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6. 03:32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예장통합 내 논란에 관하여


현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신단다. 세상에……

댓통이 대선후보시절 "내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100% 국민" 따위의 같잖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돌아다닐 때, 저걸 막지 못하면 역사의 어두운 기운이 또 다시 대한민국을 덮게 되리라는 스산한 예감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후보가 식민사관 망언으로 낙마했을 때 최소한 식민사관과 친일행적의 문제성에 관해 조금이라도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겸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당초…... "자기 아비의 명예회복"을 대통령직의 목적이라고 공언한 자가 쉽게 생각을 바꿀 리 만무했다.

대체 박정희가 회복할 명예가 있나? 박정희를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결국 역사를 뜯어 고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댓통의 역사왜곡은 친일반공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따위의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댓통에게 있어서 아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이니까. 100% 국민? 댓통의 꿈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북괴추종세력, 종북빨갱이로 간주한다는 암호통신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장통합교단의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잘 내주고 있다.

- 장신대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이 비교적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내주셨다.
- 올해 예장통합교단의 신입총회장 채영남 목사님도 마침 진보적인 성향이셔서 역사교과서국정화에 반대의견을 표명해 주셨다.
- 장신대 신대원 학우회의 촌철살인 현수막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다.


실로 예장통합교단의 면류관과 같은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예장통합의 목회자들, 특히 중견교회 담임목사 다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쪽일 것이다. 이 추정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긴 하지만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 8:2나 7:3,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6.5:3.5 정도를 넘을 수 없을 듯.) 따라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 신약학)이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의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비판한 것은 예장통합교단 정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철홍 교수님의 비판글은 좀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가볍게 매도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 김철홍 교수님과 그와 의견을 같이 대변하는 예장통합의 목사님들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조금 뒷북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일개 개인블로거인만큼 부디 양해들 하시길 바란다.)


1. 친일반공주의 미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 혹은 친일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인가? 대한민국의 국시는 민주주의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친일파와 그 후손 정치가와 언론, 재벌들에게 있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2. 친일반공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인가? 친일반공주의를 세뇌할 목적의 교육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다양성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비민주주의적 발상인가? 오히려 친일파 후예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모든 다양한 견해와 관점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친일반공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의 이념적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 아닌가?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단 말인가?
   

3. 식민사관 비판이 종북인가? 식민사관 비판과 극복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사학계가 힘들여 이룩한 성과였다.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거부하면 종북빨갱이가 되었단 말인가?


4. 역사가 살아있는 권력의 힘으로 바뀔 수 있나? 역사라는 공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공론의 장에서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부역하는 어용역사학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또, 그 어용역사학에서 기독교, 아니 개신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영광된 측면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한국개신교에 영광이 될 수 있을까?
   

5. 전국민을 획일적인 역사관을 주입시키면 대한민국이 복음으로 통일되나? 권력자의 위신을 현양하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반포하던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해야 하는 무지몽매한 시대도 지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의 서로 다른 세계과정 이해가 만나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이다. 획일적인 역사관이 남북통일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공론을 통해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이 서로 통합적인 소통을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대승적 통합의 역사관이야말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끌 자격과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 물리적 통일은 반드시 정신적 통합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인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을 보장함으로써만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한반도가 복음으로 통일되기를 기도하여 왔다. 복음의 정신은 주술적 부적처럼 오용되는 십자가상이나 모종의 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충만한 소통과 상호순환의 역사 가운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계시되었다.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역사라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에서 주역이 되어야 마땅한 전국민들을 상대로 역사적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통일로 이르게 할 복음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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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9. 17:08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에 부쳐

헌재 어르신들이


가짜댓통년이 부정선거로 정권을 찬탈한 지 두 돌을 맞이하야


기념 선물로 가짜댓통년에게 눈엣가시였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진상하시었다.



거짓증거를 조작하고 여론을 선동한 인민재판질이라니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의 풍경이라니



허허... 좀비랜드가 따로 없구나.



앞이 내다뵈질 않는 칠흙 같은 어둠이 깔린다.


후손과 역사 앞에 진심 부끄럽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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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3. 03:27

총리후보지명자의 역사인식, 그리고 한국교회

전 중앙일보 주필 문창극씨가 총리후보로 지명됐는데, 이분이 용산 온누리교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나타난 역사인식이 비판 받고 있다.


1. 먼저 KBS가 길환영 사장 퇴진을 이끌어 낸 뒤 정권의 나팔수 노릇하는 수치스런 행태에서 탈피하는 몸부림을 보여주어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그러나 조만간 MBC를 망가뜨린 저들이 길 전사장보다 일곱 배는 악한 어용바지사장을 앉힌 뒤 KBS의 인적 구성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이런 식으로 전횡을 일삼으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갈수록 칠흙 같이 캄캄한 터널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2. 문창극, 혹은 문 장로의 역사인식은 한 마디로 일제 관학자들이 만들어낸 식민사관을 빼다박았다. 그런데도 문씨가 교회장로라는 이유로 두둔해 주는 한국교회연합의 처신은 개탄스럽다. 한 마디로 뭐가 문제인지조차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관이 무엇인가?


- 타율성론: 한반도 역사는 중국대륙과 일본의 역사적 부침에 따라 영향받아온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웃나라의 영향 없는 역사도 있나? 타율성론에 따르면 명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도 망했어야 한다.

- 정체성론: 한반도 역사는 자생적 자본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체된 역사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조선 말기에 벌열정치, 혹은 세도정치에 의해 사회발전이 지체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조선 후기 사회는 실학과 상공업 발전을 통해 자생적 자본주의의 맹아가 발전되어 있었다.

- 민족성론: 조선인의 민족성이 태생적으로 의타적이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역사에 희망이란 없다는 것이다. 성격이란 변화되기 마련인데, 사회적 성격과 분위기가 고정불변하는 실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가?

- 지정학적 결정론: 한반도 역사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반도역사이기 때문에 강대국의 부속국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이 역시 궤변에 불과하다. 로마도 주변에 강대국들이 있는 반도역사지만 강대국의 부속국 운운할 수 없다. 지정학적 요인은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역사의 운명과 향배를 결정짓지 못한다.


한국사학계가 이 문제를 두고 해방 이후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현재는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둔 상태다. 즉, 이러한 식민사관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거의 두 세대 전의 문제이고, 적어도 한 세대 전에 총론적으로 비판적으로 극복되었다.[각주:1]


그런데 문씨가 조선왕조 500년이 게으름의 악습을 이어 왔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인식의 시계를 두 세대 전으로 돌린 황당무계한 처사가 아닌가?


게다가 윤치호 같은 친일변절자의 편향된 시각을 통해서 그런 판단을 함으로써 전혀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촉발시키고 있다. 우리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황실보존노력을 일방적으로 폄하했던 윤치호나 조선망국의 원인을 기득권의 전횡이 아니라 당쟁으로 지목했던 김활란 같은 친일변절자의 편향된 시각을 수용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이 일제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지난 두 세대에 걸쳐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했고, 이에 관해 21세기에 새삼스레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은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씨 자신이 이들의 부적절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되풀이함으로써 퇴행적인 논란을 부추겼다면 한 나라의 총리라는 공적 직무를 수행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뜻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3. 문씨는 이밖에도 이승만에 대한 찬양, 미국 원조와 한국전쟁, 일제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등의 발언과 반공주의적 암시를 함으로써 비판을 자초했다. 친일파적 역사인식의 바탕에 반공주의의 층위까지 얹었다. 딱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아닌가? 박근혜정부가 문씨를 낙점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뉴라이트에서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이 그렇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국부"인가? 이승만이 젊은 시절에 썼다는 글이야 개화기 젊은 지식인들이라면 능히 해 볼 법한 생각이지, 딱히 이승만이 탁월해서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후 나이 들고 나서 어떤 행보를 보여주었느냐인데, 친일파를 중용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탄압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 과연 출세지향적인 행보 끝에 부패로 자멸한 그의 행보가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불행한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친일파적 역사인식, 그리고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잘 살게 됐으니 됐지 않느냐고?


