단주의라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정신적 안정과 범유럽주의라는 사회문화적 가치의 활용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1)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 심지어 그의 의심스러운 정신상태가 아니라, 테러범이 유럽의 다문화주의와 관용에 반대하여 테러를 저지른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도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2)


[덧붙임]
*1: "그는 단순한 테러범일 뿐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국민일보 기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브레이비크가 잘못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는 선언서 1307쪽에 표현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종교적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문화와 사회, 도덕적 토대 안에서 기독교를 믿는다. 이것이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근본주의 성향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두 분 신학자들이 근본주의 기독교와 테러범의 '기독교'를 구분짓는 주장도 대체로 괜찮았는데, 제목은 교계의 딱한 현실부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좀 민망스럽다. 아예 확 세게 나가야 한다는 심산이셨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원... 사고치고 집나간 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어야 할 사실관계는, 이 기사에서 근본주의와 테러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고 한 부분은 명백히 틀렸다는 점이다. 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찾아보면서 새삼 인식하게 된 부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그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백인기독교근본주의그룹 KKK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 '그리스도의 어린 양(the Lamb of Christ)' 등이 낙태, 애국심 등과 같은 특정사안에 대해 테러를 저지른 극단적 근본주의 그룹들이 존재해 왔고, 오늘도 미국 어디에선가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기독교 테러리즘에 관한 온라인자료로서 영문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을 참고할 것.) 더 나아가, 기독교는 북아일랜드, 세르비아 등 세계분쟁지역에서 폭력과 테러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독교는 분명 잘못되고 거짓된 형태의 기독교이지만, 이건 기독교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말했든 간에 그의 교회관은 왜곡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론으로는 애시당초 공교회의 회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교회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삼일절주일에 한국개신교회 강단에서 민족대표33인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고, 개신교가 삼일운동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회주체였다는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기억하고, 주기철, 길선주 목사 같은 극소수 목회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의 참람된 변절과 배교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며, 공교회적인 참회를 행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유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관는 근본주의적이다. 테러리즘을 저지르지 않고 음모론이나 사이비이단, 자유주의, 공산주의 단죄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그 배타적인 폭력성이 당장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근본주의가 테러리즘으로 발전하는 것은 단지 한끝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희망사항과 본인의 주장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어두고 싶다.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나는 두 편의 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이에 관해 노르웨이 테러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기독교 근본주의가 결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본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논지를 재확인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극히 위험한 폭력성과 폐쇄성,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적 관계의 폭력을 저지르는 형태로 이미 수없이 표출되어 왔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한 사례도 결코 없지 않다.
문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스스로가 근본주의자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다른 이름으로 진짜 정체성을 남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공교회의 형제요 친구인 근본주의자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더하시기를! 죄많고 허물많은 우리 자신과 모든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동일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2: 미국이 조지 W 부시 시대에 테러 이후 교회는 근본주의화하고 국가는 경찰국가로 돌변한 것과 달리 노르웨이 사회는 이 비극적 사건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서 노르웨이에 대한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통합전략으로서의 관용에 관해서는 좀더 심도있는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포기할 까닭은 없다. 테러의 비극을 겪은 노르웨이 사회의 의연한 대처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부디 우리 한국사회도 자유와 관용의 가치가 뿌리내리는 위대한 사회가 되길!

2011. 7. 24. 21:49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경찰이 발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크롬의 영어번역서비스를 통해 보니 노르웨이 언론에서도 경찰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로 지칭했다고 전하는 보도가 있다.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60705175-Anders-Breivik-From-Document-No.pdf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2011. 7. 15. 18:49

관상기도에 대한 김남준 목사의 견해

예장합동 신학부가 주최한 2011년 한국 개혁주의 신학대회에서 관상기도가 다루어졌는데, 어김없이 이 교단의 강렬한 근본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첫 번째 발제자 김남준 목사의 발언이 눈에 띈다. 발언 전문을 보지 못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기사에 나온 대로라면 그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으로 봤을 때 관상기도는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이 주장에 따르면, 김남준 목사는 존 파이퍼를 포함하여 관상기도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불건전하고 그릇된 신학적 판단'을 저질렀다고 에둘러서 말한 셈이 된다. 나아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치는 미국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가 '불건전하고 그릇된 신학적 판단'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한 셈이 된다.(*1)

도대체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의 기준이 뭔가? 김남준 목사 자신의 판단인가? 혹은 예장합동 신학부의 판단인가? 혹은 그들에게 암묵적 자기검열을 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넣고 있는 예장합동의 교권세력의 의중인가? 혹은 '그들'이 이해하고 파악한 한계 안에서의 '오직 성경'인가? 자신(들)과 판단이 다르면 불건전하고 그릇된 판단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딱한 독선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가 말하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적 판단'의 내용이라는 것이, 겨우 '관상기도가 이교적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로 흘렀거나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식이다. 미안하지만 바울과 요한의 '성경적 신비주의'라는 것도 있으며,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이교주의'가 구원사 안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 두고자 한다.

'누가 이론을 제기할지라도 관상기도는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김남준 목사의 주장이 자기억견의 일방적인 선포와 무엇이 다른가? '누가 이론을 제기할지라도'라니, 이 얼마나 막무가내식 사고방식인가? 관상기도를 한다고 곧 종교다원주의가 된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개혁교회가 복음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 원천으로 삼고 있는 서방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상기도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연 종교다원주의로 흘렀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사에서도 거의 마니교적 이원론에 방불한 배타적 교회중심구원론의 대변자라는 것이 엄연한 사실관계다.
관상기도가 또다른 의미에서의 정신적 번영주의라느니, 자아 중심의 실용적 사고니 하는 김남준 목사의 비판은 그가 얼마나 관상기도를 모르고 있는지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관상기도는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자기비움을 뒤따르는 기도로서, 정신적 번영주의나 자아 중심성과 극명하게 대치되기 때문이다.

김남준 목사말고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은 어차피 비슷비슷하니만큼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관상기도를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복음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이 근본주의자들의 독선적인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심히 의문일 따름이다. 자신이 이해하고 파악한 범위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가두는 행위야말로 가장 반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자기중심적 선민의식과 협소한 자신들의 계시이해로 동료그리스도인들과 이웃종교에 섣부른 총질을 해대는 행태를 빼다박았고, 가깝게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동생으로서 부족함 없는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 합동교단이 추구하는 신학의 형님뻘쯤 되는 미국 웨스트민스턴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 마이클 호튼이 펴낸 The Christian Faith (2011)를 훑어 보고 있다.(*2) 루이스 벌코프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신학의 흐름에 대해 상당한 구색을 갖추면서도 비교적 덜 무지막지한 논조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개혁 정통주의적 견해를 재확인하고자 하기 때문에 조만간 이른바 원조보수개혁주의를 외치는 노선에서 즐겨 인용될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은 1000쪽 정도의 꽤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논점에 대해선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얼버무리곤 하는 게 감지된다. 더욱이 유감스러운 것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신학자들의 견해를 학문적 서술스타일에 맞지 않게 비꼬고 희화화해 버리곤 한다. 이를테면, 호튼은 몰트만이 기존 신학에서 비성경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자기 신학을 펼쳤다고 기술하면서, 곧바로 그 신학의 배경은 블로흐와 헤겔의 철학, 유대교 카발라사상 따위라고 쓴다. 그러니까, 몰트만의 생각은 비성경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에둘러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17세기 개혁정통주의를 따르는 자기 견해가 '성경적'이라면서 몰트만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몰트만이 끌어오는 모든 성경적 전거와 문제의식은 싹 무시하고 내가 읽은 성경만이 진짜 성경이라는 식의 그의 논조에는 스스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척 하지만 비성경적인 오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호튼은 그와 같은 그림자에 정작 중요한 논점이 가리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는 책의 부제를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했지만, 순례자의 신학에 마땅한 겸손과 사려깊음, 성경적 관용과 공교회의 연합정신에 관해서는 자신이 권두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충분히 고려해 봤는지 의문스럽다.

김남준 목사와 예장합동 신학부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문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안은 다르지만 저변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국의 동생들은 아직 미국의 형님에게서 자기 확신을 (그나마) 덜 노골적이고 덜 일방적으로, 덜 전투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미국의 형님이나 한국의 동생이나 협소한 자기 확신이 비성경적인 오만으로 진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덧붙임]
*1: 미국의 건전한 복음주의 계통 신학교 대부분이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의 '나그네'님 글을 참고하라.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언급하고 가르친다. 렉시오 디비나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주요한 채널이며, 특히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동원 목사의 경우 관상기도는 주로 렉시오 디비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그네님은 실질적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관상기도를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 '관상'의 상태에서 기도했느냐와는 별개로 - 사실상 관상기도이다. 앞서 포스팅한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의 두 번째 덧붙임 글에서 밝힌 필자의 나그네님에 대한 코멘트도 참고하라.
*2: 이 글을 쓸 당시 마이클 호튼이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조직신학 교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분은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의 조직신학 교수이다. 영문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분교로 출발했다가 독립한 또다른 학교이다. 그러나 신학노선은 분명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보수개혁신학노선을 이어 받았다. (2011.9.2)
2011. 7. 11. 00:00

관상기도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견해

최근 명설교가이신 이동원 목사가 관상기도를 가르치다가 우리나라 근본주의자들에게 맹공격을 당하신 끝에 관상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근본주의가 기세등등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막무가내로 들이대면서 악선전을 일삼는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처신이 사이비이단집단들의 광란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국내의 거친 토양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도의 기풍을 소개하고자 애쓰신 이동원 목사님의 용기와 노고에 심심한 위로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관상기도는 비성경적인가? 근본주의자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의 보수개혁주의노선의 저명한 지도적 목회자 존 파이퍼 목사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언젠가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두었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의 발언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소개한다. 여기에 제시된 생각들을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잘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파이퍼 목사는 영어성경으로부터 관상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인용된 성경은 파이퍼 목사의 의미를 살려 영어성경으로부터 옮겼으며, 굵은 글씨는 모두 글을 옮긴 필자의 강조이다.


