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0. 08:54

검찰이 죽은 노무현을 좇는 까닭

요즘 어떤 분들이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에 못지 않은 내공으로 분탕질 하시는 통에 도무지 이분들이 (진보세력을 와해시켜 영원히 해먹으려는) 새누리당이나 (남한을 자기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국가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북한정권의 X맨이 아닌가 의문을 품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한반도의 공평과 정의의 한 축을 감당해 주어야 할 진보진영이 참 말이 아니다.


이 와중에 故 노무현 대통령과 측근들에 부패혐의를 덧씌우려는 기득권자들의 마녀사냥 혹은 시체장사가 계속 되고 있다. 일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에 '수백억 원의 비자금'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딸이 '13억원의 검은 돈'을 거래했단다. 훗... 이건 뭐 대체.


현 정권의 온갖 구린내 나는 작태를 적당히 터뜨려주면서 적당히 덮어준다는 뻔히 보이는 수작이야 어차피 그럴 거라 치더라도, 대체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걸까? 왜 죽은 사람을 굳이 부관참시 해대는 걸까?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고인이 이 나라의 현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인이 그대로 구차한 목숨을 부지했더라면 그들의 원대로 철저히 정치적 집단강간으로 욕보여서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 뻔하다. 고인은 바로 이 그들의 검은 속내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온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이라도 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고결성의 문제였다. 나라를 도둑질한 자는 애시당초 침해당할 고결성이 없기 때문에 모욕을 들어도 구차한 목숨을 뻔뻔하게 이어갈 수밖에 없으며, 함께 해먹은 자들은 그를 숭배하고 찬양하면서 그 목숨과 자신들의 구차함을 은폐하고 기만할 수밖에 없다. 


누가 함께 해먹은 자들인가? 이땅의 토건족과 재벌들, 그리고 그들을 법적으로 뒷받침해 준 법조인들이 아니겠는가!


부동산정책만 해도, 고인이 이 나라의 부동산문제에 대해 수술을 하려 하자 바로 그들이 뉴타운공약으로 반격하여 고인의 부동산정책을 무력화시켰다. 솔직히 이 방면에 닳고 닳은 그런 장사치들을 상대하기엔 고인은 너무 나이브하고 만만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만만한 상대를 갖고 놀면서 전혀 계산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은, 고인이 그들과는 달리 고결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고인의 고결성을 그처럼 끊임없이 훼손할 때 그들은 자신들처럼 고인도 그냥 망가지고 말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결이란 그들로선 뜻밖의 통제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고인에게 있어서 고결성은 자기 목숨보다 존엄한 가치였는데, 그들은 그만 이걸 건드렸던 것이다. 


나라를 도둑질한 자들과 함께 해먹은 자들이 그 누구든 그들의 부패한 이해관계에 반하는 일을 도모한다면 그의 모든 고결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앗아가 버리려고 하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재이며, 고인은 이 대한민국의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그 비극적 현실을 만들어낸 세력의 핵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이재오씨가 고인의 무덤에 참배했다는 것은 고인의 아이콘을 존중한다는 제스쳐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겠지만 본질에 있어서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서푼어치 알바비를 받으면서 고인을 욕보이는 짓을 하는 시정잡배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아이콘이 남아 있는 한, 이 나라를 도둑질한 자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 해먹은 자들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부패하고 불의한 것인지, 그들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공평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것인지가 만천하에 폭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든 이 아이콘을 파괴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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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14. 21:35

한국사회와 한국개신교 - 1990년대와 향후 10년

2000년대 이전까지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사회적 힘을 집중했다. DJ 정권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시민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MB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민주주의적 참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현혹스러운 외양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0년대 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요즘의 요란한 모습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삼 되짚어 보면 1990년대는 역시 상당히 중요한 한국교회의 분수령이었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종식에 즈음하여 군종제도 등을 통해 반공주의 확산을 대가로 거의 독점적으로 누리던 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이 물심양면에서 상당부분 사라졌고, 이와 동시에 교세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개발독재이념의 어용종교버전이었던 반공주의적 근본주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1
992년 시한부종말론 소동은 당시 어용종교 버전 근본주의의 통제력과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중요한 신호와도 같았다. 물론 비슷한 유의 소동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런 소동이 냉전의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에 울려퍼지는 간주곡 정도였다면, 이제 그런 식으로 '강력한' 묵시문학적 공포분위기의 임박한 종말론으로 협박하는 논조는 페레스트로이카와 문민정권 출범 이후 한결 밝아진 사회분위기와는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지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을 여과 없이 대중에 노출해 줌으로써 한국사회에 근본주의의 벌거벗은 수치를 폭로해주었다.

어용종교 버전의 주류 근본주의가 이들이 신봉하는 유의 세대주의와 신학적으로 선을 긋는데 주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광신적 집회광경은 꼭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광경이 광신도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일반교회들은 세대주의 종말론 설교에 대해 선을 긋고 '건전한 신앙'을 역설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92년 시한부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아울러 여전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음모론을 추종하는 보수진영 내의 비주류는 90년대 이후 어용종교적 근본주의 주류세력과 다르게 분화되는 길로 접어든다.

