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4. 20:33

가톨릭도 그리스도교냐고? 예장합동 제99차 총회 유감

예장합동 제99차 총회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에게 재세례하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을 처벌키로 결의했다.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및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조처일 것이다. 합동측의 결의는 한 마디로 너무 많이 나간 근본주의 교회론의 결정판으로서, 자신들의 공교회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장자교단을 외치는 대형교단의 결의이므로, 합동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1. 합동측의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의 권능을 부정한다.


가톨릭는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합동측의 결의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가톨릭이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가톨릭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로서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는 사실관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령 가톨릭이 이단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가톨릭에서 시행한 세례를 부정할 신학적 명분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단교회가 시행한 세례가 효력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즉, 비록 이단교회라 할지라도, 심지어 타락한 교역자가 시행한 세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할 때 온전히 효력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도나투스파가 자신들만이 진짜 교회라고 참칭하면서 보편교회의 세례를 인정치 않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그런 도나투스파의 세례더라도 공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효력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전통, 자기 믿음만이 진짜라며 상대방이 교회일 수 없다고 매도하는 쪽과 격렬한 이단논쟁의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의 넓은 범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쪽, 하나는 분파주의 이단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의 태도이다. 한 마디로 배타적인 독단이냐 포용적인 관용이냐, 과연 어느 쪽이 합동측의 태도에 가까운가?


합동측은 가톨릭이 심지어 이단도 아니고 타종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는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실은 조금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톨릭교회에서 십자가의 도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유의 얘기는 합동측에서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비록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충분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의 도가 분명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또한 여느 개신교 이단들의 그것과 다르게 충분히 정통적이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종교?


이단이라면 그나마 고려의 대상이 되겠거니와, 타종교라면 들이대는 범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타종교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십자가 복음이 존재하지 않고, 가르쳐지거나 흔적 자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방교회도 그들의 눈에는 타종교여야 하고, 이들과 대화와 교류를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들도 타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는 종교혼합주의겠고? 이런 식으로 분파주의적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교회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재세례라니, 당신들은 재세례파인가, 칼뱅의 후예들인가?


2. 합동측의 결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세가톨릭교회 비판과도 동떨어져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을 퍼부어 해 대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에 부합한다고 믿어 의심지 않는 것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 일색이었는가?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에 중요한 쟝 칼뱅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쟝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비교하면서 중세가톨릭교회의 전횡과 교리적 일탈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교황 제도의 폭압 아래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째서?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되는 세례와 성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기초에 따른 것이다. 칼뱅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를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동요와 분열을 겪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기독교강요 4.2.11.)


칼뱅은 중세서방교회에서 거의 주술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던 문자적인 사효성(ex opere operato) 개념은 거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세례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고는 유지한다. 로마교회가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 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심지어 거기에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였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교황이다."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에 관한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교회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압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남겨두셨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면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합당한 교회라고 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교회론 전체를 거쳐 이 문제를 주의깊게 논증해 나간다. 즉, 로마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로마교회에 "이단"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칼뱅의 판단에 로마교회는 매우 "이단적"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격렬했던 교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종교개혁 교회조차 이 정도로 신중했는데, 과연 합동측에 이런 균형감각이 남아 있는가? 합동측의 반가톨릭적 결의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과 달리 로마교회에조차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표지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혹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관해 "이단" 선언을 남발하지 않아서 칼뱅도 미운가? (그럴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인가?


끝으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얘기에 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얘기는 근본주의자들이 처음 성경에서 발견한 발견이 아니라 중세교황권의 전횡과 더불어 권력에서 축출된 프란치스코회의 강경파나 후스파 등을 통해 이미 나왔던 얘기다. 종교개혁 시대나 정통주의 시대에 이 해석전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특정해석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까지는 못 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근본주의자들, 혹은 세대주의자들은 꽤 지나친 종교적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세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의 가장된 미소에 온 세상을 미혹하여 택하신 자라도 멸망케 하려고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얘기에 뒷받침이 되는 소위 근거들이라는 게 거의 한결같이 낭설과 유언비어라는 근본주의의 딱한 사정에 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조악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데 대해 어째서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신학적 배경이 해방신학이라서? 예수회 출신이라서? 이건 아무개의 신학적 배경이 자유주의라서, 바르트주의라서 다 거짓말이라는 식이라는 말과 똑같이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 바르트신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도대체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가.


그런 말들이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참소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이 전혀 미치지들 않는가? 근본주의자들이여, 어쩌면 당신들 생각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당신은 절대 적그리스도적이 아니게 될 성 싶은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0~11)


당돌하게 비방하는 대상이 사탄이면 자동으로 당신이 사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세에 교회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비단 교황이 적그리스도여서만이 아니다. 악마적인 참소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일 수 있다!

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