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 14:27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1. 고대와 중세까지 이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인 답변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고대교회 문헌이나 오리게네스를 필두로 한 (특히 동방) 교부들 다수의 답변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동방교회에서 먼저 주장했고, 동방의 신학적 영향력 아래 서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러한 답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그릇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악마적) 발명'이라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면서 이 주장의 외연을 자유주의로 좁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으리라는 주장을 "현대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대교회의 문헌증거들을 통해 쉽게 반박되는 단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사후 구원 기회에 한계가 없다는 희망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고대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방식처럼 단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무런 형벌 없이 구원 받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사후에 모든 사람은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에 힘입어 혹독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정화의 과정은 이미 현세에서 고통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현세(가 지옥 같을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되었다.


요컨대, 사후 구원 기회에 대한 고대교회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 은혜의 승리가 그 범위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달리 표현하면, 고대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지옥 세력의 일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승리하시어 굴복시키셨다. 지옥은 비어있다!


2.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희망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관념은 인정하나, 아무나 다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악인들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위협과 경고는 다 뭐란 말인가? 구원 받을 자는 은혜의 선택을 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옥이 비어 있다고? 천만에!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구원의 희망에 전거를 제공한다고 믿어졌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노아 안에서, 환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지옥이 비어 있으리라는 대중적 희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불신자들일지라도 - 그들 자신의 덕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확실한 인간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적어도 개혁교회 이외의 서방전통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온 내세관념이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고 죄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방교회에 퍼져 있던 또 다른 대중적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사후 어떤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purgatorium)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소위 정화의 가능성이 그레고리우스 1세를 거치면서 중세서방에서는 자명한 믿음의 대상인 연옥으로 굳어졌다. 중세 연옥설은 동방교회의 내세관과 어떻게 다른가?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 따르면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정화의 과정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예외없다. 여기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가 철저하게 미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지옥과 천국은 구분되나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화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연옥이라 일반적으로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세는 (농노에서 교황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적 변주를 거치면서 지옥-연옥-천국이라는 서로 구분되고 단절된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내세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는 지옥에는 악인이, 연옥에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보통사람이, 천국에는 선인이 들어가도록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러한 서방중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동방교회에서도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중세서방에서는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 지상교회 신자들의 행업의 공로를 통해 연옥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동방교회에 다르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과정은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동방교회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의 행업에서 나오는 대리적 보속이나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같은 서방의 중세적 관습은 낯설고 새롭다.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서는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가 내세의 모든 영혼들에게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에 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 내세론에서는 그리스도 지옥강하가 "천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운동"(토마스 아퀴나스)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점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았던 악인들에게는 지옥강하의 발생을 인지할 수 있을 뿐 구원의 효력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보속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들이 그 공로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되리라는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 더욱이 구체적으로 드라마화되기까지 한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은 중세말기에 이르러 거의 집단 히스테리 수준의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저 참담한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 남용의 광기는 이 집단 히스테리의 현세적 귀결이었다. 그 누가 두려운 연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라, 지옥만 만원인 게 아니다. 연옥도 만원이다!!


