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4. 20:33

가톨릭도 그리스도교냐고? 예장합동 제99차 총회 유감

예장합동 제99차 총회에서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개종자에게 재세례하고, 세계교회협의회 관련자들을 처벌키로 결의했다.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및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반대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조처일 것이다. 합동측의 결의는 한 마디로 너무 많이 나간 근본주의 교회론의 결정판으로서, 자신들의 공교회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장자교단을 외치는 대형교단의 결의이므로, 합동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된다.


1. 합동측의 결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의 권능을 부정한다.


가톨릭는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도 합동측의 결의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가톨릭이 교황이나 마리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얘기는 도무지 금시초문이다.

아무리 가톨릭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로서니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는 사실관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가령 가톨릭이 이단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가톨릭에서 시행한 세례를 부정할 신학적 명분이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단교회가 시행한 세례가 효력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즉, 비록 이단교회라 할지라도, 심지어 타락한 교역자가 시행한 세례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정통교회로 개종할 때 온전히 효력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도나투스파가 자신들만이 진짜 교회라고 참칭하면서 보편교회의 세례를 인정치 않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그런 도나투스파의 세례더라도 공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효력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전통, 자기 믿음만이 진짜라며 상대방이 교회일 수 없다고 매도하는 쪽과 격렬한 이단논쟁의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총의 넓은 범위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쪽, 하나는 분파주의 이단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의 태도이다. 한 마디로 배타적인 독단이냐 포용적인 관용이냐, 과연 어느 쪽이 합동측의 태도에 가까운가?


합동측은 가톨릭이 심지어 이단도 아니고 타종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는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실은 조금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톨릭교회에서 십자가의 도가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유의 얘기는 합동측에서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비록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충분하지 못할지언정 십자가의 도가 분명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또한 여느 개신교 이단들의 그것과 다르게 충분히 정통적이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들 가운데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타종교?


이단이라면 그나마 고려의 대상이 되겠거니와, 타종교라면 들이대는 범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타종교라는 것은 그들 가운데 십자가 복음이 존재하지 않고, 가르쳐지거나 흔적 자체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동방교회도 그들의 눈에는 타종교여야 하고, 이들과 대화와 교류를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들도 타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는 종교혼합주의겠고? 이런 식으로 분파주의적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교회성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재세례라니, 당신들은 재세례파인가, 칼뱅의 후예들인가?


2. 합동측의 결의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세가톨릭교회 비판과도 동떨어져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을 퍼부어 해 대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모범에 부합한다고 믿어 의심지 않는 것이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극렬한 공격 일색이었는가?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 한국장로교회의 상황에 중요한 쟝 칼뱅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쟝 칼뱅은 기독교강요 제4권 2장에서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비교하면서 중세가톨릭교회의 전횡과 교리적 일탈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비록 교황 제도의 폭압 아래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교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째서? 거기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례되는 세례와 성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기초에 따른 것이다. 칼뱅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를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동요와 분열을 겪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기독교강요 4.2.11.)


칼뱅은 중세서방교회에서 거의 주술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었던 문자적인 사효성(ex opere operato) 개념은 거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세례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고는 유지한다. 로마교회가 무슨 자격이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 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심지어 거기에도 교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칼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권력자였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 수령과 기수는 로마교황이다."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에 관한 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로마교회가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압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 가운데 교회의 표지를 남겨두셨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면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를 완전히 합당한 교회라고 보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뱅은 중세가톨릭교회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교회론 전체를 거쳐 이 문제를 주의깊게 논증해 나간다. 즉, 로마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로마교회에 "이단"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다. 칼뱅의 판단에 로마교회는 매우 "이단적"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격렬했던 교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종교개혁 교회조차 이 정도로 신중했는데, 과연 합동측에 이런 균형감각이 남아 있는가? 합동측의 반가톨릭적 결의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과 달리 로마교회에조차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표지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혹은 칼뱅이 로마교회에 관해 "이단" 선언을 남발하지 않아서 칼뱅도 미운가? (그럴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3. 교황은 적그리스도인가?