“[문] 개혁주의와 청교도전통에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소책자 「비전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기도들이 우리 예배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비전의 골짜기는 청교도들의 기도집입니다. 저는  거기에 나오는 기도들을 관상기도나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범주에 두고 싶습니다. 그 기도들은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며, 심지어 일종의 운율 같은 것이 있는데요, 눈치채셨겠지만 공동체적 셋팅에서 쓸 수 있도록 아마도 아주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기도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깊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이 성경적 실재라고 답변드립니다.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명상하라"(시편 1편) 제 생각에 관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 이게 뭔가요? 이것은 육체적인 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7-18절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이 조명받아 여러분의 소명을 알게 되기를!"이라고 바울이 말씀했을 때 언급된 바로 그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봄, 또는 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멈춰서 들여다 보고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으로 실재에 이르러 여러분이 영적 실재를 파악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이고 참되고 인격적이고 따스하고 강력한 일종의 기도를 일으킵니다. (* 옮긴이주: 파이퍼 목사가 일부러 의식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관상기도가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채널인 렉시오 디비나의 네 계기, 즉 읽기(lectio), 명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가 모두 나타난다. 여러분도 꼭 렉시오 디비나나 관상기도라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읽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 주의를 잡아 끌면서 읽기를 멈추고 깊은 묵상을 하면서 성령의 의도를 깨닫고 그 다음에 나올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를 확인해 가면서 이에 따라 기도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경험을 히에로니무스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는 성경읽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에 관하여 이연학, 「관상기도와 렉시오 디비나」in: 『활천』 2007.7:40-44을 참조할 것.)

그래서 제 답변은 제가 방금 정의한 대로의 관상기도와 명상의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 대해 "예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고, 그 사귐에 있어서 매우 신비적인 이런 종류의 깊이와 이런 종류의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결을 발견하려면 주로 신비적인 가톨릭전통에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학교 수업들에 대해 아주 화가 납니다.

이 레벨에서 하나님을 알고, 이 레벨에서 영적으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관상하며, 놀라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종류의 관상이 일어난 이들의 훌륭한 대변자들을 찾기 위해 나쁜 신학, 즉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나쁜 신학을 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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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파이퍼 목사의 견해에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논점이 드러난다.

-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 개혁주의 청교도 전통에서도 관상기도는 존재해 왔다.
- 가톨릭 전통이 아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하다.(*1)

파이퍼 목사는 가톨릭 전통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정교회의 더 깊고 풍부한 영성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관상기도에 관한 한 로마가톨릭의 역사적인 나쁜 신학이라고 생각하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의 보수개혁주의적 시각에서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일단 '나쁜 신학'으로 치부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의 영성전통을 배제하고 배타함으로써만 개신교적,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관상기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복음주의, 개혁주의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 위험성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냐 아니냐, 혹은 복음주의냐 아니냐, 혹은 개신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존 파이퍼 목사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 그러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그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안에서만도 아니고, 오로지 통성기도와 큐티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는 나머지 통성기도와 큐티 이외에도 기도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이라는 무지막지한 혐의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존 파이퍼 목사의 답변을 본 다음에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 존 파이퍼 목사는 종교다원주의 사이비이단자다. 또는 관상기도는 성경에 없는데 존 파이퍼 목사가 가톨릭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존 파이퍼 목사가 슬슬 맛이 가고 있다. 등등.
아니면
- 적어도 관상기도의 성경적 실재를 인정하고 계발할 필요가 있다.(*3)


[덧붙임]
*1: 이것은 단지 파이퍼 목사만의 개인적인 견해만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만 있는 '이방풍습'이 아니라, 칼뱅과 리처드 백스터 등 청교도들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우리 개혁교회 자신의 전통이다. 다만 한국교회가 미국의 대부흥운동 전통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에 관하여, 배정웅, 「개혁주의 전통에 나타난 관상기도」 in: 『새들녘』 2010.11:3-5쪽을 참고할 것.) 이동원 목사가 최근 자신이 운영하는 목회리더십연구소를 통해 발표했다고 전해지는 칼럼에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복음주의적인 관상기도'라는 화두를 후학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2: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소위 큐티 역시 성경말씀에 따라 하루를 조직하는 수도원주의의 잔재를 갖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Christian Spirituality :129) 큐티 외엔 말씀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없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동굴의 우상'(플라톤)이다.
*3: 좀더 인터넷을 뒤져 보니 지난 2010년 말쯤에 미국 아멘넷 자유게시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통 학교에서 교회사 박사학위를 하셨다고 자신을 밝힌 '나그네'라는 분이 이 게시판을 장악한 근본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는 중에 댓글에서 이동원 목사에게 문의메일을 보내 받은 답신을 이동원 목사님에게 추후 동의를 구하고서 공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동원 목사의 메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나그네님의 발제글과 댓글에 나타나는 관상기도 혹은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변호도 깊은 학문적 훈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내용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내가 보기엔 나그네님의 관상기도 개념은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하는 점이나 '비움'에서 오로지 '이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뉘앙스'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동원 목사의 그것과 비슷하게 복음주의의 협소한 교리주의적 테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그네님은 미국교계에 관해 우리가 잘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관계를 전해준다. 즉, 미국에서 95%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교들은 관상기도를 언급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며, 관상기도를 비난하는 것은 5%의 근본주의 계통 신학교라는 얘기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관상기도를 종교다원주의 이단으로 단죄해겠다고 기세등등해 있는 실정이다. 


2011. 5. 28. 22:11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4.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장21절)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들)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
2011. 5. 18. 20:16

故 이정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이정석 교수님의 안타까운 부고를 접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미인박명이라더니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가.
20년은 우리 곁에 더 계셨어야 할 분이었는데... 

언젠가는 꼭 가까이서 뵙고 말씀 나눌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던 분인데 너무나 아쉽다.

이제 후학들에게 짐을 나눠주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빈다.


내게 있어서 이정석 교수님은 그 행보가 늘 궁금하고 눈여겨 보게 되는 어른이었다.
근본주의가 득세한 한국교회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당신이 자란 교단의 지배적 신학의 문제점을 과감하게 비판할 용기를 발휘했던, 정말 국내에서 드물게 정직한 신학자이셨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정석 교수님의 출신교단인 예장합동은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의 원흉'(서철원)이라고 매도해 온 교단이다. 

칼 바르트는 세계교회에서, 소위 보수주의 교회에서 정말 자유주의의 원흉으로 통하고 있는가? 이정석 교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셨다. 

교수님은
총신대에서 기독교철학으로 학사과정을 하셨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교역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하셨다. 그리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세속화와 성화라는 제목으로 칼 바르트 연구를 수행하여 박사학위를 하시고, 미국 풀러신학교 등에서 조직신학교수로 봉직하다가 몇 해 전 귀국하여 최근에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부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라면 총신대와 고신대 신학자들의 학문적 본향이라 하기에 손색없는 곳들이다. 특히 화란 자유대학교는 국내 보수신학의 두 아이콘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활동했던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이정석 교수님은 바로 이곳에서 칼 바르트의 성화론으로 박사학위를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성화론은 자유주의의 원흉스럽다'이라는 사상비판을 잘 해서 박사학위를 하셨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칼 바르트의 성화론이 세속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논지였다. 이와 같은 이정석 교수님의 학문적 여정에 대해 교수님 당신자신의 글을 옮겨보자.

"......(화란대학교에서: 인용자) 나를 지도하는 환 에그몬드교수는 화란, 독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학회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실로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구해보고 싶은 신학자임에 틀림없었으나, 한국 보수신학자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개척분야로서 위험부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실로 총신대에서 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르트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서 바르트는 보다 균형있게 언급되었으며, 특히 바르트 아래서 친히 수학했던 클로스터교수는 그의 비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조건적 바르트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그와 한 학기동안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I/2를 읽으면서 개인지도를 받는 동안 나의 바르트에 대한 편견은 점차 제거되고 그의 신학이 주는 깊은 통찰력과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되었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위 인용문에서 이정석 교수님은 한국에서 보수주의신학의 아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미국 칼빈신학교와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칼 바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칼 바르트를 최악의 자유주의자라고 터무니없이 매도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바르트에게 직접 배웠던 신학자가 지도교수였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는 아예 지도교수가 유럽의 바르트학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학자였다. 적어도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갖춘 보수계통 해외신학교의 대표주자라고 할 두 학교에서 칼 바르트는 신학적 대화의 중심화두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미국근본주의의 기수역할을 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어떨까? 나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학교에서 교역학 석사를 하신 복음주의 신학자 한 사람의 글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의 이름은 이 블로그에서 가끔 언급한 바 있는 케빈 밴후저다. 공공연하게 안티바르트를 부르짖었던 반틸의 영향력이 강력한 학교에서 신학의 형성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을 읽어 보면 칼 바르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요전거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칼 바르트를 기독교사상사에 몇 안 되는 신학의 거인으로 당연히 인정하고 있기조차 하다.

이것이 세계신학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다 프리메이슨의 음모라든지, 세계신학이 배교와 변절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사고의 길로 들어설지 여부는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자여서 소위 '막 나가는' 진보신학계에서나 읽혀지는 게 아니라, 소위 보수신학계의 큰 산맥을 이룬다고 자부하는 저명한 신학교들에서도 칼 바르트가 내놓았던 복음적 통찰들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세계신학계를 더 둘러보면 지금은 바르트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칼 바르트가 남기고 간 신학적 통찰을 재해석하고 심화함으로써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장합동측은 아직도 외국신학교에서 멀쩡하게 바르트를 전공하고 돌아온 교단신학자들까지 안면몰수한 채 바르트를 매도하고 있고, 총회출판사를 통해 한종희 목사의 칼 바르트 신학비판이라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그 내용이야 바르트의 신학정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기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곡해와 아전인수로 가득하다. 국내 유수의 대교단에서 이런 참 낯 뜨거운 내용이 아직도 가르쳐지고 있다면 참 딱하고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신학이 자기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교권의 명시적, 암묵적 압력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 바르트를 입에 올렸다가 사상시비로 교수직에서 축출된 분이 있을 정도니 말 다했지. 예장합동만이 아니라 합신과 같은 합동계열의 중소교단도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새삼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귀하고 벌써부터 그립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탁한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슬러 가며 신학을 하셨으니 가히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자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래 글은 이정석 교수님의 신학함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뤄졌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박사학위논문주제로: 인용자) 바르트를 연구하고저 했던 이유는 바르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진보계열의 조직신학에서는 바르트가 중심인 반면 보수계열에서는 바르트가 전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대화와 화해를 이룰 수 없었다. 바르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대가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정석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마음 짠하게 하는 말인가...

나는 이정석 교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은 한반도 분단의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움받는다. 바르트 신학의 참된 함의를 덮어버리려는 온갖 황당무개한 곡해와 매도가 걷힌다면 한국교회는 아마도 한반도의 잘라진 허리를 잇는 소임을 감당하게 되지 않을까!

故 이정석 교수님을 주님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주님께서 한국의 보수신학계에서 이런 가인(佳人)을 만나볼 날을 주시기를 고대한다.
2011. 5. 14. 12:36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한국교회에는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 등을 자기 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상당수는 지나치다 싶으리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이 아닌 다른 신학도들이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하면 정죄의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곤 한다. 따라서 소위 개혁주의신학에 대해 개념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개혁주의신학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범위의 뜻을 지닌 표현이다.