3.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광신적 연옥관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사람이 어딜 가냐고? 연옥밖에 없지 않겠냐고? 바로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약성경, 특히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 바울의 구원론을 못 알아들은 소치이다! 실로 '불쌍한 연옥영혼들'을 건질 산 자들의 잉여공로를 운운하는 연옥은 그리스도의 대속효과를 폐기하는 무서운 사탄의 발명품이다! 불쌍한 현세의 영혼들아, 연옥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중세 연옥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저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인 발언을 부정하면 안 될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서방신학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관심 두기 보다 현세의 삶을 하나님께 자리매김하도록 권면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취지와 다르게 중세 연옥론은 현세의 삶을 단지 연옥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중간과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 표상을 내세에 대한 무익한 공상으로서 거절하고 현세에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독려했던 것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내세에 관한 사고방향은 비교적 온건한 루터파와 보다 철저한 개혁파의 그것으로 나뉘었다. 루터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멜란히톤은 루터와 일정부분 교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 때 가장 뛰어난 이교도들을 구원하셨으리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생각은 이후 루터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구원론은 연옥의 잔재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개혁파는 사후구원가능성에 관해 교회역사상 어느 교회전통보다도 단호하고도 강경한 어조로 부정해 왔다. 이미 쟝 칼뱅의 베드로전서 3장 19절 주석은 - 비록 동일한 형태로 답습되지는 않더라도 - 이후 개혁전통에서 되풀이될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웅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내세의 망대에 임하셨다. 이 망대에는 내세에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대망하던 구약족장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의 광채와 효력을 통하여 족장들을 구원하셨으나, 악인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셨다. 그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예외 없이 철저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종교개혁의 사고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가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해 절반만 이기셨는가?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옥 권세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영혼들 대부분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일체의 사후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그릇은 천하게 여길 자유가 없단 말인가?" 지엄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이중예정론을 통해 관철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일군의 사람들은 선택되기로,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구원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르트 시노드의 소위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도 강경한 형태로 갈무리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와 지옥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계시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모든 신학적 사고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중예정 교리를 통해 충족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르침 없이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의지는 과연 충족되는가? 이중예정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지 않는가? 과연 그런 폭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성경의 하나님인가? 세상 죄를 모두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대신하여 버림 받으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그를 그렇게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경륜이 온 우주에 이루기가지 만유에 편만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자비롭고 온유한 성령님 -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이중예정이 말하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정의의 차원을 계시하지 않는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너무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만을 관철시키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적 정의'(틸리히),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처음부터 다 다시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의 생각처럼 지옥이 만원일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개혁전통에 익숙한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까지 확정적인 상태까지는 못 된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지옥을 포함한 내세표상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실체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몇 갈래의 서로 다른 사고들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내세표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해당문맥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영원 지옥형벌을 강변하고자 할 때 그런 면밀한 검토보다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고 단정짓는 강박적인 해석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성경이 영원한 지옥형벌을 인간 대부분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형벌에 관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불붙는 듯 상처 입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예언자적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요나의 예언 목적이 앗수르 사람들의 회개에 있고 멸망에 있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의 지옥형벌에 대한 위협과 경고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교회에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의지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세상과 지상교회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에 속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 모두, 혹은 대다수를 구원하셔야 하거나, 거꾸로 소수, 혹은 극소수만을 구원하셔야 할 신학적 필연에 갇혀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은 죄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자유로운 주권과 경륜에 따라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에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었고, 지옥의 밑바닥이 드러난 바 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자, 이제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를 동원해서 뭔가 단정적으로 답변하면 아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변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그런 답변들은 교황론이나 마리아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연역으로 정당화된 불필요한 진리의 곁가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방교회의 구원론이나 최근 만인구원론으로 기울고 있는 최근 서구신학의 내세론적 사고(몰트만, 판넨베르크, 존 로빈슨, 칼 라너, 폰 발타자르, 한스 큉 등) 역시 약점이 있다. 모두가 예외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역시 신학적 필연의 연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위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에 대한 물음에 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당신의 독생자가 모두 겪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의 경륜을 확증하셨다.

셋째, 따라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모두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영원한 구원의지를 확증하신 하나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그것은 온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하시든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견줄 수 없이 공정하고도 자비로운 판결이 될 것이다.

넷째,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내어 주시기까지 확증하셨다는 것을 바로 산 자인 당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응하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다!

2014. 3. 24. 23:54

그리스도 지옥강하와 에녹 전승

1. 그리스도 지옥강하는 사도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신경 같은 서방신경에서 나타나는 신앙조항이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한글판 사도신경에서는 19~20세기 미국감리교회의 영향으로 이 조항이 빠져 있다. 그러나 미국감리교회의 후예인 미국연합감리교회는 현재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이 조항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여 이 조항을 다시 회복했다. 따라서 이 조항이 빠진 사도신경을 갖고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한국개신교가 유일한 셈이다. 한국교회는 이 조항을 회복해야 마땅하다.


2.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전거로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든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 개역개정)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옥"이 지옥/하계이고, "가셨다"는 것은 하계강하, 즉 지옥으로 내려가심을 뜻하며, "옥에 있는 영들"은 지옥/하계에 떨어진 죽은 자의 영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3세기 동방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서 시작되었고, 동방교회의 일반적인 이해방식이 되었다. 서방교회 역시 이 해석을 큰 틀에서 받아들여 왔다.


이 해석의 난점은 여러가지다. 우선 신약성경 헬라어 용법의 측면에서 난점이 있다.

- "옥"은 지옥 또는 하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 않았다.

- (형용어 없는) "영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이지 않는다.

- "가셨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강하/하강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니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베드로전서 3장 20절)이 언급되어 있는가 라는 물음이 이 해석방식의 중요한 난점이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는 왜 안 되며, 모든 시대의 악인들은 왜 안 되겠는가? 이 해석은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하기 보다는 모든 시대의 악인들에 대한 두 번째 구원기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약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울러, 이러한 해석의 비약에 베드로전서 4장 6절["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이 근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 비록 오랜 해석전통을 보유한 읽기이기는 하나 -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언급된 "영으로는/육으로는"의 대조를 헬라철학적 인간론으로부터 잘못 읽어 들어간 결과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다. 즉, "영으로는/육으로는"이라는 대조는 바울에게서도 이미 나타났던 대조이므로, 이를 다르게 읽어야 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본디 그리스도 하계강하나 불신자의 사후구원기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박해를 받아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전통적인 이 구절의 해석은 본문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본문을 좀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3.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서방교회 최대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서방교회에는 동방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하계에 강하하셔서 (사실상 모든)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에게 이와 같은 에보디우스가 질문한 이와 같은 견해를 비판하면서, 성육신 이전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노아 시대 악인들에게도 환상으로 나타나곤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해석과는 별도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전통적인 그리스도 지옥강하 관념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테오도르 베자 이후 개혁 정통주의를 통하여 삭감되고 수정된 형태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유력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란 문자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징적으로는 버림받은 죄인들의 번민을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민을 가리키며,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노아시대에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 정통주의의 그리스도 지옥강하론은 루터나 칼뱅의 이해와도 상당부분 다르다. 


