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6. 03:32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예장통합 내 논란에 관하여


현 정권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신단다. 세상에……

댓통이 대선후보시절 "내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100% 국민" 따위의 같잖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돌아다닐 때, 저걸 막지 못하면 역사의 어두운 기운이 또 다시 대한민국을 덮게 되리라는 스산한 예감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후보가 식민사관 망언으로 낙마했을 때 최소한 식민사관과 친일행적의 문제성에 관해 조금이라도 깨닫는 바가 있어서 겸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당초…... "자기 아비의 명예회복"을 대통령직의 목적이라고 공언한 자가 쉽게 생각을 바꿀 리 만무했다.

대체 박정희가 회복할 명예가 있나? 박정희를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결국 역사를 뜯어 고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댓통의 역사왜곡은 친일반공주의, 식민지근대화론 따위의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댓통에게 있어서 아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이니까. 100% 국민? 댓통의 꿈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북괴추종세력, 종북빨갱이로 간주한다는 암호통신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장통합교단의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잘 내주고 있다.

- 장신대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이 비교적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내주셨다.
- 올해 예장통합교단의 신입총회장 채영남 목사님도 마침 진보적인 성향이셔서 역사교과서국정화에 반대의견을 표명해 주셨다.
- 장신대 신대원 학우회의 촌철살인 현수막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었다.


실로 예장통합교단의 면류관과 같은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예장통합의 목회자들, 특히 중견교회 담임목사 다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쪽일 것이다. 이 추정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긴 하지만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 8:2나 7:3,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6.5:3.5 정도를 넘을 수 없을 듯.) 따라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 신약학)이 역사신학과 교수님들의 역사교과서국정화 반대성명을 비판한 것은 예장통합교단 정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철홍 교수님의 비판글은 좀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가볍게 매도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 김철홍 교수님과 그와 의견을 같이 대변하는 예장통합의 목사님들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조금 뒷북인 감이 없지 않지만, 일개 개인블로거인만큼 부디 양해들 하시길 바란다.)


1. 친일반공주의 미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가? 혹은 친일반공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인가? 대한민국의 국시는 민주주의 아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친일파와 그 후손 정치가와 언론, 재벌들에게 있는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2. 친일반공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인가? 친일반공주의를 세뇌할 목적의 교육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다양성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비민주주의적 발상인가? 오히려 친일파 후예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모든 다양한 견해와 관점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친일반공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의 이념적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 아닌가? 독재자를 독재자라고 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단 말인가?
   

3. 식민사관 비판이 종북인가? 식민사관 비판과 극복은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 국사학계가 힘들여 이룩한 성과였다.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거부하면 종북빨갱이가 되었단 말인가?


4. 역사가 살아있는 권력의 힘으로 바뀔 수 있나? 역사라는 공적이고 상호주관적인 공론의 장에서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부역하는 어용역사학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또, 그 어용역사학에서 기독교, 아니 개신교에 대해 긍정적이고 영광된 측면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한국개신교에 영광이 될 수 있을까?
   

5. 전국민을 획일적인 역사관을 주입시키면 대한민국이 복음으로 통일되나? 권력자의 위신을 현양하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반포하던 것은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해야 하는 무지몽매한 시대도 지났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자,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의 서로 다른 세계과정 이해가 만나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이다. 획일적인 역사관이 남북통일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공론을 통해 과거와 현재, 세대와 세대, 각계 각층이 서로 통합적인 소통을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대승적 통합의 역사관이야말로 한반도를 통일로 이끌 자격과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 물리적 통일은 반드시 정신적 통합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적인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을 보장함으로써만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한반도가 복음으로 통일되기를 기도하여 왔다. 복음의 정신은 주술적 부적처럼 오용되는 십자가상이나 모종의 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충만한 소통과 상호순환의 역사 가운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계시되었다. 과연 권력자의 사적 이해관계에 이바지하기 위해 역사라는 상호주관적 공론의 장에서 주역이 되어야 마땅한 전국민들을 상대로 역사적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통일로 이르게 할 복음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2015. 7. 17. 06:41

영화 "손님": 처절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

이제 더 이상 못 믿을 신문방송을 보거나 듣지 않고 관심 가는 분들이 페이스북 계정에 올려주시는 목소리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 언론장악과 여론조작의 이 시대에 이 편이 훨씬 정확하고 공정하다.