이 무렵 진보와 보수 양진영이 서로 '연합'하고자 하는 제스처가 나왔다. 왜 그랬을까?

진보진영은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서 자본주의 비판의 동력을 잃어 버렸고, 국내에서는 개발독재의 종식으로 타도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의 활동창구였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의 인적 구성이 가맹되어 있거나 가맹하게 되는 보수교단들(예장통합, 기독교감리회, 순복음 등)의 재정적 압력으로 보수화하면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채 표류하고 있었다. 뭔가 대의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반면, 군사독재의 최대수혜자였던 보수진영에게 군사독재종식이란 발언권의 약화를 뜻했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한기총과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합기구인 KNCC와 연합을 추구했다. 사실 말이 연합이지 내용은 적대적 M&A에 가까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실현이었다기 보다는 피차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강행한 '야합'이었고 '거짓평화'였다. 이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1994년 이후 GATT 체재를 통해 가속화한 초국가적 자본세력의 세계지배가 노골화했던 현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지만 KNCC는 미국과 허울좋은 FTA를 체결함으로써 나라의 앞날을 팔아버린 1992년의 멕시코와 비슷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의 결과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교계의 풍경이 나타났다. KNCC는 사실상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한기총은 더욱 부패한 이익집단으로 노골화했다. 뜻대로 껄끄러운 진보진영의 교회연합기구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 보수진영은 이제 친기득권 발언과 행보를 하는데 거침없다. 예전에 반공주의 확산을 통해 개발독재정권의 비호와 지원을 받아냈다면, 이제는 친기득권의 전위대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개발독재잔당세력의 비호와 지원을 보장받고자 한다. 결국 그들은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요즘 보수교단들이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루는 양상을 보면 보수교단들이 향후 10년 정도 보여주게 될 향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사이비이단문제는 참으로 혼탁하게 처리되고 있다. 사이비이단집단들이 일반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와해시키거나, 온라인상으로 일반교회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치는 경향은 2000년대 이후 확대일로에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입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마음이 갑갑해 온다. 그런데, 이에 대한 공교회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전혀 무고한 교계인사를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변질되는가 하면, 문제인사와 문제집단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에큐메니칼정신'을 발휘하여 이단해제조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현상은 본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이다.

관상기도와 최일도 목사 문제는 예장통합을 겨냥한 것에 다름없다. 최일도 목사가 통합측 목회자일 뿐 아니라, 통합측 장신대는 한국 개신교에서 드물게 영성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교이다. 예장통합에서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신학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예장통합도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황당한 일도 진작 비일비재했다.(*1) 즉, 합동계통의 보수진영은 예장통합 쪽을 신학적, 목회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할 명분을 나름대로 쌓아놓고 있다. 세결집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군소계열교단들과 합동 내지 '인수합병'함으로써 합동교단은 최대규모의 예장통합을 제치고 단일개신교단으로서는 최대 교세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어떤 문제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황이라는 얘기다.(*2)

이 현상의 본질은 신학적 근본주의를 고수하는 교단들이 신학적 근본주의를 청산했지만 정치적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교단, 즉 예장통합 교단을 겨냥한 일종의 "집단살해"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짜'를 색출하여 '진짜' 근본주의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적 '집단살해'의 명분이다.

그 속내용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야만적인 것인지는 어차피 이들에게 그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만하게 보여서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혹시 안 무너지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자기 신자들을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상황으로 내몰아 결집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대상이 무너진다면 그 신자들을 흡수할 기회가 자기들에게 있으니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런 정신적 구조는 프리메이슨 음모론에 열광하는 세대주의자들, 즉 비주류 보수진영과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즉, 타도의 대상을 찍어놓고 그것을 침으로써, 또는 그런 시늉을 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런 정신성은 그 깊은 속내에 있어서 심히 비복음적이고 반복음적이지만, 의식수준에서는 '정통신앙', '순수한 교리'를 명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황당무계한 비약과 빈약한 논리로 이루어진 세대주의 음모론와 달리 소위 오직 성경으로, 정통개혁신학이라 일컫는 신학적 근본주의의 정교한 너울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 악성은 더욱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는 사실을 볼 눈이 없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당장 자기들이 사는데 지장 없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을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정당화를 통해 진짜 속내를 무의식에 은폐한 덕에 저들은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독한 악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수교단들의 행보를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답답하고 유감스럽다. 보수진영 내부의 자성과 개혁이라는 반가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적어도 10여년 정도, 아마도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이 현상은 극복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가뜩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그렇게 뭉개고 지리는 동안 한반도의 아픔은 가중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한국교회라는 존재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지 않겠는가.