- 루터와 칼뱅은 버림받은 자의 정신적 번민을 지옥강하로 해석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동기를 아울러 언급했다. 

-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관하여는 하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칼뱅은 구약 족장들로 구원의 범위를 제한했으나 구약 족장들이 그리스도의 하계강하를 대망하면서 "망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 루터나 멜란히톤의 경우는 하계강하를 통한 사후구원가능성까지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 정통주의는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전복한다.


- 개혁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정신적 번민의 요소는 계승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삭감된 형태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던 바, 고대로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었고 중세에도 유행한 신화적 내러티브의 한 요소였던 승리의 하계강하라는 동기는 배제했다.

- 그리스도 지옥강하나 베드로전서 3장 19절 해석에서 하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이 힘을 얻게 되었다.

- 하계강하를 통한 사후구원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의하여" 교회 바깥에서도 구원 받을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개혁 정통주의는 루터란 정통주의나 로마카톨릭, 또는 동방정교회와 같은 타 교회전통들과 달리, 그야말로 전례 없이 배타적인 논조로 일체의 사후구원가능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 정통주의의 해석방식은 중세적인 내세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자연히 이러한 해석방식은 전통적 해석의 추종자들에게 많은 저항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도도한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이 탈신화적인 합리적 해석방식은 개혁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감리교의 창설자 존 웨슬리도 이 해석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웨슬리가 개혁교회와 다른 점은 신경의 권위와 세부항목에 대한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였다. 이리하여, 존 웨슬리가 영국성공회의 39개 신조로부터 24개 항으로 요약해 준 신조요약에는 신경의 권위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고,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도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여전히 자신이 즐겨 시행했던 아침/저녁 기도회에서 사용되는 사도신경을 전통적인 버전으로 암송했다.


미국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요약신조에 1개 항을 덧붙여 25개 항으로 이루어진 "종교신조"를 신앙적 표준으로 삼았다. 한편, 존 웨슬리가 시행했던 아침/저녁 기도회는 얼마 가지 않아 미국감리교회에서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결과적으로 미국 감리교회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탈락되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을 삭제한 것은 존 웨슬리가 아니라 미국감리교회였으며, 그것도 우발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어권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번역했던 한국초대교회의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삭제된 경위는 그 출발점에 미국감리교회의 관행과 개혁교회의 특정한 해석전통이 있었다.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한국에 파견된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협의과정에서 본국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을 뺀 버전의 사도신경을 배운 감리교 선교사들의 의견이 개혁교회의 해석전통을 배경으로 했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 삭제론자들이 내세우는 신학적 논거는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개혁정통주의-웨슬리 전통의 해석노선에 의존해 있다. 본디 미국감리교회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 조항이 탈락된 과정이 일정부분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면, 한국초대교회 선교사들이나 현대의 지옥강하 조항 삭제론자들은 이 탈락을 나름의 신학적 명분을 통하여 보다 의식적으로 주장한다.


이 해석의 강점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특정 내세 관념을 전제하지 않아도 좋고,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실존적인 불안과 번민의 문제를 십자가 사건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개혁교회의 그리스도 지옥강하 이해는 트렌트공의회를 통하여 로마카톨릭교회의 저주를 받았으나, 오늘날 로마카톨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지도급 신학자들(라칭어, 뮬러 등)이 정신적 번민 모티브를 통하여 지옥강하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약점은 여전히 왜 하필 노아 시대만이 언급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해 정확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문제적인 것은 이와 같은 특정 해석을 근거로 세계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경 조항을 뜯어고치는 것은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세계교회 지체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오늘날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관한 성경주석적 논의는 에녹 전승을 배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데 대체적인 중론이 모여져 있다. 즉,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하필 노아 사건이 언급되는 까닭은 베드로전서 기자가 에녹전승, 특히 에녹1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베드로전서 기자가 에녹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첫째, 베드로전서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에녹/노아전승이 잘 알려져 있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아파메나 키보토스'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키보토스'는 방주(κιβοτός)와 음이 같다. 따라서 아파메나 키보토스는 고대세계에 방주의 노아 일행이 정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따라 소아시아에는 노아와 파국을 예언한 그의 선조 에녹에 대한 각종 전승이 전해졌고, 노아는 "의의 전도자"로서 이방세계에서도 존경받고 있었다.