다만 구독중인 페이스북 계정이 이제 한 200여 종쯤 되니까 올라오는 소식들이 하도 많아 너무 빠르게 업데이트된다. 해서 찬찬히 정독할 새 없이 쭉 훑어 읽다 보면 한 번 읽었던 좋은 글을 다시 찾아내기 어려울 때가 꽤 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독하는 소식들을 훑어보던 중 영화 "손님"에 대해 어떤 분이 써주셨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훑어 보면서도, 글에서 풍기는 아우라만으로도 야 이거 뭔가 있는 영화로구나, 한 번쯤 봐야겠구나 라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정말 좋은 글이었다. 근데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다 보니, 뒤늦게 어느 분이 어떤 내용으로 쓰신 글인지 궁금해지는 거였다. 어떤 분 글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용은 틀이 근사하다는 것만 눈길을 주었던 터라 더더욱 모르겠다. 언제 다시 마주쳐질지나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글 검색기능도 없어서 어찌 해 볼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 (아마 느부갓네살왕이 간밤에 꾼 중대한 꿈이 기억나지 않아 환장했던 심정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여간 찬란한 아우라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 글 덕분에 나도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잘 알려진 동화의 플롯을 전유하여 처절하게 분단된 우리 한국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내러티브에 담아낸 근래에 잘 못 보았던 놀라운 영화다. 글재주가 워낙 미천하여 어떻게 더 감탄의 마음을 표시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진부한 동화의 제재로부터 이토록 탁월하게 우리 현대사의 전망을 오롯이 담은 내러티브로 빚어내신 감독과 이 영화를 용기있게 제작하신 제작자분들께 진심으로 경의와 찬사를 보내드린다. 이런 분들을 소중하게 잘 지켜드리는 것도 우리 시대의 깊은 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영화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1.1 지도에조차 없는 한센병 환자 마을에 전쟁피난민들이 와서 한센병 환자들과 무당을 죽이고 마을을 빼앗았던 배경은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와 전쟁중일 때 친일파와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부역한 자들이 일제항거세력인 빨치산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고 사회기득권으로 변신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1.2 촌장은 일제시대 군인과 같은 유의 사람이었다. 당연히 촌장은 국가권력을 찬탈한 박아무개 무녀와 그 부역세력(일본도와 군복), 그리고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게 셋팅해 준 이승만(짧은 머리와 두루마기)을 합친 캐릭터에 상응한다.


1.2.1 영화 속에서 절대권력자인 촌장은 가장 많이 배웠고, 가장 경륜이 풍부한 인물이다. 이땅의 기득권자들은 결코 얕볼 수 없는 정보망과 경륜과 선동능력을 소유했다. 증오와 대결 프레임이 갇히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대상을 너무 우습게 보는 패착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결코 무식하거나 우습지 않다!


1.3 예전 한센병자 마을 시절 실질적 촌장이었을 무당이 사회적 소외계층 내지 약자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진정한 정신적 지도층이 형상화한 캐릭터라면, 손님들이 거짓과 폭력으로 빼앗은 마을의 선무당은 지배층의 거짓과 폭력에 영합함으로써 생존(과 번영)을 꾀한 한국현대사의 어용종교 및 어용지식인계층에 해당된다. 어용종교의 부끄러운 선무당질에 견주면 그래도 영화 속 선무당은 일말의 고운 순정이라도 남아 있는 수동적 캐릭터였지, 한국사회의 어용종교는 정말..... 에휴.

 

1.4 주인공 피리부는 사나이는 김대중, 노무현 두 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이 땅의 민주적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다. 탄압세력과 투쟁하는 가운데 다리를 절게 되셨던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나라의 주인인 시민들 앞에서 광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가 기득권자들의 여론조작질로 사회적 타살을 당하셨지만 노란 색 바람개비와 리본으로 민주시민들에게 추모와 그리움의 대상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 피리부는 사나이의 캐릭터는 두 분 대통령의 특징을 모두 담았다.


1.5 쥐새끼들로 들끓는 마을은 친일기득권자들이 내세우고 세뇌시킨 바, 생존이 우선한다는 얄팍한 명분의 성장신화, 성공신화를 숭배하면서 공평과 정의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억압해 온 대한민국의 현재에 상응한다.