4.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높이 평가 받는 군주들은 단지 나라를 잘 살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그런 기준이라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나 아합 같은 자들이 칭송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가장 사악한 군주였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종교예식을 열심히 치렀다는 이유도 높이 평가 받는 이유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어디 종교예식이 부족해서 망국의 비극이 찾아왔는가?


따라서 단지 기독교신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이 칭송되어야 할 까닭은 되지 못한다. 박정희 때 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를 - 더욱이 반인반신 운운하기까지 하며 - 칭송해야 할 까닭도 되지 못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비그리스도인들보다도 그리스도인들, 보수성향의 개신교인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로 차단하고 억누르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당신들의 하나님은 맘몬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가?


5. 한국교회가 몰역사적이고 친기득권적인 신앙양태를 통해 성장해 왔다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대형교회에서 교역자들을 청빙할 때 장로들이 운동권 시위경력을 물어본다든지, 이런저런 질문으로 사상검증을 하려 든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강인철이 성공적으로 해명해 주었다시피, 이들의 신앙의 기초가 반공근본주의이며, 반공근본주의는 친일파로 변절한 한국초대교회 신앙유산의 업데이트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성장제일주의라는 정신적 층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신앙양태는 친일파에서 반공주의자로, 산업화의 기수로 성공적으로 변신해 간 "꺼삐딴 리"(전광용)의 세속적 처세술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한국교회는 친일파로 변절한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초대교회의 신앙유산의 토대 위에 반공주의라는 기둥과 성장제일주의라는 서까래로 이루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6. 문씨가 장로로서 보여준 역사인식의 퇴행성은 참으로 불행하고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문씨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결국 한국교회의 책임이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책임이다. 교회의 올바른 역사참여, 공평과 정의라는 성경적 역사관에 대해 제대로 들려주지 못했고, 그 자신들 상당수는 아예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회중들이 역사서와 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공평과 정의, 역사참여 같은 얘기를 들으면 색깔론부터 떠올리고, 친일파와 반공주의의 "적폐"를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편향"이라는 뒤틀린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자신들이 이미 친일반공주의적 기득권자들을 심히 편들어 주고 있다는 현실은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한 대형교회에서 사회명사의 퇴행적 역사인식을 특강 혹은 강연의 이름으로 교회회중에게 전파하도록 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연합이라는 공교회적 위상의 기관이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장로님을 두둔하기까지 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인식의 대형"참극"이 아닐 수 없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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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밖에도 식민사관의 주장들은 여러 가지가 더 있으나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 식민사관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에 관하여, 이기백 엮음, 한국사시민강좌 제1집, 1987을 참조하라. 이기백학파를 포함한 한국사학계에 식민사관의 그늘이 여전히 드러워있다는 비판이 영광된 상고사의 복원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상고사 문제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와 맞물려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이의제기는 앞으로 좀 더 경청해 볼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1) 이러한 일부 이의제기가 최소한 기존 국사학계가 이룩한 성과를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총론를 뒤집을 수 없는 각론적 사항이라고 본다. (2) 아울러, 이른바 영광된 상고사의 복원을 운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주장되는 환단고기와 같은 책의 친일파 기원론 같은 문제는 조심스럽게 분명히 규명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러한 의혹이 참이라면 식민사관과 영광된 상고사 복원 사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겠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14일 덧붙임) [본문으로]
  2. 한국교회의 한반도 역사인식이 식민사관의 영향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함석헌이 그의 나이 30대 초반 때 쓴 작품인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식민사관의 영향을 극복할 수 없었던 사실도 상당부분 그 까닭이 되고 있다고 본다. 물론 1930년대의 함석헌 자신의 손에는 식민사관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만한 역사적 도구가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온전히 함석헌의 과오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우파논객 복거일이 함석헌의 사관을 들먹이면서 문씨의 식민사관을 두둔하는 것은 빈곤한 문자주의적 독해에 불과하다. (근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문자주의도 막상막하이긴 하다!) 문씨의 역사인식 파동은 어쩌면 그 시대 그리스도교 지식인에게 익숙했을 함석헌을 문자적으로 되풀이한데서 빚어진 딱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 독자들은 이보다는 함석헌의 최선의 의도를 좀 더 입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상대화하여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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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3. 08:47

설국열차 세계일주 하듯

영화 『설국열차』는 『괴물』을 제작했던 감독의 작품답게 좁게는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넓게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우화로 읽혔다.


기차가 1년마다 세계를 일주한다는 설정은 내러티브 안에서 몇 가지 구체적인 뜻으로 드러난다. 


외부세계로부터의 위기는 기득권자들과 피억압계층 사이의 모든 갈등을 정지상태로 만들 수 있다.

- 외부세계로의 이탈실패 사례는 현 체재를 공고하게 하는 이념적 교육자료가 된다.

등등.


결국 이야기속 세계의 갈등은 기존세계의 '냉전적'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해소된다.


이 갈등해소과정에서 두 분의 한국배우가 영화의 메시아적 중심에 위치한다. 요나라는 딸의 이름, 보안책임자 부녀가 냉동창고 같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설정은 성경에서 끌어온 내러티브적 장치로서, 이들 부녀의 캐릭터와 메시아적 역할을 암시한다. 이들은 기존세계와 자신들의 운명에서 도피해 있는 것처럼 같았지만, 결국 설국열차 안의 다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새로운 미래의 도래를 예고하고, 앞당긴다.


보안책임자 부녀가 기존세계의 틀을 깨뜨릴 수 있었던 계기는 결국 기존세계의 틀 안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외부세계 내지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요즘 한반도의 현실이 마치 설국열차 세계일주 하듯 답답하다. 대체 60년대로 돌아간 것 같은 퇴행적인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설국열차" 자체로 귀결된다.


어떻게 하면 타개할 수 있을까? 영화가 현실에 대해 던져주는 메시지는 기존 틀에 갇혀 있어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 기존 틀을 과감하게 깨기 위해 외부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쉽지 않다. 영화가 알레고리적으로 그려준 그대로, 자기들이 '권리'로서 누려온 것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과 시민으로서 마땅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 맞서기 때문이고, 그 적대적 공존관계가 시스템 자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균형"은 그 나름 상당히 안정적으로 작동해 온 폐쇄적인 생활환경이 되어왔으며, 이것이 우리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한계를 규정짓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 틀을 과감하게 깨는 용기와 과단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탁상공론의 단계에 머물러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 기존세계의 틀에 순응하고 종속되어 기득권자들을 대변하는 이념의 대변자

- 기존세계의 틀에 저항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잘라내어주기까지 하는 약자들의 대변자

- 외부세계의 변화를 주목하고 알리는 예언자


이 세 가지 가능성은 영화 속에서는 서로 극명하게 갈리는 세 부류의 인물들로 나타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결국 느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는 유형들이다.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은 세 가지 가능성 모두에 걸쳐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교회는 어느 가능성을 더 많이 선택해 왔는가? 

반공이데올로기와 성장신화로 대표되는 기득권적 이념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데 만족해 온 것은 아닌가?


부디, 앞으로는 한국교회가 요나의 기적 외엔 보여줄 게 없다고 하셨던 그분의 뒤를 따르게 되기를! 


칼 바르트가 갈파했던 대로,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나와야 하겠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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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돌짝 2013.10.15 15:1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ㅎㅎㅎ 속이 시원하군요

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
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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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16. 18:38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반도


1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연주 내한공연이 있었다. 특히 임진각에서의 합창교향곡 연주는 베를린장벽붕괴 때 레너드 번스타인이 통일된 독일과 유럽에서 모여든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오케스트라와 함께 감동적인 합창교향곡을 연주했던 벅찬 광경이 한반도에도 펼쳐질 것만 같은 예감을 들게 해주는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바렌보임은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가는 음악가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피아노실력으로 베를린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의 총애를 받았던 신동이었고,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하여 현재까지 피아노와 지휘 양 분야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원로급 현역거장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영국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했다가 뒤 프레가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난치병에 걸리자 그와 갈라섰다는 이유로 국내에선 '건방지고 재수없는 놈' 정도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뒤 프레 자신도 질병의 불운과는 별개로 지나친 자유분방함으로 말미암아 결혼생활을 망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바렌보임에 대한 비난은 좀 일방적인 것 같다.