둘째, 베드로전서 기자 자신이 에녹 1서와 같은 묵시문학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에녹1서는 하나님의 사람 에녹이 후손 노아 시대에 있을 홍수심판을 예언했다는 신구약중간기 문헌으로서, 신약성경의 배경전승을 이룬다. (베드로후서 2:4이하; 유다서 4;14이하) 베드로전서 3장 19절의 경우,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에녹이 반역한 천사들에게 예고했던 최종적 심판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제시되어 있다. 


이 반역한 천사들은 노아 시대에 활동하면서 땅위 사람들을 미혹했던 악한 영들이다. 그러니까 "옥에 있는 영들",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의 정체는 바로 이 반역한 천사들이며, 이 반역한 천사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관계하여 낳은 거인족 네피림을 가리킨다.[각주:1] 그리스도는 부활 이후 "옥에 있는 영들", 즉 "노아시대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시고, 그들을 굴복시키셨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전서 3장 20절과 21절에서 세례와 노아 시대 대홍수로부터의 구원이 견주어진다. 노아가 당대의 세속적 무관심과 멸시를 견뎌낸 뒤에야 방주의 구원에 이르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정사와 권세의 박해를 겪어내고서야 약속된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이 구원의 여정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범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사와 권세와 악한 천사들에 의해 죽기까지 고난을 겪으셨으니, 결국은 그들에게 부활승리를 선포하셨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따라서 베드로전서는 성도들이 모든 고난을 담대하고도 의롭게 겪어낼 것으로 권면한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 개역개정)


소위 지옥강하에 관련하여 본 구절은 강하가 아니라 오히려 상승을 말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가서(πορευθεις)"는 신약헬라어에서 하강을 지칭한 적이 없고 거의 언제나 상승을 뜻할 때 나타나는 표현이다.

-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22절은 수미쌍관(inclusio)구조를 이룬다. 즉, πορευθεις는 22절에도 다시 나타나서 πορευθεις의 의미를 명확하게 다시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신 곳은 '아래'가 아니라 "하늘"이다.

- 신구약중간기에서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반역한 천사들의 형벌장소 내지 집결지는 하계가 아니라 궁창으로 생각되었다.

- 에녹1서에서도 에녹이 반역한 천사들에게 최종적 심판을 예고하는 장면은 하계가 아니라 하늘의 형벌장소이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5. 그렇다면 그리스도 지옥강하는 성경에 없는 후대의 신화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지옥강하의 관념은 신약성경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전제되어 있다.


- 요나의 표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신화적 존재인 바다괴물을 통하여 스올강하, 즉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심을 예고한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났다는 마태복음서의 기록은 십자가 대속의 효력이 죽음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으로부터 십자가 죽음 이후 십자가 대속의 효력이 죽음의 세계에까지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이러한 죽임당하신 그리스도의 드라마에서 절정에 해당되므로, 넓은 의미에서, 혹은 간접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전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음 이후 토요일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의 이해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 아래 얽매여 있었던 시간이 아니라,  (고대교회와 중세교회와 루터와 칼뱅과 루터교회의 이해처럼) 사망권세에 대하여 거두신 생명의 승리를 선언하는 승귀의 시간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의 토요일(Easter Saturday)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고난주간의 성 토요일은 세상의 눈에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 아래로 들어간 시간이며, 이런 한에서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실체는 사망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이며, 이런 의미에서 부활의 토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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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참고문헌] Bo Reicke, The Disobedient Spirits and Christian Baptism (1946); Werner Bieder, Die Vorstellung von der Höllenfahrt Christi (1949); Wilhelm Maas, Gott und die Hölle (1979); Rémi Gounelle ed. La descente du Christ aux enfers (2004); Markwart Herzog hrsg., Höllen-Fahrten (2006); Hilarion Alfeyev, Christ the Conqueror of Hell (2009); 그외 베드로전서 주석들; 노종문.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왜 음부행이 빠져있을까?” 『기독교 사상』 2003 no.9, 214~235.; 강창우,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의 지옥강하" (장신대 대학원 신학석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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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궁정에서 여호와 주변을 두른 천사들을 가리키므로, 이것은 신구약중간기의 성경이해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 자체의 이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뱅은 네피림이 반역천사의 후손이라는 창세기 6장 2절의 해석을 "고대의 꾸며낸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네피림이 경건한 셋의 혈통과 불경건한 가인의 혈통에서 나온 후손들이라는 해석을 따랐다. 이것은 칼뱅의 성경해석이 합리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은 개혁 정통주의, 예컨대 청교도 주석가 매튜 헨리에게도 계승되었다. 네피림=경건한 자들의 잡혼 결과라는 해석이 한국교회 회중에게 마치 정설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까닭은 칼뱅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해석이 근대에 영향력 있는 해석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칼뱅이나 개혁주의, 또는 이를 답습한 주석성경에 나오는 대중적 해설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오늘날 주요한 창세기 주석가들은 셋 후손 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회중들이 아직도 접하지 못했다는 것은 설교자들이 주어진 책임을 유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본문으로]
2013. 6. 29. 17:40

나라를 위한 기도와 시민불복종 문제

신약성경에는 임금과 권세 있는 자들에게 '복종'하고 '기도'하라는 사도적 권고 말씀이 나온다. (로마서 13:1~7, 디모데전서 2:1~4, 디도서 3:1~2, 베드로전서 2:11~17) 이 말씀들은 교회가 국가적 압제와 전횡이 일어날 때마다 어용종교 노릇을 하는데 성경적 전거 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성경을 넓게 보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권고는 이 서너 군데 말씀만 있는 게 아니다. 구약성경 역사서와 예언서에서 임금과 기득권자들에 대해 예언자들은 줄곧 목숨을 걸고 통렬한 비판을 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권고하는가? 