1.5.1 피리부는 사나이의 권능은 양심이라는 인간의 진정성 있는 욕망을 일깨워주는 데서 비롯된다. 피리부는 사나이가 쥐새끼들을 일소했던 것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에 이전 기득권자들의 패악질을 잠시나마 억제하면서 정의와 자유가 살아 숨쉬는, 부강한 민주복지국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에 견줄 수 있다.


1.5.2 문제는 피리부는 사나이의 공헌에 마을 사람들이 전혀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것. 아니, 내심 고마워하다가도 그놈의 종북좌빨 나팔질 한 방이면 모든 사실관계가 뒤엉켜 버리고, 감사와 존경 대신 인신에 대한 비겁한 흠집내기와 집단구타질 해대면서 지들 사는 데만 급급하느라 죽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와 염치는 안드로메다로 고이 보내버린다는 거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자신들에게 은덕을 베푼 피리부는 사나이일지라도 수틀리면 빨갱이간첩으로 몰아 그 주변사람들에게까지 사회적 타살과 독살을 감행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파렴치하고 뻔뻔하다. 우리 모두가, 나 자신부터가 이모양 이꼴이다.


2. 영화는 한국사회의 앞날을 율법의 원리로부터 전망한다.


이 영화가 반드시 "율법의 원리"라는 신학적 전망을 의식했으리라는 뜻은 아니지만, 영화가 내러티브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학적으로 볼 때 (죄와 사망과) 율법의 원리에 상응한다.


2.1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 계속: 그는 죽음의 천사 캐릭터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글자 그대로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예언되었던 하늘의 진노와 심판을 수행하는 죽음의 천사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선무당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그의 역할은 "셈은 셈이니까!"라는 극중대사로 집약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로마서 6:23))


본인이 본 죽음의 천사 캐릭터에 관해 약간 설명의 우회로가 필요하다.


죽음의 천사란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유명한 열 재앙 이야기에도 나온다.(출애굽기 7~11장)

열 재앙 이야기란 착취하는 기득권자들에게 하나님은 약자들을 풀어주고 사람다운 삶을 회복해주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무려 열 차례나 베푸신다는 이야기다.

죽음의 천사는 열 번째 재앙 때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진노의 심판을 수행할 때 언급된다.(출애굽기 12:23 "멸하는 자")


이 이야기에서 기득권자들은 막대한 손실과 타격을 입으면서도 절대로 기득권을 내어놓지 않았다.

하여,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 애굽 파라오의 장자에서부터 짐승의 첫 새끼까지 죽임 당하는, 그야말로 하드코어 최후통첩을 받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들과 애들까지 잔인하게 죽여야 하냐고?

하나님이 그렇게 치졸하고 쪼잔하냐고?

애굽 기득권자들의 패악질이 그보다 더 했을 거라는 생각은 왜 안 하나?

부모의 죄악이 그 자식들에게 똑같이 물려지고 있지 않은가?

그 죄값을 어찌 다 갚아야 하나?

생명은 생명으로, 죽음은 죽음으로다.

이 영화 대사처럼 "셈은 셈이니까!"

철모르는 애들이 걱정일 만큼 분별 있는 어른들이라면 진작에 잘 했어야지. 

경고가 있으면 이제라도 잘 했어야지.

근데 이 황당한 어른들 보소.

지금까지 아홉번이나 경고를 받고 빈말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텐데 들어 쳐 먹질 않네.

지 애들 목숨보다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입을 손해가 더 아까웠던 거다, 이 인간들은.

이때 하나님께서는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어야 할 약자 히브리인들에게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도록 한다.

사자나 곰의 피가 아니라, 앞뒤 분간 못하고 약간 모자라고 약한 짐승의 대명사 어린양의 피다.

어린양 피를 바른다는 건 이 집이 바로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약자 히브리인의 집이라는 표시였다.

이 피의 표시를 넘어 약자인 히브리인들의 피값에 대해 애굽의 죄를 묻는 정의로운 심판을 수행한 존재가 바로 죽음의 천사였다.

히브리인들이 지들이 약자랍시고 어린양의 피를 발라두지 않고 버텼다면?