게다가 바렌보임의 음악은 이런 가십거리에 묻힐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바로크에서 현대, 클래식과 재즈, 탱고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광범위한 레퍼토리, 우아하면서도 귀엽기까지 한 프레이징과 선굵고 저돌적인 박력의 조화에서 번뜩이곤 하는 천재성 같은 것은 그의 음악의 굉장한 강점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와 협주곡, 그리고 바그너 오페라 전곡사이클을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들보다 즐겨 듣고 있다. 재즈와 탱고도 그의 연주로 처음으로 귀담아 들어보았다. 

특히 유대계인 바렌보임이 나치에 의해 악용되었던 바그너 오페라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공연에 바그너를 포함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을 겪은 바 있다. 그처럼 자기 동족의 선입견과 금기에 맞서는 행보를 걸어오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해서 나름 바렌보임의 팬인데 아쉽게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 공연에도 참석할 여유가 없었고, 티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임진각 실황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언론과 클래식동호회에 올라오는 평을 보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들이 꽤 나온다. 클래식애호가들 입장에선 회당 15만원이라는 나름 비싼 돈 내고 들은 연주가 기대에 못미쳤다는 얘긴데, 솔직히 바렌보임이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같은 일류 오케스트라와 공연했다면 티켓가격은 래틀과 베를린필의 회당 약 50만원이라는 최고수준에 버금갔을 것이다. 따라서 바렌보임과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유대 - 아랍의 음악적 화해 프로젝트가 베토벤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하는 값어치, 그리고 그 위험부담까지가 티켓값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언론은 늘 그렇듯이 앙상블이 거칠었다거나 2번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안 좋다고 지휘를 관뒀다는 식의 자극적인 부분을 부풀려 바렌보임을 거만하고 재수없는 인간으로 희화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렌보임에 비난이 집중되게 하고, 바렌보임이 우리의 부끄러운 분단상황에 던지고 싶어하는 남북화해의 메시지는 지나쳐 버리는 우를 범한다.

어쨌든 연주가 매끄럽고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날카롭고 섬세한 귀를 지닌 바렌보임 자신에게 더욱 고역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그가 베토벤의 교향곡 2번 1악장을 연주하다가 에어컨이 시원치 않다면서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고 할까. 다시 무대로 돌아온 바렌보임이 1악장부터 다시 연주한 것은 에어컨이 시원치 않았다기 보다 오케스트라의 빈약한 연주에 마에스트로 자신이 열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보여준다. 자기 혼자 들어간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대목 역시 마에스트로가 그저 냉방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당연히 오케스트라에게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거장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 오케스트라의 능력은 놀랄만큼 증폭되기 마련이다. 연주회평을 읽어 보면 바렌보임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기능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답게 웅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충분히 감동적으로 즐길 만한 연주를 해주었다는 평을 많이 볼 수 있다. 어색하고 어설프나마 화합과 화해와 조화를 위한 음악적 몸부림이 오케스트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게다.

2

갈라지고 찢어진 한반도의 현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빗대자면, 솔직히 한반도라는 오케스트라가 서동시집오케스트라보다 과연 더 잘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한반도에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사회주체와 세력들을 중재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바렌보임과 같은 지도자가 잘 눈에 띄지 않으며, 남과 북은 고사하고 남과 남 안에서조차 기득권자들의 희생양만들기 신화에 기댄 자기이득의 극대화와 이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안철수의 지적대로 이대로 가면 우리 사회는 공멸이다.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된다. 즉, 어색하고 어설프더라도 화합과 화해를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화해와 화합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때, 그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은폐하고 싶다는 자기 바람을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처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군부독재의 후예들이 화해와 화합을 즐겨 말하면서 마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큰 잘못인 것인양 굴 때, 그것은 폭력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가해자가 화해와 화합을 말하기 전에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자 앞에서 뻔뻔하게 자랑하면서 심지어 자기 같이 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피해자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황당무개한 상황이다.

바렌보임은 가해자가 어떻게 화해와 화합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그 가장 단순한 얼개를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날 이스라엘은 더이상 나치에 의해 600만이 학살된 연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유대계가 장악한 세계권력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와 아랍세계 일반)을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강력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 오로지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피해의식 때문에 더욱 비열하고 잔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렌보임은 유대계 음악가로서,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만일 바렌보임이 아랍인을 배제하는 유대선민주의적 배제의 논리와 태도에 집착했다면, 유대계 음악가로서 세상으로부터 자기 민족이 핍박받아왔고 아랍인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음악적 화해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자신들이 한국전쟁의 억울한 피해자라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가해자인 '빨갱이'들에 대한 증오에 의한 정교하고도 강력한 배제와 타도의 논리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런 배제와 타도의 논리는 자신들의 보수기득권을 무제한적으로 확대증진하는데 남용되어 왔다. 이들은 무엇이든지 자신들과 견해와 의견이 다르면 '빨갱이'로 매도하며, 엄정한 사실관계를 흐리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보수기득권층은 악랄하고 잔인한 가해자의 면모가 있다. 그들은 조선시대 벌열정치로 나라를 기울게 한 것도 모자라서 외세에 빌붙어 공평과 정의를 굽게 한 친일파의 후예로서 서로 여러 겹의 혼맥과 이해관계의 사슬로 얽혀 우리 사회의 돈과 권력을 거머쥐고 있으며, 심지어 사실관계를 바꿈으로써 명예까지 쥐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득세한 우리 사회의 배제와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에서 우리 사회 보수기득권층의 처지는 바렌보임의 태생적 배경인 이스라엘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무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보수기득권자들와 그 추종자들은 바렌보임이 보여주는 화해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들의 배제의 논리, 또는 울타리치기와 사다리걷어차기 전략을 포기하고 사회적 이익과 권리를 우리 사회 모두가 최대한 더불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다양성의 보장을 통해 창조적 잠재력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3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구사하는 배제의 논리가 자기 정체성과 자기정당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비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보수기득권을 대변하는 종교가 된 한국개신교에 강한 아쉬움을 느낀다. 한국개신교는 보수기득권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일조해왔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성향이 워낙 강한 한국개신교는 자신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과 다르면 이단, 자유주의, 프리메이슨 따위의 사탄의 졸개나 다름없는 존재로 적개심을 품도록 교인들을 세뇌시키며, 새롭고도 넓고 깊은 이해와 공감을 위한 공간적 여지를 내면에 남겨두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정통'으로 규정한 협소한 입장의 그리스도교는 강인철이 보여주었다시피 반공주의와 드러나게든 드러나지 않게든 연관되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세뇌논리에 알게 모르게 가장 잘 세뇌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이런 정신성은 보수기득권층의 배제의 논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

안 그래도 진정한 화해와 화합은 쉽지 않다. 하물며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교가 화해가 아닌 배제가 정통이라도 되는 것인양 처신한다면? 여백의 미학이 없는 그리스도교, '비움의 멋'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실로 사람들과 한반도에 있어서 비참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수기득권층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구축해 온 배제의 논리에 따른 자기정체성을 비우고 자신들이 배제해온 서민들과 대화와 소통을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이루는 지지계층에게 인기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해야 할 공평과 정의의 문제다. 

그러나 특별히 그 배제의 논리를 제공해 온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한국개신교는 그와 같은 비복음적이고 비성서적인 배제와 증오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중지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두 팔을 벌려 인류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비움의 미학을 회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수기득권층에게 자기정체성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화해의 촉매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한국개신교야말로 지금 바렌보임처럼 화해와 화합의 음악을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할 당사자다. 우리 한국개신교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임을 감당할 때, 새로운 통일의 찬가가 이 한반도에도 울려 퍼질 날이 분명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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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3. 04:02

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한국전쟁 이후 한국개신교의 양적 팽창은 반공주의와 맞물려 있다.(*1)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한국개신교는 분단 이전에 북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공산정권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북한공산당에 대해 누구보다도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반공주의자였다.  이들이 남한의 개신교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이 원형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전후복구과정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남한사회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보완해줄 반공주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것이 바로 강력한 반공주의로 소문난 개신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개신교에 여러가지 강력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 군종목사제도: 한국개신교의 주도적 건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군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미국군종제도보다 불과 10년 늦게 군종목사제도가 설치됐다. 개신교의 독점적 지위는 군사독재말기인 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유지됐다.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는 글자 그대로 배가하게 되었고, 불교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개신교는 성장에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대형광장/체육관집회: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한 전설적인 여의도광장집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형집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재정적 행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왜 개신교의 대형집회에 대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을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진보기독교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자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국제여론을 희석시키고 진보기독교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수기독교는 반공주의의 최전선과도 같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인식이었다. 보수기독교를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신교, 구체적으로 보수계통 개신교는 독재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대형광장집회, 80년대 들어서는 대형체육관집회를 통해 막강한 세과시를 통한 자신감과 대규모 결신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란 급성장의 그늘로서 성장주의, 물량주의, 교회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는 독재정권이 육성한 반공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양적 규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탄의 무신론사상인 공산주의"를 대적하려면 최소한 남한인구의 일정수준 이상이 '복음화'해야 하고, 남한사회 전체가 복음화할 때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민족복음화'론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명분을 주었다.