끝으로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는 얘기에 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얘기는 근본주의자들이 처음 성경에서 발견한 발견이 아니라 중세교황권의 전횡과 더불어 권력에서 축출된 프란치스코회의 강경파나 후스파 등을 통해 이미 나왔던 얘기다. 종교개혁 시대나 정통주의 시대에 이 해석전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특정해석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것까지는 못 된다. 하나의 열려 있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근본주의자들, 혹은 세대주의자들은 꽤 지나친 종교적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가 세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고 있다고 해서 적그리스도의 가장된 미소에 온 세상을 미혹하여 택하신 자라도 멸망케 하려고 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얘기에 뒷받침이 되는 소위 근거들이라는 게 거의 한결같이 낭설과 유언비어라는 근본주의의 딱한 사정에 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조악에 대한 저항과 개혁의지를 표명하는 데 대해 어째서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가? 교황의 신학적 배경이 해방신학이라서? 예수회 출신이라서? 이건 아무개의 신학적 배경이 자유주의라서, 바르트주의라서 다 거짓말이라는 식이라는 말과 똑같이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이나 자유주의, 바르트신학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도대체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가.


그런 말들이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참소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이 전혀 미치지들 않는가? 근본주의자들이여, 어쩌면 당신들 생각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당신은 절대 적그리스도적이 아니게 될 성 싶은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0~11)


당돌하게 비방하는 대상이 사탄이면 자동으로 당신이 사탄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세에 교회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비단 교황이 적그리스도여서만이 아니다. 악마적인 참소를 일삼는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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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3 18:3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2014.11.03 22:23 address edit & del

      비밀댓글입니다

2014. 4. 2. 14:27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는 있는가?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1. 고대와 중세까지 이에 대한 교회의 보편적인 답변은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주어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를 통하여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고대교회 문헌이나 오리게네스를 필두로 한 (특히 동방) 교부들 다수의 답변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대동방교회에서 먼저 주장했고, 동방의 신학적 영향력 아래 서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이러한 답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그릇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악마적) 발명'이라고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의 근원은 개혁 정통주의 전통을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면서 이 주장의 외연을 자유주의로 좁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경우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해 사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으리라는 주장을 "현대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대교회의 문헌증거들을 통해 쉽게 반박되는 단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사후 구원 기회에 한계가 없다는 희망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고대교회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고방식처럼 단지 하나님 사랑 때문에 모두가 아무런 형벌 없이 구원 받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사후에 모든 사람은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에 힘입어 혹독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 정화의 과정은 이미 현세에서 고통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현세(가 지옥 같을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되었다.


요컨대, 사후 구원 기회에 대한 고대교회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하나님 은혜의 승리가 그 범위에 있어서 어떠한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달리 표현하면, 고대교회의 믿음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지옥 세력의 일부분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승리하시어 굴복시키셨다. 지옥은 비어있다!


2.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지옥강하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희망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즉, 그리스도 지옥강하의 관념은 인정하나, 아무나 다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악인들까지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위협과 경고는 다 뭐란 말인가? 구원 받을 자는 은혜의 선택을 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옥이 비어 있다고? 천만에!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인구원의 희망에 전거를 제공한다고 믿어졌던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노아 안에서, 환상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지옥이 비어 있으리라는 대중적 희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불신자들일지라도 - 그들 자신의 덕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불확실한 인간적 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적어도 개혁교회 이외의 서방전통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어 온 내세관념이다.)


하지만 어떻게? 부정하고 죄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서방교회에 퍼져 있던 또 다른 대중적 희망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사후 어떤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는 공간(purgatorium)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이 소위 정화의 가능성이 그레고리우스 1세를 거치면서 중세서방에서는 자명한 믿음의 대상인 연옥으로 굳어졌다. 중세 연옥설은 동방교회의 내세관과 어떻게 다른가?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 따르면 지옥에서 천국에 이르는 정화의 과정은 심지어 악인에게까지도 예외없다. 여기서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가 철저하게 미친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으로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지옥과 천국은 구분되나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화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차원을 연옥이라 일반적으로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면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식 내세는 (농노에서 교황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적 변주를 거치면서 지옥-연옥-천국이라는 서로 구분되고 단절된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내세의 공간으로 분화되었다. 여기서는 지옥에는 악인이, 연옥에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보통사람이, 천국에는 선인이 들어가도록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러한 서방중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 동방교회에서도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 밝혀질 것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중세서방에서는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 지상교회 신자들의 행업의 공로를 통해 연옥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동방교회에 다르면 죽은 자의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과정은 산 자들의 보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동방교회에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의 행업에서 나오는 대리적 보속이나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같은 서방의 중세적 관습은 낯설고 새롭다.  