보수진영의 교회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길 간곡히 권한다. 
한 번 잃은 신뢰는 되찾기가 극히 어렵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덧붙임]
(*1) 통합측의 장신대가 바르트를 추종한다는 얘기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김영명이 지적한 대로, 장신대는 바르트신학에서 소위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요소만을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비롯한 다른 '급진적인' 바르트의 어젠다들은 용의주도하게 배제되어 왔다. 장신대나 통합측이 칼 바르트의 신학적 어젠다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현 정권 들어 그토록 부끄러운 침묵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면면이 통합교단이 극복하지 못한 정치적 근본주의의 핵심이다. 칼 바르트와 정치적 근본주의는 서로 상극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2)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쓴 뒤 2011년말경 이런 움직임이 예장합동 등 보수교단들 사이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참조한국장로교총연합회라는 비교적 진보적인 교계인사들이 주도한 200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연합운동의 위력과 가능성에 눈뜬 보수교단들이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며 근본주의 교단 연합을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 근본주의 세력의 가시화와 그들의 비근본주의 개신교 진영에 대한 파상적 사이비이단 공세 및 소위 정통성시비라는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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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8. 12:02

자기애적 성격장애와 집단괴롭힘의 한국사회

간혹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로 착각하는 듯한, '지 편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아이디어와 노력은 굉장히 특별하다고 굳게 믿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소중한지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써먹는다. 그렇게 써먹고 나서 그 열매를 다함께 공유하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공은 제 혼자 챙기고 자기가 써먹은 사람에 대해선 도리어 험담을 퍼뜨리거나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까지 한다. 이들은 흔히 뒤에서 쑤군대는 것으로 '진심을 나누는' 친구를 만들어 자기가 써먹은 사람을 집단따돌림시킨다. 재주는 곰이 넘고 이득은 엉뚱한 놈이 챙길 뿐 아니라, 한 번 놀아보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척 하다가 멍석말이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커녕 자신들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런 식으로 집단따돌림으로 응징할 특권이 있다고 느끼기 까지 한다.

이들의 사람됨은 자연히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당위적 도덕률로 겉모습을 치장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양파껍질과도 같이 실체가 없다. 그들이 치장하는 당위적 도덕률이 실은 자기 자신에게 걸맞는 것이 아니다. 그럴수록 이들은 더욱 자기 바깥에서부터 주어지는 정당화가 필요하다. 해서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자기가 상대방보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의 속내에 은밀하게 숨겨진 불안한 강박적 욕구이다.

이런 뒤틀린 욕구의 실현이 오래 갈 수 없어야 건강하고 정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종종 혹은 자주 이들의 잔꾀와 꼼수가 아주 오래오래 먹혀들곤 한다.

최근에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애적 성격장애가 있다는 것을 다룬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는데, 신학적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안으로 굽어 있는 사람(homo incurvatus in se)이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사람이 자기 안에 굽어 있는 죄된 상태가 나타나는 양태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자기 안에 굽어 있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게 꼭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찌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 나라가 자기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바 있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재를 놓고 보면 우리 사회도 자기애적 성격장애증을 앓고 있지 않을까? 다 함께 우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인데 특정지역, 특정집단을 차별하고 집단따돌림하는 사회적 인식을 퍼뜨리는 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좌파 따위의 주홍글씨를 박아 집단따돌림을 자행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정신적 기원은 군사독재요, 친일파요, 민중과 민족의 역사를 수탈한 벌열정치를 자행한 세도가집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의 못된 버릇은 결코 바뀌지 않고 있다. 몇 안 되는 무고한 지도자들에게 죄를 만들어 덮어 씌우고, 거짓증언과 거짓증거를 만들어 그들의 의를 죄로 바꾸면서 그들의 매장과 살해 소식에 서로 축하하고 안도한다.(*1) 이들은 자신들의 세치 혀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바꾸고 있다. 이들의 잔꾀와 꼼수가 대체 언제까지 먹혀들 것인가?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이 득세한 사회란 병든 사회다. 이들은 자신들의 성격장애의 병증으로 스스로 이득을 취할 뿐 아니라, 끼리끼리 패거리를 지어 다니면서 모종의 이득을 약속하면서 자기애적 성격장애에 감염된 좀비를 양산해 낸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특유의 반공근본주의를 통해 그런 좀비를 양산해 내는 강력한 감염진원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가 자기애적 성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한 통합과 화합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타도해야만 유지되고 뭉칠 수 있는 사회는 암과 같은 존재방식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려내지 않으면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들마저 함께 망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가 그렇게 패망했고, 로마제국이 그렇게 패망했으며,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렇게 패망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당시 유다왕국의 병든 사회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이사야 5:18-24)

남유다의 패망을 목도한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전하는 사회상은 더욱 어지럽다. 특히 종교권력의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거짓이상을 보고 거짓예언을 했으며 (에스겔 13장, 예레미야 23:23-32), 사람들의 영혼을 삼키고, 재산을 약탈하고 과부를 만들었다.(에스겔 22:25) 기득권자들의 부정부패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해주었다.(에스겔22:27-28, 예레미야 23:16-22) 성직자들 가운데 간음하는 자들이 가득했다.(예레미야 23:9-10)

한반도가 분단된 지 60년이 넘었다. 아직까지도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 수 없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자기 안으로 굽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았다는 교회는 뼈를 깎는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마땅하다.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생에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셨다. 그런데, 이 복음을 증거하기는 커녕 근본주의, 반공주의 따위의 비본질적인 데 함몰되어 복음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해 통곡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로 한국교회가 한반도에 진 복음의 빚이 무겁고도 무겁다. 