그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가해자 신세인데 죽음의 천사 앞에서 무사할 리 없었다.

죽음의 천사는 결국 공의와 정의를 가차없이 적용했을 때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로서, 또한 고귀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존재를 훼손한 하나님 영광의 찬탈자로서 하늘의 진노를 아무도 피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영화 속 죽음의 천사 역할을 떠맡은 피리부는 사나이 자신도 인간으로서 죽음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2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 조금 더: 그는 하늘의 의를 수행하는 낯선 존재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손님, 낯선 이다.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낯선 존재다.

그의 낯선 존재는 결국 마을사람들의 익숙한 삶이라는 우상을 완전히 깨뜨려 버릴 굴러 박힌 돌, 아니 뜨인 돌이었다.

물론 뜨인 돌은 구약 다니엘서(2장 특히34~35절)의 표현인데, 신약적 관점에서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피리부는 사나이는 영화속에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 채 죽음의 폐허만을 남기는 존재다.

이점에서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메시아적 구원자는 아니다.

그의 역할은 오로지 죽음의 천사, 즉 진노와 심판의 집행자였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는 죄와 죽음과 율법의 원리(로마서 7:11 등)를 관철하여 그 끝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이 영화가 호러물적, 공포물적 내러티브로 자리매김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2.3 쥐떼들의 폭주는 누구 탓?


마을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욕보여서라도 자기들은 살아야겠었다.

현대한국사회도 무고한 사람들 죽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겠고, 좌우간 경제는 살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음험한 사기를 일삼는 협잡꾼을 나랏님 자리에 떠억하니 앉혔고...

이 나라엔 다시 온갖 쥐새끼들이 백주대낮에 들끓어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있다.

사대강을 녹조라떼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도 차지 않은 돈 놀이에, 허장성세 겉보기 치장을 위한 자원외교질에 시민들의 목숨과도 같은 혈세가 백조 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돈이 탕진되었다.

앞으로 얼마가 더, 또 얼마나 같쟎은 이유로 탕진될 지 누가 알겠는가?

나라꼴이 이 지경인데도 빨갱이종북놀음 나팔질 한 방이면 모든 게 가뿐히 덮이는 우리 한국사회는 위대하신 영도자 촌장님께 삼가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고 있다.

우리의 딱하고 안타까운 북한 동포들처럼 100%로 수렴해야 하는 충성이 아닌 건 그나마 다행이다.

100%의 대한민국을 꿈꾸는 자들이 비판하는 목소리를 종북좌빨로 매장시키려 들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1번만이 정답인 30%의 그네들에게 있어서 그 봉건적 충성은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근데 이 콘크리트적 충성이 자신들의 숨통을 점점 죄어 들어가고 있다는 걸 까맣게 깨닫지 못한다.

이놈도 싫고 저놈도 싫다는 헛똑똑이들은 지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숨통이 점점 죄어 들어가는 걸 그냥 넋놓고 보고만 있다.

그 눈먼 충성 때문에, 그 헛똑똑한 수수방관 때문에 자자손손 미래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도, 모든 경고의 징후들 앞에서도 눈앞의 이익과 안일함이라는 덧없는 신기루를 절대 포기못한다.

딱 출애굽 열재앙 이야기에 나오는 애굽 기득권자와 그 추종자들 얘기 아닌가?


이건 누구탓?

죽음의 천사가 빡 돌아버린 탓?

하나님이 쪼잔하고 속좁은 탓?

화해와 용서로 통크게 굴지 못하고 쪼잔하게스리 속좁게 한을 품고 울부짖는 이땅의 약자들탓?

어쨌든 니들 탓은 절대 아니지?


우리의 양심불량과 완고함 때문에 한반도의 주인이 될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오늘도 도둑맞고 있다.

피리부는 사나이에 이끌려 마을 아이들까지 죽음의 돌무덤, 스올의 어둠에 갇혀 서로 먹고 먹힐 비극적 최후를 암시하는 무서운 결말은 이대로라면 단지 영화의 판타지만으로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3. 영화에서 나오며: 복음의 원리로부터 전망 가능성은?


율법을 말했으니 복음을 말해야지 않겠냐고?