- 동방교회의 내세론에서는 지옥강하하신 그리스도의 광휘가 내세의 모든 영혼들에게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에 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 내세론에서는 그리스도 지옥강하가 "천사들이 이동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운동"(토마스 아퀴나스)을 통하여 구체적인 지점에 일어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았던 악인들에게는 지옥강하의 발생을 인지할 수 있을 뿐 구원의 효력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보속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들이 그 공로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기게 되리라는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 더욱이 구체적으로 드라마화되기까지 한 서방 특유의 내세 관념은 중세말기에 이르러 거의 집단 히스테리 수준의 사회적 효과를 낳게 된다. 저 참담한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 남용의 광기는 이 집단 히스테리의 현세적 귀결이었다. 그 누가 두려운 연옥을 피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라, 지옥만 만원인 게 아니다. 연옥도 만원이다!!


3.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광신적 연옥관념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사람이 어딜 가냐고? 연옥밖에 없지 않겠냐고? 바로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약성경, 특히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행위와 상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 바울의 구원론을 못 알아들은 소치이다! 실로 '불쌍한 연옥영혼들'을 건질 산 자들의 잉여공로를 운운하는 연옥은 그리스도의 대속효과를 폐기하는 무서운 사탄의 발명품이다! 불쌍한 현세의 영혼들아, 연옥 같은 것은 없다! 회개하라, 지옥은 만원이다!


중세 연옥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저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인 발언을 부정하면 안 될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중세서방신학의 막다른 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관심 두기 보다 현세의 삶을 하나님께 자리매김하도록 권면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취지와 다르게 중세 연옥론은 현세의 삶을 단지 연옥을 피하기 위한 부득이한 중간과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이 연옥 표상을 내세에 대한 무익한 공상으로서 거절하고 현세에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독려했던 것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회복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내세에 관한 사고방향은 비교적 온건한 루터파와 보다 철저한 개혁파의 그것으로 나뉘었다. 루터는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해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멜란히톤은 루터와 일정부분 교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지옥강하 때 가장 뛰어난 이교도들을 구원하셨으리라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의 생각은 이후 루터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후구원론은 연옥의 잔재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개혁파는 사후구원가능성에 관해 교회역사상 어느 교회전통보다도 단호하고도 강경한 어조로 부정해 왔다. 이미 쟝 칼뱅의 베드로전서 3장 19절 주석은 - 비록 동일한 형태로 답습되지는 않더라도 - 이후 개혁전통에서 되풀이될 사후구원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웅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내세의 망대에 임하셨다. 이 망대에는 내세에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대망하던 구약족장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의 광채와 효력을 통하여 족장들을 구원하셨으나, 악인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셨다. 그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예외 없이 철저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종교개혁의 사고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가 어디까지냐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해 절반만 이기셨는가?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옥 권세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영혼들 대부분을 외면하신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를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일체의 사후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존귀하게 여기고 다른 그릇은 천하게 여길 자유가 없단 말인가?" 지엄한 당신의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이중예정론을 통해 관철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일군의 사람들은 선택되기로,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구원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도르트 시노드의 소위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가장 보수적이고도 강경한 형태로 갈무리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와 지옥 권세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계시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모든 신학적 사고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중예정 교리를 통해 충족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르침 없이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의지는 과연 충족되는가? 이중예정 교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지 않는가? 과연 그런 폭군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계시된 성경의 하나님인가? 세상 죄를 모두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모두를 대신하여 버림 받으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그를 그렇게 내어주시기까지 세상을 격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경륜이 온 우주에 이루기가지 만유에 편만하셔서 활동하고 계시는 자비롭고 온유한 성령님 -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이중예정이 말하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하나님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정의의 차원을 계시하지 않는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너무 일방적이고 일면적인 이해만을 관철시키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적 정의'(틸리히),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시고 의롭고 거룩한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처음부터 다 다시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의 생각처럼 지옥이 만원일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개혁전통에 익숙한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까지 확정적인 상태까지는 못 된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지옥을 포함한 내세표상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실체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몇 갈래의 서로 다른 사고들이 병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내세표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해당문맥에 비추어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영원 지옥형벌을 강변하고자 할 때 그런 면밀한 검토보다는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고 단정짓는 강박적인 해석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성경이 영원한 지옥형벌을 인간 대부분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못박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형벌에 관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불붙는 듯 상처 입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예언자적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언자 요나의 예언 목적이 앗수르 사람들의 회개에 있고 멸망에 있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의 지옥형벌에 대한 위협과 경고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교회에 확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 의지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 세상과 지상교회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에 속한다. 