[덧붙임]
*1. 가까운 예로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총리, 곽노현 교육감에 대한 검찰의 표적수사와 주류언론의 받아쓰기를 들 수 있겠다. 특히 정권 실세가 분명 연루되어 있는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다룸에 있어서 로비 핵심인물 박태규가 금품수수를 했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 검찰 수사는 미적미적하고 주류언론은 기억 나지도 않을 만큼 보도를 하지 않으면서, 곽노현 수사 쪽을 부각시키고, 강호동, 김아중 등 애꿎은 연예인들의 탈세혐의까지 대중에게 흘려 대중의 에너지를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하고 있다. 짜고 치는 판이 정도껏 해야지, 이건 저열한 사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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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8. 22:11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대한 이단시비를 보면서

미주 크리스찬투데이에 어느 사모목사가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에 참여하고 와서 이 집회에 대해 이단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다. 최일도 목사가 교계의 유명인사이다 보니 파장이 좀 있는 것 같다.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 대해 전모를 접해 보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내가 이분들의 글에 대해 느낀 대체적인 인상은 이들의 의혹제기가 다분히 표피적이며, 자신들의 강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1. 최일도 목사가 자신을 북극성이라 칭했다?

언뜻 보기에 '두 증인' 운운하는 아무개 교주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두분의 글에 따르면 집회참가자들도 별칭을 사용했다. 집회에 별칭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다분히 익숙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도자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 기제로 보인다.
북극성이라는 별칭을 썼다고 곧 교주가 된다며 참소하는 행태는 이를테면 '푸른나무'라고 필명을 쓰면 그 사람이 자칭 사람이 아닌 나무라고 했으니 사람같지 않다고 헐뜯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없다?

이분들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없다는 최일도 목사의 말을 꼬투리잡고 있다. 아마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화내신 적이 있는가, 없는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는 기록을 가리키는 것이요, 없다고 한다면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려는 악독한 육적 분노를 가리킨다. 최일도 목사는 당연히 후자의 뜻으로 말하면서 집회참석자들에게 육적 분노를 품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지 성전심판기사를 부정하려는 뜻이 아니었음은 물론일 것이다. 최일도 목사의 말은 더도 덜도 말고 이 상황과 의도에 비추어 알아들으면 될 성질의 발언이다.

이에 비해, 육적 분노를 품은 일이 분명 있는 참석자들 가운데 있었던 두분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 말을 문제삼아 예수님을 로보트처럼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 운운한다. 이게 도대체 번지수가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얼토당토 않은 비약에서 살벌한 속내가 풍겨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3.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나는 용서받은 죄인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는 오답?

아마 이분들이 가장 강렬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최일도 목사는 이러한 '모범답안'들을 두고 '이게 다 교회에서 세뇌시킨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할 점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세팅되어 있는 소통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은혜받았다는 것은 집회의 소통방식을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없다. 아울러, 현재 한국교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방식의 집회가 반드시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 정답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집회방식이 심히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싸구려 영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일도 목사의 영성집회는 일반적인 부흥성회나 사경회 혹은 기도집회와는 소통방식이 다르다. 별칭을 사용하는 세팅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해당집회가 세팅해놓은 소통방식과 그 기제의 맥락에서 소통과정을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마치 선승이 화두를 통해 수련생과 소통하는 것과 같은 소통과정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환기해 두거니와, 이를 '혼합주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고 매도하기 전에, 소통과정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소통과정을 통해 최일도 목사가 의도했던 바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통하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표현들이 실은 일종의 종교적 가면일 수 있다. 내가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명목상으로는 굳게 믿고 있고 심지어 견고하게 내면화하기까지 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도 그런가? 아마 나는 결단코 실질에 있어서 정말 그렇고 추호의 거짓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격렬한 영적 순례를 거쳐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데 비해, 찌르면 툭하고 나오는 정식화된 후세의 문답은 일종의 자동화된 신(deus ex machina)과도 같아서 종교적 가면으로 오용되는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회에 그런 종교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내가 용서받은 죄인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답변이 세뇌에 따른 거짓답변일 가능성도 높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밋밋하고 평면적인 기술방식에 의한 문제제기 대신 나름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모범답안'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기 전에, 그걸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세뇌라고 하는 데 반발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보는 게 이 집회에서 세팅된 소통과정에서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4. 혼합주의?

그렇다면 혼합주의에 대한 의혹은 어떤가?

- 우선, 최일도 목사의 집회에서 동양음악이 명상 혹은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걸 두고 초혼음악 운운하는 것은 동양음악에 대한 모독이기도 할 뿐 아니라 중대한 거짓증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정확하게 초혼을 위한 음악인지 확인해 보고 하는 의혹제기인가? 아니면 WCC에서 정현경이 초혼제를 지냈다는 얘기를 WCC에 가입한 통합교단 소속으로서 영성훈련집회를 한다는 목회자에 끌어들여 빨간 색깔을 덧칠한 것인가? 동양음악을 경건한 시간에 쓰면 안 된다는 신학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새벽기도 때 교회 음향시설에서 흔히 흘러나오는 세미클래식풍의 잔잔한 음악이거나 CCM이나 찬송가가 아니면 과연 혼합주의인가? 집회참가자가 동양음악을 듣고 익숙치 않아서 은혜가 안 되었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걸 두고 혼합주의 운운하며 이단시비를 건다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불교의 선문답이나 가톨릭의 영성수련에서 형식이나 내용을 따오는 것은 어떤가? 명백한 혼합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나는 되묻고 싶다. 초대교회는 헬라사회에 유행하는 로고스론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적 개념을 수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주받은 이교도' 이슬람의 아베로이스주의적 주석을 통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있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조차 종교개혁자들의 뜻에 거슬리게도 다시 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수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그보다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론을 원용했고, 사도 바울조차 선교와 설교에서 이방시인과 철학자를 인용했다. 이런 게 바로 혼합주의가 아닐까?

