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 14:27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1. 고대와 중세까지 이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인 답변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고대교회 문헌이나 오리게네스를 필두로 한 (특히 동방) 교부들 다수의 답변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동방교회에서 먼저 주장했고, 동방의 신학적 영향력 아래 서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러한 답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그릇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악마적) 발명'이라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면서 이 주장의 외연을 자유주의로 좁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으리라는 주장을 "현대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대교회의 문헌증거들을 통해 쉽게 반박되는 단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사후 구원 기회에 한계가 없다는 희망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고대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방식처럼 단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무런 형벌 없이 구원 받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사후에 모든 사람은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에 힘입어 혹독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정화의 과정은 이미 현세에서 고통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현세(가 지옥 같을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되었다.


요컨대, 사후 구원 기회에 대한 고대교회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 은혜의 승리가 그 범위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달리 표현하면, 고대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지옥 세력의 일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승리하시어 굴복시키셨다. 지옥은 비어있다!


2.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희망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관념은 인정하나, 아무나 다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악인들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위협과 경고는 다 뭐란 말인가? 구원 받을 자는 은혜의 선택을 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옥이 비어 있다고? 천만에!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구원의 희망에 전거를 제공한다고 믿어졌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노아 안에서, 환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지옥이 비어 있으리라는 대중적 희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불신자들일지라도 - 그들 자신의 덕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확실한 인간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적어도 개혁교회 이외의 서방전통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온 내세관념이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고 죄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방교회에 퍼져 있던 또 다른 대중적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사후 어떤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purgatorium)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소위 정화의 가능성이 그레고리우스 1세를 거치면서 중세서방에서는 자명한 믿음의 대상인 연옥으로 굳어졌다. 중세 연옥설은 동방교회의 내세관과 어떻게 다른가?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 따르면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정화의 과정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예외없다. 여기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가 철저하게 미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지옥과 천국은 구분되나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화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연옥이라 일반적으로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세는 (농노에서 교황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적 변주를 거치면서 지옥-연옥-천국이라는 서로 구분되고 단절된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내세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는 지옥에는 악인이, 연옥에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보통사람이, 천국에는 선인이 들어가도록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러한 서방중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동방교회에서도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중세서방에서는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 지상교회 신자들의 행업의 공로를 통해 연옥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동방교회에 다르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과정은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동방교회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의 행업에서 나오는 대리적 보속이나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같은 서방의 중세적 관습은 낯설고 새롭다.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서는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가 내세의 모든 영혼들에게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에 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 내세론에서는 그리스도 지옥강하가 "천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운동"(토마스 아퀴나스)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점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았던 악인들에게는 지옥강하의 발생을 인지할 수 있을 뿐 구원의 효력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보속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들이 그 공로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되리라는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 더욱이 구체적으로 드라마화되기까지 한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은 중세말기에 이르러 거의 집단 히스테리 수준의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저 참담한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 남용의 광기는 이 집단 히스테리의 현세적 귀결이었다. 그 누가 두려운 연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라, 지옥만 만원인 게 아니다. 연옥도 만원이다!!