1. 로마가톨릭신학과 대비되는 의미개혁교회(Reformed Churches)가 종교개혁 원리를 받아들이는 개신교 일체를 가리키기 때문에(F L Cross & 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Reformed Churches' 항목) 이 경우 개신교신학 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1.1 개혁신학의 영향권: 아울러 아래 2나 3의 개혁교회전통의 영향을 받아 그 후예를 자처하는 다른 개신교의 교파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루터교신학과 대비되는 칼뱅과 스위스종교개혁전통: 이 표현을 쓸 권리가 있는 교회전통은 해당 종교개혁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미국 등에서부터 우리나라 장로교회에 이르는 개혁교회 전통 일체이다. 대체로 다른 신학전통들과 마찬가지로 특정전통에 대한 배타적 권리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현대성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공교회적 신학을 수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칼뱅 이후 개신교전통에서 슐라이어마허와 칼 바르트, 몰트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신학의 거인들을 배출해왔다. 이런 의미의 개혁신학에 관한 논의의 예로는 루카스 피셔가 편집한 The Reformed Family Worldwide나 미하엘 벨커가 편집자로 참여한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에서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3의 그룹과도 함께 대화하고자 한다.(*1)

3.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의 전통: 종교개혁자 칼뱅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온 원조보수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이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2의 의미에서 '개혁신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가짜네, 개혁신학이 아니네 공격하는 일이 잦다. (*1)

이들의 공격패턴은 대체로 자기들이 신봉하는 아무개 신학자를 비롯한 '(17세기) 개혁신학'(과 그 후예들의 신학)에서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개는 감히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장로교회, 개혁교회 출신이라도 '개혁신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건 '신학'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개혁정통주의와 그 보수적 후예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베자와 투레틴, 영국의 청교도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17세기 개혁정통주의신학은 20세기초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까지 이어져 왔고, 미국에서는 바빙크의 신학을 따르는 루이스 벌코프와 반틸, 워필드, 찰스 핫지, 존 머레이 등의 구프린스턴학파와 그 후예들에게서 존중되어 왔다.

이 가운데 독일의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정통주의는 실은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세계교회에 통해왔음에도 '진짜 개혁신학'을 한다는 이들이 언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영미계 장로교회전통과 거기에 큰 영향을 준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통을 통해 소위 '원조보수 개혁주의신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실체가 바로 이 그룹이다. 폴 틸리히가 정의한 그대로, 현대의 상황을 신학화하기를 거부하고 일체를 정죄하면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고정되어 되풀이하고 흉내내는 것이 바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2)

근본주의 신학은 분명 신실한 최선의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정통', '원조보수'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 외에 다른 생각을 진리의 적으로 돌리는 호전성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자연히 교리주의와 교회분열의 악순환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나마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탁월하고 차원높은 개념적 세련성을 유지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 놓쳐 버리면 자기중심적인 분파주의를 통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롯한 온갖 착잡한 기형적 현상까지 배태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시대착오적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의 의미에서 개혁주의 원조보수를 별 반성없이 계속 부르짖는 분들은 내가 근본주의자라는 걸 알아주시오 자랑스레 광고하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셔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개혁주의를 들먹이면서 개혁주의에 근본주의의 이미지까지 착색시킴으로써 다른 개혁신학전통에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는 근본주의자라고 아예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켜 당당히 나서시라고 권해드린다.

[덧붙임]
(*1) 
그야말로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은 더이상 탐구될 필요가 없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자칭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그룹의 배타적 권리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할 따름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과 그 계승자들의 신학이 선험적으로 백안시될 까닭은 없다.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도 다른 신학유형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할 개혁교회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의 상황에 대해 정통주의가 제시한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했는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대라는 삶의 자리에서 17세기 정통주의의 해결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여부 역시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17세기 정통주의는 개신교신학에 있어서 사고의 예리함과 개념의 명료함(푈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신학언어의 정화소(틸리히)로서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예리한 사고가 변화하는 시대를 꿰뚫어 보기 보다 복고지향적 방어노선을 택함으로써 교회분열을 공고하게 만들고, 개신교판 마녀사냥이라는 영적 노이로제를 치유할 수 없었던 중대한 약점이 있다. 우리시대에 관해서는 변화하는 세계의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말할 것 없이 그대로 되풀이될 수 없다. 우리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서구세계의 화두와 씨름한 바르트나 몰트만조차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시대의 화두 자체가 달랐고, 그 화두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극한까지 추구해나갔던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선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
) 소위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이다. 17세기 정통주의 또는 19세기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이 곧 근본주의라는 얘기는 이 기본전제를 놓친 얘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 바빙크의 신학을 근본주의로 착색하여 숭배하는 현상이다. 이들의 신학을 근본주의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오독하는 근본주의 프레임의 실체가 무엇인가?


2011. 5. 13. 04:02

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한국전쟁 이후 한국개신교의 양적 팽창은 반공주의와 맞물려 있다.(*1)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한국개신교는 분단 이전에 북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공산정권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북한공산당에 대해 누구보다도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반공주의자였다.  이들이 남한의 개신교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이 원형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전후복구과정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남한사회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보완해줄 반공주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것이 바로 강력한 반공주의로 소문난 개신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개신교에 여러가지 강력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 군종목사제도: 한국개신교의 주도적 건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군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미국군종제도보다 불과 10년 늦게 군종목사제도가 설치됐다. 개신교의 독점적 지위는 군사독재말기인 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유지됐다.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는 글자 그대로 배가하게 되었고, 불교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개신교는 성장에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대형광장/체육관집회: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한 전설적인 여의도광장집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형집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재정적 행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왜 개신교의 대형집회에 대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을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진보기독교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자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국제여론을 희석시키고 진보기독교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수기독교는 반공주의의 최전선과도 같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인식이었다. 보수기독교를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신교, 구체적으로 보수계통 개신교는 독재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대형광장집회, 80년대 들어서는 대형체육관집회를 통해 막강한 세과시를 통한 자신감과 대규모 결신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란 급성장의 그늘로서 성장주의, 물량주의, 교회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는 독재정권이 육성한 반공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양적 규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탄의 무신론사상인 공산주의"를 대적하려면 최소한 남한인구의 일정수준 이상이 '복음화'해야 하고, 남한사회 전체가 복음화할 때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민족복음화'론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명분을 주었다.

교회분열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근본주의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역색과 신학적 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다름'이 곧바로 '틀림'으로 못박힐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다르면 곧 자유주의고 이단이고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에 잠재되어 있었던 교회분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시비에 명분 노릇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시대는 한국개신교에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가 각인되게끔 했고, 내재되어 있던 근본주의 성향이 활짝 꽃피우도록 했다.

공산주의권이 패망한 지금 반공주의는 사실상 실체를 잃어 버린 철지난 시대정신이다. 반공주의 자체를 악마화할 까닭은 없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당시에는 반공주의였다. 개신교는 반공주의라는 시대의 물결을 가장 잘 탈 수 있었던 사회주체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반공주의 적응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반공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억압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사회주체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소수의 진보진영 기독교를 제외하면 인식 정도가 가장 뒤쳐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텐데, 아직도 철지난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성장주의, 물량주의를 선으로 여기는 반성경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유산은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이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깨어나라!


[덧붙임] 
(*1) 이 글의 분석은 대부분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에 의존한다. 강인철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모두 논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난다.
딱 한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이 글에서는 한기총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라 - KNCC에서 1988년 '반공주의를 참회하는 선언문을 낸 데 대한 반발로 - 성립되었다는 강인철(과 아마도 많은 다른 분들)의 주장을 옮기지 않았다. 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반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KNCC의 선언문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조성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상깊게 가시화했던 세계적 화해무드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기총의 설립은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통일 이후 북한복음화를 염두에 두고자 한 보수교계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지금 보면 때이른 부푼 꿈이긴 했지만 북한에 단일한 개신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제안이 나왔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있다. 이점에 대해 해당분야 연구자들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간단하고 부담없는 메모와 같은 이 블로그에서 이를 구구하게 논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강인철은 적어도 책에 나타난 기술로만 보면 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총의 현재 모습이 대단히 문제적인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한기총을 애써 두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문에 한기총과 이와 관련된 보수교계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2011. 4. 15. 00:01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칼 바르트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 중상모략이나 다름없는 비난을 퍼부었던 반틸도 바르트에게 인사하려고 나왔다. 이미 반틸의 그에 대한 험한 소리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바르트는 반틸과 악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반틸(Cornelius van Til)이라는 신학자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 성향의 개혁주의 그룹에서 여전히 꽤 영향력 있다. 유독 국내에서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의 괴수'(*1)로 낙인찍히게 된 데는 근본주의 성향의 미국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반틸의 신학을 한 분들이 국내에 많았고, 이분들의 전승이 후학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반틸이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국내외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근본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다른 그럴싸한 칭호로 애써 꾸미고들 있다. 

프린스턴신학교가 현대주의를 포용하는데 반발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던 근본주의 그룹에 반틸이 들어 있었는데도 반틸이 근본주의가 아니란다.
현대사조에 대해 호전적이고 전투적으로 일관한 반틸의 면면이 근본주의의 프로필과 딱 맞아떨어지는데 반틸이 근본주의가 아니란다.

왜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조차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근본주의라는 멀쩡한 칭호가 부끄럽고 캥기기라도 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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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 이 선동적인 표현은 서철원 교수가 박형용 박사의 표현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칼 바르트를 공격한 것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원흉" 기사 참조.) 그의 말은 과연 얼마나 이치에 맞는 걸까? 일례를 들어 보자. 서철원 교수는 2014년 11월6일자 한 교계언론과 인터뷰에서 칼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제4/4권 65쪽에서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죄를 고백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했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죄를 잘 고백했다"고 함으로써 칼 바르트가 예수님에게 죄가 있었다고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이 인터뷰에 나오는 다른 발언들도 황당무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 발언은 특히나 참 어처구니 없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서 교수의 말을 뜻도 모르고 대충 베낀 게 아니라 서 교수의 실제 워딩을 정말 반영한다면 말이다. 서 교수의 바르트 비판이 심각한 난독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럴까? 서 교수는 독일어원서 제4/4권 65쪽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다. 거기엔 정말 예수님이 "자기 죄를 고백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충 했는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죄를 잘 고백했다"는 따위 말은 없다. 이건 서 교수가 (악의적으로가 아니라면) 엉터리로 왜곡한 해석이고, 바르트의 논지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당신과 별개의 것으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바르트 자신의 말이다: "(그들의) 죄들을 저들의 것으로 돌리지 않으셨고 ... 그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저들의 죄들을 자기의 죄들이 되게 하셨고, 자기의 죄들로 고백하셨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는 소리인가? (참고로 한글판에서 이 대목은 92쪽에 나온다. 관심 있는 분들은 실제 전체문맥과 문장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직접 확인해 본 뒤 평가하기 바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독과 곡해가 과연 합동교단에서만 일어나고 있을까? 이런 식의 오독과 곡해를 일삼는 사람들에 의해 국내 굴지의 교단(들)이 칼 바르트의 신학유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하며, 애석하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2011. 3. 29. 00:41

최근 한기총 해체론에 대한 단상

1. 요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어수선하다. 이광선 전총회장이 물러나면서 금권선거사실을 '양심고백'했고, 길자연 현총회장에게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처분을 받아내 압력을 가하고 있다. 세간의 눈은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길자연 목사에게는 따갑다.