4. 종교다원주의?

최일도 목사에 대한 의혹제기 글들은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거슬리는 부분을 토로하다가 별안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혐의로 비약한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자신이 여기에 대한 질문에 별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으로부터 또 뭔가를 추론하면서 종교다원주의냐 참 신앙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을 운운한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하자. 결국 영성수련은 곧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라는 자신들의 기존 선입주견이 튀어나온 것 아닌가?

이들이 최일도 목사에게 혼합주의에 덧붙여 종교다원주의의 혐의까지 씌우게 된 까닭은 결국 성경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죄와 회개,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극히 표피적인 문제이다. 

표피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경을 들먹이고 과시하는게 그토록 문제라면 교회 내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 예수님, 보혈과 같은 말을 들먹이지 않으면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내적 치유 강좌와 심리학적 기법을 수용한 상담도 모조리 이단으로 '찍어내 버려야' 하지 않을까?(*1)(*2) 

사실 이런 혐의제기방식은 꽤 낯이 익다. 예전에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보혈이니 십자가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목사도 아니라는 식의 이단시비가 있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비겁하게 외면하고 로마서13장 운운하면서 독재정권과 결탁한 그 사람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남들이 눈 멀어 있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언가에 눈이 멀어 있다보니 표피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이켜 보는 게 좋을 듯 싶다.(*3)

끝으로 한 가지, 미주 크리스찬투데이는 홈페이지를 둘러 보면 상당한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미주 다일공동체 대표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은 눈에 띄지 않고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은 최일도 목사에 대해 일정한 방향의 메시지를 표시함으로써 이단시비로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가 풍겨 나오는 대목이어서 주목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최일도 목사 개인에 대한 시비를 넘어, 관상기도가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라는 이유로 보수교단들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도록 하기 위해 군불때우기 하시고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당연히 품게 된다.

부디 그렇지 않으시기를 빈다. 그건 우리 한국교회는 답이 없는 근본주의자들의 집합체요 하고 세계교회 앞에 떠들고 다니는 '제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분별력 운운하면서 성경과 종교에 대한 표피적인 선입견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분들, 먼저 제 눈의 들보부터 보셨으면 좋겠는데 절대 안 들으실테니 참 답답하다. 들을 귀 있는 분은 제발 좀 들으시라.

[덧붙임] 
(*1) 최일도 목사가 '맑은 물 붓기'라는 화두를 통해 마음 속 원망들을 털어버리는 훈련을 하도록 했으니 십자가의 보혈이 언급되지 않은 혼합주의이고 종교다원주의라는 식의 비난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식의 꼬투리잡기라면 무엇을 건들 문제가 없겠는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을 때 예물을 놓아두고 형제와 먼저 화해한 다음 예배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당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주의 보혈로',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했을까? 그런 교리의 정당화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고 형제와 화해한 사람이 주의 뜻을 따른 사람이 아닌가? 원망과 분노를 털고 형제와 화해하는데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지 않으면 혼합주의요 종교다원주의인가? '주의 보혈과 십자가'를 들먹이면서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행태야말로 오히려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7장21절)  
(*2)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 동영상을 보면 최일도 목사가 이 집회(들)에서 이단시비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예수님,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부터 우선 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 문제의 글을 올리신 사모는 '최일도 목사가 벗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매도를 하셨다. 최일도 목사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매도의 요지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 신학적 소양마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글이다.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은 마르틴 루터가 재발견한 바울신학의 핵심에 속하기 때문이다. 루터나 바울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참소하는 것과 다름없이 터무니없다.
Trackback 1 Comment 21
  1. 이제희 2011.06.22 07:39 address edit & del reply

    예수보혈 예수이름 없는 영성훈련은 아무 의미도 없고 쓰레기에 불가하다. 그영성훈련이 어찌되었는지 직접 참석하지 않아 알수는 없으나 판단과 심판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믿는다. 오직예수

  2. 산들에... 2011.12.05 16:47 address edit & del reply

    그 동안의 분쟁을 보면서 불신자들에게 창피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객관적이고 냉철한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새로운 인식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드네요.
    글 잘읽고, 박수를 올려 드리고 갑니다....