3.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광신적 연옥관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사람이 어딜 가냐고? 연옥밖에 없지 않겠냐고? 바로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약성경, 특히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 바울의 구원론을 못 알아들은 소치이다! 실로 '불쌍한 연옥영혼들'을 건질 산 자들의 잉여공로를 운운하는 연옥은 그리스도의 대속효과를 폐기하는 무서운 사탄의 발명품이다! 불쌍한 현세의 영혼들아, 연옥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중세 연옥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저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인 발언을 부정하면 안 될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서방신학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관심 두기 보다 현세의 삶을 하나님께 자리매김하도록 권면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취지와 다르게 중세 연옥론은 현세의 삶을 단지 연옥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중간과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 표상을 내세에 대한 무익한 공상으로서 거절하고 현세에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독려했던 것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내세에 관한 사고방향은 비교적 온건한 루터파와 보다 철저한 개혁파의 그것으로 나뉘었다. 루터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멜란히톤은 루터와 일정부분 교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 때 가장 뛰어난 이교도들을 구원하셨으리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생각은 이후 루터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구원론은 연옥의 잔재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개혁파는 사후구원가능성에 관해 교회역사상 어느 교회전통보다도 단호하고도 강경한 어조로 부정해 왔다. 이미 쟝 칼뱅의 베드로전서 3장 19절 주석은 - 비록 동일한 형태로 답습되지는 않더라도 - 이후 개혁전통에서 되풀이될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웅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내세의 망대에 임하셨다. 이 망대에는 내세에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대망하던 구약족장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의 광채와 효력을 통하여 족장들을 구원하셨으나, 악인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셨다. 그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예외 없이 철저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종교개혁의 사고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가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해 절반만 이기셨는가?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옥 권세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영혼들 대부분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일체의 사후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그릇은 천하게 여길 자유가 없단 말인가?" 지엄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이중예정론을 통해 관철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일군의 사람들은 선택되기로,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구원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르트 시노드의 소위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도 강경한 형태로 갈무리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와 지옥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계시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모든 신학적 사고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중예정 교리를 통해 충족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르침 없이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의지는 과연 충족되는가? 이중예정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지 않는가? 과연 그런 폭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성경의 하나님인가? 세상 죄를 모두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대신하여 버림 받으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그를 그렇게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경륜이 온 우주에 이루기가지 만유에 편만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자비롭고 온유한 성령님 -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이중예정이 말하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정의의 차원을 계시하지 않는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너무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만을 관철시키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적 정의'(틸리히),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처음부터 다 다시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의 생각처럼 지옥이 만원일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개혁전통에 익숙한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까지 확정적인 상태까지는 못 된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지옥을 포함한 내세표상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실체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몇 갈래의 서로 다른 사고들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내세표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해당문맥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영원 지옥형벌을 강변하고자 할 때 그런 면밀한 검토보다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고 단정짓는 강박적인 해석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성경이 영원한 지옥형벌을 인간 대부분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형벌에 관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불붙는 듯 상처 입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예언자적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요나의 예언 목적이 앗수르 사람들의 회개에 있고 멸망에 있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의 지옥형벌에 대한 위협과 경고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교회에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의지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세상과 지상교회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에 속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 모두, 혹은 대다수를 구원하셔야 하거나, 거꾸로 소수, 혹은 극소수만을 구원하셔야 할 신학적 필연에 갇혀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은 죄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자유로운 주권과 경륜에 따라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에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었고, 지옥의 밑바닥이 드러난 바 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자, 이제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를 동원해서 뭔가 단정적으로 답변하면 아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변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그런 답변들은 교황론이나 마리아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연역으로 정당화된 불필요한 진리의 곁가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방교회의 구원론이나 최근 만인구원론으로 기울고 있는 최근 서구신학의 내세론적 사고(몰트만, 판넨베르크, 존 로빈슨, 칼 라너, 폰 발타자르, 한스 큉 등) 역시 약점이 있다. 모두가 예외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역시 신학적 필연의 연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위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에 대한 물음에 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당신의 독생자가 모두 겪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의 경륜을 확증하셨다.

셋째, 따라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모두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영원한 구원의지를 확증하신 하나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그것은 온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하시든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견줄 수 없이 공정하고도 자비로운 판결이 될 것이다.

넷째,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내어 주시기까지 확증하셨다는 것을 바로 산 자인 당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응하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다!

2011. 2. 14. 17:24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

요 몇 해 사이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새삼 음모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종교통합음모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몇몇 소주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베리칩이나 백마스킹 음모론은 본블로그에서 일부 짚어본 바 있다. 이번 글은 소위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조금 다루려고 한다.

먼저, 근본주의자들이 저명한 국내외 교계인사를 프리메이슨이라고 단정짓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해 봄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만드는 방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저명한 교계인사를 살펴보는 것은 괜히 애써서 그들을 방패막이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음모론을 지어내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굳이 모든 교계인사를 '검증'하거나 '분별'할 까닭은 없다. 심지어 일정선을 넘어가면 어떤 교계인사를 둘러싼 모든 루머를 일일이 검증할 필요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음모론의 얼개 자체를 대표적 케이스를 통해 '검증'하고 '분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1. 빌리 그래함 목사

빌리 그래함 목사는 소위 신복음주의진영의 대표자였다. 이런 인물이 프리메이슨이라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증거란 이런 것들이다.