교회분열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근본주의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역색과 신학적 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다름'이 곧바로 '틀림'으로 못박힐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다르면 곧 자유주의고 이단이고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에 잠재되어 있었던 교회분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시비에 명분 노릇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시대는 한국개신교에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가 각인되게끔 했고, 내재되어 있던 근본주의 성향이 활짝 꽃피우도록 했다.

공산주의권이 패망한 지금 반공주의는 사실상 실체를 잃어 버린 철지난 시대정신이다. 반공주의 자체를 악마화할 까닭은 없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당시에는 반공주의였다. 개신교는 반공주의라는 시대의 물결을 가장 잘 탈 수 있었던 사회주체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반공주의 적응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반공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억압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사회주체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소수의 진보진영 기독교를 제외하면 인식 정도가 가장 뒤쳐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텐데, 아직도 철지난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성장주의, 물량주의를 선으로 여기는 반성경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유산은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이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깨어나라!


[덧붙임] 
(*1) 이 글의 분석은 대부분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에 의존한다. 강인철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모두 논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난다.
딱 한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이 글에서는 한기총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라 - KNCC에서 1988년 '반공주의를 참회하는 선언문을 낸 데 대한 반발로 - 성립되었다는 강인철(과 아마도 많은 다른 분들)의 주장을 옮기지 않았다. 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반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KNCC의 선언문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조성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상깊게 가시화했던 세계적 화해무드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기총의 설립은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통일 이후 북한복음화를 염두에 두고자 한 보수교계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지금 보면 때이른 부푼 꿈이긴 했지만 북한에 단일한 개신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제안이 나왔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있다. 이점에 대해 해당분야 연구자들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간단하고 부담없는 메모와 같은 이 블로그에서 이를 구구하게 논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강인철은 적어도 책에 나타난 기술로만 보면 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총의 현재 모습이 대단히 문제적인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한기총을 애써 두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문에 한기총과 이와 관련된 보수교계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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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7. 03:19

"나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서방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많이 쓰는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동방과 서방교회가 공히 권위를 인정하는 진정한 범교회적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μία, Ἁγία, Καθολικὴ καὶ Ἀποστολικὴ Ἐκκλησία)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공교회나 공번된 교회나 모두 보편교회, 일반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교회 조항이 동방교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들어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조항은 '로마가톨릭교회'라는 특정 교회전통이나 조직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회 조항이 신경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일반교회를 부정하고 자기들만이 아무개 사도에게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특별교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후스토 곤잘레스) 이들이 말하는 비밀하고 특별한 계시라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와 다른 희한하고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따라서 공교회는 출처가 의심스러운 비밀하고 특별한 특정사도의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출처와 유래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그리스도 증언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한 조항씩 작성했다는 유래전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신경사본들을 연대별로 견줘 보면 하나의 전설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신앙전승 같은 것은 없다. 사도들의 가르침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정경성 내지 계시성 앞에 무릎꿇는 공교회의 고백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성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을 다양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한 신앙전통이 상당한 긴장 속에서 공존했음을 증언한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와 바울,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신학은 서로 표현방식과 삶의 자리, 중심되는 신학이 달랐다. 이 다름은 평화로운 공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울은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었던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유대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사도들은 자신을 잣대로 삼아 상대방의 다름을 두고 틀렸다고 쳐내지 않고 오히려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뤘다. 그 화합과 일치의 구심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다. 공교회의 정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관용의 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천년을 이어온 서방교회가 쪼개지는 거대한 격변기를 살았던 종교개혁자 쟝 칼뱅 역시 교회의 공교회성을 그의 삶을 통해 힘차게 고백한 바 있다. 

- 그는 당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가르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성찬론에서 그의 선배 루터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써냈다. 
- 그는 루터의 후계자 멜랑히톤과는 뜻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 그는 자신들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중이었던 트렌트공의회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움직임에 일어난 데 예의주시하면서 공의회 교부들의 용기와 믿음에 찬사를 보냈다. 
- 건강이 좋지 않았던 칼뱅이 평생 초인적으로 해냈던 우호적이고 심도깊은 서신왕래는 다른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다른 개혁교회만이 아니라 루터교회와 성공회, 가톨릭교회를 아우렀다.

공교회성을 힘써 지키기 위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부림은 로마서주석을 동료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헌정하면서 쓴 헌사에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우선 우리를 계속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칼뱅의 행적에는 시대적 제약과 한계로 말미암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유럽세계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혔던 세르베투스의 화형이나 제네바 시의회의 지나치게 가혹한 신정정치는 비록 칼뱅이 얼마만큼 통제했던 상황인지 의문시할 수 있더라도(T H L Parker) 가장 높은 권위를 부여받았던 제네바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역사적 허물을 면제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뱅의 과오 모두를 애써 정당화할 까닭도 없지만, 그 때문에 칼뱅이 온 몸을 바쳐 추구했던 공교회성의 광휘를 이 그늘을 핑계삼아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처사일 것이다.

칼뱅에 신앙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한국인 후예들은 과연 칼뱅이 공교회성을 위해 애썼던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 굳이 칼뱅이 아니더라도, 과연 성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고백했던 고대교회가 그들의 전 실존으로 이루어 갔던 공교회성의 과제를 얼마나 성취해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칼뱅이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아 극복하지 못했던 폭력성과 배타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사도적 복음을 뛰어넘는 자기들만의 비밀하고 뛰어난 지식을 주장했던 영지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발자취를 따라 내가 속한 교회와 신학전통, 또는 내가 취한 신학적 견해를 성경과 동급에 놓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이비이단문제에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사이비이단은 개별적인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 아니라, 거의 예외없이 공교회성을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사도들의 본을 따라 여기에 대해 예리하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금권과 사사로운 이해관계 때문에 엄정해야 할 판결을 굽게 하고 분별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현실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되돌아 보게 된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공교회성의 부정으로서의 사이비이단이 성행하는 현상은 공교회성이 훼손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 격려하고 더불어 배우려고 애쓰는 관용과 연합의 정신이 어느 때부턴가 실종됐다. 대신, 한국교회의 공적 영역은 자기와 생각과 믿음의 모습과 신앙전통이 다른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을 깎아내리는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예리한 분별력과 영안'을 지녔다는 명예나 보수, 정통, 원조 따위의 선명성을 획득하려는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붓끝에서는 빌리 그레이엄,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릭 워렌 같은 자기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제 동료들마저 '저주받은 프리메이슨'이고, C S 루이스는 뉴에이지적 보편구원론자다. 칼 바르트나 틸리히, 본회퍼, 몰트만, 판넨베르크 같은 자기 전통이나 신념 밖에 있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엉뚱한 인용을 증거로 들이대면서 '자유주의의 괴수', '거짓교사'라고 즐겨 깎아내린다.