신약성경 로마서나 베드로전서에서 순복해야 할 하나님의 권세라고 지칭된 로마제국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 또는 "음녀" 등의 상징으로 지칭된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이 사탄의 권세에 맞서 목숨을 건 믿음의 싸움을 하라고 권면한다. 주목할 사실은 베드로전서에서도 2장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도 로마제국은 '바벨론'으로 언급된다는 것이다.(베드로전서 5:13) 그렇다면 그 나라를 위한 기도의 성격과 내용과 본질이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나라를 위한 중보기도에 관해 기록된 서너 단락들은 이 전체적인 배경 속에 이해해야 할 말씀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첫째, "모든" 국가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이미 앞서 성경의 좀더 넓은 맥락 속에서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았다. 아합과 이세벨의 사악한 왕권은 엘리야의 예언자적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했듯이, 이 한반도에서 아합과 이세벨과 같은 통치자와 기득권자들에 대해서 교회는 예언자적 저항과 비판을 해야 할 소임이 있다. 이러한 예언자적 저항과 비판을 두고 '운동권'이니 '빨갱이'니 하는 딱지를 갖다 붙이는 것은 성경 전체의 흐름에 배치되는 몰지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 보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되풀이하거니와, 뒤에서 로마제국을 '바벨론'이라고 지칭한 베드로전서기자가 여기서는 그 바벨론에 무조건 복종을 권면하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이는 문맥 자체가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문의 번역 자체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제도'는 κτισίς를 옮긴 것인데, κτισίς는 제도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 또는 피조물을 가리키며, 문맥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권위라는 뜻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베드로전서 2장 본문이 바로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바우어, 슈라게, 셸클레 등) 따라서 원문의 뉘앙스 대로 옮기면 "인간에 속한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권위"에 대해 (그 창조질서를 제정하신)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는 뜻이다. 즉, 인간이 만든 제도라면 무조건 순종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악한) 인간세계에 속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선하게 제정하신) 모든 창조질서에는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이 창조질서는 국가와 더불어 가정이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는 2장11절에서 시작해서 3장7절까지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포함시킨 확장된 형태의 가훈표(Haustafel)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박해의 조짐 앞에서 극히 기본적인 신앙원칙을 재확인함으로써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방향을 조명해 준 말씀이다. 요컨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말씀하는 '복종'은 국가라는 창조질서의 직능에 대한 복종이지, 창조질서를 벗어나 불의와 악을 자행하고 진실과 정의를 탄압하는 악마화한 권세로서의 국가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의 경우는 어떤가? 국가권력에 아첨하고자 하는 자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표현들이 나온다. 국가권력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한 것이나,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 하라"고 되어 있는 대목들이 그것이다.(로마서 13:4,7 등.)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할 당시는 아직까지 네로 황제 당시 박해의 조짐이 가시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이 좀더 신중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합당한 존경을 보이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속권력에 아첨할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집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한 것이고, 두려워 할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실 따름이다. 로마서 13장의 취지는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부터 말미암은 의를 집행하는 한 거기엔 "무엇이든지" 순종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은 국가권력에 맹종하는 어용종교인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라고 권면할 따름이다.


둘째,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로부터 말미암은 의를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타락한 본성에 따라 불의와 악을 집행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는가?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악을 행할 때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관해 로마서는 아직까지 좀더 구체적인 권면을 해 줄 시점이 아니었다. 그저 "선을 행하라, 그러면 국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반면, 베드로전서는 박해의 조짐이 가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최고의 시민"이 국가에 대한 충성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는 가훈표에 이어 3장8절에서 4장6절에 걸쳐 선을 위한 고난을 겪어내라고 권면한다. 즉, 악에 대해 굴종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새로운 의의 표준에 합당하게 고난으로 저항하라고 말씀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저항방식은 목숨을 건 복음선포요, 철저한 비폭력이다.