1.1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이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 음모론 책에 아무개가 나온다는 게 곧바로 아무개가 정말 프리메이슨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증거로 내놓는 얘기들이 믿을만한가를 짚어보는 것이 건전한 상식일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제임스 쇼와 톰 맥케니의 Deadly Deception이라는 책이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데,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실감난다고들 한다. 문제는 프리메이슨 연구자들이 이 책에 나오는 '무척 디테일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고,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제임스 쇼가 자신의 프리메이슨 시절에 대해 한 말에 부풀려진 거짓말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는 점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영역의 정보를 잡다하게 끌어와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해당영역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엉터리였던 것과 같은 케이스다. 쇼와 맥케니의 책에 나오는 무척이나 디테일한 묘사는 - 그 동기가 근본주의를 위한 열정이든 돈이든 간에 - 잘 짜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책에서 '폭로'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신뢰할 까닭이 없다.

현재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폭로'하는 책으로서 케이시 번즈라는 이가 쓴 Billy Graham and his Friends: A Hidden Agenda 라는 책이 있다. 

음모론자들로선 이 책의 인용문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와 퍼뜨리기까지 하고 있는데, 적어도 인용문에 한정해서 보면 논리적 비약을 무릅쓴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빌리 그래함과 프리메이슨의 '커넥션'을 밝히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1.2 "빌리 그래함은 사탄숭배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위 인용문 링크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사탄숭배자이며, 그의 신은 남근신이라고도 '폭로'한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빌리 그래함과 함께 프리메이슨 33도가 되었다가 개종한 개종자의 전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관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문제의 개종자가 정말 프리메이슨 33도였는지, 그가 정말 빌리 그래함의 프리메이슨 33도 동기생인지 알 수 없고, 전언의 사실관계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문제의 개종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면면으로 보아 제임스 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 개종자의 정체가 제임스 쇼라면 제임스 쇼의 책 Deadly Deception의 내용이 얼마나 안이하고 허황된 중상모략으로 가득한 지 스스로 유감없이 폭로하는 것이다. 아울러 문제의 글을 게재한 사이트 역시 제임스 쇼의 글임에도 마치 자기 사이트가 특별한 정보원에게 제공받은 비밀을 폭로하는 듯 부풀린 것이다.

빌리 그래함 부부가 점성술사인 진 딕슨과 개인적인 편지교환을 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서명날인이 첨부된 원본과 같은 증거가 없다면 날조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믿거나 말거나' 유의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미심쩍은 증언이 나왔다고 그걸로 죄를 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걸로 죄를 정하는 이들은 부패한 검찰이거나 증오와 시기심에 눈이 멀어 희생양을 원하는 군중들일 것이다.

1.3 "빌리 그래함은 친가톨릭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들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신학자나 목회자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하면 종교개혁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런 흑백논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암울한 중세말기의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을 일방적으로 사탄의 소굴로 매도하지 않고 조목조목 원칙과 근거를 갖고 비판했으며, 가톨릭에 희망이 보인다면 찬사과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도 그들의 말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하고, 아무리 자칭 정통을 부르짖는 근본주의라도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비판적인 권면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개신교 목사가 친가톨릭적 발언을 했다는 게 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신학과 대화하는 대다수의 개신교신학자와 목회자들, 하물며 가톨릭에 대해 일말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교계인사들은 프리메이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빌리 그래함은 종교다원주의자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빌리 그래함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공격은 로버트 슐러 목사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TV대담에서 나온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은 좀더 자세히 살펴본 뒤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일단 문제의 발언만 보면 제2바티칸공의회가 비가톨릭세계의 구원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데 이론적 근거가 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에 근접해 있다. 빌리 그래함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아누스의 서방교회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몰트만 등.)는 주류 현대신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은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가 공통의 로고스를 향해 살아가며 이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 시대의 구원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그리스의 현인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오늘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타적 구원관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예정론 이후 널리 확산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경우는 루터와 칼뱅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구원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일단 빌리 그래함이 키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아서 비정통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충격과 분노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나 역시 이와 같은 구원관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이 따르는 입장은 엄연히 교회사에서 공존했던 구원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원관을 따른다고 해서 그가 곧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제2바티칸공의회도 프리메이슨이 장악했단 말인가? 바르트, 틸리히, 라너, 몰트만과 같은 현대신학의 주요거장들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사도적 교부와 변증가들의 초대교회도 프리메이슨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역사적 배경과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협소한 깔때기에 몰아넣는 사고방식이 과연 '성경적'이란 말인가?