같은 개신교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정도니, 고대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영성을 '비성경적 종교혼합주의'라고 잘라 매도하고, 가톨릭과 정교회를 용감무쌍하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이단으로 단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언사를 경쟁적으로 내뱉는 분위기이니 한술 더뜨는 사이비이단집단이 흥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사이비이단문제는 결국 근본주의의 문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이게 특정 근본주의 집단이나 특정개인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기가 막힌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단지 소수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관찰된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미국근본주의의 어젠다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부터 반공이데올로기와 수구적 냉전논리에 영합한 정치신학을 거쳐 영지주의적 우월의식까지 빼다 박았다. 예전에는 한국교회의 90%가 근본주의라는 오강남의 비판이 당치도 않았다고 봤었는데, 요즘 한국교회를 바라볼수록 그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본을 따라 신학노선으로서의 근본주의를 대화와 공존의 상대로서 존중할 수 있다. 가령, 나는 모세의 모세오경저작설이나 축자영감설을 믿으려는 그들의 열심과 최선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롭고도 합당한 논증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교회의 다양한 신학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마땅히 자리매김해야 할 근본주의가 스스로 극단적인 경향을 재고해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공교회 전체의 공교회성을 훼손하는 데 대해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극단적 유대주의자나 극단적 바울주의자는 사도들의 비판을 받았다. 근본주의는 그들의 극단성을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근본주의가 애시당초 현대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성립된 반동적, 복고적 패러다임(H Küng)이어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는 신학이 아니라면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뿌리깊은 근본주의를 최소한 재고라도 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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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1. 15:01

권위주의 시대의 도래?

극단적인 경우 대한민국에 어쩌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체주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상황을 보면 여건이 어느 때보다 무르익어 있지 않나 싶어 우려스럽다. 

1. 남북갈등이 심화하여 여론이 한 방향으로 경직되기 쉽다. 
적절히 증오와 분노를 부추겨주면 그 다음은 스스로 동력을 얻어 돌아가게 될 것이다.

2. 현 대통령과 정권이 레임덕을 타개할 계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현 정권은 전 정권에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햇볕정책을 3년간 철저하게 중단하고 부정하면서 대북강경고립정책을 구사해 온 현 정권이 막상 일이 터지자 햇볕정책의 실패로 규정하는 데서 현 정권의 기본마음가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북갈등심화 덕분에 현 정권은 자신과 견해를 같이 하지 않는 비판세력을 북한과 동일시하여 통제하는 전략을 보다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어 악마화함으로써 자기칭의를 도모하기 위해 온라인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권비판세력에 대한 사찰과 검열이 의로운 분노의 이름으로 일상화될 수 있다. 민간인사찰과 대포폰의 존재 따위는 그 나쁜 조짐으로 보인다.

3. 언론방송장악이 사실상 거의 이루어진 상태다. 
언론방송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현재로선 실질적으로 없어 보인다. 정권과의 이해관계호응에 따라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도구역을 자임한다면 기득권층으로선 여론을 순식간에 조종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정권과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 골라서 내보내면서, 이에 동조하지 않는 시민이나 집단은 색깔론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제압할 것이다. 
이미 이것은 한나라당이 어느 정도 해왔고, 당대표가 공식적으로 '사이버전사'를 양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알바들이 내뱉는 몰상식한 극언이 정권의 정책이나 행동에 실제로 반영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정도가 되면 실질적으로 전체주의와 별 다를 것 없는 권위주의 사회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4. 야당과 시민사회가 구심점 없이 지리멸렬해졌다. 
김대중, 노무현 이후 실질적으로 민주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나오지 못했다. 야당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민의를 대변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5. 군검경이 현 정권과 긴밀히 호응하고 있다. 
군은 노무현 시절 제2 롯데월드 설립허가를 안보를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하다가 현 정권 들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검찰은 자신들에게 자율권을 준 노무현 대통령을 주변사람들을 꼬투리잡아 죽였지만, 동영상 증거까지 남아 있는 데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까지 나서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했다. 
경찰은 현 수장부터가 철저히 군사독재시대의 악습이 발상과 처신에 몸에 배어 출세를 거듭했다.
군검경은 현 정권의 이해관계에 적극부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몇 해전 저명한 찬송시인 송명희님이 '표'라는 소설에서 조만간 대한민국에 베리칩을 표로 받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대환란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666표를 두려워하고, 적그리스도가 교회와 세상을 커다란 고통에 빠뜨릴 대환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 휴거되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근본주의 내지 세대주의 종말론 프레임에서 나온 얘기다. 
조금만 찾아 보면 이와 비슷한 얘기들이 꽤 많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데이비드 오워의 전쟁예언을 얘기하는 이들도 이 프레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자는 그들의 최선의 의도는 존중하지만, 세대주의 종말론은 애시당초 성경적으로 합당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송명희 시인이 그리는 것과 같은 시나리오에 딱 한 가지 공감하는 부분은 이대로 가면 전체주의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아직 그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일말의 믿음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한 때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란다.
그러나 만일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이 온다면 체재의 속성상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정당하고 의롭다고 굳게 믿으면서 모든 악행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대목에 대해 얼마나 깨어 있는가? 이 점에서 다시금 마음이 갑갑해진다. 
바르멘신학선언을 작성해 독일교회의 대히틀러투쟁을 고취했던 바르트나 히틀러암살계획에 가담했던 본회퍼를 신학교나 설교에서는 곧잘 들먹이지만, 막상 교회현장에서는 목회자나 대중 모두 워낙 몰역사적인 개인신앙에 절어 있어서 역사참여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반공이데올로기에 열광하면서 기득권의 행태에 철저히 호응하고 있으니 이 모순과 부조리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나님께서 도움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덧붙임]
- 미국의 유니테리언 목사이자 예수 세미나의 펠로우인 데이빗슨 뢰어는 미국에서 종교적 근본주의가 정치적 근본주의에 호응하여 새로운 파시즘을 초래할 것을 내다보며 우려와 비판을 표명한 바 있다. 뢰어의 유니테리언주의나 예수세미나식 역사적 예수 연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정치신학적 문제의식은 동감이다. 한국 상황은 미국과 딱 판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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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7. 01:16

한반도전쟁예언과 한반도의 운명

북한에 원조를 주거나 대화와 협상을 하는 것이 이적행위라고 굳게 믿고, 북한의 붕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생각보다 적지 않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북한을 붕괴시키면 한반도 북부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느냐고 꼭 물어본다.

적어도 지난 몇해동안은 북한붕괴론의 귀결을 분명히 깨닫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었다. 북한이 미워서 붕괴를 외치긴 하는데 막상 그 다음을 생각하니 그곳이 대한민국의 영토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캥겼던 걸게다. 

그런데 현 정권 들어서 차라리 꼴보기 싫은 북한을 중국에 던져주자는 답변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참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 정권은 김대중, 노무현 시대의 남북관계에 대한 공헌을 계승, 발전시키기 보다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이루는 사람들의 뜻대로 송두리째 부정하고 북한을 백안시하는 강경노선을 택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이 10년 동안 차근차근 발전시켜왔던 경제적 영향력과 국제적 주도권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모두 잃어 버렸다. 작금의 연평도 사태는 현 정권의 강경노선이 시작된 때부터, 북한에 대한 주도권을 급속도로 잃어 버리면서부터 이미 어떤 식으로든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대체 어떻게 할 건가? 사실 우리 쪽이 들고 있는 패가 별로 없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유라시아철도건설 모두 물 건너가 버렸고, 남북정상회담은 10년간 일군 성과를 일언지하에 가볍게 부정해 버린 터라 더 말할 것도 없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이제 대한민국은 또다시 주변열강들의 파워게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 북부의 지배권 문제에 있어서도 대한민국의 지분은 거의 주장하기 어렵게 됐다. 


바로 옆의 그림이 미 국방부가 구상한 북한붕괴시 분할시나리오라고 한다. 중국이 그린 지도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혈맹이라는 미국이 그린 지도라는데, 대한민국의 지분이 없고 중국의 지분이 가장 크다. 

대한민국 사회가 증오심과 분노를 차분히 다스리면서 남북문제를 대처해나갔다면 미 국방부든 중국 지도부든 감히 이런 지도를 그리고 있지 못하지 않았을까? 증오심과 분노에 눈이 멀어 북한을 백안시한 결과가 이런 수모와 어두운 전망이다.

특별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묻는다. 북한이 붕괴하기를 피를 토하듯 기도하는 목사 장로 집사 청년들이여, 당신들 제정신인가? 이 지도를 똑똑히 보라! 이것이 당신들이 바라는 지도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보여주신 비전인가? 당신들은 북한땅을 수복하려는 꿈이 없는가? 