이 고난의 저항은 일견 가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고난의 모범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의를 증언하시고서 죽음의 세계로부터 공중권세 잡은 영들의 피난기지(φυλαχή)인 하늘로 들어올려져 승리의 선언을 하셨던 저 부활의 과정을 회상해 보도록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걸고 악한 영들을 대적하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면(베드로전서 3:18ff., 4:6),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도 목숨을 걸고 선으로 악을 대적해야 한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행해야 하는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승리가 약속되어 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3장과 4장의 권면에서 핵심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두 가지 논점은 결국 국가권력이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선과 의의 기준에 따라 행하라는 한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서나 공동체로서나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는 의의 증인이다. 국가권력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집행한다면?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국가권력이 불의와 악을 행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그 "바벨론" 앞에서 의의 증인으로 나타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모데전서 2장이나 디도서 3장은 어용종교의 길을 지지하는가? 


디도서 3장은 국가에 충성하라는 원론적인 가르침만을 되풀이했고, 이 안에는 물론 로마서나 베드로전서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 2장은 어떤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권면 가운데 통치자와 위정자들을 언급한 것이고, 이 기도의 목적은 예레미야 37장 7절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된 헬레니즘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교회공동체가 평안한 가운데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데 있을 뿐이다.


물론 위르겐 롤로프의 지적대로 제2바울서신에 속하는 디모데전서의 실질적인 수신자였던 소아시아 교회에게 이와 같은 디모데전서기자의 권면은 논란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실제로 모진 박해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비해 디모데전서는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기 보다는 이제까지 전승되어 온 일반적인 대처방법을 '보수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적극적인 색출작업보다는 "걸리면" 이루어지곤 해왔기 때문에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착하고 충성된 시민으로서 제국에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디모데전서기자로선 소아시아교회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거나, 베드로전서처럼 구체적인 신학적 숙고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어쨌거나 아마도 기존의 대처방법이 당시로선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역시 이교적 혹은 세속적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서의 교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지혜로서 여전히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소수자라면 무조건 정권에 협력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에 비추어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요즘 시리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전에서 시리아 이슬람교의 다수세력인 수니파를 주축으로 한 반정부시위는 시리아 사회 상층부를 점유하는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강간과 살인, 약탈로 변질되었다. 가장 유서깊은 교회 가운데 하나인 시리아 교회가 이슬람광신도들이 만들어낸 무정부상태에서 붕괴직전에 다다르고 있는 실정이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가 이런 무법천지가 되지 않도록 기도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독재정권이라도 정부에는 무조건 협력하는 어용종교의 길이 생존의 길이었겠는가? 아니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니파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대중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대변했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구체적인 현실의 물음에 관해 디모데전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입장에 있지 않고 극히 원론적인 대원칙만을 조언해줄 따름이다. 즉, 세상이 무법천지로 변해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써 국가에 충성한다"는 신약성경의 명제는 교회가 어용종교화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시민이 됨으로써만 국가에 충성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가 소위 "운동권" "빨갱이"가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칼 바르트가 갈파했다시피, 이 점에서 교회는 단지 옛 세계인 창조질서에 안주하여, 국가적, 시민사회적 규범에 얽매여 있지 않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터 온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 위에 미리 구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의의 증인으로서 선을 행해야 할 책무를 부여받았다.

2011. 1. 31. 07:37

관상기도와 이단시비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 올바른 길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있다.

소위 장자교단이라는 예장통합교단에서 이재철 목사와 같이 이 시대에 드문 올바른 설교자를 사도신경의 그리스도 지옥강하조항에 대한 강해에서 본질과 상관없는 말꼬투리잡기로 이단시비를 걸고 목사면직까지 강행한 사례가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재철 목사가 목회하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신자를 잃은 주변교회들과 양화진에 이익관계를 갖고 있는 외국인들이 담합과 공모를 했으리라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가장 큰 기관인 한기총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미 개별교단들이 여러 가지 신학적 오류를 근거로 이단으로 단죄한 큰믿음교회 같은 문제단체에 대해 '이단성 없음' 판정을 내렸다는 것도 착잡한 희비극이다. 신임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이전 위원회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단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이다.

관상기도가 이단시비에 올라 있는 현실은 이런 사이비이단문제의 난맥상과 맞물려 있다. 관상기도가 일부 평신도들 사이에서 종교혼합주의 쯤으로 알려져 있으니 참 딱한 현실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상기도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을 성전이라도 치르듯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와 신학자들이 이룩한 성과라고 봐도 큰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호전성이 영들을 분별한다는 그럴싸한 미명으로 포장되고 장려되기까지 하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복음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성경을 들먹인다고 해서 '성경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써야 한다면서 성경과 사도를 들먹이는 사이비집단이 있다. 공교회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행태가 성경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일 = 토요일'을 지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주일 =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공교회를 공격하는 태도가 성경적일 수도 없다. 

왜인가? 성경에 담긴 복음의 정신은 놓친 채 성경만 들먹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자주의적 인용으로 관상기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증명됐다며 의기양양하게 단죄할 수 있을까? 자전거가 성경에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라고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며 득의만면하게 저주를 퍼붓던 어떤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둔다.