1.5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회원들과 (많이) 만났거나 좋은 관계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알다시피, 빌리 그래함은 1950년대 이후 줄곧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의 전도협회 사람들 상당수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므로 빌리 그래함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아무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주장이 밑도 끝도 없다는 데 있다. 그저 음모론자들 눈에 프리메이슨으로 지목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프리메이슨으로 '찍힌다.' 

심지어 말 한 마디라도 그들의 프리메이슨 깔때기에 걸려들면 프리메이슨이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빌 클린턴이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때 빌리 그래함이 그에게 힘내시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클린턴이 감격해서 빌리 그래함이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프리메이슨이다. 프리메이슨이 좋은 친구라고 표현했으니 더 말할 것이 그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추론인가?

말꼬투리잡기의 예는 또 있다. 조지 W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 때 빌리 그래함이 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확립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 프리메이슨인 까닭이 된다고 한다. 전쟁으로 세계질서를 바꿔보겠다는 대통령에게 '새로운 세계질서' 운운하면서 격려했다고 그게 프리메이슨이란다. 내가 보기에 그가 조지 W 부시 같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우파정치인의 탐욕에 가득한 행보를 축복한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표현을 쓰면 몽땅 프리메이슨으로 엮을 태세다!(*1)

1.6 "빌리 그래함은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아마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이미 어떤 음모론자의 문의 메일에 대해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 부정하는 답변메일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변메일이 '먹혀들지 않은' 까닭은 어찌 됐든 프리메이슨 협회의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프리메이슨 협회 회원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과연 정확했을까? 오히려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냐는 의혹을 퍼뜨렸던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그 '정보'의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프리메이슨 자신들조차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선전선동에 헷갈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 웹사이트의 Q&A란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이 있는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회원가입여부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빌리 그래함을 둘러싼 세간의 풍문에 대해 프리메이슨 쪽에서 착오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빌리 그래함 뿐만 아니라 칼 맑스, 월트 디즈니 등 저명인사나 찰스 러셀, 론 허바드와 같은 사이비이단집단 창시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적이 없다고 기록으로부터 밝히고 있다. 프리메이슨 브리티쉬 콜럼비아와 유콘 지부에서 지적한 대로 무신론자 칼 맑스가 신을 믿는 이념을 가진 프리메이슨에 입회했을까? 공산주의가 이룩한 전세계적 영역이 음모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맑스의 '진정한 정체'가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것이다. 애먼 사람에 대한 억측이 나도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애시당초 부풀려졌던 것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프리메이슨 회원명단' 상당수가 음모론자들, 특히 기독교 근본주의 음모론자들에 의해 마구 부풀려졌을 것이다. 

2. 한스 큉 & 요한 바오로 2세
2.1 "한스 큉은 프리메이슨이 주는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2.2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프리메이슨이다."

교황무류설을 공격하다가 로마교황청에게 신학교수권을 박탈당한 스위스 태생 독일신학자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슬슬 흘리고 있는 중이다. 가톨릭근본주의자들이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격하는 까닭은 독일 프리메이슨이 큉에게 문화상과 메달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성립되려면 프리메이슨이 자기 회원들에게만 상을 준다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유, 평화, 인류애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확산하는 데 이바지한 사람에게 주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이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따라서 유명하고 평판 좋은 비회원을 지목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자기 단체의 위상을 드높이고 홍보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로 보이는 경우로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상 받기를 거부했다. 왜 거부했을까? 요한 바오로 2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싫어하는 가톨릭 보수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단지 교황이 프리메이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 뿐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에게 상을 받은 까닭은 그의 세계윤리구상에서 말하는 종교간 평화에 대한 요구가 프리메이슨의 이상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의 비회원일지라도 가톨릭 진보파로서 굳이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 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한스 큉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상의 선정이나 수상 자체가 프리메이슨 회원 여부를 입증하지 못함에도 굳이 큉이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프리메이슨과 커넥션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어떻게든 거슬리는 사람을 프리메이슨으로 엮으려는 프리메이슨 깔때기의 문제일 뿐이다.

(계속)

[덧붙임] 
*1. 국내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가 2011년 들어 '새 시대, 새 역사, 새 날을 주소서'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오정현 목사가 뉴에이저니, 프리메이슨이니 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송구영신예배와 새해 첫달에 프리메이슨으로 걸릴 목사님들 많으셨겠다. 바울이 현재를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두 기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파악했다는 주석적 기본개념을 얘기해주기까지 해도 이게 다 음모라고 할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