2. 글쎄. 양심고백이라. 과연 그럴까? 
이광선 목사는 마치 길자연 목사가 금권선거의 원흉인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교계의 금권선거는 어제 오늘의 관행이 아니다. 몇십만 원을 받은 아무개 목사가 소위 양심선언을 했다는데, 이게 어디 그렇게 새로운 일이었던가. 이건 일을 터뜨리기 위해 새삼 터뜨리는 전략적 행동이 아닌가. 결국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특정인에게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게 뻔히 보이는 석연치 않은 모양새다. 이런 경우 죄를 짐짓 뒤집어 씌우려고 일을 꾸미는 당사자 역시 뭔가 구린 구석이 있지 않나 의심해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배후 알력관계가 짐작되긴 한다. 짐작이 맞다면 이건 소위 양심선언을 들먹일 성질의 것이라기보다 추하고 부끄러운 교계의 진흙탕 싸움이 사태의 본질이다. 거기에 세간의 여론까지 끌어들인 셈이고.

3. 작은 공동체든 교회기구 차원에서든 결국 이런 진흙탕 싸움은 제딴에는 공평과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내 편은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자들이고 네 편은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는 사탄의 졸개라는 흑백논리가 난무하게 된다. 각자 제딴에는 성전을 치르는 십자군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십자군 전쟁'의 미몽을 헤매게 된다. 제딴에는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하나님은 이들의 승패에 하등 상관이 없으시지 않을까.

4. 이들의 진흙탕싸움 자체엔 탄식과 한숨 외엔 별 감흥이 없다. 다만 무겁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는 분들이 저러고 나서 뒷수습은 고스란히 한국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특히 사이비이단문제에 관해 이광선 총회장 재임기간에 벌어진 혼란상이 염려된다. 길자연 목사는 직전 사이비이단대책위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대책위를 새로 꾸리기로 했었다. 혼란한 한국교회의 사이비이단문제 대처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조처였다. 최근 길자연 총회장의 직무정지처분은 이와 같은 범교회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 손봉호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한기총 해체를 주장하시는 것 같다. 진보진영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금권선거시비가 없는 것과 달리 보수진영은 박형룡 목사 이래로 돈문제로 끊임없이 시비가 붙고 있으니 부끄러워들 하실 법도 하다. 원래 한경직 목사 등이 한기총 설립을 추진했을 때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어엿한 한국개신교회의 공교회적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공교회성을 보장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아울러, 적어도 초창기의 한기총은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등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기독교정신을 구현하여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나아가 남북화해에 물꼬를 트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제기되는 한기총해체론은 주된 배경과 근거가 된 금권선거문제가 공교회성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반동적 권력기관 노릇을 극우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으며, 한기총 설립정신을 거슬러 일개 이익기관으로 전락해 있다. 현재 한기총의 정체성과 관행 자체가 원래 시작되었을 때의 정신과 전망을 거스르고 있는 서글픈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드러내준다.
사회여론?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에 대해 쌓인 것들이 많으시다. 특히 현 정권 들어서 장로대통령이 뽑혔답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기라도 한 줄로 믿으시는 분들의 혁혁한 공로 덕분에 사회여론은 분명 교회권력을 엎어버릴 틈을 노리고들 있다. 이러던 차에 한기총 해체 얘기가 교계 내부에서 나오니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6. 앞서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교회가 쇠락을 맞이하는 가장 심각한 원인은 칼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비복음적 보수주의"에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의 쇠퇴를 일으켰다고들 하면서 마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태연자약하다면 정말 크게 착각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울어가는 현상은 소위 보수적 신앙인들의 비복음적 행태에서 99%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광선 목사의 '양심선언'과 한기총 (그리고 각 교단)의 금권선거문제는 비복음적 보수성의 진부한 표현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기총 해체? 답답한 분들 심정에 공감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비복음적 보수성이라는 한국교회의 정신적 토대의 문제다. 어차피 한국교회는 공교회로서 조직을 이루어가려고 하게 될텐데, 정신성이 잘못 뿌리내려 있는 한 문제는 늘상 터질 수밖에 없다. 저 찬송가공회의 착잡한 난맥상은 그 '공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과 영향력과 성공과 인기와, 그리고 반공주의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 한 이 위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1)(*2) 교회의 존재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이다. 한기총해체론은 한국교회에 닥친 심각한 위기, 참된 토대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가 여부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7. 교회는 실수할 수 있다. 한국교회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계시의 정신이 주어져 있는 한, "고백자 베드로"(바르트, 쿨만, 래드) 위에 교회는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마태복음16:13-20)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한국교회의 현재 위기로부터 새롭게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기다린다. 한국교회가 아집과 욕심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뉘우쳐 돌이키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덧붙임] 
(*1) 글을 쓰고 나서 한기총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에 지난 2010년 4월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내놓은 탁월한 분석에 대한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지방 기자는 한기총의 설립과 성장 배경 가운데 반공주의와 교회의 대형화라는 요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렵다고 진단한다. (→발제문전문)
다만 당시 교계원로들의 한기총 설립정신을 반공주의로 뭉뚱그리기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본 블로그에서도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비판적인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기총이) 반공주의라는 정신성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대목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가능성으로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결과적으로는 보수진영만의 연합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아쉬우나마 한국교회에 공교회성을 표현하는 그릇이 되어주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이비이단문제 역시 각 교단들의 단죄가 공교회성을 담보하는 틀을 제공했다는 데서 한기총의 긍정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문제는 이 긍정적인 역할마저 높으신 분들의 진흙탕 싸움으로 말미암아 흐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2) 한국보수주의교회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본격적인 분석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망라하는 국내 중진신학자들에 의해 3년 공동프로젝트로 이뤄질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김진호, 강인철, 구미정님등 눈에 익은 학자들의 이름이 보여 신뢰감과 기대감을 더한다. 다만, 문제는 대형교단들 스스로 자기성찰을 해서 나온 결과라기 보다는 주로 기장, 성공회와 같은 진보성향의 중소교단에 의한 분석이라는 점이다. 이런 분석이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같은 곳에서 나와줘야 할텐데, 서슬퍼런 교권 앞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을테니 아쉽고 안타까울 다름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들인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을 뒤엎은 것과 같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이 교계의 주류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2011. 3. 12. 13:42

서구교회의 쇠퇴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부흥

근본주의 교회는 흔히 숫적 부흥을 자랑하곤 한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대외적으로 '좋은 열매'라고 내세우는 가장 자신만만한 미덕이다. 물론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는 자부심도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좋은 열매'일 것이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다.

과연 이런 것들이 좋은 열매일까? 

1. 굳이 머릿수를 논하고 싶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목회한 삼위일체 교회에도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신자들이 돌아와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해두고 싶다. 그들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라는 식의 변명을 하려면 근본주의자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꿩잡는 게 매'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실천강령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가? (슐라이어마허라는 기독교사상사의 거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경심은 젖혀 놓고서라도 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논점이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성경에서 열매에 관한 말씀이 과연 숫적 팽창을 가리킨 경우가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예수님도 바울도 '열매'는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말씀하셨지 머릿수가 몇인가를 두고 '좋은 열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게 마련"(누가복음 17:37)이라고 하셨다.

근본주의자들이 숫적 '부흥'에 관해 스스로 확신하고 퍼뜨리는 대표적인 어젠다가 바로 자유주의 교회는 숫적으로 쇠퇴한다는 얘기다. 서구교회가 쇠퇴한 원인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서구교회의 쇠퇴는 근본주의 내지 근본주의를 방불하는 분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라는 작고 강력한 나라를 일으킨 정신적 토대 노릇을 한 영광스러운 교회였다. 20세기초만 해도 개신교회의 교세는 가톨릭을 압도했고, 50-70년대까지만 해도 우세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가 가톨릭의 절반에 못 미친다. 왜 그럴까? 네덜란드 교회가 자유주의에 물들어서? 베르까우어 같은 지도적 신학자가 사악한 '자유주의의 괴수' 칼 바르트를 추종하는 바르티안이어서? 천만에! 네덜란드가톨릭도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어 있지만 교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신학 자체가 교세감소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개신교의 쇠퇴는 오히려 개혁교회가 '보수적 신앙' 때문에 이전투구하고 분열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내 교단이 낫니 네 교단이 낫니 도토리키재기를 하지만, 결국 그 피해는 모두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그 이전투구와 교회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주로 '보수적으로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다.

[표 설명] 첫번째 짙은 파란색은 무종교, 연두색은 카톨릭, 빨간색은 개혁교회, 노란색은 개혁교단, 보라색은 화란개신교단, 옅은 파란색은 기타 종교를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직후인 1970년대 초에 교세가 약간 늘어났다가 90년대에는 다시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집필된 네덜란드주교회의 새교리서(1966)를 교황청이 검열한 '화란교리서사건' 이후 진행된 교회의 보수화, 경직화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 영국교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공회든 개혁교회든 할 것 없이 오늘날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본산이었던 영광스러운 영국교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존 로빈슨 주교가 '신에게 솔직히'를 외쳐서? 존 힉 목사가 신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퍼뜨려서? 소위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천만에! 비록 세속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영국교회가 쇠퇴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60년대 이전만 해도 영국교회는 아직 건재했다. 영국교회의 몰락은 다름아닌 복음주의 진영의 자중지란에서 촉발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거룩한 분리주의를 주창하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떨어져나간 바람에 복음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었다. 당장은 분리주의자들이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복음의 텃밭으로서의 한 사회 속에서 복음의 신뢰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만든다.