복음의 원리로부터 입에 발린 화해와 용서를 말하면 그게 과연 정말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일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먼저 이 진정성 있는 탄식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들려야 한다.

그 전에 어찌 감히 화해와 용서를 주문 읊어주는 기계처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이 탄식이 정말 진정성 있다면, 감히 가해자 주제에 지들이 억압한 피해자에게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고 강제하는 따위의 폭력을 백주대낮에 저지를 생각은 할 수 없다.

진정성 있는 탄식이 들려지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의 백주대낮에 파렴치한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진정성 있는 탄식으로 울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부끄러움과 아픔으로 심장이 터질듯 해야 한다.

그 자리에 한국교회가 최소한 있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어쩌면 다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재를 쓰고 내려와 있는 딱 그만큼이 진정한 한국교회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어두운 스올의 돌무덤 속에서 복음을 선언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지금 대체 어디 있는가?

아직도 어쭙잖게 사람 잡는 선무당 노릇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대체 종북좌빨 주문에 홀연히 정신줄 놓고 백주대낮에 쥐떼 노릇이나 하는 부끄럽고 딱한 신세는 아닌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014. 6. 13. 03:27

총리후보지명자의 역사인식, 그리고 한국교회

전 중앙일보 주필 문창극씨가 총리후보로 지명됐는데, 이분이 용산 온누리교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나타난 역사인식이 비판 받고 있다.


1. 먼저 KBS가 길환영 사장 퇴진을 이끌어 낸 뒤 정권의 나팔수 노릇하는 수치스런 행태에서 탈피하는 몸부림을 보여주어 참으로 반갑고 고맙다. 그러나 조만간 MBC를 망가뜨린 저들이 길 전사장보다 일곱 배는 악한 어용바지사장을 앉힌 뒤 KBS의 인적 구성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이런 식으로 전횡을 일삼으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갈수록 칠흙 같이 캄캄한 터널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2. 문창극, 혹은 문 장로의 역사인식은 한 마디로 일제 관학자들이 만들어낸 식민사관을 빼다박았다. 그런데도 문씨가 교회장로라는 이유로 두둔해 주는 한국교회연합의 처신은 개탄스럽다. 한 마디로 뭐가 문제인지조차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관이 무엇인가?


- 타율성론: 한반도 역사는 중국대륙과 일본의 역사적 부침에 따라 영향받아온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웃나라의 영향 없는 역사도 있나? 타율성론에 따르면 명나라가 망했을 때 조선도 망했어야 한다.

- 정체성론: 한반도 역사는 자생적 자본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체된 역사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조선 말기에 벌열정치, 혹은 세도정치에 의해 사회발전이 지체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조선 후기 사회는 실학과 상공업 발전을 통해 자생적 자본주의의 맹아가 발전되어 있었다.

- 민족성론: 조선인의 민족성이 태생적으로 의타적이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역사에 희망이란 없다는 것이다. 성격이란 변화되기 마련인데, 사회적 성격과 분위기가 고정불변하는 실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가?

- 지정학적 결정론: 한반도 역사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반도역사이기 때문에 강대국의 부속국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이 역시 궤변에 불과하다. 로마도 주변에 강대국들이 있는 반도역사지만 강대국의 부속국 운운할 수 없다. 지정학적 요인은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역사의 운명과 향배를 결정짓지 못한다.


한국사학계가 이 문제를 두고 해방 이후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현재는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둔 상태다. 즉, 이러한 식민사관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거의 두 세대 전의 문제이고, 적어도 한 세대 전에 총론적으로 비판적으로 극복되었다.[각주:1]


그런데 문씨가 조선왕조 500년이 게으름의 악습을 이어 왔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인식의 시계를 두 세대 전으로 돌린 황당무계한 처사가 아닌가?