언젠가 한반도에 대한 예언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밝혔다시피, 그 예언 자체는 하등 무서울 것이 없다. 진정 무서운 것은 이 땅의 불의와 더러움이다. 이렇게 갈갈이 찢겨져 나간 한반도를 보면서도 자기들의 증오와 분노를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려 드는 사람들의 모질고 독한 완악함이 진정 무섭다. 그 독한 죄성으로 점철된 이 땅의 불의와 부조리가 진정 두렵다.

성경의 예언은 운명의 비밀지도 따위가 아니다.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 니느웨 도성이 이 예언을 듣고 지도자와 백성이 마음을 낮춰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자 니느웨에 대한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으로 그 어느 누가 예언하든 마찬가지다. 그것은 운명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로 초대하는 부름이다. 

이땅의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북한이 붕괴하길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한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인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라! 

대한민국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의 완고함을 두려워하고 돌이키라!

원수 북한이 붕괴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 
하나님은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를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북한에 인권과 자유와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에 대한민국을 견주며 자만하지 말라! 
저들은 한없이 연약하고 가련한 우리의 동포다.

오히려 대한민국에 불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을 애통하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가 메마른 데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나님 앞에 신음하라! 

이땅에서 공평과 정의가 하수처럼 가득 흘러 저 북녘땅까지 적실 때 이 땅에 평화통일이 임할 것이다. 

[덧붙임]
*1.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실제로 미국방부 CSIS의 한반도분과가 이 문제를 토의하는 데 사용한 문서가 올라와 있지만 아쉽게도 문제의 지도는 CSIS에서 아직 찾지 못했다. 
대신 북한붕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최근 글만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이 교묘하게 결정적인 논점과 질문에 대한 대답은 회피하면서 쓰여졌음에도, 이명박정권이 미국방성과 북한붕괴문제에 관해 대화를 진행해왔음을 내비쳤다.("...Bilateral planning has been stepped up with South Korea under the Lee Myung-bak administration.") 
문제의 지도를 CSIS가 작성했다면 현 정권에서도 이를 모를 리가 없고, 심지어 그 지도의 경계선을 긋는데 동참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문제의 지도가 국내언론에 보도됐을 때 대한민국 정부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역사상 모든 대한민국 정부에서 한반도 북부 국토수복은 당연한 권리요 책무였던 걸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다. 
혹은 문제의 지도가 CSIS가 작성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 작성해서 여론의 간을 보는 것이었다면? 참으로 착잡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2. 조금 다른 각도에서 미국과 한국정부가 지난 3년간 북한붕괴를 논의해왔다는 폭로가 가디언지에서 나왔다. 국내보도를 보면 여기엔 중국에 경제적 편의를 제공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되어 있다. 북한붕괴든 북한분할이든 중국에 뭔가를 팔아넘기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 황당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왜 우리 영토를 당사자끼리 얘기하지 못하고 주변 열강을 끌어들여야 한단 말인가. 박선원 미국 브루킹즈연구소 초빙연구원에 따르면, 문제의 '경제적 편의'란 영토를 떼어주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한심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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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4. 15:02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한반도의 운명

연평도에서 북한군이 연평도에서 훈련중이던 우리 군과 주민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목숨을 잃은 서정우 병장과 문광욱 이병에게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북한의 도발은 미국과 현정권의 강경일변도의 대북관계노선이라는 환경 속에서 김정일-김정은 후계구도의 안정화라는 동기에서 나온 계산된 행동이었다. 아울러 G20정상회의 이후 터져나오리라 예상되던 정부여당의 악재들이 이 도발을 통해 한동안 묻힐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남북한 집권층의 상호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사전교감이 있었든 없었든, 결과적으로 이번 연평도 사건을 통해 북한 집권층은 내부 반발을 잠재우면서 김정은 후계구도를 공고화하고, 남한 집권층 역시 대중의 증오심과 분노를 북한으로 돌림으로써 지지층을 재결집시켜 집권 후반기의 동력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1)

한반도의 집권세력들이 희생양을 만들어 기득권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이 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관행은 슬프게도 벌써 두 세대를 이어온 오랜 버릇이다. 남한은 북한에게, 북한은 남한에게 서로 희생양노릇을 떠넘기고, 남북한은 각기 내부적으로 또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긴장을 조성하고 거슬리는 의견을 묵살하고 '정의와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함으로써 자기 체재를 유지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이런 걸 어떻게 정의라고 하겠는가. 이런 걸 두고 역사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희생양만들기로는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 수 없다.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들이 흔하게 겪는 희생양의 하나로 그칠 뿐이다. 희생양만들기는 생명의 문화가 아니라 의분으로 자기 살의를 정당화하는(Erich Fromm) 죽음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희생양만들기는 자멸의 역사를 만들 뿐이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의 갈등을 기화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외교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현재로선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므로 이런 상황이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북한이 '희생양만들기놀이'를 하다가 어느 시점엔가 장난 아닌 상황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남북한은 희생양만들기놀음을 그쳐야 한다. 희생양만들기로는 언제까지나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와 증오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원한이 사회를 흔들고 좀먹는다.

특히 남한사회의 책임이 크다. 북한은 경제발전과 민주화에서 갈 길이 아직도 아득히 멀다. 남한은 북한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입장으로서 북한과 같은 수준일 수 없다. 북한을 앞서 이끌어 나갈만한 포용력과 저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희생양만들기가 아니라 진정한 공평과 정의가 흘러넘치는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집권층은 사건으로 사건을 덮거나, 거짓정보를 흘림으로써 여론을 선동하여 정의를 흐리는 악행을 그쳐야 한다. 법조계는 돈이나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결을 굽게 하여 약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힘있는 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더러운 관행을 버려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공평과 정의로 처리된다는 믿음이 국민 사이에 가득해야 한다. 언론선전과 이데올로기 세뇌를 통한 허위의식으로 만들어진 거짓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함께 공평과 정의라는 대의로 진정 돌이킴으로써 이룩한 상호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상호신뢰는 공평과 정의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희생양만들기가 아니라 공평과 정의가 이 땅의 역사를 이끌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가 여기서 감당해야만 할 몫이 있다. 한국교회는 남한사회의 희생양만들기관행에 참여하기를 그쳐야 한다. 사람들에게 부질없는 허위의식 주입하기를 그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이 아니라 반공이데올로기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인 것처럼 거들먹거릴 때가 많았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거리낌없이 내뱉으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굳게 믿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이런 목사들을 환영하며 적극 따라가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일을 그쳐야 한다. 희생양만들기가 이 땅에서 발붙일 곳이 없도록 우리 사회의 방향을 돌이킬 때 평화통일이라는 한반도의 운명도 성취될 것이다.

[덧붙임]
*1.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 장기적 비전을 잃어 버린 채 내부결속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상태로 주민들을 내몰아야 하는 북한정권의 붕괴직전상태를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체재가 예전보다 덜 견고해졌다는 징후가 보인다는 점에서 이 분석에 일부 동의하지만 북한군부와 중국의 공고한 커넥션의 존재를 간과해선 안 된다. 김정일-김정은 부자가 무너진다고 북한이 곧 붕귀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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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0. 05:55

과연 대통령이 장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대선이 되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장로를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거세다. 지금도 장로대통령을 지켜준다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의 주류개신교회는 이 어려운 시국에 너무나도 잠잠하다.

그러나 기독교인, 또는 장로가 대통령 노릇하는 그 자체를 과연 하나님이 바라실까?

1. 기독교인 혹은 장로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이라는 성경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약 열왕기나 역대기, 혹은 예언서를 읽어 보면,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임금들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힘써 살아낸 다윗과 요시야, 히스기야 같은 몇몇 임금들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 때 예언자의 예언이나 정치적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혹독한 책망과 징계를 겪어야 했다.

아무개 장로, 아무개 권사, 아무개 안수집사 따위의 신분 자체가 그가 지닌 정치적 비전이나 실천에 아무런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2. 기독교인 혹은 장로로서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통령상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남북전쟁 당시 남쪽도 북쪽도, 그들의 지도자들도 모두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치하의 교회도 하나님께 기도했다.