- 미국교회? 오늘날 미국교회 역시 서서히 영국교회 짝 나고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교회건물이 술집이 되고 모슬렘사원이 되는 현상이 미국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왜 미국교회가 저 지경이 되고 있을까? 자유주의의 누룩 때문에? 그 별로 미덥지도 못한 축자영감설과 창조과학과 베리칩 이론을 신봉하지 않아서? 혹은 사악한 프리메이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명하고 신실한 목사 수가 부족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선명성 경쟁에 뛰어드는 데 열심이 부족해서? '한줌도 안 되는' 자유주의자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회중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미국교회가 기울고 있지 않은가?

- 결국 서구교회 쇠퇴의 가장 깊은 뿌리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지엽말단의 명분싸움으로 갈갈이 찢어졌던 데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회의주의가 서구사회를 휩쓸게 된 배경이 바로 교파분열이었다는 교회사가 후스토 곤잘레스의 지적이 합당하지 않은가. 서구세계가 세속주의, 회의주의에 먹힌 까닭은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시점은 근본주의의 한 형태인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이 터졌던 90년대초였다. 종교다원주의든, 칼 바르트든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사회의 혐오감을 자라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최근 몇 년간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절에 땅밟기를 하고, 불 지르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장로대통령을 세우겠다면서 기득권자들을 감싸고 도는 희한한 시민운동을 하고, 대통령을 무릎꿀리고, 자기 이익관계에 반하는 사안에 대해선 불 일듯 일어나 총궐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신실하고 영웅적인 신앙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고 있을까? 왜 사회적 지탄에 날마다 치명상을 입고 있을까? "이게 다 자유주의 때문"인가? 도대체 이번엔 애꿎은 누굴 희생양으로 지목하려는가? 자유주의 핑계 대기 어려우면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15:17-19, 요한일서3:13)는 성경말씀을 갖다 붙여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만드는 둔갑신공을 발휘하는 이들이 꼭 있다. 언제부터 둔갑신공의 마술적 신앙과 순교자 콤플렉스가 참 신앙이 되었단 말인가?

최근 한겨레21에 "대통령보다 세고 헌법보다 무서운 목사님"이라는 기사가 떴다. 세상 언론에서조차 주목할 만큼 근본주의 진영의 드라이브는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이 기사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전성시대를 맞이했는데 거꾸로 한국교회는 역풍을 맞아 기울게 되리라는 것이 요지다.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한국교회는 기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염치를 불안과 증오의 음모론과 맞바꾼 근본주의 드라이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2. 주님과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은 "두려움을 내어쫓는 사랑"(요한일서4:18)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계시된 용서와 화해의 복음, 공평과 정의의 복음이다. 보혈의 은혜를 믿는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얘기다. 칭의의 복음을 믿는다면서 기득권자들을 싸고 도는 부조리와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끊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연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도적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지금껏 살면서 근본주의자들이 복음의 정신인 조건없는 화해와 포용(Miroslav Volf)을 부르짖는 것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의 근본주의자들, 특히 소위 반공목사들은 상대방이 무릎꿇고 빌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극히 세속적인 원리를 성경과 참신앙의 이름으로 둔갑시킨다. (석기현 목사의 "빨갱이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설교를 들어보라!) 이러면서도 자기 아들을 살해한 공산군을 자기 양아들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신앙의 위인으로 떠받드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지 않은가? 

오히려 근본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신봉하는 '복음'은 베리칩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성경과 상관없는 밑도 끝도 없는 희생양신화들이 아닌가? 다른 글들에서 지적했다시피, 이런 근본주의의 희생양신화들이 거짓말에 기초해 있다. 한갖 거짓말로 불안과 증오를 끝없이 부추겨 영향력을 얻는 근본주의의 기본행태가 과연 성경적이고 복음적일까? 그런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낚였다는 사실이 과연 좋은 열매라는 자랑거리일 수 있을까?

이런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에서 공감을 얻고 세력을 얻는 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암적인 존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한국교회의 사도성과 공교회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1)

[덧붙임]
*1: 최덕성은 2013년 6월 24일 부산 브니엘 신학교에서 열린 WCC 찬반토론회에서 이 글에서 지적한 근본주의의 주장을 또다시 그대로 되풀이했다. 재차 강조해두거니와, 바로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태도 때문에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


2011. 3. 2. 04:43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

양화진에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묻혀 있다.


이들이 증거라고 제시한 사진들에는 이들이 선교사나 목사나 그들의 가족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기록조차 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은 양화진에 묻혀 있으면 다 개신교선교사와 그 가족들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은데, 100주년 기념교회가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양화진문화원에 따르면 양화진에는 현재 417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선교사와 그 가족은 145명이다. 양화진 묘역에서 프리메이슨 마크 사진을 찍었다고 곧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 프리메이슨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다.

양화진문화원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145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다가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고마운 분들이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싶다면 최소한 145명의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 명단을 확인해서 그중 몇 명이나 '프리메이슨'인지 확인해 보는 게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염치가 아닐까?

2011. 3. 1. 04:06

베리칩발명자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했다고?

인터넷에서 베리칩을 발명한 칼 샌더스(Carl W Sanders) 박사가 회개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와 베리칩이 666표라고 '폭로'했다는 얘기를 국내외 인터넷에서 종종 읽을 수 있다. 동영상도 대대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인상적인 얘기이긴 한데, 이런 유의 음모론에서 늘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다. 


칼 샌더스 박사가 베리칩이 666표라고 '폭로'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관계의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1. 칼 샌더스는 베리칩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박사다.
2. 칼 샌더스 박사는 베리칩을 발명했다.
3. 칼 샌더스 박사는 베리칩 발명을 뉘우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왔다.


이에 따르면, 
1. 칼 샌더스는 베리칩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박사였던 적이 없다.
2. 칼 샌더스는 베리칩을 발명한 적이 없다.
3. 칼 샌더스는 베리칩 발명을 뉘우치고 (근본주의) 기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럼 칼 샌더스는 도대체 누군가? 이런저런 얘기를 소거하고 남는 사항은 그가 근본주의의 베리칩 음모론을 추종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관계 하나 뿐이다.

칼 샌더스에 대해 굳이 더 길게 풀어써야 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존 토렐 목사의 '폭로'가 진실인지 궁금하다면 위의 링크를 열어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존 토렐 목사의 증언은 과연 신빙성 있을까? 샌더스를 음해하기 위해 급조된 인물인 것은 아닐까? 
- 우선 미국 아마존에서 그가 70-80년대에 펴냈던 근본주의 계통의 책들이 검색되기 때문에, 적어도 70-80년대에 책을 펴낼 정도 연령(아마도 당시 30~50대)의 목회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존 토렐 목사가 운영하는 선교웹사이트 European American Evangelistic Crusades에 올려진 그의 사진으로 봐도 나이 지긋한 목사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 그의 선교웹사이트에는 천사와 악마, 세대주의적 도식의 종말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세대주의 성향의 아티클이 다수 올려져 있다.
따라서, 존 토렐 목사가 급조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말뿐 아니라 인적 사항도 종잡을 수 없는샌더스와 달리 토렐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충분히 신빙성 있다고 생각된다.

존 토렐 목사는 이미 1994년에 칼 샌더스가 거짓말장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런데 20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이 거짓말에 낚이고 있는 셈이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귀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여! 거짓말과 부풀려진 헛소문을 덮어놓고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부디 여기서 돌이켜 오직 믿음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시기 바란다.

2011. 2. 19. 16:00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3)

5. 근본주의는 왜 음모론에 열광하는가?

알다시피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세속의 물결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으로 생겨난 사조다. 자신들이 근본으로 지목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 외의 거의 모든 대상은 잠재적으로 이미 세속에 물든 '순수한 신앙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심지어 근본주의자들 자신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근본'이냐에 대해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영문흠정역성경이 권위의 원천이냐 자신들의 흠정역성경번역이 권위의 원천이냐 라는 식의 논쟁과 같이, 근본주의 바깥에서 볼 땐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견해차이 때문에 서로를 '참신앙의 적'으로 돌려 버린다.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자신들이 나름대로 설정한 한계 바깥을 적으로 돌리고, 따라서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으로 바라본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니 억측이 무성하고, 적대감과 분노와 불신의 이유는 차곡차곡 쌓이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근본주의는 감정배설의 통로를 신앙의 근본진리라는 명분으로, 의분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Erich Fromm) 정당화하게 된다. 자기가 그어놓은 한계 바깥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과 신학이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마음과 눈과 귀를 닫아 버린 채 터무니없이 희화화해 버린다.

그와 같은 희화화가 사리에 맞는 것일 수 없다. 논리의 비약과 일방적이고 성급한 단정이 난무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조차 예리한 영분별을 빙자하여 무시된다. 상대방을 대화와 이해의 대상으로 품고 서로 배우기 보다 터무니없이 희화화하는 거기에는 상대방의 의도나 지향점에 대한 정확하고도 진정성 있는 파악이 고스란히 빠져 있다. 적으로 돌린 상대방은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되고, 신비화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음모론은 근본주의가 안착하기 쉬운 편리하고 매력적인 함정이 된다. 초창기에는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이젠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상대방을 사탄의 졸개로 악마화해야 하는데 근본주의가 자유주의라고 매도하는 종류의 신학은 심지어 자신들의 자매인 복음주의 계통 신학에서조차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추세여서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임팩트가 적다. 이에 비해 자기 적을 사탄의 졸개로 못 박는데 프리메이슨과 같은 딱지만큼 손쉬운 게 또 없다. 거슬리는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의혹을 계속 제기하다가 의혹이 짙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몰아 타도의 대상으로 세우면 증오와 분노를 터뜨릴 공동의 통로가 만들어진 덕분에 결집하고 유지할 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희생양만들기와 무슨 차이점이 있단 말인가? 바로 얼마전 타블로음모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음모론에 열광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더이상 사랑, 화해, 용서, 공의, 관용과 같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율법과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토록 강조했던 기독교 실천의 가장 중요한 덕목들에 대해 양심에 일말의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런 덕목들은 어차피 프리메이슨들이 온 세상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뻔뻔스러운 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에서 역사의 지평은 7년 대환란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휴거 따위로 대체된지 오래다. 어차피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모든 역사과정이 깔끔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근본주의자들은 프리메이슨을 쓰러뜨리자고 공격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굉장하고 대단한 단체라고 정말 믿는다면 한줌밖에 안 되는 근본주의자들로선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공격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불안과 적대감을 증폭시켜 근본주의 시스템에 더욱 매달리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면 족할 뿐이다.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이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이 언뜻 성경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요한복음 20:29, 로마서 8:24-25 등)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행동을 인간의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감각과 제한된 사고범위에 의지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씀이지, 자의적으로 꾸며낸 음모론을 믿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니 빨갱이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딱지를 붙여가며 혐오해마지 않을 헤겔이나 맑스나 블로흐, 마르쿠제 같은 신맑스주의자들이 현상 자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실증주의적 인식방법을 불신하고 존재에서 무를, 아직 없는 것에서 참 존재를 보고자 했던 사고방식이 오히려 성경에 그나마 가깝다. 이런 격조높은 철학을 근본주의 음모론에 견주는 것이 도리어 철학에 대한 큰 실례와 굴욕이 될 지경이다.