게다가 윤치호 같은 친일변절자의 편향된 시각을 통해서 그런 판단을 함으로써 전혀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촉발시키고 있다. 우리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황실보존노력을 일방적으로 폄하했던 윤치호나 조선망국의 원인을 기득권의 전횡이 아니라 당쟁으로 지목했던 김활란 같은 친일변절자의 편향된 시각을 수용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이 일제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지난 두 세대에 걸쳐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했고, 이에 관해 21세기에 새삼스레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은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씨 자신이 이들의 부적절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되풀이함으로써 퇴행적인 논란을 부추겼다면 한 나라의 총리라는 공적 직무를 수행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뜻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3. 문씨는 이밖에도 이승만에 대한 찬양, 미국 원조와 한국전쟁, 일제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등의 발언과 반공주의적 암시를 함으로써 비판을 자초했다. 친일파적 역사인식의 바탕에 반공주의의 층위까지 얹었다. 딱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아닌가? 박근혜정부가 문씨를 낙점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뉴라이트에서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이 그렇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국부"인가? 이승만이 젊은 시절에 썼다는 글이야 개화기 젊은 지식인들이라면 능히 해 볼 법한 생각이지, 딱히 이승만이 탁월해서라고 볼 수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후 나이 들고 나서 어떤 행보를 보여주었느냐인데, 친일파를 중용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탄압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으로서, 과연 출세지향적인 행보 끝에 부패로 자멸한 그의 행보가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불행한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친일파적 역사인식, 그리고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잘 살게 됐으니 됐지 않느냐고?


4.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높이 평가 받는 군주들은 단지 나라를 잘 살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그런 기준이라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나 아합 같은 자들이 칭송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가장 사악한 군주였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종교예식을 열심히 치렀다는 이유도 높이 평가 받는 이유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어디 종교예식이 부족해서 망국의 비극이 찾아왔는가?


따라서 단지 기독교신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이 칭송되어야 할 까닭은 되지 못한다. 박정희 때 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를 - 더욱이 반인반신 운운하기까지 하며 - 칭송해야 할 까닭도 되지 못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비그리스도인들보다도 그리스도인들, 보수성향의 개신교인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찬양하는 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로 차단하고 억누르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당신들의 하나님은 맘몬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가?


5. 한국교회가 몰역사적이고 친기득권적인 신앙양태를 통해 성장해 왔다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대형교회에서 교역자들을 청빙할 때 장로들이 운동권 시위경력을 물어본다든지, 이런저런 질문으로 사상검증을 하려 든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


강인철이 성공적으로 해명해 주었다시피, 이들의 신앙의 기초가 반공근본주의이며, 반공근본주의는 친일파로 변절한 한국초대교회 신앙유산의 업데이트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성장제일주의라는 정신적 층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신앙양태는 친일파에서 반공주의자로, 산업화의 기수로 성공적으로 변신해 간 "꺼삐딴 리"(전광용)의 세속적 처세술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한국교회는 친일파로 변절한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초대교회의 신앙유산의 토대 위에 반공주의라는 기둥과 성장제일주의라는 서까래로 이루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6. 문씨가 장로로서 보여준 역사인식의 퇴행성은 참으로 불행하고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문씨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결국 한국교회의 책임이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책임이다. 교회의 올바른 역사참여, 공평과 정의라는 성경적 역사관에 대해 제대로 들려주지 못했고, 그 자신들 상당수는 아예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회중들이 역사서와 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공평과 정의, 역사참여 같은 얘기를 들으면 색깔론부터 떠올리고, 친일파와 반공주의의 "적폐"를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편향"이라는 뒤틀린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자신들이 이미 친일반공주의적 기득권자들을 심히 편들어 주고 있다는 현실은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한 대형교회에서 사회명사의 퇴행적 역사인식을 특강 혹은 강연의 이름으로 교회회중에게 전파하도록 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연합이라는 공교회적 위상의 기관이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장로님을 두둔하기까지 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인식의 대형"참극"이 아닐 수 없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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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밖에도 식민사관의 주장들은 여러 가지가 더 있으나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 식민사관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에 관하여, 이기백 엮음, 한국사시민강좌 제1집, 1987을 참조하라. 이기백학파를 포함한 한국사학계에 식민사관의 그늘이 여전히 드러워있다는 비판이 영광된 상고사의 복원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상고사 문제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와 맞물려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이의제기는 앞으로 좀 더 경청해 볼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1) 이러한 일부 이의제기가 최소한 기존 국사학계가 이룩한 성과를 무효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총론를 뒤집을 수 없는 각론적 사항이라고 본다. (2) 아울러, 이른바 영광된 상고사의 복원을 운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주장되는 환단고기와 같은 책의 친일파 기원론 같은 문제는 조심스럽게 분명히 규명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러한 의혹이 참이라면 식민사관과 영광된 상고사 복원 사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겠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14일 덧붙임) [본문으로]
  2. 한국교회의 한반도 역사인식이 식민사관의 영향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함석헌이 그의 나이 30대 초반 때 쓴 작품인 "뜻으로 본 한국 역사"가 식민사관의 영향을 극복할 수 없었던 사실도 상당부분 그 까닭이 되고 있다고 본다. 물론 1930년대의 함석헌 자신의 손에는 식민사관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만한 역사적 도구가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온전히 함석헌의 과오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우파논객 복거일이 함석헌의 사관을 들먹이면서 문씨의 식민사관을 두둔하는 것은 빈곤한 문자주의적 독해에 불과하다. (근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문자주의도 막상막하이긴 하다!) 문씨의 역사인식 파동은 어쩌면 그 시대 그리스도교 지식인에게 익숙했을 함석헌을 문자적으로 되풀이한데서 빚어진 딱한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대 독자들은 이보다는 함석헌의 최선의 의도를 좀 더 입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상대화하여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2013. 8. 3. 08:47