미국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링컨은 참된 기도를 했고 나머지의 기도는 거짓기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당신의 기도, 아무개 장로의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거짓기도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무엇인가. 승승장구 잘 나가기 때문인가. 자신의 기도야말로 참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형교회를 건설하거나 이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된 기도라는 증거가 되는가. 성경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승승장구가 그들의 선의나 공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개 장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예수께서 승인하신 기도는 바리새인의 유창하고 겉보기에 거룩한 기도가 아니라 죄많은 세리의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도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뉘우침과 돌이킴이야말로 성경이 명시적으로 기록한 참된 기도의 증거이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개 장로의 정치적 비전이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은 새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정치판에서 이런저런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면 교회는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 아니다. 그 아무개 장로가 그냥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비전을 품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도해왔느냐, 하나님의 응답에 어떻게 순종해왔느냐를 다른 누구보다도 까다롭고 꼼꼼하게 짚어주어야 한다.

3.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방인을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시기도 하신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수도 없이 제사를 드렸을 유다왕이나 그 후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 고레스를 '기름부음받은 종'으로 세우셨다. 고레스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할 비전과 역량을 지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는 그가 단지 독실한 기독교인이거나, 교회활동에 열심이고, 쓰는 언어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익숙하게 들어왔다는 까닭에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지도자일 수는 없다. 그와 그가 감당할 나라와 겨레가 맞이한 역사적 과제 앞에 어떤 종류의 비전과 역량을 지녔느냐 여부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를 분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과연 이 시금석에 따르면 지금까지 나온 장로대통령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지도자들이었는가? 아니면 기독교라는 좁은 이익집단의 붕당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기득권집단화를 도모해주는 정상배에 지나지 않았는가?

아합왕과 같은 정치지도자라면 그가 기독교인이라도 교회가 예언자적 비판을 해야 마땅하다. 타종교를 믿는, 심지어 기독교에 비판적인 정치지도자라도, 그의 비전이 역사적 과제에 합당한 것이라면 교회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누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소위 진보급진빨갱이자유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청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장로대통령을 뽑아야 하고, 장로대통령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로지 성원과 지지만을 보내야만 한다는 소리가 소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는 평판을 누리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교회는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탑재해야 한다.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아무개 대선후보, 아무개 국회의원후보가 기독교인이고, 교회직분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바알신앙적 행태를 그치고 예언자적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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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3. 17:19

희생양

MBC스페셜의 타블로편을 봤다. 참 저렇게 뛰어난 천재가 집단의 비뚤어진 시기와 증오를 받아내느라 너무 고생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타블로의 말대로 타진요나 상진세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봐도 믿지 않을 듯 싶다. 심지어 이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제기한 의혹의 사실관계조차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냥 아둥바둥 살아온 내 현실은 시궁창인데 타블로라는 캐나다 국적의 뛰어난 젊은이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힘들이지 않고 부와 명성을 누리는 걸로 보이는 게 고깝고 싫고 미운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타블로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제대상으로서의 '외인(外人)'(또는 '人外')일 수밖에 없다. 학력논란은 결국 그들의 불타는 증오심을 둘러대는 그럴싸한 자기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새삼 페노메논이라는 한 20년 전 영화가 생각난다. 미국 한 시골의 사람 좋은 한 젊은 남자가 하늘에서 이상한 빛을 본 뒤 갑자기 천재 초능력자가 된다. 이웃들과 두루 사이 좋았던 이 남자는 하루 아침에 외톨이, 왕따가 되어 버린다. 사실 당시 '파우더' 같은 비슷한 작품도 나왔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걸로 영화 한 편을 만들기엔 진부해지다시피 한 낡은 플롯이다.

이런 진부한 가락이 현실이 되어 반 년 동안이나 우리 사회에 울려퍼지고 있으니 참 답답한 세상이다. 가진 건 사람 밖에 없는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부대끼며 사는 주제에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애꿎은 희생양을 찾아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가 희생양을 만들어 억압하고 처단함으로써 보람과 힘을 느끼는 변태적 상태로 떨어진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1) 거슬러 올라가 보면 친일파세력이 이승만정권 하에서 권력을 거머쥐면서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에 대한 논란을 덮을 요량으로 반공이데올로기에 열을 올렸던 것이 아마 현대한국사회의 희생양만들기 관행의 싹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2) 역시 반공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으로 대중의 증오를 담당시킬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 논란을 덮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들의 후예인 한나라당이 오늘날까지도 이 비루한 짓을 하고 있다.

타블로의 학력논란이 새로운 점은 희생양만들기가 정권을 잡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3)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악플이라는 수단을 통해 집단적으로 희생양을 매겨놓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효순미선이 사건, 미국쇠고기파동 등의 집단적 항의와 저항에 좌절된 뒤로 터져나올 곳을 찾지 못한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가 이런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오고 있다.(*4) 기득권자들로서는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나 연예 영역에서 대중의 에너지가 분출되도록 내버려 두고, 심지어 조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정치적 이슈가 대중의 장에서 공론화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고도 조용하게 억압하는 전략이 한결 쉬울 수 밖에 없다. 대중의 눈이 기득권을 예리하게 감시하고 그 검은 속내를 꿰뚫어 보는 부담을 적당한 이슈를 흘려줌으로써 간단히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은 한국사회의 대중 가운데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이 이런 쓸데없는 논란에 빠져 힘을 뺀다면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과 억압은 한층 쉬워질 수밖에 없다. 타블로현상을 보니 타블로 개인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 겨레의 역사와 앞날에 대한 착잡하고 절박한 느낌에 입맛이 쓰다.(*5)(*6)

[덧붙임]
*1.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시각에서 그의 여러 책에서 사회가 사도마조키즘적 메커니즘에 빠진 병리적 상태에 관해 분석한 바 있다. 르네 지라르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사회의 주체들이 희생양을 만들어 죽이고 이 죄악을 덮는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사회주체간의 살인욕구를 잠재우는 현상을 갈파한 바 있다. 두 분석은 똑같은 실재를 서로 다른 언어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피력한 내 견해는 이들의 분석에 따라 한국사회를 생각해 본 것이다.
*2.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파논란은 주류언론이 집요하게 물타기하려는 이슈이다. 공산주의자 전력도 덮으려는 마당에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박정희는 공산주의 전력이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친일행적이 있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는 궤변에 다름없다.
*3.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조작은 굳이 증거를 더 들이댈 필요조차 없을 만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부한 가락이다. 이게 대중에게 그토록 잘 먹혀들다니 신기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4. 물론 이들의 카페매니저 '왓비컴즈'가 대중을 세뇌하여 그들의 에너지를 조작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트는 이데올로그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MBC스페셜 후편에서 민경배가 지적했다시피 이들의 시스템은 신흥종교의 교주와 신도들의 관계와 몹시도 닮아있다.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뤄본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봐도 적절한 분석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가렛 싱어도 신흥종교의 시스템이 세뇌에 의해 구축된다는 점을 지적했던 바 있다.
*5. 인터넷을 좀 뒤지다 보니 문화평론가 하재근이 나와 비슷한 논지로 레디앙에 쓴 글을 만날 수 있었다. 하재근은 일부 누리꾼들이 겨냥하는 타블로의 '죄목'이 사실은 특권층들의 죄목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번지수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타진요의 주장과 타진요 운영자 왓비컴즈에 대한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놓은 글은 방송 훨씬 이전에 이미 나와있었다.
*6. 원래 나는 타블로와 에픽하이, 대중음악 자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이번에 이 글을 포스팅하고 나서 에픽하이의 노래 중 '희생양'이라는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회비판적 논조의 가사와 곡 분위기가 맘에 든다. 어쩌면 에픽하이의 팬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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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3. 17:11

한상렬 목사의 방북 논란

한상렬 목사의 방북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대한민국이 80년대 군부독재시대로 회귀했다는 느낌이 든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해대더니, 나라가 한 30년은 뒷걸음질쳤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과 만났을 때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씨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국내언론은 이들을 빨갱이로 매도했다. 그게 벌써 언제적 얘긴가.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와서야 이들의 노력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인정받았던 바 있다. 그런데 이젠 이들까지 다시 빨갱이가 될 판인가보다.

한상렬 목사의 경우 새롭게 생각되는 점은 극우세력이 조작된 기도문을 언론에 퍼뜨렸다는 사실이다.