  3. 겸비 2011.12.05 18:05 address edit & del reply

    영성 수련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던 저로써도 참 유감스러운 글 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혼신의 기도와 힘으로 섬기는 다일영성수련이 오인 받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4. sj 2011.12.05 18:28 address edit & del reply

    오- 잘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네요 :)

  5. 아주 2011.12.07 10:08 address edit & del reply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고 비난 하시지 않으신데
    누가 이렇고 저렇다라고 비난하는 자세는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6. 주안의 평안 2011.12.07 10:13 address edit & del reply

    영성수련은 받은 사람으로 이렇게 논쟁이 된다는 것이 눈물이 납니다
    기도와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다일영성수련이 이런 것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7. 오리온 2011.12.07 13:14 address edit & del reply

    의미없는 논쟁이 계속 되고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 고통 당하실 주님을 생각 하며 가슴이 아픕니다.
    일방적인 글들 사이에서 균형을 조금이나마 잡을수 있도록 다른 시각으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8. 명현 2011.12.07 18:21 address edit & del reply

    음.. 이런 시비로 에너지 낭비하지 마시길.... 근데 정말 정리 짱인듯..

  9. 질기 2011.12.10 00:22 address edit & del reply

    믿음의 지평.. 글쓰신 분이 누구신지 궁금해지네요. 글 읽어내려가면서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듯 속이 다 후련합니다. 아주 객관성이 분명하면서도 정말이지 명쾌 통쾌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10. DAILROSE 2012.01.18 21:05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비움님,너무나 시원합니다.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신학을 갖춘 분 만이 쓸 수 있는 글을 통해 균형 있는 시각을 찾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신지 무척 궁금합니다. 알 수 없을 까요?

  11. 2012.01.18 23:16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멋진비움 2012.01.19 20:35 신고 address edit & del

      모두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AILROSE님께는 따로 메일 드렸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참소가 쉽게 없어지진 않겠지만 결국은 그들의 강변에 참된 영적 무게가 실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미 없는 참소에 주의를 빼앗기지 마시고, 주님과 그분의 뜻에만 더욱 집중하시면 좋겠습니다. 모두 다 잘 될 것입니다^^

  12. 질기 2012.01.28 16:40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비움님, 댓글에 대한 답변도 참 통쾌 상쾌 하시네요.
    벗진 비움님의 한 말씀 한 말씀에서 참된 진정성과 영적 권위가 느껴집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참소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결국은 참된 영적 무게가 승리할 것이므로,
    의미없는 참소 따위에 주의 빼앗기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에 집중하라는 말씀,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 순정 2012.11.03 02:37 address edit & del

      질기와 명현은 동일인물...도배까지하실필요가 ㅋ

  13. 예쁜여인 2012.02.25 20:31 address edit & del reply

    최일도목사님을 그렇게 욕질하시는 개신교복음주의자들의 태도가 저는 오히려 치가 떠네요? 최일도목사님이 무슨 사기꾼입니까? 목사님을 욕하시려면 먼저 인간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는바입니다!

  14. 2012.03.25 22:30 address edit & del reply

    영성수련을 받았던 사람으로 참 감사한 글이네요. ^-^

  15. 신학생 2012.08.09 17:01 address edit & del reply

    글쓰신 분 신학생이신가요? 굉장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신 분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최일도 목사님 좋아합니다. 하지만 비판하신 목사님과 사모님을 무조건적으로 맹비난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거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몰아가고 계십니다. 본인이 제시하신 논리도 상당부분 비판자들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길게는 안쓰여질 것 같으니 짧게 몇 자 적겠습니다. 먼저 WCC문제를 말씀하셨는데,, WCC가 추구하는 가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속한 사람들중에 다양한 급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있어서 오해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판자들이WCC를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그 말을 꺼낸 것처럼 연결하시는 것은 추측이며 비논리적입니다. 그리고 WCC에 속했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WCC는 성삼위일체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고백하면 가입할 수 있는 연합단체이지, 정통 복음과 신앙을 보장해주는 신앙단체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이단시되는 제7일 안식일교도 WCC소속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집회 역사상 자신을 누구라고 칭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분명히 이질적인 행동이며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담임 목사님을 북극성이라 부르실 수 있겠습니까? 또 한가지 최일도 목사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 여러가지 임상병리적인 방법들을, 타 종교의 수행법들을 인용한 것은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 것 자체는 돌봄이라는 관점에서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이 방법 자체가 복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들어가면 복음이다? 그럼 예수님이 없는 복음도 가능한가요? 복음은 예수님의 선하심과 같은 선함을 행하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의미하며 그 분을 믿고, 그 분 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참된 연합으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임상병리적인 방법 자체가 심리적인 해결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영성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신학공부하신 것 같은데 영성이 무엇인지는 잘 아시죠?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영성 집회라는 것은 그분과 교제하고 만나고 경험하고 맞아 들이는 것입니다. 임상병리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파악하고 살필수는 있겠지만 그 것 자체가 영성이 될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존 교회에서 쇠뇌를 시켰다고 하는데 그럼 그 쇠뇌를 받고 순교하신 분들은 믿지도 않고 쇠뇌된 것이므로 지옥에 갑니까? 물론 자발적인 신앙고백이 중요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관적인 신앙고백을 가지고 무조건 쇠뇌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줄이고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최일도 목사님의 집회가 비성서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기존의 세계 기독교 정통신앙과도 거리가 있고, 수도원 영성등의 영성 역사와 같이 일종의 훈련방법이라기 보다는 심리치료나 혼합주의 영성의 색깔로 오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영성훈련의 역사를 살펴보시면 납득이 되실 겁니다. 복음 안에서 무조건 다된다? 생각해보십시오