둘째, 순전한 믿음은 소위 순혈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순전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때 이방인과의 통혼을 비판하기는 했다. 그것은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했다. 그러나 성경을 면면히 흐르는 구원사의 큰 흐름은 이방인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이었다. 이 구원의 보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없었을 것이요, 아직도 정결례를 삼가 지켜야 했을 것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도 여전히 그대로 있어야 했다.

순혈주의는 신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에서 순혈주의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참사도로 여겨졌던가? 오히려 순혈주의를 고집할수록 그들은 구원사의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관상기도에서 본질과 알맹이가 아닌 것을 꼬투리 잡아 자신의 '순수한 믿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쳤던 순전한 믿음에 가까운가, 아니면 극단적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가까운가? 

관상기도가 '이방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평은 설득력 없는 순혈주의에 불과하다. 이방종교에서 유래된 일체에 소위 종교혼합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성경의 역사적 과정 자체가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는 비평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관상기도가 그리스도중심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로부터 가늠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못한 한 관상기도는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세계신학계의 보편적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어차피 관상기도가 종교혼합주의라고 매도하는 이들에게는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오늘의 세계신학을 주도하는 신학의 거장들이 영성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이 별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 한 사람의 거짓교사일터이므로!

그렇다면 영국의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책 Christian Spirituality를 보면 소위 영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지향점을 갖는 여러 가지 신앙유형과 신학적 입장들이 아우러져 있다. 그 가운데는 관상기도가 예사로 등장함은 물론, 소위 복음주의니 개혁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편협한 근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거짓선생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빌랴의 테레사,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요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토마스 머튼, C S 루이스, 칼 바르트, 본회퍼 등이 다양한 영성의 모습으로서 토의된다. 

자, 맥그라스는 지도적 복음주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할텐가? 아니면 맥그라스 역시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배교한 거짓교사라고 할텐가?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존 파이퍼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관상과 명상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실재라고 긍정한다. 영성의 단계를 나누어 존재의 상승과 고양을 얘기하는 가톨릭신학의 '나쁜' 관상과 명상에 대해선 포용할 필요가 없다고 선을 긋지만 말이다. 존 파이퍼 목사가 추천하고 격려하는 차세대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이머징교회 운동(*1)과 관상기도에 참여해 온 마크 드리스콜 목사를 든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존 파이퍼나 드리스콜 목사 역시 이들의 눈에는 개혁주의 목회자가 아니고 배교한 거짓교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나름의 '엄격한' 잣대를 통과할 교회의 교사가 몇이나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들에게 교회의 교사가 과연 필요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성령의 감동 덕분에 '오직 성경으로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관상기도에 대한 세계공교회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2)

[덧붙임]
"Emerging Church"는 '이머징교회'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번역이다. 그렇다고 '신흥교회'라고 옮기자니 신흥종교가 연상되어 어감이 적절치 못하고, '(새로) 뜨는 교회'라는 식의 표현도 '요새 뜨는 교회'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할 것을 고민해야 할 낱말이다.
*2. 구글링을 잠시만 해봐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은 그들 스스로의 (소위 '영적인') 통찰이라기보다 어디선가 빌어온 얘기라는 사실이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주장을 어디선가 빌어오거나 따오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그렇게 했느냐이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보수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이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미국근본주의의 복사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두고 근본주의자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근본주의 노선에 서 있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2010. 10. 8. 17:43

작가 최윤희님의 자살소식을 접하면서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최윤희님최근 2년간 지병이 악화되면서 이를 비관하여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싶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삼가 고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나를 지탱해오던 삶의 목표와 의미가 여지없이 무너진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생의 의욕도 사라진다. 오만 가지 극단적인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나 자신이 투병 중이다보니 최윤희씨의 그 벼랑 끝에 선 듯한 심정이 절절하게 맘에 와닿는다. 그 처절함과 비참함은 겪어 보지 않고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어두운 심연의 끝도 없는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 고통은 행복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던 작가마저 죽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만큼 실로 잔혹하다.

과연 나를 지탱하는 삶의 목표와 의미가 무너지고 고통과 수치가 나를 압도하여 모든 생의 의욕을 질식시킬 때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이것은 최윤희님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실존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정말 자살 밖에는 길이 없는가.

특별히 내 경우엔 최근 투병생활 중에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질병보다도, 내가 목표요, 보람을 삼아왔던 것들이 좌절되는 고통보다도 더 괴롭고 아픈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거의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보람과 기쁨이야말로 모든 고통과 좌절을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진정한 힘이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내게 가장 뼈아픈 것은 바로 이 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내 갈 길을 밝혀주었다. 내가 어두워 헤매고 넘어질 때에도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손길이 나를 인도해 주셨다. 성경말씀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통해, 신학연구와 묵상을 통해, 기도 중 지극히 뛰어난 평강이 임하는 은혜를 통해, 앞길을 환히 보여주시는 꿈과 환상과 음성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흔들림없이 붙들어주셨다. 어떤 신학적 물음도 늘 쉬워 보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나님이 내게 완전히 침묵하신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음성으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심지어 성경을 읽을 때도,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도, 기도할 때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쇠약해진 건강으로 신학연구와 묵상도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이젠 신학적 물음 앞에 말문이 턱 막힌다.