한때 한상렬 목사가 평양 칠골교회에서 했다는 기도문을 조중동에서 들먹거렸다.(관련기사보기) 알다시피 그 기도문은 극우논객 지만원씨의 홈페이지를 드나드는 극우성향 누리꾼이 지어낸 작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극우언론 인사이더월드와 뉴데일리, 올인코리아가 악의적으로 사실로 둔갑시켜 기사로 올렸고, 이것을 조중동이 다시 받아쓰기했다.

기도문이 일개 누리꾼의 어쭙잖은 작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탄로났음에도 뉴데일리는 사과정정기사를 내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올인코리아는 추가로 문제의 기도문을 작문한 누리꾼의 입을 빌어 "한상렬 목사가 빨갱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기사까지 올렸다. 조중동은 한상렬 목사의 명예를 훼손한데 대해 사과를 구하는 정정기사를 올렸던가? 늘 그랬듯이 아니면 말고 식이다.

사실관계는 온데간데 없고 인터넷에는 "종북친북빨갱이는 북에나 가라"는 극우적 악플이 넘쳐난다. 애초 분탕질을 시작한 지만원씨 홈페이지의 극우성향 누리꾼들은 '관심'도 받고 한상렬 목사에 대한 '응징의식'을 일깨웠다며 '전리품'에 흡족해 하고 있다.

이 나라가 어느 때서부터인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죽임으로써 존재를 확인하는 악마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난들 이상하지 않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덧붙임]
1. 예전에 보수교회 목사들이 소위 운동권 목사들에 대해 목사직함만 걸어놓고 종북친북활동을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한상렬 목사 목회활동 중이시다.
종교 본연의 활동은 봉사라며 봉사도 안 하는 주제에 종북친북활동을 한다는 얘기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 '비기독교인'의 글을 읽어보라. 한국교회에 과연 지역사회에서 이만큼 신망을 얻는 목사와 공동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 9월 14,15일 쯤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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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3. 17:10

한반도전쟁예언의 사각지대

최근 데이비드 오워 박사라는 케냐의 예언가가 한국(교회)의 죄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오워 박사의 홍보영상을 보면 티벳과 칠레와 미국서부와 아이티 등의 지진을 예언한 예언가라고 되어 있다. 그런 예언가가 한반도에 전쟁을 예언했다니 평신도들과 비그리스도인들사이에서조차 입소문을 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예언이 나왔다면 그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는지 주의깊게 시험하여 보고, 주께로부터 말미암았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합당한 방향으로 돌이키면 될 일이다.

1.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예언인가?

오워 박사의 불분명한 신학적 배경이나 이현령비현령식 예언행태에 대한 이의제기가 많이 되고 있다. 이 의혹들을 간추리면 이렇다.

1) 오워 박사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초심자'이며,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두 여인과 동거했던 전력이 있다.
2) 오워박사의 부르심이야기에 성경에 낯선 the Ark of the New Covenant of The Lord in God's Throneroom이나 "천국 문 앞에 떠 있는 두 개의 결혼반지"와 같은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온다.
3) 오워 박사의 집회에서 '신사도운동' 계열에서 관찰되는 '쓰러짐' 현상이 나타난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을 처음 퍼뜨린 카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도 신사도운동 계통이고, 특히 이곳에는 92년 종말론파동 때 다미선교회 미국지부를 맡고 있던 장요셉 목사가 참여하고 있다. 오워 박사의 동영상 다수에서 통역으로 나오는 사랑과 진리 교회 벤자민 오 목사도 신사도운동가다. 신사도운동은 이미 교계에서 광범위하게 도입 내지 참여금지 판단이 내려진 기피단체다.

이 의혹들은 어찌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지나친 정죄로 보이기도 한다.

- 두 여인과 동거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케냐 같은 아프리카나라에 일부다처제가 남아있을 수 있다.
- 쓰러짐 현상은 부흥회를 아주 심하게 하다 보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전면에 내세운다는 게 치우치고 위험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때때로 성령은 주류교회에서 추방된 공동체 가운데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

다만, 그의 부르심이야기에서 비성경적인 표현이 나오는 점은 걸린다. 이것은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펄시 콜레의 천국간증 때 비성경적인 표현이 그의 정체가 탄로나는 데 단서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펄시 콜레 역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얘기한 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었고, 천국간증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한낱 사기에 지나지 않았다.(*1)

사실 오워 박사의 예언은 주께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식으로 잘라 말하지 않으면 후련하고 시원하지 않다. 하지만 후련하고 시원한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정확한 답을 찾아가는 쪽이 낫다. 누군가를 사이비이단이라고 판단하는 일은 확고부동한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제기된 의혹들 가운데 위험천만한 대목도 있지만, 확고부동한 증거랄만한 신학적 오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관련자료를 좀더 충분히 수집해서 찬찬히 살펴 본 뒤에야 이 부분을 확실히 할 수 있다. 해서 판단을 유보해 둔다. 일단 정확하다고 확신되는 판단이 서면 이 부분의 서술은 보다 간명해질  것이다.

2. 예언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매김이다.

사실 오워 박사가 말하는 한국교회의 죄 자체는 누구나 공감할 만큼 상식적이고 원론적이다. 번영과 성공의 신학, 음란의 죄 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돌이킬까?

상대적으로 음란의 죄는 돌이킬 방향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번영과 성공의 신학은 어디로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돌이킬 수나 있을지, 문제가 참 간단치 않다.

한국교회의 성공신학은 한 마디로 힘의 숭배다. 번영신학, 성공신학의 죄를 회개하자고 말하는 그 자신들이 힘의 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다. 한국교회가 앙모해온 미국교회 복음주의와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주류는 어김없이 정의를 강탈한 기득권과 결탁하여 안녕을 도모한 야합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득권과 결탁한 나머지 그들의 이데올로기, 특히 반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 6.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한국교회가 북한에 대해 강한 트라우마를 갖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렇더라도 한국교회가 반석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진배 없이 내면화 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기득권를 비판할 수 없다. 오히려 기득권을 비판하면 빨갱이라는 의혹의 따가운 눈길부터 주기 바쁘다. 나아가 기득권의 원의에 적극 봉사하기까지 한다. 현 정권을 지극정성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뉴라이트는 그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자기 반석으로 삼은 한국교회는 기득권에 밀착하여 번영과 성공을 누리느라 예언자적인 비판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 이 땅의 우파 기득권과 하나님의 뜻을 간단히 동일시하고, 소위 좌파를 사탄의 무리, 빨갱이로 즐겨 단죄하며, 북한에 대한 증오와 공포에 노예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런 수구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기득권층은 북한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안보장사를 해왔고, 한국교회는 이 비루한 안보장사에 이용당해 왔다. 그렇기에 불쌍하고 딱한 북한정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기 보다, 저 사악한 북한 정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폭싹 망하기를 피를 토하듯 기도한다. 이렇게 하면 기득권층과 기성세대에게 성공이라는 일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힘을 숭배하는 성공신학을 쉽게 버릴 수 없다.

구약예언자들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강력한 저항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비판은 바로 당대에 벌어지고 있었던 힘의 숭배라는 성공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검은 것을 희다하고, 흰 것을 검다 하며, 저울추를 속이고, 약자의 판결을 굽게 하고, 의인의 의를 거짓으로 강탈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평안이 성직자들의 축복으로 계속될 것으로 믿어 의심지 않는 시대의 불의와 신앙의 태만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구약예언자들은 그들 사회에 가득 퍼져 있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힘을 숭배하는 바알신앙을 우상숭배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 한국땅의 바알신앙은 다름아닌 반공이데올로기다. 반공이데올로기가 교회를 망치고 있다. 한국교회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추구할 힘마저 빼앗아 버리고 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때 이 땅의 교회를 오염시켜온 수많은 이세벨들이 외칠 것이다. "저 빨갱이 사탄의 무리를 잡아 죽여라!"

교회가 반공이데올로기에 안주해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통일은 멀고 전쟁과 폐허는 가까울 것이다.

* 2010년 9월 5,7일경 다른 블로그계정에 썼다가 옮김.

[덧붙임]
1. 일례로, 펄시 콜레가 솔로몬왕에 대해 책과 설교테이프에서 한 말은 서로 상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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