현상의 인식에 있어서 눈앞에 드러나는 겉보기 배후에 진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들처럼 피상적인 겉보기에 속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승리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실패하거나 패배한 모든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가 정의나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방법으로 승승장구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일을 어둠 속에 숨기기 위해 행하는 온갖 더럽고 비뚤어진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겉보기 현상이나 소식에 대한 합리적이고 엄밀한 의심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해야 할 믿음의 책무가 있다. 이 믿음의 책무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자기만족이어선 안 되고, 반드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나가야 한다. 몰트만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각자가 속한 역사의 지평에서 부르시고, 다시금 역사의 지평으로 보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의 지평은 어떤 상황인가? 질병과 고통, 죄악과 부조리를 겪는 개인사의 지평이 있고, 세대와 지역과 계층과 남북으로 갈라져서 신음하는 한반도의 역사라는 지평도 있다. 세계자본과 세계권력이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물화하고 비역사화하는 자본주의의 악마적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세계사적 지평도 있다. 교회사적으로는 제3세계에서 폭발적으로 기독교가 성장하는 한편 그동안 세계교회의 대들보 노릇을 해왔던 서구교회가 무너지고 있고, 한국교회도 구태의연한 이전 패러다임의 되풀이와 악순환 속에서 심지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심각한 영적 위기 내지 전환기에 봉착해 있다. 

이 모든 문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짐이요,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해결할 열쇠는 프리메이슨 음모론과 같은 유의 음모론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기보다는 역사의 지평과 공적 영역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 채 '바깥에 사자가 있다'면서 분노하고 불평하는 영적 게으름과 무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가 짊어진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열쇠는 오로지 세상 죄짐을 담당하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사의 지평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무거운 죄악의 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십자가를 지고 구체적인 삶을 던지고, 목숨을 다해서 그분을 뒤따르는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믿는 참된 길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의 지평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 속에 종말론적 희망의 약속이 있다.
2011. 2. 18. 01:35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2)

3. 릭 워렌

빌리 그래함의 뒤를 이어 아마도 미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서 위상을 지니게 될 차세대 복음주의 지도자 릭 워렌 목사에 대해 근본주의자들이 관심을 갖는 대목은 그가 불치의 질병을 무릅쓰고서도 탁월한 설교자로서 우뚝 섰다는 점이 아니다. "목적이 이끄는" 시리즈의 책 인세만 해도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였지만 10의 9조를 헌금하며,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과 달리 호화로운 생활을 거절하고, 교회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다지 흥미의 대상이 못 된다. 그들의 눈에는 릭 워렌의 탁월한 기독교적 실천조차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기 위해 사탄의 선지자가 벌이는 쇼일 따름이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릭 워렌은 또다른 최악의 프리메이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릭 워렌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근본주의자들이 공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다룬 빌리 그래함이나 한스 큉의 경우와 별 다름 없다. 자기들이 서로 제기한 의혹이 부풀려지고 굳어지면서 사실처럼 통하고, 거짓말도 자꾸 하다 보니 어느새 사실로 둔갑해버린 얘기들이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아무개와 가깝거나 만난 적이 있다, 관상기도를 퍼뜨린다, 따라서 친가톨릭적이다, 설교에 나타난 그의 교리가 맘에 안 든다, 프리메이슨(이라고 음모론자들이 굳게 믿는) 기관과 관련이 있다는 식이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데도 굳이 릭 워렌의 사례를 살펴 보려는 까닭은 복음주의 계통에서 릭 워렌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와 대표성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릭 워렌이 음모론자들이 프리메이슨 산하기관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CFR의 실제 회원(이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CFR이라고 하니까 무슨 비밀결사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미국외교관계평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미국의 유력한 민간국가전략연구소의 줄임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귀에도 익숙한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미국의 정책연구단체이다. 미국외교관계평의회는 브루킹스연구소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중도성향의 단체로서, 진보와 보수 정권 양쪽 내각의 인물 상당수가 이 단체와 연관을 맺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문 위키백과 해당항목에 따르면 릭 워렌 목사는 2005-06년 미국외교관계평의회의 선출회원이었다. UN이나 다보스포럼 등에서 연설을 하고, PEACE플랜을 통해 화해와 빈곤퇴치, 교육 등을 확산하고자 해 온 그의 사회참여적 행보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면, 미외교관계평의회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물론 이 단체가 미국정치외교계에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어림짐작이라면 세상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비밀결사단체사람이어야 하리라는 점에서 터무니없다.

이런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군가? 다름 아닌 미국극우정치조직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그 수장인 래리 맥도날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해당항목 기술에 따르면 그들이 제기한 의혹은 사실무근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와 더불어 1960년대 음모론자들의 영화나 책도 한몫한 게 틀림없다. 존 버치 소사이어티와 래리 맥도날드가 이들의 말에 낚였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극우단체가 이 주제를 하위문화 레벨이 아닌 정가라는 공적 영역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논의했다는 데 있다.) 우파세력이 미국의 기득권을 쥐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민간조직을 흠집내고자 반프리메이슨정서를 이용한 정치공세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관계가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음에도, 미국정가에서 음모론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뜬 음모론자들이 기꺼이 받아 적어 퍼뜨렸고, 그 중에 기독교근본주의자들도 열성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베리칩 음모론에 이어 다시 한번 미국의 극우세력과 근본주의자들이 손과 발과 입을 맞추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4.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워낙 많이 퍼져 있는데, 막상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했는가 살펴 보면 별로 나오는 게 없다. 하지만 역시 개신교 최대의 연합단체인만큼 세계교회협의회를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는 얘기는 이를테면 존 콜먼의 '300 Committe'라는 음모론 책에 나온다. 이 책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언급하는 해당단락(한글번역은 예컨대, →여기.)을 보면,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기술과 사실관계를 입증하기 보다 단정하고 강변하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걸 보고 믿으라는 건가? 세계교회협의회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모르는 사람만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만한 내용이라는 점만 말해 두겠다.

여기서 국내 유명목사님 아무개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고, 따라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식의 루머에 대해서도 간단히 덧붙여 둔다. (루머의 본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를 참조할 것.)

국내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인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국내에도 성공회, 감리교, 기독교장로회, 예장통합, 구세군, 복음교회, 순복음교단 등이 정교회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맹한 교단들이기 때문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프리메이슨 조직이라면 이 교단들도 프리메이슨 산하조직일까? 무슨 신통한 '영적 분별력' 따위를 들먹이기 전에 상식수준에서만이라도 이게 정말 그런 건지 헤아려 보라. 실로 밑도 끝도 없는 중상모략 아닌가?

게다가, 국내 유명 목사님들은 바쁜 목회활동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여력이 없으실 것이다. 하물며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단체로 규정하고 가맹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예장합동 소속이신 길자연 목사 같은 분이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할 까닭은 전혀 없다. 국내 유명 목사님들도 프리메이슨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중이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장본인들이 이 정도로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았다!

국내외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은 이쯤하면 왠만큼 드러난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근본주의가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까닭을 짚어 본다.

(계속)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
2011. 1. 31. 07:37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 올바른 길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교단에서 이재철 목사와 같이 이 시대에 드문 올바른 설교자를 사도신경의 그리스도 지옥강하조항에 대한 강해에서 본질과 상관없는 말꼬투리잡기로 이단시비를 걸고 목사면직까지 강행한 사례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재철 목사가 목회하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신자를 잃은 주변교회들과 양화진에 이익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인들이 담합과 공모를 했으리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가장 큰 기관인 한기총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미 개별교단들이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를 근거로 이단으로 단죄한 큰믿음교회 같은 문제단체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렸다는 것도 착잡한 희비극이다. 신임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이전 위원회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단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관상기도가 이단시비에 올라 있는 현실은 이런 사이비이단문제의 난맥상과 맞물려 있다. 관상기도가 일부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혼합주의 쯤으로 알려져 있으니 참 딱한 현실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상기도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을 성전이라도 치르듯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와 신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라고 봐도 큰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호전성이 영들을 분별한다는 그럴싸한 미명으로 포장되고 장려되기까지 하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복음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성경을 들먹인다고 해서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써야 한다면서 성경과 사도를 들먹이는 사이비집단이 있다. 공교회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가 성경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 = 토요일'을 지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일 =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공교회를 공격하는 태도가 성경적일 수도 없다. 

왜인가? 성경에 담긴 복음의 정신은 놓친 채 성경만 들먹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주의적 인용으로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며 의기양양하게 단죄할 수 있을까? 자전거가 성경에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며 득의만면하게 저주를 퍼붓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둔다.

둘째, 순전한 믿음은 소위 순혈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때 이방인과의 통혼을 비판하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했다. 그러나 성경을 면면히 흐르는 구원사의 큰 흐름은 이방인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이었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없었을 것이요, 아직도 정결례를 삼가 지켜야 했을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도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했다.

순혈주의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서 순혈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참사도로 여겨졌던가? 오히려 순혈주의를 고집할수록 그들은 구원사의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관상기도에서 본질과 알맹이가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순수한 믿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전한 믿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극단적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가까운가? 

관상기도가 '이방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평은 설득력 없는 순혈주의에 불과하다.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일체에 소위 종교혼합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성경의 역사적 과정 자체가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는 비평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관상기도가 그리스도중심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로부터 가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한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세계신학계의 보편적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이들에게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오늘의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의 거장들이 영성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거짓교사일터이므로!

그렇다면 영국의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책 Christian Spirituality를 보면 소위 영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향점을 갖는 여러 가지 신앙유형과 신학적 입장들이 아우러져 있다. 그 가운데는 관상기도가 예사로 등장함은 물론, 소위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편협한 근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거짓선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빌랴의 테레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요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토마스 머튼, C S 루이스, 칼 바르트, 본회퍼 등이 다양한 영성의 모습으로서 토의된다. 