설국열차 세계일주 하듯

영화 『설국열차』는 『괴물』을 제작했던 감독의 작품답게 좁게는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넓게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우화로 읽혔다.


기차가 1년마다 세계를 일주한다는 설정은 내러티브 안에서 몇 가지 구체적인 뜻으로 드러난다. 


외부세계로부터의 위기는 기득권자들과 피억압계층 사이의 모든 갈등을 정지상태로 만들 수 있다.

- 외부세계로의 이탈실패 사례는 현 체재를 공고하게 하는 이념적 교육자료가 된다.

등등.


결국 이야기속 세계의 갈등은 기존세계의 '냉전적'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해소된다.


이 갈등해소과정에서 두 분의 한국배우가 영화의 메시아적 중심에 위치한다. 요나라는 딸의 이름, 보안책임자 부녀가 냉동창고 같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설정은 성경에서 끌어온 내러티브적 장치로서, 이들 부녀의 캐릭터와 메시아적 역할을 암시한다. 이들은 기존세계와 자신들의 운명에서 도피해 있는 것처럼 같았지만, 결국 설국열차 안의 다른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새로운 미래의 도래를 예고하고, 앞당긴다.


보안책임자 부녀가 기존세계의 틀을 깨뜨릴 수 있었던 계기는 결국 기존세계의 틀 안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외부세계 내지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요즘 한반도의 현실이 마치 설국열차 세계일주 하듯 답답하다. 대체 60년대로 돌아간 것 같은 퇴행적인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설국열차" 자체로 귀결된다.


어떻게 하면 타개할 수 있을까? 영화가 현실에 대해 던져주는 메시지는 기존 틀에 갇혀 있어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 기존 틀을 과감하게 깨기 위해 외부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쉽지 않다. 영화가 알레고리적으로 그려준 그대로, 자기들이 '권리'로서 누려온 것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과 시민으로서 마땅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 맞서기 때문이고, 그 적대적 공존관계가 시스템 자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균형"은 그 나름 상당히 안정적으로 작동해 온 폐쇄적인 생활환경이 되어왔으며, 이것이 우리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한계를 규정짓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존 틀을 과감하게 깨는 용기와 과단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탁상공론의 단계에 머물러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 기존세계의 틀에 순응하고 종속되어 기득권자들을 대변하는 이념의 대변자

- 기존세계의 틀에 저항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잘라내어주기까지 하는 약자들의 대변자

- 외부세계의 변화를 주목하고 알리는 예언자


이 세 가지 가능성은 영화 속에서는 서로 극명하게 갈리는 세 부류의 인물들로 나타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결국 느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는 유형들이다.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은 세 가지 가능성 모두에 걸쳐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교회는 어느 가능성을 더 많이 선택해 왔는가? 

반공이데올로기와 성장신화로 대표되는 기득권적 이념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데 만족해 온 것은 아닌가?


부디, 앞으로는 한국교회가 요나의 기적 외엔 보여줄 게 없다고 하셨던 그분의 뒤를 따르게 되기를! 


칼 바르트가 갈파했던 대로,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나와야 하겠기 때문에...