물론 칼 바르트의 정확한 지적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 모두, 혹은 대다수를 구원하셔야 하거나, 거꾸로 소수, 혹은 극소수만을 구원하셔야 할 신학적 필연에 갇혀계시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자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구원 받기에 합당치 않은 죄인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은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자유로운 주권과 경륜에 따라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에 내어주기까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모든 죽음의 권세가 파괴되었고, 지옥의 밑바닥이 드러난 바 되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시다!


자, 이제 맨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를 잘못 믿었던 신자들이 죽은 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은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를 동원해서 뭔가 단정적으로 답변하면 아마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답변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논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그런 답변들은 교황론이나 마리아론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적 필연의 연역으로 정당화된 불필요한 진리의 곁가지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방교회의 구원론이나 최근 만인구원론으로 기울고 있는 최근 서구신학의 내세론적 사고(몰트만, 판넨베르크, 존 로빈슨, 칼 라너, 폰 발타자르, 한스 큉 등) 역시 약점이 있다. 모두가 예외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역시 신학적 필연의 연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위 사후 두 번째 구원 기회에 대한 물음에 관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지로부터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당신의 독생자가 모두 겪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지의 경륜을 확증하셨다.

셋째, 따라서 죽은 자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모두 구원받기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영원한 구원의지를 확증하신 하나님 품에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그것은 온전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하시든지, 그것은 우리의 판단에 견줄 수 없이 공정하고도 자비로운 판결이 될 것이다.

넷째,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내어 주시기까지 확증하셨다는 것을 바로 산 자인 당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초청에 응하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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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9. 03:06

한국교회의 명목과 실체

나 자신을 살펴 봐도, 주변과 한국교회를 살펴 봐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명목상(de jure)믿음과 실질적(de facto) 믿음이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실질적 믿음을 무의식으로 용의주도하게 억압해 버려 그 실체를 거의 잊어버리기까지 하고, 그 빈 곳에 그럴싸하게 정당화, 합리화(rationalization: Erich Fromm)해줄만한 명목상 믿음을 채워넣게 되기 쉽다. 기독교신앙은 명목상 믿음으로 이데올로기화하기 좋은 이미지와 상징과 교리들을 풍요롭게 제공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영화 인셉션과 같은 허위의식의 세계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그야말로 끝도 없이) 펼쳐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칼뱅이 설파한 바 있었던 '우상공장'으로서의 인간의 진면목이 아닐까.

최근 케빈 밴후저도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 교회가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양태가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어떤가? 명목상으로는 개혁주의, 보수신앙,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한국교회의 실질은 개혁주의라기보다는 반공숭미주의요, 보수신앙이라기보다는 수구기득권신앙이요, 오직 내 생각으로만, 오직 내 신념으로만, 오직 미국의 은혜로만이 아닌가?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바로 실질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진짜 믿음의 현주소에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에 바로 나 자신부터 내 믿음과 삶의 명목상 명분이 아니라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살펴보고 정직하게 가늠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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