자, 맥그라스는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텐가? 아니면 맥그라스 역시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배교한 거짓교사라고 할텐가?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존 파이퍼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관상과 명상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실재라고 긍정한다. 영성의 단계를 나누어 존재의 상승과 고양을 얘기하는 가톨릭신학의 '나쁜' 관상과 명상에 대해선 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긋지만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가 추천하고 격려하는 차세대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이머징교회 운동(*1)과 관상기도에 참여해 온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든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존 파이퍼나 드리스콜 목사 역시 이들의 눈에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아니고 배교한 거짓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할 교회의 교사가 몇이나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들에게 교회의 교사가 과연 필요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성령의 감동 덕분에 '오직 성경으로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관상기도에 대한 세계공교회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2)

[덧붙임]
"Emerging Church"는 '이머징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번역이다. 그렇다고 '신흥교회'라고 옮기자니 신흥종교가 연상되어 어감이 적절치 못하고, '(새로) 뜨는 교회'라는 식의 표현도 '요새 뜨는 교회'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할 것을 고민해야 할 낱말이다.
*2. 구글링을 잠시만 해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그들 스스로의 (소위 '영적인') 통찰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빌어온 얘기라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주장을 어디선가 빌어오거나 따오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그렇게 했느냐이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국근본주의의 복사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두고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2011. 1. 25. 12:53

신앙의 항체

우리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과 순결한 교리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다. 이 명분이 오늘날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특별히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순수한 복음 혹은 순결한 교리라는 명분 하에 교파교단간의 대화와 연합이나 종교간 대화를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교파교단간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서로 입장이 다른 교파, 교단, 신학학파간 대화와 교류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이 주제는 이미 공교회에 관한 글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교파교단간 대화는 종교개혁 이후 줄곧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환기해 두고 싶다. 이미 칼뱅과 멜랑히톤, 크랜머 주교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 각 교파의 대표자들은 당대의 교회일치적 대화와 교류를 추진한 바 있다. 슐라이어마허, 칼 바르트와 같은 한 세기를 대표하는 유럽의 신학자들 역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유럽개신교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를 아우르는 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범교회적 대화 노력을 계승한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운동이다.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와의 대화는 순수복음의 배신인가?

더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두어야겠다. 

과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하지만 과연 시대사조나 종교간 대화 일체는 저주받아 마땅한 종교혼합주의일까?

오히려 성경 자체가 종교간 대화와 통섭의 역사를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 창세기1장은 고대근동의 우주론인 신통기(신들의 탄생 연대기)를 탈신화하하여 아우른 결과였다. 
-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왕정을 비롯한 이방문화를 흡수했다.
- 잠언은 고대근동의 지혜문학을 하나님 신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말씀이다.
-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문학사상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받았다.
-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공박하는 동시에 영지주의의 상징과 이미지를 흡수하여 신앙을 설명한다.

하나하나 예를 들자면 무한정 길어질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상호작용을 거친 하이브리드였다.(*1) 신앙의 선조들은 이웃종교와 문화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흡수했다. 

이 상황은 히브리낱말 '바알(בעל)'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바알이라는 낱말 자체는 가나안신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문맥에 따라 남편, 주인, 주민, 지배자, 지배하다, 결혼하다 따위의 여러 가지 뜻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용례들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순수주의에 매달렸다면 이런 일상적인 용례 자체가 없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신앙의 중심에 야웨 하나님의 구원행동 대신 풍요와 번영이 들어설 때 바알신앙이라는 혼합주의로 퇴행하는 위기가 일어났다. 혼합주의란 신앙이라는 원에서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이지 하이브리드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바리새주의가 보여주듯이 소위 순혈주의도 중심이 흔들리거나 사라진다면 똑같이 문제다. 

오늘날 '하이브리드'라면 배교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치를 떠는 이들이 있다. 불교나 유교에서 비롯된 말을 쓰면 안 되고, 신비종교에서 비롯된 기도방법으로 기도하면 안 되고, 아무개 목사나 아무개 신학자는 시대사조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사이비이단이고 거짓선생이란다. 자전거를 타면 안 되고 안경을 쓰면 안 되고 수혈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기만 완고하고 옹졸하면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그 독소를 한국교회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니 문제다.

다원사회 속에서 시대사조나 이웃종교의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미 어떻게 차단하고 배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이미 흡수하고 있다. 이미 불식간에 수많은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을 흡수하고서 '오직 성경만으로' 자기 신앙을 쌓아올린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정신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오히려 이미 그것조차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혹은 기도의 응답과 꿈과 환상과 영음을 통해 자기 신앙이 '순수하다'라고 입증되기라도 한 걸까?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부터가 하이브리드인 것은 아닌가?

건강하다는 것은 병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항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시대사조와 이웃종교의 영향에 대해 결벽증을 갖는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올바르게 가늠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믿음의 중심이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의 믿음을 잘 벼릴 때 신앙의 건강과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덧붙임]
*1. 하나님은 그런 '하이브리드'에 담긴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려주신다.(마태복음 16:13-20) 이것이 바로 성경의 역동적 영감성이다. 최근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 예컨대, 밴후저 같은 이들은 -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이 있다. 신적 측면은 성경이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요, 인간적 측면은 성경이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배경 속에서 기록된 제한적 인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가현설에 빠지게 되듯이, 성경의 인간적 측면을 도외시할 때 성경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가현설이 실질적으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가현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믿지 않는다.
2011. 1. 4. 06:27

오직 성경으로만

루터와 칼뱅은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원칙을 통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에 뿌리박은 개신교회의 기틀을 놓았다. 개혁자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은 공의회나 교황, 신학전통 따위의 진리값을 가늠하는 잣대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여하한 영적 현상, 영적 인물 따위라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도적 복음의 권위 아래 있다.
-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명확한 부분으로부터 모호한 부분을 해석한다.

이런 개혁자들의 요구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교회의 토양에서 상당부분 오해되고 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 일체를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경읽기가 곧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실상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교단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 라는 식의 말은 공교회성을 부정하는 사이비이단집단들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강변이다. 아울러 '그냥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해야 한다'는 뒷얘기는 자기 교주나 자기 집단, 자기 선입견에 대한 복종의 요구로 귀결되곤 한다.

그 누구의 성경읽기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누구의 이해력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릇된 전통과 선입견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칼뱅이 지적했다시피,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람을 제한하심으로써 겸손하게 하시고, 더불어 사귐으로써 더욱 충만한 하나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적 토론영역에서 함께 겸허하게 지혜를 모아가는 사귐의 장이 바로 신학이다. 신학이 곧 참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성찰과 검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참다움에 가깝게 된다. 신학이 추구하는 참다움은 일개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성경읽기에 견줄 수 없는 보편적 권위를 지닌다. 전통이 성경본문과 성경의 정신이 지지하는 참된 전통이라면 거기엔 보편적 권위가 있다.(*1)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참다움조차 언제나 성경의 권위로써 재어지는 규범(norma normata)이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둘째,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도록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낚이는 대목이 바로 영적인 '현상'이나 그런 현상의 매개자라고 주장하는 영적 인물의 인상적인 '말빨'이다. 그런 것에 낚일수록 신학은 사람들이 고안해낸 종교이고 죽은 교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 현상과 인물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증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신학이야말로 성령이 주관하시는 성도의 교통과 교제의 장이다. 아울러, 덜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의 은사(*2)도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비약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스스로를 거기에 매이도록 하신다. (요한복음16:7,13-14)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을 빌미로 그 누구도 성경을 비약할 수 없다. 

대개 이런 식으로 영적 현상과 인물을 따를수록 '신학이 곧 진리는 아니다'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 신학이 비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마당에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반증도 한갖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짓거리 쯤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한 다음 성령의 초자연적 현상을 운운하는 행태야말로 사이비이단집단이 잘 닦아놓은 멸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성경의 자기해석과정은 신학전통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로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혹시 일체의 신학전통 따위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거절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종교개혁의 성경원리는 명확한 부분에서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전체 이해로서 다시 명확한 부분을 조명하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얘기한다.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은 일개 개인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 항상 동료(들)과의 상호의존적 해석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해석에 접근해 간다. 모든 건전한 신학전통은 이 해석학적 순환과정에 동참한다. 

앞서 밝혔다시피, 성경해석은 누구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동체가 신학의 장을 통해 함께 읽고 나눔으로써 건전성을 이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에는 전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처럼 성경과 전통에 동일한 권위를 돌리기를 거부한 것이었지, 전통 자체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의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대교부와 공의회, 중세신학에 정통한 당대일급의 신학자들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루터와 칼뱅에게 '오직 성경으로만'은 성경의 우위성(prima scriptura)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라는 원리를 밝힌 장본인들이 전통에 정통했다. 어떤 의미에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만을 외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으로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전통의 빛과 그림자를 잘 이해하고 스스로가 속한 전통을 객관화, 상대화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3)(*4)

[덧붙임]
*1. 이미 신약성경 안에도 존중받아야 할 전통의 전승과정이 나타나 있다.(고린도전서 11:23, 15:3-4, 데살로니가후서 2:15, 디모데전서 2:2, 베드로전서1:18-19 등.) 정경사적으로 보면 성경이 전통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전승(paradosis)이 성경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대로 교회가 성경을 만든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도베드로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든 게 아닌 것처럼(마태복음 16:13-20),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된 사도적 전승을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했을 뿐이다. '교회가 정경을 도입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의 규범이 되기를 포기했고, 전승이 진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Oscar Cullmann)
참된 사도적 전승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심점에서 통일성을 이루지만 각 성경기자의 삶의 자리와 신학사상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다.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는 사도신경의 공교회조항과 마찬가지로 전통의 다양성을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2. 아마도 최근 일어난 은사주의의 영향으로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를 '투시'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문맥상 합당치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의 문맥에 따르면 사도가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 믿음(8,9a절)을 주시고, 신유와 기적, 예언, 영분별, 방언, 통변(9b,10절)을 주신다고 했을 때, 덜 초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더불어 열거하여 은사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빗나간 시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식의 은사'(고린도전서 12:8)는 자연스럽게 교회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해명하는 데 사용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Calvin, Matthew Henry, Schlatter, Orr & Walther 등.) 아울러,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언을 앞일을 알아맞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교한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고린도전서 14:)
*3. 자신이 특별히 따르는 전통이나 입장이 없(고 오직 성경만 믿는)다고 믿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이미 우리의 성경읽기를 규정하곤 한다. 이를테면, '오직 믿음으로만'이야말로 성경의 정수라고 받아들일 때 이미 개신교전통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휴거와 7년 대환란을 기독교종말론의 내용이라고 믿을 때 이미 세대주의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전통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성경의 본래적 메시지로부터 비판하는 작업이다.
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2010. 12. 22. 11:07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님을 맞이하는 데 별 소용없는 것들부터 짚어보자.

- 베리칩과 유럽연합 (혹은 북미연합)의 최신정보나 적그리스도의 후보리스트를 꿰고 있어도 소용없다.
-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을 것이냐, 혹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재림이 7년 대환란 전에 있을 것이냐, 중간에 있을 것이냐, 후에 있을 것이냐도 상관없다.
- 그밖에 잡다한 종말론, 어떤 사람들이 보거나 들었다는 꿈과 환상, 혹은 말세론적 운명지도에 관한 모든 장광설은 이런 별 소용없는 것들에 뭉뚱그려 넣어도 된다. 