2011. 5. 13. 04:02

한국교회의 개발독재유산

한국전쟁 이후 한국개신교의 양적 팽창은 반공주의와 맞물려 있다.(*1)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한국개신교는 분단 이전에 북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공산정권이 북한에 수립되면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북한공산당에 대해 누구보다도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반공주의자였다.  이들이 남한의 개신교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이 원형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전후복구과정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남한사회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취약한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보완해줄 반공주의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것이 바로 강력한 반공주의로 소문난 개신교였다. 군사독재정권은 개신교에 여러가지 강력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한다.


- 군종목사제도: 한국개신교의 주도적 건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군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미국군종제도보다 불과 10년 늦게 군종목사제도가 설치됐다. 개신교의 독점적 지위는 군사독재말기인 80년대 말까지 약 20년간 유지됐다. 전군신자화운동을 통해 한국개신교는 글자 그대로 배가하게 되었고, 불교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개신교는 성장에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대형광장/체육관집회: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한 전설적인 여의도광장집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형집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재정적 행정적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왜 개신교의 대형집회에 대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을까?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진보기독교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자 대한민국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국제여론을 희석시키고 진보기독교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수기독교는 반공주의의 최전선과도 같다는 것이 군사정권의 인식이었다. 보수기독교를 키워주면 키워줄수록 독재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신교, 구체적으로 보수계통 개신교는 독재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대형광장집회, 80년대 들어서는 대형체육관집회를 통해 막강한 세과시를 통한 자신감과 대규모 결신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한국개신교는 세계교회가 놀란 급성장의 그늘로서 성장주의, 물량주의, 교회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는 독재정권이 육성한 반공주의의 전초기지로서 양적 규모가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탄의 무신론사상인 공산주의"를 대적하려면 최소한 남한인구의 일정수준 이상이 '복음화'해야 하고, 남한사회 전체가 복음화할 때 통일은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민족복음화'론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명분을 주었다.

교회분열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근본주의에 잠재되어 있었다. 지역색과 신학적 차이를 비롯한 수많은 '다름'이 곧바로 '틀림'으로 못박힐 수 있었던 까닭은 나와 다르면 곧 자유주의고 이단이고 신앙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에 잠재되어 있었던 교회분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하여 통합과 합동 교단의 분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시비에 명분 노릇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시대는 한국개신교에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물량주의가 각인되게끔 했고, 내재되어 있던 근본주의 성향이 활짝 꽃피우도록 했다.

공산주의권이 패망한 지금 반공주의는 사실상 실체를 잃어 버린 철지난 시대정신이다. 반공주의 자체를 악마화할 까닭은 없다. 개신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당시에는 반공주의였다. 개신교는 반공주의라는 시대의 물결을 가장 잘 탈 수 있었던 사회주체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반공주의 적응에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반공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인간억압의 위험성에 대해서 다른 사회주체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아니, 소수의 진보진영 기독교를 제외하면 인식 정도가 가장 뒤쳐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의 폐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텐데, 아직도 철지난 반공주의에 집착하고 있고, 성장주의, 물량주의를 선으로 여기는 반성경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발독재유산은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이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여, 깨어나라!


[덧붙임] 
(*1) 이 글의 분석은 대부분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7)에 의존한다. 강인철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모두 논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난다.
딱 한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이 글에서는 한기총이 반공이데올로기에 따라 - KNCC에서 1988년 '반공주의를 참회하는 선언문을 낸 데 대한 반발로 - 성립되었다는 강인철(과 아마도 많은 다른 분들)의 주장을 옮기지 않았다. 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반은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KNCC의 선언문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조성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인상깊게 가시화했던 세계적 화해무드에 호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기총의 설립은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통일 이후 북한복음화를 염두에 두고자 한 보수교계의 움직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지금 보면 때이른 부푼 꿈이긴 했지만 북한에 단일한 개신교회가 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제안이 나왔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가운데 있다. 이점에 대해 해당분야 연구자들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간단하고 부담없는 메모와 같은 이 블로그에서 이를 구구하게 논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강인철은 적어도 책에 나타난 기술로만 보면 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기총의 현재 모습이 대단히 문제적인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한기총을 애써 두둔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문에 한기총과 이와 관련된 보수교계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