    • 멋진비움 2012.08.10 22:25 신고 address edit & del

      제가 굉장히 진보적이라기 보다 신학생님이 굉장히 '보수적인' 분일 수도 있겠죠^_^
      뭔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으신 것 같은데, 님이 제 논지나 전후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상태에서 글을 쓰신 게 역력하게 나타나니 저로선 별로 길게 쓸 말이 없군요. 게다가 죄송하지만 '세뇌'를 네 번이나 '쇠뇌'라고 쓰신 걸 보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16. 나그네 2012.09.13 06:00 address edit & del reply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고 무시하는 분이시군요

  17. 김한나 2012.10.03 07:47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비움님,
    정말 글은 멋지게 잘 쓰셨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비움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만 보시고 배후에 있는 것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최일도님은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칭찬받는 목사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는 그 수련회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멋진 비움님의 글만 읽어도 그 수련회가 충분히 혼합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비록 그곳을 옹호하는 식으로 쓰셨지만)

2011. 5. 13. 04:02

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한국전쟁 이후 한국개신교의 양적 팽창은 반공주의와 맞물려 있다.(*1)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한국개신교는 분단 이전에 북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공산정권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북한공산당에 대해 누구보다도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반공주의자였다.  이들이 남한의 개신교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이 원형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전후복구과정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남한사회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보완해줄 반공주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것이 바로 강력한 반공주의로 소문난 개신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개신교에 여러가지 강력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 군종목사제도: 한국개신교의 주도적 건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군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미국군종제도보다 불과 10년 늦게 군종목사제도가 설치됐다. 개신교의 독점적 지위는 군사독재말기인 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유지됐다.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는 글자 그대로 배가하게 되었고, 불교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개신교는 성장에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대형광장/체육관집회: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한 전설적인 여의도광장집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형집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재정적 행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왜 개신교의 대형집회에 대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을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진보기독교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자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국제여론을 희석시키고 진보기독교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수기독교는 반공주의의 최전선과도 같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인식이었다. 보수기독교를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신교, 구체적으로 보수계통 개신교는 독재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대형광장집회, 80년대 들어서는 대형체육관집회를 통해 막강한 세과시를 통한 자신감과 대규모 결신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란 급성장의 그늘로서 성장주의, 물량주의, 교회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는 독재정권이 육성한 반공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양적 규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탄의 무신론사상인 공산주의"를 대적하려면 최소한 남한인구의 일정수준 이상이 '복음화'해야 하고, 남한사회 전체가 복음화할 때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민족복음화'론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명분을 주었다.

교회분열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근본주의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역색과 신학적 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다름'이 곧바로 '틀림'으로 못박힐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다르면 곧 자유주의고 이단이고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에 잠재되어 있었던 교회분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시비에 명분 노릇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시대는 한국개신교에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가 각인되게끔 했고, 내재되어 있던 근본주의 성향이 활짝 꽃피우도록 했다.

공산주의권이 패망한 지금 반공주의는 사실상 실체를 잃어 버린 철지난 시대정신이다. 반공주의 자체를 악마화할 까닭은 없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당시에는 반공주의였다. 개신교는 반공주의라는 시대의 물결을 가장 잘 탈 수 있었던 사회주체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반공주의 적응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반공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억압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사회주체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소수의 진보진영 기독교를 제외하면 인식 정도가 가장 뒤쳐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텐데, 아직도 철지난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성장주의, 물량주의를 선으로 여기는 반성경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유산은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이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깨어나라!


[덧붙임] 
(*1) 이 글의 분석은 대부분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에 의존한다. 강인철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모두 논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난다.
딱 한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이 글에서는 한기총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라 - KNCC에서 1988년 '반공주의를 참회하는 선언문을 낸 데 대한 반발로 - 성립되었다는 강인철(과 아마도 많은 다른 분들)의 주장을 옮기지 않았다. 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반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KNCC의 선언문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조성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상깊게 가시화했던 세계적 화해무드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기총의 설립은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통일 이후 북한복음화를 염두에 두고자 한 보수교계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지금 보면 때이른 부푼 꿈이긴 했지만 북한에 단일한 개신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제안이 나왔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있다. 이점에 대해 해당분야 연구자들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간단하고 부담없는 메모와 같은 이 블로그에서 이를 구구하게 논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강인철은 적어도 책에 나타난 기술로만 보면 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총의 현재 모습이 대단히 문제적인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한기총을 애써 두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문에 한기총과 이와 관련된 보수교계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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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3. 17:19