그동안 그토록 섬세하게 나를 인도하셨던 손길이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가. 지금 가장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데 그분은 대체 어디 계시단 말인가. 그동안 그토록 자비롭게 인도하셨으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침묵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나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이를 갈며 우는" 처지란 말인가. 도대체 왜? 포이에르바하의 생각처럼 하나님이 애당초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다만 내 인간성을 투사한 신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녕 나를 버리신 게로구나. 내가 도대체 무얼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다. 죽고 싶을 만큼 분하다... 자살이 내 마음에 늘 가까이 있다.

내가 지금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미지다.

첫 번째 이미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미지다.

나사로는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이름 뜻과 달리 하나님께조차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받지 못했다. 나사로도 하나님을 믿는 자였으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나사로는 구걸하다가 쫓겨나고(*1), 온 몸이 헐어 고름이 나고, 그 고름을 개들이 와서 핥아 먹는 비참한 굴욕과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죽을 때 이름없는 걸인의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죽어야 했다. 누가 그의 시신을 거들떠나 봤을까. 나사로는 이 모든 치욕과 고통을 겪어내다가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반전은 내세에서 일어났다. 그가 구걸하던 부자집 주인은 현세에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누렸지만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으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이름의 뜻과 달리 이생에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죽지 못해 살았던 고독한 나사로는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깊은 위로를 받으며 쉰다.(*2) 

이생에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영원히 위로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의 진정한 의미를 보았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차원으로서의 지옥에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현존하신다는 것이다.(*3)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마치 나를 조롱하고 힐난하듯 어처구니없이 좌절되어 버린 내 삶의 목표와 보람, 그 모든 좌절과 고통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짙어만 가는 나의 어두운 고통이 숨막히게 내 목을 조여온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을 기억한다. 나의 이 비참한 삶의 자리, 아니 죽음의 자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침묵하시는 듯한 바로 이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비록 예전처럼 손에 잡히고,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듣지 못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이 버림받은 자리에 현존하신다. 

개들이 와서 내 상처의 피고름을 핥는 기막힌 삶의 자리이지만,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나의 희망이요, 내 삶의 등불이시다.

[덧붙임]
- 10월10일 현재까지 총조회수가 110회쯤 되는데, 유입키워드를 보면 '최윤희 종교/신앙'이 무려 80여회에 이른다. 최윤희씨의 자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는 얘기다. 비슷한 현상을 얘기하는 블로그가 또 있는 걸 보면 내 블로그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하다.
아마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인들이 요새 자살을 많이 하던데, 최윤희씨가 생전에 전하던 행복의 메시지도 어딘가 기독교를 닮아 있다, 최윤희씨도 기독교인일 듯, 아니라면 종교는 무얼까' 라는 호기심에 글을 열어본 경우가 많은 걸로 보인다. 
사실 근본주의성향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자살문제에 율법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을 내려왔다.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자살에 이르게 된 당사자의 삶의 맥락을 주의깊게 삼가 고려하면서 애도의 심정으로 접근하기보다 단죄와 조롱을 일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자살자 가운데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아닌가. 이것을 보더라도 기존의 자살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기존 대처가 썩 적절한 처방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포스팅이 필요할 것 같다.
*1. 나사로가 부자의 집 앞에 '버려졌다'라고 우리말 개역개정역에서 번역한 대목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ἐβεβλητο'라고 되어 있다. βαλλοω(던지다) 동사의 수동형으로, '내던져져있다'라는 뜻이 된다. 물론 βαλλοω 동사는 연결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을 것이다. 
*2. 이걸 보면 나사로는 이생에 위로와 도움을 줄 변변한 가족과 친척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우신다'라는 나사로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고독한 상황을 함축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기만 했던 부자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겪는 것처럼, 나사로는 현세에서 아무도 도와주고 위로해 줄 이 없는 뼈아픈 고통을 내세에서 큰어른 아브라함이 직접 품에 안아 위로해준다.
*3. 한국개신교의 사도신경에는 세계교회적으로 볼 때 무척 드물게도 이 조항이 삭제되어 있다. 본래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초기한국교회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지, 종교개혁자들의 뜻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 조항에 대한 입장은 칼뱅, 기독교강요2.16.8에서 고전적인 진술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조항의 재삽입을 지지하는 국내교계인사로서 이정석교수(조직신학), 김정훈교수(신약학) 등을 들 수 있다. 이재철목사는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한 소속노회의 인식부족과 이익다툼으로 말미암은 오해와 왜곡으로부터 소속교단이었던 예장통합에서 이단시비와 목사면직처분까지 겪은 바 있다. 이 조항의 존재조차 모르는 신자들이 많은 상황이어서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