그렇다면,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배교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알아맞춘다면 호기심 가득한 종말의 퀴즈게임에서 몇 점 더 받아 휴거될 자격에 당첨될까?

예수님 말씀인 마태복음25장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4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세에 있을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과 난리에 대한 소문, 적그리스도의 출몰 따위로 휘둘릴 것을 예고하신다. 마태복음 25장은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고에 이어 종말에 관한 세 비유를 담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며, 달란트 비유는 '적은 일에 충성'할 것을 당부한다. '기름'이나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잘 보여준다.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약자를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신자의 삶에 그리스도를 미리 뵙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신자가 나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나날의 삶의 과정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빚어지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닥쳐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판의 시간표나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종말의 시금석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말씀을 전해준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취지로 말씀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무엇보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동터온 종말을 받아들여 변화된 삶을 살 때 미래의 종말에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옛사람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새사람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도 없다. 죄에 대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에 대해선 산 자가 되는 삶(로마서 6장)이 곧 부활을 예비하는 삶이다. 한 마디로, 오늘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심으면 된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선언했다.(고린도전서 15:31) 

부디 여러 가지 희한한 성경해석이나 신통해 보이는 꿈과 환상 같은 것에 낚이지 말기 바란다.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다. 오늘 주어진 당신과 나의 삶의 자리가 부활을 예비하는 자리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자리다.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도 없다.

무엇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무엇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가?

7년 대환란과 666표의 위협에서 도피하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몰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아무아무개의 종말과 전쟁에 관한 예언에 낚여서 들뜨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이런 주장이 비복음적이라는 비판을 종교의 영이 시켜서 하는 악한 사람들의 핍박이라면서 순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가?

정말 종말을 염려한다면 이런 데 관심을 두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게 바로 주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막상 십자가를 져야 할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예배 많이 참석하고, 아무리 찬양 많이 하고, 아무리 꿈과 환상과 예언을 좇는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을 줄줄 욀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아무 소용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장광설을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심지어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던 그날과 그때를 알아맞추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은 신자의 부활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신자의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상적 소망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채 종말의 최종완성만 희망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해야 한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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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5. 13:51

종말의 분별기준

세대주의의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이 교회회중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착잡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소동이나 베리칩=666표 루머의 확대재생산현상 모두 결국 시한부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것이다.

시한부종말론은 1. 시한부종말을 얘기하는 소위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뉴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 3. 장황한 세대주의식 성경인용을 통해 자기확신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성경 데살로니가후서의 관심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

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당대에도 임박한 시한부종말론과 '휴거'(*1)를 주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2절에 이들이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양태가 나타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하고 있듯이 1. 영음, 꿈, 환상 등의 영적 현상, 2. 여러 가지 소문, 3. 사도들의 말과 같은 것들로 시한부종말론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퍼뜨리는 시한부종말론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를 써야 했다.

3-4절은 종말을 식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르친다. 주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세계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도를 떠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참칭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개혁기에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을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중세교황권은 복음의 도리를 떠나 세속권력에 취해 무서운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고, 교황은 하나님을 대리한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여길 만 했다. 이렇게 당시로선 성경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음에도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도 로마가톨릭은 복음의 도리를 떠난 그리스도의 원수로서 세계종교통합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로마가톨릭의 향배는 분명 조심스럽게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배교와 악행이 횡횡하던 중세로마교회를 향해서조차 그 가운데 교회가 흔적으로나마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바 있는데(칼뱅, 기독교강요 4.2.11,12), 우리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현교황 베네딕토16세가 전임자인 요한바오로2세와는 달리 욕을 먹곤 하는 편이지만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별 근거가 없다. 본문 4절은 극단적인 종교다원주의라고 볼 수 있는데, 베네딕토16세는 가톨릭에서도 손꼽을 만한 종교다원주의의 공공연한 반대자다. 베네딕토16세 같은 타입의 가톨릭보수파가 상대적으로 이런 데 무관심한 진보파와 달리 개신교와 정교회에서 신자를 빼내 개종시키려고 애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계종교통합음모라니 터무니없다.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야말로 적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계종교통합운동이 아닐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에큐메니칼 문서들이야말로 세계교회가 복음의 도를 떠나는 배교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이런 루머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세대주의 종말론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런 루머를 퍼뜨리는 분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내놓는 공식문헌을 얼마나 확인해 보셨는지,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 보셨는지 묻고 싶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고 믿는 방식이 다르면 죄다 배교고 이단이라면 대체 배교 아닌 것이 무엇이고 이단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런 식의 분파주의야말로 이단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리스도께서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지 협소하고 완고한 교리주의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게다가, 멸망의 아들은 대체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혹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마부스'를 들먹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일개 점성술사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지만 일단 그들의 주장대로 '마부스'가 멸망의 아들이라고 해보자. 그가 과연 누굴까? 오바마 미국 대통령? 혹은 미국 국방부의 그 아무개? 혹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면서 퇴출이 예상된다는 유로화의 발권국 유럽연합의 별 권한도 없는 수장? '그들' 중 그 누구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4절의 예언에 들어맞지 않는다. 적어도 예언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양태가 현실로 드러나지 않은 현재로선 그렇다.

세상의 악의 향배에 대해서는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종말의 기준이 충족되기 전에 괜히 들뜰 필요가 없다. 그 이전에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미혹되지 않으면 된다. 저명하고 신령한 아무개가 재림과 말세의 징조를 말하는 영음을 얘기하거나, 신통하게 예언을 여러 차례 맞춘 아무개가 뭘 보거나 듣거나 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런저런 종말의 소문을 듣더라도,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경을 해석해 보니 재림과 휴거가 곧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하더라도 휩쓸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시한부종말론 대처법이다. 

[덧붙임]
(*1) 여기서 나는 '휴거'라는 말로 예수재림을 시한부종말론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예수님이 비밀히 신자들을 한 번 또는 두세 차례에 걸쳐 하늘로 데려가고 공중재림은 또다시 별도로 일어난다는 의미의 '휴거'는 존 다비 이후 세대주의자들이 발명해낸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관념이지, 초대교회의 신앙이 아니었다. 밀리오레의 지적대로, 이 관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아 이 땅의 고통을 품고 부조리에 거룩한 저항을 하기 보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게끔 그릇되게 이끈다. 예수재림을 진정 기다리는 삶은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2010. 12. 8. 01:51

베리칩에 관한 몇 가지 루머 짚어보기

베리칩에 관한 이런저런 루머가 인터넷에 하도 많이 퍼져 있어서 사실관계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루머는 오바마정부 들어 통과된 미국 의료보험개혁안에 미국민 전체가 36개월 이내에 베리칩을 삽입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바야흐로 짐승의 표 666을 받게 될 날이 머지 않았고, 예수재림이 가까웠다고 한다.

법령을 미국정부관련사이트에서 직접 찾아보면 이런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문제의 '1004쪽' 얘기는 이 글에 첨부한 파일에서는 1190쪽대가 되어 있다. '1004쪽'으로 나오는 버전은 내려받아 읽었던 파일이 손상되었는지 첨부하는데 약간 문제가 있어서 해당문서를 첨부하지 못했지만 일일이 견주어 문제의 법령 내용이 두 버전 사이에 한 글자 한 글자 동일한 것을 확인해 두었음을 밝혀둔다.

1. 법령에 나오는 '삽입할 수 있는 의료장치'는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법령에 나온 제2종 의료기구에 관한 기술에 나오는 implantable이라는 형용사가 베리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안에 삽입하는 의료기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2. 미국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법령이 36개월 이내에 발효된다는 얘기다.
문제의 '의료기구'는 미국의 일반시민 전체가 아니라 환자(patient)에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위 법령에 명시되어 있다. 당뇨병이나 심장병 같은 만성질환환자에게 적용될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법령이 말하는 '36개월'이라는 시한(1196:5f 등 여러 곳)은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아야 하는 시한'이 아니라 당연히 새 의료보험법령의 발효기한을 가리킨다.

3. 베리칩이 이번 법령에 새로 포함된 것도 아니다.
베리칩은 이미 미국식약청에 의료기구로 등록되어 있다. 2010년11월5일자 업데이트본에 따르면, 베리칩은 2003년 등록되어[date received] 2004년 승인[decision date]되었고, 제3종 (Classs III)로 분류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식이 베리칩음모론자들에게는 더욱더 두렵고도 설렐지도 모르겠지만.) 요는, 베리칩은 의료기구로 사용된지 좀 됐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베리칩이 의료기구면 짐승의 표가 되는지, 의료목적으로 베리칩을 맞는다면 곧 666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2004년부터 의료기구로 사용되고 있던 베리칩을 두고 왜 하필 지금 이 난리들일까?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이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오바마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열악한 미국의료보험제도를 손보겠다는 걸 공화당은 사회주의를 연상케 한다며 흑색선전을 펼쳐왔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미국경제를 수십 년에 걸쳐 망가뜨린 장본인인 미공화당이 경기침체로 오바마의 지지율이 떨어진 틈을 타 선거에서 압승한 뒤 경제를 빌미로 오바마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희한한 모양새가 펼쳐지고 있다. 위헌시비까지 거시는 중이시란다. 이에 미국근본주의자들은 미공화당에 호응하여 묵시문학적 파국의 색깔을 덧칠하고 있다. 오바마는 빨갱이일뿐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세계정부를 예비하는 어둠의 세례요한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오바마가 바로 적그리스도?

이들의 선전은 미국주의원들에게도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버지니아주의회는 중앙언론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리칩의 강제적 사용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현재 법안을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해 놓았다조지아주의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법안을 추진중이거나 이미 추진한 주의회가 더 있을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 조지아주 등에서 베리칩을 받도록 법제화했다는 식으로 국내인터넷에 소문이 퍼졌던 것과는 사실관계가 정반대다.) 이 모든 조처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을 압박하는 정치적 구실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이 역시 정부가 거짓말하고 있다든지, 자발적으로 받도록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할 거라는 등, 근본주의자들의 베리칩음모론을 결국 막지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판 색깔론이라고 하기조차 뭐한 진흙탕싸움인데 이걸 따라하는 한국사람이 대체 누군가? 앞의 링크를 유심히 보면 장죠셉 목사와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의 글을 열어볼 수 있다. 장죠셉 목사는 과거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했고,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 카페는 신사도운동 계통이다. 이들 모두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확산시킨 장본인들이다. 시한부적인 분위기가 이분들을 들뜨게 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