희생양

MBC스페셜의 타블로편을 봤다. 참 저렇게 뛰어난 천재가 집단의 비뚤어진 시기와 증오를 받아내느라 너무 고생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타블로의 말대로 타진요나 상진세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봐도 믿지 않을 듯 싶다. 심지어 이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제기한 의혹의 사실관계조차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냥 아둥바둥 살아온 내 현실은 시궁창인데 타블로라는 캐나다 국적의 뛰어난 젊은이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힘들이지 않고 부와 명성을 누리는 걸로 보이는 게 고깝고 싫고 미운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타블로는 일본인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제대상으로서의 '외인(外人)'(또는 '人外')일 수밖에 없다. 학력논란은 결국 그들의 불타는 증오심을 둘러대는 그럴싸한 자기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새삼 페노메논이라는 한 20년 전 영화가 생각난다. 미국 한 시골의 사람 좋은 한 젊은 남자가 하늘에서 이상한 빛을 본 뒤 갑자기 천재 초능력자가 된다. 이웃들과 두루 사이 좋았던 이 남자는 하루 아침에 외톨이, 왕따가 되어 버린다. 사실 당시 '파우더' 같은 비슷한 작품도 나왔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걸로 영화 한 편을 만들기엔 진부해지다시피 한 낡은 플롯이다.

이런 진부한 가락이 현실이 되어 반 년 동안이나 우리 사회에 울려퍼지고 있으니 참 답답한 세상이다. 가진 건 사람 밖에 없는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부대끼며 사는 주제에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애꿎은 희생양을 찾아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가 희생양을 만들어 억압하고 처단함으로써 보람과 힘을 느끼는 변태적 상태로 떨어진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1) 거슬러 올라가 보면 친일파세력이 이승만정권 하에서 권력을 거머쥐면서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에 대한 논란을 덮을 요량으로 반공이데올로기에 열을 올렸던 것이 아마 현대한국사회의 희생양만들기 관행의 싹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2) 역시 반공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으로 대중의 증오를 담당시킬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 논란을 덮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들의 후예인 한나라당이 오늘날까지도 이 비루한 짓을 하고 있다.

타블로의 학력논란이 새로운 점은 희생양만들기가 정권을 잡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3)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악플이라는 수단을 통해 집단적으로 희생양을 매겨놓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데 있다. 효순미선이 사건, 미국쇠고기파동 등의 집단적 항의와 저항에 좌절된 뒤로 터져나올 곳을 찾지 못한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가 이런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오고 있다.(*4) 기득권자들로서는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나 연예 영역에서 대중의 에너지가 분출되도록 내버려 두고, 심지어 조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정치적 이슈가 대중의 장에서 공론화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고도 조용하게 억압하는 전략이 한결 쉬울 수 밖에 없다. 대중의 눈이 기득권을 예리하게 감시하고 그 검은 속내를 꿰뚫어 보는 부담을 적당한 이슈를 흘려줌으로써 간단히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은 한국사회의 대중 가운데서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이 이런 쓸데없는 논란에 빠져 힘을 뺀다면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조작과 억압은 한층 쉬워질 수밖에 없다. 타블로현상을 보니 타블로 개인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 겨레의 역사와 앞날에 대한 착잡하고 절박한 느낌에 입맛이 쓰다.(*5)(*6)

[덧붙임]
*1.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시각에서 그의 여러 책에서 사회가 사도마조키즘적 메커니즘에 빠진 병리적 상태에 관해 분석한 바 있다. 르네 지라르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사회의 주체들이 희생양을 만들어 죽이고 이 죄악을 덮는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사회주체간의 살인욕구를 잠재우는 현상을 갈파한 바 있다. 두 분석은 똑같은 실재를 서로 다른 언어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피력한 내 견해는 이들의 분석에 따라 한국사회를 생각해 본 것이다.
*2.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파논란은 주류언론이 집요하게 물타기하려는 이슈이다. 공산주의자 전력도 덮으려는 마당에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박정희는 공산주의 전력이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친일행적이 있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는 궤변에 다름없다.
*3.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조작은 굳이 증거를 더 들이댈 필요조차 없을 만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부한 가락이다. 이게 대중에게 그토록 잘 먹혀들다니 신기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4. 물론 이들의 카페매니저 '왓비컴즈'가 대중을 세뇌하여 그들의 에너지를 조작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트는 이데올로그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MBC스페셜 후편에서 민경배가 지적했다시피 이들의 시스템은 신흥종교의 교주와 신도들의 관계와 몹시도 닮아있다. 사이비이단문제를 다뤄본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봐도 적절한 분석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가렛 싱어도 신흥종교의 시스템이 세뇌에 의해 구축된다는 점을 지적했던 바 있다.
*5. 인터넷을 좀 뒤지다 보니 문화평론가 하재근이 나와 비슷한 논지로 레디앙에 쓴 글을 만날 수 있었다. 하재근은 일부 누리꾼들이 겨냥하는 타블로의 '죄목'이 사실은 특권층들의 죄목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번지수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타진요의 주장과 타진요 운영자 왓비컴즈에 대한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놓은 글은 방송 훨씬 이전에 이미 나와있었다.
*6. 원래 나는 타블로와 에픽하이, 대중음악 자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이번에 이 글을 포스팅하고 나서 에픽하이의 노래 중 '희생양'이라는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회비판적 논조의 가사와 곡 분위기가 맘에 든다. 어쩌면 에픽하이의 팬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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